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형, 얼른 물 마셔. 물.”
누군가 물컵을 드밀었다. 한호성은 컵을 받아 들고 정신없이 물을 마셨다. 그제야 매운 기가 조금 가셨지만, 혀는 여전히 얼얼했다. 땡초가 스쳐 지나간 목구멍마저 알싸한 지경이었다.
“얼음도 있어. 입에 물고 있으면 좀 나을 거야. 응, 그렇게.”
그가 한호성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조언했다. 한호성은 그의 말에 따라 얼음을 입에 물었다. 확실히 화끈거리는 통증이 가라앉는 듯싶었다.
“고, 고마워.”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린 호성은 제논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랐다.
‘제논이었어……?’
그러고 보니까 제논의 목소리였던 것도 같다. 하지만 목소리를 떠나서, 그가 원래 이렇게 차분하게 남을 챙기는 성격이었던가. 그동안 우성한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라, 청학동 예절 수업에 다녀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대단한 변화였다.
“호성 형, 괜찮아?”
제논이 다정히 물어 왔다. 한호성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은 하도 놀라, 매운맛도 잠시 잊었을 정도였다.
“내가 대신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흰자위까지 빨개져서는 어떡해?”
“…….”
제논이 한호성의 눈가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으나 한호성은 그와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했다.
이미지를 관리하려고 이런다는 건 알지만 좀 과하지 않나?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나 싶어 멤버들을 돌아보자, 세 명 다 경악한 표정이었다. 특히 문해일은 눈에 불을 켠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래서 내 곁만 맴도나 보다.’
다른 멤버들은 제논을 경계하니, 그나마 편한 자신에게 오는 거였다. 하기야 제논은 이전부터 자신을 가장 따르긴 했다.
“호성 형, 당첨! 이걸 당첨이라고 해야 할지 꽝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5분의 1의 확률을 뚫은 거니까 역시 당첨 아닐까?”
“그런가? 헤헤. 어쨌든 부상으로 스페셜 꼬치구이 줄게.”
정신을 수습한 이주진이 꼬치구이를 내밀었다. 꼬치의 길이만 30cm에 달하고, 각종 채소와 고기 따위가 먹음직스럽게 꽂혀 있어 ‘스페셜’이란 단어에 걸맞았다.
“맛있겠다. 잘 먹을게.”
보란 듯이 통통한 새우를 한 입 베어 물자, 멤버들이 박수 쳤다. 대체 자신이 뭘 했다고 이 타이밍에 박수 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한호성은 그냥 웃었다. 캠프장이라는 장소 특유의 느낌 덕분일까.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 즐겁고, 기분이 붕 떠올랐다.
***
한나절만의 짧은 캠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해 온스타에 접속한 한호성은, 지난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보게 되었다.
˪호성아 이천만뷰 축하해!!
˪HAPPY 20,000,000 (폭죽 이모티콘)
˪드디어 이천만뷰~! 삼만뷰까지 쭉쭉 가쟈!
˪슈트 버전 기대중 기대중ㅎㅎㅎ
˪이천만뷰 너무 좋다♡ 이천만뷰 너무 좋다♡ 이천만뷰니까 두 번 말하기ㅋㅋㅋㅋ
˪이 세상에서 나이트 스위밍 뮤비가 재생된 횟수 바로 20,000,000회~
“어.”
짤막한 감탄을 토한 한호성이 위튜브에 들어갔다. ‘Night Swimming’의 뮤직비디오 조회 수를 확인하자 20,002,549라는 숫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얘들아, 우리 이천만 뷰 넘었어!”
기념 삼아 화면부터 캡처한 후, 한호성은 멤버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제각기 딴짓 중이던 멤버들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진짜?”
“‘Night Swimming’ 말하는 거지?”
“응!”
저마다 핸드폰을 부여잡고 위튜브에 접속했다. 조회 수를 확인한 멤버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이게 되네.”
“그럼 이제 슈트 버전 안무 영상 업로드할 수 있겠네?”
‘Night Swimming’ 발매 당시 건 공약이 있었다. 공식 뮤직비디오의 조회 수가 이천만을 넘으면, 슈트 버전 뮤직비디오를 업로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진작 스튜디오 촬영까지 마친 바였다.
“난 솔직히, 영상 촬영하면서도 이천만 뷰가 정말 될까 싶었는데…….”
설이태의 중얼거림에 한호성이 답했다.
“나도 긴가민가했어. 근데 미리 촬영해 두길 잘했다. 인제 와서 준비하려면 시간 걸리잖아.”
“그러게. 영상 편집도 다 끝났겠지?”
“응. 지금 당장이라도 공개할 수 있을걸. 말 나온 김에 대표님께 여쭤봐야겠다. 슈트 버전 뮤비 언제쯤 업로드할 예정이시냐고.”
장 대표에게 전송할 메시지를 작성하던 도중,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호성은 입을 열었다.
“얘들아, 오늘 저녁에 라이브 방송 하는 거 어때?”
“괜찮긴 한데…… 왜?”
“슈트 입고 ‘Night Swimming’ 안무 하자.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거랑, 연습실에서 촬영하는 거랑 느낌이 다르잖아.”
“그건 그렇지.”
