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그의 눈은 끊임없이 한차수를 쫓았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풀썩 침대에 쓰러지고, 소리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얼굴을 감싸 쥐는 남자를.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제 목을 감싸다 어느 순간 실이 끊긴 것처럼 툭 하고 손을 내던지는 사람을 말이다.
“…….”
꽈악, 주먹을 쥔 정이흔의 낯에 서늘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죽음으로부터 건져 낸 남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한차수는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게 틀림없었다.
‘백담을 보고 기절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생각해 보면 짧은 시간 동안 그에겐 너무나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서리거인 던전에서 사람을 구한 걸로 시작해 금명결의 습격과 불규칙 게이트. 그리고 한아협에서 일어난 다툼, 백담을 향한 테러까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지쳐 나가떨어질 만한 일이 그에겐 연이어 몰아쳤다.
“아니, 웬만한 헌터에게도 힘든 일이지.”
작게 속삭인 정이흔이 입술을 짓씹었다. 정신력만 믿고 쉴 새 없이 레이드에 참여하다 끝내 좋지 않은 끝을 맞이한 이들이 한둘이던가. 그만큼 무의식중에 누적되는 피로와 충격은 위험했다.
그런데 그걸 놓치고 있었다니.
‘내가 너무 안일했어.’
한차수가 보여 준 굳은 심지와 강건한 모습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은 탓이다. 저도 모르게 그는 괜찮으리라 생각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정이흔은 이제 그의 단단한 겉껍질 속에 숨은 연약한 내면을 알게 되었다.
한차수는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모든 스트레스와 감정들을 속에 억누르고 있다 한순간 툭 하고 허물어져 버리는 사람 말이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리다니. 깊은 자책감이 정이흔의 가슴을 짓눌렀다.
“좀 더 가까이서 살펴야 했는데.”
불투명한 유리 안을 바라보는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한차수를 좀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다.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에 맞게 대처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그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한차수 같은 사람을 찾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
때늦은 후회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아주 잠깐, 그의 눈 위로 검은 얼룩이 스쳐 지나갔다.
후욱!
이윽고 거친 열기가 그를 중심으로 터지듯 퍼져 나갔다.
우글거리는 공기에 빛이 굴절되며 시야가 일그러진다. 정이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창 너머, 미동도 없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이었다.
‘날 부르려나?’
창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대감을 품은 눈동자가 열기에 반짝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경악하며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한차수 씨!”
“아… 쿨럭, 커헉!”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정이흔은 벼락같이 움직여 그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뺏어 들었다. 상처 난 손에서는 핏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한차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일부러 바닥에 떨어트린 유리컵의 잔해를 줍던 도중이었다.
‘뭐야, 이 자식.’
돌아간다고 했으면서 계속 있었던 거야? 아니, 그보다 내가 컵을 깨트린 건 어떻게 알고….
‘잠깐.’
머리 뒤쪽이 쭈뼛했다. 한차수는 재빨리 눈을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병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긴 유리창이 보였다. 한차수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단순한 인테리어인 줄 알았더니 단방향 투과성 유리인 모양이다.
‘너무 여유가 없었군.’
가사 상태를 시험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패착이었다. 그래도 정이흔에겐 자신이 실수로 컵을 떨어트린 것처럼 보였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칼을 꺼내지 않길 잘했네.’
그는 의료진이 없는 틈을 타 어느 정도의 출혈이 가사 상태를 부르는 조건이 되는지 알아보려 했다. 당연히 단검으로 팔을 긋는 건 불가능했다. 샤워실도 없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대놓고 정신 병원에 데려다 달라는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대충 변명거리가 될 만한 걸 고민하는데 유리컵이 눈에 들어왔다. 깨트리기도 쉽고 치우기도 쉬운 물건. 한차수는 의료진이 왜 다쳤냐 물으면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아 실수로 떨어트렸다고 변명할 참이었다. 고작 그걸 치우기 위해서 의료진을 부르기엔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금명결 같은 놈이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니. 한차수는 혀를 내둘렀다.
그사이 정이흔은 회복 물약을 꺼내 상처 위에 들이붓고 있었다.
차가운 촉감과 함께 상처가 느리게 회복되는 게 보였다.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게 맞긴 한가 보네.’
한차수는 무심한 눈으로 다섯 병째 비워지는 물약을 바라보았다.
