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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7화 (7/162)

7화

그날 하윤은 잠들지 못했다. 잠이 들라치면 무경의 얼굴이 생각났다. 결국, 새벽 네 시쯤에야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한바탕 땀을 빼면서 무경을 어떻게 볼지 고민했다. 피하면 이유를 물을 것이었다. 그러나 간밤 네 모습을 훔쳐봤다고 말할 배짱이 없었다.

결국, 하윤은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몰래 훔쳐본 것이고 무경에게 들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훔쳐보지 않았으면 그런 일을 하는지도 몰랐을 것 아닌가.

고민하는 사이, 무경이 수련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삐죽거리며 다가와 어제 삐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미 새벽의 일로 뭐에 삐쳤는지 기억나지 않았던 하윤은 어어, 하다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무경은 하윤이 순순히 사과받자 반대로 의아해했다. 그러나 당장 묻지는 않고 아침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너 혹시 새벽에 집에 왔었어?]

[어?]

[잠결에 네 냄새 난 것 같아서.]

거짓말. 내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잠옷에서 맡았겠지. 하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무경의 얼굴 위로 새벽녘의 모습이 겹쳤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무경의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경이 옷깃이나 머리칼을 건드리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그러나 또 자신의 조각이라 그런지 싫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무경이를 좋아하는 건…….’

어차피 무경과는 사는 동안 계속 함께 있을 운명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만날 수밖에 없다면, 가지려 애쓰지 않아도 갖는다면 적어도 몇 년쯤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선택지가 무경 하나밖에 없는 건 암만 생각해도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무경에게 묶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과 달리 감정적으로는 무경과 분리되지 못했다. 그를 질투하고 갑갑해하다가도 안정감을 느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경을 좋아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좀 더.

좀, 더 깊이.

“무슨 생각해?”

이미 사랑해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

하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경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속이 어떤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저 마냥 기쁜 것처럼.

하윤이 입을 다물자 무경은 하윤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만 보고 있어. 참으려고 딴생각하지 말고. 응?”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하윤이 카랑카랑하게 외쳤으나 무경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듣기 좋은 것처럼 하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빨리 스무 살이 되면 좋겠다.”

“그때가 돼도 내가 한다고 할 것 같아?”

무경은 이번에도 웃었다. 꼭 마치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하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모르지. 그때가 되면.”

“…….”

무경은 하윤의 손가락 틈새로 자기 손가락을 우악스레 밀어 넣었다. 쉽게 털어낼 수 없어지자 하윤은 단념했다. 하윤이 가만있자 무경은 웃으며 손을 지그시 바닥에 내리눌렀다. 마주한 손이 덥게 느껴졌다.

“손만 잡고 있을게.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조금만 이러고 있자.”

“…….”

“정말, 약속.”

말과 달리 무경은 손끝으로 하윤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습기가 그날 밤을 떠올리게 했다. 뒤늦게 무경의 손을 떨쳐 내려 했으나 이미 단단히 붙잡힌 뒤였다.

맞잡은 손이 더웠다.

어느새 마주한 숨결 또한.

“혹시 무경이 암시 깨졌니?”

어쩐 일로 이른 오후에 집에 들어온 서이주는 주방에서 물을 마시던 하윤에게 물었다.

“켁.”

서이주는 왜 자신이 물을 마실 때마다 엄한 걸 말하는 걸까. 하윤은 사레들린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아주 작게 기침했으나 그걸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돌아서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캑캑거렸다.

“진짠가 본데.”

서이주는 담배를 입에 물며 쯧쯧 혀를 찼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놀라서 그래요. 가만히 물 마시는데 말 거시니까.”

서이주는 하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짓궂게 웃었다. 하윤의 말을 믿는 낌새가 아니었다. 하윤은 억울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제로 무경의 암시는 아직 풀어지지 않았다. 풀어졌다면 끝까지 갔을 테니까. 무경의 암시를 생각하던 도중 하윤은 무경의 암시 내용을 떠올렸다.

김하윤의 [동의]가 있더라도 스물이 되기 전까진 관계할 수 없다.

무경은 하윤이 싫어하는 일은 대체로 하지 않았다. 요즘 이어지고 있는 일도 하윤이 질색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이주는 이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남자애들은 충동에 잘 넘어가니까 특히 주의가 필요하지. 더군다나 조각 사이니 서로 애틋하기까지 하니까.”

