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한편, 한차수는 치료실 안에 격리된 채 시스템 창에 집중하고 있었다. 외부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해 주는 차단재와 안에서는 바깥이 안 보이는 창문 덕이었다.
[ 대상자의 생명 유지를 위해 스킬 ‘재생’의 효과가 일시적으로 변동됩니다. ]
[ 가사 상태로 돌입하시겠습니까? ]
[ Y / N ]
[ 제한 시간 내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동으로 가사 상태에 돌입합니다. ]
[ 착용 중인 귀속 아이템이 있다면 해제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
‘기절하기 직전에 떴던 게 이거였군.’
시스템 메시지 창과 상태창을 번갈아 보는 눈이 진지했다. 귀속 아이템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건 차치하고.
‘한차수 녀석, 악역 주제에 꽤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잖아?’
한차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재생 스킬은 그 자체로도 사기급이건만, 이런 식의 변형까지 가능하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아니, 아니다. 한차수는 이어지던 생각을 멈췄다.
꿈을 통해 느낀 원작 한차수의 열등감은 무척이나 뿌리 깊은 감정이었다. 그건 원작 한차수의 근원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가 S급으로 태어났어도 그는 분명 다른 이를 질투하고 열등감에 시달렸으리라.
헛생각을 흩트린 한차수는 다시 시스템 창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조건이 꽤나 까다로운데….’
재생 스킬이 가사 상태에 돌입하려면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하는 걸로 보인다.
목숨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치명상. 그리고 그걸 치료하기에는 부족한 시간.
‘재생’의 능력 자체는 사기급이나 스킬 등급이 B급이라 생긴 일인 듯했다. 짐작건대 스킬은 자체적으로 치명상을 치료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 바로 생명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가사 상태에 돌입한 뒤 시간을 확보한 것이리라.
‘이거 외에는 논리적으로 납득 가는 설명이 없어.’
스킬 주제에 상황 파악이 빠르다는 점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시스템이 똑똑해서 제게 기회를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금명결이 호시탐탐 노리는 귀걸이에게서 벗어날 기회. 이 천운 같은 기회를 이대로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치명상을 입어 볼까.’
한차수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참혹한 부상들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였다.
스르륵.
묵직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흔들리는 눈빛을 한 정이흔이 나타났다.
“ㄱ…!”
아, 나 목소리 안 나오지.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딱히 아프다든가 해서는 아니고, 정말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동의 반향은 엄청났다.
슬픈 얼굴로 다가오던 정이흔의 몸이 우뚝 굳었다. 창백한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더니, 그가 빠르게 다가와 침대 옆에 무릎 꿇었다.
문틈 사이로 작은 비명이 들린 것도 같았다.
정이흔이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얼굴로 선언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한차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는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본능이 그에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정이흔을 당장 말려야 한다. 이 뒤에 이어질 말이 뭐든 간에 하게 내버려 둬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속 아이템 해제고 뭐고 인생이 참으로 고달파질 것이다. 본능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으… 으으, 으…!”
한차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말이 안 나오면 몸짓으로라도 표현하면 되지.
그는 열심히 정이흔의 두 손을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게도 소용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정이흔의 얼굴만 더욱 애달파질 뿐이었다.
“힘이 많이 약해졌군요.”
“으으….”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다, 이 호구야. 한차수는 고개를 다급히 저었다. 애초에 이 자식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구한 건 백선이지 정서흔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자기가 형인 것처럼 이러는 걸까.
답답함에 가슴을 내리치려는데 그 손마저 붙잡혔다.
“위험합니다!”
나한테 지금 가장 위험한 건 너야!
한차수가 눈빛으로 욕을 퍼붓던 때였다.
“내가 지금 당신 개소리하라고 먼저 들여보낸 줄 알아요?”
백담이 싸늘히 뇌까리며 등장했다. 평소였으면 왜 왔나부터 궁금했을 텐데, 지금은 마냥 반갑기만 했다. 백담 특유의 빈정거림이 사막의 단비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반가움 가득한 눈으로 백담을 응시했다. 그걸 알아차린 백담이 침대를 향해 다가오며 활짝 웃었다.
‘그래, 와서 치료나 해라. 그 김에 정이흔 좀 쫓아내게.’
저렇게 웃는 걸 보면 분명 잔소리가 미친 듯이 이어지겠지만 괜찮았다. 정이흔이 다시 제 평생을 책임지겠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나 한차수의 기대는 처절히 박살 났다.
