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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2화 (32/102)
  • 32화

    여희는 올해 아흔아홉이 되었다. 그녀가 처음 이락을 만난 게 열 살이었나. 당대 최고라는 만신의 딸로서 여희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받아 신력 높은 무당이 됐다. 어린 시절 그녀는 이락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고, 그를 위해서 여태껏 많은 일을 해 왔다.

    “아닙니다.”

    “아니야?”

    “영이 맑은 것은 분명하나 이락 님의 귀인은 아닙니다.”

    흠, 이락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여희의 말은 틀린 적은 없었다.

    “게다가 저 아이 몸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무엇이?”

    “원래 있던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지금은 꼭꼭 숨어 있어 확인이 어렵습니다….”

    “여우가 내게 거짓을 말한 걸까?”

    “그자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본디 여우란 남을 속이고 농락하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까.”

    “농락하고 속이는 건 내 주특기라, 할 말이 없다.”

    이락의 말에 여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이락이 짓궂게 놀려 울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여희가 스물을 넘겨 아가씨가 됐을 때도 이락은 처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마음에 품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이었고 지금은 모두 추억이 돼 버린 이야기다.

    “저 아이가 이틀 뒤 떠난다고 하였습니까?”

    “그래.”

    “보내 주실 겁니까?”

    “그래야지.”

    “꼭 보내셔야 합니다.”

    이락이 웃었다.

    “무얼 걱정하는 게냐.”

    여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락 님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 아입니다. 곁에 두면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반드시 보내십시오.”

    이락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여희는 한 번 더 다짐을 받았고 이락은 그러겠노라고 그녀와 약조를 하였다.

    “이락 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어제 여희를 만난 일을 떠올리고 있는데 쥐방울의 목소리가 휙 머릿속을 가르고 들어온다. 이락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쥐방울을 바라봤다. 둘은 이미 한 시진부터 약재상이 모여 있는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율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다음 골목만 살펴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원해서 따라온 거니까.”

    율은 미안함을 웃음으로 대신하였다. 왕구에게 약재를 파는 거리가 있다는 걸 듣게 되어 혼자 오려고 했었는데 이락이 함께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약방과 의원을 번갈아 들러서 어머님의 병증을 설명하여도 대부분 난색을 보이기 일쑤였다.

    [환자를 만나 진맥을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증세만 듣고는 약을 짓기가 힘드네.]

    가끔 자기가 고칠 수 있을 거 같다고 호언장담하며 터무니없는 약값을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밖에서 지켜보던 이락이 들어와 못 고치면 네 팔을 잘라 가도 되느냐고 따지면 바로 말을 바꾸기도 하였다.

    마지막 골목 안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다른 곳보다 비좁고 지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거기다 말과 수레가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안에 있던 이들은 옆으로 갈라지기 바빴고 그 와중에 나이 지긋한 노인이 인파에 밀려 쓰러졌다. 다들 자기 챙기기 바쁜 와중에 율이 노인을 일으켜 세우고는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도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율은 수레에 치일 위기에 놓였다. 허겁지겁 도망치려는데 뒤에서 이락이 끌어당긴다. 조심해야지. 율은 제 허리를 감싼 팔을 내려다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수레가 다 지나갈 때까지 이락에게 안겨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앞뒤 상황을 보고 덤벼. 노인을 구하려다 네가 치일 뻔했어.”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등에 닿은 그의 가슴팍이 어찌나 단단한지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귀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더우냐.”

    이락이 귀에 대고 가까이 말하는 바람에 율은 흠칫하였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볼이 빨개졌어?”

    “더, 덥습니다.”

    “아니라며.”

    “…….”

    마지막 수레까지 지나가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옆으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길을 가기 시작하였고 율도 부리나케 이락과 떨어져 가운데로 왔다. 괜히 저 혼자 의식한 것 같아 손으로 부채질을 하여 달궈진 뺨을 식혔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마지막 약방은 문이 닫혀 있었다.

    율은 실망하여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더 둘러봐.”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이곳까지 모셔 올 수도 없는 일이고요.”

    율의 말에 이락도 수긍하였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시장 입구에서 율이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간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쫓아가려던 이락은 걸음을 멈췄다. 율이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다가 그것을 이락에게 내어 주며 웃는다.

    “뭐야.”

    “선물입니다. 그동안 보살펴,”

    율은 잠시 고민했다. 보살핀 건 나 아닌가. 밥해 주고, 청소해 주고, 빨래해 주고…. 하지만 그걸 따져서 무엇하겠나. 어차피 내일이면 헤어질 텐데. 그래도 정이 들었다고 용궁으로 돌아가면 이락이 종종 생각날 것 같았다.

