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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어디 갔다 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 몸을 굳혔다. 그런 내 등을 부드럽게 밀면서 안으로 들어선 하원은 여기가 내 집이야, 하고 해맑게 말했다.
“촬영 일찍 끝내준 이유가 뭐야? 첫방은 챙겨 보라는 거 아냐? 그럼 얌전히 집에 와서 보지는 못할망정 어딜 그렇게 쏘다…… 어?”
큰소리로 잔소리하던 매니저 윤석진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벌리고 선 윤석진을 향해 나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어…… 용주네?”
“이름 기억하고 계셨네요.”
신기한 일이네, 하고 생각했다.
“하원이가 하도 ‘용주가 가져다준 자장면 먹고 싶다’, ‘용주가 가져다준 탕수육 먹고 싶다’ 입에 달고 살아서.”
“아, 네.”
난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힐끗 하원을 보자 그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가 빨리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일단 왔으니 들어와. 왜 그러고 서 있어?”
윤석진은 나를 향해 말하고는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서 울리는 윤석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올라섰다.
“민하원, 첫방 녹화해놨으니까 빨리 씻고 옷 갈아입고 나와.”
“소파에 앉아. 뭐 마실래? 우유 가져다줄까?”
“그보다 먼저 씻고 옷 갈아입으라고…….”
매니저가 열렬히 말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힐끗 윤석진이 있는 곳을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지만 하원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예쁜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보고 있는 하원의 시선에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얼굴 많이 상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길고 곧은 손가락이 뻗어 나와 내 뺨에 닿았다.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인 감각에 나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약간의 열기를 담은 손가락이 느리게 눈 밑을 쓸고 뺨을 감쌌다.
“아팠던 건 아니지?”
아팠어요. 그것이 본인 때문이라는 것은 모르겠지만. 고개 좀 들어봐. 하원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주춤 고개를 들어 하원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보고 얼굴이 많이 상했대. 자기는 아주 피골이 상접했는데. 몸은 그렇게 좋아졌으면서 얼굴에 살이 내릴 동안 뭐 했던 거야. 속이 상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야, 내 말 들었어? 씻고 나오랬지? 아무튼 게으른 새끼.”
어느새 다가온 윤석진이 하원의 뒤통수를 내려치며 말했다. 퍽,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봐서 장난삼아 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 증거로 하원이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형, 고소할 거야. 매니저가 이렇게 폭력 써도 돼?”
“그래, 고소해라, 고소 좀 해. 나도 네 매니저 하기 엄청 귀찮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가서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아있는 하원을 일으켜 세워 욕실로 쫓아 보낸 윤석진은 내게 들고 온 주스를 건네주었다.
“오랜만이다. 하원이가 설마 중국집 찾아간 거야?”
“아, 네. 뭐…….”
중국집 근처로 찾아왔지만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자장면 시켜 먹은 거 아니지? 아직도 식단 조절 중이거든.”
나는 네, 하고 답하면서도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거 안 먹고 닭가슴살만 먹는 것이 식단 조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그럼에도 그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손에 들고 있던 주스만 꼴깍꼴깍 마셨다.
“참, 하원이 요즘 드라마 촬영하거든. 오늘 첫방이야.”
“알아요. 가족의 울타리.”
“어, 아는구나.”
윤석진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구박해도 일단은 자기가 관리하는 연예인이니만큼 애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리모컨을 가져온 그는 녹화해두었던 것을 선택해 화면을 정지시켜놓았다.
“너도 못 봤지?”
“네.”
“잘됐다. 하원이 나오면 같이 앉아서 봐. 저녁은 먹었어?”
“아뇨. 그런데 별로 생각은 없어요.”
민하원이 사는 집을 방문한 기념비적인 날에 배고픔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석진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사실 집에 먹을 것도 없어. 요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만날 시켜 먹거든. 하원이 저놈 똥배 나온 건 다 배달 음식 때문이야. 야식도 매일 시켜 먹어서 아주 그냥 똥배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또 식욕도 좋아서 눈만 떼면 엄청 먹어대. 요주의 인물이야, 저거.”
종종 하원이 내게 자신의 흉을 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윤석진은 그 보복이라도 하듯 하원의 흉을 보았다.
민하원의 좋지 않은 야식 사랑과 그 탓에 만들어진 뱃살을 빼려고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럼에도 민하원이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고 뺀질거리며 운동을 빠지려고 머리를 굴리고 눈만 떼면 몰래 뭔가를 먹어댄다는 이야기는 하원이 씻고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용주한테 무슨 얘기 하고 있어?”
“네 흉.”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용주 옆에서 떨어져.”
민소매 셔츠를 걸치며 나오던 하원이 쪼르르 달려와 옆에 앉아있던 윤석진을 밀어냈다.
“석진이 하는 말 듣지 마. 다 뻥이야.”
하원이 내 손을 잡고 말함과 동시에 뻑, 소리가 울렸다.
“왜!”
“형 소리는 어따 팔아먹었어. 너 자꾸 나랑 맞먹으려고 그런다?”
“나이 스물일곱 살 노총각 윤석진 형. 안 가?”
하원은 석진에게 맞은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제발 집에 가서 쉬고 싶다. 누구만 아니라면 그럴 텐데, 내가 왜 평일 주말 구분 없이 누구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표 쓰고 푹 쉬든지.”
하원의 대답에 곧바로 석진의 주먹이 내려왔다. 딱콩, 이마를 맞은 하원의 눈가에 글썽 눈물이 맺혔다.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니 정말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헛소리 말고 녹화해둔 것 보기나 해.”
“알았으니까 빨리 가라고.”
“용주는?”
“용주가 왜?”
하원은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윤석진을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신경 쓰는 것이 기분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가는 길에 같이 나가자고. 가는 길 모르잖아.”
“용주 지금 왔는데 가긴 어딜 가? 왜 내 손님을 멋대로 쫓아내려고 그래?”
