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Le Petit Prince) (13/17)

Le Petit Prince

1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 같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앉아있던 하원이 옆에 앉은 석진에게 말했다.

“뭘?”

“플래카드나 현수막을 만들어 왔어야 했다고. 서용주 파이팅! 이런 거.”

“그거 엄청난 민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있던 석진은 내리쬐는 햇볕이 눈 부신지 손으로 챙을 만들어 이마에 붙이고는 연신 인상을 써댔다. 그런 윤석진을 흘겨보며 하원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야 용주가 힘이 나지.”

“민하원, 너 용주한테 말 안 하고 왔다며.”

“응.”

“그런데 대문짝만한 플래카드를 들고 서용주 파이팅! 하고 외치면 곤란하지 않겠냐?”

“그런가?”

“용주도 힘이 나기보다는 엄청 쪽팔릴 것 같은데.”

쪽팔리다니? 용주는 절대 그렇지 않아. 하원이 눈에 힘을 주고 윤석진을 노려보았다.

자기가 귀찮으니까 이러는 것이 분명하다. 혹시라도 자기한테 만들어달라고 할까 봐. 설마 용주 응원 카드를 윤석진의 손에 맡기겠는가.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 자신 있었는데. 역시나 플래카드를 만들어 왔어야 했다며 하원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나저나 시작은 열한 시 반이라는데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평소에는 게으름이라면 최고인 녀석이 쓸데없는 일에 꼭 부지런을 떨어요.”

“쓸데없는 일 아니야. 용주가 나오는 전국 대회라고, 전국 대회. 그것도 대통령금배 전국 대회!”

“결승전도 아니고, 하다못해 준결승도 아니잖아.”

“준준준결승이야!”

“그런 건 보통 16강전이라고 하지.”

계속해서 시비를 거는 윤석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하원은 빽 소리를 질렀다. 그에 드물게 관중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어 석진은 하원의 입을 손으로 꾹 눌러 막았다.

“시끄러워. 괜히 시선 모으지 말고 모자나 잘 쓰고 있어.”

아침부터 따라와서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구시렁거리는 하원의 뒤통수를 석진이 아프지 않게 철썩 때렸다.

“왜 때려!”

“아침부터 귀찮게 한 사람이 누군데?”

“누가 따라오랬나?”

“네가 얼마나 못 미더우면 내가 쉬는 것도 마다하고 이 아침부터 여길 쫓아오겠냐. 제발 내 생각도 좀 해줘라.”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건 고용인이야. 피고용인은 고용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고용인은 피고용인의 작업 환경에 신경 써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며 석진은 하원의 머리를 손으로 꽉 잡아 눌렀다. 머리가 지끈 울릴 정도의 강도에 하원이 으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형은 퇴출 일 순위야. 나니까 형 데리고 다니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매니저는커녕 심부름꾼으로도 안 쓸 거야.”

“그 말 그대로 너한테 돌려줄게. 나나 되니까 널 멀쩡하게 데리고 다니지 다른 놈이었으면 너한테 주먹질에 발길질 여러 번 했을 거다.”

팔짱을 낀 상태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석진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다지 이른 시간도 아니건만 어젯밤에 무엇을 했는지 피곤한 모양이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진 것을 보면 새벽까지 인터넷 채팅이라도 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 나이 되도록 애인이 없으니 인터넷 채팅이라도 해야겠지.”

“뭐라는 거야.”

때릴 힘도 없는지 하암,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하며 석진이 시간을 살폈다.

“왜 이렇게 시작 안 하냐.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자고 싶은데.”

“금방 할 거야. 이제 입장하잖아.”

거짓말이 아니라 운동장에는 양 팀 선수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곧 시작하려나 봐. 하원은 꼴깍 침을 삼키며 저 수많은 선수 중에 어디쯤 용주가 있을지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마음 같아서는 용주가 참가하는 대회마다 응원을 가고 싶었지만 용주가 부끄러운지 말을 안 해주는 이유도 있었고, 딱히 오라는 말도 없는데 쫓아가서 괜히 얼굴이라도 보였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서 시끄러워지면 오히려 용주에게 더 방해가 될 것이라는 석진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해 칠월 전국 대회 때는 그저 힘내라고 말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때는 8강전에서 떨어졌다는 아쉬운 결과를 전해 들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쭉쭉 승리해서 8강전, 준결승전, 그리고 결승전까지 올라가겠지.

용주가 축구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원은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대회 준비로 쭉 바빴지만 칠월에 있었던 전국 대회를 부산에서 하는 바람에 가끔 만나 밥을 먹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 뒤로 용주가 서울에 올라오긴 했지만 바로 팔월 대통령금배 전국 대회를 준비해야 해서 하원이 용주를 만난 것은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 전이었다.

