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화 〉 시어머니2
* * *
“후아아아……, 하양이 등은 언제나 높네요.”
“으응? 그런가?”
“네에, 정말로요. 산책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높아요.”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까?”
“그, 그건 좀 무서우니까 사양해도 괜찮을까요?”
레이시의 말에 샐쭉하게 입술을 내미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하양이의 등 뒤에 앉아서 하양이에게 방향을 알려주다가 저 멀리 커다란 나무가 보이자 저기가 자기가 발견한 정원이라고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또 처음 보는 정원의 모습에 저 정원의 이름은 뭐냐고 물어봤다.
“레드포트 17공원. 임시 이름이라고 들었다.”
“에……, 그건 분명히 국왕님의 첫 번째 미들네임이었죠?”
“응, 그렇다. 국왕이 내게 가르쳐줬다. 이번에 엘라가 오면 일에 대한 상으로 이 공원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저택에서 가까운 곳에 만들었다고 들었다. 안에는 엘라가 좋아하는 게 있다고도 했다.”
“헤에~, 뭐가 있는데요?”
“모른다. 꽃은 꽃이고 꿀이 있는 것만 알면 되니까.”
“아하하, 하긴 그래요.”
“그래도 저 커다란 나무는 엘라가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국왕이 그랬는데 여자놀음이나 술로는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엘라는 나무 그늘에서 자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었다.”
“헤에. 그렇군요.”
미네르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두 사람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던 에일렌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잠시 멈추자 엄마는 저 나무를 좋아하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에일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무 가지에 앉아서자는 걸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정말? 저렇게 높은데 올라갈 수 있어?”
“네, 올라갈 수 있어요. 에일렌은 아직 어리니까 올라가면 안 돼요.”
“으응, 몇 살이 되면 올라갈 수 있어?”
“에? 그게, 그러니까…….”
이럴 땐 신체 나이를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실제 연령을 말해야 하나?
에일렌의 질문에 잠시 말을 멈춘 레이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엘라와 아샤에게 일을 떠넘겼고, 에일렌은 엘라와 아샤가 허락하면 해준다는 말에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오늘은 나뭇가지 위 말고 하양이 몸에 기대서 잘까요?”
“웅!”
“후후, 귀여워라. 에일렌은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귀여울까요?”
“마망!”
“에헤헤, 그럼 도착했네요. 조금 걷다가 잘까요?”
“응!”
레이시가 손을 내밀자 손가락을 잡고 배시시 웃는 에일렌.
레이시는 에일렌을 데리고 정원을 돌아다니며 나중에 엘라와 에일렌, 셋이서 왔을 때 어떻게 산책할지 생각했고, 에일렌은 엘라의 이름을 말하면서 다음에 올 땐 저기부터 가보자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마망, 나 이제 배고파아앙.”
“그래요? 그럼 하양이에게 가서 밥 먹고 코오~ 할까요?”
“응!”
레이시의 말에 쪼르르 달려가더니 하양이의 옆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에일렌.
하양이는 에일렌이 자기 옆구리에 몸을 기댄 채 밥을 먹자 몸을 살짝 틀어서 좀 더 부드러운 곳에 에일렌이 눕게 해주었고, 레이시는 그런 하양이의 이마를 쓰다듬다가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에일렌의 옆에 앉아 에일렌을 재워주었다.
“주인도 자라.”
“그럴까요? 미네르바는요?”
“나는 주인을 지켜야 한다.”
레이시에게 날개를 내어주면서 자기만 믿으라는 듯 눈을 부릅 뜨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 천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이시는 반사적으로 팔을 쭉 뻗어서 에일렌을 감쌌고, 이내 뱀 한 마리가 자기 팔을 물어뜯고 있는걸 봤다.
“……하?”
미네르바는 어디로 갔지?
미네르바라면 내가 당하기 전에 먼저 이 뱀을 죽였을 건데?