    “지나갈 때 봤는데, 이락 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이락이 상자를 연다. 붓이다. 족제비 털로 만들어진 붓은 꽤 윤기가 흘렀다.

    “이별 선물이군.”

    율이 헤헤 웃었다.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듣자마자 이락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바뀐다.

    “떠나는 게 아주 즐거운 모양이다?”

    “아유, 당연한 것 아닙니까. 실은 그동안 부모님과 누이 걱정을 하느라 잠을 설친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돌아가니 조금 안심이 됩니다.”

    둘은 다시 왔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아픈 모친을 떠맡아야 하는데 그게 그리도 즐거우냐?”

    “가족인데 어찌하겠습니까…. 그래도 녹봉은 따박따박 나오니 먹고 사는 데는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요즘 용궁도 일자리가 없어 난립니다. 제가 시험을 칠 때만 해도 경쟁이 그리 치열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무척 세져서 어지간히 해서는 어림도 없다 합니다.”

    조잘조잘 떠드는 율을 이락이 지그시 내려봤다.

    “대단하구나. 가서 열심히 살아라. 누가 아냐. 네 왕자마마가 나중엔 너를 정승까지 올려 줄지.”

    빈정거림을 율은 칭찬으로 알아듣고 볼이 붉어졌다.

    “덕담 감사합니다.”

    이락이 노려봤으나 율은 눈치채지 못하였고 뭐가 좋은지 자꾸만 싱글벙글하였다. 그것이 이락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렇게 둘은 해가 질 무렵 거처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거처로 돌아온 다음 율은 이락을 위해 마지막 저녁을 준비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이제 육지의 채소를 다루는 일에 조금 능숙해졌는데, 아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그렇게 밥을 하여 이락의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니 그는 가부좌를 틀고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율은 밥상을 내려놓았다.

    “이락 님, 식사하십시오.”

    이락이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율이 나가려고 하자 이락이 그를 불러 앉혔다.

    “어디가?”

    “저는 왕구 형님이 오면 같이 먹을 겁니다.”

    “나하고 밥 먹는 게 불편하냐?”

    율이 애매하게 웃었다. 편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여태 밥은 왕구나 왕태하고 먹었다. 그게 편하고 이야기도 하고 즐거웠으니까. 이락과 밥을 먹으면 밥 먹는 내내 말 한마디를 하지 않으니 숨이 턱턱 막혔다. 율은 핑곗거리를 찾았다.

    “아까 먹은 곶감이 아직 소화가 안 됐습니다….”

    “앉아라. 너한테 줄 게 있다.”

    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락이 상자를 꺼내 내민다. 율은 그것을 얼떨결에 받았다. 뚜껑을 열어 보라고 눈짓을 하길래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무언가가 들어 있다.

    이게 뭐지. 동그란 그것은 아기 주먹보다 작은 크기였는데, 색은 짙은 갈색을 띠었으며 표면은 주름이 진 것처럼 고르지 못하였다. 율이 의아하여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 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맛을 봐라.”

    율이 아무 의심 없이 혀끝을 가져다 댔다. 아무 맛도 안 나는데?

    “내 고환이다.”

    혀를 내밀고 있던 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고환이라고.”

    으엑, 하고 그것을 던지니 이락이 탁 잡아채서는 다시 상자에 예쁘게 모양을 잡아 넣어 놓는다. 율은 손으로 혀를 문지르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고 이락은 짓궂게 웃었다.

    “어떠냐. 직접 본 소감이? 아직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율은 충격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할 수 있다면 이락의 물을 빼앗아 입을 헹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정말 고환이 있다니. 세상에 고환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니.

    율은 충격으로 한참 말을 잃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과 앞에 놓인 고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근데 어째서 저렇게 딱딱하지. 진짜 고환이 맞는 걸까. 태어나서 토끼 고환이란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으니 의심이 생긴다. 율의 심중을 알아챈 이락이 먼저 떠보듯 말했다.

    “그걸 가르면 안에 백색의 씨물 주머니가 나온다. 빼서 용왕에게 먹여라. 그럼 차도가 있을 테니까.”

    율은 여전히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못 믿는 눈치구나?”

    “얼떨떨하여 그럽니다…. 정말 고환을 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여서….”

    “그럼 네가 직접 확인하는 것은 어떠냐.”

    율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

    “네가 직접 내 것을 만져 크기와 모양을 비교하면 될 것 아니야.”

    이, 짐승이 뭐라는 거야. 율은 자기가 잘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러자 이락이 한심하게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그래야 너도 할 말이 있을 것 아니냐. 네가 검증하여 가져왔다고 하면 그들도 믿을 거고, 그럼 네 왕자마마의 위신도 서겠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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