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건강이라면 자신 있던 슈엘에게 몸의 아픔은 너무나 낯설었다.
엉망진창으로 뒤섞여버린 머릿속에 온전히 살아있는 것은
붉은 눈동자의 그 사람뿐이었다.
온몸에 가득차오는 고열 속에서도 그의 얼굴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마저 잊고 정신을 잃는다면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의식이 없는 중에도 그렇게 필사적으로 그를 생각했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몇 시간을 끙끙 앓던 슈엘이 눈을 뜬 것은
1분 도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무의식중에 슈엘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흐릿한 시선너머로 보이는
빨간색의 머리카락에
가슴이 뭉클해왔다.
아직 당신... 곁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어이, 반려님. 깨어 난거야...?”
그가 무언가 말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정확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그 붉은 머리카락이 슈엘의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슈엘에게있어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듯 그렇게 보였다.
그가 입을 움직이자 슈엘은 생긋이 웃었다.
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천하의 슈엘인걸요.
아주 짧은 시간 미소를 지은 후 슈엘은 다시 눈을 감았다.
“슈가 깨어났어?”
“... ...”
“이안! 어떻게 된 거야?”
황급히 달려온 사리엘의 물음에 그제야 이안은 정신을 차렸다.
“아...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든 것 같아...”
“...그래.”
이안은 눈감은 슈엘을 바라보았다.
‘놀랐..잖아..’
뭐였지 방금... 그 미소는...?
오늘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바보같이 웃었으면
어떻게 그런..
슬픈 미소를 짓냔말야, 너는.
이안은 알지 못했다.
한순간 보여준 슈엘의 미소에 신경 쓰이는 자신의 마음을.
이 감정은 그저 사랑받지 못하는 반려에 대한 동정이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되내였다.
******
[후안님, 좋은 아침입니다-.]
“!!”
후안은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았다.
이런... 환청이었나...
아침햇살속에 익숙한 그 모습이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커다란 황제의 방에 있는 것은 여전히 자신 혼자였다.
슈엘을 안았던 날 이후 그를 보지 못한지 이제 이틀.
이틀의 시간이 몇 십 년, 몇 백 년이라고 느껴질 만큼 따분했다.
겨우 그 바보같이 웃는 얼굴을 못 봤다고,
귀찮게 달라붙는 그 얼굴을 못 봤다고,
오히려 더 잘된일일텐데...
작게 한숨을 쉬던 중, 후안을 사로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
후안도 모르게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저 노크소리 따위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이런 감정은...
하지만 그런 감정보다는 역시 처음의 감정이 먼저다.
반가운. 이 기분이 먼저였다.
애써 목을 가다듬고는 낯은 음으로 말했다.
‘그 녀석’일거라 생각하며...
“누구냐?”
“접니다, 형님.”
“... ...”
알 수 없는 실망감.
실망감에 이어 짜증마저 날 정도였다.
그녀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분노마저 생길지경이다.
컵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짜증스럽게 들어오라 말하자
이안이 생긋이 웃으며 문을 열었다.
시선을 돌리는 후안에게 살짝 목례를 하며 자연스럽게 침대를 둘러본다.
‘매일 밤 안는 남창이 있다는데...
요 며칠 형님께서 아무도 부르시지 않으신 다라..
이건 무슨의미일까~?’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이안은 더욱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대놓고 반기는 형님은 아니었어도 저렇게 짜증스럽게 반긴적또한 없었다.
아니 일체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역시 무언가 변한 것이 확실하다.
이건 의아함이 아닌 확신이다.
누가 저 냉정한 대륙의 황제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벌써 오랜 시간 형님의 잠자리에 불려왔다는 그 멜이란 남창?
아니면...
아직도 고열에 시달리는 까만 눈동자를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저나 형님, 설마 잊으신 겁니까?”
“?”
“아직 쌀쌀하긴 하지만 햇빛이 따사롭습니다.
제가 제국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봄축제를 말하는 거냐?”
하하- 이안은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한 겨울을 자랑하는 제국의 봄축제라 하면
대륙에서도 제일의 축제라 불리는 행사였다.
