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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8화 (8/113)

8화

닷새 전, 한차수가 막 유백 병원으로 실려 와 인공호흡기를 부착했을 무렵이었다.

그날 백담은 자그마치 2년 만에 고대해 마지않던 전화를 받았다.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남동생의 전화였다.

“선아, 무슨 일이야.”

수화기를 붙잡은 손이 희열에 떨렸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며 집을 박차고 나가 천령 길드에 들어가 버린 지 어언 2년.

백담은 드디어 동생이 제 품으로 돌아오나 싶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그래? 우리 선이, 집 나가면 개고생인 걸 이제 깨달았구나. 걱정 마, 형은 계속 우리 선이 기다리고 있었어. 비밀번호는 그대로니까….”

그러나 그의 고막을 울린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흐으윽, 혀어엉. 씨바알, 내가 너한테 내 손으로 전화를 해야 하다니. 어허헝.

“…선아?”

-너… 당장 유백 병원으로 와.

백선은 앙증맞게 훌쩍거리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백담에게 선포했다.

-지금 당장 달려와서 사람 하나 살리면 가출 취소할게.

“뭐? 너 지금 다른 새끼 때문에 울면서 나한테 전화한 거야?”

-올 거야, 말 거야!

동생은 깜찍하게도 고함까지 질렀다. 백담은 도대체 어떤 놈 때문에 백선이 우나 싶었으나 일단 숙이기로 했다.

형이 되어서 동생을 이겨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국내 3위 길드인 필로소의 부길드장이자 세계에 다섯뿐인 S급 힐러 백담이 한차수를 치료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거죠. 한차수 씨에게는 감사드려요.”

백담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를 따라 물결쳤다.

“한차수 씨가 언제 죽어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선이는 절 부르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당황스러움을 갈무리하고 한차수는 눈앞의 남자를 훑었다.

‘백선이 정말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람이 이 남자인가 보군.’

자못 성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아까부터 언행이 제법 거칠었다.

그래도 일단은 날 치료해 준 사람이니,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비록 전혀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해도 말이다.

마주 고개를 숙인 한차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백선 씨에게 형이 한 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백담 씨였군요.”

“선이가 제 이야기를 많이 했나 봐요?”

백담이 눈을 반짝이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평범한 동작임에도 팔다리가 길고 유연해 우아함이 배어 나왔다.

“아는 척도 안 하길래 괜히 달려왔나 했는데, 깜찍하긴. 제가 많이 보고 싶긴 했나 봐요.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제 이야기도 하고.”

첫인상으로 딴 점수를 말로 깨는 타입이군. 한차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이야기나 나누다 돌려보내야겠어.

백담의 말에 성의 없이 맞장구를 치던 한차수가는 돌연 몸을 굳혔다.

백담이 대화 도중 잠깐 소매를 정리하던 때였다.

“한차수 씨?”

차갑게 굳은 회색 눈동자에 백담이 섬세한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그는 제 부름에 답하지 않고, 어딘가를 집요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백담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한차수가 관심을 보인 건 그가 항상 차고 다니는 팔찌였다.

“예쁘죠? 저랑 선이랑 나눠 낀 거예요.”

백담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 소매를 걷어 보였다.

“…혹시 던전 부산물로 만든 겁니까?”

“눈썰미가 생각보다 좋으시네요. 맞아요, 몸 쓸 일이 많은 입장이라 잘 마모되지 않는 걸로 만들었죠.”

백담이 잘 보이도록 팔을 들었다.

팔찌는 은백색 뱀이 단단하고 굵은 팔목을 비틀듯 감싸는 형태였다.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두 눈은 초록색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석의 반짝이는 빛에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들지?

본래 세계에서는 저런 호화로운 장신구를 본 기억이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관심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았을 테고.

그때였다. 묻혀 있던 기억이 한차수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고 지나간 건.

[축축한 동굴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아아아악!”

한차수의 것이었다.

백담은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그래야 저것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더 오래 볼 수 있으니까요.”

“…치료나 해.”

들고 있던 다리를 내던진 정이흔이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지 마,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한차수의 절규에도 백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도 완벽히, 아픈 곳 하나 없이 치료해 드릴게요, 한차수 씨.”

그래야 조금 더 오래 고통스러울 테니까.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리는 백담의 손목에서 은백색 뱀이 녹색 눈을 빛냈다.]

“젠장.”

한차수는 침음을 흘렸다. 어쩐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더라니.