“누가 멋대로 쫓아낸다고 그래? 웃긴 놈일세.”
“형이 지금 그러고 있잖아.”
“억지 부리지 마라.”
슬슬 말다툼의 강도가 세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대화를 하는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하게 앉아서 멍하니 생각했다.
“그럼 둘이 같이 녹화해둔 것 봐. 난 좀 자고 있을게.”
침실로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윤석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방이 무슨 노숙자 휴게소야? 형 집에 가서 자.”
“한 시간 드라마 보고 한 시간 수다 떨고 놀다가 나 깨워라.”
“왜!”
“그때 가려고. 가는 길에 용주도 데려다주고.”
“내가 데려다주면 되니까 신경 꺼.”
하원은 내 손을 잡으며 그렇지? 하고 물었다. 글쎄요, 제가 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난 어색하게 웃으며 하원을 바라보았다.
“너 내일 새벽에 촬영 있어. 또 졸려 죽어요. 못 일어나요. 나를 깨우려면 차라리 죽이세요. 이딴 소리 지껄이지 말고 일찍 자기나 해.”
“내가 언제!”
하원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파르르 떨며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니 윤석진의 말에 더 신뢰가 감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게 해요, 형. 두 시간 있다가 깨워드릴 테니 매니저님도 눈 좀 붙이세요.”
아닌 게 아니라 윤석진의 얼굴도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내 말에 냉큼 방으로 들어가 쾅, 방문을 닫는 윤석진을 향해 하원이 뭐라고 구시렁거렸다.
“드라마부터 봐야겠죠?”
“저녁 먹었어? 배 안 고파?”
“형은요?”
“난 아까 닭가슴살 먹었어. 너 배고프지 않아? 뭐 시켜줄까?”
조금 출출하긴 했지만 하원이 먹을 수 없는데 음식을 시켜 먹는 것도 끌리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눈에 띄게 상심하는 하원의 얼굴에 설마 이 사람이 음식 시켜서 몰래 먹을 생각이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리 내려와. 난 소파보다 바닥에 앉아서 보는 게 더 좋더라.”
소파 한쪽에 세워두었던 커다란 등받이 쿠션을 바닥에 놓고, 하원이 나를 끌어 내렸다. 쿠션에 등을 대고 나란히 앉은 하원은 두 다리를 쭉 편 상태로 느긋하게 리모컨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윤석진이 기다렸다 정확하게 녹화를 해둔 것인지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광고 없이 바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제1화.
화면에 뜬 글자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 있었어?”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화면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하원을 응시했다.
“네?”
멍하게 바라보고 되물었던 데는 하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쿠션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나란히 한 상태로 앉아 우리는 서로를 잠시 마주 보았다.
하원은 조금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뺨을 슬쩍 어루만졌다.
“엄청 고생한 얼굴이야.”
“형 얼굴도 못지않아요. 보기 좋던 얼굴에 살이 쭉 내렸잖아요.”
몸만 좋으면 뭐해. 얼굴은 피골이 상접했는데. 예쁜 얼굴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이 쭉 빠지니 속이 상한다.
드라마 촬영하느라 많이 힘들었나. 두 달 사이에 홀쭉해진 얼굴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이쪽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 그때 엄청 고민했어.”
내 뺨을 만지고 있던 손을 내리며 하원이 쿠션에 등을 기대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티브이 쪽을 향하고 있는데 화면을 보고 있지는 않은 듯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처럼 입술을 모으고 우물거리던 그는 아휴, 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 너 가고 나서 생각 많이 했어.”
그날이 언제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하원이 말하는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듣고 있다는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이후로 나는 항상 연예인 민하원이었어. 주변 사람들이 보는 나는 항상 그랬거든. 그런데 넌 좀 다르잖아. 그게 신기하고 조금 즐거웠어.”
“형이 연예인이라는 걸 제가 알고 있지 않아서요?”
느긋하게 쿠션에 기대어 앉은 상태였지만 속마음은 별로 느긋하질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판가름하듯 가늘게 눈을 뜨고 하원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떨리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적당히 그의 말에 대꾸를 했다.
“내 주변에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선망하는 사람과 나를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있어. 비슷하게 나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 그게 웃기고 어이없고 그런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점차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어버려. 그래서 자장면 시켰던 날에도 네가 날 몰라봐서 조금 당황했어.”
“제가 티브이를 잘 안 보거든요.”
나름 변명조로 말했지만 하원은 상관없다는 것처럼 작게 웃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타인의 자리에 서서 누군가와 거리를 좁혀 가까워지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라서 기뻤어. 게다가 넌 내가 연예인이란 걸 알고 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뭐랄까…… 조금 신선하기도 했고.”
“저를 그런 식으로 관찰했어요?”
나는 다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턱을 기댄 상태로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고 약간의 투정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하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냐, 절대 그런 거 아냐. 난 그냥 용주랑 있는 게 좋아서…….”
두 손까지 흔들어대는 하원의 행동에 작게 웃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농담한 거예요.”
“농담한 거야?”
“네, 농담한 거예요.”
하원은 내 말에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나쁘다, 용주. 난 혹시 오해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엄청 놀랐어.”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자 하원은 아냐, 하고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용주랑 대화하는 것도 좋고, 용주랑 같이 있는 것도 좋고. 물론 자장면도 먹고 싶었지만 자장면 시키면 용주가 가져다줄 테니까. 용주가 보고 싶어서……, 윤석진이 나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
하원의 고백에 나는 작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서없는 말이다. 가만히 듣고 한참 정리를 해야 하원이 무슨 의도로 말을 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이지만.
“그때 멋대로 키스해서 미안해. 정말 충동적이었어. 너 도망치듯 가고 나서 한참 후회했어. 전화하고 싶었는데 안 받을까 봐 무서워서 못 했어.”
나름 용기를 낸 듯싶은 고백에 나 역시도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잡고 있던 하원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는 잠잠해진 하원의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저는요, 형이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파요.”
