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고환을 두고 와? 얼토당토않은 말에 대신들은 혀를 찼다. 저자가 우리를 놀리려고 작정을 했구먼. 내가 뭐랬나. 그냥 없애서 고환만 빼앗자고 하였지 않나. 왕자마마가 말리지 않았다면 진작 그랬을 것을. 듣고 있던 율은 비로소 이락을 쳐다봤다. 그는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토끼는 원래 세 개의 고환을 가지고 있어. 그중에서 제일 튼튼한 고환은 따로 있는데 그것이 몸에 좋다고 소문이 나 노리는 자들이 무척이나 많지. 그래서 평소엔 떼어서 나만 아는 장소에 꼭꼭 숨겨 둔다. 신령이라는 자가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나 보군.”
술렁이는 가운데 대신들의 시선이 율에게 쏠렸다.
“별주부. 사실인가. 정말 토끼의 고환이 세 개냐 말이야!”
고래 대신이 다그쳤고, 율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락을 힐긋 올려다봤다.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눈빛은 살기가 등등했다. 율은 그것이 이락의 계략임을 깨달았다. 이락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원치 않지만 도망가게 둘 수는 없었다.
“아, 아닙니다. 수인의 몸은 인간과 같습니다. 고환을 세 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듣지 못하였습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은 하였고?”
율은 할 말을 잃었다. 확인이라…. 아니, 그것을 어찌 확인한단 말인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락이 한마디 거든다.
“쥐방울이 탄신일이네 뭐네 핑계를 대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면 내 그것을 챙겨 왔을 텐데. 나도 금전이 필요하고 아쉬운 대로 지금 가지고 있는 두 개 중 하나를 내어 주는 것이 어렵진 않으나, 그랬다가 너희 왕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나를 원망할 게 아니냐.”
다들 근심에 사로잡힌 모습인데 유독 기진만 태연한 표정이다.
이어서 대신들이 서로 앞다투어 의견을 내놓았다.
“저자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합니다. 고환을 내놓기 싫으니 거짓말을 하는 게지.”
“하지만 참말이면 어쩌려고 그러나. 우리는 눈앞에서 기회를 놓치는 걸세.”
“근데 정말 효험이 있긴 하답니까. 저는 아직도 의문이 듭니다.”
“아까 저자의 양물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나는 다리에 팔뚝이 매달린 줄 알았네.”
“그럼 어찌합니까. 이대로 돌려보내자고요? 아니면 지금 죽이자고요?”
좀처럼 의견이 모이지 않는 가운데 잠자코 있던 기진이 앞으로 나섰다.
“별주부.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곁에서 봤으니 알 것 아닌가. 이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맞겠는가.”
주저하던 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 지금 고환을 잘라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이락이 웃으며 거리낌 없이 허리끈을 풀었다. 그럼 당장 잘라 가라. 대신 약효가 없다고 나를 원망해선 아니 된다. 원망할 거면 이 자라를 원망해. 대신들의 혼란스러운 표정과 기진의 고민 앞에서 율은 한 번 더 고개를 조아리며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를 원망해도 좋으니 지금 잘라 내십시오. 고환이 3개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락은 율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런. 그 사이 꽤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착각이었나 봐?”
율은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고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락의 처지가 안타깝다. 하지만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 3번째 고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옹다옹하던 대신들은 기진을 쳐다보며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려 주길 바랐다.
“좋아. 자네의 말을 믿고 열흘의 말미를 주지. 단, 우리의 병사를 자네와 함께 뭍으로 돌려보내겠네.”
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마, 그것은! 그러나 기진은 손짓으로 방율을 제지하였다. 율은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락이 묘한 표정으로 기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좋아, 나도 청이 있는데.”
“말해 보게.”
“여기 있는 자라도 함께 데려가겠다.”
율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갑자기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건데? 놀라서 이락을 쳐다보자 그가 서늘하게 웃는다.
“여러모로 쓸모도 많을 것 같아서.”
율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기진에게 눈빛으로 애원했다. 제발요. 왕자마마. 지금 저를 보내시면 저는 죽습니다. 이들은 이락이 어떤 자인지 상세히 모르지 않는가. 필시 뭍으로 가자마자 복수를 할 것이다. 호랑이도 찢어 죽인 적이 있다고 왕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기진이 애타는 율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바로 입을 뗀다.
“별주부는 먼 거리를 다녀오느라 지쳤을 테니 다른 자를 보내도록 하지.”
“아니, 나는 여기 있는 쥐방울을 데려가고 싶은데?”
둘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율은 죽을 맛이었다. 더불어 대신들은 어차피 한 번 다녀온 거 두 번 못 다녀오겠냐고, 그래도 그사이에 정이 붙었나 보다고, 이참에 토끼를 잘 설득해 보라고 등을 떠민다. 율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기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하오. 대신, 이틀마다 한 번씩 뭍으로 병사를 보내 별주부의 상태를 확인할 것이오.”
