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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장면 촬영이라서 행복해.]
[그럼 음식 진짜 먹어요?]
드르륵, 하고 울리는 핸드폰을 보니 하원의 문자였다. 문자에서조차 하원의 행복함이 느껴지는 듯해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바로 보낸 답장이었건만 촬영에 들어갔는지 기다려도 문자는 오지 않았다.
[응. 나 밥 한 그릇 먹었어. 윤석진이 운동 세 배로 시킨대. ㅠㅠ]
답문이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거의 서너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이 시간 동안 계속 밥을 먹지는 않았겠지.
우는 표정이 실감 났다. 왠지 하원의 징징거리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해서 나는 또 웃어버렸다.
[지금까지 촬영해요? 시간 늦었는데 밥 먹은 거예요?]
[응, 이제 다 먹었어. 먹는 장면 끝.]
이번에는 이모티콘이 없었지만 아쉬움이 듬뿍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자 하나에도 감정이 전해지는 것은 민하원의 능력일까, 내가 중증인 걸까. 손으로 턱을 괸 채로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생각했다.
[벌써 열한 시인데 설마 운동시키겠어요? 그것도 세 배로?]
[날 새고 운동시키려나 봐. 윤석진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분명히 삐죽 입술을 내밀고 있을 테지. 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하원의 얼굴에 킥킥 숨죽여 웃었다.
이게 바로 ‘민하원앓이’인가. 미치겠다. 조만간 하원이 촬영하는 세트장까지 따라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하원이 형, 하고 소리를 지르게 되지는 않을까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것이 그리 머지않은 미래 같아. 꽤나 두려운 상상임에 틀림없었다.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데, 그것이 걱정 때문은 아닌 듯 드르륵드르륵 소리가 울렸다.
전화다. 민하원, 하고 액정 위로 뜬 글자를 보고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여보세요.”
―자는 거 아니지?
“이제 겨우 열한 시인데요. 그리고 방금 전까지 문자 했잖아요.”
―그래도 그사이에 잠들었을 수도 있잖아.
늦은 시간인데도 민하원의 목소리는 활기차게 울리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아니, 밥 먹어서 그런지 막 힘이 나.
하원의 말에 나는 웃었다. 어떻게 보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보다 더 단순한 사람인 것 같아.
설마 사탕 준다고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거나 하지는 않겠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설마 하고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그저 나의 기우일 뿐일까.
“촬영은 끝났어요?”
―다른 장면 찍고 있어. 난 이다음 장면 촬영 기다려.
“그럼 잠깐 시간 난 건데 좀 쉬죠.”
―내가 전화하는 거 귀찮아?
생각해줘서 말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저거다. 너무하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휴대폰 너머에 있는 하원이 알 수 있을 리도 없는데.
“형 피곤할까 봐요. 벌써 열한 시 넘었는데 촬영 언제 끝나요?”
―글쎄, 모르겠어. 오늘은 좀 늦게 끝날 것 같아.
아직 몇 장면 더 찍어야 한다면 앞으로도 꽤 오래 있어야 할 모양이다.
늦게까지 하겠구나 싶어 걱정이 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었다고 비교적 활기찬 목소리인지라 그나마 다행이기도 했다.
“무슨 반찬 먹었어요?”
―쌀밥에 김치찌개.
“고기 이런 건 없고요?”
―생선 있었는데 식어서 비린내 나. 반찬 몇 가지 있었는데 김치찌개가 제일 맛있었어. 그거랑 밥 한 공기 뚝딱.
통통 튀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하원이 그 밥 한 그릇에 얼마나 행복해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유명 연예인 민하원이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촬영하면서 먹는 김치찌개에 좋아 죽겠다고 말하는 남자를 누가 유명 연예인이라고 생각하겠어.
나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면서도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뒤로도 촬영 오래 해야 하면 딱히 운동하지 않아도 열량 소비 다 되겠어요.”
―석진이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분명 뾰로통한 얼굴일 거다. 항상 매니저에 대해 말할 때에는 볼을 부풀리고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되어서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늦게까지 촬영하면 내일은 어쩌려고요.”
―오늘 못 끝내면 내일도 이어서 해야 해. 그래서 오늘 좀 늦게까지 촬영하더라도 끝내려고 하는 거야.
“너무 늦지 않게 끝나면 좋을 텐데요.”
―새벽까지 해도 내일 촬영 없는 게 더 좋아. 내일 올 거지?
시간을 보니 열두 시에 가까웠다. 이제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해야 하나. 암묵적으로 만나기로 한 토요일. 나는 네, 하고 답하며 웃었다.
“제가 문제가 아니라 형 촬영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내일 촬영 절대 안 할 거야. 안 해, 못 해. 새벽까지 찍는 한이 있어도 내일 촬영 절대 안 한다고 할 테니까 내일 꼭 와야 해.
“그게 어떻게 형 마음처럼 되나요?”
―난 한다면 해!
꽤나 자신감에 차 있는 목소리여서 나는 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원은 안달 난 목소리로 재차 내일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오늘 촬영 끝나면 내일 스케줄 말해주죠?”
―응.
“그럼 문자로 내일 스케줄을 저한테 알려주세요. 촬영이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언제부터인지. 그럼 그거 보고 제가 언제 가면 되겠구나 알 수 있잖아요.”
내 말에 하원은 잠시 생각하는지 음, 하고 말을 끌었다.
―새벽에 촬영 끝날지도 모르는데 문자 해도 돼?
“저 문자 소리에 잠 깰 만큼 예민하지 않아요.”
알람을 맞춰놔도 아침마다 일어나지 못해서 엄마가 큰소리를 내며 깨워줄 정도로 둔한 편에 가까웠다. 새벽 훈련도 겨우겨우 기어나갔었는데, 뭐.
괜찮다고 하자 하원은 착하게도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럼 조금 쉬고 촬영 잘하세요.”
―용주는 푹 자고 내일 꼭 보는 거야.
