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7)

2

“형, 오토바이 좀 알려줘요.”

한가한 시간이었다. 이제 막 배달을 다녀온 영덕이 형은 시티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담배 연기 들어가는 거 아버지가 싫어하시는데 매번 이런다.

몇 걸음만 옆으로 가면 될 텐데, 항상 이러는 것을 보면 영덕이 형이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오토바이는 왜? 사장님이 나 자르고 너 배달시키겠다고 그러시냐?”

“형은 여기서 한두 달 일한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걸 물어요?”

벌써 일 년 넘게 여기서 일한 사람이 저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참 얄밉다.

영덕이 형은 가자미 눈처럼 쫙 찢어진 눈으로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 냉큼 형의 곁으로 가서 서자 피우고 있던 담배를 허공으로 튕겨 껐다.

“그럼?”

“그냥 하는 일도 없으니까 좀 배워보게요. 형 말대로 내가 형 쫓아내고 배달해서 대신 월급 받으려고요.”

“이 새끼가 남의 밥줄을 탐내네.”

형은 내 뺨을 잡고 흔들면서도 실실 웃었다.

“면허 따볼까 싶어서요. 그냥 놀고 있으려니 좀이 쑤시네.”

“민증도 안 나온 새끼가.”

“2종 소형 말고 원동기 면허는 지금도 딸 수 있잖아요.”

“쪽팔려, 새끼야. 원동기 면허가 뭐야? 원동기 면허가. 가오 빠지게.”

“가오 세우려고 면허 따는 거 아니니까 좀 알려줘요. 주변에 형만큼 운전 잘하는 사람도 없잖아.”

“그럼, 인마. 나만큼 운전 잘하는 새끼가 또 어디 있어?”

그것도 자랑이라고.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말을 꾹 눌러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영덕이 형이 기대고 있던 시티에 올라타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형이 오른쪽 손잡이를 가리켰다.

“거기 있는 스타트 버튼 눌러. 그게 시동 거는 거야.”

“오케이, 시동 걸고.”

형이 손을 뻗어 핸들 가운데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N에 불 들어오면 기어가 중립이란 얘기야. 브레이크 잡고 왼발로 레버 밟으면 변속돼.”

“브레이크 잡고 왼발로 레버 밟아서 변속.”

N에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야. 엑셀 살살 당기면서 운전하면 끝.”

형의 말에 나는 클러치를 놓고 엑셀을 당겨보았다. 스르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시티에 오오, 하고 환호를 질렀다.

“오오는 무슨 오오야. 내려, 인마.”

오 미터도 가지 못하고 뒤쫓아 온 영덕이 형한테 덜미가 잡혀 끌어 내려졌다.

“넌 한참 멀었어. 내 밥줄 노리지 말고 가서 공이나 차.”

손으로 내 뒤통수를 문지르며 말하는 형의 손을 나는 기분 나쁘지 않게 쳐냈다.

“너 축구 관뒀다며?”

“아버지가 그래요?”

“사장님이 걱정하시더라.”

시티를 끌고 터덜터덜 중국집 문 앞까지 걸어온 형이 키를 뽑아 들고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건물 틈 그늘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형이 나에게 손짓했다.

담배 피울 땐 옆에 가기 싫은데. 하지만 싫은 표정을 감추며 나는 형의 곁으로 가서 섰다.

“돈 없어서 너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게 한다고 많이 속상하신가 보더라. 너 때문에 내색도 못 하시고 속만 끓이셔.”

영덕이 형이 대뜸 내뱉은 말에 나는 고개를 수그려 운동화 끝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에서 예체능은 공부 못하는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거라는 말이 왜 나온 줄 아냐?”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그러니까 돈이 왜 많이 들어가는 줄 아냐고.”

“배우는 게 비싸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게 다 감독들 밑구멍 닦아주느라 들어가는 돈이거든.”

영덕이 형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웃었다.

“하계 전지훈련비 백만 원 넘게 걷었다며?”

“네.”

“축구부원이 한 학년에 열 명이 넘어. 그게 삼 학년 포함하면 삼십 명이 넘지. 그 인원한테 백만 원씩 걷으면 그게 삼천이다. 아무리 겁나 좋은 훈련소를 예약하고, 겁나 좋은 식단으로 처먹인다고 해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삼천이 말이 되냐?”

“그럼 왜 그렇게 걷는데요?”

돈 걷는 사람이 영덕이 형도 아니건만 나는 따지듯 그에게 물었다. 병신. 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향해 웃었다.

“방금 말했잖아. 그게 다 감독들 밑구멍 닦아주고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라고. 애들 생각하면 오십도 비싸. 훈련을 무슨 호텔에서 하냐? 백만 원씩 걷게. 백만 원 내고 가봤자 학교 운동장 비슷한 축구장에, 강당 같은 숙소에 침낭 하나씩 안겨줄 거다. 훈련? 훈련 좋지. 그런데 거기 가서 공 차나 학교 운동장에서 공 차나 그게 그거야. 여기서 알려주지 못한 비장의 카드를 거기 가서 알려줄 것 같냐? 애초에 그런 거 없어, 새끼야. 그런 게 있으면 그 자식들이 왜 이런 곳에서 선생질하고 있겠냐? 지들이 국가대표 뛰겠지.”

웃기지도 않는다며 영덕이 형은 카악, 하고 가래를 뱉었다.

“너는 하고 싶은 거 못 해서, 니 부모는 너 하고 싶은 거 못 시켜줘서 속상해할 테지만…… 나는 그냥 네가 여기서 관둔 거 어쩌면 잘된 거라고 생각해. 쓸모없이 돈 처발라서 선생들 밑구멍 닦아줘봤자 나중 가면 별거 없어. 어차피 프로로 나갈 놈들은 정해져 있고, 대학에서 스카우트해갈 놈들도 정해져 있어. 그런 놈들은 지금부터 받는 대우가 다르거든. 학교에서 돈 내라는 소리도 안 할 거다. 네가 그런 대우 못 받고 있다는 건…… 넌 글러 먹었단 얘기야. 돈 싸다 바쳐서 그 새끼들 가는 길이나 닦아주고 있다는 거지.”

“뭔가…… 묘하게 현실성 있는 말이기는 한데 좀 화나네요.”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고개를 들고 영덕이 형을 바라보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머리를 형이 턱, 하고 손으로 감싸 쥐었다.

“현실은 원래 더럽게 짜증나는 법이야. 그걸 느꼈다면 너도 슬슬 어른이 되어간다는 거지.”

웃기지도 않네. 고등학교 중퇴에 동네 중국집에서 짱개 배달이나 하는 새끼한테 인생 충고나 듣고 있다니 나도 참 갈 데까지 갔구나.

고개를 들어 형의 면상에 대고 네 인생이나 똑바로 살라고 쏘아붙이고 싶은데, 고개를 들어 바라본 영덕이 형의 얼굴은 나보다 더 상처 입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넌 그래도 해주지 못해 속상해하는 부모라도 있잖냐.”

꽁초 끝까지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영덕이 형은 킁, 하고 코를 들이마셨다.

“내 부모는 나한테 돈 한 푼 쓰는 것도 아까워 죽으려는 작자들이었거든. 내가 태권도 한다니까 깡패 새끼가 될 거냐고 매부터 들더라. 전지훈련 같은 건 말도 못 꺼냈어. 결국 죽어라 알바해서 훈련에 참가했는데 뭘 가르쳐주는 것도 없고, 뭐가 다른가 싶더라. 엄청 외진 바닷가로 갔었는데 무슨 폐교 같은 곳에서 숙식했어. 몇십만 원 내고 담력 훈련하러 간 것도 아닌데 말이야. 밥도 코펠에 지어 먹었다니까. 나중에 거기 가서 선생들 회 처먹고 밤에는 양주 처마셨다는 얘기 듣고 내가 그 새끼들 밑 닦아주려고 밤에 잠도 안 자가며 알바 뛰고 개고생하면서 돈을 퍼다 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감독 교사 멱살 잡아서 코뼈 부러뜨리고 퇴학당했다.”

영덕이 형은 마치 영웅담을 들려준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 너머로 일그러진 슬픔이 보였지만 나는 눈치껏 모른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찌감치 미련 버리고 다른 길 찾아. 생각해보면 세상엔 할 게 참 많아.”

“짱개요?”

“그건 짱개집 아들이 할 말이 아니지.”