이건 투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날, 하원과 키스한 날에도 그가 내뱉은 미안하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고, 다시 만난 뒤에도 미안하다는 말에 슬퍼졌다. 지금도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미안하다 말하는 하원은 오히려 나를 더 상처 입히고 있었다.
“물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놀라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 더 복잡한 감정과 많은 의미를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형은 단순하게 충동적인 행동이라고 말했지만요. 그래서 형이 미안하다고 말하면 난 마음이 아파요. 형은 그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그것에 나 혼자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질 않거든요.”
내 말에 하원은 손을 틀어 자신의 손을 쓰다듬고 있던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미안한 건 그냥 내 멋대로 너한테 키스해서…… 네가 놀랐을까 봐. 사실 그때 너 무척 놀란 표정이었고. 또 내가 억지로 해서 네가 화낼 수도 있고, 나 안 보겠다고 할 것 같았어.”
“형도 그때 무척 놀란 얼굴이었어요.”
“응, 나도 놀랐어.”
뭔가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말하는 하원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웃었다. 내 말에 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 놀랐어, 정말. 그때 너 무척 예뻐 보였거든.”
순간 나는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형, 예쁘다는 말은 거울 보고 해야 할 말이 아닌가요.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나는 고놈 참 씩씩하게 생겼구나, 소리를 듣는 정도이지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얼굴은 아니었다.
조금 어이없는 얼굴로 하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미끄러지듯 몸을 쭈욱 내려 기대고 있던 쿠션을 베고 누울 뿐이었다.
반대편 손을 들어 눈 위에 가져다 댄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 알아?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 나.”
하원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자장면 냄새요? 항상 가게에 나가 있으니까 그래요.”
“자장면 냄새인가? 그거랑 약간 다른데. 좀 더 달고 더 먹고 싶어지는 그런 냄새야. 그런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안절부절못하게 되어버려. 그래서 널 보면 자꾸 옆에 가게 되고, 자꾸 만지게 되고, 그리고 맛보고 싶어져.”
“예?”
대화가 잘 흘러간다 싶더니 또 이상하게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고 있어서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데다가 그때 너 정말 예뻐서 나도 모르게 키스해버렸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도 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어. 네 놀란 얼굴 보는 순간 큰일 났다. 그거 하나만 떠오르더라고. 정말 큰일 났다. 용주가 이제 나 보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큰일 났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응.”
어떻게 생각하면 딱 민하원스러운 대답이네. 나는 조금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슬픈 건 슬픈 거예요. 지금도 형이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난 또 슬플 거라고요.
“좋아해.”
대뜸 내뱉어진 말에 나는 하원을 바라보았다. 언제 일어난 것인지 몸을 세워 자리에 앉은 하원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아까 말 못 한 것 같아. 좋아해. 이 말 하고 싶어서 너 찾아갔던 거였어.”
하원은 꽤나 비장한 얼굴로 좋아해, 하고 말했다. 그 얼굴이 웃겨서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네가 나 미워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자장면도 시키지 말라고 할까 봐 연락 못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무서워서 너 보러 가지 못하는 거나 네가 오지 말라고 해서 보러 가지 못하는 거나 똑같잖아. 그래서 어떻게 되든지 너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하원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했다. 조그만 아이가 짝꿍에게 말하는 것처럼 다른 어떠한 불순한 의도 없이 단순하고 원초적으로 좋아해, 하고 말하는 하원은 그래서인지 더욱 절실하고 진실해 보였다.
그는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왜 초조해해요. 나는 묻고 싶었다. 초조해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형이 초조해해요.
“형은 연예인이잖아요.”
내 말에 하원은 그게 뭐?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 일반인이라고요.”
“연예인은 싫어?”
하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꾹 입을 다물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다.
“형은 남자잖아요. 저도 남자고요.”
“역시 그건 좀 곤란한가? 남자는 싫겠지?”
하원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싫겠지?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내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면 이 자리에서 졸도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형인데, 형은 왜 자꾸 내가 걱정이라는 것처럼 물어볼까요.
“형은요?”
나는 조금 비겁하게 그 대답을 하원에게로 미뤘다. 하원은 내 질문에 어벙하니 엉? 하고 되물었다.
아무래도 질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라서 나는 살짝 시선을 돌리며 형은 어떠냐고요, 하고 재차 물었다.
“난…… 용주가 좋아.”
좋아해, 라고 고백한 사람에게 또다시 같은 말을 요구하다니. 나도 참 못됐다. 비겁하고 나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일그러뜨리자 하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용주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원이 미웠다. 내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어보는 것 같았다.
저렇게 예쁜 사람을 누가 싫다고 할 수 있을까. 저렇게 예쁜 얼굴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남자를 향해 어떻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 참 나빠요.”
“미안.”
왜 나쁘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원은 시무룩한 얼굴로 재차 미안, 하고 중얼거렸다.
“잘 살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나서 게이로 만들어놓고 연락 한번 안 해주니까 진짜 미웠어요.”
“……너 게이야?”
하원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형 여자예요?”
“아니, 남자야.”
“나 지금 형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내 말에 하원은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슬쩍 턱을 밀어 입을 닫아주고 싶다. 먹이를 달라고 짹짹 주둥이를 벌리는 아기 새처럼 귀여웠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하원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귀 끝까지 벌겋게 물들이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누가 이 남자를 보고 스물셋이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커다란 덩치를 하고 이렇게 귀여울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아직까지도 수줍게 잡고 있던 하원의 손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얼굴 붉힐 사람은 난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하원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작 나도 고개를 숙이고 하원의 손끝만 바라보는 상태이니.
서로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하원이 용주야, 하고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너 그냥 좋아하는 거 아닌데.”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면? 하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들어 올린 하원은 조금 난처한 듯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손잡고 싶고, 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래.”
하원은 긴장한 것처럼 꼴깍,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울리며 침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와 나는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작게 웃어버렸다.
“좋은 형 동생 말고 ……애인 하고 싶어.”
