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정연이는 답답해 (1)
* * *
"흐음..."
첫날은 숱, 어제는 트레이닝복이었으니 오늘은 다른 옷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한데...
"치마...?"
치마는 아직 너무 허들이 높다.
그런 개념이 희미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은 스스로가 남자인 것 같은 생각이 가끔 드니까, 치마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든다.
아름이랑 적당히 맞춰입을까 했지만 씻고 돌아오니 아름이는 이미 평소처럼 검은 수트를 입은 채 태블릿으로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냥 셔츠에 면바지나 입어야겠다.'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 또 그렇지만 옷걸이가 괜찮아서 그런지 어설프게나마 풋풋한 여대생 느낌이 나는것 같기도...?
적당히 만족하고 아름이랑 나가며 오늘 일정을 확인한다.
새터 3일차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정확하게는 어제 모든 기력과 힘을 쏟아내고 하얗게 불태워버린 새내기들이기에 따로 할 수 있는게 없는 것도 있겠지만,
아무튼 다시 또 대강당에 모여 딱딱한 말을 듣고 딱딱한 식순에 따라 딱딱한 마무리를 하면 공식적인 새터 일정은 끝이었다.
"정연, 아름! 어제 아팠다며... 몸은 좀 괜찮아...?"
시간에 맞춰 기숙사를 나가려는데 입구에서 예림이랑 다른 여학생들과 마주친다.
걱정스러운 투로 말하는 그녀들.
"어, 응... 새터한다고 설레서 잠을 좀 설쳤었는데 그거때문에 그랬나... 이제 완전 괜찮아! 하하..."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뻔한 거짓말이지만 굳이 캐묻지 않을 것 같아서 대충 넘어간다.
"어제 공연도 그렇고 반 대항 프로그램도 그렇고 엄청 재밌었는데 너무 아쉽다... 같이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게..."
어제 공연이 어땠고, 동아리 박람회에서 자기들은 뭘 했고 하는 내용으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는 예림과 적당히 이야기하며 가다보니 금방 대강당에 도착했다.
첫날과 똑같이 1반은 제일 왼쪽 앞이었기에 같이 온 애들이랑 적당히 앉았다.
지나고 보니 참 빠르게 느껴진 새터.
첫날 여기서 아름이 때문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가 기숙사 돌아가는 길에 싸운게 아직도 생생하다.
"벌써 3일이 끝이네, 오후만 되면 피곤해져서 나는 절반도 못 즐긴거 같기도 하고... 아름아 재밌었어?"
"..."
뭔가를 고민하는지 아름이는 허공을 보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름아...?"
"..."
"아 름 아...?"
"아, 네 선배, 아니 언니. 왜요?"
두번 더 부르자 흠칫하며 답하는 아름이는 역시나 뭔가 이상하다.
"아름아 요즘 피곤해?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거야?"
"아뇨,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시간 참 빠르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게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면 꼭 말..."
"자, 새내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터는 즐거우셨나요!"
내가 아름이에게 하려던 말은 새프디 단장의 행사 오프닝 멘트에 묻혀버렸다.
그뒤는 뭐. 식순에 따라 진행하다보니 아름이의 반응이 신경쓰였던건 사실이지만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건가 싶어서 더 물어보지 않는다.
'자꾸 넘어가고는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힘이 돼줘야 할텐데.'
...
"자 1반, 공식적인 새터는 이걸로 끝이고, 오늘 저녁에 뒷풀이 할테니까 8시까지 단톡방에 올려준 곳으로 오면 돼. 각자 짐정리 마저 하거나 놀러다니거나하고 저녁에 보자. 오케이?"
네~
'드디어 새터가 끝이구나...'
사실 일정 확인 전에는 오후까지 뭐가 있는 줄 알고 술자리가 끝난 뒤에야 아름이랑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날은 벌써 끝이라니.
아름이가 나랑 안해준다고 했던 것도 새터 끝날때까지니까, 곧 아름이가 먼저 한계에 도달했다는 티를 내면 나는 살살 튕기다가 못이긴척 넘어가주면 된다.
아름이는 침대 위에선 은근히 잘 안받아주는 스타일이라 또 목줄을 채우거나 부끄러운 짓을 시키겠지만, 다리가 풀릴정도로 갈 수 있을텐데 그정도는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해줄 수 있다.
"아름아~ 새터 끝났네~?"
일부러 과장된 몸짓과 톤으로 아름이를 부르며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아까 코박죽이니 뭐니 했으니까 일부러 아름이를 살짝 유혹? 암튼 대충 그런 느낌으로.
"언니. 제가 일이 있어서 뒷풀이까지 혼자 계셔야 될 것 같아요."
역시 아름이는 당장 나를 원할 줄 알았다.
일이 있지만 오후까지... 응...?
"응..? 같이 안있고?"
"네. 미안해요. 중요한 일이라서.
