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Welcome to B-612 (12/17)

3. Welcome to B-612

―오늘도 숙소?

“네,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 있어.

내 사과에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시무룩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나를 불렀다.

―잠깐 만나는 건?

“저녁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저녁엔 훈련 못 하니까요.”

―그래?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다시 숙소 들어가야 하지?

“네. 일요일에도 훈련해야 하니까요.”

아무래도 집에 다녀오면 다음 날 새벽 훈련에 늦을 수도 있고, 이래저래 번거로워 요즘은 거의 숙소에서 먹고 자고 하는 편이었다.

저녁 식사는 해야 하니까 그 시간에 잠깐 얼굴 보고 오면 되지 않을까. 시간을 계산해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용주 저녁 먹을 시간에 맞춰서 갈게.

“형 번거로울 텐데.”

―아냐, 안 번거로워.

절대 아냐, 하는 하원의 대답에 나는 웃으며 알았어요, 라고 답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용주는 뭐 먹고 싶어?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고기 먹으러 갈까?

“고기도 좋아요.”

하원이 채소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유이지만, 나 역시도 채소보다는 고기가 좋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이 근처에 고기 먹을 곳이 있으려나.

―그럼 용주 저녁 먹을 시간 맞춰서 학교로 갈게.

“형 지금 어딘데요?”

―난 집.

“이쪽으로 오려면 귀찮잖아요.”

―안 귀찮다니까!

버럭, 화를 내는 하원의 말에 알았어요, 하며 웃었다. 왜 화는 내고 그래요. 뾰로통해 있을 하원이 떠올라 웃음을 삼켜야 했다. 웃으면 화낼지도 몰라.

“그럼 학교 앞으로 와줄래요?”

―응, 몇 시에 갈까? 여섯 시? 일곱 시?

“일곱 시가 괜찮을 것 같아요. 그전에 훈련 끝내고 샤워하고 준비하면 되니까요.”

감독 샘도 저녁 식사는 하실 테고, 우리도 저녁을 먹으려면 여섯 시에는 훈련이 끝날 듯싶었다. 개인 훈련이야 눈에 불을 켜고 관리하지는 않으니까, 밥 먹고 조금 늦게 온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럼 일곱 시 맞춰서 정문 쪽에 가 있을게.

“늦지 않게 나갈게요.”

―아휴, 빨리 용주 만났으면 좋겠다.

“몇 시간만 있으면 되잖아요.”

힐끗 시간을 확인하며 말하자 그래도, 하고 하원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힘들잖아. 아무튼 바쁜 애인 두면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

이제껏 바빴던 사람이 조금 한가해졌다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가. 하원의 투정에 작게 웃으며 미안해요, 하고 하원을 달랬다.

“저 다시 훈련하러 가봐야 해요. 저기서 감독 샘이 노려보고 있어요.”

―아, 응. 그럼 조금 이따가 만나.

“네, 일곱 시에 만나요.”

끊기 싫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고집 피울 상황이 아님을 아는 모양인지 하원은 안녕, 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해요. 하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휴대폰에 속삭인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앉아있던 스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예상했던 것보다 훈련이 삼십 분이나 늦게 끝났다. 미리 준비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교문으로 뛰어나가니 저쪽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 하원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자 지잉, 반쯤 창문을 내린 하원이 생긋 웃었다.

“빨리 타.”

“많이 기다렸어요?”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며 묻자 아니, 하고 고개를 내젓는다.

“용주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씻고 바로 나와서 그래요. 훈련이 좀 늦게 끝났거든요.”

“그래도 잘 말리고 와야지.”

바쁜 일 없어도 만날 이런 상태로 욕실에서 나오는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거든요. 하원이 차를 출발시키는 것을 바라보며 조수석 쪽 창문을 절반 정도 내렸다. 부는 바람에 머리가 금방 마를 것이 분명했다.

“어디로 가요? 생각해보니까 이 근처에 먹을 곳이 없더라고요. 있다고 해도 학교 근처라서 형이 가면 곤란해질 것 같고요.”

“나 가끔 밥 먹는 곳으로 가자.”

“멀어요?”

“음, 그렇게 멀지는 않아.”

저녁 시간이라고는 해도 너무 늦게 돌아가면 곤란한데. 내 걱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하원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차로 한 이십 분 걸리기는 하는데 미리 준비해달라고 말해둬서 가면 바로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다 늦으면 어쩌려고 미리 말해놨어요?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분명히 하원의 이름을 보고 예약을 받아주었을 텐데.

“몇 시에 예약해둔 거예요? 늦지 않았어요?”

“괜찮다니까. 그리고 조금 늦어도 혼나지 않아.”

물론 혼나지는 않겠지만요. 걱정스럽게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해하자 하원이 괜찮다니까, 하며 웃었다.

“지금까지 훈련한 거야?”

“네, 형은 집에서 뭐 했어요?”

“난 잤어. 뒹굴뒹굴.”

드라마를 끝내고 푹 쉬고 있는 모양인지 얼굴이 보기 좋게 피었다. 봄철 꽃처럼 화사하게 물이 오른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곤란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왜?”

“형 얼굴이 아주 활짝 피어서요. 계절은 여름인데 혼자 봄이잖아요.”

“원래 연애하면 예뻐지는 거래.”

그거야 여자들이 하는 말이고. 원래 예쁜 얼굴인 데다 혼자 열여덟 봄 처녀인 것처럼 물이 올라서 이래저래 나쁜 사람들이 꼬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데이트하자고 연락 오거나 하지는 않아요?”

“데이트? 글쎄, 밥 먹자고 가끔 전화 오기는 해.”

“누가요?”

누가 임자 있는 남자한테 자꾸 대시를 해? 어떤 연놈이야? 하는 투로 묻자 하원이 깔깔 웃었다.

“왜 웃어요?”

“용주가 질투해주는 척하니까 기분 좋아서.”

“질투해주는 척이 아니라 질투하는 거예요.”

“거짓말.”

좀 속아줘요. 하고 말하자 하원이 크게 웃었다. 하원의 말처럼 이십여 분을 차로 이동하여 커다란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주차요원의 안내에 주차를 하고 내려 건물로 들어갔다. 그냥 일반인이 와서 가볍게 고기를 구워 먹고 가는 곳과는 조금 다르다.

“엄청…… 고급스러워 보여요.”

그냥 고기만 구워 먹는 가게가 아닌 것 같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자 하원이 내 팔을 잡아 끌어당기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예약해뒀는데요.”

“오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조금 늦으시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하원이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로 다가가 말을 건네자, 안면이 있는 모양인지 직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걸으며 하원과 나를 이끌었다.

“이쪽이에요. 음식 바로 들일까요?”

“네, 배고파요.”

배를 문지르며 답하는 하원의 행동에 직원이 작게 웃었다. 미닫이문을 열어주는 서비스에 신발을 벗고 방으로 올라가자, 직원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테이블 하나와 옷걸이, 방석 서너 개가 있는 방은 작고 아담하면서도 깔끔했다.

“조용히 식사하고 갈 수 있어서 좋아. 괜찮지?”

하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석을 깔고 자리에 앉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음식 들이겠습니다.”

“네.”

하원의 대답에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가지고 온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 개인 접시를 하원과 내 앞에 놓아주었다.

입맛에 맞게 마시라는 것인지 냉 녹차와 생수가 담긴 물병과 컵을 내려놓고, 소담하게 담긴 반찬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고기는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네.”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 하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종업원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하원이 왜? 하고 물어왔다.

“네, 네, 대답도 예쁘게 한다 싶어서요.”

“칭찬해주는 거야?”

“네, 참 착해요. 하고 연필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연필 말고 뽀뽀?”

“한 번? 두 번?”

“세 번.”

욕심도 많아라. 내 핀잔에 하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웃는 것도 예쁘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종업원이 고기를 가져왔다.

빨간 고기 위에 마블링이 장난이 아니다. 엄청 비싸 보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종업원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놓았다.

“제가 구울 테니까 나가보셔도 돼요.”

“시간 맞춰 중간에 한 번 오겠습니다.”

“네.”

집게와 가위를 놓고 종업원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하원에게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기 엄청 비싸 보여요.”

“응? 딱히 그렇지는 않아. 그런데 여기 고기 엄청 맛있거든. 언제 용주랑 한번 와야지 했는데, 오늘 오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맛있어 보이기는 한데 비싸 보이기도 해요.”

“정말 안 비싸.”

비싼지 비싸지 않은지 확인하고 싶은데 메뉴판도 없다. 여긴 왜 메뉴판도 안 걸려 있지? 하물며 오기 전에 미리 주문을 해둔 모양인지 작은 메뉴판도 주질 않았다.