수줍게 두 뺨을 붉히며 말하는 하원을 향해 아마도 나도 그래요, 하고 말했던 것 같다. 그게 확실하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하원의 얼굴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온기를 품은 입술이 강하게 부딪치며 나는 말을 끝냈던가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입을 맞추는 하원의 어깨 위로 살며시 손을 올려 안으며 아무렴 어떠냐고 생각했다.
상체를 덮치듯 다가와 입을 맞추는 하원의 행동에 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하원의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을 내려 바닥을 짚으려 했지만, 손을 내리기도 전에 기우뚱 균형을 잃어버렸다.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하원의 손이 뻗어 나와 부드럽게 내 머리를 감쌌다.
이렇게 누워서 올려다보는 건 처음인데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때와 조금 비슷해. 나는 하원을 올려다보며 처음 키스했던 날을 떠올렸다. 바닥에 앉아있던 내 어깨를 잡고 키스를 하던 그때.
새삼 하원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었다. 드물게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지금처럼. 나는 하원을 올려다보며 멍하게 생각했다.
음영 진 하원의 얼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알 수 없는 눈동자. 그 눈동자가 무게를 가지고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입술을 묵인하고, 꾹 다문 입술을 벌리며 들어오는 살덩이를 받아들였다. 굶주린 듯 허겁지겁 입을 맞추는 하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나는 서투르게나마 혀를 섞었다.
서투른 키스처럼 내가 가진 감정 역시 서툴겠지만 처음이니까.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처음이니까. 타인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을 기분 좋게 느끼는 것 역시 처음이니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자체만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도 처음이니까.
서툰 만큼 행복한 연애를 해요, 우리.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가슴으로 속삭이며 나는 하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 ∞ ∞
“어땠어?”
“네?”
“드라마 말이야.”
윤석진의 물음에 나는 멍청하게 네? 네? 하고 되묻기만 했다. 어디 아파? 윤석진이 걱정을 담아 물어볼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사실 드라마가 재미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뭔가에 미쳤던 듯 나는 정신을 빼놓고 방에서 윤석진이 잠들어있다는 것조차 망각한 상태로 하원과 입을 맞췄었다. 녹화해두었던 드라마가 끝난 줄도 모를 정도로 하원과의 키스에 열중했다.
입을 맞추고, 또 입을 맞추었다. 아직까지도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열이 오른 입술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랐을 정도로. 하원과의 키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짜릿했다.
“몇 프로 나왔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정신없이 잤네.”
윤석진은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는 눈가를 비볐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나는 걱정스럽게 윤석진을 바라보았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하원이 녀석이 바쁘니까 나도 덩달아 바빠지네.”
“그렇게 많이 바빠요?”
“한창 촬영해야 하니까. 게다가 매니저는 잡일까지 다 해야 하는 시다바리거든.”
아무리 그래도 ‘시다바리’라니. 민하원 매니저 이미지를 생각해서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지, 너무하네. 윤석진의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알람을 맞춰둔 모양인지 방에서 희미하게 벨 소리가 울릴 때까지 하원과 나는 키스를 했다.
녹화된 드라마는 이미 끝까지 돌아가서 티브이 화면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듯 하품을 쩍쩍 하며 윤석진이 방에서 나올 때까지 정신없이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티브이 화면, 어색하게 앉아있던 우리 둘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윤석진은 이내 드라마 안 보고 놀았지? 하고 우리를 타박했다.
데려다준다는 윤석진의 말에 불퉁한 표정을 짓는 하원을 토닥이고 따라나선 것이 십 분 전의 일이었다.
가는 길에 태워다주겠다며 앞장서는 윤석진을 따라 나와 그의 차에 올라탄 나는 또다시 하원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원이가 널 많이 좋아하나 봐.”
“예?”
윤석진이 알 리 없건만 그의 말에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그렇게 놀라? 그 녀석이 촬영 일찍 끝났다고 너한테 쪼르르 달려간 거 보면 뻔하지.”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 알 수 없어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말은 안 해도 엉덩이 들썩거리는 꼴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았는데 이제껏 참은 게 용하지. 그래도 용주야, 너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예에.”
윤석진이 아는 것일까. 하원이 윤석진에게 말했을까? 나는 힐끗 윤석진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고민했다.
잘근 입술을 깨물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하게 대답을 끌자 윤석진은 쯧쯧 혀를 찼다.
“절대 자장면 이런 거 주면 안 돼. 걔가 그렇게 안 보여도 금방 살이 찌는 체질이야. 신경 안 쓰고 막 먹이면 배에 살 엄청 붙거든. 다행히 얼굴이나 보이는 곳은 잘 안 찌는데 안 보이는 곳에 살이 붙어. 이번에 상반신 노출이 몇 번 있는데, 생각해봐. 배 볼록 나와서 상반신 노출하면 얼마나 쪽팔리겠냐.”
“그러네요.”
나는 입 끝을 끌어 올려 웃으며 윤석진의 말에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윤석진은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윤석진이 알면 그냥 있지는 않겠지.
나는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하원이 형 너무 살 빠진 것 같아요. 얼굴이 홀쭉해져서 좀 놀랐어요.”
“신경 쓸 일이 많은지, 촬영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지 얼굴 살이 좀 내리기는 했더라. 민하원 사전에 신경 쓴다는 것이 있을 리 없지만. 밤마다 잠 안 자고 딴짓이라도 하나. 왜 그렇게 살이 내리는지 모르겠네.”
내 생각으로는 닭가슴살이 문제인 것 같은데. 볼을 긁적이며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지는 않았다.
“종종 놀러 와. 하원이 촬영 일찍 끝나는 날은 같이 모니터링 좀 하고 그래. 민하원 저건 귀찮아서 안 시키면 자기가 나오는 것도 잘 안 보거든.”
윤석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능숙하게 운전을 한 그는 내가 말한 동네의 입구에 차를 세웠다.
“용주야.”