“한차수 씨.”
“……?”
“우리 집 둘째가 되는 건 어때요?”
백담이 웃는 얼굴로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종신 계약이라느니, 파트너라느니 그딴 삭막한 계약 관계보다 정이 넘치고 화목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새로운 형태의 종신 계약 제안에 한차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신적 충격은 치명상으로 쳐 주지 않는 건가?’
[ 경고! ]
[ 대상자의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
[ 에너지 절약을 위해 외부 자극을 차단합니다. ]
아니, 잠깐만.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에 한차수가 경악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 외부 자극 차단까지 남은 시간 : 3초, 2초, 1초…. ]
[ 외부 자극을 차단합니다. ]
한차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
“조심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상태가 안정적이라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한동안 면회는 자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이흔과 백담은 치료실에서 바로 쫓겨났다. 방금 전까지 그들을 어려워하던 의료진은 이런 문제에 있어선 칼 같았다.
“음….”
“하아.”
의료진이 한차수를 각별히 챙기는 건 좋은 일이니까. 두 S급은 떨떠름한 눈빛을 교환하다 자리를 떠났다.
복도에 딸린 커다란 창으로 한차수를 지켜볼 수도 있었지만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처음 한차수를 데리고 왔을 때 신물 나게 보기도 했거니와.
‘원래는 실험실이었다고 했지.’
치료실에 왜 매직미러가 설치되어 있겠는가. 저건 과거의 흔적이었다. 각성자 관리국에 초기, 강제 등록된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여러 실험의 자취.
생각만 해도 불쾌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백담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정이흔은 그런 그를 말없이 따랐다.
의료동을 벗어나 중정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정이흔이 뜬금없이 물었다.
“진심입니까?”
“네.”
백담은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대신 예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정이흔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왜요? 설마 길드원의 가족 관계에도 참견하려는 건 아니죠? 그런 짓 했다가는 스토커라고 고소당해요.”
“그건 내가 할 말입니다.”
“뭐라고요?”
“한차수 씨는 백담 헌터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피해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짜고짜 모습을 보이는 걸로도 모자라 가족이 되라니…. 얼마나 무서웠으면 당신을 보자마자 쓰러졌을까요.”
“잠깐, 그 말은 지금 한차수 씨가 나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는 건가?”
“그거 말고 달리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 하! 어이가 없어서, 내가.”
백담은 뒷골이 찡하고 울리는 걸 느꼈다.
“비루먹은 개처럼 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오나 싶었더니 나한테 시비나 걸려고 그랬던 거라 이 말이지?”
“말조심하십시오, 백담 헌터. 시비가 아니라 주의입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그쪽은 한차수 씨가 정신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느껴지는 이 열기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백담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여기서 날 죽이기라도 하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라에 단 한 명뿐인 귀한 S급 힐러이신 걸요.”
콰아앙!
폭발음과 동시에 멀리서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솟구친 건 그때였다.
“……!”
“저건 또 뭐야?”
“전 한차수 씨에게 가보겠습니다. 당신을 보면 또 쓰러질지 모르니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마시죠.”
“저 싸가지가.”
백담이 이를 갈며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아니.
“젠장.”
자신이 말을 건네자마자 까무룩 눈을 뒤집으며 쓰러진 한차수가 떠올랐다. 백담은 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살벌한 욕설을 내뱉었다.
콰아아앙!
2차 폭발이 이어졌다. 백담이 산발이 된 머리로 폭발음이 들린 곳을 노려보았다.
“본부에 남아 있는 위기 관리 2팀, 3팀. 들어라. 구치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방어막 펼칠 수 있는 사람 위주로 팀을 짜서 돌입 준비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기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백담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각성자 관리국 근처에 위치한 능력자용 구치소. 그곳에는 자신을 습격하고 한차수를 다치게 한 범인들이 갇혀 있었다.
“이런 씨발.”
한차수가 깨어나자마자 타이밍 좋게 구치소가 공격받는다고.
“하.”
이건 너무나도 뻔한 상황이었다.
구치소를 노려보는 백담의 눈동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황금처럼 찬란한 채찍이 들려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뒤에 숨은 녀석들까지 전부 잡으면 괜찮아지겠지.”
한차수가 자신을 보고 그날의 참상을 떠올려 기절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녀석들을 전부 찾아 사지를 잘라 놓으면 한차수도 안심하리라.
백담이 하얗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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