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일렁일렁, 일렁이는 물결에 고민을 놓아 버리고
노래에 몸을 맡겨, 행복이 이제 On
마지막 포인트 안무를 하는 순간, 넥타이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춤을 추는 도중 매듭이 풀린 모양이었다. 한호성은 넥타이를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봐 주셨을까요?”
엔딩 포즈까지 마친 멤버들이 하나둘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채팅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좋은 댓글이 가득한지, 다들 활짝 웃으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이태야, 다음엔 소장 중인 선글라스도 꼭 착용해 줘.’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네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저 정장 잘 어울려요? ……정말 회사원 같아요? 우와. 살면서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서 너무 설레요! 뭐랄까, 저는 회사원이 아니라서 회사 생활에 대해 동경이……. 아. 그런 거 동경하지 말라고요? 지지라고요?”
한호성은 멤버들과 두어 발자국 떨어져서 넥타이를 손봤다. 그런데 넥타이의 모양이 좀처럼 잘 잡히지 않았다. 분명 넥타이 잘 매는 방법을 익혀 두었는데, 익숙잖은지라 손이 꼬였다.
“‘여름, 찰칵!’도 슈트 버전으로 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이 많은데. 다들 어때?”
“좋아!”
“이왕 슈트 입은 김에 해 보자.”
다들 문해일의 제안에 찬성했다. 한호성도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나도 좋아. 그런데 그 전에 넥타이 좀 다시 묶어도 될까?”
“응, 천천히 해도 괜찮아.”
문해일이 말했다. 하지만 네 명이 자신을 주목하는데, 더더군다나 수많은 사람이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는 중인데 천천히 하기란 쉽지 않았다. 빨리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손이 더욱 꼬였다.
“내가 묶어 줄게.”
그때, 제논이 한호성에게 다가왔다. 한호성은 얼떨결에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논의 손이 넥타이에 닿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움직이며 넥타이를 묶던 그가, 무언가 답답한지 눈썹을 살포시 찌푸렸다.
“호성 형, 돌아 봐.”
“응? 어떻게?”
“이렇게.”
제논이 한호성의 양어깨를 붙잡더니 빙글 올렸다. 그 바람에 한호성은 제논을 등지고 서게 되었다.
어라, 하는 사이 등에 제논이 닿았다. 그가 한호성을 끌어안듯이 팔을 뻗었다.
‘……갑자기 웬 백 허그?’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깜빡일 때였다. 제논이 한호성의 넥타이를 묶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굴려 내려다보니, 손동작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이 자세가 훨씬 편하네.”
어깨에 제논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나지막하고 차분한, 제논답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어조.
한호성은 라이브 방송 중인 것도 깜빡 잊고 큰소리를 낼 뻔했다.
‘너 제논 아니지……!’
아무나 제논에게 빙의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의 몸을 차지할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우영찬.
벼락처럼 머리에 내리꽂힌 그 이름에, 한호성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
무슨 정신으로 라이브 방송을 마쳤는지 알 수 없었다.
‘여름, 찰칵!’까지 춤춘 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것까진 기억났다. ‘Night Swimming’의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천오백만을 넘은 후로도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라, 채팅창이 축하 파티 분위기였다. 게다가 하이파이브로선 드문 슈트 차림인지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팬이 많았다.
-원래도 잘생겼는데 슈트 입으니까 분위기까지 미쳐버림ㅠㅠㅠ
-그동안 왜 슈트 안 입었는지 아무나 진지하게 해명 좀;;
-다음 컨셉은 무조건 슈트로 가자!!!!
-하이파이브 슈트 아주 멋져 하이파이브가 100점이라면 슈트는 50점 그러니까 도합 10050점이야
격한 반응을 보이는 댓글을 읽자, 앞으로 종종 격식 갖춘 슈트나 세미 정장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라이브 방송이 팬들에게 깜짝 선물 같은 이벤트가 되어 주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호성에겐 이와 별개로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수고 많았어, 얘들아. 조심히 들어가.”
“형은?”
“난 제논하고 얘기 좀 하고 들어가려고.”
한호성은 제논인지 우영찬인지 모를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문해일이 한 발짝 나섰다.
“그냥 같이 돌아가자. 숙소에서 얘기하면 되잖아.”
“아, 그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숙소에선 못 할 이야기야?”
“응.”
문해일의 낯에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 보나 마나 ‘나를 빼놓고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따위의 생각 중일 터였다.
문해일에게 미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우영찬이 며칠간 제논으로 가장하고 지냈다고 밝히면, 그의 체면이 곤두박질칠 터였다. 이유를 설명하기 난감한 건 덤이고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야. 안무 디테일 좀 잡아 주려고 그래.”