이락이 입을 꾹 다문 채 웃고만 있자 기진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러니 절대 손끝 하나 대선 아니 되오.”
***
아아, 율은 얼굴을 감싸고 궁궐 기둥에 머리를 쿵, 쿵 찧었다. 이대로 죽을까. 또다시 육지로 갈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토끼가 나를 산채로 찢을 게 분명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기진이 이락을 위하여 연회를 준비했고, 대신들까지 합세해 궁은 한마디로 잔칫집 분위기였다. 다들 속이 편하시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렇게 신나게 떠들 수 있단 말인가. 이락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이젠 자신의 안위가 걱정된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왜 여기 있어?”
율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진이 서 있었다. 율은 의복을 가다듬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님의 병환이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기진이 가까이 다가와 율의 두 손을 붙들었다.
“내 아까는 정신이 없어 너에게 고생하였다, 말 한마디 못 하였구나.”
따뜻한 온기에 불안함이 녹아내린다. 율은 귀가 빨개졌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가 걱정한다는 것을 안다.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으니 이해해다오. 뭍으로 가도 내 병사를 보내어 너의 안부를 확인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마마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자 기진이 웃는다. 달달한 미소에 율은 잠시 넋을 놨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단에 쌓인 것을 내밀자 기진이 그것을 바라본다.
“이게 무엇이냐?”
“마마께 잘 어울릴 것 같아 육지에서 샀습니다….”
기진이 비단을 풀어 보더니 이번엔 화사하게 웃는다.
“갓끈이구나.”
“색이… 마음에 드십니까?”
“응. 내가 좋아하는 빛깔이다.”
“다행입니다!”
기진을 물끄러미 보던 율은 그의 어깨너머로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언제 나타났는지 이락이 담벼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기진의 시선 또한 율을 따라 이락에게 당도하였다. 이락은 느긋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토 선생. 어찌하여 나왔소?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신경 꺼.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자라가 눈에 띄길래 걸음을 멈춘 것뿐이니까.”
율이 눈짓을 보냈다. 왕자마마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락이 보란 듯 턱을 치켜든다. 뭐. 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이다. 이락의 시선은 기진이 들고 있던 갓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쥐방울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를 피해 주겠어?”
기진이 율을 쳐다본다. 율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음 같아선 싫다고 당장 내빼고 싶었으나 어차피 육지로 함께 돌아가야 하는 사이다.
“마마,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혹시 곤란해지거든 소리를 지르거라.”
기진이 말한 곤란한 경우가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끼는 바보가 아니다. 나를 찢어 죽인다면 그건 육지에 당도하는 순간이지 지금은 아닐 거다. 율은 애써 미소를 보였고 기진은 내관을 데리고 다시 연회장 쪽으로 사라졌다. 기진이 사라지고 둘만 남게 되자 이락이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율은 긴장하여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죄를 하였는데도 반응이 없다. 율은 고개를 들어 이락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락이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율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어찌하여 그냥 가십니까….”
“왜. 너를 여기서 죽이기라도 하랴?”
“제가 이락 님께 잘못을 저질렀으니 여기서 당장 죽인다고 하여도 원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말은 잘하네. 그럼 지금 죽일까?”
“하지만 죽고 싶진 않습니다….”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율을 돌아봤다.
“아까는 겁도 없이 내 고환을 자르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막상 육지에 나와 함께 갈 생각을 하니 후회가 되는 모양이지?”
율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을 속였으니 내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럽겠는가.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되어도 율은 그의 고환을 자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락은 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겁에 질려 뒷걸음치던 율은 길이 막혀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하였다.
“내 너한테 비밀 하나 알려 주랴?”
율은 고개를 들어 이락을 쳐다봤다. 비밀…이요?
“실은, 나는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다.”
“예…?”
“아주 오래전 남해에 사는 자라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지. 간을 내어놓으라 하더군.”
처음 듣는 소리다. 하지만 율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도 똑같이 했다.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여 위기에서 벗어났지. 그리고 자라와 함께 육지로 갔어.”
율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니 이락이 말을 멈추고 바로 코앞으로 얼굴을 디민다.
“그 자라가 어찌 되었는지 아느냐?”
겁에 질린 율은 몸을 옹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이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율의 턱을 손으로 확 움켜쥐었다.
“궁금하지 않아?”
공포에 질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두근댔다. 율은 턱이 붙들린 채 입술만 뻐끔뻐끔 움직였다.
“어, 어찌 되었는데요…?”
“자라로 변한 순간 불에 구워 버렸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락의 눈빛이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이번엔 널 구워 먹을 차례구나.”
히익, 율은 기겁하여 이락의 어깨를 밀쳐 내고 털썩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보니 여전히 이락의 눈이 불에 타는 듯 온전한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율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오, 오지 마십시오. 저리 가십시오! 병사를 부를 겁니다! 눈물이 그렁하여 꽥꽥 고함을 치자 이락이 내려다보며 산뜻하게 웃는다.
“기대하마. 네가 얼마나 맛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