나중에 계산할 때 슬쩍 봐야겠어. 하원 몰래 생각하고 있자 하원이 무슨 생각해? 하며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긴 언제 왔었어요?”

“가끔 회식하려고도 오고, 가족들이랑 몇 번 왔었고, 고기 먹고 싶을 때 매니저 끌고 오기도 했었고. 다른 곳도 가봤는데 여기만큼 맛있는 곳이 없더라고.”

그만큼 맛있고 비싸다는 얘기겠죠. 가격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하원이 말을 할수록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 의기소침해져 있자 하원이 내 접시 위로 반찬으로 나온 양념게장을 올려주었다.

“그거 먹어봐. 진짜 맛있어. 양념게장 전문으로 파는 가게 가서 먹는 거랑 비교해도 나쁘지 않아.”

젓가락에 묻은 양념을 쪽 빨며 하원이 말했다. 젓가락으로 게 다리를 잡고 입에 물자 달달하면서도 매콤한 양념이 느껴졌다.

이빨로 게를 씹자 싱싱한 게살이 툭 밀려 나왔다. 하원의 말처럼 전문적으로 파는 양념게장에 뒤떨어지지 않는 맛이었다.

“맛있지?”

하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도 맛있는데 반찬도 맛있어. 그래서 좋아.”

하원이 양념게장의 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리고 다시 종업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고기 뒤집어 드릴게요.”

밖에서 시간을 재고 있는 모양인지, 방으로 들어온 종업원은 집게로 고기를 뒤집어주었다.

“저번에 가족분들 오셨던 거 알고 계세요?”

“아버지랑 어머니 오셨다 가셨어요?”

“형님 내외분이 모시고 오셨었어요.”

“어, 왜 나는 몰랐지.”

하원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종업원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드라마 찍으실 때 아니었나요? 마지막 회 방영일까지 촬영하셨다면서요?”

“아, 네. 그전에 오신 거예요?”

“그전 주에 오셨거든요. 한창 바쁘실 때라 말씀 안 하고 오신 모양이에요.”

종업원의 말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가 익는 것을 확인한 종업원은 알맞은 크기로 고기를 자르고 한쪽에 집게와 가위를 놓아둔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익힌 뒤에 드세요. 식사 맛있게 하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주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종업원이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서비스도 장난 아니야. 생각보다 더 대단한 곳을 와버린 기분이었다.

“저분이랑 아는 사이예요?”

종업원이랑 엄청 친근하게 대화를 했던 하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쪽 룸 매니저.”

“룸 매니저요?”

“응, 여기 홀 매니저랑 룸 매니저가 따로 있거든. 룸 손님들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고깃집이면서 매니저까지 있다니. 이제껏 종업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매니저가 손수 와서 고기를 잘라주고 간 것인가. 나는 종업원이라고 생각했던 매니저가 나간 문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형 엄청 대단한 연예인이라는 걸 새삼 느꼈어요.”

“뭐야?”

내 감탄에 하원이 샐쭉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서용주의 민하원이 아니라, 만인의 민하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냐, 용주의 하원이 맞아.”

입술을 삐죽거린 것이 거짓말이었던 듯 하원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 부모님 단골집이라서 그나마 좀 챙겨주는 거지. 아니었으면 민하원이라고 해도 흥, 했을걸.”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하원이 웃겨서 픽 웃음을 흘렸다.

“어, 정말이야. 아버지랑 어머니 젊으실 때부터 여기 자주 오셨대. 여기 엄청 오래된 곳이거든.”

“그래요? 낡아 보이지는 않는데.”

“공사도 몇 번 하고 그랬지. 아무리 전통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더러우면 잘 안 오게 되잖아. 서비스도 요즘 트렌드에 맞춰야 하고.”

“인기 좀 많아지면 맛이 없어지기도 하는 모양인데, 여긴 그렇지 않은가 봐요.”

“응, 여기 주인이 신경 많이 쓰는 모양이야. 그래서 다들 좋아해.”

역시 엄청난 곳에 와버린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 익었다. 용주 빨리 먹어.”

하원은 익은 고기를 내 그릇 위에 놓아주며 말했다.

“너 요즘 훈련한다고 얼굴이 반쪽이야. 감독이 너 굶기는 거 아냐?”

“오히려 잘 먹이지, 굶기지는 않아요. 저희는 체력으로 승부하는 거나 마찬가지인걸요. 굶으면 안 되죠.”

다이어트하는 연예인과는 입장이 다르답니다. 그럼에도 하원은 못마땅한지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그래?”

“훈련이 좀 빡세요. 그래서 그래요.”

“감독이 너무 굴리나 봐. 보양식도 좀 해 먹이고 그래야 하는데. 여름이잖아.”

해마다 오는 여름인데 뭐 특별할 게 있다고. 나는 상추에 싼 고기를 우물거리며 하원의 말에 대충 웃어주었다.

“와, 진짜 맛있어요. 고기가 살살 녹네요.”

“그치? 여기 떡갈비도 맛있어. 이거 다 먹고 떡갈비도 가져다 달라고 하자.”

“이것도 충분히 많은데요.”

“아냐, 모자라. 이거 다 먹고 더 먹어야 해, 넌.”

하원이 상추에 깻잎을 겹쳐 고기를 세 점이나 올리고 마늘과 쌈장을 듬뿍 찍어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먹으라고 주는 거 맞아요? 부담스럽게 큰 쌈을 눈앞에 두고 나는 잠시 갈등하다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용주는 잘 먹어서 좋아.”

“형도 잘 먹어서 보기 좋아요.”

“그런데 이렇게 잘 먹다가는 다음 영화 찍을 때 또 다이어트해야 한다고 석진이가 그랬어.”

고기를 두 점씩 상추에 싸서 먹으며 하원이 우물거렸다.

“벌써 영화 찍어요?”

하원이 출연했던 드라마 가족의 울타리가 끝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나 싶은데 벌써 다음 영화라니.

“아직은 아냐. 대본 들어오는 거 보고 있나 봐. 추린 다음에 같이 결정하겠지.”

“그렇구나.”

“아무리 빨리 결정한다고 해도 한두 달은 지나야 할걸.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용주는 바쁘겠지만.”

“미안해요.”

드라마 마지막 회 방영일까지 숨 가쁘게 촬영을 한 하원은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여유롭게 쉴 수 있었지만, 그때와 딱 맞물려 내가 바빠져 버렸다.

전국 대회 준비로 거의 숙소에서 먹고 자고 하는 바람에 하원의 집에 갈 틈도 없었다. 그것이 불만이라고 하원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얼굴 보고 밥 먹을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흰 밥은 꼭 챙겨 먹거든요.”

흐흐, 하고 웃자 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 위에 고기를 마구 올려주었다.

“저 먹고 있으니까 형도 드세요.”

“나도 먹고 있어. 너 먹으라고 여기 온 거야. 용주 볼 때마다 얼굴이 홀쭉해져.”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머쓱하게 웃었다.

“용주 보약 먹을래?”

웬 보약? 뜬금없는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하원이 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보약, 하고 다시 말했다.

“나 저번에 어머니가 해다 주신 보약 같은 거. 여름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거기 꽤 유명한 한의원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서.”

“형, 전 보약 먹을 정도는 아닌데요.”

“아냐, 용주 지금 피골이 상접해서 쓰러질 것 같다니까.”

전 지금 최상의 컨디션입니다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됐다며 손을 내젓자 하원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한 달 치 정도만 지어 먹어보면 안 돼?”

“유별나다고 할 거예요. 우리 누나 고3 때 지어 먹었던 것 같긴 한데, 저는 어림없는 소리예요.”

“왜! 용주도 고3이야. 그리고 체력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아버지도 안 드시는 보약을 제가 뭐라고 먹어요.”

보약의 ‘보’ 자만 꺼내도 등짝을 맞을 것이 분명했다.

“나랑 같이 가자. 팩에 담아달라고 해서 숙소에 두고 하나씩 먹어. 집에 가져가지 않으면 되잖아. 응?”

“됐어요.”

“가서 진찰도 받아보고.”

갈수록 점점. 나는 그만 말하라는 뜻을 담아 커다랗게 싼 쌈을 하원의 입에 밀어 넣어주었다.

“용주는 내 맘을 너무 몰라줘.”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에요.”

고기가 타지 않도록 불을 약하게 줄여놓고 두 점씩 집어 쌈을 싸 먹으며 하원을 보았다.

“이렇게 먹는 게 보약이에요. 밥이 보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럼 보약 같은 밥도 먹고, 보약도 먹자.”

“그만 해요.”

손을 뻗어 하원의 입술을 살짝 잡아 흔들었다. 우웅, 칭얼거리는 소리를 모른 척하자 하원이 칫,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남은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용주 너무해.”

