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슈... ’
... 형의 목소리다,
누구와 얘기하고 있는 걸까...?
일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는다.
머릿속이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붕떠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
안되는데.
어서... 눈을 떠야 하는데...
마음과 상관없이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형의 목소리는 다시 멀어져 갔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이거 열이 장난이 아닌걸?”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작게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벌써 몇 시간째 끙끙되고 있는 슈엘을 바라보며.
이 바보 같은 녀석이 도대체 제국의 추위를 뭘로 보고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닌건지...
높은 고열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찬다.
‘건강해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 슈는 건강한 아이야.
이 아이가 이렇게 아픈 건 추위 때문만은 아니지.”
녹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슬픈 빛을 띄며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빛처럼 반짝이던 금발이 어둡게 빛난다.
이내 고개를 돌린 사리엘의 얼굴에 온화함이 사라져있자
남자는 하하- 웃음이 나왔다.
“무서울 정돈데, 사리엘 왕자님-?”
-과연 알고 있을까.
열을 앓고 있는 저 세 번째 왕자님은
그에게 만큼은 따뜻하고 다정한 자신의 형이
사실은 얼음 같은 자라는걸.
“이건 모두 그’때문이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화나있었다.
사리엘은 끙끙대는 슈엘의 이마를 매만지며 분노를 내뱉었다.
단순히 감기...만이 아니다.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벗긴 슈엘의 몸을 보는 순간
사리엘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고 황제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 강제로 당한 것이다.
얼마나 당신을 순수하게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슈에게 잔인한 짓을 해버린 것이다.
“증오심은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도록 해, 사리엘.
밖으로 표출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무력감만 느끼게 될 뿐이지.
후안이라는 제국의 황제 앞에선 말이야.”
“... 내가 말한 부탁은 그에게 청해본거야?
사리엘의 녹색 눈동자에 남자의 얼굴이 비춰졌다.
갈색의 눈동자에- 황제와 같은 불같은 빨간 머리카락.
남자는 생긋이 웃었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겠는걸.
형님이 나, 이안·루비젝트·란의 부탁을 과연 들어주실까,
하는 것은 말야.”
실실 웃는 제국의 두 번째 왕위계승자 -이안을 향해
사리엘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난 놀랄 따름이다.
이 녀석이 어떻게 너랑 형제라는 거냐?
닮은 데라곤 요만큼도 없는 평범한 녀석인데.
사람 좋은 것 정도가 이 녀석의 장점이라고.”
아침에 만났던 슈엘의 모습을 생각하며 이안은 말했다.
잘생긴 외모긴 했지만 아름답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리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외모다.
특출하게 현명해 보이지도, 뛰어난 재주가 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나의 형인 후안... 의 반려가 되기엔
그 어느 것도 갖추지 않은 소국의 왕자가 아니던가.
“사람 보는 눈썰미정돈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보군 이안.”
“?”
사람들은 내 외모를 보고 다가오지만 그것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보석’일 뿐이다.
보고 즐기고... 소유하고 싶은 보석.
하지만 슈는 다르다.
자연스럽게 슈의 곁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게 되고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바로.
-슈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감정.
“나따윈 상대되지 않을 정도로 이 아이는... 특별해.”
******
차가운 밤바람 속에 후안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어느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혼자...있고 싶은 밤이다.
테이블위에 놓여있는 보석들을 만지며 낯익은 얼굴을 떠올려본다.
오늘밤은 오지 않는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상처를 줘도 이맘때쯤이면 보석을 들고 오곤 했었는데...
나 때문인가 역시.
“... ...”
루비에 비췬 자신을 보자 이내 자신과 닮은 남자가 생각난다.
... 오늘 아침 돌아온 나의 동생. 이안-
[ 형님의 반려를 제게 주십시오.- ]
-그렇게. 말했었다.
성큼성큼. 시원한 걸음위로 후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석이 왔단 말인가... 이안·루비젝트·란.
현재 제국의 왕위서열1위.
내가 죽으면 왕이 될 나의 배다른 동생.
그의 어머니가 가진 권력욕을 누르고 나와의 권력싸움을
일찌감치 피한 괴짜왕자.
귀여운 동생은 아니었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왕가의 형제중
유일하게 아끼는 녀석이었다.