S급 힐러 백담. 그는 원작에서 한차수를 고문하는 데 가담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유는 정이흔과 같았다. 한차수 때문에 그의 동생이 서리거인 던전에서 죽었으니까.

‘갑자기 차출된 힐러. 그래, 그게 백선이었던 거야.’

어쩐지 그날 백선과 이야기했을 때 위화감이 들더라니!

수틀리면 자신을 고문할 놈이 근처에 또 한 명 있었던 것이다.

‘백선이 살아서 다행이다.’

그때, 그를 밀치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꼬였을지 모른다.

‘이 녀석은 자기가 힐러라는 걸 이용해서 사지를 찢고 붙이는 걸 반복했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한차례 떨었다.

아, 악역으로 살기 정말 힘들다.

‘얼른 퇴사하고 싶어.’

“한차수 씨?”

한차수가 몸을 부르르 떨자 백담이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몸이 편찮으신가요?”

말본새는 좋지 않아도 직업은 힐러인지라, 다가오는 얼굴이 걱정에 물들어 있었다.

“제가 힐링이라도-.”

“아뇨, 아뇨, 아닙니다.”

덜컹.

한차수가 몸을 빼며 격렬하게 백담의 배려를 거절했다.

훅하고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원작이 떠오른 탓이었다.

[여기서 당신 걱정을 해 주는 건 나밖에 없어. 감사하죠?]

하얗게 웃으며 정이흔에게 고문당하는 한차수를 구경하던 그의 변태 같은 행태가.

“괜찮습니다. 갑자기 찬 바람이 들어서요.”

“저런, 조심하셔야죠.”

백담이 혀를 쯧쯧 차더니 직접 창문을 닫았다.

“제가 어떻게 살려 드린 몸인데.”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생각 없이 말하는 타입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이마에 묻어난 땀을 닦은 한차수가 토해 내듯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빨리 회복하고… 퇴원해야죠.”

너 같은 또라이랑도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고.

한차수의 걱정은 지극히 당연했다.

백담의 동생 사랑은 정이흔 못지않았다.

즉, 그 또한 제 동생을 살려 준 은혜를 갚고 싶다며 덤벼들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내가 읽은 건 분명 현판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왜 등장하는 놈마다 형제들의 우애가 이리 깊은 건지 모르겠다.

한차수가 한숨을 삼키는데 백담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퇴원 이야기가 나왔나요?”

“언제까지 병원에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차수가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계속 길드에 폐를 끼칠 수도 없고.”

“아, 어쩐지 선이가 퇴사 어쩌고 하더라니.”

“백선 씨가 그 얘기도 벌써 했군요.”

“예에, 그쪽이 퇴사하고 사라지면 어쩌냐면서 울먹거리더라고요. 애가 마음이 너무 여려서…. 흠.”

가만히 중얼거리던 백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그가 한차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서늘한 체온에 놀란 한차수가 그를 후려갈기려던 때.

“그럼 우리 길드로 올래요?”

“…예?”

“내가 잘해 줄게요.”

백담이 배시시 웃으며 홀리듯 눈매를 접었다.

“어차피 망가진 몸인데 가능하면 S급 힐러 곁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한차수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참지 말고 그냥 후려갈길걸.

***

“잘 생각해 봐요!”

끈질기게 구는 백담을 이제 그만 자야겠다는 말로 내보낸 한차수는 겨우 평화를 맞이했다.

“하….”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한차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에 누웠다.

기력을 빼앗긴 것처럼 온몸에 탈력감이 가득했다.

잠시 뒤에 간호사가 식사를 가지고 올 텐데.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면서도 한차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

고른 숨소리가 적막한 병실에 울려 퍼졌다.

시한폭탄 같은 악역의 몸에 빙의한 지 6일 차.

한차수는 처음으로 제정신을 유지한 채 평화로운 잠에 빠져들었다.

***

병원 생활은 썩 괜찮았다.

일단 한차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식사였다.

삼시세끼 시간에 맞춰 제공되는 식사는 매우 풍족하고 종류가 많았다.

매일 바뀌는 메뉴는 영양분과 칼로리를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났다.

덕분에 입과 눈이 즐거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쁘지 않은데?”

다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설탕 인형 취급하는 건 좀 어처구니없었지만, 살 만했다.

침구도 첫날보다 훨씬 푹신한 걸로 교체되어 굴러다니기 좋았고.

‘이거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면 알려 주려나.’

한차수가 매트리스를 푹푹 누르며 생각할 무렵이었다.

“형, 뭐 해요?”

가출 성인, 백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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