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후회~하고 있어요
* * *
"...저에요."
[예 아가씨, 김실장하고 조금 전 통화하면서 간단하게 들었습니다.]
"네... 그, 언니한테 저번에 다른 건물에 잡아놨을 때 이야기를 살짝 했었는데 제가 말했던 일 다음날 좀 많이 힘들게 했었거든요..."
[예 아가씨, 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네, 가짜 시체로 신원 말소 이후에 일부러 직접 겪도록 하고, 사람들 반응도 보여주고 그랬어서...
그게 같이 떠올랐는지 막 비명을 지르다가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아가씨]
"네."
[발작적인 증세라고만 들은 상태라 일단은 제가 받기는 했지만, 제 소견으로는 신경과에서 내과적 치료가 필요한 문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과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경과에서는 치료를 못한다는 이야긴가요...?"
[음... 검사를 원하시면 당연히 해드릴 수 있지만, 저희 '그 수술'을 진행하면서 가장 중요시했던게 뇌랑 신경부분이지 않습니까. 수차례 검사도 진행했고 안정적인 반응이 나와서..]
"그 사이에 문제 생길 가능성은 낮다...?"
[예 아가씨, 좀 쉽게 설명하면 사람을 컴퓨터로 비유했을 때 하드웨어적 결함일 가능성이 대단히 적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퇴행이나 집착적인 면이 갑자기 나왔다고 하셨으니까 소프트웨어, 즉 심리적인 문제가 클 것 같습니다.]
"네 알겠어요. 전화 돌려주세요. 감사해요."
[아닙니다, 도움이 못되어드려 죄송합니다. 아까 연락받고 정신과 과장도 다른 진료 없이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
...
그렇게 한참을 정신과 과장과 통화하며 언니의 증상이 어땠고, 내가 한달 전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 다시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둘만의 비밀로 갖고 싶었지만... 언니의 상태가 더 중요하니까..'
대전에 내려와있는 동안은 내 상담을 전담해서 맡은 분이셨기에 비밀유지 따위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선배에게 했던 행동들을 내 입으로 하나하나 정리해서 말하는 것은 내가 선배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품어왔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비틀린 집착임을, 내가 행했던 일들은 일방적인 폭력임을 자백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네, 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또 연락드릴게요."
직접 만나서 진료를 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은 어렵지만, 단편적으로 보였던 증상은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리고 의존성 성격장애적인 면이 보인다고 한다.
특정 상황에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거나 했다면 공황장애를 의심해봐야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보다는 특정 기억이 트리거가 되어 방금과 같은 일이 생겼으니까.
과장은 지금 언니의 문제가 내가 했던 행동들 때문에만 생긴 것은 아닐 확률이 높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신과 의사들이 원래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쉽게 알아듣는 표현으로는 애정결핍.
어릴 적 성장배경 탓에 축적되어진 무의식 속 불안감과 두려움이 평소에는 잘 감춰져 있다가 다른 부분을 건드려 터져나올 때 함께 새어나왔다는 것이다.
"언니..."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언니의 뺨에 손등을 살짝 갖다댄다.
언니의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옛날부터 쌓여왔다는 것, 그리고 언니의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언니를 괴롭게 해왔다는 것에 대해서 속상하고 화나는 마음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전부 내 탓은 아니라는 부분에 어쩌면 언니에게 생각보다 조금 덜 미움받고 있겠다고 안도하는 자신이 병신같았다.
언니와 내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는 전부 없애려고 했는데.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다.
"괜찮아요... 언니의 무의식까지 오롯이 저를 향하게 만들면 되니까.
얼마를 쓰든, 어떤 방법을 쓰든, 정 안되면 선배의 뇌를 한번 더 갈아엎어서라도 고쳐드릴게요..."
언니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언니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불을 끄고 나와 휴게실로 간다.
언니한테 가장 필요한 건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다.
언니의 지금 상태의 원인이 된건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받아왔던 스트레스, 내가 선배를 고문하는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였고 최근에도 언니를 자꾸 감정적으로 자극하면서 그게 속에서 곪아가고 있었을 것이라 했다.
그 원인을 직접 마주하고 이겨낸다는 만화 주인공 같은 연출은 현실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다.
PTSD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가장 하기 쉬운 실수라고 강조한 과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첫째도 둘째도 그런 상황은 없을 것이며 지금 충분히 안전하고 괜찮은 환경에 놓여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정하은 그년이랑 엮이면서 너무 모질게 대하긴 했네요.'
