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질투는 남자의 힘
간단히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우우우웅, 하고 울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금방 만날 텐데 왜 전화야.”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다 액정 위에 뜬 발신 번호가 생각했던 사람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잠시 고민했다. 어서 받지 않고 뭐 하냐는 듯 휴대폰은 끈질기게 울어댔다.
“여보세요.”
받기 싫은데.
전화를 걸다 지쳐 끊어지기를 바라기엔 전화를 건 상대가 꽤나 끈질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두 번 해서 받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하고 있나 보다 생각하고 포기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분명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고, 통화가 되면 파르르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냥 포기하고 전화를 받는 게 더 속 편하지.
―동생아, 어디야?
모처럼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봄바람이 부니 누나의 기분도 봄 날씨처럼 살랑살랑 간드러지나 보다.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티 내지 않고 학교, 하고 답해주었다.
―수업은 언제 끝나?
“이미 다 끝났어.”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모르는 척하기는. 내 대꾸에 누나는 까르르 웃고는 아이참,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집에 가려고 하는 중?
“아니, 이번 주는 집에 안 가려고 했는데.”
―그럼 숙소야?
“응.”
숙소에서도 곧 나갈 테지만 누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주는 하원의 집에서 하루 자고 오기로 미리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학교에는 집에 간다고 말해둔 상태였고, 집에는 숙소에 있는 것으로 말해두었다.
―그럼 집에 가게 준비해.
“나 이번 주는 집에 안 갈 거라고 방금 말했는데.”
―우리 모처럼 고기 구워 먹자. 그리고 집에 가기 전에 나랑 들를 곳 있으니까 준비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번 주는 집에 안 가고 숙소에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거든.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누나는 또 까르르 웃고는 좀 이따 봐, 하고 말했다.
“누나, 내 말 안 듣고 있지?”
―나 지금 너희 학교 가고 있어. 좀 늦게 끝날 줄 알고 먼저 가서 짠, 하고 놀래주려고 했는데. 십 분이면 도착할 것 같으니까 짐 챙겨서 교문으로 나와.
역시 내 말은 안 듣고 있는 거구나.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십 분 뒤에 도착한다는 누나의 말이 떠올라 급하게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 진짜. 도움이 안 돼.”
저번 주부터 하원과 미리 약속을 해둔 터라 오늘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사물함 한쪽에 넣어두었던 빨랫감을 꺼내 가방에 쑤셔 넣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못 간다고 말하고 저녁에 상황 봐서 숙소 간다고 하고 나오거나 아니면 친구네 간다고 하고 나오는 수밖에.
빨랫감으로 빵빵하게 찬 가방을 둘러메고 휴대폰에 저장된 하원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어 번 신호가 가기도 전에 여보세요, 하고 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저예요.”
―용주야. 어디야? 학교 끝났어?
“네, 학교 끝나기는 했는데…… 저 못 갈 것 같아요.”
―응?
딴짓을 하다가 듣지 못한 것인지, 들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하원이 조금 맹한 목소리로 응? 하고 되물었다.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집?
“네, 미안해요.”
숙소를 빠져나와 운동장을 빙 둘러 걸어가며 나는 하원에게 사과했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교문 근처에서 치마를 살랑거리며 서 있는 누나가 보였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거야.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형, 진짜 미안해요. 저녁때 갈 수 있으면 갈게요. 나중에 다시 연락해요.”
―용주야!
“서용주, 너 빨리 안 뛰어올래?”
나를 발견한 누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휴, 남의 학교까지 와서 큰 소리 내는 것은 제발 참아줘. 하원에게 미안해요, 라고 말하며 급하게 통화를 끝냈다.
뛰는 척이라도 좀 해야겠다. 몇 미터를 남겨두고 누나의 앞으로 달려가니 큰소리를 친 것과는 다르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인지 생긋 웃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누나가 빨리 온 것이겠지. 그러한 불만을 담아 나는 미안, 하고 말했다.
“무슨 용건인데?”
“일단 가자. 가면서 말해줄게.”
누나는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에 자꾸만 꺼려지는 마음이 커져 누나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며 누나는 활짝 웃었다.
