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5)

<2>

"아아아~ 춥다."

후우- 하고 불자 하얀 입김이 눈앞을 가린다.

지금까지 지냈던 나의 나라 알스가 얼마나 따뜻한 곳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슈엘은 차가워진 두 손을 꼬옥 쥐어보았다.

손이 점점 더 차가워진다고 느끼는 아마도. 

그의 눈빛.....때문일 테지.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도 미안한 마음 없이.

사랑하는.....마음 없이.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은 힘들다.

후안·루비젝트·알...... 커다란 제국의 외로운 왕.

나를 사랑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

작고 아름다운 남자를 안고. 

나를 보며 냉소를 보낸.

나의 반려님-.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추운 곳에 온 건 내가 정한 일이니까.

바로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니까.

"힘내자. 슈엘-."

조금이라도 좋아.

당신이 나를 바라본다면. 

조금이라도 당신과 가까워진다면.

-그것만으로.

<<반려로 맞아주세요>>

슈엘이 이곳에 온지도 이제 막 한달이 지났을까.

밤새도록 새 찬 눈보라가 칠 때도 있지만 

어느 때면 봄 햇살이 가득한 날이 많아져서.

점점 봄이 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봄은 멀어 보이는걸-.

얼굴을 가린 하얀 두건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

책을 보는 형을 보자 가슴이 아파온다.

형과....너무도 닮은 그 얼굴이 생각나서.

길게 빛나는 금발에, 녹색 빛이 나는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

그의 이름은 ‘멜’이라 했다.

벌써 한 달째. 후안님의 침소에 드나드는 건 그 뿐이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생긋이 웃으며, 

밤이면 당당히.... 후안님의 침소로 들어간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눈물을 참고 웃어야만 하는데.

그 사람은 당당히, 웃으며 그곳을 들어간다고 했다.

내게 향하던 차가운 눈과 비꼬는 말은 그에게 보여주지 않는 걸까.

그 사람은 따뜻하게 맞아주는걸까.

웃어주는걸까.

....사랑해 주는 걸까.

"... ....?"

".... ..."

"슈?"

"엣, 에엣! 응?"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사리엘이 걱정스런 눈으로 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알다시피 건강 빼곤 남는 게 없는 바보잖아.

그러니까. 그런 걱정스런 눈으로 보지마, 형.

내가 미안해지니까.

헤헤, 하고 웃어보이니 그제야 사리엘의 눈이 부드럽게 웃는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니?"

"아니. 뭐, 그냥. 저녁메뉴는 뭐가 나올까 하고~"

대답하고 나서, 아차 싶은것이. 

저녁을 먹은 것이 바로 방금이었다. -바보 슈엘. 

하지만.  이런 마음... 절대로 말 할수 없는걸.

질투하는 모습 따위 보이지 않아. 보일수가 없어.

힘들어하는, 내 모습 따위 말이지.

헤헤헤, 하고 웃으며 형에게 안겨본다.

따듯하고 정겨운. 형의 품에 기분이 좋다.

"따뜻하다~"

"그러니?"

"응.응. 따뜻해!"

그렇게 잠시 동안 형의 품이 안긴 뒤, 

이내 손을 떼고 재빨리 외투를 걸쳤다.

"후안님께 다녀올게."

"뭐?"

언제나. 잠이 들 때쯤의 나의 인사시간.

"... 그래, 다녀와, 슈."

"응!"

쾌활히 문을 열고. 당당히 나선다.

세찬 바람이 부는 문을 닫고는 오늘도 어김없이- 

세찬 눈보라가 치는 밖을 뛰어나갔다.

즐거운 듯이.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다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이.

시녀한명,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밤의 궁을 뛰어서.

슈엘은 이내, 후안님의 침소의 앞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두근두근.

눈보라의 추위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

여전히 꽉 닫혀있는 문 앞에 서서 눈을 감아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슈엘.

거친 숨을 안정시키며. 

닫혀진 문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내게 용기를 줘 본다.

언제나. 언제나.

떨리지 않는 법이 없지.

문을 여는 순간, 내가 얼마나 떨리는지, 누가 알겠어.

아무도 몰라.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연습을 하고.

용기를 내서 들어가곤 하니까.

당신의 눈을 당당히 볼 수 있게.

준비해온 말을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게.

생긋이- 가슴의 떨림과는 상관없이 웃을 수 있게.

그렇게. 연습을 하고. 또 해서 들어가는 거니까.

아무도 몰라.

나의. 떨림은.

