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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6화 (6/113)

6화

눈을 뜬 순간 느껴지는 낯익은 공간감에 한차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인가.’

다행히 상체가 분리되지는 않았군.

한차수는 서리거인 망령의 마지막 일격을 떠올리며 천천히 몸을 훑었다.

“…….”

이건 좀 심한데?

이 정도면 환자가 아니라 미라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은데 왜 이리 과잉 치료를 한 거야.

병원비 걱정에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상태창을 확인하는데 어디서 와다다 하고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쾅!

“형!”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백선이 뛰어들었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제게 올 줄 몰랐던 한차수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선 씨?”

놀라 그를 부르자 백선이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밤이라도 새다 왔는지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고, 색이 옅은 머리는 헝클어진 상태였다.

그 꼴로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게 적잖이 공포스러웠다.

한차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선 씨,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설마 내가 기절하고 나서 정서흔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섬뜩한 상상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당연히, 당연히 안 좋은 일이 있었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해요? 나, 나는 형이, 그렇게 날 밀치고…. 흐어엉, 죽은 줄,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요…!”

뭐야, 얘 갑자기 왜 울어.

백선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한차수는 당황했다. 안 그래도 앳된 얼굴이 우니까 더 어리게 보인 탓이었다.

“흐윽, 꺼억, 꺽…!”

저러다 과호흡 오겠네. 한차수는 급하게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지는 도자기 인형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윽!”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격통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코가 깨지기 직전이었다.

“흐아악, 형!”

“…….”

“가, 감사합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몸을 누군가 잡아챘다. 겨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는데 머리가 쩡 하고 얼어붙었다.

불을 품은 듯한 주홍빛 눈동자가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정이흔?’

정이흔이 왜 여기 있지?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의문과 동시에 그럴싸한 정답이 떠올랐다.

‘동생을 살려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라도 하러 왔나 보군.’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나쁜 일은 아니었다.

대충 감사하다는 말 몇 마디 듣고 퇴원 때까지 몸보신 잘하라 하고서는 돌아가겠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길드장님.”

“내 길드원이 다쳤는데 당연히 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이흔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하하.”

한차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부축을 받았다.

“아, 그런데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나요?”

“한차수 씨가 정신을 잃은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묻는 거라면, 오늘이 닷새째입니다.”

“아….”

생각보다 오래 기절해 있었군. 한차수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정이흔의 주홍빛 눈동자가 한차수의 모든 곳을 빠짐없이 탐욕스레 훑었다.

아래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던 시선이 한차수의 눈과 마주친 순간.

“동생은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아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 달라는군요.”

정이흔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 인사라뇨,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한차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으시다니, 얼마나…. 윽.”

그러다 갑자기 눈매를 찡그렸다. 무릎이 힘없이 떨리는 걸 느낀 탓이었다.

A급 암살계나 되는 몸이 왜 이리 약해 빠졌어.

속절없이 이를 악물며 버티는데 뜨거운 손이 등 뒤를 받쳤다.

“침대까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라고 작게 읊조리며 한차수는 다시 침대로 복귀했다.

그사이 다 울었는지 백선이 빨갛게 부은 눈을 문지르며 다가왔다.

“괘, 괜찮아요, 형?”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형이라니. 갑자기 언제부터….”

우리가 언제 그렇게 친한 사이가 됐다고 형이라고 부르는 거냐.

흐린 말끝에 서린 의미를 알아챈 백선의 눈이 다시금 촉촉해졌다.

한차수가 빠르게 그의 손을 붙들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형!”

던전 안에서 머리라도 다친 걸까. 헝클어진 옅은 색 머리를 유심히 살피는데 뺨이 따가웠다.

“…….”

“…….”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정이흔은 백선의 뒤편에 서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백선에 밀려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친 듯싶었다.

“음, 길드장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몸은 괜찮습니까?”

“아, 예.”

비록 사지에 깁스며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지만 죽지는 않았으니까.

“살 만합니다.”

한차수가 대답했다. 그런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정이흔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혹시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뭐든 말씀하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겁니까?”

어….

이런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대충 어떻게 B급 생산계인 네가 보스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었냐는 식의 취조가 들어올 줄 알았다.