“날씨 정말 좋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웃고 있는 누나를 보며 왠지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슬쩍 누나를 내려다보며 갑자기 왜 이러나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알 수가 없네.”
“뭐가?”
중얼거리는 소릴 들은 모양인지 누나가 응?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름 귀여운 표정인가 본데, 누나랑 엎치락뒤치락 십구 년째 같이 살고 있는 내게 통할 리가 없음을 알아줬으면 싶었다.
“뭐 먹고 싶어?”
“그냥 빨리 볼일 보고 집에 들어가자. 밥은 집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
“아휴, 야. 넌 누나가 밥 사주겠다는데 그게 뭐야? 어서 먹고 싶은 거 말해.”
“언제는 집에서 고기 구워 먹자며.”
“저녁은 저녁이고. 일단 지금 먹을 걸 말해보라고.”
집에 가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 뭘 먹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괜찮다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음식에 약이라도 타려고 그러는 거 아냐?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이러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누나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자신이 좋을 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너 삼겹살 좋아하지? 저녁에 아버지 들어오시면 삼겹살 파티하자. 지금은 고기 말고 다른 거 먹는 게 좋겠지? 햄버거는 좀 그렇고 피자 먹을까?”
뭘 먹자고 한들 결국 결정하는 것은 누나니까. 나는 누나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의 브랜드 피자 가게로 나를 끌고 간 누나는 이 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먹고 싶은 거 골라.”
“누나가 골라.”
나는 누나의 앞으로 메뉴판을 밀었지만 누나는 눈을 흘기며 빨리 골라, 하고 말할 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배려에 왠지 모를 두려움이 조금씩 커져갔다.
“그럼 이거 핫 앤 스위트로…….”
“그거 먹어봤는데 별로 맛없더라.”
“그럼 쉬림프…….”
“해산물 들어가는 건 비려서 싫은데.”
그럼 자기가 시키든가. 메뉴판에서 고개를 들어 누나를 빤히 바라보자 왜 그렇게 봐? 하는 얼굴로 눈썹을 깜빡거린다. 오늘따라 무섭기도 하고 한 대 때리고 싶기도 하고 그러네.
“아무래도 누나가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다 잘 먹으니까.”
“그럴까, 그럼?”
내 말에 누나는 사르르 웃으며 서빙하는 직원을 불러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음료가 먼저 나오고 피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대체 누나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자리를 마련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용주야.”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누나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응?”
소파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생각에 빠진 나를 누나가 조용히 불렀다.
“운동하느라 힘들지?”
“갑자기 왜 이래?”
생글 웃으며 묻는 얼굴이 무서워 나도 모르게 정색을 했다. 내 반응이 기대한 것과 다른지 누나가 슬쩍 눈썹을 추켜세우며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넌 누나가 걱정돼서 물어보는데 그렇게 말하냐.”
“그냥 평소에 하던 것처럼 해. 갑자기 그러니까 오히려 내가 누나를 걱정해야 할 것 같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누나가 깔깔 웃었다. 한참 동안 웃던 누나가 옆에 내려둔 가방을 뒤적거려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뭐야?”
“과외비 받았거든.”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아서 하얀 봉투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묻자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번에 누나 장학금 받았어.”
“아…… 축하해.”
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걸 지나가듯 들은 듯도 한데 받았구나. 조금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누나를 바라보자, 쑥스러운 듯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슬쩍 시선을 돌린다.
“그래서 등록금 하려고 모아두었던 건 학기 등록할 때 엄마 드렸어.”
“그런데 이건?”
뭐 어쩌라고 나한테 내미는 것일까. 기대하는 마음보다 조금 찝찝한 마음에 슬쩍 누나 쪽으로 봉투를 밀자, 누나가 내 손등 위로 손을 올려 토닥토닥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너 먹고 싶은 것도 많을 거고 사고 싶은 것도 있을 텐데, 엄마가 용돈 많이 못 챙겨준 거 내 탓이 커. 나 항상 너한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갑자기 왜 그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일찍 죽는다던데. 무섭다, 정말 무섭다. 내 시선에 누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토닥거리던 내 손을 잡아 꽉 힘을 주었다.