“결승전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

그럼 만날 수 있는 날이 더 미뤄지겠지만 그래봤자 일주일을 넘기지는 않겠지. 며칠 뒤에 만나게 되더라도 제발 결승전까지 올라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용주다.”

빨간색과 검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 중 한 명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말하자 석진이 뭐? 하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기 용주.”

저기 있잖아, 유난히 눈에 띄는 선수. 막 용주 주변으로 빛이 나는데 형은 안 보여? 하원의 말에 석진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대체 누구라는 거야?”

“형은 어떻게 용주도 구별 못 할 수 있어? 저기 있잖아, 저기.”

정말 우리 용주가 안 보인단 말이야? 윤석진의 눈은 장식용인가.

하원은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운동장 쪽의 선수를 마구 손가락질하는 하원의 행동에 주변의 시선이 모이자 석진이 재빨리 하원을 끌어당겨 앉혔다.

“그래, 저기 용주 있네.”

“걔 아니거든.”

일단 진정을 시키려는 목적으로 아무나 골라 가리켜보았지만 찍는 것에 소질이 없었던 모양인지 하원이 샐쭉한 표정으로 석진을 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팔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몸을 풀고 있는 용주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듯 보여 다행이다.

용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가겠다며 어젯밤에 챙겨두었던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하지만 콤팩트 디카를 너무 과신한 모양인지 넓은 운동장에 있는 용주는 풀밭 위의 개미보다 더 작게 보였다.

“뭐야, 이게. 용주 얼굴이 안 나와.”

“그걸로 사진이 찍히겠냐. 기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그런 겁나 큰 카메라여야 찍히지.”

“다음엔 DSLR을 가져와야겠어.”

하원의 중얼거림에 석진이 하원의 뒤통수를 쳤다.

“쓸모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경기나 봐.”

쓸모없는 것은 바로 이 디카야. 용주 얼굴도 안 찍히고 가지고 온 보람이 없다. 씨근덕거리며 디카를 가방에 쑤셔 넣은 하원은 차라리 쌍안경을 가져올 걸 하고 후회했다.

진영을 정하는 모양인지 주심과 각 팀의 주장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전 던지기로 진영이 정해지고 각자의 포지션에 선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시작하나 봐.”

“아…… 이제 시작인데 더워 죽겠다. 맥주도 미지근해졌네.”

언제 챙겨 온 것인지 가방에서 캔 맥주를 꺼내며 석진이 불퉁거렸다. 하원에게 하나를 건넸다가 노려보는 시선에 줘도 불만이라며 구시렁거리면서 찬기가 사라진 맥주를 홀짝거리며 석진 역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해. 심장이 막 두근거려.”

“두근거릴 것도 많다.”

“용주 축구 하는 거 처음 본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이 휘슬이 울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공은 상대편이 가지고 있었다. 휘슬과 함께 공이 움직이며 선수들 역시 공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주 백넘버가 뭐야?”

“저기 빨간색이랑 검정색 줄무늬 유니폼. 8번.”

용주는 달리기도 빠르구나. 저렇게 운동장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오늘 용주의 모습은 정말 새로웠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용주의 모습, 꿈을 위해 뛰는 용주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용주에게 민하원이라는 존재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고교 축구라고 해도 엄청 피 튀기네. 초반부터 열심이다.”

“고교 축구 무시하지 마.”

조금 날카로운 음성으로 석진을 향해 말하면서도 하원은 운동장을 뛰고 있는 용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얌마, 공을 봐.”

용주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하원의 머리를 툭 건드리며 석진이 핀잔했다.

“신경 쓰지 말고 형은 맥주나 마셔.”

“까칠하기는.”

석진이 불퉁거리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어…… 어어…… 아휴, 아깝다. 저걸 못 넣냐.”

경기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 수비진이 뚫려버리는 바람에 상대편 선수가 공을 찼다.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오는 공을 보며 석진이 아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형 지금 누구 편이야? 용주가 졌으면 좋겠어?”

“나? 아무 편도 아닌데? 재미있자고 보는 건데 뭐 그렇게 열을 내냐?”

“용주 응원해야지! 내가 용주 응원하라고 같이 왔지, 상대 팀 응원하라고 같이 왔어? 그럴 거면 저리로 가.”

상대 팀이 선제골을 넣으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천하태평이다. 그것에 속이 터져서 하원은 괜히 석진에게 화를 냈다.

상대 팀이 선제골을 넣으면 용주네 팀 사기가 떨어지잖아. 이럴수록 용주를 더 응원해야 한다며 하원은 땀이 나는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용주를 바라보았다.

석진의 말처럼 고교 축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다들 열심이다. 용주를 비롯해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발 용주네 팀이 이겼으면 좋겠다. 실력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것인지 전반전이 다 끝나갈 때까지 어느 팀도 득점은 없었다.