다행인 점은 언니가 평소에는 심한 증상을 안보였다는 것.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잘 누르고 있었다는 것이니 정확한 진단만 되면 금방 호전될 수 있다고 했다.
"언니... 흑... 미안해요..."
상황을 속으로 정리할 수록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또 눈물이 새어나온다.
언니가 깨어나면 방금의 상황을 기억할 수도, 못할수도 있다고 했다.
꼭 PTSD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해리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언니는 어릴 때부터 받아온 외부 자극을 다시 풀어내지 않는 것에 익숙했다.
그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증상이 발현되었을 때도 평소의 일상생활을 위한 인격이 어느정도 분리되어서 고통과 상처를 일부분이 대신 받도록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무언가를 잘해야 되거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확신을 줘야 합니다. 고문이나 가정폭력에도 다시 노출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주시고요.]
마지막 당부를 다시 명심한다. 내가 해야할 일은 명확했으니까.
...
...
"으응... 흐아암~"
얇은 커튼 너머로 햇빛이 들어오는 걸 보니 아침인 것 같다.
오랜만에 누가 깨워서 일어나지 않고 자고 싶은 만큼 푹 잤다.
"으으... 또 씨발스러운 꿈이야..."
고모네 집에 맡겨졌을 때의 꿈을 조금 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척이라는 인간들을 다 한 곳에 모아서 불을 지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타는 쓰레기 of 쓰레기가 고모부라는 인간이었다.
엄마보다 상대적으로 나눠질 재산이 없었던 아빠쪽 친척이라서 그런지 나를 막 대하고 때리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참어른이셨던 고모부.
더 맞으면 죽겠다 싶어서 반항하는 내게 그 집이 싫으면 고아원이나 가라고 그러셔서 가출한 뒤로 거의 마주친 적이 없다.
명절때도 별 말 안했고.
근데 지금도 그때 쳐맞던 꿈을 한번씩 꾸는데 이게 악몽은 꼭 시리즈로 나와서 어릴 때의 다른 안좋은 기억들이 함께 나왔다.
명확하게 꿈을 전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만 남지만 아름이가 나를 못움직이게 해놓고서는 억지로 입에 약을 밀어넣는 그런 부분도 있었다.
"아름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꿈을 다꿨네 하하..."
그 하얀 방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당하긴 했지만...
지금은 말만 잘 따라주면 잘해주니까. 기댈 곳이 이제 아름이 밖에 없기도 하고...
씻으러 가려고 샤워도구들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방을 나가려는데 마침 방에 들어오는 아름이와 딱 마주친다.
"언니!'
"응, 아름아. 굿모닝?"
"몸은 좀 괜찮으셔요?"
"어... 어제 부스 끝나고 들어온 다음에 피곤해서 자버렸던거 같은데, 깨우지 그랬어. 아름이 너도 잤어?"
"아... 네... 저도 너무 피곤해서...
프락터 선배한테 오늘 못할거 같다 그러고 잤어요."
"우리 둘 다 체력이 너무 약해서 큰일이네."
"그러게요. 같이 운동이라도 해야겠어요. 아, 맞다!"
아름이는 잊었던게 생각났다는 것처럼 나를 꼭 안았다.
아름이가 쓰는 샴푸랑 바디워시 향 때문일까 늘 아름이한테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왜...?"
"일어날 때 옆에 못있었으니까 모닝 포옹이에요."
"나 아직 샤워 안해서 더러워, 갔다와서 해줘.."
"언니한테 더러운게 어딨어요. 오히려 언니향이 진해서 코박죽하고 싶은 그런 냄새..♥"
"변태같이 왜그래 빨리 갔다올게."
"힝... 아쉽네요. 아, 언니 사랑해요. 언제나, 무조건, 언니를 제일로요."
"어.. 응... 나도."
오늘도 아름이가 좀 이상한 것 같지만 굳이 지적은 하지않고 품에서 벗어나 씻으러 간다.
벌써 새터 마지막 날이라니.
잠때문에 너무 많이 날려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적당히 친해진 애들도 생겼고 아름이도 즐겼다.
또 동아리도 하나 거의 확정지었으니까 나름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 일정이 끝나면 아마 반별로 술자리를 갖을거고 그러면 또 아름이랑...♥
이상하게 여자가 되고 성욕이 더 강해진 것 같다.
첫 연애인 부분이 겹쳐서 그런가 내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아름이 없을때 자위라도 해야하나 자꾸 없는 뭐가 불끈거리는 것 같네.'
아무튼 3일째의 아침을 시작하기위해 샤워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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