“형 스케줄 보고요.”
―아냐, 내일 꼭 보는 거야.
이래서야 한도 끝도 없겠다. 투정부리는 아이 달래듯 나는 네, 네, 하고 답하며 웃었다.
―용주 보고 싶어 죽겠다.
한탄 조로 내뱉는 하원의 말에 작게 웃던 나는 얼굴을 붉혔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들이마셨다.
―일주일 지났는데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용주 얼굴이 막 눈앞에서 아른거려. 어떨 때는 엄청 선명하게 보이고, 어떨 때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것처럼 아득해. 나 병 걸린 것 같아.
그런 말은 제발 사람 앞에 두고 하지 말아요. 나야말로 심장에 무리가 와서 쓰러질 것 같으니까.
남은 숨도 못 쉬게 만들어놓고 조잘조잘 잘도 떠드는 민하원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형이 그런 말 하면 전 심장이 쿵, 쿵 내려앉아요.”
―왜? 좋아서?
“네, 좋아서요. 그거 엄청 직격타거든요.”
솔직하게 내뱉은 말에 하원이 하하, 웃었다.
―그럼 너도 나 보고 싶다고 말해.
속삭이듯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취한 것처럼 눈을 감은 나는 열기가 담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보고 싶어요, 하원이 형.”
―으으.
하원은 내 말에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왜 그래요?”
―너…… 목소리 엄청 야해.
하원의 말에 또다시 얼굴로 열이 올랐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변성기 들어선 목소리가 어디가 야해요.”
―아냐. 지금 엄청 저음으로 깔리면서 오싹했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나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심장에 좋지 않아. 그냥 즐겁고 좋기만 하던 통화가 이제는 음란 전화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빨리 통화를 끝내는 것이 좋겠다 싶은데 막상 전화를 끊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휴, 씬 끝났나 봐. 다음 씬 촬영 들어가. 나 가봐야 해.
“아, 그래요?”
다행스럽게도 하원의 차례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어서 가보세요. 통화한다고 쉬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요.”
―그래도 멍하게 앉아서 있는 것보다 용주랑 통화하는 게 더 좋아. 나 지금 얼굴 빨개졌는데 촬영 어떻게 하지?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나 역시도 열이 오른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있는 상태라 하원의 입장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런 하원에게 손부채질 하세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촬영 빨리 끝내고 쉬세요. 문자 보내는 거 잊지 말고요.”
―용주 부끄러워하는 거야?
“촬영이나 하러 가세요.”
킥킥 웃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일부러 불퉁한 목소리로 답하자 하원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하게 울리는 하원의 웃음소리에 나 역시도 작게 따라 웃었다.
“내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응, 문자 할게.
“촬영 힘내세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원은 잘 자, 하고 작게 속삭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은 손바닥 안에서 열기를 내고 있었다. 내일 만나요. 끊어진 휴대폰을 향해 나는 작게 속삭였다.
∞ ∞ ∞
[오늘 촬영 더 안 하려고 새벽까지 했어. 오늘 오는 거지?]
문자 도착 시각이 새벽 네 시 오십이 분. 문자 확인을 했을 때는 일곱 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문자를 보내려다 말았다.
집에 가서 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참 꿈나라일 시간인 듯싶어서, 나처럼 둔한 신경을 가진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닌지라 혹시나 문자 소리가 하원의 잠을 깨울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정오를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하며 턱을 긁적거렸다.
지금쯤이면 괜찮으려나. 새벽까지 촬영을 한 탓에 피곤한 데다 다른 일도 없다고 했으니 쭉 자고 있을 거다.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고민하다가 일단 집을 나섰다.
근처 가서 연락해도 늦지는 않겠지. 아파트는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한 동 호수는 기억나질 않아서 어차피 혼자 찾아갈 수도 없었다.
하원의 아파트 근처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나는 휙휙 지나치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벌써 가을이구나. 가로수들이 조금씩 색을 바꿔가는 모습을 보며 멍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교복도 춘추복으로 갈아입었지.
요즘은 날씨가 극과 극이라서 더우면 여름, 추우면 겨울이다. 봄가을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춘추복을 입는 가을이라고 해봤자 아직까지 더위가 물러나지 않아 여름과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등교 시간 교문을 지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넥타이는 실종 상태, 셔츠의 윗단추 두 개는 풀어두고 소매도 걷어 올려 반팔과 다름없었다.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셔츠 안에 반팔 티를 입어 가끔은 셔츠 앞단추를 완전히 풀고 다니기도 했다. 이러다 금방 겨울이 오겠지.
하원의 아파트 근처 정거장에서 내린 나는 커다란 마트를 발견하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자기 전에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본 닭가슴살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사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닭가슴살 냉채는 한 번 했으니까 다른 거 해봐야지.
무빙워크를 타고 식품 매장으로 내려가 야채 코너로 향했다.
색색의 파프리카가 한 개씩 들어있는 봉지를 집어 들고 나오려다 과연 하원의 집에 달걀이 있을까 고민했다. 달걀 없으면 큰일인데. 집에서 음식을 해 먹지 않는다고 했으니 달걀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고민하다 달걀이 담긴 팩도 집어 들었다. 아무리 음식을 해 먹는 집이 아니라고는 해도 소금, 후추 정도는 있겠지.
계산을 하고 나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하원의 아파트로 슬렁슬렁 걸음을 옮겼다.
슬슬 전화를 해볼까. 잠들어있다면 깨우기가 미안한데. 매니저한테 연락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윤석진의 피곤에 찌든 얼굴이 떠올라 또 고개를 내저었다.
어쩐다. 조금 곤란한 마음이 되어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정말 기적적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반가운 마음이 되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보세요.”
―용주야,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는지 여전히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전화 안 하길 잘했다. 몇 분 차이는 없었을지언정 스스로 일어나는 것과 벨 소리에 억지로 깨어나는 건 기분이 다르니까.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서 걸음을 멈추고 나는 하원의 물음에 네, 하고 답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나 확인하고 일어났느냐고 묻는 것일까. 아마 그런 정신도 없는 듯 느껴졌다.