-당신도. 모를 테지.

-달칵-

이제 또다시 웃어야 하는. 순간.

또다시. 용기를 내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운 나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

문을 열자 침대에 누운 그가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와.

그의 품에 안긴....아름다운 금발이 보인다.

아아................

그렇지. 그랬었지.  

-이 사람이.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매번 알고 있었으면서. 

들어오는 순간에 잊어버리는 건 뭐람.

하하. 바보. ....바보 슈엘.

나의 왕은... 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는걸. 

알고 있으면서.

몇 번이나.. 두 사람을 보아왔으면서 뭘. 이렇게 떨어....

"안녕...하세요."

"... ..."

연습한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이 웃는다.

여전히 차가운 붉은색 눈동자가 나를 본다.

하하........ 괜찮아요., 그런 눈동자라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듯한 눈동자에 힘을 주고 

그의 눈과의 마주침을 피하지 않는다.

"오늘도. 후안님께 드릴 선물이 있어 왔어요."

아니, 실은. 이 선물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이곳에 오기 위해 만든 선물이지만.

"받아주시는거죠?"

바보처럼. 헤헤- 웃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웃음으로서, 그의 '반려' 로서의 나를 잊게 만든다.

그가 다른 사람을 안던, 사랑하던, 상관 않는 

바보 같은 남자를 연기한다.

오늘은 붉은 루비가 장식된 팔찌.

내가 준 선물을 한건 본적이 없지만

그래도 내일이면 이 팔찌가. 그의 팔에서 빛나길 기대해 본다.

팔찌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슈엘은 입을 움직였다.

『 그럼 오늘도 좋은 밤 되세요 』

내게 뒤돌아 있는 멜에겐 들리지 않을, 나과 당신만의 인사.

들어올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문을 열고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와서.

재빨리 문을 닫고.

그리곤.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헤헷, 성공했다."

아아. 오늘도 무사히 성공입니다.

축하해요. 슈엘 ·알스 ·슈. 수고했어요...

추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버들버들 떨리는 손과 다리를 잡고는, 

차가운 바닥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아아.. 역시. 너무 춥다, 여기.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뭐가. 겨울이 이렇게 길어.

뭐가 이렇게 추워.

대체.....뭐가.

뭐가....

이렇게.

... 아픈 거야...

"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침이 되자, 파란 눈동자는 이내 달콤한 밤의 요부에서 

침착한 남자로 돌아가 고개를 숙였다.

뭐, 너의 그 철저한 이중성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간단한 인사와 함께 멜이 방을 나가자, 

밤의 행위. 신음소리. 그 모든 것이  잊혀져 버린다.

놀랄 정도로. 아주 간단하게.

이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아이처럼 동글동글한 까만 눈동자와 

빙긋이 웃는. 그 바보 같은 웃음이다.

대체, 왜지?

대체 이 내가. 따로 바쁜 일도 없는데 이른 시간에 일어난 거지?

서둘러 남자를 보내고.

옷을 입고. 나가지 않고, 이렇게 방안에 앉아서....

...............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내가. 그 바보 왕자를?

그따위 반려 같지도 않은. 사내 녀석을?

하-

이런 자신의 생각에 기가 찰 지경이지만, 후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테이블위에 놓여진 빨간 주머니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체 언제까지 저런 짓을 할 건가, 저 녀석은.

내 손으로 직접 받아준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가, 자신이 한 장식품을 한번도 몸에 걸친 적이 없는데!

몇 번이나. 필요 없다고 그렇게 얘기 했는데도 

하루라도 저 선물이 끊긴 적은 없었다.

이미 반려의 직책 따윈 잊어버렸다는 듯이

자신을 한번도 찾아주지 않은 내가 다른 남자를 안는 것에 

그 어떤 질투심이나 수치심을 안지 않는다.

바보 같은 웃음을 연신 띠며, 뻔뻔한 얼굴로 선물을 두고 나간다.

대체. 그 놈의 영악한 알스의 왕자. 

설마. 네까짓 놈이 나를 놀리려는 것인가.

하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이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그 눈동자와 그 목소리, 어디가 사람을 놀린단 말인가.

오히려 그 속에 있는 건

아이 같은 순수. 라는 것쯤은 안지가 오래다.

그래서 더더욱 알 수가 없다.

그 녀석의 마음 따위.

언제나 웃고 있는 그 녀석을 어떻게든 상처주고 싶어서

다른 남자를 계속 안는 나의 마음 따위.