“전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여름인데 땀 흘리면서 뛰어다니면 그만큼 보충해줘야 한다고.”

“형이 보충시켜주면 되잖아요. 이렇게 고기도 먹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면 보약보다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하원은 정말? 하고 물었다.

“네. 쓴 보약 불편한 마음으로 먹는 것보다 형이랑 기분 좋게 밥 먹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내 물음에 하원은 꾹 입을 다물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헤집었다. 아무튼 그냥 예의상으로라도 그렇다는 말은 절대 안 하지. 그런 점이 귀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슬쩍 생마늘을 넣고 쌈을 싸서 하원의 입에 넣어주고 모른 척 고기를 뒤집으며 가위로 자르자, 우물거리던 하원이 으아아아, 우는소리를 내며 물을 찾았다.

“너 일부러 그랬지?”

“뭘요?”

“마늘! 익은 것도 아니고 생마늘 넣었잖아. 으, 매워.”

눈 끝에 눈물을 찔끔 매달고 나를 흘겨보며 하원이 손부채질을 해댔다.

생마늘을 통째로 씹은 것도 아니고 작은 조각 하나 먹은 주제에 맵다고 호들갑이야. 정말이지 아이 같다니까. 피식 웃으면서도 슬쩍 물김치를 하원 쪽으로 밀어주었다.

∞ ∞ ∞

정말 배부르게 먹었다. 하원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떡갈비까지 먹게 되어 배는 한계까지 가득 찬 상태였다. 여기에 물 한 모금이라도 더 넘긴다면 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낼 성싶은 기분이 들었다.

“배불러?”

“으, 배가 너무 불러서 아플 정도예요.”

내 대꾸에 하원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음에 또 오자.”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오고 싶을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네요. 그럼에도 나는 잘 먹었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너무 늦었나?”

“괜찮아요. 어차피 저녁에는 개인 트레이닝 하니까요.”

“용주도 정말 힘들겠다.”

“해야 할 일인데요.”

고깃집에 준비되어있던 탈취제를 옷에 뿌렸지만 강하게 남은 고기 냄새가 고작 탈취제로 사라질 리 없었다. 창문을 반쯤 열어 바람을 쐬면서 어두워진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전국 대회는 언제야?”

“칠월이랑 팔월이요.”

“멀었네.”

어떻게 보면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같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같다. 그것은 아무래도 마음가짐과 얼마나 준비했느냐의 차이겠지만.

“긴장하고 있어?”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하원은 핸들을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돼요. 시합이 가까워질수록 더 긴장하겠죠.”

“마음가짐의 문제겠지.”

그 비슷한 생각을 지금 내가 했던 것 같은데. 신기한 마음에 하원을 바라보자, 하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긴장을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그만큼 용주한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긴장하는 거라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싶어서.”

반대편 차선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원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남자의 얼굴이다. 순간순간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원의 낯선 얼굴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움과 감동에 휩쓸려버리곤 했다.

“왜?”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다시 차를 운전하던 하원은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아니에요. 배가 불러서.”

형이 어른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내가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을 하기에는 부끄러웠다.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리자 하원이 픽 웃고는 정면을 주시하며 차를 몰았다.

“아, 오늘 헤어지면 또 언제 보나.”

“미안해요.”

“용주한테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고 하는 소리 아닌데.”

그럼 뭐 다른 소리 듣고 싶다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원을 보자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는다.

“다음 주는 시간 괜찮아?”

“글쎄, 잘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어디 있어?”

“괜찮다고 말했다가 일요일에 훈련한다고 하면 곤란해지잖아요.”

내 대꾸에 하원은 흐음,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핸들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토요일 훈련 끝나고 일요일 아침 훈련할 때까지의 시간은 비는 거지?”

“그건 딱히 주말의 의미가 없잖아요.”

“비라도 오면 좋을 텐데.”

부슬비 같은 경우에는 맞으면서 훈련을 하지만, 많이 내리게 되면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비 왔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물론 우리도 가끔은 훈련하기 싫을 때 비가 오지는 않을까 기대하긴 하지만.

“이번 주는 햇빛 쨍쨍 맑음이래요.”

“기상청 일기예보 봤어?”

“저희도 가끔은 땡땡이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가끔이라는 것이 너무 빈번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토요일 저녁에 시간 좀 내줘.”

“왜요?”

“맛있는 거 먹게.”

저녁 식사하자고 말하는 것치고는 꽤나 거창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안 돼. 꼭꼭 나랑 가야 해.”

어디를?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면서 마치 어디 갈 곳을 정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의아한 마음에 하원을 바라보자 자기도 뭔가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는 것처럼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지? 조금 이상하네.

“저랑 어디 갈 곳 있어요?”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하원이 손으로 입을 가린 상태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주말에 만나지 못해도 딱히 상관은 없겠네요?”

그러자 곤란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또 고개를 내젓는다.

“안 돼? 안 될 것 같아? 오늘처럼 저녁 식사만 하는 것도 안 돼?”

대체 뭘 먹으러 갈 생각이기에 이렇게 일주일 전부터 안달을 하는 것일까. 하원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해 조금은 웃기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모르는 척 넘어가주며 시간이 된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날 무슨 일이 생기거나 훈련이 늦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장담할 수가 없었다.

“딱히 계획이 잡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더 확실하게 답을 못 해요. 훈련 없으면 꼭 형이랑 같이 밥 먹도록 할게요.”

“연락 줄 거지?”

“연락 안 해도 형이 전화할 거잖아요.”

“용주는 나한테 너무 전화 안 해.”

“제가 하기 전에 형이 먼저 하니까 그렇죠. 그럼 제가 할 때까지 기다려요.”

“기다리기 싫어.”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으면 어쩌라는 것인지. 어느새 교문 앞에 도착한 하원은 한쪽으로 차를 세우고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말하지 않아도 형이 항상 맛있는 곳으로 데려가니까 전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형 먹고 싶은 거 해 먹을까요?”

“안 돼. 사 먹어도 되는데 괜히 음식 만든다고 힘 빼고 시간 낭비하지 마.”

너무하네. 난 그래도 형이 먹는 모습 보면 뿌듯하고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만드는 거였는데 시간 낭비라니. 엄청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하원이 손을 내저었다.

“아냐, 취소. 말 잘못했어. 미안. 나도 용주가 음식 해주면 맛있고 좋아. 그런데 요즘에는 용주도 힘들고, 그 시간 아껴서 용주랑 더 같이 있고 싶어. 용주가 해주는 것보다 맛도 정성도 없겠지만 그래도 음식 사 먹고 용주랑 같이 있는 게 좋아. 용주가 편하게 있는 것이 더 좋고.”

“형은 제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었다가, 슬프게 만들었다가, 또 기쁘게 만들었다가, 감동도 주고 그래요.”

“오해하지 마. 나 정말 용주가 요리해주면 좋아. 좋은데 요즘에는 만나는 시간도 짧으니까, 용주가 요리해주는 것보다 그 시간에 그냥 같이 앉아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랬어.”

“알아요. 형이 말하는 의미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변명하지 않아도 돼요. 하원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웃자 하원이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서 먹고 싶은 거 말해줘.”

“글쎄요. 형은 뭐 먹고 싶어요?”

“난 용주가 먹고 싶은 거.”

그렇게 말하며 하원은 씨익 웃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말해보라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배가 너무 불러서 다른 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다른 건 생각이 안 나요. 전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형이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는 게 더 좋아요. 아니면 토요일 되기 전에 다시 통화할 때 생각해요.”

“응, 그러자.”

힐끗 시간을 확인하니 너무 늦어버린 듯했다. 가야 한다는 뜻을 담아 하원을 바라보자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토요일에 또 만날 수 있잖아요.”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하잖아.”

“형이 그런 얼굴 하면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요.”

고기 냄새 때문에 오늘은 넘어가려고 했는데. 하원의 목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며 기분 풀어요, 하고 속삭였다.

학교 앞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인지 깊게 입술을 겹치지는 못하고 쪽쪽 입을 마주하는 것으로 끝낸 하원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놓아주었다.

“다음 주에 봐.”

“전화할게요.”

“응.”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어서 들어가라는 것처럼 하원이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려 교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미안해요.”

아, 서용주 정말 최악이다. 요즘 들어 하원에게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있어. 질끈 눈을 감고 푹 고개를 숙이자 하원이 괜찮다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늦어도 머리는 말리고 오라니까.”

“그게 아니라요, 내일 새벽 훈련이요.”

“내일은 쉰다고 했다며.”

“그렇게 말씀하셨죠. 어제까지는…….”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한 뜻으로 푹 고개를 숙이자 하원이 으엉, 하고 우는소리를 했다.

