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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1화 (31/102)
  • 31화

    아침밥을 짓고 마루에 앉아 걸레질하고 있는데 왕태가 커다란 지게를 지고 나타났다. 가만 보니 지게 아래에는 나무가 덧대어져 있고 그 위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키가 작았으며 몸에는 동물의 뼈로 보이는 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고 눈까지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율은 노인의 행색이 특이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이락이 나타나자 노인은 지게에서 내려와 예를 갖춰 인사를 하였다.

    “여희, 이락 님을 뵈러 왔습니다.”

    이락이 마루에 서서 노인을 바라봤고, 율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이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니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노인이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다가 율과 시선이 마주쳤다. 제대로 본 노인의 눈은 검은 동공이 없이 거의 흰색에 가까웠다. 놀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율에게 다가왔다.

    “이리로.”

    오라고 손짓을 하기에 율은 이락을 쳐다봤다. 그가 가 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낮추자 노인이 율의 손을 붙든다. 쭈글쭈글 주름이 진 손은 나무껍질처럼 뻣뻣하였다. 하얀 눈이 율을 유심히 쳐다본다. 장님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마치 율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 눈을 계속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손을 놓아준 그녀는 왕태의 도움을 받아 이락이 있는 마루로 올라갔다. 그녀가 벗어 둔 신발 역시 손바닥만 한 크기로 아주 작았다.

    “오랜만에 봤으니 차나 한잔하지.”

    노인과 이락이 방으로 사라졌고 혼자 남은 율은 조금 전 노인이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별거 아닌데도 노인과 대면한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다시 마루를 닦으려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져 기웃거리려고 하자 왕태가 딱 막아선다. 율은 멋쩍은 웃음을 짓고 하는 수 없이 걸레와 빨랫감을 챙겨 들고는 개울가로 향하였다.

    퍽퍽퍽, 개울가에 앉아 방망이질하던 율은 흐르는 땀을 닦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혀로 문질렀다. 요 며칠 멍하게 있으면 그날 대나무 숲에서 이락과 입을 맞춘 기억이 떠올랐고 기분도 이상해졌다.

    생각하지 말자. 자꾸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다시 방망이질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돌아보니 왕구가 빨랫감을 한가득 가지고 온다. 율을 입을 벌리고 그것을 쳐다봤다.

    “그것이… 다 무엇입니까?”

    “큰형님 옷이다.”

    “세상에…! 또 있었습니까?”

    율은 왕구가 내려놓은 옷들을 뒤적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길래 단벌 신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똑같은 걸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는 것이었다.

    “형님이 워낙 깔끔하시다.”

    율은 울상을 하며 분노의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직접 빨래도 안 하는 분이, 응? 옷은 또 왜 이렇게 벗어 놓으신답니까!”

    빨랫감을 이락이라고 생각하고 두들기니 때리는 맛이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육지에 왔나. 신세 한탄 하다가 앞으로 이틀만 버티면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환에 대해 떠올렸다. 정말 있긴 한 걸까. 여태 구경조차 못 하였는데, 그때 가서 또 무슨 꾀를 부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 전에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고 여길 떠나려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드는 와중에 왕구가 뒤에서 어깨를 꾹꾹 주물러 준다.

    율은 빨래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괜찮습니다, 형님. 힘은 들지만 할 만합니다.”

    이번엔 목덜미를 눌러 준다. 덩치와는 달리 야무진 손길에 율은 뻐근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에이, 그만하십시오. 형님도 일하고 오셔서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손이 자연스럽게 율의 귓불을 만진다. 율은 오싹하여 방망이질을 멈췄다. 형님? 하고 슬그머니 돌아보다 기함을 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왕구는 어디 가고 대신 이락이 앉아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언, 언제 오셨습니까?”

    “아까부터.”

    “깜짝 놀랐습니다….”

    율은 조금 전 이락이 만진 귀를 문질렀다. 불에 덴 것도 아닌데 뜨겁다. 혹여 티가 날까 싶어 얼른 돌아앉아서는 두들기던 빨래를 물에 헹궜다. 며칠 전 입맞춤을 했던 일이 또 생각나 괜히 의식이 됐다. 앞만 쳐다보면서 제 할 일을 하는데 이락이 곁에 앉아 턱을 괴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율은 끝끝내 모른 척하였다.

    “쥐방울.”

    “예….”

    부르고 나서는 대답이 없다. 율이 고개를 돌려 봤더니 이락이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 뭐가 있나. 목을 쭉 빼고 봤으나 율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무엇이 있습니까?”

    “안 보여?”

    “예….”

    흠, 이락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 건너에서 혼 하나가 너를 보고 있다.”

