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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25화 (25/162)

25화

[열쇠를 완성하렴.]

선명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하윤은 목소리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누군가의 생살을 찢고 그 속에 손을 넣어서, 뼈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것을 막 꺼내려는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급히 얼굴을 들자 고통에 찬 서이주의 얼굴이 보였다. 하윤은 급히 손을 뺐다. 오해라고,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변명했으나 팔뚝까지 벌건 피로 젖어 있었다. 늘어져 있던 서이주의 손이 하윤의 목께로 다가왔다.

겁먹은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가 쫓아오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하윤은 그대로 돌아서 힘껏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야, 아니야!, 선생님은, 선생님은 이미 곡옥을 빼기 전에 죽었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발밑이 무너진 것처럼 몸이 쑥 내려갔다. 하윤은 놀라 몸을 들썩이다 잠에서 깼다.

“……!”

하윤은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온몸의 털이 바짝 선 것 같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떨어지던 꿈이 허튼 것이 아닌지 소파 끄트머리에 몰려 있었다. 까딱 잘못 움직였다간 소파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하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가 넘을 즈음에 잔 것 같은데 아직 새벽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았다.

하윤은 베란다로 나가 바깥 기온을 확인했다.

‘춥다.’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몸을 움츠릴 정도는 됐다. 하윤은 팔을 쓸며 다시 베란다는 나섰다. 아파트 사이로 빼꼼 보이는 산들도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톡 건드리면 툭 터져 울다 보니 다음 날이 오는 게 무서웠다. 아침만 시작했다 하면 언제 하루가 다 보내나 막막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지나고 보니 또 시간이 빠르게 느껴졌다.

‘……시간이 가긴 가네.’

잔혹한 여름이 가고 어느새 가을이 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대로 또 얼마 있다 보면 가을이 왔다 갔는지도 의아하게 겨울이 성큼 다가오리라. 하윤은 달력을 바라보다가 작게 신음했다. 서이주 부부의 결혼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이주의 꿈을 꾼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두 분이 다 돌아가신 경우엔 결혼기념일은 어떻게 하는 거지.’

서이주의 집에선 설날, 추석, 그리고 부부 결혼기념일이 삼 대 명절이었다. 매년 대단하게 챙겨 오다 보니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명절 급이었으니까 제사를 지내야 하나?’

하윤은 휴대전화를 들고 검색하기 시작했다. 결혼기념일 제사라고 검색하자 부부 결혼기념일에 시부모님 기일인데 어떡하냐는 질문 글이 보였다. 다른 글들도 내용이 비슷했다. 결혼기념일에 제사를 지냈다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검색하는 데 지친 하윤은 인터넷에 글을 남겼다. 제사는 일 년에 몇 번 치러도 되는지, 부모님 결혼기념일에도 지내도 되는지 등을 적었다.

그런 다음 평소보다 조금 늦게 운동하러 나갔다. 운동에 돌아왔을 때쯤엔 답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미친놈이라는 한마디가 댓글로 달려 있었다. 하윤은 찝찝한 얼굴로 글을 삭제했다.

‘하긴 시신 수습도 안 됐는데 제사만 챙기는 건 그런가.’

하윤은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이 아주 잠깐만이라도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서이주의 시신이라도 챙겨 올 수 있을 테니까.

‘시신을 갖고 나올 정도의 시간이면 되는데.’

딱 한 번만이면 되는데.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윤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본격적인 아침을 시작했다.

아침 운동을 갔다 오면 인영을 도왔다. 아침을 먹고 나면 아버지와 쌍둥이들을 배웅했다. 평소보다 퉁퉁 불어 보이면 부친은 쌍둥이 몰래 용돈을 찔러 주곤 했다. 마침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음료수라도 사 먹어. 응?”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말처럼 부친 경연의 손이 하윤의 주머니 속에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 손은 나왔지만 바스락거리는 지폐가 주머니 속에 남았다. 하윤은 씩 웃으며 부친을 꽉 끌어안았다. 다 큰 자식이 징그럽다고 하지만 경연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 있었다.

“잘 다녀오세요.”

“오냐. 너도 잘 갔다 오고. 쌍둥이들은 아직 멀었냐?”

“하여튼 김지하. 아침에 등교 준비 하나 하는 데 한세월이지, 한세월.”

“아, 지는 양말도 안 신어 놓고는!”