“누나가 용돈을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지. 쪼그만 게 누나 말에 토 달기나 하고. 그냥 받을래, 한 대 맞고 받을래?”
받으라니까 받기야 하겠지만. 슬그머니 하얀 봉투를 집어 가방 안으로 쑤셔 넣었다.
“혹시 모르니까 다음 학기 등록금 대비하지.”
“누가 뭐 매달 용돈 주겠대? 이번만이야. 꿈도 야무져.”
누나는 흥, 콧방귀를 뀌고선 콜라를 쪽쪽 빨아 마셨다.
“나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장학금을 탈 거야.”
“그게 뭐 사람 마음대로 되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테이블 아래에서 뾰족한 구두 앞코가 날아왔다. 아무래도 주변 시선이 있으니 주먹을 휘두르는 짓은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넌 어쩜 얄미운 소리만 하냐?”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지.”
“네가 걱정 안 해줘도 난 잘해. 네가 걱정이야, 네가.”
우아한 백조의 수면 아래 애처로운 물장구질처럼, 테이블 아래에서 날아오는 구두를 피해 몸을 뒤로 물리자 누나가 샐쭉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됐어. 아무튼 말도 예쁘게 못 하고 정말. 피자나 먹어.”
그렇게 말하는 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약간의 부끄러움과 머쓱함이었다. 그래도 누나가 나를 생각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누나는 가족들을 생각하는 만큼 표현하는 것은 서투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제게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에 새삼 그것을 표현하기가 어색하고 부끄러운 것인지도.
“피자 먹고 너 티셔츠 하나 사러 가자.”
“웬 티셔츠?”
“넌 운동하니까 땀도 많이 흘릴 거 아냐. 땀 냄새 나는 티셔츠 입고 있을래?”
대체 누가 땀 냄새 나는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거야.
“땀 흘려서 냄새나기 전에 갈아입거든.”
“티셔츠도 몇 장 없으면서.”
갈아입을 만큼은 있는데. 오늘따라 호의가 과하다. 작게 구시렁거리자 누나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직원이 가져다준 피자를 내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조용히 하고 피자나 먹어. 넌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누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는 해도 거기에 맞춰 좋은 소리 못 해주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누나나 나나 참으로 닮은꼴 남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입을 다물고 누나의 말처럼 애꿎은 피자만 꾹꾹 씹어댔다. 그래도 피자는 참 맛있네. 작은 사이즈를 시켜 누나가 세 조각을 먹고 나머지는 모조리 내 배로 들어갔다.
배부르게 먹고 피자 가게를 나온 누나는 나를 끌고 유명 스포츠 브랜드 가게로 들어갔다. 거기서 한 장에 십만 원을 호가하는 티셔츠 두 장을 거리낌 없이 내 품에 안겨주는 누나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나는 또다시 누나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 ∞ ∞
누나가 갑작스럽게 학교로 찾아온 탓에 하원을 만나지 못하고 주말을 넘겨버렸다.
그날 저녁에라도 가려고 했지만 고기 파티가 훈훈한 가족 파티로 이어졌고, 그다음 날까지 묘하게 가족끼리의 끈끈한 분위기가 이어져서 차마 그 공기를 헤치며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삐친 건가.”
조용한 휴대폰을 바라보다 들고 온 비닐봉지와 함께 주방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뒤로 일주일 동안 연락도 없고, 전화를 해도 풀 죽은 목소리로 응, 응, 몇 마디 대꾸하는 것이 전부였던 통화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삐친 거겠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의자에 주저앉아 손끝으로 휴대폰을 툭툭 건드렸다.
집에 없는 것으로 보아 촬영하고 있으려나. 이번 주에 갈까요? 하고 물어도 시큰둥하게 너 알아서 해, 라고 대답했던 것을 떠올리면 삐쳐도 심각하게 삐친 거다. 정말 애도 아니고. 휴대폰을 들어 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도 안 받으려는 건가.”
이런 적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원인 제공을 한 것이 나이기에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두어 번 더 통화를 시도하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초의 통화 연결음 뒤에 윤석진이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용주예요.”
―응, 그래. 오랜만이네.
