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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5화 (5/113)

5화

한차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다섯 겹의 배리어가 모두 설치되고 난 뒤였다.

“잠깐만요. 차수 씨가 안 보여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뒷목을 예리하게 베어 내는 듯한 목소리에 정서흔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았다.

백선이 가느다란 눈을 희번덕이며 빛내고 있었다.

“혹시 한차수 씨 보신 분 계신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복귀 준비를 하던 팀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A급 헌터마저도 물리칠 수 없는 상대였다. 상황이 너무 나빴다. 다들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들었다.

따지자면 수십 개의 변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생채기 없이 출입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공략 1팀의 인명 손실은 전무한 상황.

그런 가운데 발생한 보조 팀원의 실종은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기 딱 좋았다.

‘이대로 귀환하는 순간 X된다.’

공략 1팀 전원의 머리가 치열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무슨 상황이야, 서흔아?

정이흔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서흔의 고막을 때렸다.

“아.”

정서흔은 퍼뜩 정신이 들어 손에 쥐고 있던 붉은 구슬로 시선을 돌렸다.

출발 직전, 혹시 모를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 챙겨 가라며 형이 준 통신 아이템이었다.

“…보조 팀원이 낙오된 것 같아.”

-뭐?

붉은 구슬에 비치는 형의 눈빛이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정서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젠장.’

그의 머릿속으로 한차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생산직의 몸으로 겨우 따라와 블리자드에 갇히면서도 제게 도움을 준 사람인데.

짙은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형, 내가 다시 연락할게. 일단은 구조대를 보내야….”

그때, 얼어붙은 땅이 울리고 묵직한 공기가 몸을 때렸다.

우우우-

하늘에 닿을 듯 새까만 형체가 그들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오고 있었다.

“게이트 구동까지 몇 분 남았지?!”

“3분, 3분만 버티면 돼!”

“젠장, 너무 빨라!”

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정서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새까만 그림자의 움직임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 이미 배리어 앞이었다.

쿠우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람 머리통만 한 새까만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카가각!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공기를 때리고, 첫 번째 배리어가 깨졌다.

콰앙, 쾅, 쾅-!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배리어마저 부서졌다.

[히히힉—!]

그림자가 손톱을 내리치며 인간들을 비웃었다.

다른 손으로 휘두른 지팡이가 땅에 닿을 때마다 작은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쫄부터 치워!”

“젠장, 벌써 금이 가면 어쩌라는 거야…!”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배리어를 사수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정서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쩌어억-

망령이 거대한 지팡이를 휘두를 때마다 배리어에 금이 갔다.

‘이렇게 끝나나.’

쓴웃음을 지은 정서흔이 검을 쥐었다. 자신이 막아선다면, 남은 몇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을 터였다.

챙강!

마지막 배리어가 깨지고, 비산하는 파편들 사이로 정서흔이 몸을 들이민 순간.

“안 돼!”

콰아아앙-!

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현장의 한복판에 떨어진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무슨…. 쿨럭, 컥!”

안개를 헤치고 가까스로 눈을 뜬 정서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망령이 잿더미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자신을 지키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은.

“하, 한차수 씨?”

형편없는 목소리로 묻자, 눈앞의 사내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무, 무사해서… 다행…. 쿨럭!”

털썩.

폭포수처럼 피를 쏟아내며 쓰러진 사내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마지막 일격을 그의 몸으로 받아 낸 듯, 방어구가 날아간 등은 끔찍한 상흔으로 가득했다.

“차수 형! 형!”

발 앞의 하얀 눈밭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정서흔이 멍청하게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백선이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형! 정신 차려요, 죽으면 안 돼!”

백선이 한차수를 붙들고 엉엉 울어 젖히는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번쩍.

땅을 구르던 붉은 구슬의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더니 곧이어 점멸했다.

***

천령 길드 공략팀이 서리거인 던전을 나온 건 들어간 지 반나절도 안 된 때였다.

“벌써 나왔다고?”

한창 업무에 몰두하고 있던 던전 안전부 공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착된 게이트석으로부터 보내온 신호에 따르면, 공략팀은 진입한 지 두 시간 반 만에 던전을 나왔다.

그것도 중도 포기나 퇴각이 아닌 던전 ‘공략’으로 말이다.

“정서흔이 대신 투입됐다고 하더니, 꽤 하네. 역시 낙하산이라도 S급 혈육은 혈육이라는 건가?”

공무원은 손가락으로 펜을 휙휙 돌렸다.

한참 어린 정서흔의 업적이 못마땅한 듯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화염계여서 빨리 나온 거겠지. 길드장 동생이니 고급 아이템도 몰아줬겠고.

정서흔을 깎아내리는 걸로 열등감을 해소한 공무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요?”

“커피 한잔하려고요.”

공무원은 웃으며 손목을 가볍게 꺾었다.

“그럼 내 것도 한 잔만.”

“옙.”