겨울에 지친 사람들이 봄의 빛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웃는 온 나라의 축제.
성대함도 성대함이지만 사랑의 시작이라는 구절이
봄축제를 대표할 만큼 결혼이나 약혼 등의 행사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기도 하다.
“이번 행사 때에는 형님의 옆에 누가 있을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 ... ...”
봄축제 내내 열리는 성의 무도회를 말하는 것이다.
무도회는 커플로 한 쌍씩이어야만 했고
그것은 황제라고 예외는 없었다.
아니, 황제의 옆에 있는지가 누군지 보기위해
연회에 출석하는 귀족이 있을 정도였다.
후안은 즉위이후 매년 짝이 바뀌었었다.
특별한 것 없이 그시기때쯤 가장 귀여워하던 여인
(이따금 미모가 출중한 남성도 있었지만.)이 옆에 있었다.
때로는 하찮은 신분의 여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고귀한 귀족가문의 딸이기도 했다.
그에게 마음이 있는 귀족가의 영양들은 그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이맘때쯤이면 선물행세등 갖가지 수고를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에는 몇 끈질긴 여인들의 선물 몇 개가 성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황제에게는
공식적으로 ‘반려’가 생겼으니까.
매년 그가 자유롭게 파트너를 바꿀 수 있었던 건
반려가 없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라 후안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봄축제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석이 내옆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
그녀석의 공식석상에
나 후안·루비젝트·알의 반려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아니던가.
근데 이 기분은 뭘까?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짜증났던 기분이 서서히 풀려간다.
마치 사춘기소년마냥, 자신도 모를 만큼 감정의 변화가 커져간다.
겨우 바보반려, 녀석이 중심에 있는 것 하나로.
“형님, 알스의 반려를 파트너로 모실 겁니까?”
“어쩔 수 없지. 반려는 그 녀석뿐이니까.”
마음은 꽤나 기쁜데도 나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슈엘을 데려간다는 말투.
자신의 감정이 솔직한 것에 익숙지 않은 성격인 탓이다.
“매년 형님의 옆은
금발에 그린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올해에 처음으로 형님 옆의 사람이 바뀌는군요.”
쿡쿡-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혹시나 놀이감으로 여기시는 그 반려님이 폐하의 옆자리로
부족하시다 여기신다면 그땐 저에게 양보해주십시오, 형님.”
“!!”
장난처럼 가볍게 하는 말인데도 자연스럽게 넘길 수가 없다.
이안의 저 관심은 이상할 정도다.
겨우 아침에 몇 마디 한 걸로 사람에게 저렇게 흥미를 가진
인간이던가, 저 녀석이?
아니, 그런 것보다도... 그 까만눈동자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짜증이 뒤섞여 밀려온다.
“내게는 데려갈 사람이 따로 있지 않느냐.”
“데려갈 사람이라뇨?”
“... 알스에서 온 그 시종말이다.”
그 말에 이안의 머릿속에 하얀 두건을 쓴 사리엘이 나타났다.
그리고 재빨리 형님의 말을 정리해본다.
근래 이안은 후궁에 자주 드나들었고
슈엘이 앓아누운 후궁에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사리엘 뿐이었다.
덕택에 성안엔
오랜만에 돌아온 이안왕자와 신비한 알스의 시종이
내연의 관계라는 작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을 말하는 거라면-
“하하, 그가 제 곁에 있는 건 밤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가... ”
-이것은 기회였다.
형님에게서 사리엘을 향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기회.
한마디 말로 사리엘을 자신의 밤놀이상대로 만들어 놓은
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말 했다는 거... 들키면 죽음이겠지만-.’
******
슈엘이 눈을 뜬 것은 이틀이 지난 오후에서였다.
창문으로 비취는 햇살에 슈엘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놀란 것은 겨우 며칠 새에 따스해진 햇빛 때문일 것이다.
아직 창 밖은 하얀 눈이 보이는 겨울이었지만
햇빛만큼은 분명 봄의 향기가 풍겼다.