“어, 어…… 용주네 볼이야. 용주가 공 잡았어!”

상대 팀의 공을 멋지게 가로챈 선수가 패스를 했다. 허공을 길게 날아오른 공이 용주에게로 떨어졌다. 그 공을 잡아 상대 팀의 수비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드리블하는 용주를 보면서 하원이 소리를 질렀다.

“제발 좀 조용히 해라. 너 때문에 창피해 죽겠다.”

관중석에 자리 잡은 이들은 응원 온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상해 보이는 남자 둘이 동떨어진 곳에 앉아 고교 축구를 구경한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던 윤석진은 하원의 호들갑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의식하고는 하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여기서 사진 찍히면 엄청 쪽팔린다는 거 아냐? 너희 사장한테 나만 깨진다고.”

“왜! 나는 뭐 스포츠를 즐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기껏 고교 축구 대회라고.”

“기껏이라니? 이건 대통령금배 전국 대회야. 대통령이 주는 상이라고.”

딱히 대통령이 와서 주는 건 아니라고 본다만. 석진은 열정적인 하원의 모습에 대꾸할 의지마저 잃어버린 채 혀를 찼다.

“오, 용주 드리블도 환상적이야. 저거 보여? 용주라니까.”

“그래, 그래. 용주가 공도 참 잘 찬다, 잘 차.”

용주의 시원하고 깨끗한 패스가 바로 포워드에게로 연결되어 상대 팀이 손쓸 틈도 없이 골문에 공이 들어갔다.

“골이다. ……골이야! 용주네 팀이 골 넣었어.”

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관중석 드문드문 앉아있던 관중들 역시 시합 시작 후 첫 골에 환호를 지르거나 침통한 신음을 내뱉었다.

“용주 진짜 멋지다. 어쩜 저렇게 축구를 잘하지?”

“저 정도도 못하면 축구부겠냐?”

“아냐, 용주 정말 잘해. 국가대표도 하겠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석진의 중얼거림에도 불구하고 하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용주 멋지다, 를 연신 내뱉었다.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필드를 뛰어다니던 선수들이 벤치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하원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용주한테 가고 싶다.”

“선수도 아닌 놈이 어떻게 가?”

“그래도…… 저기 밑에 내려가서 용주 부르면 나 보지 않을까?”

관중석 제일 아래를 가리키며 묻는 하원을 보며 석진이 혀를 찼다.

“용주한테 비밀로 하고 왔잖아. 괜히 애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앉아있어. 집중력 깨지면 선수한테도 안 좋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용주한테 가고 싶다. 마음은 이미 용주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몸은 관중석에서 들썩들썩. 도통 안정을 취하지 못하는 하원을 자리에 앉히며 석진은 반쯤 벗겨진 모자를 바로 씌워주었다.

“용주도 힘들 테니까 좀 쉬게 둬. 그게 도움되는 거야.”

“그렇겠지? 저렇게 필드 뛰어다니면 엄청 힘들 거야.”

용주가 체력이 좋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께 그 한약방 위치를 좀 물어봐야겠다고 하원은 생각했다.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선수들이 필드로 나왔다.

골 몇 번 더 넣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지금 상태에서 수비만 잘한다면 이길 수 있어. 힘내, 용주야.

마치 눈앞에 있는 용주에게 말하듯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는 하원을 석진이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다시 선수들이 공을 쫓았다. 선제골을 내준 탓인지 상대 팀의 움직임이 다소 격해진 것을 느꼈다.

후반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슬쩍슬쩍 보이는 몸싸움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조금 위험하다 싶은 생각에 하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용주를 바라보았다.

“1 대 0이라서 그런지 분위기 좀 불타오르는 모양이다.”

골을 내준 쪽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그리고 골을 넣은 쪽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분위기가 다소 거칠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규칙이 있으니까 큰 사고가 일어나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야, 장난 아니다. 마음 급해졌나 봐.”

공을 빼앗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조금씩 격해지는 몸싸움을 보며 석진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상대 팀이 압박 수비를 전략으로 내세운 것인지 공을 잡아도 도통 뚫고 나가질 못했다. 그래도 일단 선제골을 넣었으니까, 라며 안심하기가 무섭게 공을 빼앗은 상대 팀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수비 진형으로 급하게 돌아가 상대 팀을 마크했지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며 패스한 공을 상대 팀 선수가 받아 골대로 밀어 넣었다.

와아, 하는 함성이 저 멀리 관중석에서 울렸다. 더불어 아아, 하고 아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이 하원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1 대 1이다. 기운 내라는 뜻으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용주네 팀이 빠르게 공격 진형으로 돌아섰다.