‘역시 바보처럼 마냥 사람 좋은 녀석이라니까.’

한차수는 살짝 동정하는 눈빛을 뒤로 숨기며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사람을 구하는 건 본능적인 일이죠. 딱히 무슨 생각을 했던 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정이흔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감돌았다.

“그러면….”

말 사이에 짧은 침묵을 가진 정이흔이 다시 입을 연 순간이었다.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백선이 뾰족하게 말했다.

“형은 바보예요?”

“어?”

“도대체 어떤 바보가 본능적으로 자기 목숨을 갖다 바치냐고요.”

백선은 위협적인 소형견처럼 눈을 희번덕 뜨고서 컁컁 짖어 댔다.

한차수는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그래요?”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난리야, 하는 시선을 돌려주자 백선의 동그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형이 나 대신 그 미친… 더러운 누더기 새끼한테 처맞아서 죽을 뻔했잖아요!”

내가?

“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형이 진짜 죽을까 봐. 나, 나 때문에 죽을까 봐, 그 개새끼한테 내 손으로 연락까지 했단 말이야. 흐윽, 그 새끼한테 죽어도 연락하기 싫었는데….”

백선의 흐느낌이 방 안을 채웠다.

정이흔은 뭐라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한차수는 도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식은땀을 흘렸다.

‘뭐야, 내가 언제 널 구했는데.’

그리고 네가 연락한 개새끼는 또 누군데.

도대체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

다행히 백선의 울음이 가라앉고 난 뒤, 탈진한 그를 대신해 정이흔이 한차수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백선 씨가 배리어를 보강하려고 사각에 빠져 있었는데 한차수 씨가 구해 줬다고 하더군요.”

아.

설마 그게 너냐.

그러고 보니 누가 거치적거리는 위치에 있어서 대충 뒤로 날리고 정서흔을 감쌌던 기억이 났다.

“크흥.”

백선이 코를 훌쩍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생산계면서 무슨 깡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어느새 말도 놔 버린 백선은 진심으로 자신이 목숨 바쳐 그를 구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형 아니었음 나는 거기서 죽었을 거야. 아니, 나뿐만 아니라 우리 공략팀 다.”

“…….”

강렬한 시선은 뜨겁다 못해 뺨을 태워 버릴 것 같았다.

한차수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팔을 피했다. 그리고 정이흔에게 눈을 떴을 때부터 궁금한 것을 물었다.

“길드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 의사 선생님을 뵙지 못해서요.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싸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정이흔의 모양 좋은 입술이 꾹 다물리고, 백선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다 말씀해 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겠군요.”

슬쩍 눈매를 찌푸린 한차수가 너스 콜을 누르려 했다.

백선이 다급하게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대요.”

“뭐라고요?”

“예전처럼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대요.”

베이지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다친 부분이 너무 안 좋았대요. 망령의 손톱이 척추를 부러트리고 혈관과 신경에 독을 퍼트렸나 봐요. 겨우 목숨을 살리기는 했지만….”

백선의 눈이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한차수의 다리를 훑었다. 그의 얼굴에 미약한 죄책감과 동정심이 깃들었다.

한차수는 가만히 생각하다 백선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거네.”

한차수는 기묘할 정도로 덤덤한 얼굴이었다.

“네 반응을 보니 일상생활도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것 같고.”

“형,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백선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외쳤다. 목소리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큰 목소리에 놀란 듯 한차수가 그를 응시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백선의 눈이 삽시간에 축축해졌다.

“아, 미안해요, 형. 나 때문에….”

백선은 다시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하고, 정이흔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둑한 정적이 병실 안을 채웠다.

말없이 고개를 돌린 한차수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퇴사하러 갔다가 망가진 꼴이 허망하고 비참해서는 아니었다.

“하….”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백선이 오기 전 띄워 놓았던 상태창이 보였다.

[ 재생(B) : 죽지만 않으면 된다. 시간은 인내하는 자의 편

중독, 부상, 상실 및 신체적 손상에 한하여 완벽한 회복 가능 ]

무사 퇴사가 꿈인 한차수가 왜 굳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했겠는가.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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