“감독님 너무해. 어떻게 모처럼 만나는 건데 이렇게 도움을 안 주시지?”

감독 샘은 아마 연예인 민하원 씨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저를 만나러 왔다는 것도 모를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오늘도 밥만 먹고 다시 와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하원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일단 가자. 좀 늦었거든.”

“또 예약해둔 거예요?”

“그런 게 좀 있어.”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는 하원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나를 보며 작게 웃던 하원은 차에 시동을 걸며 저기, 하고 뜸을 들였다.

“우리 집으로 갈 거야.”

학교 앞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 익숙하게 차를 모는 하원을 보며 나는 집이요? 하고 물었다.

“그럼 뭐 해 먹을 재료 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집으로 가는데 시켜 먹는 건 좀 그렇잖아요.”

“아니, 내 집 말고.”

그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나는 하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집. 모처럼 가족끼리 식사하기로 했거든. 너 데려가겠다니까 어머니가 엄청 기대하고 계셔.”

“예에?”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하원의 집이 아니라 부모님 집에 가는 거라니.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리다고 말해달라는 뜻을 담아 빤히 바라보았지만 하원은 혼자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부모님 집에 가고 있다는 거예요?”

“응.”

“형!”

“응?”

내 외침에 하원이 힐끗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안 돼요. 못 가요.”

“왜?”

“형네 가족 식사하는 자리에 제가 어떻게 가요?”

“왜? 나 드라마도 끝났고 해서 모처럼 모이는 거야.”

“그러니까요.”

그 자리에 제가 왜 끼냐고요. 나는 울상이 되어서 말했지만 하원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부모님도 너 데려오라고 하셨는데?”

“뭐라고 그랬는데요?”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거나 그 비슷한 의미로 말을 한 것은 아니겠죠.

아는 동생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울 테지만 그 이상으로, 혹은 사실대로 말을 했다고 하면 더욱 기겁할 일이다. 제발 그랬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내가 잘 말해뒀어.”

“그러니까 어떻게 잘 말했는데요.”

순간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원은 내심 즐거운 듯 보였지만.

“어머니가 너 온다고 하니까 먹고 싶은 거 말하라고 하셨는데 용주가 아무거나 다 좋다고 해서 용주는 다 잘 먹는다고 했어. 어머니가 다행이래. 아까 통화했더니 갈비찜 해놨다고 하셨는데 갈비찜 좋아해?”

“네,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럼 뭐가 문제인데? 하는 얼굴로 하원이 바라보았다. 문제가 뭔지 모른다는 것부터가 문제예요. 나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였다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죠.”

“난 그냥 너 부담 갖지 말라고.”

“지금 말해주는 게 더 부담이에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조수석 시트에 몸을 기댄 상태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옷이라도 신경 써서 입고 왔죠. 이게 뭐예요? 머리는 말리지도 못하고 티셔츠에 청바지 입고 왔는데.”

하원을 타박하자 예뻐, 하고 단박에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야 형만 그렇게 보는 거고요. 형이 나를 부모님께 뭐라고 소개했는지 차마 상상이 되지 않지만 이런 모습으로 가는 것은 정말 예의가 아니라고요.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예의범절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원의 부모님이 보시고 뭐라고 하실지 암담했다.

“용주야, 그냥 밥만 먹으러 가는 거야. 싫어?”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응, 그렇지.”

그렇게 답하는 하원이 얄미워서 나는 하원을 힐끗 노려보았다.

“형 진짜 미워요.”

“미안. 대신 어머니 갈비찜 진짜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

갈비찜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하원은 지금 내 고민과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뭐라도 사 가야 하지 않아요?”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음료수라든가 꽃이라든가. 내 말에 하원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용주가 뭐 사 들고 가는 게 더 이상해.”

“그래도요. 꽃이라도 한 다발 사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럼 그럴까. 나도 집에 오랜만에 가는 거니까. 중간에 꽃집 들러서 꽃 사 가자. 어머니가 꽃 좋아하셔.”

가볍게 말하는 하원과는 달리 내 속은 아주 복잡했다. 쉽게 생각해, 라고 하원이 말해도 도저히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리 아파. 밥을 먹기도 전에 속이 더부룩해지는 기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로를 달리는 차 속에서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하원이 몇 마디를 건넸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도통 풀리질 않았다.

“가기 싫어?”

“아뇨. 가기 싫은 것보다는 그냥 좀…… 긴장이 돼서 그런가 봐요.”

“왜 긴장해?”

“형네 부모님 만나는 거라고요. 친구네 놀러 가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난 긴장 안 되는데.”

형은 형네 부모님 만나러 가는 거니까 그런 거고요. 하원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나는 힘이 빠진 몸을 시트에 기댔다. 중간에 문을 연 꽃집에 들러 하원의 어머니께서 좋아한다는 꽃다발을 사고 다시 차에 올랐다.

“여기서 멀어요?”

“아니, 이 근처야. 배고프지? 빨리 가서 밥 먹자. 지금쯤 아버지도 오셨겠다.”

“완전히 늦었네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도 문제고, 처음 뵙는 자리에서 늦는 것도 문제고, 정말 문제투성이다.

한숨을 내쉬는 내 머리를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하원이 웃었다. 그렇게 웃어도 지금은 별로 안 예뻐 보여요. 순간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다 먹고 내 방 구경시켜줄게.”

“기대하고 있을게요.”

한없이 땅만 파고 있으면 뭐해. 기분 안 좋다는 것을 드러내봤자 하원까지 기분 나빠질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현실에 순응하자는 생각에 나는 힘을 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해줘야 해요. 당황스럽잖아요.”

“미안. 놀래주고 싶었어.”

“엄청 놀랐어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요.”

“응.”

반성할게. 하고 하원이 말했다. 하원의 말처럼 십 분 정도 지나 주택가로 차가 들어섰다. 엄청 부잣집 동네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골목 주제에 넓고 깨끗했다. 안쪽으로 십여 미터를 들어가 커다란 대문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기야.”

“집이 참…… 좋네요.”

“그래? 잘 모르겠는데.”

저는 너무 잘 알아서 탈이고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상태로 차에서 내리자 하원이 비디오폰의 벨을 눌렀다.

“어머니, 저 왔어요.”

하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컥, 대문이 열렸다. 하원을 따라 쭈뼛쭈뼛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정원은 깔끔하게 손질되어있었고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돌계단을 올라 현관에 다다랐다. 구겨진 티셔츠 앞자락을 손으로 털어내는 사이 하원이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네.”

긴장하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열린 문을 보고 있으려니 긴장이 되었다. 내 손을 잡아끌며 하원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에서 여자가 나오며 환히 웃었다.

“이제 와?”

“네, 좀 늦었어요.”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하원의 어머니라고 생각되어 꾸벅 인사를 하자 여자가 하원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던…….”

“용주예요. 요즘에 훈련한다고 엄청 바빠서 오늘 데리고 오는 것도 힘들었어요.”

아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자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환히 웃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일단 들어와. 아버지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셨어.”

하원을 따라 신발을 벗고 올라서자 하원의 어머니는 하원과 나를 이끌어 식사를 준비한 주방으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하원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부모님만 계시다고 했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나는 원망을 담아 하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서용주입니다.”

“음, 일단 앉지. 식사 시간이라 배도 고플 텐데 먹자고.”

하원의 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게 뭐예요. 대체 뭐라고 설명했기에 나를 보는 표정에 당혹스러움과 경악이 섞여 있는 거야.

하원을 바라보자 앉아, 하고 하원이 생긋 웃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하원의 옆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자 대각선에 앉아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저번에 한 번 만났죠?”

“안녕하세요.”

호되게 감기에 걸렸을 때 신세를 진 의사 선생님이었다. 왜 여기 앉아 계세요? 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하원이 형이에요.”

“예?”

“하원이 형. 하원이가 말 안 했었나 봐요?”

“네에.”

그런 말 전혀 듣지 못했는데요. 하원을 힐끔 쳐다보자 그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며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꽃이 참 예쁘네요. 고마워요.”

“죄송합니다. 여기 온다는 얘기를 미리 들었으면 신경 썼을 텐데, 오는 길에 알게 되어서요. 차림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하원이가 얘기 안 하고 그냥 끌고 왔구나? 아무튼 저 녀석이 저렇다니까요.”

“내가 뭘.”

하원의 형은 알 만하다는 듯 하원을 타박했다.

“넌 주변 사람들 생각은 하지도 않고, 너만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끝이잖아. 그게 문제야. 용주 학생도 갑자기 여기 끌려와서 얼마나 당황했을지 생각 좀 해.”

“용주가 괜찮다고 했어.”

“그럼 싫다고 하겠냐?”

쯧쯧, 혀를 차던 남자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식사나 같이하자는 거니까 긴장하지 말아요.”

