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전 여친과 현 여친3
* * *
마케르크 가문에서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마차 안.
레이시는 하양이의 고삐를 잡고 멍하니 있다가 루룬이 해줬던 말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엘라를 불렀다.
“저……, 엘라.”
“응? 왜?”
“루룬이 블루드라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했었는데, 블루드가 누구예요?”
“……”
레이시의 말에 입을 다물고 읽던 책을 덮는 엘라.
레이시는 마차 안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분위기 변화에 움찔 떨면서 뭔가 자기가 말실수를 했나 고민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머리를 꾹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엘라를 직접 죽이려고 드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엘라의 오빠 중 한 명을 이미 자기 손으로 묻었고 기회만 있다면 다른 형제들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폐위된 주제에 아직도 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또라이 새끼라고?
그리고 네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계기인 그 사건을 뒤에서 부추긴 장본인이라고?
아샤는 잠시 생각을 이어가다가 엘라에게 어떻게 할 거냐며 고개를 뒤로 돌렸고, 엘라는 아샤의 시선에 잠시 눈을 피하다가 아샤에게 말해보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입을 다물고 레이시를 바라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히자 움찔 떨면서 아샤를 쳐다봤다.
“블루드는 엘라의 오빠야. 국왕의 맏아들이자 첫자식이지. 그래서 국왕과 나이 차이가 17살밖에 안 나.”
“그러면…….”
“지금 35살 정도야.”
“으응, 꽤 나이 차가 있네요.”
엘라와는 띠동갑 이상 차이나는 구나.
레이시는 아샤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른 말은 없는지 기다렸고, 아샤는 레이시가 자기 입을 쳐다보자 한숨을 내쉬면서 블루드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다만 다른 왕자와는 다르게 블루드는 폐위된 상태야. 이유는 국가를 다스리기에는 역량이 부족했거든. 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본인 능력은 둘째치더라도 수많은 사람을 다스리기엔 부족하다는 거지.”
“블루드 왕자님……? 은 무슨 재능이 있어요? 엘라처럼 막 마법을 써요?”
“아니, 전투 쪽으로는 일반 기사보단 강하지만 벽천화 기사단의 신입보다 약해.”
“네?”
“예술도 일반인들보단 잘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녀석들보다는 못하고, 계산도 그럭저럭하지만 다른 전문적인 녀석들보단 못해.”
아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시.
아샤의 말대로라면 블루드는 딱히 눈에 띄는 재능이 없어서 왕이 되지 못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아샤는 그런 게 아니라 재능은 있지만, 사람들을 다스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재능이라고 말했다.
……대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샤를 쳐다보자 아샤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레이시를 바라봤다.
그러자 레이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기록에 남아있는 사건.”
“네?”
“30여년 전에 두 기사단이 정면으로 부딪쳤던 기록이 남아있어.”
갑자기 시작된 기사단의 이야기에 입을 다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가 입을 다물자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보통 부딪친다고 해도 기사단의 대표가 5 대 5로 나와서 가검으로 결투를 벌이는 게 끝이야. 그래도 철덩어리를 휘두르며 싸우는 거니까 간혹 사망자가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망자는 거의 없고, 나름 무력으로 결판을 내는 거니까 다들 만족하거든.”
“그렇구나, 그 사람들도 결투했어요?”
“아니, 그때는 결투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는데도 두 기사단은 진검을 들고 격돌했어.”
“……네?”
“진검을 들고 전쟁하듯 싸웠다고. 이상한 건 그들의 피해야. 보통 전쟁이라고 해도 1~20%의 사람이 죽으면 군대는 항복하거나 후퇴해. 그리고 대패했다고 기록하지. 생명의 무게란 그런 거니까. 그런데 그 격돌에는 사망자가 70명이 나왔어.”
“그 이야기는…….”
“서로 다 죽을 때까지 칼부림을 벌였다는 거지. 마치 뭔가에 홀렸듯.”
아샤의 말에 입을 다물고 멍하니 아샤를 바라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면서 알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27년 전 오라토리엄 최대 규모의 상단주끼리의 암살 대결.
22년 전 생긴 의문의 왕족 시해 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17년 전 엘라의 암살 시도 사건.
그것들을 말한 아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의 시선을 살펴봤고, 이쯤 되자 눈치가 둔한 레이시도 뭔가 깨닫는 게 있는 건지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아샤를 쳐다봤다.
“만약 전란 시대 때 왕이 되었으면 그 녀석은 그럭저럭 괜찮은 왕이 됐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전쟁은커녕 일반적인 다툼도 안 일어나고 있지. 평화의 시대라는 거야.”
“으으응…….”
“물론 지금도 이런저런 귀찮은 일은 일어나고 있는데, 적어도 블루드만큼은 아니야. 지금 시대에 그 방식은 잘못됐어. 그 녀석은 그냥 사람이 죽는 걸 좋아하는 전쟁광이야. 폐위된 이후로 다른 왕족이 전부 죽으면 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녀석인걸.”
“…….”
“네 어깨에 화살을 박은 것도 아마 블루드의 짓이겠지.”
아샤의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자기 어깨를 손으로 감싸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다가 레이시에게 마저 충고해주기 시작했다.
“……일단 너도 알아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했지만, 거기에 집착하지는 마. 잊어.”
“잊으면 위험하지 않아요?”
“우리가 어떻게든 해줄게.”
“……으응.”
아샤의 말에 쭈뼛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신 고삐를 잡으면서 교대하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삐를 넘겨주고 조심스럽게 아샤에게 기댔다.
