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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7화 (7/113)

7화

스킬 ‘재생’은 작중 주인공인 정이흔마저 갖지 못한 사기급 스킬이었다.

‘애초에 원작에서 이런 스킬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말 다 했지.’

난다 긴다 하는 S급 들 중 누구 하나 재생 스킬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은가.

‘도대체 한차수는 뭐 하던 놈이길래 이런 스킬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찌질하게 굴었대?’

참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였다.

완벽한 회복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으면서 B급 스킬인 것도 그렇고.

그래도 덕분에 정서흔도 지키고, 덤으로 좋은 오해도 받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

나른한 한숨을 뱉은 한차수가 고개를 돌렸다.

두 남자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한차수가 정이흔을 바라보며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천령 길드에 다닐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

“이런 몸으로는 출근은커녕, 근무 시간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한차수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심지어 다리를 가리키는 손끝마저 새파랬다.

반응은 격렬했다.

“형, 설마 지금 퇴사하겠다는 거예요?”

“한차수 씨. 섣부른 생각입니다.”

백선이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정이흔의 반응은 의외였다.

‘쟤가 왜 저래?’

얼굴을 굳힌 그가 한차수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한차수 씨가 저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게 아니라,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걸 생각하시는 게 옳습니다.”

“예?”

“천령 길드는, 아니. 저 개인적으로라도 한차수 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아니, 빚을 갚을 필요는 없고. 그냥 퇴직서만 깔끔하게 받아 주시면 되는데.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렸다.

퇴사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이 정수리를 내리친 탓이다.

“길드장님, 전 그런 걸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한차수가 열심히 그를 설득하려 하는데 정이흔이 허리를 숙이며 침대맡을 짚었다.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상대의 주홍빛 눈동자가 열광을 품고 있었다.

“제 동생을 위해 몸을 바치신 모습,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

“그걸 보고도 한차수 씨를 돕지 않는다면 저는 그야말로 금수나 다름없는 인간이겠지요.”

대체 언제 봤는데, 그걸.

얼어붙은 한차수를 천천히 훑은 정이흔이 매끄럽게 웃었다.

“그러니 제가 부디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길드장님.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었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야.”

“아뇨.”

정이흔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이해 못 할 열기마저 느껴졌다.

한차수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일이 아주 제대로 망했다는 예감이었다.

“앞으로 한차수 씨는 어떤 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

“천령 길드에서 한차수 씨의 모든 걸 책임질 테니까요.”

정이흔이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한 손에 잡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두꺼운 서류였다.

슬쩍 본 앞면에는 종신 계약이라는 끔찍한 단어가 주택 제공, 지원금 어쩌고 하는 말과 함께 적혀 있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

“그럼 다음번에 다시 오겠습니다.”

병실을 나오는 정이흔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또 올게, 형!”

백선은 그렇게 외치고서는 잽싸게 튀어 버렸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복도에서 기다리던 이진렬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어떻게 됐어?”

“…생각보다 고집이 세던데.”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은 정이흔이 말을 이었다.

“거절당했다는 소리야?”

“그래.”

“허….”

이진렬은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 계약서를 보고도 거절했다고?”

전용 외제 차에 24시간 대기 운전사, 그것도 모자라 거주지에 병원 시설까지 완비해 주겠다는 제안을?

이진렬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고 정이흔은 묵묵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인간은 뭐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라도 된대? 이렇게 되면 의심했던 내가 면목이 없잖아.”

이진렬이 투덜거리며 목 뒤를 쓸었다. 정이흔도 이진렬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정말 서흔이를 구하기 위해 희생했던 걸지도 몰라.”

나지막이 떨어지는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사실 정이흔이 한차수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가끔 사내에서 마주칠 때마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시선의 주인공.

어쩔 때는 실수인 척 부딪히려 드는 귀찮은 남자,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동생을 위해 몸을 날렸다가 이런 비극을 맞이하게 되다니.

“내가 한차수 씨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담담한 목소리에 이름 모를 감정이 물씬 묻어 나왔다. 죄책감 때문일까. 이진렬은 안타까운 눈으로 정이흔을 보았다.

“네 탓이 아니잖냐. 너무 마음 쓰지 마.”

“하지만 서흔이 때문인 건 맞지.”

정서흔을 구한 대신 한차수가 맞은 마지막 일격. 그로 인해 그는 생사를 오갔다. 말 그대로, 닷새 동안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이었다.

“수술실을 들락날락하는 의사마다 모두 피범벅이었지.”

힐러가 투입되며 결국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으나, 한차수는 유리 파편 같은 몸이 되었다.

온몸에 퍼진 독이 어떤 수를 써도 해독되지 않은 탓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이흔은 한차수에게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 게 서흔이었다.

“형, 그 말이 진짜야? 그 사람이 곧 죽는다는 게…!”

어떻게 안 건지, 한차수의 상태는 순식간에 그에게까지 퍼졌다.

‘그렇게 조심하라 일렀건만.’