“아, 시간 왜 이렇게 빨리 가?”

벌써 후반전이 15분이나 지났음을 확인하며 하원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한 골만 더 넣어줘. 이리저리 패스 되는 공을 바라보며 하원이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압박 수비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어려운지 공이 계속 빙빙 돌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길게 띄운 공이 미리 상대 진영 안에 들어가 있던 용주에게로 향했다. 그것을 가슴으로 트래핑하여 받은 용주가 상대편 수비의 빈틈으로 빠져나와 공을 드리블했다.

“용주 진짜 멋져. 어떻게 하지? 용주 진짜 잘한다.”

두 손을 꼭 쥔 상태로 하원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윤석진도 포기했는지 그런 하원을 말리지 않았다.

골대 근처에 있는 포워드에게 골을 패스하려는 순간 떨어진 곳에서 뛰어오던 상대편 선수가 공을 향해 발을 날렸다.

“어!”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하원에게는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보였다. 저건 좀 위험한데,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상대편 선수의 발은 공이 아닌 용주의 발목을 거세게 걷어찼다.

“용주야!”

경기장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하원을 윤석진이 당황하여 끌어 앉혔다.

“아, 진짜. 민하원 너 자꾸 이럴래?”

“요, 용주. 용주 쓰러졌어, 용주.”

석진의 타박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지 하원이 운동장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몹시 놀란 듯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운동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석진 역시 필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삑, 휘슬이 울렸다. 잠시 경기가 중단되고 쓰러진 용주에게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갔다.

꽤나 아픈 모양인지 발목을 손으로 감싼 용주는 필드에 누워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다가간 의료진이 용주의 발목을 살피고 구급상자에서 파스를 꺼내 뿌리는 것이 보였다.

“용주 크게 다쳤나 봐. 어쩌지? 발목에 금 가는 거 아닐까? 나 가볼래.”

“어딜 가? 네가 저길 어떻게 가. 일단 앉아봐. 지금 응급처치하고 있으니까. 가볍게 부딪힌 거면 금방 일어날 거야.”

그러다 들것에라도 실려 나오면 어쩌려고. 석진의 말처럼 필드로 나갈 수도 없고, 용주에게 간다고 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애가 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두 손을 꼭 쥐고 쓰러져있는 용주를 지켜보는 하원의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저것 봐. 용주 금방 일어나잖아.”

금방은 무슨. 한참 동안 의료진이 발목을 마사지해준 뒤에 부축을 받아 일어난 용주는 조심스럽게 발목을 움직이며 의료진과 대화를 나누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젓는 것으로 보아서는 고통이 심하지는 않느냐, 계속 경기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인 듯싶었다.

주심이 용주를 걷어찬 선수와 간단히 말을 주고받고 프리킥을 선언했다.

용주 팀의 주장이 주심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손짓이 거칠어지는 것으로 보아 뭔가 항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용주가 말리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경고 안 주는 모양인데?”

“뭐? 왜? 왜! 저건 엄연히 레드카드라고, 레드! 프리킥만 주면 다야? 왜 경고를 안 먹여, 왜!”

석진의 말에 흥분한 하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석진이 뜯어말렸다. 마치 자기가 필드에서 뛰는 선수라도 되는 양 가슴을 퍽퍽 치며 억울해하는 하원을 진정시키면서 석진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석진의 말처럼 경고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을 알아차린 주장 선수가 항의를 한 모양이지만 주심은 오히려 그런 주장 선수에게 경고를 담은 시선을 보낸 뒤 경기를 재개시켰다.

“뭐야? 이럴 수는 없어! 심판 눈은 고자야? 왜 경고를 안 먹여? 우리 용주 다리 아파서 막 구르는데 왜 경고를 안 먹여! 이럴 수 있어?”

“민하원, 좀 참아라. 응? 시합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일부러 걷어찬 것도 아니고 시합하다 보면 더 심한 일도 있어. 월드컵 경기에서도 저것보다 더 심하게 사고가 일어나도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그래. 용주도 괜찮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좋게 생각해, 좋게.”

“어떻게 좋게 생각해? 용주 발목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알고! 부러지거나 금 갔으면 어쩔 거야? 엑스레이 찍어봤어? 확인해봤냐고!”

“그래, 그래. 일단 앉아. 앉아서 음료수 좀 마시고 숨 좀 돌리고. 경기 보자. 용주, 프리킥 찬다.”

석진은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하원의 손에 쥐여주고 경기장을 가리켰다. 석진의 말에 금세 조용해진 하원이 프리킥을 준비하는 용주를 응시했다.