권력엔 전혀 욕심이 없다며 오랜 시간 제국을 떠나
여행을 하기일쑤였던 녀석이 돌아오다니.
왕가의 사람 외엔 들어갈 수 없는 홀에 들어가자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생긋이 웃으며 이안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이안의 인사에 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실 웃고 있는 녀석이지만 우습게보아서는 안 된다.
후안은 알고 있었다.
미소 띤 얼굴 뒤엔 무서울 정도로 영리한 남자가 숨어있다는걸.
“오랜만이구나, 이안.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온 거지?”
테이블에 있는 잔에 붉은 포도주를 따르며 묻자 이안이 작게 웃는다.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드디어 형님이 반려를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 왔지요.”
“흐음-.”
형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은 아침에 만난
반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이 취향이 아닌 남자.
“도대체 무슨 변덕이십니까, 형님.”
“무슨 말이지?”
“여자도 아닌, 더군다나 아름다운 외모도 아닌
알스의 왕자를 어째서 반려로 맞으신 겁니까?”
... 슈엘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작은 궁금증이 일지만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진지하게 맞은 것은 아니다.
단순한 놀이일 뿐이야.”
그래... 놀이...
단순한 황제의 변덕 일뿐이다.
반려라 데려왔어도 그 녀석은 단지 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아...
이런 이상한 마음 따위,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녀석에 대한 감정일 뿐이라고.
“그렇습니까?”
와인으로 살짝 입을 축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 기억나십니까? 형님께서 황제로 즉위하시는 날이었습니다.“
“... ...”
“황제의 자리에 있어서 절대 형님의 목에 칼을 대는 일이 없을 거라고.
절대 형님을 배신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했습니다.
그 말에 형님께선 제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셨죠.“
후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갈색눈동자가 빛났다.
“대신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갑자기...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냐.”
차가운 후안의 말투에 이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냥 갑자기 갖고싶어져서요.”
“?”
“형님이 단순히 놀이라고 하시니 새삼스럽게 욕심이 나는군요.”
... 형님의 반려를 제게 주십시오.“
“!!!!”
놀란 표정의 후안을 바라보자 이안은 더더욱 웃음만 나왔다.
얼음같이 냉정한 천하의 형님께 그런 표정이 있었다니 놀랄 일이네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이 말한 대로 단지 그 알스의 왕자를
놀이감으로 여기시는지 아닌지는.
-단지 약속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 내 동생을 황제에게서 구해 내줘. ]
알스의 아름다운 왕자에게 부탁을 받은지라
형님께 그 검은머리 왕자를 데려와야겠습니다.
후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
술을 마실수록 냉정해지기보단 더 감정적이 되는 느낌이다, 제길.
저 말 한마디가 신경이 쓰여 심장이 주체가 안될 정도다.
겨우 그 녀석을 달라는 말 따위에.
“형제에게 반려를 물려주는 일은 대단한 일도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명백한 밤의 반려라면 더더욱요.”
“... ...왜냐? 왜 알지도 못하는 그 녀석을 달라는 거냐. ”
욕심이 많고 특이한 녀석이긴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자를 갖고싶어할 정도로의 녀석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 우연히 그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그가 꽤 마음에 들었고 가지고 싶어졌다, 이겁니다.”
생긋 웃음을 짓지만 이 웃음은 자신이 생각해낸
엉터리 대답이 유치해서다.
가지고 싶다...란 생각을 가진 건 오히려 그가 아니라 그의 형-사리엘-이다.
그 바보왕자가- 살짝 마음에 든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형님, 제게 주십시오.
기껏해야 밤을 즐기려고 데려온 밤의 반려가 아닙니까?”
“!!”
이안의 말이 분명... 사실이다. 반박조차 불가능한.
분명 가볍게 가지고 놀고 싶어 그를 원해서 반려로 맞았다.
... 하지만-
“줄 수없다, 이안.”
“?!”
“결코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 나는 녀석을 괴롭히는 즐거움이 꽤 괜찮거든.”
가슴이 욱씬 아려오지만 이것이 진심이다...
진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후안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괴롭히고 상처 줘도 녀석은 내 얼굴을 보면 바보처럼 웃지.
그 웃음이 사라질 때-
내 눈길을 피하고 나를 피해 도망을 칠 때
너에게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