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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16화 (16/102)
  • 16화

    오라버니! 집 근처에 다다르자 선이 먼저 율을 반겼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뛰어온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꽃처럼 활짝 웃었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아주 오신 겁니까?”

    그러다가 지친 율의 낯빛을 보더니 덩달아 어두워졌다.

    “오라버니.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육지에 가셨던 일이 잘 안됐습니까?”

    율은 쉴 새 없이 질문하는 선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별일 없었다. 다만, 먼 길을 헤엄쳐 왔더니 피곤하구나. 그러면서도 내일 다시 떠나야 한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이가 부엌에서 나온다.

    “오라버니가 없는 동안 저분이 어머님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됐고요.”

    “다행이구나.”

    “기진 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곳간에 먹을 것이 가득해서 당분간은 오라버니의 녹봉이 아니어도 충분할 것 같으니 저와 부모님에 대한 걱정은 넣어 두십시오.”

    일찍 철이 든 선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고 기진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지금으로선 마냥 기뻐하진 못했다. 이락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육지에 가면 너부터 먹어 버리겠다.]

    설마 진짜 잡아먹기야 하겠는가.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지. 부모님은. 선이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서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던 율의 얼굴이 굳었다. 부친인 방희가 술에 잔뜩 취하여 비틀비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 있었다.

    “하. 이게 누구야. 도망간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구나!”

    선이 급히 다가와 아버지를 붙들고 방율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방희는 손길을 뿌리치고 율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차라리 도망치지 그랬어! 혹시 알아? 네놈이 사라지면 네 어미 병도 씻은 듯 나을지!”

    선이 화가 나서 버럭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오라버니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방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누구 때문이긴! 다 지 놈 팔자인 게지! 이놈이 태어나고부터 집안에 되는 일이 없다! 배냇병신으로 태어난 걸 거두는 게 아니었어. 네 어미가 말려도 너를 버렸어야 했다! 우리 집안이 망해 가는 건 다 너 때문이다!”

    “아버지!”

    선이 울컥하여 소리를 질렀고, 율은 그만하라며 눈짓을 하고 나서 방희의 팔을 붙들었다. 들어가세요. 많이 취하셨어요. ‘놔라, 이놈아!’ 방희가 술병을 든 손을 휘두르다 그것이 방율의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율이 맥없이 쓰러졌고 선이 놀라서 뛰어왔다.

    “오라버니!”

    뚝, 뚝,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율은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지혈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율은 담담하였다. 선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방희를 보자 그는 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아. 이리 오거라. 그놈 옆에 가지 마라. 그럼 너도 아프다. 네 어미가 병이 난 것도 다 그놈 탓이다. 내 하나밖에 없는 너마저 잃으면 살아갈 낙이 없지 않느냐.”

    “어머니가 아프신 게 어찌 오라버니 때문입니까! 그건 모두 아버지가!”

    율이 선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 말라고 눈빛을 보내니 선이 입술을 꾹 닫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방희는 들고 있던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욕을 내뱉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작은방에서 벌러덩 쓰러졌다.

    아버지를 노려보던 선이 율의 상처를 확인하려 했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괜찮다…. 난 살성이 좋아 피가 금방 멈춘다. 너도 알지 않느냐.”

    율은 애써 웃으며 오히려 동생을 다독였다. 그러고는 마루 위로 올랐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어머니는 떠날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어머니. 율이 왔습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대신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간혹 눈을 뜨긴 하였으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힘겨워 보였다. 이불속으로 손을 넣은 율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오랜 병환으로 나뭇가지처럼 말라 버린 팔과 손가락이 안쓰럽다.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율은 봇짐을 뒤져 가족에게 주려고 산 선물을 꺼냈다. 선이에게 댕기를 건네주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제 선물입니까?”

    “마음에 들어?”

    “들다마다요. 어찌 제가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사 오셨습니까.”

    율은 웃고 나서 이번엔 가락지를 어머니의 손가락에 끼웠다. 옥색의 반지가 앙상한 손가락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율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더 꼭 잡았고 선이는 어머니의 귓가에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머니. 오라버니가 반지를 사 왔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옥색입니다. 정말 예쁩니다….”

    그러다 선은 율이 꺼내 놓은 것 중 약재를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이것은 무엇이어요?”

    “육지에서 얻은 귀한 약재다. 어머님의 병환에 도움이 될까 하여 가져왔다.”

    궁궐에 잡혀가 심 낭자를 만난 이야기를 하려다 선이 괜한 걱정을 할까 싶어 관두었다.