“하원이 형 혹시 촬영 중이에요?”
내 물음에 윤석진은 잠시 웃더니 아니, 하고 답했다.
―너 하원이랑 싸웠냐?
“아뇨, 제가 형이랑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이 녀석이 촬영할 때는 빨리 끝내달라고 징징거리더니 촬영 끝나고 나니까 집에 가기 싫다고 또 징징거리잖아. 하원이 집에 와 있는 거야?
그랬단 말이지. 윤석진에게 전해 듣는 것만으로 하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어서 나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네, 촬영 끝났으면 집으로 오라고 하원이 형한테 말 좀 전해주세요. 엄청 삐쳤는지 전화도 안 받아요.”
―그러게, 아무튼 민하원 유치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윤석진의 말에 내가 뭘, 하고 불퉁한 하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럼 지금 뭐 하시는데요?”
―배고프다고 징징거려서 밥 사 먹이려고 했더니 이건 싫다, 저것도 싫다 이러면서 근 삼십 분 넘게 진상을 부리고 있어. 얘 대체 뭐야?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나 역시도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귀여운 생명체가 아닐까.
그나저나 내가 올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집에 오기 싫다는 건 내가 보기 싫다는 건가.
나도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이대로 가버리면 하원이 더 삐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비빔국수 할 건데 하원이 형이랑 오세요.”
―이야, 비빔국수. 맛있겠다.
“달래 비빔국수예요. 봄나물이 싱싱하더라고요.”
―말만 들어도 군침 돈다. 나 먹을 건 없냐?
“넉넉하게 할 테니까 어서 오세요.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휴대폰 너머로 하원이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희미해서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손으로 감싸 쥔 상태로 윤석진이 하원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윤석진이 용주야, 하고 나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하원이 끌고 갈 테니까 넉넉하게 해둬. 배고프다.
촬영이 벌써 끝났다는 것은 아침부터 했다는 얘기가 된다. 한창 배고플 시간이지. 윤석진의 말에 나는 앞에 그들이 있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글쎄, 차 안 막히면 한 삼십 분 걸리려나.
“그럼 지금부터 준비할 테니까 얼른 오세요. 늦게 오시면 면 불어요.”
―그래, 지금 간다.
매니저에게 전화하길 잘했네. 통화를 끝내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 주에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한 내 잘못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하원이 마음 상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점심은 먹이고 얘기를 나눠봐야 할 듯싶어 올 때 사 온 달래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양푼에 물을 받아 달래를 넣고 달래 뿌리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냈다.
양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만 것을 커다란 손으로 까려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지만, 곧 도착할 하원이 먹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 써서 씻고 벗기게 되었다.
손질한 달래를 깨끗하게 씻어 한쪽에 두고 오이와 양파, 상추 조금 사 온 것도 함께 씻어두었다. 고추장과 물엿, 고춧가루, 마늘 다진 것을 적당량 그릇에 넣고 홍초를 넣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적당히 달고 새콤해 맛이 괜찮았다. 달래랑 같이 버무리면 향긋하니 맛이 좋을 것 같았다.
냄비에 물을 담아 끓이다가 국수를 넣었다. 국수가 삶아지는 시간 동안 씻어두었던 달래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채 썬 양파와 적당한 크기로 자른 상추를 양푼에 넣고 양념장을 절반 정도 넣어 버무려두었다. 중간중간 넘치지 않도록 찬물을 부어가며 국수 면을 삶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상하게 면은 깨끗하게 씻지 않으면 닭똥 냄새가 난단 말이야. 흐르는 물에 벅벅 서너 번 씻어낸 면을 양념장에 버무려둔 야채가 담긴 양푼에 넣고 나머지 양념장과 함께 손으로 조물조물 버무렸다.
“이야, 맛있는 냄새.”
시간 맞춰 도착한 윤석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힐끗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하원이 뾰로통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무튼 삐친 것도 귀여운 걸 보면 내 눈에도 콩깍지가 단단히 씐 모양이었다. 웃음을 참으며 윤석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셨네요. 손 씻고 앉으세요.”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주방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찼다. 입맛을 다시며 욕실로 들어가는 윤석진을 보다가 하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배고프죠? 형도 손 씻고 나와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답은 없다. 무언의 시위를 참고 인내하며 나는 예쁜 접시에 국수를 나누어 담았다.
