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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14화 (14/102)
  • 14화

    반나절을 걸어 강가에 도착하였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율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정체 모를 짐승에게 습격당했던 꽃밭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찔할 정도로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저와는 달리 이락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말짱하였다.

    둑에 올라 주변 풍경을 눈에 담던 율은 이락을 다시 바라봤다. 그는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렌다거나, 떨린다거나 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는 도중 율은 그만 돌부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휘청였다. 그때 이락이 팔을 붙들어 넘어지는 것을 잡아 줬다.

    “조심해. 어딜 보고 걷는 것이야.”

    “감, 감사합니다.”

    민망하여 팔을 슥 빼고는 비탈길을 마저 내려가 강가에 당도하였다. 잔잔한 물이 흐르는 가운데 강 주위가 처음 왔던 날과 마찬가지로 조용하다. 율은 주변을 한번 살펴보고는 이락에게 다가갔다.

    “출발하시기 전에 약을 드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락이 고개를 까닥였고 율은 소매 주머니에서 약을 하나 꺼내었다. 껍질을 벗겨 내자 붉은빛을 띠는 약이 하나 나온다. 구명환이었고, 바다에 사는 생물을 뭍에서, 뭍의 생물은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주는 약효가 있었다.

    “이걸 씹어서 삼키십시오.”

    이락이 아, 하고 입을 벌렸고 율은 약을 쥔 채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지었다. 어서 넣으라고 눈짓을 하길래 뒤늦게 알아채고는 이락의 입에 조심스럽게 약을 넣어 주는 순간 이락이 앞니를 딱, 소리 나게 다문다. 으악! 율은 기겁하여 손을 거뒀고 동시에 이락이 짓궂게 웃었다.

    “노, 놀랐습니다!”

    “네 얼굴이 경직되어 있길래 장난을 좀 쳤다.”

    “제, 제가요?”

    “그래. 강제로 어디 끌려가는 표정이잖아.”

    율은 뜨끔하여 물에 슬쩍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봤다. 물결이 일렁여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이락이 본 것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율은 자꾸만 밀려오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털어 내고 어떻게든 자신의 본분만 떠올리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꼭꼭 씹어 삼키십시오….”

    “맛이 없어.”

    “그래도 삼키셔야 합니다.”

    꿀꺽. 이락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다 드셨으면 이제 토끼로 변하십시오….”

    그 말에 이락의 눈썹이 삐죽 올라간다. 뭐?

    “토끼로 변하시면… 제가 안고 용궁까지 헤엄쳐 가겠습니다. 그게 빠를 것입니다.”

    흠, 이락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육지에 사는 그가 물속에 적응하여 움직인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율이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자 이락이 마지못해 모습을 탈바꿈한다. 갑자기 모습이 사라져 놀랐는데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옷 사이에서 무언가 꼬물꼬물 기어 나온다.

    세상에나! 솜뭉치처럼 작고 하얀 토끼가 코를 찡긋거리며 율을 올려다봤다. 율은 입을 틀어막은 채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실물로 본 토끼는 도감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귀여웠으며 뽀송뽀송한 느낌을 주었다.

    귀여워. 정신이 팔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만지려 하는데 토끼가 앞발로 율의 손을 툭 친다. 쳐다보는 눈빛이 건방진 놈.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아, 뒤늦게 이것이 이락임을 깨달은 율은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이락 님. 너무, 귀….”

    토끼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인다. 율은 한 번 더 사과한 뒤 급한 대로 이락의 옷을 챙기고 토끼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솜뭉치 같은 게 폭 안겨 있으니 더 귀엽다. 왕구가 귀여운 것만 보면 환장한다고 하였는데,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토끼를 단단히 안은 율은 강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물속으로 완전히 잠겨 헤엄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토끼의 안위를 한 번씩 살폈다. 우려했던 거와는 달리 평온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얼마를 헤엄쳤을까, 강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 율의 눈앞에 저 멀리 자신이 사는 도성이 나타난다. 도성 입구에는 커다란 집게발을 가지고 있는 문지기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성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별주부, 방율. 용왕님의 명을 받들어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나이다.”

    율이 품 안에 든 토끼를 내보였다. 그 사이 토끼는 잠이 들어 눈을 감고 쌕쌕 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자는 것도 이렇게 귀여울 수가. 넋을 놓고 있는데 경비병들이 율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며 어딘가로 신호를 보낸다.

    성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용궁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뜀박질을 시작했다. 율은 다시 이락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구명환에 잠드는 약까지 섞었으니 당분간은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얼른 이락을 데리고 대신들을 만나야 한다.