-도저히.

모르겠어.

-똑똑-

시녀와는 달리, 경쾌한 노크소리.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내, 까만 머리의 녀석이 나타나 생긋이 웃는다.

"안녕하세요, 후안님. 좋은 아침입니다!"

철저히 내려다보는 나의 시선은 상관없다는 듯

버릇처럼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

밤새 남자를 안은 흔적이 여실한 침대 따위 상관없다는 듯 생글생글.

-정말 짜증나는 미소였다.

"좋은... 밤 되셨어요?"

좋은 밤? 

매번 같은 질문을 하는 모습이 거슬린다.

너의 그 말은.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네가 원하는 말을 대답해주면, 

이제 그만 그 질리는 질문을 멈출 건가?

"아주- 좋았어."

"......!"

순식간에 녀석의 두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두 손을 뒤로 잡고는 또다시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러......셨어요?"

"하- 그래. 네가 말하지 않아도 좋은 밤 이었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의, 아름다운 남자와 함께 보낸 밤이었으니까!"

".... ...."

재잘재잘 놀려대던 입이. 그제야 다물어진다.

원인모를 기쁨이 느껴질 찰나 또다시 웃어버리는 그 얼굴에 울컥

하고 무언가 가슴 속에서 튀어 올랐다.

"너는?"

"........예?"

아이 같은 그 까만 눈동자가 싫었다.

"너는. 외롭지 않나?"

"................아.......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슈엘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다.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너를. 그 남자처럼 안아 주지 않아서 외롭지 않냐 묻는 거다."

"................."

화끈.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달아오른다.

그의 말에 정곡이 찔린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워 어쩔 수가 없다.

알아버린걸까.. 알아버린걸까. 설마-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켜 버린 걸까.

안돼.

날. 싫어하게 될 거야.

두 손을 꽉 죄고 또다시 거짓웃음을 짓는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

순식간의 일이라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손이 잡히고. 그의 눈동자가 가까이 보이는 순간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거칠게 입속을 파고들었다.

아무런 배려 없이 거칠기 만한, 그의 입맞춤에 

슈엘은 두 눈을 감을 새도 없이 빠져들었다.

배려 없는 키스 라해도.

사랑 없는 키스 라해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나의....첫. 키스.

한참 후에야, 입을 뗀 후안은 입 꼬리를 올렸다.

"하.....? 반항한번 없이, 의외인걸. 

역시... 속으론 꽤나 바라고 있었던 건가?"

익숙지 않은 호흡을 고르며 슈엘은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그를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그 선홍의 눈동자를 보면 멈 출 수가 없어.

좋아한다고 고백해 버릴 거야.

-사랑을. 숨길 수 없게 돼.

고개를 돌리고 숨을 멈춘다.

두 주먹을 꾸욱 쥐어본다.

조심히... 입을 연다.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후안님."

...............................................

심장이 멈춤을 경험했다. 

후안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에 휩싸였다.

하? 장난?!!

내. 이 행동이 너에겐 장난이란 말인가.

순식간의 일이었다.

슈엘의 팔을 잡고, 자신을 외면하고 있던 얼굴을 강제로 돌려 입을 맞추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얼굴따위 상관없었다.

이미 아무것도.

아무것도.

분명 분노로 시작한 행위였다.

하지만 이건. 무슨 감정이지?!

주체할 수 없는 열기가 후안을 감싸고 있었다.

단정히 입혀진 녀석의 옷을 벗기고, 그 속살에 입을 맞춘다.

작게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에 점점 이성을 잃어버리며 그를 갈구한다.

한쪽 손으론 그의 옷을 벗기고 다른 한쪽 손으론 슈엘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 손.

"...안님, 그만하세요. 제발..."

멀리서 들려오는 듯 작은 목소리.

저항하는 손의 힘이 의외로 약해 웃음이 났다.

작진 않지만 부드러운 손에 입을 맞추자 움찔거리며 

작은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옷이 벗겨진 몸은 생각대로 탄탄한 남자의 몸이었다.

평소엔 이런 몸따위. 

이런, 남자의 몸따위 관심 갖지 않았다.

이런 까만 눈동자 따위. 까만 머리카락 따위.

"후안님.......후안님.......하아..........으윽..."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만큼은 미치도록

자신을 흥분시켰다.

점점 멀어져가는 이성과 강하게 치솟는 욕정에 후안은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슈엘의 입술에. 볼에. 목에. 가슴에. 다리에. 

그리고 그의 은밀한 그곳까지도.