레이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뱀을 쳐다봤고, 뱀은 독을 주사하려다가 레이시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자 레이시의 팔뚝에 이빨을 박아넣은 채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누가 기르는 뱀이네……, ……암살자? 에일렌을 다치게 하려고?”
하지만 누가? 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뭐라고?
지금 왕궁 내에 있는 사람 중에 나를 적대하는 사람이 있던가?
볼케릭이 그나마 엘라와 자기를 조금 적대적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실의 규율을 유지하려고 일부러 적대시하는 것일 뿐 이렇게 암살을 시도할 만큼 적대적인 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지금껏 본 왕족들은 전부 자기에게 우호적이었다.
보지 못한 왕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레이시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레이시에게 이런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레이시를 죽이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더 좋은 방법도 있었을 거고.
그렇기에 레이시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뱀에게 자기 마력을 불어넣으며 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주인에게 가서 주인을 물어버려요. 할 수 있죠?”
싱긋 웃으면서 뱀에게 명령을 내리는 레이시.
자칫 잘못하면 주인에게 죽을 수도 있는 명령이었기에 뱀은 레이시의 명령에 부르르 떨면서 싫다고 발악하려고 했지만, 레이시는 에일렌을 물려고 한 뱀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마력을 계속 억지로 부여하며 뱀이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점점 눈이 풀리더니 눈동자의 색이 레이시의 것처럼 초록색으로 변하는 뱀.
레이시는 뱀이 자신의 명령을 따를 듯이 천천히 입을 벌리고 바닥으로 내려가자 웃으면서 보내준 다음 팔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는 미네르바의 이름을 불렀다.
“미네르바!”
“주인, 조금, 비켜라!”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나?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노성에 눈을 깜빡이다가 저 멀리 미네르바의 날개 끝자락이 보이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 사람들이 감싸고 있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누구길래 미네르바가 자기에게 오는 걸 막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은 레이시의 얼굴을 보더니 감히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냐며 레이시를 비웃었다.
“이 분이 누구인지 아시느냐!?”
“음, 모르겠는데요?”
추종자들이 떠받들여주는 사람은 국왕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였다.
닮았다고 한다면 슈레이와 닮은 여자.
레이시는 거기에서 이 여자가 슈레이의 어머니……, 그러니까 자기에겐 시어머니 중 한 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분명 이름이 알티네 오라토리엄이었던가?
흰머리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한 사람의 모습에 레이시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자기가 마력을 억지로 불어넣은 뱀이 저 멀리서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살의를 내뿜었다.
슬쩍 고개를 비튼 채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엘라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레이시의 모습에 움찔 떨면서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자기를 바라보자 싱긋 웃으면서 에일렌을 미네르바에게 맡긴 다음 아까 명령을 내렸던 뱀을 손으로 불렀다.
그러자 뱀은 전 주인을 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안심하며 레이시의 손을 휘감았고, 레이시는 그런 뱀의 안도의 눈을 가늘게 뜨며 알티레를 바라봤다.
“천한 출생의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여자구나.”
“엘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왕가에 그 아이 말고 누가 평민의 피가 섞였지?”
“아하하하. 그러네요. 엘라가 여기에 계신 분들처럼 피가 고여서 늘 하는 생각하진 않죠?”
천천히 손을 올리더니 뱀을 바닥에 내려놓는 레이시.
그러자 피로 물든 소매가 드러났고 알티네의 추종자들은 레이시의 소매를 보고 레이시는 옷을 깔끔하게 입는 방법도 모른다면서 레이시를 비웃기 시작했다.
“옷도 더럽게 입는구나.”
“아하하~ 그래요? 으응~ 그래도 당신네들 보다는 깨끗할 거 같은데.”
“…….”
“미네르바.”
“응, 주인.”
“죽일까요?”
눈을 가늘게 뜨고 살기를 내뿜기 시작하는 레이시.