영덕이 형이 내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치며 웃었다.

∞ ∞ ∞

민하원에게서는 일주일 넘게 연락이 없었다. 자장면이 질린 건가. 나는 프런트 앞에 앉아 하염없이 전화만 바라보았다.

어차피 민하원과 나는 자장면을 시켜 먹는 사람과 배달해주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인데. 뭐 이렇게 애타게 민하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용주야, 너한테서 진짜 맛있는 냄새 난다.」

목덜미에 감겨오던 민하원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얼굴을 붉히며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이상한 사람이다. 같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아. 오히려 이쪽이 낯을 붉히게 된다. 이상한 기분이나 들게 만들고, 참 나쁘다.

전화기를 툭툭 손으로 건드리며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전히 가게에는 손님이 드물었다. 좀 전에 들어온 모녀는 자장면을 시켜 먹고 있었고, 방금 들어온 아저씨 둘은 탕수육을 시켜둔 채 단무지를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아, 날씨 더럽게 덥다.”

그릇을 수거해 온 영덕이 형이 개수대에 그릇을 넣어놓고 나오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덜덜거리는 에어컨이라도 있으니까 조금 살맛 난다.”

“그렇긴 하죠.”

저 에어컨이 얼마나 오래되었냐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가게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지금 가전제품 코너에서는 볼 수도 없는 냉장고급 사이즈의 에어컨이다.

그런 것이나마 있어서 홀은 밖의 날씨보다 조금 더 시원했다. 그래봤자 밖의 날씨보다, 라는 전제가 붙는 정도였지만.

더위가 최고조를 찍고 있어서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덥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매우 덥냐 조금 덥냐의 차이로 우리 모두는 조금 더운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항상 밖에서 시간을 때우던 영덕이 형마저도 가게 안으로 더위를 피해 들어왔다.

따르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네, 흑룡관입니다.”

―용주야, 진짜 오랜만이다.

“하원이 형.”

아무튼 이 사람은 점심시간, 저녁 시간 구애받지 않고 전화하는 시간이 참으로 대중없다. 그것은 매니저 윤석진이 잠시 외출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 테지.

“매니저님 또 외출하셨어요?”

―응, 윤석진이 일주일 내내 외출도 안 하고 나랑 붙어있어서 용주 얼굴도 못 보고 자장면도 못 먹었어.

민하원의 우는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금방 갈게요. 신문지 깔아놓고 계세요.”

―응, 응.

전화기 너머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민하원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작게 웃었다.

전화를 끊고 주방을 향해 자장면 하나요, 하고 외치려는 내 시야로 탕수육을 만들어 접시에 담는 아버지가 보였다.

「용주야, 나도 맛있는 고기 먹고 싶다. 닭가슴살 너무 퍽퍽해.」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미안해요, 아버지. 나는 신의를 저버리는 나쁜 중국집 아들입니다. 그래도 민하원이 그 예쁜 얼굴로 고기가 먹고 싶다잖아요. 고기가 먹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 내가 이때껏 새치기 한번 하지 않고 자랐으니, 이번 한 번만 좀 눈감아주세요.

“배달이냐?”

“아, 그런데 내가 가요. 내 친구네거든.”

한숨을 내쉬며 묻는 영덕이 형을 향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형이 다행이라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것을 보며 나는 주방에서 홀로 음식을 전달하는 틈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나를 돌아본 아버지가 손으로 탕수육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용주, 너 그거 내가라.”

“아버지, 정말 죄송한데요.”

그러면서 나는 손으로 철가방의 문을 열고 단무지와 나무젓가락을 챙겼다.

“탕수육 배달부터 먼저 가져갑니다.”

“뭐, 뭐 인마?”

눈을 동그랗게 뜬 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보며 나는 재빨리 탕수육 접시에 랩을 씌웠다. 능숙하게 랩을 꽁꽁 씌우고 철가방에 집어넣은 뒤 죄송해요, 하고 소리를 쳤다.

아저씨들한테도 죄송해요. 대신 아버지가 서비스로 탕수육 고기 많이 드릴 겁니다.

빽,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나는 재빨리 중국집을 나왔다.

민하원이 기다리는 빌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다. 멀고도 가까운 것 같다. 얼른 도착해서 탕수육을 보여주고 싶은데 빌라가 가까워지질 않았다. 그런데 또 어느 순간 보니 빌라 앞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한걸음에 3층으로 올라가 302호의 문을 작게 두드렸다.

“어? 용주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빠끔 문을 열어준 민하원이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땀 흘린 거 봐. 뛰어왔어?”

“형, 그것보다 빨리 와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민하원의 손목을 잡고 나는 성큼성큼 남의 집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로 향했다.

“저번에 고기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응. 닭가슴살 말고.”

한숨을 내쉬듯 말하는 민하원을 보며 나는 가지고 온 탕수육을 신문지 위에 올려놓았다.

“홀에 주문 나가려고 한 거 먼저 집어 들고 와서 소스가 섞였어요. 빨리 오겠다고 뛰어오긴 했지만 눅눅해진 건 각오해야 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면 먹을래요?”

“……탕수육이다.”

민하원은 내가 건네준 젓가락을 손에 들고 눈을 끔뻑거렸다.

“홀에 주문 나가려고 한 거 가져와도 돼?”

“어차피 동네 장사라서 단골들이에요. 아버지가 서비스 넣어서 금방 또 해드릴 텐데요, 뭐. 그것보다 빨리 먹어요. 소스 섞여서 시간 더 지나면 맛없거든요.”

내 말에 젓가락을 물고 있던 민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스가 듬뿍 묻은 탕수육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민하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모으고 오물거리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진짜 맛있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탕수육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아버지 음식 솜씨가 그 정도는 아닐 테고, 형이 지금 식단 조절하느라 그럴 거예요.”

“아냐, 이건 진짜 맛있어. 맹세코 최고야.”

민하원은 아이처럼 엄지를 들어 올리며 최고, 최고 하고 말했다.

자장면을 먹으나 탕수육을 먹으나 입가에 묻히고 먹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 모습이 묘하게 어울리며 귀여운 것도 여전했다.

베란다 창에 기대어 앉은 나는 탕수육을 먹고 있는 민하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원이 형.”

“응?”

탕수육을 먹던 민하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형은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나는 민하원이 연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며칠 전에 찾아보았던 CF가 전부였지만, 그라면 연기도 잘할 성싶었다.

내 물음에 민하원은 눈 끝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꿈은…… 여행자가 되는 거였어.”

“여행자?”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탕수육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어린 왕자라는 책을 본 적 있어?”

나는 책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남들이 책을 읽을 때 나는 공을 찼고, 남들이 문제집을 풀 때 나는 여전히 공을 찼다.

조금 부끄러운 마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민하원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텍쥐페리라는 사람이 쓴 어린 왕자라는 책을 보면 말이야. 거기서 비행사인 ‘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어린 왕자’를 만나게 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서 이웃해 있는 소혹성들을 돌아보고 지구로 온 거였거든. 지구에 온 어린 왕자는 수많은 장미꽃들을 만나고, 예쁜 여우도 만나고, 뱀도 만나고, ‘나’도 만나지.”

“형은 어린 왕자처럼 여행을 하면서 장미와 여우를 보고 싶은 거였어요?”

내 말에 민하원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스물세 살의 남자가 깔깔 웃는 모습이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어울려서 나는 웃고 있는 민하원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솔직히 나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여행도 좋아하지 않거든.”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면서요.”

“그러니까 말이야, 여행의 목적이 약간 달라.”

민하원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에게는 예쁜 장미가 있었어.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어린 왕자의 별에 자리를 잡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지. 어린 왕자는 그 장미를 남겨두고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그 장미가 자신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지. 그래서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게 돼.”

민하원은 탕수육을 먹던 젓가락마저 내려놓은 상태였다.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민하원의 얼굴은 드물게 그의 나이보다 더 성숙하고 진지해 보여서 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말이야, 내게 의미 있는 것을 찾고 싶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열여덟 살의 나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나에게 의미를 주는 존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내 가슴을 뻐근하게 채워줄 존재를 원했어. 그래서 어린 왕자처럼 여행을 떠나려고 했어. 여행을 하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린 왕자처럼 여행을 떠나서 뒤돌아보면 내가 있던 곳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의미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민하원의 말은 조금 어려웠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잔잔하게 울리는 민하원의 목소리가 좋아서 나는 그저 조용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장미를 찾기 위해서 열여덟 살의 나는 여행을 떠났어. 아니, 여행을 떠나려고 했는데 그날 가벼운 배낭 하나만 메고 길을 걸어가는 나를 지나가던 사장이 발견하고 멈춰 세웠어. 막무가내로 차에 태워서 납치범인가 했는데 엔터테인먼트 사장이라고 하는 거야.”