이내 참을 수 없게 된 그의 남성은 슈엘의 깊숙한 곳에 닿았고 

쾌감은 절정을 이루었다.

"아...아악!! 으..."

아침햇살이 창문에 비취는 아름다운 날이었지만, 방안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두 남자의 신음소리만이 가득 찼다.

새하얀 시트는 더럽혀져갔고 쾌락의 절정에서 후안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어느 새부턴가 후안의 등을 안으며 속삭이는

슈엘의 목소리를 ... 들을 수 없었다.

"후안님. ....... 해요. .........ㅅ 랑...합니다.....“

"으음........"

얼마나 많이 그 행위가 반복되었는지 모른다.

눈을 뜨자 보이는 석양에 슈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처럼 정신을 잃다니. 바보 슈엘. 진짜........천하의 바보다.

엉망이된 몸을 일으키려 보지만 처음 겪는 고통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슈엘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공간.

붉은색의 그와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장엄한 방.

이곳에서. 후안님이.

나를. 안아주었어―.

그제야 깨달은 그 의미에 슈엘은 얼굴을 붉혔다.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린다. 

그와 자다니. 내가......................... 

내가. 

아름다운 금발도, 녹색눈동자도 가지지 않은 나를

후안님이 안아주시다니.

가슴속에서 나오는 행복과, 기대감이 커져간다.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걸까?

......... 밤의 상대라도.....괜찮은 걸까?

그것만으로도 기뻐. 정말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꾹꾹 참는 슈엘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목욕을 끝내고 나온 그의 머리카락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엉망으로 누워있는 자신과 달리 말끔히 옷까지 차려입은 후안의 모습에

슈엘은 얼굴이 빨갛데 달아올랐다.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슈엘에게 후안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듯이 뛰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할까, 하는 유치하지만 절박한.

기대감에 

심장이 

달아오른다.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있을거지?"

....................................?

"정신을 차렸으면 어서 일어나서 후궁으로 돌아가.

아니면- 그 쾌락이 잊혀지지 않기라도 한건가? 

다시 한번 내 밑에서 신음소리를 내 뱉고 싶은 거냐.“

.... 더러운 것을.

보는. 말투.

한순간의 쾌락에 취한 남창이라도 보는. 

내리까는 시선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의 눈동자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좋아한다는 말 따위. 

사실은 아주 예전부터 이렇게 당신을 원했다는 말 따위...

이런 나라도........좋겠냐는 말 따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아무......런 고백도.

후들거리는 두 손을 꼬옥 쥐고 텅 비어버린 심장에도 

슈엘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냥. 버릇처럼.

지독히도 연습한 그 성과처럼 마음과는 다르게 

싱긋이 웃고 있는 얼굴.

갑자기 보인 그 미소에 후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저건 또 뭐란 말인가...

울 줄 알았는데. 강간과도 같은 자신의 행위에, 

울면서 자신을 원망할줄 알았는데.

소리 지르며 언제나 보였던 미소 따윈 이제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당연한 듯 눈꼬리가 휘인다.

입술이, 살며시 올라간다.

그 모습에 분노보다는 

가슴이 아파..........

놀랐다.

사람의 웃는 모습에, 이토록 가슴이 아픈 적은 없었다.

왜?

어째서.......?

『 후안님...... 행복하셨나요? 』

"?!"

벙긋벙긋. 입술을 벙긋거리며 미소 짓는다.

『  .............. 행복하셨나요? 』

다시 한번 벙긋벙긋.

『 ... 그렇다면 그걸로 됐어요. 』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얼굴이었던 것처럼 웃는 얼굴이 바뀌지 않는다.

평소의 건강한 모습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피곤함이 

슈엘의 얼굴에 비춰졌다.

비틀거리며 힘들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선다.

온화한 표정과는 달리 엉망이 된 몸과, 

걸음에.

후안의 가슴이 아파왔다.

웃고 있던 표정이 보이지 않고.

.................... 작게만 보이는 등이 보인다.

뒤돌아선 남자의 등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허허한 웃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점점...  그 모습이 멀어져가고.

문소리와 함께 뒷모습은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까만 머리카락...........까만 눈동자.

짧은 시간....... 중독처럼 미쳐있었던. 그-

하얀 몸.

이제는 보이지 않는 그 미소에 후안은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하! 행복했냐고? 행복?!

너 같은 녀석의 몸을 안고 행복?

............너같이 사랑에 서투른 자에게서 행복. 했냐고?