동의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다들 왁자지껄 의견을 냈다.
“근데 의상이야 준비되어 있으니까 괜찮지만, 헤어랑 메이크업은 어떻게 해? 당장 샵 들르기엔 너무 촉박하지 않나.”
“지금 상태에서 조금만 손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슈트 입으려면 어느 정도 격식 차려야 하지 않나 싶어서.”
“이태 형, 얼마나 각 잡고 슈트 입으려고 그래. 원래 연습실 촬영은 프리한 맛이잖아.”
“그것도 그런가.”
한호성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다 함께 라이브 방송 하려면 오늘 저녁이어야만 해. 왜냐면 우리 당분간 스케줄 안 겹치거든.”
“아, 맞다…….”
“다섯 명이 모이는 날이 얼마 없긴 하지.”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로써 의견이 하나로 모였다.
“그럼 오늘 라방 하자.”
“좋아!”
“나도 찬성.”
제논을 제외한 멤버가 찬성했다. 운전석에 앉은 장영수까지 “찬성!”이라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이 정도면 만장일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 한호성은 다시금 핸드폰을 확인했다. 우영찬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
한호성은 일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정말 그럴지, 우영찬에게 마음이 쓰였다.
***
한호성은 슈트 차림의 멤버들과 함께 연습실에 들어섰다. 그러고 보면, 이 연습실의 계약 문제에 관해서도 우영찬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 했다.
‘연습실 대여를 중도 해지하긴 어렵겠지.’
그러니 회사가 계약금을 부담하는 식으로 조율하면 좋을 듯싶었다. 이젠 하이파이브의 수익이 상당해서, 연습실 대여비쯤은 너끈히 충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삶은 얼마나 편리한가. 덕분에 우영찬에게 진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어서 새삼 다행이었다.
“이왕 라방 하는 거 많이 봐 주셨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아까 공지도 올렸으니까.”
회사 스태프가 삼각대에 카메라를 세팅했다. 라이브 방송을 켜기 무섭게, 시청자 수가 빠르게 올라갔다.
“Hi, High-Five! 안녕하세요, 하이파이브입니다.”
인사를 마친 후, 한 사람씩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희 ‘Night Swimming’ 뮤비가 천오백만 뷰를 달성했어요!”
“많은 관심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념으로 슈트 버전 ‘Night Swimming’을 보여 드리려고 하는데요. 부디 멋있고 예쁘게 봐주세요.”
-슈트 왔다~~~!
-15,000,000 뷰 축하해~!
-호성이 허리선 ㅁㅊ.....
-미미ㅣ미미미미친 정장 박제해
-ㅠㅠ ㅠ? 해일아 제발 깐머 계속해줘...ㅠ
-리조트룩도 좋았지만 슈트도 좋다 이거에요
-아니 정장이 이렇게 어울리는데 그동안 정장 안입고 뭐했니 그 개구린 개구리 때 초록색 옷 버리고 정장만 입었어도......
-섹시한 회사원 5인조같다 물론 현실 회사원 말고 가상의 회사원ㅋㅋㅋㅋ
와글와글 쏟아지는 채팅이 단비 같았다. 그에 호성의 얼굴이 비 맞은 꽃처럼 반짝반짝 피어났다. 모처럼 받은 긍정적인 관심이 반갑고 기뻤다.
쿵, 쿵, 쿵.
전주가 흘러나왔다. 연습실 스피커의 음질이 워낙 좋아, 베이스가 안정적으로 울렸다. 그 위에 재즈 박자의 기타 선율이 자작하게 얹혔다.
관객이 한 명도 없는 동시에 수천, 수만 명이 자신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한호성은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듯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모두가 즐겁게 보아 주리라는 확신에, 춤을 추는 자신도 즐거웠다.
밤이지만 쓴 별 모양 선글라스,
기분 내려 뿌린 샤워 코롱
야자수 이파리가 손짓하고 있지
Fool in the Pool, Enjoy this moment
동선을 바꾸는 찰나, 제논 곁을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방금까지는 한호성이 비교적 앞쪽이었지만 이젠 제논이 그러했다. 한호성은 그의 춤을 보고는 감탄했다.
‘잘 추네.’
좋은 의미로 놀라웠다. 사실 한호성은, 제논이 춤을 잘 추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속성 과외 하듯 안무를 가르쳐 주긴 했지만, 단 하루 만에 완벽히 익히긴 어려울 테니 말이다. 게다가 제논은 본래도 춤을 잘 추지 못하는 멤버였다.
한데 지금, 제논은 안무를 제대로 숙지한 데다 여유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멤버들 사이에 있어도 이상하긴커녕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한 팀’다웠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여긴 파라다이스인걸
일단 즐겨 그리고 잊어
어차피 다 잘될 테니까
또다시 동선을 바꿀 차례였다. 한호성은 제논에게서 시선을 떼며 몸을 움직였다.
제논이 잘하는 중이라 다행이긴 한데, 이 석연찮은 기분은 대체 뭘까.
‘좋은 게 좋은 거긴 하지만…….’
애써 마음속 한 점 찜찜함을 지워 내며, 한호성은 카메라 렌즈와 눈을 맞췄다. 곡은 어느덧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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