“정말 길거리 캐스팅이네요.”

“응, 그전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어서 싫다고 했는데 이 사장은 좀 막무가내였어.”

역시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얼굴을 그냥 둘 리는 없을 테니까.

지금보다 앳되고 순수해 보였던 민하원의 첫 CF 때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막 여행을 떠나는 길이라고 했더니 사장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여행이 가고 싶은 거라면 자기가 시켜주겠다고 했어.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여행을 가게 해주겠다면서. 혼자 가려면 이것저것 알아봐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테지만, 자기랑 같이 일을 하면 그런 걱정 없이 저절로 여행을 하게 될 거라고. 지금 생각해도 사장은 나를 너무 잘 파악했던 것 같아.”

흐음,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민하원은 드물게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일을 하면서 여행을 하는 게 뭔가 했는데 한마디로 ‘전국적으로 뺑이 돌린다’라는 의미였어. 그것도 모르고 네, 좋아요 하면서 따라갔던 내가 좀 바보였나 봐.”

민하원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젓가락을 들어 탕수육을 먹었다.

“그래도요.”

나는 민하원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형 모습은 참 보기 좋아요. 전 형이 연기하는 건 보지 못했지만, CF 찍은 거 찾아봤거든요. 그런데 정말…… 음, 멋있었어요. 지금 형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나는 형이 원래부터 이쪽 길을 생각하고 있었나 생각했어요.”

내 말에 탕수육을 입에 물고 있던 민하원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뚝, 하고 입에 물고 있던 탕수육에서 소스가 흘러 민하원의 다리 위로 떨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그러니까 입에 물고 있지 말고 얼른 드세요. 나는 냅킨으로 민하원의 종아리 위에 떨어진 소스를 닦아주었다.

맨다리 위에 떨어져서 조금 끈적거리겠다. 다 먹고 씻으라고 말해야지. 생각했을 무렵 민하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손을 밀어냈다.

“어.”

그렇게 손을 쳐내고 나보다 자기가 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거리는 민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작게 웃었다.

“소스…… 다리 위에 떨어져서요. 옷에 묻을까 봐. 끈적거릴 테니까 다 먹고 씻어요.”

“아…… 응.”

민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탕수육 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민하원의 목덜미가 약간 붉어진 듯 보여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장미는 찾았어요?”

“응?”

“형의 장미요.”

입가로 흐르는 소스에 이번에는 냅킨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입술을 문지르며 민하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직.”

“찾았으면 좋겠네요. 막상 형이 형의 장미를 찾으면 조금 아쉬울 것도 같긴 하지만요.”

“왜?”

민하원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들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것이 도망가던 꿩이 엉덩이를 하늘로 높이 든 상태로 고개만 처박고 숨어있는 것과 비슷하여 나는 치미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민하원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모른척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생각한 건데요.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정말 멋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형의 말…… 엄청 감동받았어요.”

“나 멋지다고?”

“네, 엄청 멋졌어요.”

고개를 들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민하원을 향해 나는 엄지를 들어주었다. 엄청 멋있어요.

민하원이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웃었다. 눈꺼풀을 내리깔고 새치름하게 웃는 얼굴이 멋있다기보다는 예쁜 것에 가까웠지만 나는 멋져요, 하고 말했다.

“쌍으로 놀고들 있어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민하원의 발그레한 얼굴을 좀 더 오래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고개를 들어 내 뒤를 바라본 민하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 역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두 다리 위로 허리에 짚은 두 손, 그리고 그 위로 매섭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서, 석진이 혀엉.”

민하원이 말까지 더듬으며 부르는 상대는 바로 그가 매일같이 흉을 보던 매니저였다.

윤석진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민하원과 나,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는 탕수육을 번갈아 보았다.

“어쩐지 민하원이 똥배가 안 들어간다 했지.”

“나 똥배 없어!”

“조용히 안 해?”

윤석진의 윽박에 민하원이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외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냐, 두 시간이 지났냐? 어떻게 그사이에 탕수육을 시켜 먹을 생각을 해? 아주 신나서 문 잠그는 것도 잊으셨어.”

“아! 문을 안 잠갔다.”

민하원은 멍청한 표정으로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민하원의 행동에 윤석진이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띨빵한 새끼가. 너 솔직히 말해. 몇 번이나 시켜 먹었어? 내가 외출할 때마다 시켜 먹었지?”

윤석진이 민하원의 귀를 잡아 비틀며 물었다. 민하원은 맥반석 위의 오징어처럼 온몸을 비틀며 아픔을 표현했다.

“으아아아, 아파. 아프다고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쳐다보며 두 손을 마주해 비비는데도 전혀 봐줄 마음이 없는 듯 윤석진은 귀를 잡고 있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기까지 했다.

민하원의 곁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저 얼굴에 면역력이 생기나 보다. 어쩜 민하원의 저런 얼굴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가 있지.

나는 순수하게 윤석진이란 사람을 보며 감탄했다.

“야, 너.”

대뜸 나를 향해 찔러오는 손가락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석진을 바라보았다.

난 체육부이기도 했고 키로는 평균을 웃도는 편이어서, 유독 키가 작은 윤석진과 신장 차이가 꽤 크게 났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내려다보는 시선에 윤석진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다시 앉아.”

윤석진이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앉으라는데 다리 아프게 서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이, 학생. 보아하니 민하원 빠돌이인가 본데 민하원이 진짜 좋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저 녀석 이제 곧 촬영 들어가서 한창 몸 만들고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탕수육 같은 거 먹으면 이제까지 굶기면서 운동시킨 거 말짱 도루묵이다. 넌 네가 좋아 죽고 못 사는 민하원이 여태까지 굶고 운동하면서 개고생했던 걸 또 했으면 좋겠어? 생각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지.”

윤석진의 말을 들으며 민하원을 바라보자, 민하원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살짝 찡그린 눈 끝에 주름이 진 것마저도 귀엽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마주 웃었다.

“그리고 하원이 녀석이 뭐라고 하면서 널 끌고 들어왔는지도 모르겠고, 네가 무슨 생각으로 탕수육을 시켜줬는지도 모르겠는데 앞으로는 모조리 금지야. 민하원은 바쁘니까 앞으로 드라마 시작하면 화면에서 만나자고. 응? 알겠지?”

윤석진은 나를 향해 그만 일어나, 하고 말했다. 명백한 축객이었다.

「앞으로 드라마 시작하면 화면에서 만나자고.」

윤석진의 마지막 말에 일순 지금의 상황이 꽤나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눈앞에 있는 이가 유명한 연예인 민하원이구나. 조금은 꿈을 꾼 듯한 기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윤석진에게 사과했다. 그는 여태까지 잡고 있던 민하원의 귀를 놓고, 두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릇 하나 쓸 수 있을까요?”

대뜸 내뱉은 말에 윤석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거실 지나서 부엌 선반에 그릇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

윤석진의 표정이 썩는지 익는지 알 바 아니라는 듯 민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 거실을 뛰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민하원은 새하얀 접시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민하원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그가 다 먹지 못한 탕수육을 옮겨 담았다.

소스의 깨끗한 부분까지 담아서 한 그릇을 만든 탕수육을 윤석진에게로 내밀었다.

그는 내 행동을 쭉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내민 손 위에 그릇을 올려주고 나는 중국집 그릇을 챙겨 철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저는 민하원 빠돌이가 아니라 그냥 중국집 배달분데요, 여기 중국집 저희 아버지가 하시거든요. 음식 남기면 아버지가 속상해하세요. 식어서 맛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닐 거예요. 저희 집 동네 장사로 삼십 년 넘게 하고 있거든요. 맛없으면 지금까지 남아있지도 못했을 거라서 어느 정도 맛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데워 드셔도 맛있으니까 매니저님 출출하실 때 드세요.”

나는 철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게 서 있는 윤석진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힘내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화면에서 보는 건, 제가 티브이를 잘 안 봐서 모르겠네요. 시간 나면 한번 보든지 하죠, 뭐.”

“용주 너.”