정이흔은 이번 일이 정리되는 대로 내부 인사 점검을 다시 한번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동생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서흔아, 진정해. 그분 아직 살아 있어. 우리가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있고.”

“형, 미안해. 이런 일로 형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치만, 그 사람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서흔이의 흔들리는 눈에서 동생이 아직도 그날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끝까지 제 동생의 안위를 확인한 뒤에야 작은 안도감을 남기며 쓰러지던 창백한 남자의 모습이.

“…알았어.”

그래서였다. 서흔이의 요청대로 그를 돕고자 한 건.

하지만 그리 쉽게 믿어 줄 수는 없었다. 일부러 과한 보상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렇게 깔끔하게 거절할 줄이야.

‘의외였어.’

심지어 한차수는 한술 더 떠 퇴사하겠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어쩌면 그것마저 거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그때, 한차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잡생각을 흐트러트리듯, 이진렬이 중얼거렸다.

“보상도 싫어,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퇴사하겠다니. 그럼 정말로 다른 뜻 없이 서흔이를 구했다는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지. 망령을 퇴치한 것도 거의 요행에 가까웠으니까.”

한차수가 서흔이를 구해 내고 기절한 뒤, 남은 팀원들은 현장을 수습했다.

예상치 못한 폭주, 처음 보는 히든 보스 몬스터.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경우를 위해서라도 정보 수집은 필수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우연에 우연이 겹칠 수가 있냐. 서흔이가 정말 살 운명이긴 했나 보다.”

차에 올라탄 이진렬이 감탄을 섞어 말했다.

그날 한차수가 가져간 시약 중에는 정신체 몬스터에게 영향을 주는 종류가 섞여 있었다.

팀원들은 아마도 그가 망령을 향해 던진 물건이 해당 시약들을 조합한 폭발물일 거라 이야기했다.

정이흔도 그에 대해서 동의했다.

강력한 폭발과 함께 망령이 잿더미처럼 스러지는 걸 보았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새삼 한차수의 능력이 아까워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런 기지를 발휘하는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 역시 그냥 보내 주기에는 아까웠다. 여러모로.

시트에 툭, 뒷머리를 기댄 정이흔이 낮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어, 네가 그렇게 말할 땐 언제나 골치 아픈 일이 생기던데.”

“한차수 씨를 이렇게 떠나게 둘 수는 없어.”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은 어느새 굳은 의지에 차 있었다.

“길드장으로서도, 서흔이의 형으로서도 은인을 푸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붉은 눈에 보기 드문 불꽃이 타오르는 걸 본 이진렬은 아연해졌다.

‘백선에 이어 정이흔까지 왜 이러냐.’

형이랑 같이 살기 싫다고 뛰쳐나온 백선이 제 발로 백담에게 연락하게 만들지를 않나.

심지어 정이흔은 어떻게든 한차수를 붙들어 놓겠다고 열의를 불태우다니.

‘한차수에게 정말 뭔가 있는 건가.’

멀어지는 병원을 바라보는 이진렬의 눈이 깊어졌다.

***

한편, 한차수는 정이흔이 던지고 간 극심한 스트레스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종신 계약? 종신 계야악?

“그럼 다음번에 다시 오겠습니다.”

거지 같은 말과 함께 정이흔이 떠넘기고 간 서류는 뒷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이 호구 주인공이 누굴 엿 먹이려고.’

계약서는 좋다 못해 환상적일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들로 가득했다.

완치할 때까지 치료비 전액 지원 및 서울 중심 아파트와 출퇴근 차량 및 운전 제공.

심지어 근무 시간은 10분의 1로 줄었는데 연봉은 도리어 열 배로 늘었다.

파격적이다 못해 뇌가 녹아 버렸나 싶을 정도로 미친 계약서였다.

문제는 그게 한차수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데 있었다.

“열 배나 되는 연봉 받자고 죽을 일 있나.”

한차수가 차게 식은 얼굴로 서류를 툭 던졌다.

“내가 거기서 저지른 짓이 얼마나 많은데.”

포션 조작은 너무 많이 해서 입이 아프고.

일기에 쓰여 있는 것만 해도 장비 훼손, 업무 방해, 연구 재료 횡령 등 아주 확실하게 해 처먹었다.

‘그게 한 번도 아니고 입사 이래로 꾸준히 저질러 왔으니….’

아무리 길드장 동생을 구해 준 은인이라고 해도 덮고 넘어가 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나라도 걸리면 길드에서 쫓겨나는 건 당연지사.

혹여나 다른 것들까지 죄다 탄로 난다면 줄소송을 당하다 못해 살해까지 당할지도 몰랐다.

“얼른 퇴사해야지.”

한차수가 굳은 의지를 다지는데 누군가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깨어 계셨네요?”

아마색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길게 늘어트린 청초한 인상의 남자였다.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 남자는 친구라도 되는 양 다가와 곁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요? 치료하느라 땀 꽤나 뺐는데.”

…이 새끼는 또 뭐야.

한차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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