“네?”
내리려는 내 뒤로 윤석진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려던 나는 윤석진의 부름에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원이 그게 좀 맹하고 덜떨어진 것 같지? 그런데 그거 은근히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 하원이가 너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자기 담당 연예인이 일반인이랑 어울려서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 시켜 먹고 다니는 거, 매니저가 몰라서 그냥 두겠냐? 사람 가려가면서 만나야 하고, 말하는 거 웃는 거 입는 거 먹는 거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게 이쪽 애들이야. 내가 아무 생각 없어서 하원이 내돌리는 거 아니다.”
윤석진이 말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어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그가 알고 있는 것일까. 하원과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입 맞추는 것을 보았던가. 그래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나.
나는 숨을 죽이며 조용히 윤석진을 응시했다.
“넌 요즘 애들이랑은 조금 달라. 그래서 하원이가 좋아하는 거겠지. 나도 너 좋아한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원이 주변에 있는 것 같지는 않거든. 그렇지?”
윤석진의 물음에 나는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머리가 아픈 기분이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하자 윤석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종종 놀러 와. 한창 촬영 중이라 바쁘기는 하지만 가끔은 오프인 날도 있고 그렇거든. 어차피 하원이 녀석 따로 놀러 나가거나 하지 않아서 집에만 있으니까 와서 같이 놀아주고 그래.”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빤히 쳐다보고 있자 윤석진이 얼른 내리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시간 늦었다. 얼른 집에 가. 나도 좀 쉬어야지, 나이 드니까 몸이 축나서 안 되겠다. 하원이 녀석 치다꺼리하다가 내가 먼저 죽겠어.”
윤석진의 말에 나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들어가.”
문을 닫고 꾸벅 인사를 하자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한 윤석진이 빠르게 차를 몰아 사라졌다.
윤석진의 차가 희미하게 보이다 사라질 즈음 자리를 지키고 섰던 발을 움직여 느리게 집으로 향했다.
∞ ∞ ∞
“촬영 이제 끝난 거예요?”
힐끗 시계를 보자 네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응. 피곤해 죽겠다.
“새벽부터 촬영이라고 했잖아요.”
―여섯 시부터 시작해서 촬영하다가 장소 옮겨서 또 찍고. 그래도 난 오늘 이걸로 끝이니까. 한숨 돌렸어.
히유, 하고 한숨 내쉬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벌써 몇 시간째야. 여섯 시부터 지금까지면 거의 열 시간이라는 얘기가 된다. 힘들만도 하지.
지친 듯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안쓰러움이 가득 생겨난다.
“식사는 하셨어요?
―응, 아까 점심에 닭가슴살 먹었어. 집에 가서 저녁으로 또 먹고 일찍 자려고. 새벽에 일어나는 거 너무 졸려.
아까부터 목소리가 희미했던 건 졸음이 묻어나온 탓이었나 보다.
집에 가서 저녁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 또 닭가슴살이라는 사실에 마음 아프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그저 하원과 함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먹어야 해요, 그 닭가슴살?”
―글쎄, 나도 모르겠어.
설마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는 아니겠지. 드라마 끝나기 전에 하원의 체력이 바닥나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윤석진에게 넌지시 말해볼까 싶지만 그것은 자신이 간섭할 만한 부분이 아닌지라 그냥 옆에서 지켜보며 속만 끓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식스팩 생기는 건 좋지만 형 건강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용주야.
내 말에 하원이 울먹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나 지금 엄청 감동받았어.
“왜요?”
지금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감동을 받아요? 나랑 전화하고 있는데 누가 뭐 선물이라도 주고 갔어요? 수많은 물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윤석진이 네가 생각하는 거에 반의반만이라도 생각해줬음 좋겠다. 나 요즘 막 눈앞에서 별 보인다. 이러다 분명히 쓰러질 거야.
“쓰러지면 안 되죠. 몸 아프면 바로바로 말해야 해요, 형.”
하원은 내 말에 웅, 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어쩜 이렇게 우는소리 하는 것까지 귀엽지.
―다음에 만나면 그거 해줘.
“뭐요?”
뭘 해달라는 거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요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해준 거 있잖아. 샐러드 같은 거. 나 그때 너 가고 나서 먹기는 했는데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어.
“닭가슴살 냉채 말하는 거죠? 맛없었어요?”
―…….
내 물음에 하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색색 숨만 내쉬었다.
―너랑…… 키스하고 났더니 다른 건 아무 맛도 안 느껴졌어.
이번에는 내 쪽에서 말을 잃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있자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듣고 있어요.”
―아무 말도 없기에 전화 끊긴 줄 알았어.
“순간 좀 당황해서요. 형 지금 제 앞에 없어서 하는 말인데…… 저 엄청 부끄러워요.”
내 말에 하원은 나도 그래, 하고 작게 속삭였다. 붉게 얼굴을 물들이고 웃고 있을 하원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용주 보고 싶다. 어제 봤는데도 또 보고 싶어.
“형 집은 너무 멀어요. 매니저님 집이면 그래도 가까운 편인데.”
―우리 집은 자장면 배달 안 해줘?
“배달 지역 아니에요.”
내 말에 하원은 풀 죽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 개학해서 학교 나가니까 제가 배달 못 해요.”
―아, 맞다. 개학했구나.
“네. 짱개집 아들도 학교는 다녀요.”
―왜 그렇게 말해. 중국집 아들인 게 별것인 것처럼.
하원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너희 집 자장면 엄청 맛있는데. 덧붙인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드라마 끝나면 우리 가게 와서 자장면 실컷 먹어요. 탕수육도 먹고 팔보채도 먹고. 매니저님이랑 같이.”
―잘 나가다 윤석진은 왜 집어넣어? 자장면 맛 확 떨어지겠네.
하원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제는 토요일이라서 가게에 있었던 거야?
“네, 평일에는 늦게 오니까요.”