민하원은 볼을 부풀렸지만 나는 그를 향해 살짝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주었다.

“아, 그리고 저 학생이라 돈 없어요. 하원이 형, 아니, 연예인 민하원 씨한테 탕수육 사줄 정도로 부자 아니에요. 민하원 씨가 첫날에 미리 돈 십만 원 내셨고, 그걸로 차감하면서 시켜 드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탕수육 가져다줘서 고맙다는 말씀은 안 하셔도 된다고요.”

“어어, 용주야. 가려고?”

민하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윤석진을 지나쳐 거실을 가로질러 문 앞에 당도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자 쪼르르 달려오는 민하원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를 잡기 전에 문을 열고 나왔다.

“용주야.”

문틈으로 들리는 민하원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었다. 문을 쾅, 닫고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2층으로 내려왔을 때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단을 마저 내려가 빌라를 빠져나왔다.

∞ ∞ ∞

오토바이 별로 어렵지도 않네.

나는 며칠 짬을 내서 영덕이 형에게 시티 모는 법을 배웠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능숙하게 운전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면허 시험이 있기에 시험을 보기로 했다.

아버지는 배달용 시티에 앉아서 운전 연습을 하는 날 못마땅하게 쳐다보셨지만, 축구도 관둔 마당에 괜히 내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는지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절대 아버지에게 말하지 말라고 영덕이 형의 입단속을 시키고 나는 다음 날 아침 시험장으로 갔다. 응시 원서를 작성하고 신체검사를 받고, 안전교육도 받았다.

공부와는 담을 쌓아서 필기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영덕이 형의 말처럼 이건 시험이 아니라 그냥 애들 상대로 내주는 점수 주기 문제에 가까웠다. 여유롭게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기능시험을 접수했다.

느긋하게 가게로 돌아와서 아버지표 볶음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시간에 맞춰 기능시험을 보러 갔다.

영덕이 형이 가르쳐주었던 범주에서 그리 다르지 않아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크게 실수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인지를 사서 접수를 한 뒤 십 분 정도 기다리자 면허증이 발급되었다.

손에 들어온 면허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것을 지갑 안쪽에 넣고 가게로 돌아왔다. 저 멀리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영덕이 형이 보였다.

“여, 다녀왔냐? 붙었냐?”

“네, 쉽던데요.”

“거봐. 면허 따는 것도 쪽팔리는 거라니까.”

“그래도 있으면 좋잖아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고 짱개집 배달은 하지 마라.”

“짱개집 아들한테 할 소리는 아니네요.”

“이거 말고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인마. 축구가 아니라도, 공부가 아니라도 세상에는 좆나게 많은 일이 있거든.”

뭔가 감동적인 말이기는 한데 감동이 전달되려다 만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고했다. 뭐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단 낫겠지.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더라고.”

영덕이 형은 씁쓸하게 말하며 피우던 담배를 던져 껐다. 그런 형의 옆에 멍하게 서 있던 나는 진동으로 해둔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모르는 번호. 빤히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자 영덕이 형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뭐 해? 하고 물었다.

“아뇨, 모르는 번호라서.”

저장된 번호가 아니라 누굴까 싶었다. 친구라고 하면 거의 축구부 애들뿐이고, 그놈들은 지금 하계 전지훈련에 가서 한창 훈련을 받고 있을 시기라 연락이 올 리가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용주야?

일주일 넘게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나는 지금 민하원이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것이 맞나 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대꾸를 하지 않자 저쪽에서 용주야, 하고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댔다. 나는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영덕이 형의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겨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왔다.

“하원이 형, 웬일이에요?”

―대답 없어서 잘못 건 줄 알았어.

“아뇨, 전화하실 줄 몰라서.”

전봇대에 기댄 나는 운동화 앞부리로 바닥을 쿡쿡 찍으며 민하원의 말에 답했다.

―저번에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석진이한테 혼나고. 석진이 엄청 나쁜 놈이야. 내가 너 가고 나서 막 혼냈어.

“형이 매니저님한테 혼난 게 아니라요?”

―혼나긴 했는데…… 다 혼나고 나서 나도 석진이 혼내줬어. 그러니까 화 풀어. 석진이도 얘기 듣더니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그리고 나 또 혼났어.

그렇게 말하는 민하원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머릿속에 떠올라 나는 작게 웃었다.

―아까 중국집 전화했는데 다른 사람이 받더라. 아버지였나? 너 없다고 그래서 그냥 끊었어.

“자장면 시켜 드시려고요?”

―아니, 석진이가 이젠 절대 안 떨어질 거래. 화장실 갈 때도 따라갈 거라고 그랬어.

하긴, 잠깐 외출한 사이에 탕수육을 먹고 있었으니 어디 마음 놓고 화장실이나 제대로 갈까. 매니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매니저님이랑 같이 있어요?”

―응, 운동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 전화하는 거야. 그날 이후로 운동량이 배로 늘었어. 쉬는 시간도 잘 안 줘. 윤석진은 악마야. 악, 왜 때려!

조그맣게 목소리를 죽여 말한다고 해도 옆에 있는 사람이 듣지 못할 리 없잖아.

나는 웃으며 옆에 있을 윤석진을 향해 뭐라고 뭐라고 꿍얼거리는 민하원의 목소리를 조용히 감상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아…… 그냥. 너 저번에 그렇게 가고 나서 연락도 못 하고. 석진이가 잘못 알고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아니에요. 틀린 말 하신 거 하나 없어요. 운동하고 계신 거 알면서 자장면이랑 탕수육이랑 가져다드린 제 잘못인데요. 덕분에 운동 더 빡세게 하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먹고 싶다, 자장면. 악, 때리지 마! 먹고 싶댔지 누가 먹겠대?

민하원은 악악거리는 것도 귀엽네. 나는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운동 다시 시작하래. 아무튼 오 분 이상 쉬는 꼴을 못 봐.

“힘들겠지만, 힘내세요.”

―응, 또 전화할게. 이제 자장면 못 시켜 먹으니까 전화라도 막 할 거야.

“네, 네. 그만 운동하러 가세요.”

―응.

민하원은 “안녕.”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끝냈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안녕, 민하원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통화를 끝낸 휴대폰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민하원의 목소리를 녹음해둘걸, 하고 후회했다.

아쉽네. 뭐가 그렇게 아쉽나, 하고 물으면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는데 그냥 가슴이 아쉽고 허전하다 말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민하원의 목소리를 들려주던 휴대폰을 손에 꼭 쥐며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가게로 향했다.

∞ ∞ ∞

「앞으로 드라마 시작하면 화면에서 만나자고.」

내심 윤석진의 말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티브이 화면이 아니라면 그렇게 예쁜 사람을 어디 가서 만날 수나 있을까.

이번 일은 정말 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일은 이대로 좋은 추억으로 남을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민하원이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할 방법이 없다. 민하원이 머무르고 있는 매니저의 빌라 또한 민하원이 자장면을 시키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그곳을 찾아갈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철가방을 들고 민하원이 있는 빌라로 향할 때마다 기쁘면서도 슬픈 감정을 느꼈었다.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이 철가방을 들지 않으면 내가 이곳을 찾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 슬프고 무서웠다.

―저번에 네가 나한테 물었었잖아. 원래부터 연예인이 하고 싶었냐고.

“네.”

나는 현관 밖으로 나와 집 계단에 걸터앉아 민하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휴대폰으로 걸려온 민하원의 전화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또 전화할게. 민하원은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렇게 밤늦게 걸려온 전화를 나는 꿈일까 생각했던 것이다. 누나가 시끄럽다고 전화 받으라며 내 등짝을 발로 차기 전까지.

―넌 어때? 나 그때 못 물어봤던 것 같아. 네 꿈은 뭔지.

그는 모르겠지만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이제껏 내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질문이었다. 나는 선뜻 내뱉을 말이 없어서 대답을 망설였다.

―용주는 지금 열여덟 살이니까 고등학생?

“네.”

―인문계인가?

“인문고이기는 한데, 예체능계예요.”

―그림 그려?

“그림 그릴 것처럼 보여요?”

나는 작게 웃으며 민하원에게 물었다.

―아니, 체구가 좋으니까 운동하려나?

“축구…… 했어요.”

