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93화 (93/102)
  • 93화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세수한다. 멋쟁이.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죽었니, 살았니? 살았다! 와하하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보고 무령은 부채를 흔들며 성질을 냈다.

    “흥! 놀고 있네. 먹을 게 없어서 개구릴 먹어. 여우에 관해선 털끝만큼도 모르는 우매한 것들!”

    그러자 옆에 있던 산신령이 말린다.

    “아이들이 뭘 몰라서 하는 소리에 발끈하지 말게. 귀엽지 않은가.”

    산신령은 평소와 달리 평범한 젊은 사내로 모습을 바꾸었다. 무령 또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었는데, 빛나는 외모는 여전하여 저잣거리를 지나면서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보란 듯 눈웃음을 치니 남녀 할 것 없이 얼굴이 대번 붉어진다.

    “보았나. 나의 미모에 반해 좋아 죽으려 하는군.”

    옆에 있던 산신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상점에 들러 무언가를 골랐다. 무령이 다가가자 화병 두 개를 들고 어느 것이 더 낫느냐고 묻는다. 무령은 둘 중 화려한 것을 선택하였고 산신령은 흰색 백자를 달라고 주인에게 요청했다.

    “마음대로 할 거면 왜 물어봤나.”

    “이락과 자네의 취향이 반대니 이걸 고른 걸세.”

    “화병은 몰라도 사내 보는 취향은 같을걸.”

    “무슨 소린가, 그게.”

    “알 것 없네. 화병은 왜? 이락에게 주려고?”

    “처음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은가. 그건 예의가 아니네.”

    “…….”

    “자네 설마 빈손인가…?”

    무령이 시치미를 뚝 떼고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작은 호리병이었는데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준비하였네.”

    “그게 뭔가.”

    “먹으면 극락으로 보내 주지.”

    “독약은… 아니지?”

    “자네 상상력은 턱없이 부족하구먼. 이락 그놈이 독약을 먹는다고 어디 죽을 놈인가. 그랬으면 내 진작 죽여서 없애 버렸지.”

    아….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걸어 이락의 집을 찾았다. 금산에서만 오랜 시간을 보낸 이락이 도성 안에 터를 잡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틀림없었다. 거기다 집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주위를 둘러보던 둘은 무언가를 깨닫고 잠시 말을 잃었다.

    “맞지?”

    산신령이 물었고, 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쯤이었어.”

    수백 년 전 이곳에서 왕족의 일가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몰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저승에서 개입해 어린 사내아이를 데려갔는데, 당시에는 제법 떠들썩하여 일대에서는 모르는 신령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지금의 이락이었다.

    이락은 어째서 수백 년 전 자신이 살던 곳에 돌아왔을까.

    직접 물어보면 답을 알려나. 하긴, 그 성미에 순순히 대답해 줄 리가 없지.

    이리 오너라. 무령의 외침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에잇. 무령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커다란 대문이 열리면서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다. 방에 있어야 할 집기들이 마당에 나뒹굴고, 꽃밭은 짓밟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령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산신령을 쳐다봤다.

    “이게 뭘까?”

    “먼저 온 손님이 있는 것 같네.”

    “우리처럼 초대받지 않은 자들인가.”

    들어가 살피는데 마루에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손으로 발의 크기를 잰 무령이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건장한 사내들이 왜 이곳을 찾아왔을까. 방을 기웃거리던 무령은 열린 문틈으로 커다란 병풍이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다락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신을 신고 마루로 올라서자 산신령이 쫓아온다.

    “무언가 없어진 것 같지?”

    “뭔지 모르나 이락이 보면 열받을 만한 장면이군. 하하.”

    무령이 웃으니 산신령이 인상을 쓴다. 이 상황에도 그놈 열받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나는가?

    “돌아가세. 이러다 우리가 홀랑 뒤집어쓰겠네.”

    그때 대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다. 혹여 집을 이렇게 만든 범인인가 하였는데, 이락이다. 이락은 엉망이 된 집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고, 무령과 산신령을 보면서는 표정이 험악해졌다.