정말 괜찮은 걸까. 멀리 있어서 용주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다지 좋은 얼굴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워. 공을 차도 될까. 오만가지의 생각이 하원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골문과는 약간 먼 거리인 데다 마크가 심했기 때문에 용주는 슬쩍 공을 뒤로 빼내 다른 선수에게 몰아주었다. 그것을 또 다른 미드필더가 받아 골문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렇지, 잘한다. 옆에서 석진이 흥이 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하원의 시선은 여전히 용주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절뚝거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멀쩡하게 잘 뛰는 것 같지만 약간의 부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고통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있거나 인상을 쓰고 있겠지. 많이 아플까. 걱정되는 마음에 하원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용주 많이 아픈가 보다.”

처음에는 아닌 척 잘 뛰던 용주의 걸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려졌다. 그것을 석진 역시 알아차린 모양인지 그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용주 팀의 감독이 선수 교체를 할 모양인지 사인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나갈 선수가 벤치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 용주의 백넘버와 교체될 선수의 백넘버가 적힌 교체 판을 대기심이 준비했다.

용주가 시합에 뛰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태로 계속 경기를 할 수는 없겠지.

기본 예의를 아는 선수들이라면 적당히 공을 밖으로 차내 선수 교체 타이밍을 줄 텐데, 이것이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상대 팀은 마구 공을 몰아 달리고 있었다.

“선수 교체 대기 중이란 걸 알 텐데……. 매너가 좀 없네.”

“저것들은 기본 예의도 없나.”

하원이 분통을 터트렸다. 조금 더 열받으면 인터넷에 ‘상대 학교 축구팀 노매너 플레이 자제욤.’ 하고 글이라도 쓸 기세다. 그런 하원을 힐끗 쳐다본 석진은 턱을 괴고 필드로 시선을 돌리며 골치 아프네, 하고 중얼거렸다.

“곧 교체되겠지.”

걱정 말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줄어들 리가 없었다.

“아, 진짜 매너 황. 노매너. 개매너.”

“민하원, 말조심 안 할래?”

석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하원의 뾰족하게 나온 입술을 손으로 콱 잡아 흔들었다.

“으아아…… 아퍼어.”

“너 계속 이런 식이면 용주 시합이고 뭐고 못 보게 할 거야.”

“왜! 나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

“그 사생활 단속하는 게 내 일이다.”

석진의 말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꾹 입을 다문 하원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팩 고개를 돌려 다시 필드를 바라보았다.

결국 공을 잡은 용주네 팀 선수가 공을 라인 밖으로 차내 선수 교체가 이루어졌다.

절뚝절뚝 벤치로 걸어가는 용주의 걸음에 힘이 없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며 하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야, 용주 괜찮아. 조금 마사지하고 그러면 된다니까. 뼈 부러졌으면 저렇게 걷지도 못해. 지금 근육이나 인대 같은 게 놀라서 아마 저럴 거야.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네?”

석진은 풀 죽은 하원의 어깨를 안아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지만 정작 하원은 그런 석진의 위로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절뚝거리며 벤치로 간 용주를 맞으며 감독이 괜찮다는 듯 등을 쓸어주었다. 벤치에 앉아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은 용주가 발목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병원 가자고 해야겠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하원이 용주에게 전화를 거는 모양인지 단축키를 눌렀다.

“지금 시합 중이야. 벤치에 있다고 해도 전화를 받을 리 없잖아.”

하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은 석진이 종료 버튼을 누른 다음 도로 하원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조용히 시합을 끝까지 지켜봐 주는 게 예의야. 저 녀석들 예의 없다고 매너 황이라고 화냈잖아. 저 녀석들이랑 같은 취급 받고 싶어?”

석진의 물음에 하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용주가 빠졌지만 그래도 용주네 팀이 이기도록 열심히 응원해. 용주도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 모양이니까 8강 올라가서 다시 시합에 나가면 좋잖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용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하원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석진은 경기 봐, 하고 말했다.

1 대 1인 데다 용주의 부상으로 선수 교체를 하고 나서 더욱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빈번한 몸싸움에 주심이 구두로 경고를 할 정도였다. 멀리 떨어진 관중석에서조차 그것을 알 수 있어 하원은 그럴 때마다 힐끗 용주 쪽을 바라보았다.

용주의 팀에 다시 득점의 기회가 주어졌다. 수비가 잠깐 허물어진 것을 틈타 골문 앞까지 밀고 들어간 포워드가 다른 선수에게 공을 전달하여 매끄럽게 골인을 시킨 것이었다.

완벽한 골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것으로 용주네 팀의 승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웃고 있던 하원은 선심의 오프사이드 선언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게 왜 오프사이드야.”

이번에는 석진까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 포워드인 선수가 공을 잡았을 때 스트라이커는 뒤에 있었고, 그 앞에 풀백이 있었다.