탕비실로 들어간 그는 커피 머신의 불을 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익명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게시판 상단, 굵은 글씨의 제목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10분 전에 업로드된 글이었다. 그런데 벌써 추천글 표시를 달다니 꽤나 어그로가 넘치는 듯싶었다.

[ 제목 : 밀현구 오늘 몬웨 터져서 ㅈ될 뻔함 + 인증有 ]

몬웨? 몬스터 웨이브가 터질 뻔했단 말인가. 김인규는 눈썹을 찌푸리며 게시글을 클릭했다.

-제곧내. 밀현구 서락산 던전 하나 몬웨 터질 뻔함. 헌터 하나가 그거 막고 지금 죽기 직전.

ㄴ익명1: 노인증 씹구라

ㄴ익명2: 개소리하네ㅋ 내가 지금 거긴데 존나 평화로움

ㄴ익명3: 포털 기사 뜬 거 하나 없는데 이런 등신은 뭐가 문제냐? 몬웨 본 적도 없는 새끼가 몬웨 이지랄떠네ㅋㅋㅋㅋㅋㅋ

ㄴ익명4: 아니 그래서 인증 가져오라고

.

.

.

ㄴ익명54: 글 하나 싸지르고 가면 끝이냐?? 하여튼 어그로 새끼들 먹금도 제대로 못하고 휘둘리는 꼴 봐라 ㅂㅅ들

ㄴ글쓴이: (이미지.jpg)

ㄴ익명54: 씨발 혐주의 붙여

ㄴ익명36: 미친새끼

ㄴ익명 13: 뭐야 죽었어?

ㄴ익명 51: 따라가는 거 정서흔이네

글쓴이가 첨부한 사진은 살짝 흔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가까이서 몰래 찍은 듯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사체만은 정확하게 담겨 있었다. 들것 위에 널브러진 피투성이의 사내.

의료진이 다급한 얼굴로 그의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있고, 몇몇은 들것을 붙들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은 김인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친. 진짜 정서흔이잖아?”

김인규가 탕비실을 박차고 나감과 동시에 곳곳에서 목격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제목: 몬웨 막은 거 그 헌터 맞음 ]

-서락산 말하는 거 맞음ㅇㅇ 거기 녹게 하나 터졌음

따라가는 인간도 ㅈㅅㅎ 맞음 천령에 있는 친구한테 확인함 뭐 채집하겠다고 따라간 생산계라던데 지금 안에서 완전 영웅 취급받는 중;;;;

“…미치겠네.”

천령 길드 부길드장 이진렬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정서흔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진렬이 형. 우리 다 정신없어서 연락할 생각을 못 했어.

“…그럴 수 있지.”

일이 터지고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사태를 알게 됐지만, 그럴 수 있지.

직원들 중의 누군가가 촉새같이 다 떠벌렸지만, 그럴 수도 있지.

“일단 몸부터 추슬러라. 글은 우리가 알아서 내릴게. 경호팀도 그쪽으로 보낼 거고.”

-부탁해.

통화가 끊기고 이진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건은 천령 길드 측에 호재이자 악재였다.

길드 소속 B급 헌터가 던전 폭주를 막아 냈다는 점에서는 호재. 하지만 그때 당시 정예 공략대가 함께 있었다는 점에서는 악재였다.

까딱하면 여론은 천령 길드 공략팀의 무능력함을 지적할 테니까. 그러면 공략대 대장이었던 정서흔이 화살받이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이흔, 이 자식은 운도 좋지.”

이진렬이 머리를 짚으며 신음했다.

하필이면 정이흔이 제주도로 떠났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자신도 참 재수가 없었다.

“일단 우리 편인 언론사에 연락 돌리고, 받아쓰기하는 놈들한테는 법무팀에서 메일 보내라고 하자.”

“…….”

“내 말 좀 들어 주겠어, 김 비서?”

“부길드장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비서가 건넨 단말기 화면을 본 이진렬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대형병원 중 하나인 유백 병원. 그곳에 몰린 취재진을 뚫고 들어가는 장신의 사내.

그건 바로 제주도에 있어야 할 정이흔이었다.

“얘 왜 여기 있어?”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진렬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김 비서가 말했다.

“정서흔 씨도 입원했으니까요.”

“아, 그렇지.”

자타가 공인하는 남동생 팔불출이었다.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

이진렬은 단말기 화면을 슥 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에 나타났다는 긴급 게이트가 한 시간 전에 공략이 완료되었다는 알람이 떠 있었다.

‘미친놈.’

화력으로 밀어 버린 모양이었다. 이진렬이 혀를 쯧쯧 차는데 비서가 물었다.

“길드장님이 가셨으니 경호팀도 더 늘리는 게 좋겠죠?”

“…그래. 거, 방어막 펼칠 줄 아는 애들 중심으로 뽑아서 가라.”

정이흔에게 달라붙을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경호팀은 꼭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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