“슈엘, 깨어났구나.”
자신을 껴안는 사리엘을 보며 슈엘은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놀란 눈으로 사리엘의 어깨를 잡고 그의 형을 보았다.
하얀 두건을 쓰고 있고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과 얼굴은 감춰져 있었다.
“형! 괜찮아...? 후안님께서... 오시지 않으셨어?
형의 얼굴을 보지 않으셨냐고!”
아직 몸이 멀쩡치 않을 텐데도 큰소리로 물어오는 슈엘을 보며
사리엘은 힘겹게 미소를 만들었다.
아직 뜨거운 슈엘의 얼굴을 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 이젠.”
“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슈엘에게 사리엘은 말해주었다.
후안의 동생 이안왕자가 자신의 친구라는 이야기,
자신을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이야기를.
하지만 이안이 후안에게 부탁한 슈엘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슈엘은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나 걱정했던 일이 해결됐구나...
이안님이란 분께서 도와주시기로 했다면
형은... 이제 괜찮은 거...겠지?
...그제야 안심이 된다.
기쁜 마음에 모든 상처는 다 잊어도 좋을 지경이다.
후안님이 나를 형대신 안은일따위...
경박한 남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따위, 모두.
그저 당신이 형의 본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당신이 형을 선택하지만 않는다면.
그걸로도 너무나 감사해요, 나는.
“휘유~ 반려님 일어나셨군.”
“?!”
소리의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린 슈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색이 창백해 더욱 도드라진 까만 눈동자에
한 남자가 비춰졌다.
분명... 며칠 전 아침에....
“당신은!!”
“사리엘에게 얘기를 들었을 테지? 내가 바로 이안·루비젝트·란이야.”
싱긋이 웃는 남자를 보며 슈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안과 뒷모습이 너무도 닮은 이 남자가 그의 동생이었다니.
형의 친구였다니!
“앞으로 잘 부탁해, 반려님. 꽤 질긴 인연이 될듯하니까.”
그때까지도 슈엘은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저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형의 친구라는 사실이 기쁘고 반가웠을 뿐이다.
그래서 환한 얼굴로 그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네, 이안왕자님. 잘부탁려요, 헤헤.”
“좋아-.”
역시 이런 모습이 더 너답구나, 슈엘.알스.슈.
요 알 수 없는 녀석아.
편히 의자에 앉은 이안이 슈엘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으음-”
역시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녀석. 으로 끝날 녀석이지만
이렇게 계속 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
저 녀석 특유의 선한 눈동자.
까만 눈동자와 동글동글한 눈매가 어린아이 같아선.
‘정말 괴롭혀주고 싶은걸.’
-유치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 녀석을 괴롭히는 것이 즐겁다는 후안의 말을 떠올리며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이안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슈엘이 묻자
그는 그제야 아아- 하고 입을 열었다.
“참, 봄축제를 아나?”
“봄축제요? 그럼요! 그 성대한 축제를 왜 모르겠어요!”
순식간에 기운을 차린 모습에 이안은 슈엘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이틀 동안이나 끙끙 앓은 녀석이 맞아...??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좋아하는슈엘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리엘은 그저 미소 짓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즈음이 봄축제인가요?
제국에 오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들중 하나인데.”
소문으로만 그 아름다움과 성대함을 들었지
실제로는 봐본적 없는 슈엘은 두 눈을 반짝이며
아이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두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뻐하는 모습에 이안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끙끙되는 것보단 그게 훨 나아, 바보반려.’
침대에서 일어나 춤이라도 출 듯 기뻐하는
슈엘에게 던진 이안의 한마디는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봄축제 무도회때 형님의 파트너가 너라는 건 알고 있겠지?”
“... ...”
즐거워하던 슈엘의 행동이 멈추었다.
놀란 표정으로 멈추며 이해 못했다는 표정이 역력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형님의 반려는 아직...은 너뿐이니까.
네가 형님의 파트너인건 당연하잖아?”
“... ...”
여전히 슈엘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미 머릿속에는 아직은- 이라는 말 따위 들어올 리 없었다.
