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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40화 (40/113)

40화

한편, 기절했다 깨어난 한차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스킬이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행동할 줄 몰랐던 탓이다.

‘이거 완전 미친 스킬 아니야.’

정신적 충격을 에너지 소모로 치환하다니. 뒤통수를 맞은 듯한 감각에 머리가 얼얼했다.

‘이럴 거면 곧장 가사 상태로 빠지게나 해 줄 것이지…. 아니, 그건 아닌가.’

시스템 창이 보여 준 메시지에는 정확히 ‘착용 중인 귀속 아이템’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인벤토리 안에 있는 아이템은 해제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한차수는 인벤토리 안에서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 꼈다가는 눈에 띌 테지.’

아무래도 가사 상태에 재진입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춘 뒤에 착용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인벤토리 창을 치우던 순간이었다.

콰아앙!

“?!”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곧이어 새카만 연기가 하늘 위로 피어오르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뭐지? 습격인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각성자 관리국을 습격하는 것인가. 한차수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전투 요원으로 보이는 각성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한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그쪽에서 뭔가 번쩍이는 게 누군가 벌써 진압에 들어간 것 같았다.

흥미로운 기색으로 사건 현장을 보던 한차수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저거 백담 아냐?’

아니, 힐러가 도대체 왜 현장에 뛰어든 거야? 좀 더 가까이 창문에 붙는데, 푸른 전기가 튀어 올랐다.

파직!

“으!”

따끔한 감각과 동시에 창문을 건드린 손이 튕겨 나갔다. 놀란 것도 잠시.

“한차수 씨!”

정이흔이 문을 벌컥 열며 들이닥쳤다. 그를 막기 위해 따라온 의료진 열댓 명도 함께.

“이러시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나오세요!”

“한차수 헌터에게 지금 필요한 건 안정입니다, 안정!”

의료진은 악을 쓰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방금 전 한차수가 기절한 것 때문에 더욱 신경 쓰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정이흔은 아랑곳 않고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군의 무리를 몸에 매단 채 붉은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장신의 남자. 그건 공포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한차수에겐 더했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광경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한차수 씨, 창가에서 떨어져요.”

그보다는 네가 나한테서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테러는 멀리서 일어나기라도 했지. 정이흔은 눈앞에 존재하는 위협이었다.

한차수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창가에서 떨어지려는 의도보다는 그에게서 멀어지고픈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정이흔은 제 말을 들은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붉은 눈동자가 한층 너그러워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의료진 중 누군가 외쳤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국장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천령 길드장님. 마지막 경고예요!”

“…….”

국장을 언급하는 말에 그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그가 제 허리를 꽉 붙든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한차수 헌터를 생각한다면 이 이상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은 그만두셔야 합니다.”

직원은 S급의 살벌한 눈빛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정이흔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차수를 불렀다.

“한차수 씨.”

“…….”

“언제든 내가 필요하면 바로 불러요.”

아니, 나 말 못 하는데.

한차수는 제 목을 가리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면에서는 제약이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 그랬죠.”

정이흔의 얼굴이 서글퍼졌다. 손으로 얼굴을 덮은 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건넸다.

“이거 받아요.”

한차수는 순순히 그의 손에서 구슬 같은 뭔가를 가져갔다. 만약 자신이 받지 않으면 나가지 않을 기세여서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쓰면 나에게 바로 연락이 올 겁니다.”

뭘 주나 했더니, 참…. 구슬을 바라보던 한차수의 눈이 단번에 식었다. 그래도 그가 보는 앞에서 갖다 버릴 수는 없어서 대충 주머니에 넣었다.

때마침 의료 센터장이 나타나 이게 무슨 짓이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의료진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자 무슨 일이 생겼나 알아보러 온 참에 정이흔을 발견한 듯했다.

“정이흔 길드장, 이게 지금 무슨 소란입니까!”

“이런.”

“당장 나오세요!”

“알겠습니다. 한차수 씨, 그럼 쉬어요. 나중에 또 봐요.”

정이흔은 애처로운 얼굴로 터덜터덜 복도로 사라졌다. 한차수는 애써 한숨을 삼키며 주머니 속의 구슬을 매만졌다.

‘미치지 않은 지금도 저렇게 끈질긴데, 동생이 죽었으면 정말 끔찍했겠군.’

새삼 정서흔이 살아서 다행이다. 한차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의료진이 그에게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의료진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누가 봐도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가식적인 미소였다.