원래는 주말에도 훈련한다고 늦게 집에 왔었는데. 체육관 지하에 축구부 숙소가 따로 있어서, 그곳에서 숙식 해결이 가능했다. 그래서 주중에는 축구부 숙소에서 생활하고 주말에 빨랫감을 들고 집으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그것도 옛날 말이지만.
―그럼 나는 용주 보려면 주말에나 찾아가야겠다.
“네?”
―평일에는 학교 다니느라 늦게 올 거 아냐. 아, 주말에도 바쁜가? 이제 나랑 놀 시간은 없나?
아이쿠, 어쩌지? 시간 없으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도 느껴져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창 바쁜 배우가 고등학교 남학생을 상대로 생각할 것은 아닌데. 보통은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고요.
“형은 주중이나 주말 상관없이 바쁘잖아요. 저랑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아냐, 나 안 바빠.
내 말에 하원은 바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분명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거다.
한창 드라마 촬영하는 배우가 바쁘지 않으면 누가 바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에도 아니라고 말하는 하원을 핀잔하지는 않았다.
“오늘처럼 주말에 촬영 일찍 끝나게 되면 말해줄래요? 그럼 놀러 갈게요.”
―정말?
“네.”
―정말 올 거야? 주말에 나랑 놀아줄 거야?
“형만 한가하면요.”
바쁜 시간 내야 하는 사람은 유명 연예인이지 한낱 남고생이 아니다. 그것을 하원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휴, 하고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오늘은 안 되겠지?
“형 오늘 촬영 새벽부터 했잖아요. 집에 가서 쉬어야죠.”
―새벽부터 안 하면 이렇게 일찍 끝나지도 않지.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모처럼 딱 부러지는 하원의 대답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다음 주 주말에 꼭 촬영 일찍 끝내고 너 데리러 갈 거야.
“집에 가서 쉬세요.”
―왜? 일찍 끝나면 같이 놀아준다며.
내 말에 하원이 우는소리를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귀여운 짓을 하네. 나는 하원의 징징거림을 들으며 작게 웃음을 삼켰다.
“촬영 끝나고 연락하면 저는 그때 준비하고 출발하면 되고, 형도 시간 맞춰 집으로 가면 되잖아요.”
―아냐, 용주 데리러 갈 거야. 그게 더 좋아.
“그럼 그건 그때 정해요.”
아직 정확하게 정해지지도 않은 일주일 뒤의 일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며 나는 하원과 한참을 대화했다.
피곤에 지친 목소리를 들으며 쉬어야 하니까 그만 전화를 끊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쉽사리 통화를 끝낼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자꾸 욕심이 났다.
“지금 집에 가고 있는 거예요?”
―아직, 석진이가 운전해야 하는데 어디 갔는지 없네.
“피곤하니까 빨리 가서 쉬어야 할 텐데요.”
때맞춰 하원이 작게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까지 피곤하면 빨리 집으로 가야지. 매니저는 뭐 하고 소속 연예인을 저렇게 방치해? 윤석진은 하원을 너무 막 돌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운전은 매니저님이 하시죠?”
―응, 그런데 석진이도 졸려서 눈이 반쯤 풀렸어. 졸음운전으로 훅 갈지도 몰라.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웃으면서 할 소리 아니에요.”
내 말에 하원은 미안, 하고 말했다.
“집에 가서 씻고 푹 쉬세요. 내일도 촬영 있죠?”
―그렇지, 뭐. 용주는 내일 월요일이니까 학교 가겠네?
“네.”
―학교에 휴대폰 가지고 다녀?
“언제 적 말을 해요? 당연히 가지고 다니죠.”
이제는 생활필수품이 된 휴대폰이 아닌가. 수업 시간이나 시험 기간을 제외하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선생님 앞에서도 손에 꼭 들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었다.
게다가 운동부원들은 합숙을 많이 해서 집과 연락할 수단으로 꼭 필요했다.
―나 가끔 문자 보내도 돼?
“네, 답 바로 못 보낼지도 몰라요. 수업 시간에는 못 보거든요.”
―응, 괜찮아.
히히 웃는 소리가 작게 전해져 덩달아 나까지 웃게 되어버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웃는 사이로 희미하게 윤석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니저님 오셨나 봐요?”
―응, 지금 왔어. 이제 집에 가려나 봐.
“그럼 쉬세요.”
―전화 끊으려고?
“네, 끊으려고요. 형 피곤할 텐데 너무 오래 통화하는 것 같아요.”
―안 피곤한데.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도 하품하잖아요.”
내 말에 하원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뭐해. 소리로 다 들리는데. 하원의 행동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나는 쯧쯧, 혀를 찼다.
이렇게 허술하게 귀여워서 어쩌라는 건지. 정말이지 못 살겠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꾸욱 누르면서도 결코 싫지 않았다.
“집에 조심해서 가시고 푹 쉬세요.”
―응, 용주도 쉬고. 내일 연락해도 되지?
“네.”
정말이지 그런 건 내 쪽에서나 물어봐야 하는 거라니까 그런다. 어느 누가 그저 평범한 남학생에게 연락해도 되냐고 묻겠냐고. 민하원 말고 그럴 사람 아무도 없음을 알까 모르겠다.
통화를 끝내기 싫은 마음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목소리로 잘 자, 하고 말하는 하원을 향해 나는 네, 하고 답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직 네 시밖에 안 되었는데 잘 자라는 인사는 너무 이르잖아요. 그럼에도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지어졌다.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리며 누나가 들어왔다. 탐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른 척하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괜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자신의 책상으로 가 올려둔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누나가 서용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왜 부르는지 뻔히 알 것 같은데 모른 척 대답하자 누나가 샐쭉 눈을 흘기며 바라보았다.
“누구랑 통화했어?”
“남이 누구랑 통화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네가 지금 전화하면서 시시덕거릴 때야?”
“아닐 건 또 뭐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틀어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너…… 연애하냐?”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돌려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누나는 학교 다닐 때 연애 한 번 못 해봤구나. 조금 슬프지 않아?”