    “약탕기에 넣고 내리라 할게요. 오라버니께서 먼 육지까지 가서 구해 온 것이니 분명 어머니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율이 옅게 웃다가 봇짐에서 삐죽 튀어나온 붓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버지를 위하여 사 온 것이나 이것을 직접 전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방율에게 처음으로 붓을 쥐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어린 율을 앞에 앉혀 두고 글자를 적어 내려가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율은 애틋한 표정으로 붓을 보다가 그것을 한쪽에 놓아뒀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사라졌던 선이 약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 저를 보십시오.”

    상처를 보며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많이 찢어지진 않았으나 벌써 퍼렇게 멍이 들었다. 선이 약상자를 열어 상처에 문지르자 율이 인상을 쓴다. 율은 얼마 전 이락이 자신의 손을 치료해주던 것을 떠올렸다. 고약한 약 냄새와. 저를 보고 웃던 얼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누군가를 떠올렸다.”

    “혹시 기진 마맙니까?”

    “아, 아니다.”

    “에이. 표정이 아닌 게 아닌데요.”

    “정말 아니다….”

    당황하는 율을 보며 선이 웃었다.

    “오라버니의 반응이 재미있어 농을 한 것입니다.”

    짓궂기는. 율도 덩달아 웃었다. 그렇게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 짐을 풀고서는 그동안 쌓인 집안일을 하나둘 살펴보았다. 일손을 도와주는 사람 덕분인지 자신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율은 마루에 앉아 문밖을 내다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바다로 돌아온 것이 실감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일 다시 떠날 생각을 하니 걱정이 든다. 이락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혹여 홧김에 난동을 부리진 않을까. 그러다 율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몰려드는 생각을 털어 냈다. 누가 누굴 걱정해. 내 코가 석자다. 지금은 그냥 내 걱정만 하자….

    ***

    “아바마마를 만나고 싶다 하였소?”

    “내 고환을 나눠 줘야 하는데 얼굴을 봐야 하지 않겠어?”

    기진이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락을 용왕이 누워 있는 침전으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가던 이락이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정말 그 말을 믿는 건가.”

    “무얼 말이오.”

    “내 고환이 용왕의 병환을 낫게 할 거라는 말. 진짜 믿느냐 말이야.”

    기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묘하게 표정이 달라지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를 만들었다. 방율에게 보여 주던 그 인자함이 가득 담긴 미소….

    “사실 온전히 믿진 않소. 하지만 아바마마를 위한 일이니 자식 된 도리로 무엇이든 할 생각이오.”

    그렇군. 이락이 나직한 소리로 읊조렸다. 용왕의 침전 앞에 도착하니 내관들이 지키고 서 있다가 문을 열어 준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찌나 사치스럽게 꾸며 놨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락은 내부를 한번 둘러보고는 기진을 따라 침상에 누워 있는 용왕에게로 다가갔다. 병색이 짙은 얼굴은 하루 이틀 앓은 게 아닌 듯 보였다.

    기진은 용왕의 손을 부여잡고는 애틋한 표정을 했다.

    “아바마마. 기진입니다…. 아바마마를 치료할 토 선생을 모셔왔습니다. 토 선생이 우리를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곧 기력을 회복하실 것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시옵소서.”

    기진의 말에 주변에 있던 내관들이 그의 효심에 탄복한 표정을 짓는다. 으, 으, 용왕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눈을 뜬다. 초점이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주시하던 그가 눈동자를 움직여 기진을 쳐다본다. 기진은 용왕의 손을 더 꼭 붙들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바마마? 접니다. 아바마마의 하나뿐인 아들 기진입니다.”

    용왕의 잿빛 눈동자가 슥 이락을 향한다. 그러다 갑자기 동공이 커지더니 무슨 이유인지 숨을 헐떡인다. 기진은 놀라서 내관을 돌아봤다. 어의! 어의를 불러라! 내관이 어의를 데리러 뛰쳐나간 사이 용왕의 발작은 심해졌다.

    이락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 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때마침 의원이 들어와 왕의 상태를 살피고는 침을 놓는다. 숨소리가 차츰 고르게 변하였고, 실내는 금세 조용해졌다. 기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와 이락을 찾았다. 이락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딜 가는 것이오.”

    “얼굴을 봤으니 됐다.”

    “되다니. 무슨 뜻이오?”

    이락이 돌아서서 이번엔 기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관상이란 것을 볼 줄 아는데, 네 아비는 수백 년은 족히 더 살 것 같구나.”

    기진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오.”

    그러자 이락도 같이 웃는다.

    “진심인가?”

    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오? 이락이 묘한 웃음을 띠고는 돌아섰다. 아니다. 너무 귀담아듣지 마. 그러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고 그대로 멀어진다. 순간 멀어지는 이락을 보는 기진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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