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화 〉 시어머니1
* * *
미스트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레이시는 미스트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리드하지 못 했다는 사실에 시무룩하게 있으면서도 이내 미르와 레아의 몸을 닦아주었다.
몸이 크기 시작하면서 영 갑갑한지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미르와 레아.
레이시는 두 사람의 발버둥 겸 애교에 작게 웃다가 자기 손가락을 내어준 채 두 아이를 빤히 쳐다봤고, 에일렌은 레이시가 요람 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네르바의 손을 잡고 있다가 쪼르르 달려가 레이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으응? 왜요?”
“마망, 나 책 읽어줘어.”
“네? 무슨 책 읽고 싶어요?”
“이거!”
레이시의 주의를 끌자 배시시 웃으면서 책을 내미는 에일렌.
레이시는 에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에일렌이 원하는 대로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와 에일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레이시에게 한 편지를 건네주었다.
“레이시, 이번에는 백작 영애와 그 추종자들이 레이시를다과회에 초대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으응, 미스트. 에일렌하고 노는데 그런 거 물어보지 마요.”
“마자아~ 마망이랑 놀구 있으니까 미스트 엄마는 나중에!”
“후후, 그럼 못 간다고 답장을 보낼까요?”
“에에, 답장까지 보낼 필요가 있을까요? 미스트 말대로라면 그 사람들도 어차피 답장을 기대하고 편지를 보내진 않았을 거잖아요.”
약간 귀찮다는 듯 투정을 부리면서 미스트를 바라보는 레이시.
레이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방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답장도 보낼 필요가 없다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태연하게 편지를 찢어버리는 레이시의 행동에 눈웃음을 치다가 레이시에게 커피를 끓여오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미네르바는 미스트를 따라서 나갔고, 미스트는 자기를 따라오는 미네르바를 보고는 도와주겠냐고 물어보면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미네르바는 요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그래도 도와줄 건 있답니다.”
“으응? 뭐지?”
“과일 좀 깎아주시겠어요? 껍질만 따라 빙글빙글 자르면 돼요.”
“알겠다.”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칼을 잡고 잘라보는 미네르바.
칼 자체를 처음 잡아봤지만, 일반적인 날붙이로는 다치지 않기 때문에 미네르바는 빠르고 과감하게 칼을 휘두르며 껍질을 잘라내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미네르바의 칼질에 에일렌이 못 봐서 정말 다행이라면서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미스트.”
“왜요?”
“엘라가 있을 땐 아무도 안 그러던데 엘라가 사라지자마자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엘라가 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나 미스트가 약한 것도 아닐 텐데.”
“아하, 그거요? 저 사람들은 나대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없어서 상대방의 힘은 생각도 안 하고 일을 저질러서 그래요.”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네르바.
미스트는 미네르바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자 잠시 말을 고르고는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위험을 겪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하위 10% 이하의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뒷골목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평화로운 가정에서 부족할지라도 하루 두 끼 정도는 먹으면서 어떻게든 자라날 수 있어요. 평균적으로 부유할수록 평범한 삶을 보낼 수 있죠.”
“음, 그건 좋다. 에일렌도그렇게 자라나면 좋겠다.”
“후후, 그렇죠? 그런데 그러면 문제가 너무 평화롭게 살아서 상대방이 화를 내는 선을 모르게 되고 이렇게 계속해서 선을 넘게 되요. 그러다가 얻어맞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거죠.”
“흐음…….”
미스트는 미네르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사회에 대해서 매일 미스트에게 특강을 받았기에 지금은 어느 정도 법이 왜 필요하고 도덕과 윤리를 왜 배우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기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짓을 왜 이렇게 계속하는 걸까?
야생에서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건 부상을 입지 않는 것.
그리고 부상을 입지 않으려면 전투의 숫자를 줄여야만 하고, 그 방법은 가장 간단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건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흔히 문명인이라는 녀석들이 왜 상대방의 기분을 계속 건들고 짜증나게 구는 걸까?
이것만큼은 배움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미네르바는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저택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칼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처리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죽이지는 마요~.”
“그건 알고 있다.”
직접 죽이지 않고 법이라는 것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믿음을 공유하던 거랬나?
미네르바가 보기에는 허점이 많은 시스템이었지만, 일단 레이시와 살기 위해서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됐기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던 곳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보이는 건 나름 평범하게 꾸민 사람의 모습.
망원경을 들고 저택이 있는 쪽으로 바라보던 사람은 미네르바가 안 보이자 옆에 있던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누었고, 미네르바는 나무 위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헛웃음을 들이켰다.
자기가 여기에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나름 자기를 감시하러 왔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허접한 감지 능력.
미네르바는 이 정도로 둔감하자 오히려 재미있단 생각에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자기를 언제 눈치채나 확인했고, 미네르바가 보던 사람들은 이상하게 구름이 오래 낀다고 생각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허억!?”
그러자 보이는 붉은 눈동자와 황금빛 머리카락.
얼굴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눈동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했기에 감시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자기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밝히며 미네르바를 진정시켰고, 미네르바는 감시자들이 내민 문장을 바라봤다.
“미스트가 말한 문장이 아니군.”
미스트가 알려준 왕가와 공작 가문의 문장으로는 안 보이는 문장.