“애틋하지는 않은데요.”

“그래?”

“…….”

대답한 순간 어째 서이주에게 말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하윤은 이 주제로 계속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요 맹랑한게 말 돌리는 것 좀 봐. 하지만 금제는 널 위한 거기도 하지만 무경이를 위해서이기도 해. 나는 안 그래도 좁은 무경이의 세상이 닫히길 바라지 않거든. 지금은 이게 마냥 잔소리로 들리겠지만.”

나 때는 말이야. 서이주의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였다. 하윤은 슬그머니 컵을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서이주가 잽싸게 다가와 하윤의 귀를 꼬집었다.

“아야야, 아야!”

“야! 힘도 안 줬다, 힘도!”

하윤이 깨갱거리는 소리에 위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샤워 중에 밖으로 튀어나온 무경이 계단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왜?”

몸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무경의 몸 여기저기에 물과 거품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서이주가 바락 소리 질렀다.

“안 잡아먹는다, 안 잡아먹어!”

하윤은 귀를 움켜잡은 채 무경이 보이는 곳까지 나왔다. 그러곤 일러바치듯 서이주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 모습에 서이주는 기가 막히다는 양 코웃음 쳤다.

“요, 요 맹랑한 거 봐. 넌 가서 마저 씻어. 별일 아니었으니까.”

“하윤이 때리지 마세요. 걔가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얘도 밖에 나가면 충분히 큰 키거든? 너 지금 네 조각이라고 편드냐?”

“예.”

배시시 웃는 모습에 서이주는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는 척했다. 하윤은 서이주의 등을 받쳐 주며 키득거렸다.

“아들 새끼 키워 봤자 보람이 없어. 보람이. 어휴.”

“이참에 하나 더 낳으시죠. 십 년 전쯤부터 귀여운 동생 갖고 싶어 했다구요.”

“말이나 못 하면.”

서이주는 하윤을 흘겨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무경은 아직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하윤이 무경을 향해 손짓했다. 가서 마저 씻으라는 뜻에 무경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다가 이내 돌아섰다.

욕실 문이 잠기는 걸 느끼고 난 뒤에야 하윤은 서이주에게서 떨어졌다.

“……너 진짜 조심해라.”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너 내가 왜 일찍 왔냐고 물었지?”

“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야.”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놀랍게도 이제 시작이야. [문]을 열어라, 김하윤.”

“…….”

하윤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듣기에 앞서 겁이 났다. 그러나 겁이 난 것과 별개로 하윤과 서이주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문이 다가왔다. 활짝 열린 문은 하윤과 서이주를 삼키고, 또 다른 문이 다가와 하윤과 서이주를 삼켰다. 공간과 공간이 이어졌다가 멀어지며 또다시 다른 공간을 열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르자 하윤과 서이주는 시뻘건 공간에 도착했다. 아래위로 빼곡한 문들은 서로 맞닿아 거대한 구체를 만들고 있었다. 하윤과 서이주는 그 가운데 있는 투명한 바닥에 서 있었다.

문들은 제멋대로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꼭 하윤을 향해 말을 하는 모양새였다. 문이 닫혔다 열리면서 생긴 바람에 하윤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서이주는 손을 뻗어 하윤의 안경을 빼냈다.

하윤의 색 옅은 갈색 눈동자에 아주 얇은 금색 테가 생겼다. 하윤이 눈을 한번 깜빡이자 수다스레 열고 닫히던 문들이 일제히 닫혔다. 불타듯 붉기만 하던 공간이 일시에 황금색으로 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그러세요?”

“이번엔 문태강이 죽었어. 아니, 가까스로 탈출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

“문태강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가 보구나. 전에 말했지만, 정기오와 나, 문태강은 아주 오랫동안 문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지. 그리고 정기오가 죽고 문태강이 죽었어. 다음은 내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왜 죽어요.”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서이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윤은 서이주의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다. 서이주는 하윤과 마찬가지로 문과 관련된 에스퍼였다. 여차하면 달아나면 그만 아닌가.

“네가 날 대단하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세상엔 뛰어난 에스퍼가 많단다.”

“하지만.”

“더군다나 나는 문을 열 때 허락이 필요하단다.”

“…….”

“물론 같은 에스퍼인 정기오와 문태강과 비교했을 때 문이 빨리 열리는 편이었지. 하지만 때로는 열리지 않는 문이 있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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