    “둘이 내 집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야?”

    ***

    “율아….”

    오랜만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율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머니는 거울로 보았던 것보다 안색이 훨씬 밝았고, 눈빛에도 생기가 돌아왔다. 옆에 있는 누이도 둘을 보며 연신 훌쩍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어명을 받아 육지에 큰일을 하러 갔다더니, 벌써 일을 마치고 돌아온 거야?”

    그녀의 얼굴에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아들이 그리워 울고 있다던 기진의 말은 아무래도 거짓이었나 보다. 기진을 생각하자 또다시 마음이 괴로워진다. 율은 내색하지 않으려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아닙니다…. 일이 남아 육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은 아직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거칠었으나 체온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따뜻했다.

    “선이에게 들었다. 네가 가져온 약초로 나를 살렸다지. 그동안 고생하게 한 것도 미안한데…. 내가 너에게 많은 짐을 지웠구나. 미안하다, 율아….”

    어머니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고, 율은 덩달아 울음이 터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아닙니다. 그것을 주신 분은… 따로 있습니다. 함께 오진 못하였지만, 어머니께 안부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참으로 고마운 분이구나.”

    “예…. 고맙고 좋은 분입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락은 왜 나를 이리 보낸 것일까. 시험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모르겠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도 어머니는 눈에 띄게 힘겨워했다. 율은 그녀가 쉴 수 있도록 한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마루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담배를 태울 뿐 율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율이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오자 선이 쪼르르 따라온다.

    “오라버니 어디 가십니까?”

    “시장에 들르려고 한다.”

    “저도 따라갈래요!”

    “아니다. 혼자 다녀올 테니, 여기 있거라.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 사다 주마.”

    “어디를 가시기에 그럽니까. 저 몰래 숨겨 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율은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었다. 아니나 달라 아버지가 냉랭하게 쏘아붙인다.

    “반푼이가 계집은 무슨! 누가 저걸 좋다고 해. 평생 혼자 살아야지.”

    아버지! 선이 아버지에게 따지려 하였고, 율은 그런 선을 말리며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러자 선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괜히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 반푼이 소리를 듣게 한 게 미안한 모양이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러세요. 오라버니가 밖에 나가면 여인들이 줄을 서는걸요. 제 친구 해인이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저를 무척 졸랐습니다. 그리고 또 영주도, 아, 영주가 이건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선이 입을 가리기에 율은 다정하게 웃었다.

    “어서 들어가거라. 올 때 네가 좋아하는 당과를 사 오마.”

    “책방에 가시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

    “울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길 가시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그런 이유로 책방에 간다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어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다 컸구나…. 율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른 돌아오마.”

    “그럼 빨리 오십시오. 내일 또 떠나는데, 얼굴이라도 많이 봐 둬야지요.”

    율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시장이 있는 거리로 향하였다. 시장 중간에 있는 허름한 책방으로 들어서자 나이 든 주인이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난다.

    “어? 이게 누군가.”

    “어르신. 잘 지내셨습니까….”

    “하도 안 보여서 일이 생긴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구먼.”

    “잠시 앉았다 가도 되겠습니까….”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암, 되고말고. 잘됐네. 오랜만에 자네가 왔으니 김 영감한테 가서 놀다 와야겠군. 그래도 되겠지?

    율은 기꺼이 다녀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시간은 손님도 없을뿐더러 책들이 낡고 오래되어 찾아오는 이도 많지 않았다. 노인이 사라지고 홀로 책방에 남은 율은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품에서 약을 꺼냈다.

    [그자에게 몸을 내주더니 마음마저 빼앗긴 것이냐.]

    [도와다오, 율아…. 네가 돕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제발… 부탁이다….]

    마음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듯 괴롭다. 율은 몸을 웅크린 채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고 바닥으로 툭, 툭 얼룩이 생겨났다. 나는 어찌해야 좋단 말입니까. 누구든 내게 방법을 좀 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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