―역시 운동했구나. 어쩐지 몸이 좋다 했어. 키도 나랑 비슷하지? 조금 작았나? 열여덟 살인데 벌써 그렇게 몸이 좋냐. 나는 열여덟 살 때 진짜 작았거든. 팔다리도 가늘고. 그러다 갑자기 고3 때 확 자라서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어.

봤어요. 그 변천사. 나는 웃음으로 그러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얼굴 안 바뀐 게 다행이라고 사장이 막 가슴을 쓸어내리더라니까.

“조금 달라졌어도 형은 멋있었을 거예요. 본판은 바뀌질 않는다잖아요.”

―너 지금 엄청 늙은이처럼 말했어.

민하원은 깔깔 웃었다. 휴대폰 너머로 조용히 웃어!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윤석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윤석진 저 성질머리. 진짜 더러워.

쯧쯧, 혀를 차던 민하원이 작게 하품을 한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형,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러 가지 않아요? 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요즘엔 운동량을 더 늘려서 엄청 졸려. 잠이 쏟아져. 배도 고픈데 윤석진이 만날 닭가슴살만 주고…….

민하원이 또 꽁알거렸다.

“운동하고 칼로리 맞춰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분한 수면도 중요해요. 어서 주무세요.”

―그래야겠다. 내가 너무 늦게 전화하니까 곤란하지?

“아니에요. 전 어차피 늦게 자거든요.”

―용주도 빨리 자야지. 그 나이에는 열 시 전에 자야 해. 그래야 키가 커.

전 이미 다 컸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민하원의 이어지는 하품 소리에 나는 네, 하고 짧게 답하며 통화를 끝낼 것을 종용했다.

―내일 낮에 전화할게. 잘 자.

“네, 주무세요.”

내 말에 민하원은 작게 웃으며 다시 잘 자, 하고 말했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워졌다.

목덜미에서부터 귓바퀴까지 벌겋게 열이 오르는 기분에 나는 손으로 귀를 감싸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아, 이상해.”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민하원이랑 얼굴을 마주하고, 민하원의 목소리를 듣고, 민하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꾸 열이 오른다.

사람 이상하게 만들어. 자꾸 가슴도 뛰는 것 같고. 이게 바로 팬심인가. 슬슬 나도 민하원 빠돌이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건가.

차라리 여자 아이돌 가수나 배우를 좋아하지 왜 하필 민하원이야. 나는 소리 없이 절규하며 눈물을 삼켰다.

∞ ∞ ∞

민하원은 꽤나 자주 전화를 했다. 연예인이 이렇게 막 자기 휴대폰으로 전화해도 되는 건가. 발신 번호가 표시되어서 번호가 다 남는데. 그런 거 모르고 전화를 하지는 않을 테고.

나는 민하원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조금 고민했다.

휴대폰 통화 목록에 남아있는 민하원의 번호를 저장해두고 싶었지만, 본인의 허락도 없이 저장해도 되는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저장해두지는 않았지만 하염없이 바라본 탓인지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나름 곤란했다.

“네?”

나는 민하원의 말에 놀라 드물게 큰 소리를 냈다.

―왜 그렇게 놀라? 석진이가, 아얏, 석진이 형이 잠깐 나가야 한다고 너 부르래.

민하원의 말에 따르면 그의 매니저 윤석진은 민하원보다 네 살 위인 스물일곱이라고 했다. 나랑 대화를 할 때는 윤석진이, 석진이가, 하면서 막 부르다가 그 버릇이 나와 매니저 옆에서 그대로 말해버린 모양이었다.

기어코 한 대 맞았는지 불퉁한 목소리로 석진이 형이, 하고 말하는 민하원 때문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해야 했다.

“매니저님 나가는 거랑 저랑 무슨 상관있다고요. 제가 또 자장면 가져가면 어쩌려고 저를 부르래요?”

―나 혼자 있으면 일낼지 모른다고 자기 나가기 전에 너 불러다 놓으래. 빈손으로 오는 거 확인하고 가겠대.

민하원의 풀 죽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가도 돼요?”

―왜? 바빠? 약속 있어?

민하원은 속사포처럼 빠르게 물었다. 아뇨,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아니라 댁이 걱정이라서요. 난 일반인이지만 댁은 티브이 화면에서나 봐야 하는 연예인이니까요. 이제껏 전화 통화한 것과는 또 의미가 다르잖아요. 이제는 그렇게 쉽게 만나러 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석진이가 두 시간 있다 나가야 한다고 한 시간 반 뒤에 너 빌라로 오래.

“한 시간 반 뒤요?”

―응, 나 아직 운동 안 끝났거든. 한 시간 더 해야 해. 가는 데 한 삼십 분 걸리니까 너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그러나 봐.

나는 볼을 긁적이며 음, 하고 말을 끌었다.

―용주야, 와라. 와서 나랑 놀아줘. 용주 못 본 지 오래돼서 보고 싶다.

장난기 섞인 말이었지만 보고 싶다는 민하원의 말에 또다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상하다. 점점 더 민하원 빠돌이가 되어가나 보다. 증상이 심각해지는 나 자신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갈게요, 하고 말했다.

―와, 그럼 나 운동 열심히 하고 빨리 갈게. 좀 이따 봐.

“네.”

한껏 신이 난 듯 높아진 목소리로 좀 이따 봐, 하고 말한 민하원은 네, 하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빨리 운동하자고 달려갔을 게 분명하다. 충분히 예측 가능한 민하원의 행동에 웃음을 흘리며 나는 프런트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저 친구네 갔다 와도 돼요?”

“그래라. 가게 딱히 안 나와도 된다니까 나와서 그러네.”

앞치마를 벗고 젖은 손을 행주에 닦으며 주방에서 나온 아버지가 금고를 열어 이만 원을 꺼내 주셨다.

“갈 때 먹을 거 사 가서 먹어.”

“괜찮은데.”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아버지 손에서 이만 원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다녀올게요.”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 반 뒤에 오라고 했지만 더워서 흘린 땀 때문에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자장면 냄새 폴폴 풀기며 철가방 들고 그 집에 갔던 게 몇 번인데 새삼스럽게.

그러면서도 집으로 날듯이 뛰어온 나는 옷을 벗고 깨끗하게 샤워를 했다. 속옷도 갈아입고 빨아놓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상태로 컴퓨터를 켰다.

은근히 매니저가 똑똑하다. 똑똑하다기보다 영악하다고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르면 양심 때문에라도 내가 민하원에게 음식을 가져다줄 수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닭가슴살만 먹고 있을 민하원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픈데, 내가 가져다준 자장면과 탕수육 때문에 더 힘들게 운동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닭가슴살 요리.

인터넷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서 검색하자 여러 가지 레시피가 쭉 목록으로 떴다.

세상 참 좋아졌구나.

누나가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인터넷 강의를 듣는 누나 때문에 컴퓨터를 하지 못했고, 대학 들어가고 나서는 리포트를 써야 한다며 밤새워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누나 때문에 역시 못 했다.

그 외의 시간들은 내가 훈련 때문에 할 시간이 없어서 못 했고. 그래서 나는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더듬더듬 목록에 뜬 닭가슴살 요리를 새 창으로 띄워 살펴보자 튀김 요리, 볶음 요리, 여러 가지 요리들이 나왔다.

담백하게 기름기 없이 먹어야 하는 모양인데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네.

쯧쯧, 혀를 차며 레시피를 쭉 넘겨보다가 가장 칼로리가 적고,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

닭가슴살 냉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요리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준비해가서 매니저한테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요리를 해보고, 아니면 관두지, 뭐. 필요한 재료와 간단한 요리 방법을 종이에 옮겨 적으며 생각했다.

제대로 요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집에서 가끔 이것저것 만들어 먹기도 하고 또 레시피를 보니 그다지 대단한 기술이 필요치 않은 간단한 것이라 심각하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드레싱만 만들어 가면 거기서 할 건 별로 없겠지.

레시피에는 잣이 재료인데 없는 잣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아버지 술안주로 남겨두었던 땅콩을 까서 잣 대신 넣고 대추와 우유를 함께 갈아 추가로 소금, 설탕, 식초, 연겨자를 조금씩 넣고 섞어 일명 ‘고소하고 담백한 잣 대신 땅콩 드레싱’을 만들었다.

그것을 작은 용기에 담아놓고 시계를 보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새지 않도록 주방에서 쓰는 위생봉투에 드레싱 용기를 넣고 잘 묶어서 가방에 넣었다.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저 나가요.”

“부엌에서 뭐 만드는가 싶더니 그새 나가?”