기준이 후다닥 달려오며 이죽거리자 지하가 뒤쫓아 오며 바락 소리 질렀다. 실제로 기준은 양말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채였다. 부친이 시끄럽다며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하윤은 덩달아 웃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쌍둥이들과 부친이 나가자 집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인영이 출근을 준비할 차례였다. 하윤은 그 사이 식탁 위를 대강 치웠다. 빈 그릇은 물로 한번 헹궈 식기 세척기에 넣고, 행주를 빨아 식탁을 닦았다. 영 익숙하지 않은 손길이라 자꾸만 나물 한 조각이 행주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아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게 뭐라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치우는 척은 했었다. 실제로 일한 건 무경이나 백진하였다. 하윤은 인영의 출근을 재촉하며 행주를 빨아 뒷 베란다에 널었다. 베란다 창으로 바쁘게 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 나왔다.

“엄마 일하러 갔다 올게.”

“잘 다녀오세요.”

“아참, 하윤아. 이거. 쌍둥이들한테는 들키지 마. 재활 끝나고 간식이나 사 먹으라구.”

“…….”

새파란 지폐 세 장에 하윤은 환하게 웃었다. 인영은 하윤의 등허리를 톡톡 두드린 다음 집 밖을 나갔다. 하윤은 자신이 먹고 자는 거실만 대강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베란다에 옹기종기 자리한 식물들에 물도 준 다음, 저도 외출할 준비를 했다.

무경으로 인한 상처의 치료가 끝날 무렵부터 하윤의 능력에 관한 재활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에스퍼들의 재활 훈련은 전투계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하윤은 에스퍼 전용 재활 센터에서 기초적인 재활 훈련을 진행한 다음, 평소 공간이동에 관심을 가졌던 연구소에서 연계 치료를 받았다.

재활 센터와 연구소, 그리고 집까지 각각 제법 거리가 있었다.

덕분에 재활 치료보다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재활 센터에서 연구소로 가는 버스는 재활 센터가 종점이자 출발지였기 때문에 늘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재활 훈련이 끝나면 늘 녹초가 되었기 때문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윤은 재활 훈련을 마친 뒤 버스에서 깊이 잠들었다. 종점에서 가기 때문일까, 하윤의 얼굴을 외운 기사가 깨워 주어 무사히 목적지에 내릴 수 있었다. 비몽사몽한 몸을 이끌고 연구소로 가자 먹어야 할 약을 한 무더니 내어 주었다.

약은 삼 단계로 구분 되어 있었는데, 단계별로 삼십 분 텀을 두고 먹어야 했다. 하윤이 마지막 삼 단계를 먹고 나자 그때부터 연구원들은 하윤의 상태를 분 단위로 확인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장치에도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기초 재활 훈련과 비교하면 비교적 몸이 편했으나, 끝나고 나면 지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버스 시간 때문에 늘어져 있지 못하고 바쁘게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버스에 타자 마침 맨 뒷좌석의 한가운데가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눈길만 줬겠지만,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하윤은 어깨를 최대한 옹송거리고 자리를 파고들었다. 가방을 쿠션같이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뛰느라 두근거리던 가슴도 가라앉은 뒨데도 숨이 찼다. 하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깊이 잠들었다가,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세게 지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그러나 놀란 사람은 저뿐인 것 같아 놀라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려는 순간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남은 정거장은 이제 세 정거장. 하윤은 잠들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준 다음 자신의 다리를 때렸다.

안내방송이 그치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피노키오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이 정부가 해당 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사회견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더 듣고 싶었으나 기사는 그 소식을 마지막으로 버스 기사가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어휴, 지겨워.”

“…….”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말에 가슴 속이 뜨끔거렸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버스에 내린 뒤에도 마음이 찝찝했다.

‘자기 가족들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면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피노키오 사건은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끝난 지 오래다. 그들 일당을 잡아 들였고, 무리를 이끌던 제페토 김득철도 미궁이 열리던 날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노키오 일당이 이전에 벌인 사건들이 몇 건 더 드러났지만, 새로운 범죄가 일어나진 않았다.

‘제페토.’

그는 새로운 초능력자를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문지기들을 죽이고 배를 갈라 곡옥을 갈취하고, 다른 미성년 에스퍼들의 신체를 산채로 축출했다.

‘곡옥은 내 손에 들어왔다가 깨어졌는데, 그럼 김득철이 만들고자 한 새로운 초능력자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면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김득철이 초능력자를 만들었든 못 만들었든 그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거짓말쟁이 중 하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냈다.

‘그럼 걔네가 아닌 내가 피노키오여야 하는데.’

하윤은 자신의 생각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거짓말쟁이 피노키오.”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윤은 한숨과 함께 잡념을 털어 내며 걸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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