오이를 채 썰어 그 위에 올리고 미리 삶아둔 달걀을 반으로 잘라 오이 위에 올렸다. 통깨를 조금 뿌리자 모양은 그럴싸한 비빔국수가 완성되었다.
“이야, 진짜 맛있겠다.”
손을 씻고 나온 윤석진이 식탁 앞에 앉으며 군침을 흘렸다. 모양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맛은 어떨지 모르겠네.
양념장만 조금 맛본 것이 전부라서 맛이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먹어보는 건데.
“먹어보질 않아서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냐, 진짜 맛있어 보인다. 민하원, 빨리 안 오면 네 것까지 먹어버린다.”
욕실에 들어가 조용한 하원을 윤석진이 큰 소리로 불렀다. 욕실 안에서 윤석진을 향해 불평하는 하원의 목소리가 들려 작게 웃으며 테이블 위로 국수를 담은 접시를 올려놓았다.
젓가락을 꺼내주며 냉장고에서 찾은 열무김치도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열무김치가 엄청 시원해요. 열무김치로 국수 해 먹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거 하원이네 집에서 가져온 거야. 걔네 어머니가 김치랑 밑반찬 가끔 해다 주시거든. 근데 하원이 녀석이 애들 입맛이라 김치 같은 건 잘 안 먹어서 거의 내가 가져가서 먹지.”
애들 입맛. 아니라고 하기엔 하원의 입맛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느릿느릿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하원을 바라보고 있자 윤석진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후루룩 국수를 입에 넣었다.
“와,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 진짜 맛있다.”
“먹을 만하세요?”
“응, 달래가 들어가서 그런지 향긋하고 좋아. 너도 앉아서 좀 먹지?”
“네, 그러려고요.”
물을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하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움찔, 몸을 굳히는 하원을 보며 이건 뭐 내가 치한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몸을 사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민하원, 배고프다고 계속 징징거렸으면서 왜 안 먹어? 먹기 싫어? 먹기 싫으면 가서 씻고 자.”
“먹어. 먹을 거야!”
윤석진의 말에 입술을 삐죽거린 하원이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 역시 젓가락을 들었다.
∞ ∞ ∞
“진짜 맛있게 먹었다. 간만에 입이 호강했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용주 요리 진짜 잘하는구나.”
“아니에요, 그냥 보고 따라 하는 건데요.”
“그냥 하는 수준이 아닌데? 음식 간 맞추는 건 타고나야 하는 거거든. 하원이만 먹이지 말고 나도 종종 먹여주라.”
윤석진의 극찬에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으며 웃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왜 저래?”
국수만 먹고 거실로 쪼르르 가서 의미 없이 티브이 채널만 돌리고 앉아있는 하원을 슬쩍 바라보며 윤석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좀…… 잘못을 했어요.”
“네가 잘못할 게 뭐 있어? 보나 마나 저 녀석이 그냥 삐친 거구만.”
이렇게까지 삐칠 일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기에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너 놀러 오는 주말마다 신나서 방방 뛰던 녀석이 저렇게 대놓고 삐친 척을 하고 있으니까 웃기지도 않는다. 아까 촬영할 때도 그렇고 촬영 끝나서도 너 오는 거 뻔히 알았던 모양인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주제에 고집은 있어가지고 전화도 안 받고. 아무튼 저건 애야, 애.”
애긴 애지. 덩치만 커다란 애기. 자기 얘기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원은 리모컨 버튼만 쿡쿡 누르며 티브이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무튼 잘 얻어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던 윤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먹고 난 그릇을 싱크대에 넣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나 갈 테니까 화해해라.”
“싸운 게 아니라 형이 화난 거라서 화해라는 말은 좀 그러네요.”
“아무튼 저 녀석 좀 잘 달래놔. 일주일 동안 저거 뾰로통해 있어서 나도 슬슬 짜증나던 차였거든. 저거 단순해서 조금만 얼러주면 금방 또 풀리니까.”
