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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91화 (91/102)

91화

“입맛이 없어? 해장국을 끓여 줄 걸 그랬나?”

율은 퀭한 얼굴로 맞은편에 있는 이락을 바라봤다. 그가 먹으라고 수저를 쥐여 주는데 하마터면 그것을 집어 던질 뻔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밤새 그리 괴롭혀 놓고 아침에는 정성 들여 죽까지 끓여다 바치다니.

똑바로 앉는 것이 힘들어 삐딱하게 기울여 앉으니 이락이 안타깝게 웃는다.

“많이 아파? 약을 발라 줄까?”

“됐습니다….”

“그러니까 빈말이라도 날 구하겠다 했어야지. 끝까지 고집을 부려 화를 자초할 줄이야.”

율은 기어이 눈을 흘겼다. 이락은 기진과 둘 중에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건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게 왜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율은 양심상 이락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기진은 자신이 모시는 왕자가 아닌가.

거기다 이락은 죽지 않는 존재라고 들었는데 내가 과연 구해 줄 필요가 있을까.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했는데 이락은 기분이 상했는지 나중에는 기어서 도망가는 율을 붙들고 정신을 놓을 때까지 쉬지 않고 삽입하였다. 그렇게 밤새 시달리다 눈을 뜨니 해가 이미 중천에 있었다.

“자 물도 마시고.”

다정하게 물도 챙겨 주더니 수저를 빼앗아 죽을 뜬다.

“아, 해라.”

“제가… 먹겠습니다….”

“깨작거리기만 하잖아. 먹고 금산에 가야 하는데, 이래선 밤에나 도착하겠다.”

“금산이요?”

아…. 율은 그제야 오늘이 바다에서 수인들이 물건을 가지고 오는 날임을 깨달았다. 기진도 오는 걸까. 잠시 멍한 얼굴로 있는데 이락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마치 네 생각을 다 안다는 표정이다. 율은 뜨끔하여 얼른 시선을 피하고 죽을 받아먹었다.

“옳지. 잘 먹네. 맛이 어떠냐.”

“이락 님이 직접 만드신 겁니까.”

“응.”

“맛있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가 끓여 주신 죽과 매우 흡사합니다.”

“할머니?”

“예…. 이락 님도 연륜이 있으셔서 그런지 음식에서 깊은 맛이 납니다….”

“일부러 멕이는 거야?”

율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멕이다뇨?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이락은 헛웃었다.

“그래, 뭐. 네가 맛있다니 됐다.”

죽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율은 식사를 마친 후 나갈 채비를 서둘렀는데, 평소 입던 푸른색 의복을 입으려고 하자 이락이 옷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골라서 가지고 왔다. 거기에 갓끈과 비단신 또한 화려했다.

“이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네가 여기서 잘 먹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왕자가 돌아가서 네 어미에게 그대로 전할 게 아니냐.”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 더 따지지 못하였다.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는 걸까. 경대가 깨져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바다에 한 번 다녀오면 좋겠는데…. 그러나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여러 차례 물속에서 숨을 쉬려고 노력해 봤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차차 증세가 호전된다고 하였는데 그게 언제쯤일지…. 마음이 답답하여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이락이 저고리의 고름을 고쳐 매어 주다 손끝으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역시. 내 안목은 탁월해.”

“예. 옷이 참으로 곱습니다….”

“옷을 말한 게 아니야.”

이락은 돌아섰고 율은 눈만 끔뻑였다. 옷이 아니면 대체 뭐가….

“아….”

뒤늦게 율은 얼굴이 붉어져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그러다 방에 소중히 모셔 둔 등껍질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메고 갈까, 아니면 두고 갈까. 오랜 갈등 끝에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등껍질을 다락에 꼭꼭 숨겨 두었다.

집을 나서고 얼마가 지났을까. 시장을 지나던 중에 이락은 뜬금없이 상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율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은 불지만, 날씨는 맑았다. 의아하여 이유를 물으니 그가 무심하게 대답한다.

“곧 소나기가 내릴 것이다.”

“이리 맑은걸요?”

율은 그가 산 다홍색 우산을 펼쳤다. 신기하게 생겼구나. 바다에선 전혀 쓸 일이 없는 물건인데….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락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율은 민망하여 우산을 도로 접었다. 그런데 마을을 지나 금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도하자 이락의 말대로 하늘이 어둑어둑해졌고,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율은 이락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세상에, 비가 옵니다. 어찌 아신 겁니까?”

“오래 살면 저절로 깨우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것도 그중 하나지.”

“또 무엇을 깨우치셨습니까?”

율이 눈빛을 반짝이며 올려다봤고 이락은 그런 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흥분하여 흐트러진 모습도 좋았으나, 이처럼 말간 얼굴은 더 좋았다. 천진난만하게 보이면서도 묘하게 색기가 흐른달까. 본인은 알까. 영영 몰랐으면 좋겠는데.