―어디야?
“형네 아파트요.”
―어디?
“형네 아파트요.”
이해를 하지 못했는지 하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겠지. 아니면 베란다 너머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답 없는 하원을 향해 나는 형, 하고 불렀다.
―우리 아파트에 지금 와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조금 높아진 목소리에 웃으며 답했다. 으아, 하고 알 수 없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에구구, 하고 신음도 들렸다.
“형, 괜찮아요?”
―응,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굴렀어. 왜 연락도 안 하고 그냥 왔어? 그럼 지금 오고 있는 거야?
“네, 그렇기는 한데 몇 동 몇 호인지 모르잖아요.”
―아, 맞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 나 세수만 하고 모자 쓰고 나가면 금방이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발소리에 나는 작게 웃었다.
“형, 그러지 말고 몇 동 몇 호인지 말해주세요. 그럼 제가 찾아갈게요. 그동안 형은 씻으면 되잖아요.”
―어, 찾아올 수 있어?
“네, 그러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있을 하원이 떠올랐다. 그럼 얼른 와. 곧장 전화를 끊으려는 하원을 불러 몇 동 몇 호인지를 알아내고 통화를 끝냈다.
왠지 조금 지치는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원의 집으로 찾아가는 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려야 하나, 벨을 눌러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열리는 문틈으로 얼굴을 빠끔 내밀며 하원이 배시시 웃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씻고 나온 모양인지 얼굴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피곤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뽀얀 얼굴로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빨리 들어와.”
하원은 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하원의 집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는 것과 한층 더 어질러져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꽤나 더럽구나 싶은 생각에 발 디딜 틈 없는 거실을 내려다보고 있자 하원이 헤헤, 하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지르는 건 잘하는데 치우는 건 못한다고 석진이도 만날 구박해. 좀 더럽지? 있어봐, 금방 치울게.”
그렇게 말한 하원은 난장판이 되어있는 거실로 향했지만 가만히 지켜본 결과 오 분이 지나도 뭔가를 치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형, 머리에서 물 떨어져요.”
“그래? 대충 닦았는데.”
“대충 닦았으니까 그렇죠. 가서 머리 말리고 오세요.”
내 말에 하원은 착하게도 응,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풀나풀 뛰어간 하원의 흔적처럼 물방울이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저렇게 물을 흘리고도 미끄러지지 않은 게 용하다.
거실을 어지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벗어둔 옷이었다. 입었다 벗어둔 옷, 뒤집혀 있는 옷, 꺼냈다가 넣어두지 않은 모양인지 접혀져 있는 옷이 다양하게 거실 바닥과 소파에 뒹굴고 있었다.
그것들을 집어 차곡차곡 개어 소파 한쪽에 올려두자 그나마 거실 바닥이 나타났다.
“매니저님이 오셨다 갔나 봐요.”
“응?”
“이거 맥주 캔이요.”
다이어트한다고 닭가슴살만 먹는 사람이 맥주에 육포를 먹었을 리가 없다. 옷 아래에 깔려서 보지 못했던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육포를 내려다보며 묻자 하원이 응, 하고 욕실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하원은 힘들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매니저라는 사람이 참 잘하는 짓이다.
쯧쯧, 혀를 차며 휴지통을 가져와 맥주 캔과 굴러다니는 육포를 모조리 쓸어 담았다. 이 위에 있었으니 옷도 다시 다 빨아야 할 성싶었다.
아무튼 다이어트하고 있는 연예인 집에서 술 마시는 매니저나 도통 치울 줄 모르는 듯 보이는 연예인이나 다를 게 없다.
걸레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소파 아래 구석에 처박혀 있는, 곰팡이가 피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넝마 조각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손이 썩어들어갈 것 같다. 아무리 살림하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너무하네.
“용주 뭐 해?”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온 하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거실 치워요.”
인간적으로 정말 더럽네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런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벌레가 기어 다닐 것처럼 더러웠던 거실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 왜 안 말리고 다시 나와요?”
“잘 안 말라.”
“형이 잘 안 말리는 거죠. 이리 와서 앉아요.”
내 손짓에 쪼르르 다가온 하원이 내게 수건을 건네고는 소파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근히 눈치는 있는 모양이지. 하원에게서 받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작게 웃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햇빛에 눈이 부신지 하원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형 아직도 졸리죠?”
“아냐, 안 졸려.”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웅얼웅얼 잠꼬대처럼 들려왔다.
아이 피부처럼 뽀얀 얼굴, 웅얼거리는 것과 함께 움직이는 입술, 예쁜 눈동자를 감추고 있는 눈꺼풀, 나른하게 떨리는 속눈썹.
그저 내 허벅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을 뿐인데도 가슴 떨리는 감동을 전해주는 이 얼굴이 참으로 신기했다.
조물조물 소꿉장난을 하듯 부드러운 하원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만지작거리던 것도 잊은 채 나는 하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원이 호흡할 때마다 작게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쁘다. 진심으로 생각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이 하원의 뺨을 감쌌다.
감고 있는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왜?”
슬쩍 뺨에 닿았던 입술을 떼어내자 하원이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이 예뻐서요.”
약간은 갈색이 도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나는 작게 속삭이듯 답했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었다.
형이 너무 예뻐서요. 그에 하원이 눈을 감고 작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용주가 더 예뻐.”
“전 엄청 평범하게 생긴 거예요. 제가 예쁘면 세상에 안 예쁜 사람이 없어요.”
게다가 예쁜 게 뭐야, 차라리 위로해줄 거면 멋있다고 해주지.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운 뺨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불퉁한 마음과는 달리 속없이 웃었다.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웃게 되어버린다. 이 사람이랑은 싸우지도 못할 거다.
“배 안 고파요?”
“고파. 속에서 막 꼬르륵거려.”