저녁까지 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몰라서 먼저 드셔야 될 것 같아요. 뒷풀이 할때는 올게요."
"어... 근데 그... 새터 끝났는데..."
"네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네요. 혹시 반별로 뭐 해야하면 어떻게 가야하나 싶었는데.
그럼 다녀올게요, 사랑해요."
아름이는 나를 한번 안아주더니 대강당 앞에 준비된 김실장의 차를 타고 급하게 가버렸다.
"어... 그... 나랑..."
아름이에게 채 닿지 못하는 말만 멍청하게 되풀이하며 서있었다.
"저기..."
왠 처음보는 키큰 남학생이 뒤에서 말을 건다.
"아 네?"
"말 놓아도 돼. 나도 21학번인데, 그 4반 대표로 나왔던..."
"아... 네. 아니 응..."
그러고보니 첫날 무대위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키도 크고 누가봐도 인싸인 것 같은 깔끔한 비주얼.
고딩때 나같은 놈 한트럭 정도는 왕따시켰을 것 같은 잘놀아본 이미지의 그는 K 공대에서는 그렇게 흔치 않은 스타일인데...
그때는 좀 더 당당한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머뭇머뭇거리는 느낌이다.
"저... 괜찮으면 점심 같이 먹을래?"
'아 이새끼 씨발 이거 작업멘트냐?'
뭔가 묘하게 느낌이 다르다 했더니 일부러 좀 순박한 이미지를 주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다.
"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다른 뜻이 있겠지'
"같은 고등학교에서 올라온 친구도 없고 그래서"
'그래서 새터반이 있는거잖니'
"점심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마침 보이길래."
'너무 거짓말이다 이놈아.'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요, 가장 확실한 작업 전략은 잘생김이란 말이 있긴 하다.
모쏠 아다인, 아 지금은 아니게 됐으니까 아무튼,
한달 전까지 찐텐 모쏠 아다였던 내가 보기에도 너무 뻔한 작업 멘트인데 여자애들이 좋아하게 생겨서 그런지 저 전략으로 이때까지 재미 좀 봤나보다.
'오히려 저렇게 티나는게 전략인건가?'
내가 이제 막 대학에 와서 들떠있는 새내기 여학생이면 넘어갔겠지만 이 껍데기 안에 있는건 22살 형님이라서 이런 어린 놈 작업에 어울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미안...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그럼 번호만이라도 줄 수 있을까? "
"그건..."
"오래기다렸지! 가자!"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휙 잡아채며 끌고 간다.
"거기 동기님은 다음에 봬요~"
익숙한 목소리의 그녀는 다름아닌 정하은.
"넌 뭔데 갑자기..."
"언니가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아서 도와줄려고요. 오늘 아름이는 없나봐요?"
"일이 있어서. 아 아니지 너가 알바 아니잖아."
"에이, 너무 딱딱하게 그러신다 또. 옷깃 한번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 지금 몇번이나 보는거에요?"
"너무 올드한 표현 아니니?"
"하핫.. 클래식한 맛이 또 있잖아요."
넉살좋게 넘기는 그녀는 대강당을 빠져나와 주차장 입구 옆에서 잡았던 손을 풀어준다.
"그.. 고맙긴 한데, 이제 그만 갔으면 좋겠어."
"언니 아름이 때문에 그러는거에요? 꼭 여자친구 눈치보는 남자 같아요."
"...!"
내가 괜히 이상한 티를 내면 정하은은 아름이랑 내가 그런 사이라는 걸 눈치채거나 내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도 있고, 아름이 말에 따르면 정하은이랑 사이가 안좋다고 했으니까 그건 다시 돌고돌아서 아름이한테 안좋은쪽으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응...? 남자 같다니 무슨 소리야...?"
"너무 과하게 철벽 치잖아요. 아름이가 다른 년이랑 바람나면 죽인대요? 특히 저...?"
자신을 가리키며 씨익웃는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느껴져 뒷걸음질친다.
"아니.. 그.. 아... 아무튼! 나한테 좀 치대지마. 꺼, 꺼져..!"
대충 뱉은 후 길을 따라 빠르게 내려온다.
'저년은 뭔가 기분나빠... 소름끼치고.'
결과적으로는 빙 둘러가는 형태가 됐지만 내려갔다가 옆쪽 길로 다시 올라와 기숙사까지 돌아간다.
"후우... 후우... 씨발.. 씨발...!"
남자였을 때 쌓인다는 느낌은 2주동안 금딸 후 자꾸 빳빳해지는 내 아랫도리에서 느껴졌었는데 이건 며칠 됐다고 몸이 간질간질 답답한 느낌이다.
'진짜 자위라도 해야지 머릿속에서 그 생각 밖에 안나네.'
아름이는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끝나자마자 가버리는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겠지.
'아름이 없는 아름관은 쓸쓸하네'
되지도 않는 개그를 속으로 삼키며 방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