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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92화 (92/102)

92화

도성에 당도하자 낯익은 풍경에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육지에 갔을 때만 해도 이방인이라 느꼈는데, 이젠 구명환을 먹어야 바다에 올 수 있는 처지가 되었지 않은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앞서가던 기진이 돌아본다. 왕자의 행차에 많은 백성이 그를 알아보고 예를 갖추었다. 율은 기진의 위치가 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용궁에 도착하였는데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다. 아니나 달라 평소라면 퇴청하고 남을 시간인데도 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율을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별주부 왔는가. 고생 많았네.”

“안 본 사이 신수가 훤해졌구만. 역시 육지 물이 좋긴 좋은가 보군.”

“근데 토끼는 어딜 갔는가. 같이 오지 않았나?”

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락 님이요? 어찌 이락 님을 찾으십니까? 의아하여 기진을 봤는데 그의 낯빛이 어둡고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떠들썩한 와중에 상석에서 내관이 나타났다.

“전하께서 납십니다.”

어? 잘못 들었나. 이어서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용왕이 등장하였고, 율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어, 어떻게…! 놀라서 기진을 쳐다볼 새도 없이 신하들이 줄을 맞추고 고개를 숙인다. 뒤쪽에 선 율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별주부가 왔다고…?”

노쇠한 목소리가 갈라졌고, 옆의 내관이 방율을 불렀다.

“별주부는 앞으로 나와 전하께 얼굴을 보여라.”

율은 신하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별주부, 방율… 육지에서 돌아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고개를 들라.”

율은 고개를 들어 용왕을 바라봤다. 여전히 병색은 짙었으나 전과 달리 눈빛에는 생기가 느껴졌다. 가망 없다 하시지 않았나…. 왕이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 마땅한데, 나는 왜 지금 이리도 불안한 걸까….

“네가 기진과 토끼의 고환을 구해 내 병을 치료했다지.”

율은 목이 콱 막혔다. 하지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소신은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장하구나.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왜 이락은 함께 오질 않았느냐?”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기진이 곁으로 나란히 선다.

“이락은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하였습니다.”

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저런. 내 그리 신신당부를 했거늘. 그래, 언제쯤 올 수 있다던.”

기진은 망설임이 없었다.

“별주부가 사가에 들러 부모님을 찾아뵙고 내일 육지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러면 며칠 후엔 볼 수 있겠구나. 아니 그러냐, 기진아?”

다정하게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용왕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죽다 살아나서 달라진 건지 아니면 기진이 저를 구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율에게는 이 모든 광경이 낯설고 어색하였다.

“수일 내에 이락을 데려와라. 내 직접 그의 공을 치하하고 나눌 이야기가 많으니, 콜록, 콜록!”

용왕이 기침을 터트리자 내관과 어의들이 다급히 와서 살펴본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안쪽 내실로 이동하였다. 왕이 사라지자마자 무릎을 꿇은 율의 등 뒤로 대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볼수록 믿기질 않네. 산송장처럼 누워 있던 분이 저리 움직이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자네도 들었잖아. 그 토끼가 예전에 저승에서 쫓겨난 염라라고 하더군. 그러니 고환이 오죽 효험이 좋았겠어.”

“어쩐지 기세등등하다 했습니다. 모가지를 빳빳하게 세운 이유가 다 있었군요.”

“거기다 전하께서 육지와 교역을 텄다고 펄펄 뛰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지 않았나. 이쯤에서 그자를 빨리 데려와야 하네. 지금이 기회야. 우리 용궁이 예전으로 돌아가 태평성대를 누릴지 누가 알겠는가.”

“대감 말씀이 맞습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너도나도 이락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는 상황에서 율은 기진의 눈치를 살피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있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별주부가 이락을 데려올 것입니다. 교역 이야기는 그때 가서 나누면 되겠지요. 저는 이만 별주부와 함께 사가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퇴청하시지요.”

저마다 고생했다며 한마디씩을 하였고, 율은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기진을 쫓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앞서 걷는 기진의 뒷모습을 보는 율은 착잡해졌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문득 그가 왕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래서 이락이 호두를 고환이라 속였을 때도 모른 척 넘어가지 않았나.

“율아.”

돌아보는 기진은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기진 마마….”

“이락이 나를 배신하였다.”

율의 얼굴이 굳었다.

“나를 왕위에 올려 줄 것처럼 하여 이득을 취하고, 결국 내 아버지를 살려 냈지.”

“…….”

“내가 어리석었다. 그자를 믿는 것이 아니었어.”

기진의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책망이 깔렸다. 율은 주위를 살피었다. 소리를 낮추십시오.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진은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눈빛은 전과 다르게 분노로 일렁거렸다.

“아바마마께서 그자를 꼭 보길 원하신다. 만나서 은혜를 갚겠다 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다르다뇨…?”

“의심하고 있어. 당신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허락도 없이 내가 육지와 거래를 트고, 남해에 혼담을 넣었으니 궁금하신 거겠지. 무슨 의도로 그리했을까. 나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을까.”

직접 듣는 건 처음이라 율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혼인을 하시려 했구나…. 그런데 우습게도 전처럼 마음이 아프질 않다. 왜…? 생각을 마무리 지을 새도 없이 기진이 다가온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빛이 이젠 슬픔으로 물들었다. 예전, 멸시와 비난을 받던 그 처연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율아. 그자를 데려와선 안 된다.”

“이락 님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올 것이다. 그자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율은 기진의 팔을 붙들었다.

“진정하십시오, 마마. 섣부른 판단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입니다.”

기진은 입을 다문 채 침묵하고 불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답지 않은 모습에 율 또한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기진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

“어젯밤… 아바마마께서 내의원의 자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오라 명하셨다….”

“내의원은… 왜…?”

율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약재에… 손을 대셨습니까…?”

기진은 어금니를 꽉 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율은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환으로 증세가 악화한 게 아니었나. 그저 용왕이 죽길 기다린다고만 생각했지 이후로 그가 손을 썼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질 못했다.

“마마…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정신이 아찔한 와중에 기진이 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의원의 장부는 감쪽같이 바꿔 놨다. 그러니 우리는 이락만 처리하면 돼.”

율은 눈가가 붉어졌다. 손끝이 떨리고 온몸에 힘이 빠진다.

“처리라뇨…?”

“가서 그자를 데려와.”

“그러면 마마께서 곤란해지신다지 않았습니까….”

기진이 손을 내민다.

“바다에 오기 전 그자에게 이걸 먹여라. 그러고 나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기진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구명환이었다. 그것이 진짜 구명환인지,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율은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아바마마가 그자를 데려오라는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 아니야. 내 부정을 확인하고 싶으신 거겠지.”

율은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급히 이락을 변호했다.

“온다고 해도 이락 님은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긴 하나 일부러 남을 위험에 빠트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장담을,”

기진의 손이 율의 목에 가서 닿는다. 목을 은근히 문지르는 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는다.

“그자에게 몸을 내주더니 마음마저 빼앗긴 것이냐.”

율은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어… 어찌 그것을….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하얗게 질리었다.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기진이 기어코 율의 손에 약을 쥐여 준다.

“도와다오, 율아…. 네가 돕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제발… 부탁이다….”

간절한 기진의 얼굴을 보며 율은 이락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기진하고 내가 물에 빠지면 넌 누굴 구할 거냐.]

아…. 율은 절망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면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겁니까.

도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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