“왜… 그리 보십니까.”

“예뻐서.”

율은 귀가 달아올라 딴청을 피웠다. 수컷에게 예쁘다니요…. 칭찬이 아니지 않습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우산을 펼치고 나란히 걷는데 제법 큰 우산이었음에도 빗줄기가 굵어지니 전부 막아 주진 못하였다.

우산이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자 율은 그것이 불편하여 이락을 불렀다.

“이락 님의 어깨가 다 젖습니다…. 똑같이 나누어 쓰십시오….”

“나는 건강하여 비를 맞아도 괜찮아.”

“저도 비실비실하진 않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락이 눈빛을 바꾸며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렇다면 오늘 밤 내 위에 올라타서 증명해 볼래?”

율이 질색하며 떨어지려고 하자 이락이 어깨를 잡아당겨 우산 안으로 다시 집어넣는다.

“농이었다. 서운하게 정색을 하고 그러냐.”

“어쩜 그리… 짐승 같으십니까….”

“짐승이지. 아무렴 내가 사람일까.”

“예전에는 사,”

말을 꺼내려던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를 살피니 이락이 웃으며 뒷덜미를 슥 만지고서는 우산을 다시 기울여 준다. 율은 미안하여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 가까워지니 거짓말처럼 비는 그치고 저 멀리 왕구가 뛰어나온다.

“큰형님. 오셨습니까. 방울아. 이게 며칠만이냐!”

왕구가 반가운 마음에 끌어안으려고 하자 이락이 율의 목덜미를 낚아채 뒤로 잡아당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왕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그들이 한 시진 전에 도착했습니다. 안에서 형님을 기다리는 중이고요.”

왕구의 말대로 집 주변에는 바다에서 온 수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율은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고, 왕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기진을 발견하였다.

“오셨습니까, 이락 님. 율아. 오랜만이구나.”

“왕자마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별일 없으셨는지요.”

기진이 웃는다. 그래, 나는 잘 지냈다. 너는…. 그가 말을 잇지 않고 율의 목 언저리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율은 당황하였다. 혹시 새 옷을 입고 달라진 모습 때문인가. 민망하여 안절부절못하는데 기진이 율의 어깨를 탁탁, 두드린다.

“보기 좋구나. 이곳 생활이 너에게 잘 맞는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이락 님이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그렇지요.”

기진이 이락을 돌아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 사람을 이리 아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답은 방율이 대신했다. 신경 쓸 것 없어.”

이락이 용궁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확인하는 사이 기진은 가족이 보낸 서신을 전해 주었다. 서신을 읽던 율은 울컥하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오신 겁니까? 식사는요? 식사는 잘 드십니까? 선이는 학당에 가고 있지요? 끝내 아버지에 대해서는 묻지 못하였는데 기진이 그런 율의 마음을 안다는 듯 다독였다.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다. 내 수시로 사람을 보내고 있으니 걱정 말거라. 다만….”

기진이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했기에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다만… 무엇입니까?

“네 어미가 깨어나서 너를 애타게 찾는 모양이다. 매일 울고만 있으니, 혹여 병세가 다시 악화하진 않을까 의원이 걱정하더구나.”

“아….”

율은 울컥하여서 할 말을 잃었다. 나를 찾으시는구나. 나를…. 마음이 아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락이 다가온다.

“물건은 다 확인하였다. 은자를 내줄 테니 챙겨서 돌아가라.”

이락의 말투가 다소 냉랭하였음에도 기진은 여전히 공손한 태도였다.

“예, 구명환의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아…! 율은 구명환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그것이 있으면 나도 바다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을 보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얼굴이라도 뵙고 오면 좋겠는데….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락을 쳐다보는데 그가 바로 외면한다. 율이 입을 꾹 다물자 눈치 빠른 기진이 나선다.

“이락 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이락의 시선이 기진에게 날아온다.

“별주부를 집에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 관직에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어린 나입니다. 가족들이 그리울 것입니다.”

이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 애는 몸이 좋지 않다. 바다에 갈 수 없어.”

기진은 곰들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제게 구명환이 있습니다. 먹으면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열흘 후에는 돌아갈 텐데, 구태여 지금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별주부의 어머니가 애타게 자식을 찾습니다.”

율은 둘을 번갈아 봤다. 보이지 않는 실 같은 것이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지기 직전인 느낌이다. 가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이락이 진심으로 싫어한다면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가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좋다. 허락하지. 대신 내일까진 돌아와야 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

예상치 못한 일이라 율은 뛸 듯이 기뻤다.

“이락 님!”

뛰어가 안으려다 흠칫하여 뒤로 물러나는데 이락이 피식 웃는다. 그리 좋으냐? 눈으로 묻기에 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락의 표정이 어딘가 묘했으나 율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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