안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오며 물었다.

“친구네 가요. 다녀올게요.”

조금 어질러놓은 주방은 다녀와서 치울게요. 미안함을 담아 웃으며 나는 재빠르게 집을 나왔다.

가는 길에 야채 가게에 들러 양배추와 오이를 샀다.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네.”

―우리는 집에 도착했어. 윤석진은 지금 옷 갈아입고 있어.

“저도 가는 길이에요. 십 분 정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문 열어놓고 기다릴게.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웃으며 네, 하고 답했다.

야채가 담긴 봉지를 손에 들고 민하원이 기다리고 있을 빌라로 향했다. 금방 씻은 몸에서 땀이 흘렀지만 더워서 짜증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빌라로 향하는 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요즘 들어 심각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 민하원의 빠돌이가 되어가는 듯싶었다.

빌라로 들어서 계단을 올라 302호의 문 앞에 섰다.

예전 같았으면 벨을 누르기도 전에 민하원이 문을 열어줬을 텐데. 매니저 스파이인 앞집의 아줌마를 경계하면서.

벨을 누르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철컥, 문이 열리며 얼굴을 내민 이는 윤석진이었다.

“들어와. 하원이 씻으러 들어갔어.”

“아, 네.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비켜주는 윤석진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가만히 서 있자 윤석진이 문을 닫고 와서는 “물 줄까?” 하고 물었다.

“네, 주세요.”

무척 더운 날씨였기에 이마에서 땀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하원이는 운동하고 씻고 왔는데, 기다리다가 너무 덥다고 다시 씻으러 지금 방금 들어갔어.”

“용주 왔어?”

“그래, 빨리 씻고 나와.”

대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욕실 안에서 민하원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윤석진이 욕실 문을 쾅 발로 차며 답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떠 왔다.

“마시고 아무 데나 앉아.”

“네.”

그렇지만 혼자 멀뚱하게 앉아있기가 뭐해서 나는 물을 마신 빈 컵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건 뭐야? 또 뭐 먹이려고 사 왔냐?”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하기도 하고.”

“뭔 소리야?”

윤석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가져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야?”

“그냥 닭가슴살만 먹으면 퍽퍽하고 맛없다고 그래서, 굽거나 튀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샐러드로 만들면 먹기 쉽지 않을까 해서요. 샐러드라서 칼로리도 별로 안 높아요.”

내 말에 윤석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민하원을 생각한다면 네가 몰래 먹인 음식으로 민하원이 좆 빠지게 러닝머신 뛰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해.”

꽤나 무서운 협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저번엔 미안했다.”

주방 싱크대에 야채를 가져다 놓으며 윤석진이 내뱉은 말에 나는 “네?” 하고 물었다.

“저번에 말이야, 탕수육.”

“아, 아니에요.”

“아무튼 민하원 이 새끼는 눈만 잠깐 떼고 있으면 사고를 쳐요.”

“내가 뭘.”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민하원이 밖으로 나왔다. 간단하게 트렁크 하나만 걸친 그는 하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면서 나와 윤석진의 앞에 떡 버티고 섰다.

키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윤석진은 손을 들어 민하원의 머리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이 머리통에 생각이란 게 있기나 하냐?”

“있어, 있다고.”

불퉁한 목소리로 민하원이 윤석진을 향해 꽁알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용주 왔구나? 덥지?”

“아, 네.”

의도치 않게 민하원의 세미 누드를 보게 된 나는 시선을 발끝에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발가락도 저렇게 예쁠까. 분홍색의 발가락 하나하나 어디 휘거나 모자람이 없이 곧고 반듯하니 귀엽다. 그 위로 보이는 복사뼈도 예쁘고, 쭉 빠진 종아리도 예쁘고, 튼튼한 허벅지도 요즘 말하는 그 뭐냐 말벅지, 꿀벅지 저리 가라고. 트렁크 색깔도 알록달록 예쁘고, 그 위로 배꼽도 예쁘고, 탄탄한 근육에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식스팩도 예술이고, 젖꼭…….

한참 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민하원의 가슴에서 황급히 시선을 떼어냈다. 분명 발끝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민하원의 가슴을 훑고 있었지.

쿵쿵 울리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하원이 다가와 젖은 머리를 닦던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밖에 날씨 진짜 덥지? 땀 흘린 거 봐. 너도 샤워할래?”

콧속으로 샴푸 냄새가 확 휘몰아쳤다. 왠지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고. 샤워하기 전에 잠시 누워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민하원을 살짝 밀어냈다.

“야, 더우니까 떨어져. 쟤 더워서 땀 삐질삐질 흘리는 거 안 보이냐? 가서 옷이나 입고 나와.”

민하원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때린 윤석진이 민하원의 목덜미를 잡고 방으로 밀어 넣었다.

“저 새끼는 명색이 배우란 새끼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빤스 차림으로 돌아다녀.”

안에서 구시렁거리는 민하원을 향해 윤석진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물 한 컵 더 줄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 하원이가 하도 용주, 용주 하기에 저 새끼 혼자 두고 가는 것보다 너 옆에 두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서 부른 거니까. 내가 부탁해서 너 오라고 한 거니까 그렇게 얼어있지 말라고.”

“네.”

“웬만하면 저 녀석 안 떼놓고 다니려고 하는데 좀 중요한 일이 생겨서. 부탁이니까 저 새끼 딴 거 안 처먹게 하고. 그 무슨 샐러드? 그거 해서 먹이고 좀 데리고 놀아줘. 저 새끼는 처먹으면 안 되니까 나중에 따로 밥 한 끼 쏠게.”

“아니에요.”

“그럼 나 좀 늦었으니까 먼저 나간다.”

윤석진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서둘러 구두를 신고 문을 열고 나갔다. 이 더운 여름날 왜 정장을 입고 있나 했더니 중요한 일이었구나.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싱크대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검은 봉지에서 야채를 꺼내 씻고 도마와 칼을 찾았다.

“어, 뭐 해?”

간편한 민소매 티와 반바지를 입고 나온 민하원이 내 뒤로 다가와 빠끔 얼굴을 디밀었다.

“형 닭가슴살 퍽퍽해서 먹기 싫다면서요.”

“응.”

“닭가슴살 냉채 해줄게요.”

“그게 뭔데?”

“샐러드랑 비슷해요. 담백하고 아삭아삭하게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민하원은 으응, 하고 대답했지만 별로 이해하고 답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냉장고에서 닭가슴살을 한 덩어리 꺼냈다. 물은 금방 바글바글 끓었다. 끓는 물에 닭가슴살을 집어넣고, 씻은 야채들을 한쪽으로 올려두었다.

먼저 오이를 썰어 소금을 약간 뿌려 절여두고, 양배추는 가늘게 채를 썰어 볼에 담았다.

“용주 되게 능숙하다.”

“집에서 가끔 요리하거든요.”

“아버지가 요리사이시니까 용주도 요리를 잘하나?”

“별로 타고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민하원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 내려다보며 민하원이 말했다. 더운 날씨에 주방에서 가스 불을 켜놓고 민하원까지 등에 달고 있으려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오롯이 더워서, 라기에는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이 이상했지만 일단은 더우니까,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양배추 썬 것을 냉장실에 넣어두고 삶은 닭가슴살을 꺼내 결대로 찢어놓았다. 가방에서 미리 챙겨 가지고 온 드레싱과 달걀 하나를 꺼냈다.

닭가슴살 삶은 물에 달걀을 넣고 익혔다. 일석이조,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나는 볼을 긁적이고는 아무렴 어때,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샐러드 담을 그릇을 찾아 꺼내고 냉장실에 넣어두었던 양배추를 그릇 위에 올렸다. 볼에 닭가슴살과 물에 헹궈 물기를 짠 오이, 그리고 삶은 달걀에서 노른자를 빼내고 채를 썬 흰자를 넣고 드레싱을 절반 정도 넣어 버무렸다.

채 썬 양배추 위에 드레싱으로 버무린 것을 올리고 따로 빼두었던 달걀노른자를 체에 내려 샐러드 위에 올렸다. 남은 드레싱을 야채 위에 살짝 뿌려주니 그럭저럭 볼만했다.

“어때요?”

“엄청 맛있어 보여. 고소한 냄새 나는데 뭐야?”

여전히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던 민하원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민하원이 그럴 때마다 묘한 울림이 전해져 가슴 한쪽이 간지러웠다.