“전혀 슬프지 않거든.”
입술을 앙다물며 누나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대답했다. 으득, 이 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지금 누군가를 만나봤자 그건 한때야.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그걸 모르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쓴다면 결국 후회해봤자 되돌릴 수 없어.”
“중요한 게 뭔데? 공부? 대학?”
윈도우 화면이 켜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의미 없이 물었다.
“지금은 공부가 별건가 싶지? 대학이 뭐라고 그렇게 열을 올리나. 그런데 그게 다 별것이야. 공부가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데 말이야, 우리 인생에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은 확실해. 우리가 고3 때까지 하는 공부는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이고, 대학을 갈 수 있는가, 어느 대학을 갈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의 인생이 앞으로 몇 점짜리가 될 것인지를 좌우해.”
누나는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알고는 있는데, 누나. 누나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조금 슬프다. 누나도 나도 아직 어른이 아니잖아. 그런데 벌써부터 그렇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게 슬퍼.”
“나이를 먹어야 현실적이 되는 건 아니야. 네가 돈 때문에 전지훈련을 못 가고, 축구부를 관둔다고 말했을 때부터 너 역시 현실적이 되어버린 거야.”
뒤적거리던 책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책상에 걸터앉은 누나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대학 등록금이랑 엄마 수술비 때문에 너도 부담 많이 느끼는 거 알아.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용주야. 너 참 착한 동생이고, 착한 아들인데 말이야 좀 멍청한 것도 사실이야. 조금 이기적으로 훈련비 달라고 손 내밀어서 훈련 갔다 오는 게 내 생각으로는 더 현명한 것이지 않았을까 싶어. 백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야. 그렇다고 백만 원 없어서 우리가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니야. 조금 더 힘들겠지만 못 살 정도도 아니야. 네가 이제까지 해왔던 축구를 중도에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누가 백만 원 때문에 축구 때려치웠대?”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답하며 누나를 흘겨보았다.
“축구 때려치우면 뭐 할래? 너 정말 공부할 거야?”
누나는 의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공부? 기초도 하나 없는 주제에 공부? 공부가 제일 돈이 안 들기는 하지. 그렇기는 한데 기초 없는 상태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그것도 힘들지 않겠냐?”
누나는 쯧쯧 혀를 차며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괜히 안 되는 머리 가지고 공부한다고 설치지 마. 그러다 머리 터진다. 더하기도 못 하는 놈이 곱하기 진도를 어떻게 따라갈 거야?”
“더하기랑 곱하기 다 할 줄 알거든?”
“말이 그렇다는 얘기야. 지금 한창 시그마 배우겠네.”
시그마는 뭐야. 다시마는 들어봤어도 시그마는 금시초문인데. 그렇지만 나는 의연한 얼굴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헛짓하지 말고 축구나 계속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건 축구밖에 없으면서 그거 때려치우면 뭐 하려고?”
“내가 알아서 해.”
“물론 네 인생이고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야. 요즘 엄마나 아빠 모두 너 눈치 보는 거 몰라? 돈 없어서 하고 싶은 거 맘대로 하게 해주지도 못한다고 속상해하셔. 사춘기라고 유세 떠는 거 아니면 적당히 해.”
누나는 내 머리를 손으로 꽈악 누르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너 연애질 할 때도 아니란 거 알아둬.”
∞ ∞ ∞
축구부 숙소를 집보다 더 친숙하게 여겼던 때가 있었다.
일 학년 때에는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선배들의 눈치를 보느라 편히 쉬지도 못했는데, 일 년 동안 선배들 수발들어주면서 구르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집에서는 안 하던 운동화 빨래도 하고, 집에 가기가 귀찮아 숙소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일도 늘었다. 그만큼 짐도 늘어나서 개인 사물함 안에는 옷과 잡다한 물품이 가득했다.
사물함에 구깃구깃 넣어두었던 옷들을 꺼내 롤백에 옮겨 담고 있으려니 그것도 다 옛날 일이구나, 하고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 년 넘게 굴렀으면 오래되긴 했지. 빨지 않고 구겨서 넣어둔 옷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여름 동안 처박아둔 것도 있으니 냄새가 날 만도 했다. 집에 가서 세탁기에 넣고 한 번에 돌려야겠다.
빨지 않은 속옷도 있네. 별다른 감흥 없이 롤백에 쑤셔 담고 지퍼를 잠갔다.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한 짐이다. 아직 챙기지 못한 것도 있는데.
축구부 숙소에 책이 있을 리는 없고. 널어두었던 운동화랑 팬티를 걷고 있는데 숙소 문이 열리며 동민이 들어왔다.
조용한 숙소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슬렁슬렁 다가왔다.
“뭐 해?”
“보면 몰라? 짐 챙겨.”
롤백에 운동화와 속옷을 쑤셔 넣으며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빨지 않은 속옷이랑 섞이겠네. 어차피 빨았다고는 하지만 찝찝하기도 했으니까 한 번 더 빨지, 뭐.
따로 담기가 귀찮아 나는 편하게 생각하자며 울퉁불퉁한 롤백을 주먹으로 툭툭 쳐서 평평하게 만들었다.
“정말 축구부 나가려고?”
“그럼 뭐 가짜로 나가겠냐?”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하나. 나는 박동민을 향해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더 챙길 것이 없나 숙소를 둘러보고 있자 동민이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갑자기 그만둬?”
“갑자기 아니야. 방학 전에 그만둔다고 말했는데 감독 샘이 말을 콧구멍으로 처먹었는지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형들이 벼르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렇게 말하는 박동민은 제법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학년에 올라와 같은 반이 된 박동민은 사교성이 좋다거나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반에 같은 축구부라는 인연 때문인지 가까워진 사이였다.
나름 생각해주고 있음이 얼굴에 보여 나는 동민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어차피 트집 잡아서 굴리는 게 특기인데 그냥 넘어가겠냐.”