“소파 한쪽에 둔 옷이요. 보고 빨 옷과 다시 넣어둘 옷으로 나눠서 두세요. 아까 보니까 맥주랑 육포 위에 굴린 것도 있고 그래서 빨아야 할 것도 꽤 되는 것 같던데요.”
“그래?”
그러면서도 하원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형, 빨래나 청소는 누가 해요?”
“석진이가 일주일에 두 번씩 일하는 아줌마 불러줘.”
“와, 아줌마가 엄청 욕하겠어요. 더럽다고.”
“응, 저번에는 나 있을 때 와서 청소하셨는데 나보고 얼굴 빼면 쓸모없는 놈이랬어.”
꿍얼거리는 입술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큭큭 웃어버렸다.
“옷이라도 좀 치워두세요. 서 있을 자리도 없어요.”
“석진이는 잘 앉아있어.”
그거야 면역이 되었으니까. 이 난장판 속에서 맥주랑 육포를 먹다 버려둔 것으로 봐서는 윤석진이나 민하원이나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빨리 옷 좀 정리해둬요. 전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고기?”
“닭가슴살이요.”
눈을 반짝 빛내며 묻는 하원을 향해 말하자 피이, 하고 입술이 나왔다. 빵빵하게 부풀린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설픈 기억을 더듬어 주방으로 가자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가 보였다.
“형은 뭐 해 먹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거짓거리가 이렇게 많아요?”
“윤석진이 와서 처먹고 가서 그래.”
“매니저님 나쁘네요. 형은 닭가슴살만 주고 혼자 뭘 그렇게 먹어요?”
“혼자 겁나 잘 처먹어. 나는 막 배고파 죽겠는데 혼자 컵라면 먹고, 빵 먹고, 맥주 마시면서 안주 없으면 내 닭가슴살까지 구워 먹어. 엄청 나쁘지?”
“그러게요. 매니저님 안 되겠네요.”
한쪽에 쌓여 있는 컵라면 용기를 잘 포개어 두고 개수대에 이리저리 뒹굴어 다니는 컵과 그릇들을 먼저 설거지했다.
하원이 먹는 것이라고는 닭가슴살뿐인데 음식 찌꺼기가 이것저것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매니저가 여기서 종종 식사를 하고 간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건 매니저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닭가슴살만 먹는 사람 앞에서 혼자 다른 것을 먹다니 꽤나 얄밉다.
“어, 설거지해? 그냥 두면 아줌마가 와서 해주실 텐데.”
쪼르르 주방으로 따라온 하원이 내 뒤에 서서 빠끔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그럼 지금 당장 요리는 어떻게 해요?”
물에 헹궈 비누기를 제거한 그릇들을 식기 건조대에 올려두고 몸을 틀어 하원에게서 빠져나왔다. 뒤에서 껴안듯이 서 있던 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형, 옷 하나도 안 치웠잖아요.”
거실에 그대로 놓여 있는 옷을 보며 말하자 하원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흘렸다. 과연 저것이 뜻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밥 먹고 방에서 놀자. 방은 깨끗해.”
치우기 싫다는 마음이 빤히 보이는 얼굴이라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출입문 가까이에 가방과 함께 내려놓았던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일단 먹이자. 먹이고 나서 치우든 하자. 주방으로 돌아오자 하원이 다시 등 뒤로 찰싹 달라붙었다.
“저번에 해줬던 거 하는 거야?”
“아뇨, 오늘은 다른 거예요.”
“샐러드 말고?”
“네. 샐러드 말고.”
다행스럽게도 소금이나 후추 같은 조미료는 있어서 그것들을 꺼내두었다.
닭가슴살을 냉장고에서 꺼내 포를 뜨듯 얇게 펼쳐 칼등으로 자근자근 두드리고 있자, 어깨 위에 턱을 기대고 있던 하원이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는 몸을 기대왔다.
“형, 칼질하는데 그러고 있으면 위험해요.”
“나 가만히 있는데 위험해?”
네,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차마 밀어낼 수 없어서 나는 말 없이 집중했다.
어느 정도 부드럽게 두드린 닭가슴살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밑간을 살짝 해두고 프라이팬을 꺼냈다.
달걀을 풀어 프라이팬에 지단을 부쳐두고 파프리카를 물에 깨끗이 씻었다. 색색의 파프리카가 알록달록 예쁘기도 하다.
일정한 크기로 채 썬 파프리카를 옆으로 밀어두고 지단을 도마 위에 접히지 않도록 조심해서 펼쳐놓았다. 그 위에 녹말가루를 고르게 펴 발라주고 밑간을 해둔 닭가슴살을 올렸다.
“계란말이 하는 거야?”
“비슷해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하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닭가슴살 위에 썰어두었던 파프리카를 올리고 조심조심 김밥을 마는 것처럼 돌돌 말았다.
“형, 찜기 있어요?”
“찜기?”
고개를 돌려 하원을 향해 묻자, 찜기가 뭐야? 하는 표정이 돌아왔다.
물어본 제가 죄인입니다.
찬장을 뒤져 적당한 냄비와 체를 꺼냈다. 물을 조금 담은 냄비에 체를 걸치고 그 안에 닭가슴살말이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게 찜기야?”
“이 대신 잇몸이요.”
“잇몸?”
“없으니까 임시방편으로요.”
뚜껑을 덮고 가스 불을 켰다. 이대로 쪄지기만 기다리면 되겠지. 싱크대를 정리하고 뒤로 돌아서자 그때까지 뒤에서 찰싹 달라붙어 있던 하원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많이 배고파요?”
“아니, 조금.”
얼굴은 엄청 배고픈 표정이다. 하원의 손을 잡아당겨 테이블 의자에 앉혔다.
“십 분 정도만 찌면 된대요. 새벽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자고 일어났어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묻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문자 보내고 기절했어. 왜 전화 안 했어? 내가 안 일어났으면 어쩔 뻔했어?”