나는 의연한 얼굴로 간질거리는 감각을 참아내며 땅콩 드레싱이요, 하고 말했다.

“땅콩이나 달걀 알레르기 같은 거 있는 건 아니죠?”

“없어. 나 다 잘 먹어.”

“다행이네요.”

조리용 나무젓가락으로 드레싱이 듬뿍 묻은 양배추와 닭가슴살을 집어 민하원을 향해 돌아섰다.

흘릴지도 몰라서 밑에 왼손을 대고 민하원의 입으로 가져가자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는 게 보였다. 예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닭가슴살 냉채를 밀어 넣어주자, 입을 닫고 오물거린다.

“맛 어때요?”

“맛있어.”

가까이 서 있어서 그런지 민하원이 입술을 벌려 말을 하자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조금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더위라도 먹었나. 자꾸 정신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시야가 어지러워짐을 느끼고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테이블에 앉아서 드세요.”

닭가슴살 냉채를 예쁘게 담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수저통을 뒤져 예쁜 포크를 꺼냈다. 아직까지도 가까이 붙어있는 민하원을 끌어 테이블 앞에 앉히고 포크를 손에 쥐여주었다.

“드레싱 버무려놓았으니까 그냥 먹어도 될 거예요. 어서 드세요.”

민하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에서 조물거리던 포크를 기어코 떨어뜨리고 포크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는 얼굴이 웃겨 나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쪼그리고 앉듯이 무릎을 구부려 포크를 집었다. 씻어서 줘야겠다 생각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민하원이 턱, 어깨를 잡았다.

“용주야.”

“네?”

고개를 들자 민하원은 뭔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쁜 얼굴에 담긴 표정은 평소 그가 보여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꽤나 복잡해 보였다.

심각한 남자의 얼굴이란 이런 것일까.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있어서인지 민하원이 성인 남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왜…….”

왜 그래요? 라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민하원이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형, 제가 뭐 화나게 했어요?

말을 내뱉기도 전에 민하원의 품으로 끌어당겨져 입술을 부딪쳤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 민하원의 얼굴이 있을 텐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바탕에 그것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불빛이었다.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눈앞에 하얀 것들이 팡팡 터졌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든가. 입술을 마주하고 있는 민하원의 숨결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

“용주야.”

애달픈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민하원이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민하원의 손바닥이 뜨거운 것인지 내 뺨이 뜨거운 것인지 몰라도,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부딪치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민하원의 혀가 밀려 들어왔다. 윽, 하고 몸을 굳히자 부드럽게 입술 안쪽을 문지르며 쪽쪽 입을 맞춘다.

“혀, 혀엉.”

나는 민하원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는 내 입가에 입을 맞추고 내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집어넣어 입 안쪽을 헤집었다.

뜨겁게 열이 오른 혓바닥이 입천장을 간질이고 안쪽에 숨어있던 내 혀를 잡아당겼다. 혀뿌리가 뽑힐 것처럼 아파 찔끔 눈물이 솟았다.

뺨을 감싸고 있던 민하원의 손이 목덜미를 쓰다듬고 귓불을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도 민하원의 손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더워, 더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민하원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민하원이 혀를 움직여 내 입술과 내 혀를 빨아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울려 낯을 뜨겁게 만들었다.

분명 민하원의 예쁜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을 텐데도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차마 열이 오른 얼굴로 민하원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내 것인지 민하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을 목으로 넘기고,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혀를 이로 잘근 씹으며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입술을 마주하고 춥춥거리던 민하원이 이윽고 입술을 떼어냈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몸을 껴안고 있는 상태였고, 입술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말을 하거나 움직이면 다시 부딪칠 것처럼 가까웠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를 마주한 상태로 우리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민하원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결이 내 입술에 부딪혔고, 내 입술에서 흘러나간 숨 역시 민하원의 입술에 닿았을 것이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

민하원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의자 위에 앉아있던 민하원은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와 앉아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내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당황한 것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예쁜 입술이 벌어지며 내뱉은 말에 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현실과 함께 진실도 깨달았다.

“미안해.”

민하원은 다시 한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따라 민하원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럴 생각 없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예쁜 입술이 내뱉는 말은 항상 기분을 좋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저 예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이렇게 사람 가슴을 찢을 수도 있구나. 그것을 실감하고 있노라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내 존재가 참으로 우스웠다.

“저…… 가봐야겠어요. 죄송합니다. 가볼게요.”

“용주야.”

민하원은 주춤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거실 한쪽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들고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민하원을 보지 않은 채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민하원이 뒤따라 나올 리도 없건만, 나는 누가 잡아채기라도 할 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 ∞ ∞

가슴이 울렁거린다. 밥도 먹기 싫고 밥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 같았다. 괜히 감정이 격해져서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가끔은 물만 마셔도 욕지기가 치밀고, 어떤 때는 뭔가 막 먹고 싶어서 슈퍼에 나가 과자를 한가득 사 와서 먹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입덧하는 임산부라도 보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셨고, 누나는 별 미친 짓을 다 한다며 혀를 찼다.

그러게, 어머니 말씀은 가능성이 없는 거니까 기각이고, 누나 말은 조금 그럴듯하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거든.

나는 벽에 기댄 상태로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았다. 며칠째 이런 상태인 나 때문에 누나는 요 며칠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도 별소리 안 하는 것을 보니 고맙기도 하다.

동생이 진로 때문에 결국엔 폭발해서 집에 처박혀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동생은 진로보다 자신이 게이인가 아닌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계속해서 민하원과 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그것이 싫고 역겨웠다면 다행인데 민하원의 얼굴 탓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부터 그런 쪽이었는지 전혀 이상하다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분에 취해서 민하원의 어깨에 매달렸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안, 하고 말했던 민하원의 목소리도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미안해. 이럴 생각 없었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지.

민하원의 말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것을 보면 아마도 내가 민하원을 좋아했었나 보다. 우정이나 형제애 같은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바라보는 감정으로 민하원을 좋아했었나 보다.

그래서 그 예쁜 얼굴에 자꾸 눈이 가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었나 보다.

민하원을 티브이에서 먼저 보았다면, 그 사람이 유명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만났다면 이런 감정보다 팬심이 먼저였을 텐데. 그럼 이런 웃기지도 않는 고민 따위 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째서 사람 대 사람으로 민하원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나는 언감생심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보게 되었을까.

이성을 대하는 마음으로 남자를 보는 것도 모자라서 그 대상이 유명 연예인인 민하원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겨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배를 잡고 깔깔 웃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큭큭, 아이고 배야. 으흐흐흐흐, 웃겨 죽겠네. 하하하.”

바닥을 빙글빙글 돌면서 웃어대는 나를 누나가 벌컥 방문을 열고 바라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적당히 해, 등신아.”

평소라면 쾅, 하고 문을 닫아버리는 누나를 쫓아가 내가 뭘! 하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스스로도 적당히 해, 하고 말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자, 서용주.

첫사랑의 아픔은 달곰씁쓸한 것이라고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나는데 정말 그랬다. 정말 달콤하고 정말 씁쓸했다.

민하원을 떠올리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바닥에 누워 웃던 자세 그대로 나는 조용히 울었다.

민하원에게서는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있지는 않지만 통화 목록에 남아있는 번호. 그 번호를 보며 나는 통화 버튼을 눌러볼까 말까 고민했다.

하루, 아니, 한 시간, 아니, 일 분 동안 열 번은 넘게 고민하면서도 결국 통화 버튼 한번 눌러보지 못하고 나는 휴대폰을 꺼야 했다.

민하원, 나쁜 놈.

나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왜 아무런 연락도 안 하는 거야, 왜. 유명 연예인이면 더더욱 내 입을 막아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무슨 소문이라도 내고 다니면 어쩌려고. 내가 고소라도 하면 어쩌려고.

한참 동안 허공을 향해 열을 내다가 결국 나란 놈은 그럴 가치도 없다는 거지?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민하원은 내게 따분한 일상 속의 작은 일탈이었고 즐거움이었지만 결국 하룻밤 꿈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 ∞ ∞

짧았던 여름방학 동안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고, 원동기 면허를 취득했으며, 민하원이라는 유명 연예인을 직접 보았고,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첫사랑의 시작과 끝을 겪었다.

그것이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가 겪은 일이었다.