포워드가 풀백의 수비 범위 밖으로 공을 찼을 때 뛰어나간 스트라이커가 공을 받아 골인을 시켰음에도 나온 오프사이드 선언에 선수들은 물론 지켜보던 관중들까지도 화를 냈다.

“아, 진짜. 병신같이 심판 보네.”

남들 시선이 어쩌고 하던 윤석진마저 욕설을 내뱉으며 가방을 뒤적여 남은 캔 맥주를 꺼내 뚜껑을 따 들이켰다.

“이거 순 편파 판정 아냐? 저 심판 저 학교 출신 아니냐고. 무슨 심판을 저따위로 봐? 재미 떨어지게.”

저게 어떻게 오프사이드야. 저게 말이 돼? 하고 화를 내려던 하원이 오히려 쪼그라들어 석진의 큰소리를 듣고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윤석진의 말이 다 맞아. 오랜만에 석진이 형 말이 다 옳아!

이건 분명히 편파 판정이다. 용주가 다쳤을 때에도 레드카드는커녕 옐로카드도 주지 않고, 이번에도 명백히 골인인데 그걸 오프사이드라고 하다니. 심판 보는 사람들의 눈이 병신이 아니라면 상대 팀 학교나 그쪽 감독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하다.

으득, 이를 갈며 하원은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주심을 노려보았다.

결국 용주네 팀이 넣은 골은 오프사이드로 선언되어 득점이 인정되지 않았고, 후반전 종료 2분을 남기고 터진 상대 팀의 득점에 1 대 2로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말도 안 돼.”

용주가 뛰는 모습을 보겠다고 온 첫 경기였는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허망함과 실망감에 하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용주가 있는 벤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합을 끝내고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들을 맞으러 일어나는 용주가 절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났다. 마치 자신이 저 필드에 나가서 뛴 것처럼, 선수였던 것처럼 억울하고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해서 하원은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퍽퍽 가슴을 쳐댔다.

“너무해. 이게 뭐야.”

“시합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심판이면 공정해야 하잖아!”

“기껏 고등학교 축구 시합 가지고 열 내지 마.”

편파 판정이니 어쩌니 하면서 화를 내주던 윤석진이 사라졌다. 별일 아닌 것 갖고 왜 그래?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석진을 하원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기껏이 아냐. 용주한테는 중요한 시합이라고. 미래가 걸린 거나 마찬가지야. 그걸 저 심판이 막은 거야.”

“우리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은 섣불리 말할 수 없어. 심판도 사람이고. 심판이 저쪽 학교에 뭘 받아 처먹었는지 아니면 정말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그렇게 생각해서 결정을 내린 건지 알 수 없단 말이야. 화내봤자 이미 승패는 결정 났고. 그리고 선수들도 화는 나겠지만 받아들이고 있잖아.”

“그래도…… 억울해. 용주가, 용주가 시합 때문에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데.”

만나는 시간이 없어도 용주가 시합에서 우승하는 게 좋으니까 참았는데. 하원은 속상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중에 용주 오면 맛있는 거나 사줘. 힘들게 훈련하고 시합하느라 지쳤지? 이러면서. 괜히 또 용주한테 심판이 나빴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면 너 몰래 와서 구경한 거 다 뽀록난다.”

대답하지 않는 하원의 목에 손을 걸어 끌어당긴 석진이 내 말 들었어? 하고 물었다.

“용주한테 갈래.”

“지금은 안 된다니까 그러네. 저 녀석 병원에도 가봐야 할 테고. 그리고 지금은 감독이랑 선수들끼리 해야 할 말도 있을 거야. 경기는 끝났지만 훈련이 끝난 건 아니잖아. 저 녀석들은 피드백도 엄청 중요하다고.”

피드백. 언젠가 용주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다. 시합 전에는 시합 준비로, 그리고 시합이 끝나면 피드백을 하느라 바쁘다고 했었지.

윤석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면서도 하원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용주가 있는 필드의 벤치 쪽을 두 번, 세 번 돌아보았다.

∞ ∞ ∞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거리듯 뭔가 뺨을 간질이는 것이 느껴졌다.

귀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묘하게 간지럽고 부끄럽게 만드는 기분이라 볼을 실룩거리다가 고개를 틀어 베개에 얼굴을 묻자 귓가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젯밤 윤석진과 실랑이를 하다 늦게 잔 탓에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꿈나라를 헤매던 하원은 낯익은 웃음소리에 부스스 고개를 들어 눈을 떴다.

“용주다.”

멍한 얼굴로 용주를 올려다보며 하원은 맹하니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늦게 잤어요? 열두 시가 넘었는데 아직까지 자고 있네.”

“어…… 정말 용주야?”

“가짜 용주도 있어요?”

용주의 되물음에 하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용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용주의 목소리, 용주의 얼굴, 용주의 냄새, 정말 용주다.