자신을 사랑해주는 연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살기를 뿜어대던 레이시는 자신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는 알티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안 봐줄 거예요.”
여러 의미에서 마지막 경고를 날리는 레이시.
알티네는 그런 레이시의 경고를 귀엽다는 듯 피식 웃더니 그대로 레이시의 뺨을 때렸다.
“자기 애완동물도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
“다른 건 다 됐으니, 슈레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거라. 엘라, 그 하찮은 년은 그동안 늘 방해만 하다가 이제야 슈레이의 도움이 될 수 있게 됐으니 기뻐하며 내 말을 듣거라.”
레이시는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알티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다며 입술을 비틀더니 자기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없다면서 알티네의 말을 그대로 거절했다.
정중하게 찾아왔다면 적어도 이야기라도 들어봤겠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에일렌에게 뱀을 보내고 자기를 때린 사람.
레이시는 이야기를 듣기도 싫다는 듯 이걸로 만족했으면 돌아가라는 말을 건넸고, 알티네는 레이시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지금 자기 말을 거절하는 의미를 알고 있냐고 물어봤다.
“연회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될 건데.”
“그런 건 어머니가 혼자서 마음껏 즐겨주세요. 저는 그런 거 싫거든요.”
“흐응, 엘라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된다고 해도?”
“그렇다고 제가 이런 취급을 받고 어머니께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되는 건 더 싫어할 거라서 그렇게 할 수는 없겠네요.”
“그이가 부패 귀족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낳은 것의 부속물 주제에 말이 많구나.”
“사람에게 물건 취급이라니, 너무하시네요. 엘라도 아버님의 피를 반이나 받은 소중한 딸인데.”
“흥, 끝까지 바락바락 대드는구나.”
“엘라에게 배운 거랍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빨리 꺼지라는 듯 눈을 차갑게 뜨는 레이시.
레이시는 당장에 가지 않으면 그대로 공격하겠다는 듯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뼈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알티네의 추종자들은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한 살기를 내뿜는 레이시의 모습에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알티네를 불렀다.
그러자 알티네는 레이시와 미네르바를 번갈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다가 자기의 말을 제대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천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주인.”
“네에?”
“아까 명령대로 죽일까?”
“으음, 시어머니니까 죽이면 안 되죠? 에일렌은 자요?”
“응, 아직 잔다.”
“후후, 고마워요. 다시 아무 일 없는 듯 자고 계세요. 저는……, 저는 미스트에게 가볼게요. 이번 일은 저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괜찮나?”
“네, 괜찮아요. 에일렌만 안전하면 괜찮아요. 뱀도 독을 넣지는 못 했고요.
“…….”
“뱀은 내버려 두세요. 미스트에게 보여줘야 하니까.”
레이시의 말에 뱀의 목을 잡고 있다가 혀를 차면서 레이시의 팔에 뱀을 올려주는 미네르바.
뱀은 방금 자기가 죽을 뻔 했다는 걸 알고 있는지 꼬리 끝을 파르르 떨면서 겁을 먹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고, 레이시는 그런 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겨 미스트에게로 돌아갔다.
하양이의 등을 타고 와야만 했던 것만큼 저택과는 거리가 꽤 있었지만…….
“후우, 조금 뛰어야겠네요. 꽉 매달려요. 길가다 떨어지면 그냥 몸통을 쥐고 달릴 거니까.”
레이시는 전혀 개의치 않고 구두의 끈을 만지작거리더니 하양이가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뱀은 짧은 생동안 처음 느껴보는 속도에 레이시의 팔을 꽉 조이면서 레이시를 바라봤다.
자기가 주인의 명령을 듣고 에일렌에게 독을 주입하려다 들켰을 때보다 더 냉혹하게 빛나는 초록색의 눈.
자기 주인도 어지간한 맹수보다도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레이시의 눈동자에 뱀은 얌전히 레이시의 손에 자신의 몸을 휘감고 그 미스트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내릴 처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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