“……알았어.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해.”
한호성의 변명에, 문해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멤버들이 연습실을 나섰다. 매니저와 스태프도 철수한 뒤였다. 그러자 조금 전의 활기가 거짓이었던 양, 연습실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한호성은 그제야 남자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해. 너, 우영찬이지?”
잠시 무표정하던 그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 들켰네.”
짐작한 바임에도 소름이 돋았다. 한호성은 속았다는 배신감과 충격, 그리고 반가움에 주먹을 말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너……!”
“생각보다 일찍 알아차리네? 내가 연기를 잘 못 한 것 같진 않은데. 실제로 네 명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잖아.”
“……우영찬!”
“그래, 맞아. 나야. 예전엔 나라고 말해도 못 믿더니,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보네.”
뭘 잘했다고, 우영찬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한호성은 억지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멀미라도 난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이래. 제논 대신 활동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사기를 쳐?”
“사기라는 말은 좀 과하지 않나. 사기죄는 상대를 기망해 재물을 갈취했을 때 성립하는 건데. 네가 딱히 손해를 본 건 아니잖아?”
“어쨌든 속인 건 맞잖아! 난 그것도 모르고…….”
지난 며칠간의 일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자신이 문해일과 같은 방에서 자는 걸 경계하더라니. 어쩐지 부득부득 함께 자자고 졸라 대더라니. 어쩐지 유난히 자신에게 치대더라니. 그게 다 흑심이 있어서였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뭐?”
“……네가 연락도 없어서…….”
행여나 자신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을까, 걱정한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우영찬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남의 속도 모르고 싱글싱글 웃는 꼴이라니. 한호성은 약이 오른 나머지 주먹을 들었다. 우영찬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톡 때리자, 그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화났어? 화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도 돼. 어차피 김제국 몸이야.”
“……너 진짜.”
맞는 게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그리해 줄 수 있었다. 한호성은 우영찬의 가슴을 콩콩 때렸다. 그가 간지럽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연락 없어서 걱정했어?”
“아니거든.”
“왜 인제 와서 부끄러워하고 그래. 촬영할 때도 혹시 내 연락 왔나 스마트워치 흘끔흘끔 봤으면서.”
“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도……!”
“일부러 연락 씹은 건 아니야.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그랬어.”
우영찬의 변명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려던 그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밀당을 의도한 건 아닌데……. 효과 좋네, 이거.”
“야!”
한호성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우영찬의 옆구리를 쿡 찌…… 르려다 실패했다. 그에게 손목이 붙잡힌 탓이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우영찬을 바라보자,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미안. 이제 안 놀릴게.”
“그동안 놀렸다는 자각은 있고?”
“그러려던 건 아냐.”
“그럼 왜 제논인 척한 건데?”
“네가 문해일이랑 자는 꼴을 어떻게 두고 보냐?”
뻔뻔한 대꾸에 뒤통수가 띵했다.
우영찬 때문에 흥분했다가, 진정했다가, 다시 흥분했다가. 이게 정녕 ‘밀고 당기기’인지, 혹은 제 혈압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기 작전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음흉한 뉘앙스로 말해? 그냥 같이 숙소 생활하는 것뿐인데. 그리고 내가 문해일이랑 단둘이 지내는 게 정 걸리거든, 너도 숙소로 들어오면 될 일이잖아? 왜 굳이 제논인 척했냐니까?”
“내가 나인 채 숙소에 갔으면. 네가 받아 줬겠냐?”
“…….”
한호성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우영찬이 숙소까지 따라왔더라면 돌려보냈을 터였다. 제논과 달리 그에겐 지낼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숙소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까 다행이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
호성은 우영찬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자 우영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제논인 나는 괜찮지만, 우영찬인 나는 안 된다?”
“그런 뜻이 아니라…….”
“나 먹고 버리면 안 되지, 한호성.”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널 먹고 버렸다고 그래?”
“결과적으로는 그렇잖아. 제논으로만 써먹고 버리려는 거.”
우영찬이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한호성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영찬아. 난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절대 강요하지 않아. 네가 제논으로서 활동하고 싶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래도 돼. 난 너를 억지로 활동시키고 싶지 않고 애초에 그럴 힘도 없어.”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우영찬이 손을 뻗었다. 그는 한호성의 넥타이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넌 참 상식적이고 논리적이야. 그래서 쉽지 않은데…… 그래서 좋아.”
“난 네가 조금 싫어지려 하는데.”
“아닌 거 다 알고 있어.”
한호성 딴엔 단호하게 쏘아붙였음에도 우영찬은 손톱만큼도 타격받지 않은 기색이었다. 장난감 총으로 BB탄을 쏘아도 저것보다는 뜨끔한 표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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