미네르바는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그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렸고, 마리아는 숲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한숨을 푹 내쉬면서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미네르바 씨~? 문제 있나요?”
“아니, 아무런 문제 없다.”
“부상자는요?”
“있다.”
“그럼 문제 있는 거잖아요. 이런 일은 저희 기사단에게 맡겨두라니까.”
“레이시를 훔쳐보는 녀석이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
“……그으,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요.”
“기사단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대충 일하나?”
“윽……. 그런 게 아니라 저희도 이것저것 다 잡으면 예산이라거나 그런 문제에 봉착해서요. 적의만 없으면 보내줄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다가 저희가 엘라 공주님의 부하 기사단이라면 그냥 공주님의 명령을 따르겠지만, 저희는 왕가 직속 부대라서 왕가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나는 그런 거 모른다. 하지만 레이시는 누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싫어한다.”
“……주의를 한 번 줄게요. 그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처리하지는 말라구요. 저는 미스트 씨가 아니에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시말서를 써야겠다고 말하는 마리아.
미네르바는 그런 마리아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것도 미스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미스트는 미네르바의 발에서 피 냄새가 나자 미네르바의 발을 씻겨주면서 같이 간식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미네르바가 깎아준 걸 알면 레이시도 칭찬할 거예요.”
“정말인가?”
“네에, 물론이죠. 레이시가 잘했다고 말해줄 거예요.”
미스트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위로 올라가는 미네르바.
문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고 간식을 들고 왔다고 말한 미네르바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서 들어갔고, 레이시와 에일렌은 미네르바가 방에 들어오자 손을 흔들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준비하느라 힘들었겠네요. 수고하셨어요.”
“미네르바 엄마가 했어?”
“커피는 제가 탔지만요. 자, 에일렌은 밀크 티에요.”
“와앙~!”
미스트의 말에 곧바로 내려와서 미스트에게 달려가는 에일렌.
레이시는 넘어진다면서 조심하라고 말하다가 에일렌이 미스트에게 안기자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미네르바를 바라봤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눈치를 보더니 레이시에게 안겨서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수고했어요.”
“에헤헤…….”
“미네르바, 둘이서 가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에일렌이 나가고 싶다는데 같이 산책 갔다 올까요? 하양이도 산책하고 싶어 하는 거 같고.”
“셋이서?”
“네, 셋이서.”
싱긋 웃으면서 미네르바의 볼에 입을 맞추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입맞춤에 눈을 깜빡이다가 배시시 웃으면서 좋다고 대답했고, 레이시는 마리아와 미스트에게 미리 말해뒀으니 2시쯤에 출발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2시…….”
“네.”
“에헤헤, 데이트다.”
“푸흣.”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웃음에 똑같이 웃다가 미네르바를 꽉 안아주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품에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데이트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즐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다가 미네르바와 함께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네요~.”
“에헤헤, 그런가? 그런데 이번 산책은 어디로 갈거냐?”
“글쎄요? 왕궁 내부를 돌아다닐까 해서요. 엘라도 없으니 밖을 돌아다니긴 좀 그렇고……, 무엇보다 왕궁도 어지간한 도시만큼의 크기가 되잖아요.”
정확하게는 제 2 내벽 안쪽 왕족 거주구의 넓이지만, 아무튼 어지간한 도시 하나 넓이는 되는 왕궁.
레이시도 아직 완전히 다 돌아다니지 못했었기에 레이시는 하양이를 타고 왕궁 탐험이라도 하자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왕궁을 탐험하자고 말했다.
사실 어딜 가든 상관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미네르바는 에일렌과 눈을 마주치자 눈을 깜빡이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어봤고, 에일렌은 미네르바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 베개를 내밀었다.
“음, 낮잠 잘 수 있는 곳…….”
그늘이 있는 곳이 좋으려나?
엄폐물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레이시라면 여기에서 엄폐물을 찾진 않겠지.
그렇다면 왕궁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공원에 가서 적당히 낮잠이나 자야지.
미네르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양이를 산책시킬 때 갔었던 공원을 생각해보며 어디로 갈지 정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어디로 갈지 정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어디로 갈거냐고 물어봤다.
“근처 공용 공원에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만든 정원이 있다. 거기에 가자. 거기 그늘이 시원해서 좋다.”
“그럴까요?”
“응. 그쪽으로 가자.”
미네르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스트를 바라보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의 시선에 준비는 이미 끝내뒀다면서 에일렌용 담요도 준비했으니 낮잠을 즐기고 오라고 말했다.
“미안해요.”
“뭘요, 새벽에 한숨도 안 자고 미르랑 레아를 돌보는 사람은 레이시잖아요. 낮에는 낮잠을 좀 자야죠.”
“에헤헤…….”
“감시자들이 몇 명 붙겠지만, 아직 주의해야할 감시자는 붙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네르바에게 주의해야 할 감시자의 문양도 보여줄 테니까 미네르바에게 경호를 맡겨주세요.”
“네, 그럴게요.”
“후후, 그럼 재미있게 놀고 와요. 그동안에 미르랑 레아는 제가 돌볼게요.”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웃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웃음에 같이 헤픈 미소를 짓다가 소매를 잡아당기는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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