하원의 급작스러운 행동에도 용주는 손을 들어 하원의 등을 마주 껴안아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네요.”

“응.”

“정말 보고 싶었어요, 형.”

“나도. 나도 용주 많이 보고 싶었어.”

버스에서 내려 느긋하게 걸어온 모양인지 용주의 등은 조금 땀에 젖어있었다. 땀이 흐르는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며 정말 용주다, 하고 하원은 생각했다.

“시합은…… 다 끝난 거야?”

응원 갔던 경기의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묻는 것이 힘들다. 눈을 내리깔고 묻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합 끝났는데도 집에 안 보내주는 바람에 계속 합숙하다가 어제 겨우 집에 왔어요. 목욕탕 갔다 와서 오늘 아침까지 잠만 잤다니까요. 숙소나 집이나 특별할 것 없이 잠을 자는 것일 텐데, 이상하게 집에서 자면 피곤이 싹 풀리는 것 같아서 신기해요.”

그럼에도 약간은 살이 내린 얼굴이라 하원은 속상한 마음에 용주의 뺨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감쌌다.

“밥은 잘 먹었어? 너 얼굴에 살이 더 내렸어.”

“아니에요. 저 엄청 잘 먹고 지냈어요.”

“다친 곳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다 놀란 하원이 헙, 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용주가 웃으며 그런 하원의 손을 잡아끌어 내렸다.

“그날…… 경기장 왔었죠?”

용주가 봤을 리는 없는데. 갔다고 말해야 하나 안 갔다고 말해야 하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용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나 그때 형 목소리 들었거든요. 다칠 때 용주야, 하고 형이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컸던 것일까. 하원은 조금 반성했다. 그렇지만 용주가 다친 상황에서 목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어야지. 목소리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속으로 변명하며 하원은 용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용주가 오라고 안 했는데…… 나 너무 궁금해서 갔었어. 미안해. 방해 안 하고 몰래 보고만 오려고 했는데 용주 다칠 때 너무 놀라서 소리 질렀나 봐.”

“역시 형 왔었네요.”

하원의 말에 용주가 웃으며 하원의 손을 가볍게 잡아 쥐었다.

“이상하게 그날 시합하러 운동장 들어가는데 기분이 좋더라고요. 날씨도 좋고. 그래서 조금 설레기도 하고 계속 들떠 있었어요. 아마도 형이 와서 그랬나 봐요. 형이 왔다는 거 몰랐지만 형이 응원해주니까 그게 저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에요.”

“넌 예쁜 말만 골라서 해.”

“형은 예쁜 짓만 골라서 하고요.”

용주가 웃으며 하원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부딪쳤다.

“모처럼 형이 응원 와줬는데 멋진 모습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안 좋은 모습만 보였네요.”

“아니야, 용주 정말 멋있었어. 난 용주가 그렇게 축구를 잘하는 줄 몰랐어.”

“형, 시합 제대로 보긴 했어요? 그럼 나 잘했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아냐, 용주 정말 잘했어. 달리기도 엄청 빠르고 패스도 잘하고 드리블도 잘하고 엄청 엄청 잘해. 용주만큼 잘하는 선수는 없었어. 앞으로 용주 시합 나가면 나 응원하러 따라다닐 거야. 캠코더도 가지고 갈 거야.”

“적당히 해요.”

하원의 말에 용주가 웃으며 하원의 손끝을 아프지 않게 살짝 물었다 놓았다.

“왜 왔다고 말 안 하고 그냥 갔어요?”

“석진이가 너 시합 끝났어도 무척 바쁠 거라고. 조용히 집에 가는 게 더 도움 되는 거라고 해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럼 너 다친 거 물어보게 될까 봐 못했어. 다친 거 물어보면 나 시합 보러 간 거 알게 되잖아.”

“사실 시합 끝나고 바로 숙소로 끌려갔어요. 전 병원부터 들렀지만요. 매니저님이 잘 생각하신 거였어요.”

“다리는 괜찮고?”

“네, 이제 괜찮아요. 둘째 날까지는 멍들고 근육도 심하게 아프더니 물리치료 받으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뼈에는 문제없다니까 다행이죠.”

“다행 아니야. 애초에 그런 일은 없었어야 했다고. 왜 그 녀석은 하필이면 용주 다리를 차서.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나 쫓아가서 화내려고 그랬어.”

“형, 저 정말 괜찮아요.”

“아니야. 용주 엄청 아파서 막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주심이 경고도 안 먹이고. 다시 생각해도 화나. 축구 심판위원회에 항의할까 생각도 했었다니까.”