-반려는 너뿐이니까-
-네가 형님의 파트너인건-
오직 그 말만이 슈엘의 머릿속에 가득이었다.
난 사랑 앞에선 너무나 심각한 바보일지 몰라.
하지만 역시-
후안님이 차가운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대해도 나는,
지금만큼은...
“슈?!”
사리엘이 붙잡을 새도 없이 슈는 달려갔다.
이안이 의자에 걸려있던 외투를 던져주었다.
슈엘이 고맙다 고개를 숙이곤 순식간에 방을 나갔다.
“이안. 무슨 생각이야?”
슈엘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간
사리엘의 차가운 말투에 이안은 웃었다.
큰소리로 하하하하-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어, 네 동생말야.”
“... ...”
“고작 봄축제의 파트너가 되었다고 잠옷 바람에 맨발로 뛰어가는 모습이라니-”
그런 점이 너무 재미있어-.
한번도 본적 없는 타입이다.
권력을 가진 왕자주제에 아이같이 순수한 녀석 따위.
한사람만을 지독히 바라보는 헌신적인 녀석 따위...
세계 곳곳을 돌아본 나조차도 본적이 없었다.
“지금 가봤자, 슈가 황제에게 좋은 말을 들을 리 없잖아?”
기뻐하는 슈에게 황제는 또 차가운 말을 내뱉을 것이다.
돌아오는 슈는 또 한번 마음의 상처를 입고 올것이라는걸...
알고 있으면서.
사리엘의 말에 이안은 더더욱 크게 웃을 뿐이다.
“그게 네가 바라는 거잖아?”
“?!”
“너의 그 소중한 동생이 형님께 상처입어서 더 이상
그의 앞에 설 용기를 잃고 도망칠 때
그제야 네가 바라는 게 이루어지는 거야.
-저 녀석이 형님의 손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있잖아?”
잔혹한...말이다. 슈엘이 이 말을 들었다면 울었겠지...
나를 원망하겠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사리엘은 고개를 숙였다.
하얀 천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걱정인 것은 나라구...
왜...내가 바라게 되는 거야?’
조금이지만 분명 들었다, 그런 마음.
저 아이 같은 녀석이 하루빨리 후안을 피해 자신에게 와주길...
“...정신 차려라, 이안·루비젝트·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달렸다.
이틀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슈엘은 거친 숨을 쉬었다.
[ 네가 형님의 파트너잖아- ]
그 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내가 당신의 반려로서..
아름다운 봄축제에 당신의 짝으로 같이 할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이렇게 행복한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후궁에서 후안의 침소까지는 거리는 가까웠다.
작은 정원 속에 난 길을 지나면 바로 본성안의 침소가 보였다.
열심히 달리던 슈엘이 발을 멈추었다.
모르는척하고 지나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치지만
도저히 눈길이 멈추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고야 만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너무도 잔혹하게만 보이는.
금발의 아름다운 ...멜...
여전히 선명히 빛나는 파란 눈동자가 슈엘을 비추었다.
“오랜만이군요. 슈엘왕자님. ”
“... ...”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슈의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간다.
어젯밤도 폐하와 밤을 보낸 것일까..
지금에야 방을 나선 것일까...
두 손을 꾸욱 쥐고 일그러져가는 인상을 바로잡는다.
그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짓기 위해 애를 쓴다.
“오랜...만이군요, 멜.”
“예. 사실 왕자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오늘은."
나를-?
그럼... 후안님의 침소에서 나온 게 아니었구나...
슈엘의 감정이 눈에 띌 정도로 '안심'으로 바뀌자
멜은 재빠르게 눈치 챘다.
'흐음-며칠째 내가 폐하의 침소로 불리지 않았던걸 몰랐나보군...'
그리곤 흘깃 슈엘의 옷을 보더니 쿡쿡- 비웃는 듯 한 웃음을 흘린다.
“이런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어딜 그렇게 서둘러 가시나요?
설마 그런 차림으로 폐하를 뵈려가는건 아니겠죠?”
“!!”