“아파트 근처 도착하면 전화하려고 했어요. 전화하려고 한 순간에 형이 전화한 거예요.”
“정말?”
“네. 정말이요. 신기하죠?”
웃으며 말하자 하원이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눈이 딱 떠졌어. 용주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나서 바로 전화한 거야.”
“어쩐지 금방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목소리였어요.”
아직까지도 잠이 묻어있는 눈가를 손으로 쓸자 그 손을 잡은 하원이 제 뺨을 비벼댔다.
약간의 온기가 손바닥 너머에서 전해져왔다. 그것이 묘하게 가슴을 간질이고, 배꼽 아랫부분을 간질이고, 묘한 곳을 꽉 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하원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냈다.
“오늘은 촬영 없고, 내일은 있어요?”
“사실 오늘도 촬영하기는 하는데, 내 장면은 없어서. 난 내일 새벽에. 만날 새벽에 불러내. 사람 잠도 못 자게.”
“오늘 일찍 주무셔야겠어요.”
“아냐. 용주랑 놀다가 늦게 잘 거야.”
“저는 조금 있다가 집에 갈 건데요.”
내 말에 하원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갈 거야? 언제? 일찍 가려고?”
“아뇨. 저녁에 해 떨어지면 갈 거예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하원을 앉히고 나는 가스레인지 쪽으로 다가갔다. 거의 다 쪄진 것 같다.
가스 불을 끄고 잠시 기다렸다가 냄비 뚜껑을 열어 닭가슴살말이를 꺼냈다. 그새를 못 참고 다가온 하원이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래도 일찍 갈 거 아니지? 늦게 갈 거지?”
“형 일찍 자야 하니까 되도록 일찍 갈 거예요.”
“늦게 가라. 내가 차로 태워다 줄게. 응?”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응? 응? 하고 애타게 묻는 하원을 피해 나는 작게 웃었다.
조금 일찍 가는 것이 뭐가 그리 아쉽다고. 그러면서도 하원이 이렇게 매달리는 모습이 나쁘지 않아서 나는 몰래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아, 오늘 드라마 하는 날이잖아. 같이 모니터링해야지.”
형이 모니터링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건 매니저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건 형이 해야 하는 거고요.”
“같이 봐줘. 혼자 보면 심심하고 지루해서 안 보게 된단 말이야. 응? 그것만 보고 내가 데려다줄게.”
정말 모니터링이 하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닐 거다. 아홉 시가 넘을 때까지 여기 있으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돌려서 한다.
“이거 맛있게 먹어주면 한번 생각해볼게요.”
“용주가 해주는 건 다 맛있어. 맛없게 먹으라는 것보다 쉽다.”
결국 그때까지 있겠다는 내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하원은 신이 나서 웃었다.
이럴 때만 여우같이 군단 말이야. 그럼에도 얄밉지 않은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 역시도 웃어버렸다.
살짝 식힌 닭가슴살말이를 손가락 두께로 썰어서 예쁜 접시에 올렸다. 설거지는 나중에 할 요량으로 그대로 두고 음식을 담은 접시와 젓가락을 챙겨 테이블로 향했다.
“형, 빨리 와서 먹어요.”
내민 젓가락을 받아 들면서도 하원은 늦게 가야 해, 하고 다짐을 시켰다.
알록달록 색이 예쁘게 나온 닭가슴살 계란말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하원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자 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맛없어 보여요?”
“아니, 예뻐서. 먹어도 되는 거야?”
“네, 형 먹으라고 만든 거잖아요. 사실 소스를 같이 내야 했는데, 칼로리가 좀 많아 보이더라고요. 그럼 다이어트하고 닭가슴살만 먹는 의미가 없잖아요. 아까 닭가슴살에 밑간 조금 해서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니까 소스 없이 그냥 드세요.”
“아냐. 엄청 맛있어 보여.”
하원은 얼른 젓가락으로 닭가슴살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작은 입술이 벌어지며 노란 계란말이가 쏙 들어간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하원이 하나를 집어 들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용주 음식 진짜 잘한다. 난 이런 거 잘 못하는데.”
“저도 처음 해보는 거예요.”
맛이 아주 없지는 않아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이어트할 때는 맵고 짠 음식은 피해야 하기에 간을 거의 하지 않은 탓인지 조금 밍밍한 것을 빼면 담백하게 먹을 수 있는 한 끼 식사로 훌륭한 듯싶었다.
지단은 부드럽고, 닭가슴살은 든든하고, 파프리카가 자칫 퍽퍽해지는 것을 잡아주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
하원이 입에 넣어준 것을 꼭꼭 씹어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떠 왔다.
“천천히 먹어요.”
“어떻게 이렇게 음식을 잘하지? 나는 라면도 못 끓여.”
“다행이에요. 라면이 얼마나 건강에 안 좋은데요. 끓여 먹지 마세요.”
하원의 앞에 물컵을 내려놓으며 답해주었다. 하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닭가슴살말이를 꼭꼭 씹었다.
“석진이는 음식 절대 안 해. 뭐 먹고 싶다고 하면 만날 시켜 먹으라고 하고, 자기가 먹고 싶어도 시켜 먹고. 그러고서는 사장한테 내가 배달 음식만 먹는다고 고자질해. 요즘에는 다이어트하라고 아예 못 먹게 하면서, 자기 혼자 시켜 먹어.”
“시켜 먹을 거면 매니저님 집에 가서 혼자 드시라고 해요. 왜 형 다이어트하는데 주지도 않을 거면서 시켜 먹어요? 나쁘다.”
“그치? 엄청 나쁜 놈이야. 나는 못 먹게 하면서 앞에서 약 올려. 먹다 체해서 병원이나 가라고 속으로 기도하는데 절대 체하지도 않아. 짜증나.”
닭가슴살 계란말이가 윤석진이라도 되는 양 하원은 으득으득 이를 갈며 씹어댔다.
