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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9화 (9/113)

9화

“이렇게 계속 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치만 형이 언제 숨넘어갈 줄 어떻게 알고 그래요.”

“…….”

한차수는 이마에 돋는 힘줄을 무시하며 백선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들어와 앉아.”

그의 형이 백담이라는 걸 알게 된 후, 한차수는 백선에게 좀 더 너그러워졌다.

‘괜히 마음 상하게 했다가 백담 귀에 들어가면 나만 망하는 거야.’

잠적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백선이 이상했다. 기세 좋게 문을 연 것까지는 예전과 같았는데, 들어오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게 아닌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그게.”

백선은 반쯤 열린 문을 붙잡은 채 자꾸 뒤를 힐끔거렸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나. 고개를 기울인 한차수가 침대 프레임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 형, 아냐. 가만히 있어요!”

백선이 놀라 외침과 동시에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시커먼 무언가가 구르듯 제 앞까지 도달했다.

시커먼 무언가와 시선이 마주친 한차수가 높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정서흔 씨?”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겨우 입을 연 정서흔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팽팽히 긴장된 입가에 죄책감이 머물러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붉은 눈동자에 너울이 일렁였다.

***

“그동안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번이 벌써 열일곱 번째 사죄였다.

“정서흔 씨도 많이 다치셨던 걸로 아는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지금 절 걱정하시는 겁니까?”

“…네.”

네가 잘못되면 괜히 내가 덤터기 쓸 것 같거든.

한차수는 무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정서흔이 이상해졌다. 속에서 뭔가 치미는 듯, 울컥하는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 괜찮습니다. 애초에 저는 한차수 씨에 비하면…!”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고, 그가 얼굴을 푹 숙였다. 한차수는 그가 미쳤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이러려고 찾아온 게 아닌데.”

고개를 숙이는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제야 돌아가는 꼴을 대충 이해한 한차수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쓸모없는 죄책감을 가지는군.’

적당한 미안함 정도는 괜찮았다.

죄책감을 가지더라도 언젠가는 묻고 잊어버릴 정도의 기억. 그 정도가 딱 좋았다.

그런데 정서흔은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내려놓은 한차수가 그를 불렀다.

“정서흔 씨.”

붉은 눈동자가 조심스레 그를 향했다.

한차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든 제 행동은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려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한차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는 정서흔 씨가 쓸데없는 데 마음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예?”

“형,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백선이 놀란 토끼처럼 몸을 튕겼다.

한차수는 그를 향해 엄한 시선을 보낸 뒤 다시 정서흔을 응시했다.

“제 선택의 결과를 정서흔 씨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절 더 힘들게 할 뿐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정서흔의 눈이 흔들렸다. 달싹이던 입술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꾹 다물렸다.

좋아.

한차수는 마음속으로 진한 웃음을 덧그렸다.

‘설득당하고 있군.’

열심히 입에 침을 바른 보람이 있었다.

‘거기에 누가 있든 구했을 거라고?’

그럴 리가 있나.

한차수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영웅도, 이타적인 사람도, 선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살고 싶어 발악하는 일개 소시민일 뿐.

그래서 그는 정서흔에게 ‘너라서 구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구할 수 있었고요.”

“…….”

“제가 바라던 건 그게 답니다. 제가 구해 낸 사람들의 동정이 아니라.”

마지막 말에 정서흔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동정이라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형!”

곁에 있던 백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느껴.”

한차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혼자뿐인 병실에 앉아 매일같이 찾아오는 길드장님을 볼 때마다 항상 느껴.”

“…….”

“나는 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바친 거지, 이런 대접을 원해서 몸을 던진 게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 제발 나 좀 놔줘라.

한차수는 창백하게 굳은 두 사내를 지긋이 바라보며 눈빛으로 호소했다.

너네가 날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 놔 달라고.

‘덤으로 길드장 놈도 못 찾아오게 해라.’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먼저 입을 연 건 백선이었다.

정서흔은 덩치만 크지 마음은 순두부 같은지 아직도 멘탈을 회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너무 부담스러웠던 거죠.”

그렇지.

한차수는 제 말을 찰떡같이 이해한 백선의 태도에 흐뭇했다.

“그럼 이제 미안하다는 소리는 안 할게요.”

“그래, 그러니….”

“대신 형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뭐?

왜 이야기가 거기로 튀지?