정이흔이 들고 다니는 물약이라면 못해도 A급일 것이다. 그런데 이리도 느린 회복 속도라니. 제 상처가 회복되는 꼴만 봐서는 물약이 F급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의 상태가 처참하다는 뜻이었다.
‘하긴 가사 상태에 강제로 돌입해야 할 정도였으니 심각한 게 맞긴 한가.’
서리거인 던전 히든 보스보다 덜할 거라 생각했던 게 무안할 정도였다. 머쓱함에 목 뒤를 쓸어내리는데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앞으로 이런 일은 직접 하지 말고 사람을, 아니. 날 불러요, 알겠습니까?”
“…….”
“구슬 같은 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요.”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눈빛은 딱히 따뜻하지 않았다. 한차수는 하나뿐인 구슬을 매만지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신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거기도 아픕니까?”
아니, 글을 쓸 만한 걸 갖다 달라고.
붙잡힌 손을 빼낸 한차수는 거기다 대고 글을 쓰는 흉내를 냈다. 정이흔은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더니 급히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구슬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는 말이 이젠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네요.”
정이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웃한 한차수는 이어서 펜을 끄적였다.
<제가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당연한 말을…!”
<그럼 방을 바꿔 주셨으면 합니다.>
“방이요?”
정이흔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럴 만했다. 스토커처럼 음침하게 구경할 수 있는데 그걸 잃자니 싫겠지.
하지만 한차수에겐 훌륭한 변명이 준비되어 있었다. 방금 전 정이흔이 그에게 가져다 바친 완벽한 구실이.
<저렇게 커다란 유리창이 깨진다면 방금 전보다 훨씬 크게 다칠 겁니다.>
펜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정이흔의 낯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차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단방향 유리를 향해 펜을 까딱였다.
<보십시오.>
짧게 휘갈긴 한차수는 힘겹게 일어나 유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덜컹이는 몸을 움직여 유리창에 몸을 기대려는 순간이었다.
“한차수 씨!”
순식간에 몸이 뒤로 끌려갔다. 사내의 품에 갇힌 한차수는 물끄러미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정이흔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한차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손을 움직였다.
<평범한 유리창이 아니란 거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달려오실 수 없지 않으냐. 그런 의미를 가득 담아 바라보니 정이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방을 바꿔 달라 할 리 없는데.”
정이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차수는 이전부터 강박적으로 타인에게 ‘보이는 것’을 불편해했다. 불규칙 게이트에서도, 아이템 거래소 협회에서도. 그는 제 존재를 숨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정이흔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한차수에게 타인의 시선은 큰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아무래도 병실을 바꾸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팔뚝 위를 꼼지락거리는 손을 붙들며,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관리국에서 일부러 이런 방을 당신에게 내준 건 아닙니다.”
정이흔은 먼저 오해부터 풀고자 했다. 한차수가 혹여나 각성자 관리국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오해했다간 일이 복잡해지니까.
‘그랬다간 여기서 휴식은커녕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될 거야.’
무엇보다 우선은 한차수의 정신적 안정이었다. 그가 제 의지를 받아들일 만큼의 안정.
정이흔은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어요.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치료 기기를 설치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곧 센터장에게 병실을 바꿔 달라 할 테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한차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슬쩍 용기를 내 봤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심리 상담을 받지 않겠습니까?”
한차수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그의 무의식에 쌓인 스트레스와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시간이.
하지만 한차수의 표정은 미묘했다. 회색 눈동자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정이흔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방치했다가 무슨 결과가 벌어졌는지 두 눈으로 이미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차수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길드장님.>
“네.”
<제가 퇴사하길 바라십니까?>
“…….”
무심한 회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언제든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얼굴에 정이흔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내가 섣불렀군.’
아무리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다 한들 한차수는 한차수였다.
그는 혼자 무너질지언정 타인 앞에서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한차수에게 자신은 아직 타인이라는 뜻이었다.
가면 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바운더리 바깥의 존재.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끊길 수 있는 인연.
“…….”
정말 쉽지 않은 상대였다.
아니, 반대로 생각하면 막대한 돈도, 명예도 거절한 사람다웠다. 정이흔은 한 걸음 물러나기로 했다.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요.”
무심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힘들어야 얻는 보람이 있지 않은가.
한차수가 알았다면 바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까무러쳤을 속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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