하원의 말에 용주는 워, 워, 진정하세요. 하고 하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경기하다 보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일어나는 일이에요. 주의하지 않으면 겪을 수 있는 일이고요. 이번에도 그 선수가 조금 거칠게 플레이한 것도 있긴 했지만 제가 주의하지 못한 잘못도 있으니까요.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 더 주의해야겠다는 것을 배웠으니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해요.”

“넌 너무 착해.”

“형 앞이니까 조금 착한 척하는 거예요. 저 혼자 있을 땐 그 자식을 확 패버릴 걸 그랬네, 하고 욕도 한다고요.”

“정말 때려주지 그랬어. 지금이라도 가서 내가 혼내주고 올까?”

“사양할래요.”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하원을 잡아 누르며 용주가 웃었다.

“발목…… 봐도 돼?”

“정말 괜찮다니까요.”

주춤거리며 묻는 하원을 향해 용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려 양말을 벗었다. 복사뼈 뒤쪽으로 연약한 부분이 보라색으로 얼룩덜룩하게 멍들어있었다.

“왜 하필 여기야. 살도 없는 곳이고. 엄청 위험하잖아.”

“그렇긴 한데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다행이죠?”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 용주의 얼굴을 밀어내며 하원이 아니, 하고 입술을 뿌루퉁하게 다물었다.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거야.”

정말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다. 용주가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까. 용주가 못 일어나면 어쩌지. 인대나 뼈가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다행이라니. 다행이 어디 있어, 다행이. 지금 이렇게 다친 것은 다행이 아니라 재난이다. 하원이 용주의 두 뺨을 손으로 잡아 흔들었다.

“용주 미워할 거야. 나 걱정하게 만들고. 그래놓고 다행이죠? 라니. 너무해, 너무해.”

“크게 다치지 않았잖아요. 그런 사고야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래도 사고가 일어났으니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조금 위안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말은 참 예쁘게 한다니까. 하원은 용주의 뺨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를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도 다음에는 다치면 안 돼.”

“네, 조심할게요. 하필이면 형이 응원 온 날 이렇게 되어버려서 저 속상해요. 형한테 멋진 모습 보여줬어야 했는데.”

“용주 엄청 멋졌어. 용주가 멋있어서 용주밖에 안 보이는 거야. 석진이가 경기 보라고 계속 나한테 뭐라고 했어.”

“그래서였는지 기분이 무척 들떴어요. 시합 끝나고 감독님한테 혼났다니까요. 혼자 기분 업 되어서 뛰어다니다 사고 쳤다고요.”

“그거 용주 잘못 아냐.”

“그렇긴 하지만 저도 그럴 땐 적당히 피할 수 있었어야 했어요. 제가 부주의했다는 건 인정해야 해요.”

“넌 정말 잘했어.”

하원은 손을 뻗어 용주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용주가 아닌 것 같았어.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용주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용주는 이렇게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감탄했어.”

그리고 용주의 이런 멋진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쭉 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용주가 쪼잔하다고 비웃을 것 같아서 역시 이건 비밀로 해야겠다고 하원은 생각했다.

“형은 바쁘잖아요. 그래서 시합 구경 와달라고 말하기가 미안했어요.”

“나 요즘 엄청 한가해. 백수야.”

“게다가 시합이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준결승전이나 결승전에 올라가게 되면 그때 부탁하려고 했어요. 와서 응원해달라고.”

“정말? 정말 나 부르려고 했어?”

“네. 하지만 16강전에서 떨어져 버려서……. 형이 몰래 와서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어요.”

“8강에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하고는 중요한 게 아냐. 난 그날 가서 용주가 정말 축구를 좋아하는구나,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고 감탄했는데. 그날 용주는 진짜 멋졌어.”

“고마워요. 난 하필이면 형이 온 날 그런 사고가 일어나버려서…… 형이 실망했을까 봐 걱정했어요.”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나 뭐랄까, 용주에 대해서 알아가는 기분이라 정말 좋아. 앞으로는 아무리 바빠도 용주 시합 있으면 가서 응원하고. 나도 용주 도시락도 싸주고 그럴 거야. 용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나 반성했어.”

하원의 말에 용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형 말만으로도 나 엄청 힘이 나요.”

“진짜야. 나 정말 앞으로 용주한테 더 잘할 거야.”

정말이야. 용주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말하자 용주가 웃으며 하원의 어깨에 턱을 기대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립 서비스가 좋아요?”

“서비스 아냐. 진심이야.”

“그럼 저 감동 받을래요.”

“아직도 감동 안 받고 있었어?”

장난이 담긴 말을 주고받으며 웃다가 용주가 하원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야 형 옆에 있는 게 실감이 나요. 훈련 끝 이제 행복 시작이네요.”

“나도, 나도. 용주 수고 많이 했고 잘 다녀왔어.”

약간의 틈을 두고 떨어져 있는 입술을 다시 마주하며 하원이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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