정말, 아주 건방진 왕자로군!

정말 아주............... 경박한 놈!!"

그래도. 너의 그 미소가 가슴에 걸린다.......응?

이게 어떻게 된 거냐.......대체.... 

하필이면 왜. 이 시간에, 이 장소에 그가 있는 걸까.

자신을 쳐다보는 그 차가운 시선을 피해, 

문을 닫고 슈엘은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슈엘·알스·슈 폐하."

"안...녕하세요, 멜....."

블루의 눈동자가 생긋이 웃으며 슈엘을 직시했다.

매일같이 정갈하고 순수했던 모습의 왕자는 변해 있었다.

남자를 안- 여자의 얼굴.

아이처럼 동그랗던 눈동자가 사랑에 지독히 

상처받은 눈동자로 변해있었다.

대충 걸쳐진 옷사이로 선분홍색의 자욱이 보이자

멜은 모든 걸 알아챘다.

흐음. 그렇게 된 일이군요-.

"이런 시간에, 폐하의 침소엔 웬일이신지요?"

"........... 멜, 어째서 그런 걸 묻지요? 

제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나요?"

쿡쿡. 바보처럼 굴어도.

짐승처럼 대해도 상관없는 남창 따위에게 존칭을 쓰는 

어리숙한 면을 보여도 

역시 한나라의 왕자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군.

멜은 싱긋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왕자님. 단지, 평소에 들르시던 시간과 달라서 좀 놀랐습니다."

"나는... 나, 슈엘·알스·슈는.... 후안님의 반려입니다."

"예?"

나는. 그 사람의 반려예요...

아무리 그분의 사랑을 받지 못해도...

밤의 반려라 말하는 몸뿐인 관계가 되더라도...

그의 옆자리는. 나라고요.

당신이 아니라...

나. 슈엘···알스·슈라고-.

"그러니... 이곳엔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멜."

나의 변명. 나의 작은 바램.

자유롭다시피 매일같이 드나드는 사람에 대한.

나의.

질투.

고개 숙인 슈엘의 표정을 보며 멜의 파란눈동자가 살며시 진해졌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왕자님."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방안에서 들려온 커다란 웃음소리.

슈엘의 커다래진 눈동자와는 달리 

방안의 목소리는 커다랗고 선명히 두 사람에게 들려왔다.

"하, 하하! 행복했냐고? 행복?!

너 같은 녀석의 몸을 안고 행복?

............너같이 사랑에 서투른 자에게서 행복. 했냐고?

정말, 아주 건방진 왕자로군!

정말 아주............... 경박한 놈!!"

"..................."

털썩.

도저히.

이제는.  참을 수가 없어....

바닥에 무릎 꿇은 슈엘을 지나 

당당히 문을 열며 즐겁다는 듯 멜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위치라는 건, 저와 별 다르지 않은 것 같군요."

쾅-

문이 닫히고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후안과 함께 였다.

바람이 부는 추운 이 곳에 외로이 있는건 ‘나’였다-.

떨리는 손으로 슈엘은 입을 막았다.

안돼. 

울지마- 

울지마.

... 힘내. 

슈.

******

“폐하... 이제 좀 쉬시는 것이...”

신하의 걱정스런 목소리에도 후안은 손에 들고 있는 펜을 놓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미친 듯이 정사에만 매달리는 그 모습에 걱정은 되었지만

이 냉혹한 황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젠장-!!!”

마지막서류의 싸인을 끝내며 후안을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일에 집중하려해도!

집중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잊고 싶은데도 잊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녀석의 검은머리카락따위!

멍청해 보이는 그 눈동자 따위!

...그. 

웃는 모습 따위!

-신경 쓸 이유는 전혀 없단 말이다!

완료된 서류를 짜증스럽게 던지며 후안은 눈을 감았다.

재빠르게 신하가 방을 나가자 이제 이 넓은곳은 오직 그뿐.

창문에 비취는 까만 밤하늘에 그 녀석이 생각나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이내 똑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의심할 여지없는 남자의 얼굴.

하지만 보드라운 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만큼은 아이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두 팔 가득 안기는 몸이 생각보다 가늘어 놀랐었다.

눈물이 맺힌 까만 눈동자가 도발적으로 보여

미친 듯이.

그를 원했다.

그따위 사내를 ...어째서?

[ 후안님.... ]

그 눈동자가 떠올리자 또다시 온몸이 뜨거워진다.