    율은 흠칫하여 그쪽을 다시 쳐다봤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혼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귀신이 달려들까 봐 겁이 나서 엉덩이를 살짝 움직여 이락의 곁으로 붙어 앉았다.

    “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나무 숲에 그 귀신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열렸다는 영안이 닫혔나 봅니다.”

    이락이 헛웃었다.

    “영안이 곳간 문인 줄 아느냐? 열었다 닫았다 네 마음대로 하게.”

    “그럼… 아직 열려있단 겁니까?”

    “나는 모르지. 알 만한 자가 하나 있긴 한데. 궁금하면 가 보자꾸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이틀 뒤에 용궁으로 돌아갈 텐데요.”

    이락은 반응이 없었고 율은 그에게 넌지시 속내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락 님….”

    “응.”

    “말씀하신 고환은 언제… 보여 주실 겁니까?”

    “왜. 내가 주지 않을까 봐 걱정돼?”

    “저한테만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뭘.”

    이락이 빤히 쳐다봤고, 율은 입을 달싹이다 속내를 꺼냈다.

    “없지요?”

    하. 이락이 웃고 나서는 정말 궁금하냐고 물었다. 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럼 이리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한다. 율은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뒤로 주춤 물러나 앉았다. 저번에도 시키는 대로 하였다가 당하였지 않은가. 그러자 이락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율은 그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없다면 지금이라도 솔직히 털어놓으십시오….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락이 팔짱을 끼고 율을 내려다봤다.

    “왜 마음이 바뀌었어? 용궁에서 당장 고환을 잘라야 한다, 간청하던 게 너 아니었나.”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되돌려 놓고자 하니 저에게만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말인즉, 고환이 없어도 모른 척 넘어가 주겠다?”

    고민하던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락 님이 고환을 주지 않으면 군사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저는… 이곳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물론 용왕님의 병환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있겠지요. 꼭 이락 님의 고환이 아니더라도요.”

    입을 꾹 다물고 내려다보던 이락이 슬쩍 웃었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그날 네 왕자와 약속을 하였다.”

    “무슨 약속을요?”

    “고환을 내주고 원하는 걸 받기로.”

    그럼 정말 고환이 있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으나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이젠 혼란스러워지려 한다. 그래…. 세상에 별별 일들이 다 있고, 고환이 3개인 동물이 있을 수도 있겠지.

    “이락 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락은 침묵하였고 율이 대신 말하였다.

    “혹시… 용궁과 무역을 트려는 것입니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그것은… 불법 아닙니까?”

    육지와 바다의 교류는 금지되었고 그것을 어길 때에는 크게 벌을 받는다고 들었다.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이락이 웃는다.

    “내가 하는 일 중 합법한 것이 있을 것 같으냐?”

    “…….”

    “무역까진 아니어도 용궁의 것들을 이곳에서 팔 생각은 있다. 원래 구하기 힘든 것일수록 돈이 되는 법이니까.”

    “나라님이 아시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락뿐인가. 기진도 마찬가지였다. 눈물 산호는 육지뿐 아니라 어디든 반출을 허락하지 않는 품목이다. 이미 그것을 이락에게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용왕이 깨어나면 날벼락이 떨어질 텐데….

    “용왕께서도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그건 깨어났을 때 이야기고.”

    그는 용왕이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고환을 먹고도 용왕이 깨어나지 않는다? 용왕의 소멸은 곧 기진이 다음 왕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혹시 둘이 모종의 거래라도 한 걸까. 이락은 몰라도 기진 마마는 그럴 분이 아닌데. 저를 천대하던 부친이지만 여태까지 얼마나 효심을 다하였던가.

    딱, 이락이 율의 눈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흠칫 놀라 율이 쳐다보자 이락이 눈짓으로 냇가를 가리킨다.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율은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 빨던 옷들이 냇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가 옷을 건지다가 돌에 발이 걸려 벌러덩 미끄러졌다. 어푸, 뒤를 돌아보니 이락이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율은 원망스러워 외쳤다.

    “보고 있지만 말고 도와주십시오!”

    “나는 발이 젖는 게 싫다. 그만 갈 테니 하나도 빠짐없이 다 건져와라.”

    그러더니 홱 돌아서 가 버린다. 율은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째려보다 다시 일어나 옷들을 주웠다. 그런데 저만치 가던 이락이 돌아본다. 마음이 바뀌어 도와주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가 한마디를 던진다.

    “잃어버리면 벌당 한 대씩 엉덩이를 때려 줄 테다!”

    율은 눈을 흘기며 젖은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틀만 참자. 이틀만. 이틀이면 나는 용궁으로 간다. 그러고 나서는 옷들을 챙겨 휘청거리며 물 밖으로 첨벙첨벙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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