“네.”

그렇게 말씀하셔도 엄청 긴장이 되거든요. 그래도 나름 안면 있는 사람이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려는 남자의 노력에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요. 뭐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다 잘 먹는다고 하기에.”

“네,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요.”

“그래서 그렇게 몸이 좋은가?”

“용주 축구부예요. 이번에 전국 대회 나간다고 훈련 엄청나게 하고 있어요.”

하원은 마치 제 자랑을 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축구를 하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몸이 좋은가 봐요. 갈비찜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먹어볼래요?”

“맛있어 보이는데요. 잘 먹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하원의 어머니께서 손수 그릇에 갈비찜을 퍼 건네주었다. 아버님부터 드리지. 받는 손이 송구스러워서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당신이 들어야 애들도 들죠. 어서 드세요.”

그릇 가득 갈비찜을 퍼주신 어머님이 아버님께 말씀하시자, 아버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먹자.”

하원만 보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아버님이 참으로 과묵하시네. 굳게 다문 입술이 열리는 것은 어머님의 말씀에 대꾸하실 때와 식사를 하실 때뿐. 조용히 시작된 식사에 나 역시 젓가락을 들었다.

“요즘 몸 아픈 곳은 없고?”

하원처럼 말이 많은 것은 아닐 테지만 불편해하는 나를 생각해서인지 의사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네, 이제는 감기 걸릴 일도 없는걸요.”

“운동하려면 건강해야 하니까 감기 같은 것 걸리면 곤란하죠.”

“네.”

“학생이면 고등학생?”

의사 선생님의 옆으로 두 명의 여자가 앉아있었는데 끝에 앉은 여자가 내게 물었다. 누굴까, 하는 궁금함과는 다르게 대답은 해야 할 듯싶어 나는 네, 하고 답했다.

“몇 학년이야?”

“삼 학년입니다.”

“운동해서 그런지 몸은 정말 좋네. 아니면 요즘 고등학생들이 다들 발육이 좋은 건가.”

“확실히 너희 시대랑은 다르지. 병원 오는 초등학생들만 해도 키가 얼마나 큰데.”

“그러는 오빠는 나보다 더 옛날 사람이거든.”

아무래도 하원의 누나인 모양이었다. 그럼 가운데 앉아있는 여자는 또 다른 누나일까, 의사 선생님의 부인일까. 하원이 나서서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겠건만, 그는 갈비찜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숨을 삼키며 나는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밥을 떠먹었다.

“입에 안 맞아요?”

“아닙니다. 맛있어요. 음식 솜씨가 정말 좋으세요.”

“예의상으로 하는 말이라도 듣기 좋네.”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시며 웃으셨다. 웃는 얼굴이 예뻐서 하원이 어머님을 닮았구나 생각했다.

“용주도 요리 엄청 잘해요. 나 드라마 찍을 때 용주가 닭가슴살로 요리 엄청 해줬어요.”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돼요. 종알거리는 하원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차마 그의 부모님 앞이라서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용주 학생이 요리도 잘하나 보네.”

“엄청 맛있게 잘해요. 석진이 형도 저번에 한번 같이 밥 먹더니 그 뒤로는 만날 용주가 와서 밥해주길 기다린다니까.”

“얘기 들어보니까 훈련하느라 바쁘다며. 너 요리해줄 시간이 어디 있어?”

“요즘은 아니고. 예전에만 가끔…….”

어머님의 타박에 하원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변명을 했다.

“그래도 대단하네. 요리도 할 줄 알고. 우리 애들은 설거지도 못 하거든요. 큰애랑 막내는 사내 녀석이니 그렇다고 쳐도 하진이는 좀 배워야 할 텐데. 저래서 시집을 어떻게 가려나 싶어.”

“엄마도 참. 내가 못하면 잘하는 남자를 만나면 되지. 나 좋다고 하는 남자 중에 집안일 잘하는 남자 하나 없을까 봐.”

“말이나 못 하면.”

“여자가 밥하고 집안일 해야 한다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야. 유교 사상이 어쩌고 하는 건 쓰잘머리 없는 소리고. 그냥 빌어먹을 남성우월주의 때문에 인식이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요. 여자가 무슨 종인가? 남편 밥 차려주고 살림해주려고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기대하고 결혼하는 놈들은 그냥 가정부를 쓰라고 해야 돼. 그게 이치에 맞지.”

누님 성격이 화끈하시다. 말씀도 시원시원하게 잘하시네. 틀린 말은 아닌지라 고개를 끄덕이는데, 흠, 하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밥 먹을 때에는 좀 조용히 하자.”

가만히 듣고 계시던 아버님이 입을 열어 한마디 하셨다. 누님의 말에 대한 반박이나 꾸짖음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식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그에 누님이 꾹 입을 다물었다.

“용주야. 갈비찜 맛없어?”

아버님이 조용히 밥 먹으라고 방금 말씀하셨거든요. 그새를 못 참고 내게 말을 거는 하원을 보며 나는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아뇨, 맛있어요.”

“그렇지? 우리 엄마도 요리 잘하셔. 더 먹어.”

내 그릇을 가져간 하원이 국자로 갈비찜을 산처럼 퍼주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힐끗 주변 눈치를 보다 이쪽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님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괜찮으니까 많이 먹어요. 깨작거리는 것보다는 잘 먹어주는 게 더 좋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많이 먹으라고는 하지만 어디 많이 먹을 상황이어야지. 그럼에도 자꾸 그릇을 가져가 산처럼 갈비찜을 덜어주는 하원 때문에 그릇에 있는 것만 먹고 그만 먹어야지, 그만 먹어야지 생각하는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

“형, 저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해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작게 속삭이자 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저는 잘 먹고 있으니까 형 어서 먹어요.”

“하지만 용주는 많이 먹어야 해.”

이미 많이 먹었어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드세요.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식사를 끝낸 아버님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어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오셨다. 은근히 느껴진다.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아까 누님이 어째서 그렇게 피를 토하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식사 끝나면 차나 한잔씩 하지. 어떠냐.”

어떠냐고 물으셔도 제가 뭐 대답할 군번이나 되나요. 쥐죽은 듯 가만히 앉아있자, 그러시라며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마.”

아버님이 의자를 뒤로 밀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식사를 하던 가족들이 함께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난 나를 아버님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건 저를 부르시는 겁니까? 하원이 형이 아니라 저요?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아버님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여셨다.

“밥 더 먹을 거냐?”

“아뇨, 다 먹었습니다.”

“그럼 같이 나가자. 남 먹는 거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못 할 짓이거든.”

그렇긴 하지만 아버님 따라 나가서 뻘쭘하게 앉아있는 일도 그리 할 만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하원을 바라보자 아직 밥그릇에 밥이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하원에게 뭘 바라는 것은 그른 듯싶었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님께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아버님께로 다가가자, 그런 나를 이끌어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차하고 과일 내올게요.”

“어머님, 제가 할 테니 식사하세요.”

의사 선생님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그의 부인이었던 모양인지, 그녀는 어머님을 다시 자리에 앉게 하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오빠가 좀 해. 왜 만날 이런 건 여자들이 해야 해?”

“그렇게 말을 하는 너부터 좀 해라. 내 와이프가 집안일 하러 나랑 결혼한 줄 알아?”

“그러니까 와이프 시키지 말고 오빠가 하라고.”

다 큰 남매가 아옹다옹 다투고, 하원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갈비찜을 뜯었다. 그런 식당의 모습을 뒤로하고 거실로 나와 아버님이 가리키는 소파에 엉덩이를 내리고 앉았다.

“하원이가 말을 안 하고 데려온 모양이지?”

“네? 아, 네. 전 그냥 밥 먹으러 가는 줄 알고요. 미리 알았다면 신경을 썼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다. 격식 차리는 자리도 아니고 식사하러 오면서 무슨 신경을 더 써.”

아버님은 손을 내저으며 웃으셨다.

“그래, 축구를 한다고?”

“네, 고등학교 축구부예요.”

“전국 대회도 나간다면서?”

“칠월에 대회가 있어서 준비 중입니다.”

“그렇구나. 축구를 잘하는 모양이지?”

“아니에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서.”

“누구나 자기가 해야 할 것은 있는 것이니까. 얘기 들어보니 하원이보다 더 바쁜 모양이더구나. 대회 준비 때문에 그런가?”

“형이랑 어떻게 비교를 하겠어요. 형은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고, 저는 학생인걸요.”

“그래도 앉아서 공부하는 녀석들이랑 운동하는 것과는 또 다르지. 체력적인 면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제가 용주한테 보약 먹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용주가 싫대요.”