[ 후안님... 그..만.. 우읏... ]

달아오르는 열기에 자신의 남성을 쥐며 숨을 내쉬었다.

하아-

낮은 신음소리가 방을 채우고 그의 머릿속엔 오직

까만 눈동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

“아야야야....”

“슈. 많이 아프니? 다른 약을 가져다줄까?”

“아, 아니아니아니!”

황급히 형을 말리며 슈는 고개를 내저었다.

만신창이로 돌아온 그날은 도저히 무얼 할 수 있는 상태가아니라

침대에 쓰러졌지만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던 것.

도저히...말할 수가 없잖아.

후안님이 나를 안아주었더다는 말같은건...

.... ....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다음날 걱정하는 형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감기에 걸렸나봐.

라는 한심한 거짓말뿐.

눈치 빠른 형인걸 알기에 속지 않을걸 알지만 

깊게 묻지 않고 나를 간호해주는 형의 배려가 너무 고맙다.

온통 상처받은 눈동자를 해서는

자신은 쌩쌩하다는 듯 열심히 수프를 떠먹는 슈를보며

사리엘이 입을 열었다.

“슈... 이제는 황제께 가지 않니?”

“!!”

자연스럽게 올라가던 손이 멈추었다. 

“아주 많이 보고 싶지만 많이 아프니까...”

아프니까 가지 못해, 형.

열이 라던가, 두통때문던가 그런 게 아니고...

그를 만나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와서

도저히 이젠 그를 볼 수가 없을 것 같아.

근성 빼면 시체인

슈엘·알스·슈가 유일한 무기를 잊어버린 거야.

“...몸이 나으면, 이제 또 그를 보러 갈 거지?”

“... ... ”

이제는 가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도저히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어...

후안님이 아무리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걸.

[ 경박한 놈- ]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왓?!!”

갑작스런 기습에 슈엘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형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나는 형의 품에 가슴이 따뜻해져온다.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리엘은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알스의 왕자는 절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아, 슈.”

“... ...응.”

“그러니까 그렇게 포기해버린듯한 눈은 하지마. 너답지 않으니까.

슈엘왕자는 알스의 왕자 중에서도 고집 세기로 유명하잖아?”

형을 꼬옥 안으며 슈엘은 편안함을 느꼈다.

응- 응-.

포기 하지 않을게.

용기를

잊지 않을게.

변함없는 시간에 등장하는 모습.

금발의 머리카락과 파란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등장에

후안은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흘리는 미소조차 유혹인 요부의 인사에

후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게 신호인 듯 멜은 옷을 벗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몸.

남자지만, 여자보다 아름다운 곡선.

같은 남자를- 유혹하는 몸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몸을 보며 아무런 욕정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에 놀랐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

그 녀석을 안기 전만해도 저 아름다움에 취했었다.

쾌락에 취해 저 자를 안았었다.

하지만-

“폐하...?”

후안의 입술과 목 근처에 키스하던 멜이 이상한 기운을 느끼곤

반응 없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붉은 눈동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폐하, 오늘은... 그만 둘까요?”

한참 후에야 후안이 입을 열었다.

“머리를 염색하고와라.”

“예?”

“네 금발이 이제는 너무 지겹군. 짙은 색으로....”

갑작스러운 질문에 멜은 혼란을 느꼈다.

빛나는 이 금발이야말로 멜의 무기였으며 

황제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갈색으로 말입니까?”

“아니 좀더, 짙은 색으로. 남색. 아니... 더 진한 검정색으로.“

“!!!!”

.... 이제야. 알겠다.

그 말의 의미.

금발의 블론드라야만 침소로 들어오라고 했던

황제가 이제 그 금발이 지겨워?

검정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라고?!

그가 이런걸 요구하는 이윤 하나뿐이잖아.

갑작스런 패배감에 멜은 수치스러웠다.

제국의 높은 사람들만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그런 나보고 그따위 남자의 대역을 하라는 건가, 당신은!

“알겠습니다...폐하의 명이시라면.”

“...그래.”

“그런데 폐하, 요즘은 반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군요.

이때쯤에 들어오셔서 자신이 만든 선물을 두고나가지 않았던 가요.“

“네가 상관할일이 아냐.”

“물론 그렇겠지만, 다만 제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

“반려님이 데리고 오신 시종을 아시나요?”

슈엘이 데리고 온 시종이라면 한명뿐이었다.

언제나 하얀 두건을 덮고 있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운 목소리만큼은 이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종과 반려님의 관계를 의심한 일이 없으십니까?”

녹색의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