그러자 아샤는 레이시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마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이시를 재우듯이 레이시의 어깨를 토닥이는 아샤.
아샤는 계속해서 레이시의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레이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꾸벅거리다가 아샤에게 기대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
“응. 자네.”
승마할 때와는 다르게 자극이 하나도 없는, 편안하기만 한 마차에 앉아서 두 시간 동안 숲과 나무만 봤으니까 졸리겠지.
아샤가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엘라는 마차에 난 작은 창문을 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런 일에 휘말렸을 땐 별로 신경 안 썼는데…….”
“레이시는 그렇게 못 하겠지?”
“그야 레이시는 약하니까.”
아샤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는 엘라.
엘라는 아샤에게 기대어 자는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를 마차 안으로 들일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엘라의 질문에 마차를 잠시 멈춘 다음에 레이시를 마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를 품에 안고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셰런 미인 대회에 나가서 더 신경 쓰는 거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죽이고 싶은 녀석이 약점을 보였는데 얌전히 있는 멍청이는 어디에도 없어. 애초에 그 녀석은 약점을 만들어서라도 너를 죽이려 들었던 것 같지만.”
저번엔 무슨 이유로 엘라가 단체로 기습을 받았더라?
자기가 있었을 때 받았던 습격을 떠올려보는 아샤.
워낙 많은 기습을 받아서인지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자 아샤는 레이시 대신 자기 옆자리를 차지한 미스트에게 왜 기습을 받았는지 알겠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아샤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타국에서 귀빈이 오셨는데 여자와 노느라 대접을 안 하셨다고 해서 습격당하셨죠?”
“미쳤다고 왕족한테 성 접대를 시키냐? 공창에서 여자 부르라고 그래.”
“상대가 왕족이라 왕족이 접대해야 한다면서 공주님을 압박하셨잖아요.”
“아, 맞아. 그랬지. 개새끼.”
그 외에도 미스트의 입에서 나오는 이유는 거의 다 시답잖은 쓰레기 같은 이유였다.
계속해서 말장난을 치면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블루드.
아샤는 블루드 같은 인간은 딱 질색이라며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한숨을 내쉬었고, 미스트는 아샤의 반응에 작게 웃다가 커피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러자 아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아샤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싱긋 웃으면서 앞으로 조금 바빠질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금만 바빠지면 다행이게.”
“후후, 이럴 땐 그래도 조금만 바빠진다고 이야기해야 해요.”
“……씨발.”
아샤는 미스트의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서 가볍게 욕설을 내뱉고는 육포를 거칠게 씹었다.
그리고 마차를 좀 더 빠르게 몰기 시작하는 아샤.
엘라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 변화에 적당히 몰라고 말한 다음 자기 품에 있는 레이시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여자들에게도 가볍게 협박했었던 블루드.
그땐 협박만으로 끝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가볍게 관계를 끊는 것으로 대답해줬지만…….
엘라는 블루드가 레이시에게 협박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블루드가 레이시에게 장난질을 치지 못하게 준비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레이시를 침대에 눕히고 미네르바를 불렀다.
엘라의 목소리에 하늘에서 마차 위로 뚝 떨어지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왜 불렀냐면서 눈살을 찌푸리다가 엘라가 레이시와 함께 잠 좀 자달라고 부탁하자 천천히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엘라는 반대로 달리는 마차에서 나와 자기 뒤를 따라오던 말에 올라탔고, 미스트는 엘라가 말에 올라타자 자연스럽게 말에 올라탔다.
“잠시 다녀올게. 야영지에서 보자.”
“그래. 조심해라.”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움직이는 아샤.
엘라는 아샤가 떠나가자 미스트에게 주변에 눈이 있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두 명 붙었다며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엘라는 곧바로 미스트가 가르친 위치에 갔고, 블루드가 붙여둔 사람들은 엘라가 자기를 쳐다보자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감시는 할 만해?”
“감시라니, 저희는 그저 공주님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블루드님의 명령을 받들고 주기적으로 보고를 보낼 뿐입니다.”
“흥, 그게 감시지. 하여튼 그 전쟁광은 아직도 시답잖은 변명이나 대면서 지랄하는구나?”
“…….”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에서 내리는 엘라.
태평하게 자기들의 사거리까지 걸어들어오는 엘라의 모습에 감시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엘라를 쳐다봤다.
다른 왕족이라면 이 거리라면 공격할 수 있으니 가까이 오면 위험해질 거라며 협박이라도 해보겠지만…….
“움직이면 큰일 날 거예요?”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엘라만 하더라도 기분에 따라 자기를 죽일 수도 있는데 이 분야에 있어서 전설과도 같은 미스트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
여기에서 말 실수를 해도 자기들이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레이시에 대한 걸 보고 했어?”
“……네.”
“흐응.”
“끄으읍!?”
감시자의 보고에 그대로 손가락을 부러트려버리는 엘라.
엘라는 어떻게 보고했는지 말하라며 압박했고, 감시자는 엘라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엘라는 그들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쉽게 말하는 걸 보면 블루드가 눈을 붙여서 감시하는 걸 숨기지 말라고 명령을 해둔 상태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엘라는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레이시를 건든다면, 그렇게 좋아하는 전쟁이라는 게 아예 사라질 거라고 전해. 알겠어?”
만약 레이시를 건든다면 아예 미친 척하고 블루드가 폐위되면서 얻은 영지를 지도상에서 지워주겠다고 말하는 엘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핵병기와 같은 엘라가 그렇게 말하자 감시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엘라는 그런 그들의 대답을 매개체로 저주를 건 다음 천천히 마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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