윤석진은 하원을 슬쩍 바라보며 내 귓가에 수군거렸다.
“가시게요?”
“응, 너 있으니까 난 마음 놓고 가서 쉴란다. 매일 촬영이라서 나도 힘들어. 저 녀석 투정 받아주는 것도 힘들고.”
“드라마 연장되었다면서요.”
“응, 두어 달 더 고생해야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윤석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간다. 민하원, 나 간다고!”
주방에서 나가며 윤석진이 하원을 향해 소리를 쳤다. 고집스럽게 티브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하원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아휴, 아무튼 애기야. 용주 잘 놀다 가라.”
“네, 다음에 봬요.”
내 배웅을 뒤로하며 윤석진이 문을 열고 나갔다. 철컥 닫히는 소리 뒤에 엘리베이터 소리가 났다. 그가 내려갔음을 확인하고 나는 거실에 앉아있는 하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은 분명한데 대꾸하기 싫다는 듯 하원은 티브이 화면만 보고 있었다. 이건 정말 화났다고 시위하는 건가.
티브이만 보면 졸린다던 사람이 이러고 있으면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삐친 것을 다 알겠다. 나는 웃으며 하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해요?”
내 물음에 금방이라도 대답할 것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더니 또 입을 꾹 다문다. 그런 하원을 바라보다 소파 한쪽에 놓여있는 잡지를 들어 뒤적거렸다.
“어, 여기 형 나왔어요. 인터뷰했었나 봐요.”
마치 보란 듯 접혀진 페이지에는 하원이 찍고 있는 드라마 소개와 배우들의 짧은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내가 잡지를 뒤적이다 관심을 표하자 하원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건데. 억지로 말하라고 해도 지금 상태로는 말하지 않을 게 뻔해 나는 잡지에 실린 인터뷰로 시선을 돌렸다.
Q : 연상의 여인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A : 다은이 누나는 친절해요. 인생 선배이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훌륭한 선배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그래서 부담 갖지 않고 더욱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자기 배역을 잘 소화해내는 것도 능력이지만, 상대 배우를 잘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저는 더욱 다은이 누나를 존경해요. 물론 (극 중) 아버지, 어머니도 저를 잘 이끌어주시고요.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분들과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의 울타리는 제게 아주 소중한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Q : 질문을 교묘하게 피해 가시네요. (하하) 그럼 실제로 연상의 여인은 어떠세요? 민하원 씨의 이상형은 연상의 포근한 타입인가요, 아니면 연하의 상큼 발랄한 타입인가요? 민하원 씨 여성 팬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답을 잘 해주셔야 할 것 같네요.
A : 짓궂은 질문을 하시네요. (매니저 형, 기자님이 나 안티 만들려고 그러나 봐.) 사실 사람을 사귀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막내로 자라서 그런지 응석도 심하고 약간 아이 같은 면이 많다고 주변 분들이 말씀하시거든요. 솔직히 저 역시도 누군가를 챙겨주기보다는 챙겨 받는 것에 익숙하고요.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고받는 것을 떠나서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행동하게 되지 않나요. 그런 면에서 보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좋아한다면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도 챙겨줄 수 있는 거고, 또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한없이 기댈 수 있는 거고요.
Q : 어라, 지금 발언 엄청 위험했던 거 알아요? 여기서 잘만 파면 스캔들 기사 하나 나오겠어요. 혹시 그런 여성분이 계시는 것 아니에요?
A : 아니에요. 제가 누나한테 어렸을 때부터 하도 구박을 받고 자라다 보니 아직까지도 여자는 누나처럼 무섭게 느껴지거든요. 언젠가 무섭지 않은 여성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지금은 다른 누구보다도 제 장미가 가장 예쁘고 소중해요.
Q : 하원 씨가 꽃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또 처음 듣네요. 저 지금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꽃미남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어요. 민하원 씨에게 언젠가 장미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성분이 나타나기를 기대할게요.
기자의 말에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배우 민하원은 확실히 꽃보다 아름다운 남자이다. 아름다운 남자의 곁에 자리할, 장미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나기를 나 이윤미 기자는 간절히 소망해본다.
배우 민하원과의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