밥을 다 먹은 모양인지 거실로 나온 하원이 쪼르르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약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체력 보충을 위해서 가끔 보약 같은 걸 먹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다들 밥만 먹어도 잘 뛰어다녀요.”

“한창 힘이 날 나이니까. 그래도 몸은 미리미리 챙겨야 하는 법이다. 아니면 큰일 나. 하원이 저 녀석도 이번에 드라마 찍으면서 힘들었던지 안사람이 보약 한 제 지어 보낸 모양이더라.”

그 보약을 먹이느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면 아마도 기겁을 하실 겁니다. 난감한 표정을 감추며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축구를 하는 거면 앞으로 쭉 그쪽으로 나가겠구나.”

“네, 아무래도 하던 것을 해야 하니까요. 공만 차다가 갑자기 공부하겠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렇지. 앉아서 책만 보던 녀석이 나가서 공 차고 뛰어놀 수는 있어도 어디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과 같겠나. 축구만 하던 사람이 공부하는 것도 그만큼 힘들겠지.”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치셨다. 꽤 과묵하시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조용히 말을 들어주시고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나가셔서 처음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때마침 과일을 가지고 나온 여자가 소파 테이블 위에 차와 과일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딸기가 싱싱하고 좋아요. 좀 드세요.”

“감사합니다.”

아버님께 하나, 그리고 내게 딸기를 찍은 포크를 내미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포크를 받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잘생겼네. 몸도 좋고. 인기도 엄청 많을 것 같네요.”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하원이 뾰로통한 얼굴로 내 팔을 끌어당겼다.

“형한테 이를 거예요.”

“어머, 도련님.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용주 보고 침 흘리는 거 다 알아요.”

“형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네요.”

“이미 다 들었어.”

식사를 끝낸 모양인지 주방에서 형님과 다른 사람들까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둘러앉아 있으려니 다시 새록새록 부담감이 쌓여갔다. 그것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전국 대회라면 엄청 실력이 좋은가 봐요.”

“용주 축구 엄청 잘해요.”

아뇨, 아직 예선도 치르지 않았는데요.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하원이 앞서 답하며 웃었다. 해맑은 것은 좋지만 제발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형.

진정하라는 의미로 하원의 다리를 티 나지 않게 손으로 토닥거리자 하원이 나 잘했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중에 티브이에서 보게 되는 거 아냐?”

“미리 사인 받아놔야 할지도 몰라요.”

이분들이 점점 왜 이러실까 모르겠다. 농담임을 알지만 그것이 꽤나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앉아있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누님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하나 봐. 얼굴이 발그레해졌네.”

“그러려니 생각해요. 하원이가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데려온다고 해서 다들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네.”

나름 생각해서 말씀해주시는 모양이지만 그 말씀이 더 부담스럽네요. 의사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면서도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차 들어요. 요즘 아이들은 차 별로 안 좋아하나? 주스 가져다줄 걸 그랬나 봐.”

“아니요, 차 좋아해요.”

정말 좋아합니다. 호로록, 차를 마시다 뜨겁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설핏 미간을 찌푸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어머님이 손으로 입을 가린 상태로 작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정말이지 서용주. 추태나 부리고 눈물 나네.

“오늘도 훈련하다가 왔다고?”

“네,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서. 미리 알았더라면 감독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일찍 나오는 거였는데요.”

“아니야, 식사 조금 늦게 하는 게 뭐 어때서. 이런 일로 훈련에 빠지면 안 되지.”

어머님은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 큰애랑은 어떻게 알아요? 아까 보니까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던데.”

“우리 병원 환자였어요.”

“응? 어디 아팠던 건가?”

“아뇨, 감기에 걸렸었는데 형이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서 신세를 졌었습니다.”

“그게 무슨 신세라고.”

의사 선생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운동하려면 건강이 제일 중요할 텐데. 지금은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네, 아주 건강합니다.”

지나치게 건강해서 탈이죠. 내 대꾸에 의사 선생님은 다행이네, 하고 말씀하셨다.

식구들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딱히 말이 많은 것은 아닌데 여러 사람이 한마디씩만 해도 정신이 없다. 누가 묻는 것인지조차 확인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정신 못 차리고 휩쓸려버린 기분이 들었다.

∞ ∞ ∞

“여기가 내 방.”

이 층으로 나를 끌고 온 하원은 그중 가운데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나를 보는 것이 마치 들어가라는 의미 같아서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와아.”

“왜?”

감탄 아닌 감탄에 하원이 나를 보며 물었다.

“굉장히 아기자기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생각 외로 평범하구나 싶어서요.”

“내가 막 인형 같은 거 모아두고 그럴 줄 알았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요.”

커다란 옷장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고 다른 쪽에는 침대가 있었다. 책상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는 모양인지, 책상과 작은 책장에는 책과 함께 화장품 같은 것들이 있었다.

“보통은 브로마이드나 액자 같은 게 있지 않아요?”

“남의 방도 아니고 내 방에 내 브로마이드를 걸어서 뭐해?”

그런가. 볼을 긁적이자 하원이 배실 웃었다.

“부모님이 용주 엄청 마음에 드나 봐.”

그런 말은 마치 인사 온 애인에게 상대 남자나 여자가 안심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 같은데요.

기껏 아는 동생으로 생각하고 계실 테지만, 그래도 좋게 봐주셨다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러한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하원이 내 손을 잡아당겨 침대에 앉히며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용주가 우리 집 와줘서 나 기뻐.”

“생각 못 했던 일이지만 저도 형 집에 오게 되어서 좋았어요.”

“정말? 화난 거 아니지?”

제가 어떻게 형에게 화를 내겠어요. 조금 당황하고 당혹스러웠을 뿐이지, 화난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형이 무슨 잘못을 한다고 해도 별로 화날 것 같지도 않고.

아무튼 나는 왜 이렇게 민하원이라는 남자에게 약한 것일까. 순간적으로 슬퍼졌다.

“이제 하나 남았어.”

“뭐가요?”

“용주가 우리 집에 인사 왔으니까, 이제 내가 용주네 집에 인사 가는 것만 남았잖아.”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일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하원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핀잔을 주자 하원이 칫, 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내가 창피해?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 해!”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거든요? 드라마 대사라고 막 뱉고 있어.”

내 말에 하원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튼 나도 용주네 집에 언제 한번 가볼 거야.”

“그래요. 나도 형 자랑하고 싶어요. 이렇게 멋지고 예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하면 부모님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맞아, 그리고 용주네 누나가 엄청 배 아파할 거야.”

“누나는 왜요?”

갑자기 우리 누나 얘기가 왜 나오는 것일까. 의아한 마음에 하원을 바라보자 턱을 쳐들고 뻐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 동생의 애인이라니!”

“연기하지 말아요.”

“칫.”

내 말에 하원이 토라진 척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좀 걱정이네요.”

“뭐가?”

“누나가 형 보고 반해서 소개시켜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난 용주 애인인데?”

“그렇다고 내 애인입니다, 하고 소개할 수는 없잖아요.”

“안 돼?”

진심으로 묻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며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형은 매장당하고, 저는 죽기 직전까지 맞겠죠. 아마 죽을 때까지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용주와의 연애는 험난하구나.”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우며 하원이 한숨처럼 말했다.

“참, 형.”

“응?”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드렸던 거예요?”

“뭘 말씀드려?”

“저요. 저 데리고 온다고 말씀드렸다면서요. 누구 데려온다고 말했냐고요.”

“용주 데려온다고.”

“그러니까 제가 누구인데 데려온다고 말씀드렸냐고요.”

물어보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도 일이구나 싶어서 한숨이 나왔다.

“내 장미.”

여긴 내 방, 이건 내 침대, 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어조로 말하는 하원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다시 말해봐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하원이 내 장미,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가족들에게 내 장미를 데리고 올게, 라고 말하고 고등학교 삼 학년 축구부원인 서용주를 데리고 온 거란 말이네요. 아아, 앓는 소리를 내며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용주야, 왜 그래?”

하원은 내 쪽을 향하고 누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원의 시선을 피해 침대에 얼굴을 묻자 손을 뻗은 하원이 톡톡 내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뭐 잘못했어?”

“부모님께서 엄청 당황하셨겠어요.”

어쩐지 내가 왔을 때 놀란 얼굴이다 싶었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 쉬어? 내가 잘못한 거야?”

톡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려 하원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은 내 기분을 살피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하원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싱긋 웃으며 내 뺨 위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마. 용주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아.”

따뜻한 온기가 하원의 손바닥에서 전해졌다. 그것을 느끼며 나는 하원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형은…… 종종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요.”

“그래?”

“네, 그럴 때마다 전 엄청 당황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머리도 아픈 것 같고, 식은땀도 뻘뻘 나고 그래요.”

“나 때문에?”