한차수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진이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아까 쓰러지셔서 많이 놀랐어요. 아, 밖의 연기 보셨나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구치소 안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위기관리실에서 출동해 진압 중이니 곧 정리될 거예요.”

위기 관리실은 각성자 관리국 제1본부의 가장 큰 병력이자 핵심 기관이다. 그들이 출동했다는 소리에 한차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백담은 그냥 거들러 간 건가?’

그렇다기엔 너무 신나게 활약하는 것 같던데. 한차수가 흘끗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서 번쩍이는 황금빛 빛살을 본 그의 얼굴에 문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슬슬 생각이라는 걸 할 여유가 생기자 백담이 건넨 충격적인 입양 권유가 다시금 떠오른 탓이다.

‘동생한테만 미쳐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미친놈이었던 모양이야.’

꿈속의 백담처럼 자신에게 배은망덕한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생을 살렸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기가 막혔다.

가족이라니. 저 백담이 자신의 형이 된다니?

차라리 정이흔의 종신 계약이 좋아 보일 지경이었다.

우울해진 기색을 알아차린 이가 화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의료동에는 이중 방어막이 둘려 있으니 진짜로 아무 걱정도 안 하셔도 돼요! 게다가 기태연 실장님이 직접 나서셨으니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예요. 정말이에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맞습니다. 한차수 씨는 그저 편안히 앉아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마음 편히, 아무것도 안 하고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한차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의료진이 절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도 백담 때문에 참 고생이 많군.’

각성자 관리국 의료 센터라 하면 소속 헌터만 치료하는 전문 직원들. 그런데 백담의 억지 때문에 갑자기 애먼 B급 헌터를 치료하게 됐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밖에서는 정이흔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귀찮게 굴기까지 하니….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을지도 모르겠는데.’

가만히 생각하던 한차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차피 당분간 여기서 나갈 수도 없어 보이겠다, 이미 바닥을 친 이미지지만 그래도 좀 회복해 보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헉.”

“하, 한차수 헌터.”

“그, 그… 목에 관해서는 저희가 최선을 다해 치료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뭔가 이상했다. 왜 갑자기 눈에서 빛을 뿜어내는 거지? 저들은 힐러 아니었나?

한차수가 흠칫 몸을 굳힌 순간이었다. 의료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저희만 믿으세요.”

“그래요. 이래 봬도 한국에서 제일가는 실력자들인걸요!”

이거 좋지 않은데. 본능 차원의 감각이 한차수를 일깨웠다. 갑자기 그들의 얼굴에 백담과 정이흔이 겹쳐 보였다.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며 평생을 내놓으라는 광기가 느껴진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가 제약을 잊고 목소리를 내려던 찰나였다.

[ 주의! ]

[ 에너지 절약을 위한 제약이 적용 중입니다! ]

[ 적용 중인 제약(1) : 말조심 ]

[ 에너지 절약을 위한 노력에 동참해 주세요! ]

[ 지속적으로 제약 행동을 어길 시, 페널티가 가해질 수 있습니다. ]

“콜록… 컥!”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마른기침이 그치지 않고 터져 나왔다. 의료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한차수 헌터, 괜찮으세요?”

“내상 때문은 아니야. 그냥 병실이 건조해서 그런 것 같은데.”

“여기가 좀 건조하긴 해. 가습기 없나?”

“보니까 안보실에 잔뜩 있던데.”

의료진이 서로 눈을 맞췄다. 한차수는 그치지 않는 기침에 허리를 숙이고 있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갈까?’

‘가자.’

‘어차피 본부장님도 한차수 헌터한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고 했다며?’

꼴 보기 싫은 안보실 녀석들한테 엿 먹일 합법적인 기회였다. 의료진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한차수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

그리고 한차수는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트에 풀썩 몸을 묻었다.

‘정말이지 제정신인 인간이 한 명도 없군.’

그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이내 힘없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그렇지 않아도 가사 상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귀속 아이템 해제를 위해선 그 단계에 재진입해야 했으니까.

‘어떻게 할까. 목을 조르는 걸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시험 삼아 목을 감싸 쥐어 봤지만 역시 턱도 없었다. 유리 몸이 적용 중인 신체는 제대로 힘을 주기도 전에 나가떨어졌으니까.

‘나 참, 아무래도 교살은 안 되겠군.’

한차수는 얼굴로 덜덜 떨리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을 복도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정이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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