“왜 그만두는데?”
동민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의미 없이 손으로 툭툭 치고 있던 롤백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넌 네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
“내 실력?”
“졸업하면 프로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겠거니 생각하냐?”
“글쎄.”
“딱 나오는 답이 없지?”
“뭐, 지금은.”
동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 말에 긍정했다.
“그게 이유야.”
내 말에 동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라서 나는 피식 웃었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서 그만두는 거라고 말하는 거라면 차라리 시작도 하지 말지. 이 바닥에 재능 있는 새끼들만 있는 줄 아냐? 다들 피 터지게 노력하…….”
“알아.”
열이 오른 얼굴로 제법 언성을 높여 말하는 동민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뿐이지 특별히 재능이 있는 건 아냐. 그래서 나도 더 열심히 노력하자, 그러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그 노력을 하는 기간 동안 과연 우리 부모님이 나를 지탱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부모님이 관두래?”
“설마 그랬겠냐.”
나는 동민의 어깨를 툭 밀치며 껄렁하게 답했다.
“그냥 내가 이렇게까지 투자할 가치가 있는 놈인가 생각해보니까 별로 그럴 가치는 없는 놈인 것 같아서. 그럴 바에야 조금이라도 일찍 손 떼는 게 낫지 않나 싶었어. 어영부영 돈은 돈대로 버리고 프로로 나가지도 못하고 이름도 없는 무명 선수 백날 하다가 결국 짱개 배달이나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이름 없는 무명으로 살지 프로로 나가서 돈을 긁어모을지 어떻게 알아?”
“지 앞날도 장담 못 하는 새끼가 남한테 훈수야.”
나는 씨익 웃으며 동민을 바라보았다.
“무작정 좋아서 하는 나이는 지났다는 생각이 들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좋은데, 이제는 옆도 보고 뒤도 보고…….”
“넌 운동하는 새끼가 쓸모없는 생각을 많이 해.”
아, 씨발. 머리 아파. 박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까치집이 되어버린 녀석의 머리를 보며 나는 쯧쯧 혀를 찼다.
“형들이 널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는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지랄 쌈 싸 먹는 소리 하고 있네.”
“쌈 싸 먹는다는 소리 하니까 배고프다.”
배를 문지르며 말하자 박동민이 내 뒤통수를 손으로 꽈악 잡아 눌렀다. 지압을 해주는 거면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 이건 도가 지나쳤다. 으, 아파. 신음을 내자 녀석이 더 세게 내 머리를 꾹꾹 눌렀다.
“네가 웃기지도 않게 잡생각을 많이 하니까 널 싫어하는 거야. 넌 가끔 멍 때리면서 병신 같은 생각 많이 하잖아. 이해 못 할 소리도 하고.”
“원래 이 나이는 사색에 잠길 나이야.”
“멋대로 가져다 붙이지 마.”
한참을 내 머리에 분풀이하던 박동민은 털썩 바닥으로 드러누웠다.
“축구 관두면 뭐 하려고.”
“글쎄…… 공부?”
내 말에 박동민이 박장대소를 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마구 쳐대며 웃는 동민의 웃음소리가 숙소를 가득 채웠다. 그것이 듣기 싫어 나는 손으로 녀석의 입을 막았다.
동민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손을 떼자 녀석이 허억허억 하고 숨을 내쉬었다.
“죽이려고 작정했냐?”
“차라리 죽이고 싶다.”
지그시 노려보자 박동민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교과서는 있어?”
“교실 사물함에.”
“씨발, 내 건 누가 다 훔쳐 갔더라.”
동민은 욕설을 뇌까리며 분하다는 듯 말했다.
“요즘은 ABCD도 안 알려줘.”
알아. 방학 때 영어책 펴봤다가 기겁했다. 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테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뇌까지 근육인 새끼가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너 우리 누나랑 만나냐?”
“뭔 헛소리야?”
“우리 누나도 그런 소리 했거든.”
내 말에 동민이 낄낄 웃었다.
“일 학기 성적표 등수 기억나? 너랑 나랑 뒤에서 한 등수 차이거든? 그런데 공부? 우리 부모님은 그래, 차라리 축구나 해라. 이러시던데. 그 성적표 보신 네 부모님은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시든?”
그 성적표 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부모님한테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기억도 안 나네. 나는 허허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공부로는 미래가 안 보이고, 축구도 글러 먹었으면 난 이제 뭐 해야 하나.”
“축구 해. 하던 거나 해.”
“역시 우리 누나 만나는 게 분명해.”
지그시 눈을 뜨고 박동민을 바라보자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발이 날아왔다. 몸을 굴려 그것을 피하며 나는 녀석을 향해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형들 오기 전에 나 간다.”
“훈련 그렇게 빠지다 너 진짜 끌려가서 죽게 처맞아.”
“나 축구부 나왔거든요.”
훈련할 필요 이젠 없다는 의사를 담아 말해보지만 박동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식으로 말한 거 아니라서 형들 지금 빡 돌기 직전이야. 너 훈련 이리저리 빠진다고 한번 손봐주겠대.”
“난 정식으로 나왔어. 감독 샘이 아무래도 나 엿 먹으라고 이러는 거 같지 않냐?”
“널 엿 먹여서 뭐하려고?”
“그렇지 않으면 방학 전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는데도 아직까지 질질 끌고 있는 이유가 뭐야? 더 받아먹을 것도 없는데 그만 내보내지. 이건 아무래도 엿 먹으라는 것밖에 안 돼.”
“그래, 엿이나 처먹어라.”
박동민은 나를 향해 중지를 세워 흔들었다. 남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박동민을 향해 같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흔들어주며 나는 씨익 웃었다.
“들키기 전에 가련다.”
“밤길 조심해, 새끼야.”
바닥에 뒹굴고 있는 롤백을 주워 들고 걸음을 옮겼다. 누워있던 박동민이 일어나 앉아 나를 바라보았지만 따라올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고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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