“그럼 저 때문이겠어요?”

하원을 힐끔 흘겨보자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고 풀 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형을 믿게 돼요.”

“믿어?”

“네, 제가 정말 어렵고 곤란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형이 도와줄 것 같고. 딱히 그런 게 아니더라도 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지가 되고 그래요.”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건가?”

“웃지 말아요. 형이 일만 벌이지 않으면 어렵고 곤란한 상황 따위 없을 거라고요.”

손을 뻗어 하원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해보지만 그것이 통할 리 없었다. 볼을 꼬집히면서도 좋다고 배시시 웃는 하원을 보고 있노라니 나 역시도 그냥 웃어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밉지도 않아요.”

“나 안 미워?”

“미웠으면 이렇게 끌려다니지도 않고 휘둘리지도 않겠죠.”

“아냐. 끌려다니는 건 나야. 나 만날 용주한테 끌려다녀.”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야. 용주가 나를 막 길들여. 전화도 내가 걸기 전에는 안 하지. 그러다 가끔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해주면 난 그것만으로도 막 너무 좋아. 게다가 나 드라마 찍을 때는 ‘형 바빠서 자주 못 만나니까 슬퍼요.’ 이랬으면서, 이제는 내가 한가해졌더니 바쁘다고 나 만나주지도 않고. 나 가지고 밀당 하나 봐. 아주 수준급이야.”

“자꾸 허위사실 유포할래요?”

“아이야, 저마이야.”

하원의 볼을 꼬집어 흔들자 웅얼거리면서도 할 말은 끝까지 한다. 아팠던 모양인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 갈 거예요.”

“어딜?”

“학교요.”

“왜!”

내 대답에 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하원의 입을 꾹 막았다.

“아래층까지 다 들리겠어요.”

작게 속삭이듯 말하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막고 있는 내 손을 잡아 내리며 하원이 왜? 하고 다시 물었다.

“형이 막 나를 모함하니까요.”

“아냐, 그럼 취소할래. 민하원이 서용주를 끌고 다녔습니다. 내가 용주 손에 쥐고 막 휘두르고 다녔어.”

“제가 무슨 야구 방망이예요? 휘두르고 다니게?”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자 하원이 다가와 내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그럼 안 갈 거지?”

“그래도 가야 해요.”

“왜?”

젖 떨어진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하원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자고 가자. 응?”

“저 내일 새벽에 훈련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봐야죠. 게다가 형 혼자 사는 곳도 아니고 가족들 다 계신데 여기서 어떻게 자고 가요.”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태워다줄게.”

“잠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새벽에 일어나서 태워다주려고요. 일어날 수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느 정도 믿음이 가야 넘어가줄까 말까 고민이라도 하지, 이건 고민의 여지가 없다. 내 지적에 하원이 아냐,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알람 다섯 개 맞춰둘까? 나 정말 일어날 수 있어. 진짜야. 촬영할 때도 새벽에 일어나서 나가고 했어.”

“그건 매니저님이 닦달을 해서 깨우니까 가능했던 일이잖아요.”

매니저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런 소리에 홀랑 넘어갈까. 내 말에 하원은 내 허리를 껴안고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정말이야. 새벽에 꼭 일어나서 데려다줄게. 나 못 믿어?”

믿고 싶지만 그러한 마음만으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멋쩍은 웃음을 내비치자 하원이 칫, 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만 좀 삐죽거려요. 애도 아니고 만날 삐죽삐죽.”

“하지만 그러면 용주가 넘어와 준단 말이야.”

역시 알고 그랬던 건가. 은근히 지능적이다. 하원의 뺨을 손으로 조물조물 주무르는 수준으로 꼬집자 하원이 배시시 웃었다.

“진짜 얄밉다.”

“이번에도 넘어와 주라, 응? 정말 새벽에 일어나서 태워다줄게.”

“형 가족들한테는 뭐라고 하고요?”

친한 동생도 아니고 장미라고 사내놈인 나를 데려와서 인사시키고 밥까지 먹고. 자고 가겠다고 말하면 얼마나 이상하게 보겠어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원은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칭얼거렸다.

“내가 아까 용주 자고 갈 거라고 말해뒀는걸.”

“뭐예요?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아무튼 제멋대로인 데다 막무가내이기까지 해. 애초에 내가 그냥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심각하게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으니까,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자괴감을 느꼈다.

“이러다 평생 형한테 휘둘리고 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그거 평생 나랑 같이 있을 거라는 얘기잖아. 난 좋아.”

내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하원이 히히, 하고 웃었다. 좋긴 뭐가 좋아요, 난 심란한데. 하원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며 타박해보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새벽에 일어나서 데려다줄 거죠?”

“응.”

“형 안 일어나면 저 여기 어딘지 몰라서 학교 못 가요. 훈련 빠지면 감독 샘한테 엄청 깨지고요.”

“나만 믿어!”

정말 믿고 싶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원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누가 지는 게 이기는 거래? 지는 건 그냥 지는 거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하원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야한 것도 금지예요.”

“왜!”

“형 집이 아니라 가족들도 다 있잖아요. 뽀뽀도 금지예요.”

“용주 너무해.”

“너무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요.”

하원을 가볍게 떨어뜨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안고 있는 것도 금지.”

“다음에는 절대 집에 안 데려올 거야.”

뾰로통한 얼굴로 구시렁거리는 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는 집에 와서 좋다고 했으면서, 스킨십 금지라는 말에 다시는 데려오지 않겠다니. 누가 들으면 엄청 밝히는 사람처럼 말을 한다.

“잠도 형은 침대에서 자요. 난 바닥에서 잘게요.”

“왜? 내 침대 넓은데.”

“둘이 같이 침대에서 자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민망하잖아요.”

“용주 나 잘 때 야한 거 하려고 그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하원의 뺨을 잡아 늘이며 타박했다.

“야한 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잘 건데 뭐 어때?”

그냥 아는 동생으로 소개했다면 이러지 않았겠죠. 장미가 대체 뭐라고 사람을 낯 뜨겁게 만들어서는. 아무튼 형은 침대, 나는 바닥이에요. 하고 못을 박듯 말하자 하원이 싫어,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용주가 침대에서 자.”

“안 돼요. 형이 침대에서 자요. 전 원래 바닥에 이불 깔고 자고, 형은 침대에서 생활하잖아요.”

“그래도 용주가 바닥에서 자면 내가 마음이 편하겠어?”

“안 편해도 어쩔 수 없어요. 가서 저 깔고 잘 이불이나 가져와요.”

이 정도까지 양보해줬으니 형도 양보해야죠. 내 말에 하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있다가 들어온 하원은 요와 이불을 품에 안고 있었다.

“어머니도 침대 넓은데 왜 바닥에서 자냐고 물어보셨어.”

“그걸 또 어머니께 이르고 왔어요?”

아무튼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고 뭘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고 와. 하원의 품에서 요와 이불을 받아 바닥에 깔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갈아입을 옷 줄게.”

옷장을 뒤적여 추리닝 한 벌을 내게 건네며 하원이 눈을 반짝였다.

“왜 눈을 반짝여요?”

“내가 언제? 빨리 갈아입어.”

“욕실은 어디예요?”

“여기서 갈아입어.”

“됐어요.”

그 속을 모를까 봐. 내 타박에 하원이 이 층에 있는 욕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간단히 씻고 하원이 준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을 나오다 이 층으로 올라오던 의사 선생님 부부와 마주쳤다. 어색하게 서 있자 의사 선생님이 나를 보고 웃었다.

“자고 가나 봐요?”

“실례인 것은 아는데…….”

“하원이가 고집부렸죠?”

알 만하다며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훈련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조용히 가려고요. 미리 인사드릴게요.”

“아니, 그것보다 아침에 어떻게 갈 거예요? 여기 근처에 버스 정거장이 있던가?”

“좀 걸어야 해요. 새벽이니까 당신이 태워다 드려요.”

아내의 말에 의사 선생님이 그러면 되겠다며 나를 바라보았다.

“몇 시쯤 나가요?”

“아니에요. 하원 형이 일어나기로 약속했어요.”

“그 녀석 아침잠이 얼마나 많은데 그 녀석 말을 믿어요?”

“그러기로 약속하고 자고 가기로 한 거니까 믿어야죠. 믿어보라며 호언장담을 했으니 못 일어난다면 억지로라도 일으키려고요.”

“그런다고 일어날 녀석이 아닌데.”

의사 선생님은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웃으며 하원의 방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새벽에 혼자 일어나면 그게 기적인데. 또 모르겠다. 용주 학생 말은 잘 들으니까 일어날지도.”