음식에 화풀이하면 안 좋은데. 그러면서도 하원이 귀여워서 나는 슬쩍 접시를 하원의 앞으로 밀어줄 뿐이었다.
“용주 점심 안 먹고 왔지? 너 뭐 시켜 먹을래? 난 이거 먹으면 되니까.”
“아뇨, 저 별로 배 안 고파요.”
“거짓말. 그 나이 때에는 진짜 배고파. 난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배고파서 항상 먹을 거 들고 다녔어.”
“그러고 보니 형 고3 때 키 컸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게 다 미리미리 먹어둬서 그런 거야.”
그래봤자 나는 이미 자랄 만큼 자라서 더 크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하원은 식탁 한쪽에 모아둔 광고지를 꺼내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먹고 싶은 거 골라.”
“저 괜찮아요.”
“왜, 점심 안 먹고 왔잖아. 빨리 시켜.”
“그럼 형도 먹고 싶어지잖아요.”
“난 지금 이거 먹잖아. 괜히 다 먹고 나서 시키면 나 또 먹고 싶어진단 말이야. 빨리 나 먹고 있을 때 시켜서 같이 먹어.”
하원이 볼을 퉁퉁 부풀리며 말했다. 결국 근처 치킨집에서 치킨 한 마리를 시키고 기다리다가 그사이에 청소라도 좀 해두기로 했다.
“먼저 드시고 계실래요? 전 거실 좀 치울게요.”
“안 돼. 그럼 용주 혼자서 먹어야 되잖아. 기다렸다가 같이 먹을래.”
젓가락을 내려놓은 하원이 나를 따라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옷들을 살펴 빨아야 할 것과 그냥 두어도 괜찮은 것을 나누고 있자 하원이 쪼르르 다가와 발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용주는 집에서 이런 거 해?”
“사실 집에서는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꽤 능숙한데?”
“저 축구부 숙소에서 생활했었거든요. 집에서는 안 해도 거기서는 해야 하니까 익숙해졌나 봐요.”
“아, 맞다. 운동부라고 했지. 그럼 축구 잘하겠다.”
하원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부담스러운 시선이어서, 나는 멋쩍은 듯 웃으며 하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뇨, 별로 못해요.”
“못하면 축구부에 뽑힐 리가 없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라서 미래가 보이질 않네요. 그렇게 말하기엔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원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서 나는 빨랫감 나누기에 더욱 신경 쓰는 척했다.
“용주는 축구 하는 모습도 멋질 거야.”
“별로요. 저는 형이 연기하는 모습이 더 멋질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거야말로 별로야.”
하원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발갛게 물드는 얼굴을 보아하니 조금 부끄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하원은 눈을 반짝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중에 촬영장 놀러 올래?”
“촬영하는데 어떻게 놀러 가요?”
“주말 같은 때, 너 수업 없는 날 와서 보면 되잖아.”
“관계자도 아닌데 가서 구경하고 있으면 좋아하겠어요?”
“왜 관계자가 아냐? 민하원 관계자라고 하면 되지.”
속 편하게 내뱉는 하원의 말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나와는 달리 하원은 진심인 모양인지 눈동자를 굴리며 그게 좋겠다, 하고 말했다.
“민하원 애기 매니저라고 하고 와서 구경해. 나중에 꼭 같이 가자. 아냐, 내일 가볼래?”
“새벽에요?”
“응, 새벽에.”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올래? 응? 와라. 용주가 와서 봐주면 힘내서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원은 내 무릎에 턱을 받치고 나를 올려다보며 그 큰 눈을 끔뻑거렸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기 얼굴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정말 잘 알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얼굴을 이용해서 얻어낼 것은 다 얻어내는 영악한 남자.
그러다 문득 저 얼굴 어디에 뭔가를 얻어내려는 영악함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저 남자가 나에게 얻어낼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어버려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일은 말고요.”
“내일 아니면 언제?”
“글쎄요. 낮에 촬영할 때 제가 도시락 싸 갈게요.”
“석진이가 못 먹게 할 거야. 분명히 자기가 다 처먹을 거야.”
“것도 그러네요. 아쉽다. 그럼 형 닭가슴살 그만 먹어도 된다고 하면 도시락 싸 갈까요?”
“도시락 싸 오지 말고 그냥 와. 윤석진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드라마 끝날 때까지 닭가슴살만 먹일 것 같아. 독한 놈이야. 나쁜 놈이야. 사장이랑 손발 맞추고 나를 아주 죽이려고 해.”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어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형 상체 누드가 대체 얼마나 나오기에 이렇게 다이어트를 시키는지 모르겠네요.”
“작가가 변태인가 봐. 막 목욕하는 장면도 있고 그래. 목욕하면서 고뇌를 왜 하는지 몰라. 빨리빨리 씻고 나올 것이지.”
하원의 꿍얼거림에 그가 맡은 둘째 아들 역할이 조금 궁금해졌다.
배우 민하원은 어떤 모습으로 연기를 할까.
이따가 하원에게 물어봐서 저번에 녹화한 것이 있으면 같이 보자고 해봐야지. 나는 하원의 구시렁거림을 들으며 생각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옷가지를 빨 것과 옷장에 넣을 것으로 나누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쯤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소파에 앉아 옷을 정리하던 나와 그런 내 무릎에 턱을 기대고 앉아있던 하원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치킨이다, 하고 외쳤다.
∞ ∞ ∞
주말 가족 드라마라서 그런지 딱히 누군가가 주인공이라고 정해지진 않았지만 하원이 맡은 남자네 가족의 생활이 주된 이야기라서인지 하원의 역할도 비중이 컸다.
커다란 기업의 회장 가족 이야기로 하원이 맡은 둘째 아들은 이 년 정도 어학연수를 다녀온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부잣집 도련님답게 조금은 방탕하고 게으르고 여자와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그런 남자에게는 어학연수를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준 애인도 있었다.
