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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0화 (30/102)
  • 30화

    “인고초다!”

    율은 울타리에 매달려 안쪽을 바라봤다. 어머니의 병환에 쓸 약초를 캐러 다녔는데 귀하디귀한 약초가 울타리 안쪽에 피어 있었던 것이다.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듯 그곳은 풀이며 꽃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 있었다.

    버려진 땅인가. 율은 울타리를 넘어 그쪽으로 갔다. 풀들을 헤치고 걸어가 보니 노랗고 작은 꽃 한 송이가 땅에서 솟아 올라와 있다. 율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것을 캐었다. 조심스럽게 망태기에 담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돌아보던 율은 너무 놀라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으악!”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 저를 쳐다보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겁에 질려 도망치려던 순간 목덜미가 붙들렸고, 질질 끌려갔다. 놓아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저는 맛이 없습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 먹어 보면 알겠지.”

    그러더니 얼굴을 붙들고 혀를 내밀어 게걸스럽게 핥는다. 율은 놀라고 경악하는 표정으로 괴물을 떼어 내려 발악했다. 살려달라 애원을 하자 이번엔 물컹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헤집어 놓는다. 놓아주십시오. 이러지 마십시오. 거친 손길은 옷 안으로 파고들어 살갗을 어루만졌고 소름 끼치는 감각에 어떻게든 벗어나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 아이를 낳아라. 아이를 셋만 낳아 주면 너를 용궁으로 보내 주마. 그때까지 네 등껍질은 내가 맡아 두겠다.”

    이것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헛소리란 말인가.

    “저, 저는 수컷입니다!”

    요괴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율의 바지를 벗기더니 제 바지도 훌러덩 벗는다. 눈앞의 광경에 율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요괴의 양물 크기도 놀라운데 그 아래로 고환이 3개가 달린 것이 아닌가.

    그 사이 요괴가 율의 다리를 벌려 삽입을 하려고 움직인다. 엉덩이로 파고드는 감각이 어찌나 생생한지 기겁하여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싫습니다. 이런 건 싫습니다! 못생긴 요괴하고는 더더욱 하기 싫습니다!”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요괴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락이 나타난다. 율은 조금 전 요괴를 보았을 때 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

    “이제 잘생겨졌으니 됐지?”

    이락이 위에 올라타 허리를 움직이니 양물이 짓눌려 요의가 느껴졌다.

    “이, 이락 님! 이러지 마십시오!”

    “네 덕분에 마법이 풀렸다. 내 원래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니 너하고 혼인을 해야겠다.”

    “무슨 혼인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저는 연모하는 이가 따로 있습니다.”

    “누구? 왕자?”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이락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곧 그가 옆에서 무언가를 집어 든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기진의 머리다. 순간, 허공을 노려보던 기진의 눈동자가 아래로 또륵 움직이더니 율을 쏘아보며 고함을 친다.

    [너 때문이다!]

    버둥거리던 율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헉, 숨을 몰아쉬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야 꿈이란 것을 깨달았다. 마른세수하고 나서는 곁에 놓아둔 물그릇을 들어 목을 축였다.

    무슨 이런 꿈을 꾼단 말인가.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에 책들이 널려 있다. 마지막으로 읽다 잠든 페이지를 확인하니 악인이 주인공을 향해 ‘너 때문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다. 헛웃음을 내쉬고는 그것을 치웠다.

    그 밖에도 여러 종류의 책들이 굴러다녔다. 이야기를 읽다가 잠들었는데 꿈에 이런 식으로 각색되어 나올 줄은 몰랐다. 거기다 이락은 왜 나온 건지. 꿈이라고 하여도 영 찝찝하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율은 얼굴이 굳었다.

    “어…?”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보던 율의 뺨이 희게 질렸다. 축축한 느낌에 처음엔 소변을 지린 건가 하였는데 뒤늦게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열다섯에 첫 몽정을 하였고 그 뒤로는 한 적이 없었는데…. 충격으로 넋이 나가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속곳을 갈아입었다.

    누구한테 들키기 전에 옷을 빨아야 할 것 같아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모두 잠이 들었는지 불이 꺼져 있고, 마당에는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율은 우물가로 살금살금 가서는 대야에 물을 받아 그것을 빨았다.

    그러고 나서는 찝찝하여 남쪽을 향해 침을 세 번 뱉었다. 퉤, 퉤, 퉤. 용궁에서는 나쁜 꿈을 꾸면 이리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런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깨끗하게 속곳을 빨고 나서는 그것을 가지고 와 누가 볼세라 방에다 널었다.