그의 말에 깨닫지 못했던 수치심이 슈를 감쌌다.
겨우 남창 따위가 일국의 왕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저런 조소에 가까운 말은...
‘하지만 이 사람의 말, 사실이잖아...'
내가 너무 경솔했어...
이런 이른 아침에 이런 차림으로 후안님을 뵈려 하다니...
유일한 반려라고 해도 관심도 갖지 않으시는 밤의 반려인걸.
안 그래도 나를 싫어하시는데
봄축제같은걸로 혼자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면
더더욱 날 싫어하실지 몰라.
그랬었지, 참...
고개를 숙였던 슈엘은 고개를 돌아 멜을 바라보았다.
빙긋이 웃으며 슈엘은 말했다.
“그렇네요, 멜. 고마워요.
나, 너무 생각이 짧아서... 실수를 할 뻔했네요.”
그 미소에 놀란 것은 멜이었다.
알량한 권력을 내세워 화를 낼줄알았는데
이만한 조소에도 웃을 수 있다니.
... 바보 같을 정도로 너무 선하군요, 당신은.
믿기 싫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다.
보면 볼수록 그것을 깨닫게 되어 기분이 나빠진다.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고 자란
이런 새하얀 사람은!
“...그나저나 왕자님. 봄축제를 아시나요?”
“예, 그럼요!”
뜻밖의 이야기가 멜의 입에서 나오자 슈엘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현재 슈엘에게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봄축제였으니까.
슈엘을 표정을 보며 멜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폐하의 짝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뻔뻔하시군요.”
알면 이야기는 더 쉬어지지...
“...무슨...말이죠, 멜?”
경직된 슈엘의 표정에 멜은 웃음이 나왔다.
자신에 관해선 무슨 말을 해도 웃어넘기는 주제에
후안과 관계되면 금세 심각해지는 저 꼴이라니-.
“무도회에 나가 그냥 폐하와 춤을 추고 놀면 끝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폐하의 짝이 된다는 건 그날 하루 동안
폐하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자님께서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내리까는 시선에는... 담겨있었다.
너는 그런 역할 따위 할 수 없어... 하고.
“폐하께선 지금껏 여자든 남자든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였어요.
일국의 황제라면 당연히 누
구라도 부러워할 미인이 옆에 있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당신은 어떨까요?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보셨는지요,
알스의 왕자님-?”
가시 박힌 목소리가 슈엘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좋았던 기분이 점점 어두워져갔다.
... 생각지도 못했던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역시... 부족한... 거야?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미녀도 아니고...
매혹적이지도 않은 검정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서...?
겨우 밤의 반려로 온 소국의 왕자님이라서...?
인형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눈에 보여
더더욱 자신감이 사라져간다.
하지만 역시-
포기... 할 수는 없어.
하하- 미안. 미안해요, 후안님.
이런 말을 듣고도...
당신을 위한다면 당신의 옆자리를 넘겨줘야 하는데도
그게 안 돼요.
나는 안 돼요...
내 외모라던가, 나의 위치라던가 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부정당해도 되는데...
당신에 관한 것만큼은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어요.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인 반려인걸까요...
“난... 그래도 후안님의 반려로서 그의 옆에 있을 거예요.”
“?!”
“연회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어요.
후안님의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모습같은건 도저히...
볼 수가 없으니까요.
후안님의 곁은 아직은... 내 자리인걸요.”
아직은...
내 자리...
분명 나는 그의 밤의 반려일 뿐이고,
그 사람에겐 이제 많은 반려들과...
그를 평생 사랑해줄 왕비를 맞게 되겠죠.
그때엔 그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직은...
지금만큼은...
나의 자리니까.
“그럼, 다음에 뵙죠...멜.”
몸을 돌려 되돌아가는 슈엘의 모습을 보며 멜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품 있는 걸음걸이와
당당한 풍채가 영락없이 ‘왕자’의 모습이다.
어리숙한 녀석 주제에, 강한척하는 꼴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밤의 반려주제에!!
“그렇게 당당한 것도 한순간이야, 알스의왕자님.
... 황제가 너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