그가 말리기도 전에, 백선이 정서흔의 손을 덥석 잡으며 동의를 구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서흔아?”

“…응, 네 말이 맞아.”

눈물로 얼룩졌던 눈동자는 어딜 가고, 정서흔이 붉은 눈을 강하게 치켜떴다.

“죄송, 아니. 더 이상 이런 말은 하면 안 되겠죠. 그게 한차수 씨의 뜻이니까.”

“아니, 그게.”

“한차수 씨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그러니 한차수 씨도 저희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정서흔이 굳건한 의지를 풍기며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한차수 씨를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저, 제 말 좀.”

“그럼 다음번에 다시 뵙죠.”

전장터로 떠나는 장수처럼 결연한 의지를 남기고, 정서흔과 백선은 사라졌다.

‘안 돼.’

일단 잡자.

병실에서 몰래 빠져나가 녀석들을 잡으려면….

[ 소리 없는 발걸음(B) ]

“윽!”

송곳으로 머리뼈를 두드리는 듯한 고통.

한차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뭐?

‘잠깐만.’

던전에서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팔다리가 가늘게 떨리며 관절이 불에 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애송이들 붙잡는 게 뭐가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그의 불평을 읽은 듯, 눈앞에 새파란 창이 떠올랐다.

[ 위장 신분(A) : 활성화 ]

[ 활성화된 신분 : 포션 제작자(B), 유리 몸(A) ]

[ 새로운 신분 ‘유리 몸’으로 인해 체력에 변화가 생깁니다. ]

[ 변경 사항 동기화 완료 ]

[ 위장 신분 : ‘유리 몸 포션 제작자 한차수’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두통’에 걸렸습니다! ]

“…….”

이 미친 소설 새끼가.

한차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머리를 쪼개는 고통이 그를 덮쳤다.

[ 상태 이상 ‘두통’에 걸렸습니다! ]

한차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으윽….”

“환자분! 괜찮으세요?!”

그 광경을 목격한 간호사가 놀라 달려왔다. 폭풍 같은 검진 시간이었다.

***

“아무런 이상이 없다 이 말입니까?”

“예… 각성자 기준으로도 이렇다 할 이상은 없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기는, 아주 중대한 이상이 생겼다.

다급히 달려온 정이흔이 의사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든 말든. 한차수는 팔다리에 바늘을 주렁주렁 매단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

[ 위장 신분 : 유리 몸 포션 제작자 한차수 ]

포션 제작자뿐이었던 위장 신분에 쓸데없는 게 달라붙었다. 제 건강 때문에 이상한 업데이트가 된 모양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창을 보며 한차수는 혀를 내둘렀다.

‘유리 몸 페널티를 없애겠다고 스킬을 해제했다가는 포션 제작자마저 같이 날아가겠군.’

굳이 시험해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차수는 상태창 한구석에 둥둥 뜬 스킬 해제 버튼을 무시하고 창을 내렸다.

‘죽을 자리 찾아갈 일 있나.’

한차수는 쓱 하고 정이흔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도 의사들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고작 그런 걸로 뭘 알 수 있다고…. 한차수 씨, 어디 불편합니까?”

잠깐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귀신같이 눈치채고 시선을 맞춰 오는 붉은 눈동자. 한차수는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바쁘신 분을 굳이 부른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럴 리가요. 한차수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달려와야죠.”

“…….”

싱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착잡해졌다.

저 녀석이 제 곁에 상주하는 한 스킬 해제는 꿈도 못 꿀 일이니까.

‘이 세계에서 S급들은 규격 외 존재라는 설정이었지.’

그들은 본능의 영역에서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내가 죽일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 상대의 힘을 귀신같이 판별한다는 점에서.

즉, 위장 신분을 해제했다가는 ‘어이쿠 네가 B급 생산계가 아니라 A급 전투계였구나!’ 하고 덥석 멱살이 잡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

악역으로 살기 정말 힘들다.

허탈함에 넋을 놓고 있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눈만 돌려 보니 정이흔이었다.

“……?”

어쩐지 조금 수줍어하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수상쩍었다. 이게 또 뭘 하나 싶어 살펴보니 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한차수 씨.”

“…예.”

“한차수 씨는 모르셨겠지만 이번에 천령 길드가 정부와 협력해서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치료 약물을 개발 중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종신 계약 안 합니다.”

“…….”

“…….”

불똥 튀는 듯한 정이흔의 눈동자를 무시하며, 한차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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