    후, 불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하려 누웠으나 한번 깬 잠은 쉽사리 오질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던 율은 다시 불을 켜고는 일어나 앉았다. 보다만 책들 사이로 붉은 표지의 책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승전?

    내용은 대략 주인공 맹이라는 어린아이가 저승사자의 실수로 저승에 가 겪게 되는 이야기였다. 저승에 사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꽤 흥미진진하여 한참을 읽던 중 중간에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이 있었다.

    [염라의 눈은 봉황을 닮아 옆으로 길게 찢어졌으며, 코는 오뚝하고 입술은 붉은색을 눈동자는 검은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졌다. 그를 한 번 본 자는 결코 잊지 못하였고 천계를 통틀어 인물만큼은 으뜸이었다. 그러나 염라는 태어날 때부터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다. 다른 신들과 반목하는 일이 잦았고 하루는 천계가 뒤집힐 만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천제는 염라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를 지상으로 추방한다.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빼앗고 다를 이, 떨어질 락, 으로 부르게 하였다.]

    율은 눈을 의심하였다.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은 부분을 마쳤으나 염라의 등장은 그것이 전부였다. 어찌하여 이름이 똑같은 것일까. 우연의 일치인가.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하다 책을 내려놓고 잠을 청하려고 누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들어가도 됩니까?”

    율은 아침 댓바람부터 이락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락이 자리에 앉아 붓글씨를 쓰고 있다. 정갈한 서체에 율은 감탄하였다. 그림도 그렇더니 글도 빼어나구나.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이락이 고개를 들어 율을 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밥을 해야 할 시간 아니냐.”

    율은 자리에 앉으며 책상 위에 이락에게 빌린 책을 내려놓았다.

    “왜 벌써 가져왔어? 그새 다 읽었어?”

    “어떤 것은 읽다 말고, 어떤 것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그 말에 이락이 웃었다.

    “뭘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율은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저승전이요.”

    “취향이 특이하구나.”

    “읽고 나서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뭐가 궁금하더냐.”

    “중간에 염라대왕에 대해 나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염라의 용모를 서술한 부분이 이락 님과 매우 흡사하여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 염라가 지상으로 추방되어 떨어졌고 그 이름이 이락이라는 겁니다.”

    이락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그게 왜.”

    “이락 님과 비슷한 인물이 소설에 나오는데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왜 그런 줄 알려 줄까?”

    “왭니까….”

    “내가 썼거든.”

    율이 멍청한 얼굴로 예? 물으니 이락이 손가락 끝으로 저승전의 윗부분을 툭툭 두드린다.

    “이 책을 내가 썼단 말이다.”

    헉. 율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입니까?”

    이락은 턱을 치켜들고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당시 인간계과 수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었지.”

    율은 놀라다 못해 감탄하였다. 세상에….

    “돈도 어마어마하게 쓸어 담았다. 상상도 못 할 만큼.”

    율은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 집은 왜 이렇고, 도적질은 왜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자 이락이 마지막 글자를 적고는 그것을 들어 햇볕에 비춰 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종이를 한쪽으로 홱 치워 버린다.

    “버신 돈은… 다 어디에 쓰셨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으니 이락의 눈빛이 흉흉해진다.

    “몽땅 잃었다.”

    “예?”

    “노름으로 반 잃고, 반은….”

    “반은?”

    “사기당했어.”

    “아….”

    “물 건너온 옥장판을 싸게 판다길래 거금을 들여 모두 사들였는데, 나중에 보니 가짜 옥이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지 이락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인다. 그 새끼를 잡아 찢어 죽이지 못한 게 아직도 여한으로 남는구나. 처음엔 농을 하는 것인가 하였는데 표정을 보니 진심인가 보다. 세상에. 이런 자도 사기를 당하는구나. 율은 새삼 사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이락의 인간적인 면을 느껴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내가 사기당한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느냐.”

    “아니요…. 저는 이락 님이 피도 눈물도 없는,”

    율은 아차하여 괜히 눈가를 훔쳤다. 아, 웃다 보니 눈물이 난 거 같습니다. 말을 얼른 돌리고는 이락이 쓰다 만 종이를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이락 님은 재주가 많으신 거 같습니다…. 그림도 그리시고 소설도 쓰시고….”

    이락이 웃었다.

    “다음엔 네가 나오는 글을 써 줄까?”

    율은 손을 내저었다. 아유, 저 같은 걸 어디에 씁니까.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정말 써 준다고 하면 어쩌나 잠시 고민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제목은 뭐라고 하지? 방율전? 음, 그건 조금 평범한 것 같은데…. 혼자 상상하며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락이 저를 빤히 보고 있다. 율은 민망하여 헛기침하였고 이번엔 이락이 웃었다.

    “바보 같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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