회장 가족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하원이 맡은 역의 남자도 등장했는데, 남자의 첫 장면은 그가 어학연수를 끝내고 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던 여자와의 이별 장면이었다.
여자의 헤어지자는 말에 남자는 많은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그래, 라고 대답했다. 여자가 어째서 헤어지자는 이유를 묻지 않느냐고 물어보자 남자는 네가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라고 답했다.
가만히 남자를 보고 있던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고 뒤돌아 걸어가며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자의 생각이 무엇일까 궁금해하기보다는 하원의 뺨을 걱정했다.
“정말 때렸어요?”
“응? 저 장면?”
“네, 엄청 큰 소리 났잖아요. 짝!”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린 것처럼 나는 손뼉을 짝 치며 소리를 냈다. 하원이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때리면 다시 하라고 해. 그래서 저 장면 찍기 전에 누나가 한 방에 가자, 이러더니 완전 세게 때린 거 있지. 나 그날 하루 종일 뺨에 손자국 나 있었어.”
하원이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답했다. 정말 세게 때리고 맞는구나. 저 정도로 소리 난 것을 보면 웬만큼 세게 때린 게 아닌 듯싶다.
입안이 안 터졌길 다행이지. 좀 적당히 하지 저렇게 세게 때리나.
저 장면을 찍은 것은 분명 한참도 더 된 일이겠지만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하원의 뺨을 손으로 살살 문질러주었다.
기분 좋은지 하원은 고양이처럼 내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웃었다.
“그런데 누나예요?”
“응, 나보다 두 살 더 많대. 드라마에서도 대학교 선배로 나와.”
“대학 선배랑 사귄 거였어요?”
“응. 남자가 신입생 때 사 학년이었던 여자랑 사귀게 돼. 일 년 정도 사귀고 남자가 유학을 가. 그 시간 동안 여자가 기다려주고, 돌아온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야.”
하원은 내 손을 잡고 손가락을 가지고 놀면서도 꼬박꼬박 내 물음에 답해주었다. 하원에게 한 손을 맡겨둔 상태로 나는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클럽 같은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약간 질 나쁜 친구들과 모여 여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 묘하게 어색하지 않아서, 나는 하원을 힐끗 곁눈질해보았다.
“왜 그렇게 봐?”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던 하원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제가 어떻게 봤는데요?”
“엄청 이상하게 봤어.”
이렇게, 하면서 하원이 눈 끝을 손가락으로 쭉 늘려 가자미눈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큭큭 웃음을 흘리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 형이 자장면 입에 다 묻히고 먹는 모습밖에 본 기억이 없는데, 저렇게 술 마시는 모습을 보니까 엄청 어색해서요. 어른이구나, 생각했어요.”
“술 마신다고 다 어른인가.”
“그래도 왠지 어색하지 않아요. 저런 곳에 가서 많이 마셔본 것처럼 엄청 능숙해요.”
“아냐.”
내 말에 하원은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나 술 마시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저런 곳도 많이 안 가봤어. 난 클럽이나 나이트 같은 곳도 시끄러워서 싫어해. 차라리 집에서 잠자는 게 더 좋아. 석진이도 가지 말라고 해서 나 몇 번 안 가봤어.”
“가면 또 어때요. 형은 성인이잖아요. 미성년자가 가는 건 문제가 되지만 형은 괜찮잖아요.”
“괜찮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 정말 저런 곳 싫어해.”
하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술 마시는 것도, 저렇게 여자들이랑 노는 것도…… 그럼 다 연기예요?”
사실 신경 쓰이는 것은 후자였지만. 나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흘리듯 물었다.
“응. 진짜 연기야. 평소에는 저런 곳 가라고 해도 안 가. 시끄럽고 어지러워.”
저거 봐. 불빛이 뱅뱅 돌아. 클럽 조명을 가리키며 하원이 말했다.
뭐야, 스물셋이나 먹은 남자가 시끄럽고 조명이 어지러워서 클럽을 싫어한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럼에도 하원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믿게 되었다.
“그럼 클럽 같은 곳 안 가면 어디서 놀아요?”
“집에서.”
“친구들 집으로 불러서 노는 거예요?”
“아니, 집에서 혼자 놀아.”
아휴,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연예인 민하원 왕따라고 소문나겠어요.
나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동네 애들 엄청 무서워. 같이 안 어울리는 게 가장 좋아.”
하원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기대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뒤에서 욕하고 험담하는 건 기본이야. 앞에서 얼굴 마주 보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도 잠깐 화장실 간다고 자리 비우면 돌변해서 막 욕한다니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래.”
“그래도 친구도 사귀고, 여자도 만나고 하잖아요. 보통은.”
“친구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 가끔 만나. 그것도 시간 맞추기 힘들어서 자주 못 만나게 되더라고. 서로 시간 조정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그냥 쉬는 날에는 혼자 조용히 집에서 쉬어. 그게 제일 편해.”
“……그럼 여자는요?”
아, 이거 위험 발언이다. 과거 애인 이야기를 묻는 것이 가장 미련한 질문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그것을 떠올리며 아차 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인지라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원의 얼굴을 힐끗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자? 무슨 여자?”
“이쪽에서 일하다 보면 관심 있는 여자도 생기고, 아니면 형 관심 있다고 연락 오기도 하잖아요.”
“안 돼.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데. 특히 이쪽에 있는 애들은 겁이 없어.”
하원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 연예인이랑은 안 만나는 거예요?”
“응,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어깨를 움츠리며 하원이 웃었다. 그럼 일반인은요? 그렇게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참으며 티브이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하원이 슬쩍 다가와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으며 내게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용주야.”
“네?”
고개를 돌리려다 지척으로 다가와 있는 하원의 얼굴에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뒤로 몸을 물린 만큼 다가온 하원이 다시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왜요?”
“용주는 축구부잖아. 키도 크고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니까 인기도 엄청 많겠다. 그렇지?”
“아뇨, 별로요.”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나는 하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 인기가 없어? 거짓말하는 거지?”