“그러게요. 아까 도련님이 갈비찜 먹으라고 손수 퍼주는 것도 봤잖아요. 새벽에 일어나서 다들 기함을 하게 만들지도 몰라요. 일찍 일어나서 구경해야지.”

구경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어째서 민하원은 가족에게 이렇게 불신을 안겨주고 있나 모르겠다.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자 의사 선생님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몇 시에 나갈 예정이에요?”

“여섯 시쯤 조용히 나가려고요.”

“하원이 녀석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가 태워다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형 안 일어나면 그냥 버스 타든지 아니면 지하철 찾아보고요. 안 되면 택시라도 타죠. 저 때문에 일찍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항상 일찍 일어나시기 때문에 늦잠 자려고 해도 잘 수가 없어요. 늦잠 자는 건 저 녀석뿐이라니까. 막내라서 어리광만 심하고. 그죠?”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하게 웃던 의사 선생님은 문을 열고 나오는 하원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새 쪼르르 달려 나오냐?”

“왜 나 빼고 용주랑 얘기해?”

“용주가 네 거야?”

“내 거야.”

“용주가 왜 네 거야?”

“그럼 형 거야?”

“그거 꽤 위험한 발언이에요, 도련님. 엄연히 제가 옆에 있는데.”

유치한 말다툼을 하는 형제들 사이로 의사 선생님의 부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누구 유치하다고 말할 게 아니라니까요. 그렇죠?”

그녀는 내게 눈을 찡긋거리고는 의사 선생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만 쉬시라고 하고 우리도 들어가요. 내일 새벽에 나가서 훈련할 사람 붙잡고 있으면 잠은 언제 자요?”

“그러게. 하원이 너도 짹짹거리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용주 푹 자게 해. 아무튼 은근히 시끄러워.”

“내가 뭐 참새야? 짹짹거리게.”

“아니면 뭐, 삐약삐약?”

“병아리도 아니야!”

팩 토라진 음성으로 말하며 하원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형이랑 놀지 마.”

하원에게 방으로 끌려 들어오는 바람에 주무시라고 인사도 하지 못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

가족들끼리 있어서 그런지 하원의 투정이 더 심해진 듯 보였지만 그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의사 선생님도 그렇고 가족들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옷 여기 걸어둬.”

하원이 건네주는 옷걸이에 셔츠와 청바지를 걸어 옷장 문고리에 걸어두고 나는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잘 거야?”

“열한 시잖아요. 이제 자야죠.”

내 눈치를 살금살금 보던 하원이 베개를 들고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이거 용주 베개.”

“나머지 한 개는요?”

“이건 내 베개.”

그런데 왜 그 베개까지 들고 내려오는데요? 슬그머니 내 옆자리로 와서 눕는 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빨리 침대로 가요.”

“용주야. 여기 누워봐.”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앉아있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하원이 말했다.

“내 방 창문 넓어서 하늘이 잘 보여.”

하원의 말처럼 유난히 하원의 방에 있는 창은 컸다. 어린아이라도 있었으면 엄청 위험해 보일 정도로, 위아래 옆으로도 큰 사이즈의 창문 덕에 누워도 밤하늘이 잘 보였다.

“나 고등학교 때는 여기 누워서 종종 잤어.”

“이렇게 이불 깔고요?”

“응. 하늘도 잘 보이고 별도 잘 보이고.”

하원의 옆에 배를 깔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부러 공사해서 창 넓힌 거야.”

그런 수고까지 해가면서 밤하늘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시선을 돌려 하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별이 좋아요?”

“어린 왕자는 자기 별을 가지고 있어. 그 소행성 이름이 B-612래.”

소행성 B-612.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은, 어린 왕자가 살았던 소행성. 지금도 아마 장미와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한 어린 왕자의 작은 별. 하원은 그 별을 말하고 있었다.

“B-612를 떠난 어린 왕자가 여행을 하면서 옆에 있는 별들도 가거든. 왕이 살고 있는 별에도 가보고, 허풍쟁이가 살고 있는 별에도 가고, 술주정뱅이가 살고 있는 별에도 가고, 계산만 하는 사업가가 사는 별에도 가. 하루 종일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있는 곳도 가게 돼. 하늘을 보면서 저 별은 유난히 크고 밝으니까 왕이 살고 있는 별일 거야. 저 별은 유난히 반짝거리니까 분명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사는 별이겠지, 하고 생각했었어.”

“형은 참…….”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기를 보냈나 보네요. 뒷말을 삼키며 나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때는 진짜 어린 왕자가 부러웠어.”

“아직도 부러워요?”

하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묻자 하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부러워. 용주가 있으니까 어린 왕자도 안 부러워.”

그렇게 말하는 하원의 표정이 자못 뿌듯하여 괜스레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때는 부러웠거든. 가족들도 다 알고 있었어. 그래서 부모님이 내 방 창문 공사해주신 거야.”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청소년기의 아들을 위해 창문 공사를 해주셨던 부모님도 꽤나 걱정이셨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 싶은 마음과 여기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반쯤 포기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하원을 믿는 마음이 더 컸을 수도 있고.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여기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잘 때가 더 많았어. 그래서 겨울에는 어머니가 전기장판도 깔아주셨었어.”

그 어머니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형이랑 누나는 이러다 내가 우주비행사 같은 직업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랬었는데, 부모님은 정신 이상해진 거 아니냐며 걱정하셨대.”

“그렇게 말씀하셨었어요?”

“그때는 아니고 나중에.”

하원은 멋쩍은 듯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내 손을 잡아 쥐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겹쳐지며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슬슬 더워지는 날씨였지만 그 온기가 나쁘지 않아 나는 겹쳐진 하원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때는 외로웠어. 그래서 별을 보면 어린 왕자가 또 부러웠고.”

“가족이 있잖아요. 이렇게 창문 공사까지 해주시는 부모님도 계신걸요.”

“가족이랑은 달라. 대신해줄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

하원은 내 말에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가족들도 소중하고 용주도 소중하지만, 같은 의미를 주지는 않잖아. 그래서 난 요즘 정말 기쁘고 행복해.”

그렇게 고해성사하듯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원이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할 때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그럼에도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을 돌리거나 웃음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나도 형을 만나서 정말 좋아요.”

“우주비행사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우주비행사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죠?”

내 물음에 하원은 음, 하고 대답을 고민했다.

“지금 다시 공부해서 우주비행사가 되기는 어려우니까 엄청 유명한 연예인이 되어서 연예인 특혜로 우주선에 타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은 있어.”

정말이지 민하원다운 생각이다. 내가 팔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참고 있노라니 하원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왜 그래? 나 이제 우주비행사 안 할 거야. 용주 있으니까 별 이제 안 봐.”

얼굴을 묻고 있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하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 말했다. 그것에 더 웃음이 나와서 나는 어깨를 떨며 웃음을 삼켰다.

“이제 우주 비행 같은 거 안 하고 싶어요?”

“응.”

“어린 왕자도 안 부럽고요?”

“응.”

“다행이네요. 형이 나 두고 우주로 나간다고 하면 엄청 슬플 것 같아요.”

“이제 안 그래.”

하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장미가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다른 곳은 안 가. 어린 왕자가 지구로 오고 남겨진 장미는 무척 슬펐을 거야. 난 용주 두고 어디 안 갈 거야.”

“맞아요. 형이 가버리면 전 엄청 슬플 거예요.”

남이 듣는다면 닭살이라고 치를 떨 것이 분명한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지에 오른 내가 신기했다.

하원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하고 있으면 그 대화가 일곱 살짜리들의 유치한 대화 같을지라도 나 역시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진심이기도 하니까. 형이 없으면 정말 슬플 것 같거든요.

“그럼 형의 B-612는 여기네요.”

“내 B-612?”

“형이 어릴 때부터 쭉 살아온 곳이잖아요. 형이 자란 곳. 형의 별이요.”

하원은 놀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어.”

“형의 B-612에 오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맞아. 내 B-612야.”

하원은 사르르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장미까지 있는 내 소행성이야.”

너무 늦게 오긴 했지만.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마냥 좋은지 하원은 배시시 웃었다.

“용주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도 형을 만나게 된 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자장면 먹다 걸려서 석진이한테 엄청 혼났지만, 그래도 좋아. 앞으로 열 번, 백 번 더 혼날 수 있어.”

“그렇다고 막 혼날 짓 하면 안 돼요.”

내 말에 하원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용주는 오랫동안 나랑 같이 있어줘야 해.”

형 옆에 있을 거예요. 어차피 형 옆이 아니면 전 장미가 아닌 그냥 서용주일 뿐이거든요. 그러한 생각과 함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딱히 여기가 아니라도 좋아.”

하원은 내 손을 잡아 입을 맞추며 배시시 웃었다.

“용주가 있는 곳이 내 소행성 B-612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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