    무사히 궁으로 들어가자 내관이 율을 마중 나온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십시오. 내관을 쫓아 걸음을 서두르던 율은 편전 입구에 멈춰 섰고 품고 있던 토끼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가만히 서 있으니 내관이 어서 오라며 재촉한다. 율은 마음을 굳히고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곳에는 문지기들에게 연락을 받은 대신들이 있었다. 율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별주부를 향해 모여들었다.

    “별주부, 방율. 분부하신 대로 토끼를 데리고 돌아왔나이다.”

    “어서 오게 별주부. 우리가 자네를 얼마나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줄 아나.”

    “진짜 토끼를 구해 오다니. 하하, 역시 자네는 훌륭한 인잴세. 어떻게 이렇게 빨리 데려올 수 있었단 말인가.”

    “어서 토끼를 보여 주게. 품에 있는 그것인가.”

    율은 망설임 끝에 토끼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대신들이 신기하여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한다. 생각보다 귀여운걸. 보자, 고환이 잘 붙어 있나. 문어 대신이 토끼의 다리 사이를 슥 벌려 보려고 하는 순간 토끼가 감고 있던 눈을 푸스스 뜬다.

    다들 놀라 뒤로 물러섰고 동시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토끼를 향해 창을 겨눴다. 율은 기겁하여 토끼를 냉큼 품에 다시 안았다.

    “눈을 뜬 것뿐입니다! 약 기운에 아직은 탈바꿈하는 것이 어려운,”

    펑, 하며 졸지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락이 율을 덮쳤다. 율은 알몸으로 제 위에 있는 이락을 보고는 기겁을 했고 이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율을 봤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이락 님!”

    병사들이 일제히 몰려와 창을 겨누는데도 이락은 고개를 좌우로 느긋하게 꺾으며 여독을 풀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동시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율은 그것이 이락의 알몸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궁녀들은 얼굴이 빨개져 손으로 눈을 가렸고, 대신들은 놀라서 저마다 한마디씩을 보탰다.

    “저, 저것이 가능한 크기란 말인가.”

    “짐승 같은 놈!”

    “짐승이 맞긴 하지요. 다산의 상징이라더니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망측해라. 궁녀들도 있는데, 내관들은 무엇 하느냐. 어서 저자의 몸뚱이를 가리지 않고!”

    “그 전에 저자를 도망치지 못하게 포박하라!”

    내관들이 옷을 가지러 분주하게 뛰어다녔고 그 와중에도 이락은 태평하게 방율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 용궁에선 손님을 이런 식으로 환영하나 봐?”

    율은 이락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였다. 이락이 봇짐을 뒤져 자신의 옷을 꺼내 입으려고 하자 병사들의 창끝이 더 사납게 겨눠진다.

    “고환을 떼기 전까진 다치게 하지 마라!”

    고환? 이락은 의아해하면서도 주저 없이 옷을 걸쳐 입었다. 그의 당당함에 대신들도 병사들도 당황한 표정을 했다. 율은 이마를 바닥에 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마 고개를 들어 이락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왕자마마께서 납십니다.”

    기진이 등장하자 술렁임도 멈췄다. 다들 그를 향해 예를 갖췄고 이락은 고름을 매며 앞에 나타난 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얀 비단옷에 신선 같은 외모를 지닌 자는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용궁에도 저런 인물이 있었군.

    “토끼는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라.”

    병사들의 칼끝이 목 아래까지 들어왔음에도 이락은 꼿꼿하게 서서 기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기진이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내자 병사들이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

    “그대가 육지에 사는 토끼인가.”

    “그렇소만.”

    “내 그대에게 청할 것이 있어 이곳까지 오게 하였네.”

    청이라. 이락은 엎드려 있는 율을 한번 힐긋 쳐다봤다. 역시, 탄신일은 핑계였군.

    “내 아버지인 용왕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데, 신령이 자네의 고환을 달여 먹이면 병이 나을 수 있다 하더군.”

    이락은 당황하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고환을 내어 달라?”

    좌의정 고래가 앞으로 나섰다.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아나, 용왕께서 생사의 갈림길에 계시니 우리도 어쩔 수 없었네. 대신 자네에게 평생 누리지 못할 보상을 하지. 어떤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게. 다 들어줄 테니.”

    이락은 턱을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뭐든 다 들어준단 말인가?”

    “그래. 뭐든 다 들어줌세.”

    이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쁜 제안은 아니네.”

    대신들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육지에선 금은보화면 부모 자식도 팔아먹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먼. 그런데 이락이 갑자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그런데 어쩌지? 내가 고환을 육지에 두고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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