딱히 거짓말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
“막 여자애들이 응원도 하고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그러지 않아?”
“……남학교인데요.”
“아, 그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것처럼 굴던 하원이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학교구나. ……그럼 남자애들이 막 응원하고 먹을 것 가져다줘?”
웃던 얼굴로 정색하며 묻는 하원의 표정이 웃겨서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있어요?”
“왜! 용주는 키도 크고 예뻐서 엄청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막 옆에 있는 여학교에서 용주 보러 오고 그러지 않아?”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런 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질문하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형의 경험담이에요?”
“말 돌리는 거야?”
“아니요. 그런 일이 없어서, 신기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형 학교 다닐 때 형 보려고 여자들이 줄을 섰었어요?”
내 물음에 하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란 말은 안 하네.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그렇다고 아니란 소리도 못 하고 우물거리고 있는 하원이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결국 웃어버렸다.
“여자 친구 있었어?”
“아뇨.”
“그럼 남자 친구는?”
“남자 친구야 많죠.”
“그런 거 말고.”
하원이 묻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되었지만 나는 모른 척 “그럼요?” 하고 물었다.
“나처럼…….”
“형처럼?”
“내가…… 널 좋다고 하는 것처럼.”
하원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유난히도 길구나, 하는 생각을 멍청하게 했던 것 같다.
“없었어요.”
“그럼…… 네가 좋아했던 사람은?”
하원의 물음에 나는 하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묻고 싶었던 건데. 민하원과 서용주. 둘을 놓고 본다면 누가 더 가슴 졸이면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할까가 뻔히 나오는데, 하원이 얼굴을 붉히며 주저주저 묻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약간의 심술과 궁금증을 담아 “형은요?” 하고 되물었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그래서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없었어.”
물어보기 무섭게 바로 나온 대답에 나는 조금 당황해서 하원을 바라보았다.
“형이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어.”
“거짓말.”
“진짜야. 없었어.”
하원은 두 뺨을 붉히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귀 뒤로 넘기고 있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리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든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그건 인간적인 면의 좋고 싫음이잖아. 너를 보면서 느끼는 손 잡고 싶고 껴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은 그런 감정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민하원의 대화법은 정말 직설적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는 반면 이렇게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올 때도 있어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시야가 어지러운 것을 느끼며 나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용주야. 용주는 어때? 용주는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나는 하원이 그랬던 것처럼 눈만 들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조금은 궁금하고 또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원의 모습에 왠지 가슴이 조금 아릿해졌다.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저는 남중 남고 다녀서 주변에 여자는 엄마랑 누나뿐이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여자 친구보다 축구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럼…… 없었다는 거지?”
“축구 하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운 건 형이 처음이에요.”
진심을 담은 고백이었다. 그만큼 형이 좋아요. 그 의미를 하원이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하고 싶었다.
가만히 마주 앉아있던 하원이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이상해.”
“뭐가요?”
“네가 너무 좋아. 아무런 접점도 없이 매일 마주치는 사람도 아니고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네가 점점 좋아져서 내가 이상할 정도야.”
진심이구나. 내가 말했던 것처럼 하원도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다. 명확하게 이것이 이거다, 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가슴으로 전해지는 진심인 거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처럼 하원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그것을 하원도 알아차린 것인지 꽉 안고 있던 상체를 뒤로 물리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파.”
“왜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전 제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아파요.”
농담처럼 말하며 웃자 하원이 따라 웃었다. 입 끝을 올리며 웃는 것처럼 보이던 얼굴이 허물어지며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왜 그래요? 하고 물었지만 이내 다가온 하원의 입술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트거나 거칠어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하게 부딪쳐왔다.
타의에 입술이 벌어지며 밀려 들어온 것은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번 마주한 경험이 있는 것이었기에 놀랍지 않았다.
입안으로 들어온 살덩이에 혀를 감으며 나는 눈을 감고 부드러운 감촉을 음미했다. 조금은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짓궂은 아이처럼 거칠기도 하다.
입술을 마주하고 혀를 섞는 행위가 낯설고 어색했지만 가까워지고 싶다는 본능은 언제나 하원을 내치기보다 끌어당겨 안게 만들었다.
가까이 있고 싶고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진다.
비단 하원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마음인지 나 역시 알 수 있었다. 같은 마음이기에 내민 손을 잡을지언정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이와도 같은 얼굴이 한껏 붉어질 정도로 깊은 입맞춤을 하고,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벌리며 나직한 한숨을 내뱉는 하원의 얼굴이 야해서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나를 보며 하원이 작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치킨 맛 난다.”
“형!”
아무리 남자끼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분위기는 좀 생각해주면 안 되나. 하원의 지적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는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왜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팔을 잡아 도로 자리에 앉히며 하원이 물었다.
“양치하고 올 거예요.”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자 하원이 “화났어?” 하고 물었다.
댁 같으면 키스하고 나서 치킨 맛이 난다는데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러한 뜻을 담아 하원을 슬쩍 노려보자 히히 웃으며 하원이 내 뺨을 잡아당겨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하지 마요.”
“화내지 마. 치킨 맛 나니까 좋아서 그런 건데 왜 그래?”
“전 엄청 부끄럽거든요.”
“왜?”
“꿀맛 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말이에요. 누가 형한테 키스 어땠어요? 하고 물었는데 내 키스의 기억은 치킨 맛이에요,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내 말에 하원은 “그게 어때서?” 하고 되물었다.
“난 더 좋은데. 앞으로 키스할 때는 먹고 싶은 거 용주한테 먹이고 해야겠다. 그러면 내가 안 먹어도 맛볼 수 있잖아.”
“아, 형. 좀!”
“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인 하원을 바라보며 진심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아냐,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른다. 부디 진심이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음에는 양념치킨 시켜 먹어. 난 양념치킨이 더 좋더라.”
몸을 뒤로 물리는 내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며 뺨을 가까이 마주한 상태로 하원이 웃으며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