전자는 남들에게 대수롭지 않게 이번 여름에는 말이야,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고, 후자는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꽁꽁 묻어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약간의 아픔을 겪고 약간의 성장을 하여 학교로 돌아갔다.

하계 전지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았건만 축구부 탈퇴는 아직 승인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탈퇴 승인이 될 때까지 축구부 훈련에는 참가해야 했지만 예전처럼 축구에 대한 열기는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러했다. 그 어떤 것에도 예전처럼 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장마철도 끝났건만 아직까지도 비가 내리는 8월 말, 물비린내를 동반한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서 나는 어린 왕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어떤 책이기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중반에는 조금 지루해서 졸기도 했고, 졸다가 억지로 책장을 넘겨 중반을 겨우 읽고 넘어가서 마지막까지 읽었을 때는 ‘씨발, 이게 무슨 내용이야.’ 하는 마음이었다.

책 한 권으로 감동을 얻기에는 나는 뼛속까지 근육으로 되어있는 사내 녀석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어린 왕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네 번 정도 읽고, ‘나를 길들여줘.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기쁠 거야.’ 등등 유명한 여우의 대사를 대충 지껄이며 인용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가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축구부를 관두지 못했고, 태도가 불량하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감독과 선배에게 코피 터지게 얻어맞기도 하고 가을비가 내리는 운동장을 하염없이 돌기도 했다.

이전에는 보지 않았던 티브이 앞에 앉아 연예계 소식을 전달하는 프로그램들을 간간이 챙겨 보았고, 조만간 주말 드라마 ‘가족의 울타리’가 첫 방송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하원이 둘째 아들 역으로 나온다는 그 드라마였다.

짧은 인터뷰를 하는 민하원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야윈 것도 같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이 홀쭉해진 것처럼 보였다.

운동은 그 뒤로도 열심히 한 모양인지 몸은 더 좋아진 것 같고. 조금 야위었지만 빛이 나는 얼굴은 여전했다.

여전히 예쁜 사람이다. 나는 멍한 얼굴로 민하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 ∞

가족의 울타리 봐야 하는데.

일주일 전부터 애타게 기다려왔건만 주말이라 가게가 바빠 일을 도와야 했다. 평소에는 나와서 도와준다고 하면 필요 없다고 화를 냈으면서, 꼭 이럴 때만 나를 찾는다.

오늘만큼은 제발, 하고 기도했는데, 어째서 슬픈 예감은 틀리는 일이 없는지 하필이면 오늘 끌려 나와서 프런트를 맡았다.

가게에도 티브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에는 법으로 정해둔 것도 아닌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꼭 ‘추억의 가요’ 프로그램이 틀어져 있었다. 게다가 가족의 울타리가 할 시간인 딱 여덟 시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일곱 시 삼십 분을 넘어서는 시계를 쳐다보다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이는 홀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 오늘 진짜 집에 들어가야 해요. 네?”

“아직 손님 다 안 가셨다.”

“저 진짜 오늘은 들어가서 봐야 할 게 있다니까요!”

조금 짜증을 내자 아버지가 이마에 팍 인상을 썼다. 아버지가 저렇게 인상 쓰면 진짜 무섭더라. 나는 깨갱, 꼬리를 말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가족의 울타리 보고 싶었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꾹꾹 서러움을 눌러 참으며 나는 프런트 위로 엎드렸다.

“사내새끼가 드라마 보려고 집에 가려고 하냐?”

“내가 그거 꼭 보려고 일주일 전부터 벼르고 있었거든? 형이 그걸 알면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배달 갔다 오면서 그릇도 수거해 왔는지 주방에 들어갔다 나오던 영덕이 형이 내 등을 팍 때리며 말했다.

“너 집에 가라신다.”

“응?”

“사장님이 너 집에 보내래. 얼른 가서 드라마나 봐라, 자식아.”

“진짜?”

“그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저 진짜 가도 돼요?”

“가라, 가. 그렇게 퉁퉁 부어서 엎드려 있으면 오던 손님도 다 가버리겠다.”

“죄송합니다. 저 그럼 빨리 갈게요.”

이히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집업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형, 나 먼저 갈게.”

“넘어지지 말고 조심해서 가라.”

애 취급하는 형의 말에도 기분이 나쁘질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삼십 분 정도 여유 있으니까 빨리 뛰어가면 씻고 나와서 드라마를 볼 수 있겠다.

발을 재게 놀려 걸음을 옮기고 있을 무렵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갑자기 손님이 몰려왔다고 다시 끌고 가려는 거지. 나는 눈물을 참으며 뒤로 돌아섰다.

“차라리 보내준다고 말하지나 말지.”

“안녕.”

나를 잡은 이가 영덕이 형이라는 생각에 원망을 잔뜩 담아 노려보았는데, 귓가로 낯익으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흐릿해진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

“……오랜만.”

민하원이었다. 가벼운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그는 야구모자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해도 떨어졌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면 더 눈에 띄는데.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그런 생각을 했다.

멍하게 서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민하원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바보처럼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 인사를 하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드라마 오늘 첫방이라는데 나 지금 그거 보러 가요. 그런 말을 하기엔 조금 부끄러웠다.

오랜만에 보는데 몸이 더 좋아지셨네요. 이것도 왠지 어울리는 대화는 아닌 듯했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나는 민하원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얼굴이었는데 막상 마주하고 나니 가슴이 아파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려 발끝을 바라보았다.

“좀 바빴어.”

민하원은 며칠 외박하고 들어온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변명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드라마 찍으시잖아요.”

“응, 그래서 연락 못 했어.”

그랬구나. 변명임을 알지만 나는 민하원의 말에 수긍했다. 바빠서 연락 못 했대. 그렇게 이제껏 가슴 졸이고 아파하던 내 가슴에 대고 말했다. 바빠서 연락 못 했대.

“아니, 이건 그냥 변명이야.”

민하원은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그때…… 미안해서 연락 못 했어.”

또 미안하다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듣기 싫은데. 그게 그렇게 미안할 일이라면 이성을 바라보듯 민하원을 좋아하는 나는 대역 죄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너무 이상했어. 너를 보면 항상 가슴속이 답답하고 뻐근하게 아파. 너랑 있는 게 좋은데 이상하게 아프고. 내가 좀 이상했어.”

민하원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을 몰라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쳐댔다. 나는 멍청하게 서서 그의 두서없는 말을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말하는 것들이 낯설지 않다고 바보처럼 생각했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고 싶었는데 참을 수가 없었어. 물론 배고픈 것도 못 참고, 먹고 싶은 거 못 참아서 자장면 먹고 탕수육도 먹었는데…… 그것보다 더 참기가 힘들었어. 너한테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나고, 널 보면 그래서 항상 안고 싶고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네?”

점점 이상해져 가는 민하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주절주절 두서없이 지껄이던 민하원의 얼굴은 선글라스 아래로 드러난 부분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얼굴 전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는 것이겠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너한테 연락 못 했어. 내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 못 하겠지?”

민하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내게 물었다. 그 모습이 풀 죽은 아이와도 같아서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손을 뻗어 민하원의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리고 있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겼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래봤자 목덜미랑 귀도 다 빨간데.

“하원이 형.”

나는 부드럽게 민하원을 불렀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남자가 주춤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요, 어린 왕자를 네 번이나 읽었어요. 지금 다섯 번째 읽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 수업에 들어가도 교과서 내용 하나도 모르고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내용도 잘 몰라요. 우리 누나는 내가 대학 가면 대한민국에 대학 못 갈 애들이 없을 거래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머리가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형이 지금 한 말도 사실 거의 이해 못 해요.”

내 말에 민하원의 얼굴 위로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것을 보며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린 왕자를 읽으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었어요. 형을 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하는 것도 있었고요.”

“뭔데?”

민하원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아직 장미를 찾지 못한 거죠?”

그는 내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형은 결국 장미를 찾아간 어린 왕자가 부러운 거잖아요.”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쥐고 다른 손을 뻗어 민하원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곧고 아름다웠으며 열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는…… 형의 장미가 되고 싶어요.”

물론 장미가 될 정도로 예쁘지는 않지만. 장미가 아니면 해바라기나 민들레, 진달래, 개나리도 좋아요.

내 말에 민하원은 대답 대신 나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마주 닿은 가슴 너머로 쿵쿵 심장의 울림이 전해졌다.

말해주지 않을래요? 형이 여행을 떠났다 돌아올 때, 형을 돌아오게 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내가 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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