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로 맞아주세요 - 아쉴리
<1>
대륙의 대왕, 가장 커다랗고 웅장하며 강대한 제국의 왕.
가장 오만 한 자-. 가장 위엄 높은 자-.
그것이 나, 후안·루비젝트·알.
태어난 순간부터 왕으로 자란 내게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없었다.
아름다운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어렸을 적 만난 아름다운 소년이 생각나 나는 말했다.
[알스공국의 왕자를 반려로 맞고 싶다 전하라.]
오래전 태자의 신분으로 방문했던 작은 공국 알스에서 보았던 왕자.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매일 밤 안곤 하는 가벼운 남창과는 달리 기품이 넘치는 녹색 눈동자.
아름다운 금색머리카락.
새하얀 얼굴 위에 웃음이 떠오를 때면,
어린 마음에도 가지고 싶다. 란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 그를 가지자. 평생의 반려가 아닌 밤의 반려로.
음란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그를 원했고,
알스는 “반려” 라는 그럴싸한 말을 반박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오는 날.
아-. 나의 천사. 얼마나 아름답게 자랐을까-.
“알스공국의 제3왕자, 슈엘·알스·슈 가
반려가 될 제국의 황제께 인사를 드립니다.”
왕자보다 앞서 마차에서 내린 시종은 하얀 두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두건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언뜻 보이는 녹색 눈동자에
아름다움을 느끼며 후안은 생각했다.
3왕자라. 그래, 그랬었군.
‘슈엘·알스·슈.’
기억나지 않았던 그의 이름.
분명 장난에 가까운 감정이라 생각했음에도
그가 카펫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가슴은 두근거렸다.
나의 천사.
소녀보다 작고,
여인보다 아름다운 나의... ...
...반...려?
“슈엘·알스·슈 입니다. 안녕하세요, 후안님!”
-이건 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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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금빛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래, 이런 까만색의 촌스럽고 멋없는 머리카락이
결코! 아니었다.
보이는 것을 초록빛으로 물들이는 녹색눈동자를 기억했지
저런 까만 눈동자에 두근거렸던 기억은 없었다.
하-! 이 후안을 능청스럽게 골탕 먹였군, 알스의 왕!
분명 특정한 누구왕자. 라고 말은 하지 않았어도 알스의 세 왕자중
가장 아름다운 왕자를 보내달라고 말했었다.
그를 나의 반려로 삼을 거라고.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까만 머리카락의 까만 눈동자.
떡벌어진 어깨하며, 보통사람보다 커다란 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제국엔 정말 눈이 많군요! 오면서 너무너무 놀랐답니다.
헤헤, 저희나라는 항상 봄이라 눈을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너무- 예뻐요!“
... 머리를 다친 녀석인가.
사랑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었고!
정식 혼사를 치루고 왕비로 데려온 반려도 아니었다.
남자의 반려!
황제인 내게 작은 공국이 보내는 선물과도 같은 것.
아기를 낳지 못하는 남자가 반려로 온 다면 그것은 뻔할 뻔자.
-기껏 해야 잠자리 상대인 밤의 반려.
그런데 이 녀석은 뭐냔 말이다.
귀엽지도 않은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동그란 두 눈으로
말똥말똥 주위를 쳐다보기에 바쁘다.
소풍이라도 온 어린애처럼 신나는 표정으로.
거기다가 네 나라의 아버지조차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 앞에서 눈?! 하하...예쁘다고?!
잔뜩 분노한 내 표정에 조용해진 분위기도 모르고 떠들어대던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헙. 하고 입을 닫는다.
“...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좋아, 알스의 영감탱이-.
자신의 아름다운 아들은 주기 싫었다, 이건가.
그렇다고 먼저 보내달라고 한 반려를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제국의 황제로서 허락되지 않는 창피함이었다.
조용히 이를 갈며 휙 돌아섰다.
돌아선 그때 마주친 녀석의 얼굴이
잔뜩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상관할 바 아니었다.
됐다. 저런 녀석은 내 취향이 아니야.
밤의 노리개 따위도 되지 못한다.
죽은 듯이 살라 말하자. 없는 사람으로 대하자.
그렇다면 평생 나를 원망하겠군.
안지도 않을 것, 사랑하지도 않을 것, 친구도 되주지 않을 것,
왜 반려로 맞아 비참한 시간을 보내게 만드냐고.
그것도 좋아.
내게 한 번이라도 분노에 소리를 치는 날엔,
그것을 빌미 삼아 알스로 돌려보낼 셈이니까.
-대신 네가 나를 찾아와 소리 지르는 일이 있기 전 까진,
넌 내 눈길한번 제대로 받는 일은 없을 거야.
슈엘·알스·슈.
******
“... 후안님은 나를 싫어하시는 걸까-.”
사랑의 고백을 한 후 이별을 선고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지만 우울한 마음은 감춰지질 않아.
바로 나 슈엘이.
웃음과 바보처럼 낙천적인 성격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내가.
작게 내뱉은 내 말을 들은 건지 옆에서 나를 바라보던
초록색 눈동자가 빙그르 웃고는 하얀 두건을 벗었다.
하얀 두건을 벗자 놀랄 만큼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먼 제국에서 유일하게 나의 사람인 이 아름다운 사람은
단순한 시종이 아니었다.
바로...
나의 형.
알스의 아름다운 사리엘 왕자.
형은 생긋이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럴 리 없어, 슈. 너는 사랑스런 아이이고, 모두가 너를 사랑해.
분명 황제도 그렇겠지.
그는 머지않아 너의 이름을 속삭여줄거야.”
아아 형. 천사처럼 고운 나의 형.
그 말에 나는 위로보단 고마움을 받아.
고개를 끄덕이며 형을 안으니 가녀린 몸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얼굴에 잘 어울리는 예쁘고 여린 몸.
빛나는 초록눈동자.
후안님의 말한 알스의 아름다운 왕자.
-그것은 형이었다.
갑자기 전달된 황제의 편지.
‘알스의 아름다운 왕자를 나의 반려로-.’
그것은 왕족의 가족답지 않게 단란한 가정으로 살아갔던
우리들에게 놀랍고 슬프기만 일이었다.
형에겐 연인이 없었지만 이제 생길 차였다.
사랑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황제의 반려라니.
... 알스의 아름다운 왕자가, 밤의... 반려가 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답이 내게서 나왔다.
[나를. 보내줘요.]
모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 알아.
그리고 누구보다 나를 더 위하는 형은 날 보낼 바엔
자신이 가는 걸 택할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난
... 그가 좋아.
내 대신 희생하지 말라며, 방으로 찾아온 형에게 한 고백이었다.
오래전- 후안님이 알스에 온 적이 있었다.
제국의 어린 황태자로.
그때의 그 당당했던 붉은 머리카락과 심홍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어.
그는 작은 공국의 꼬마왕자인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가 좋았어.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지금의 일을 기회로 삼는 나를 용서해.
고개를 푹 숙이며 죄를 고하듯 말하는 나를 안으며 형은 말했다.
[아니야, 슈. 착한 나의 동생. 네 순수한 사랑을 존경해.]
[... ...]
[하지만 그 사랑에 네가 아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응. 나직이 내 뱉은 대답소리에 형은 웃었다.
알스를 떠나는 날,
재회의 날을 정확히 약속하지 못하는 나를 꼬옥 안아주며
어머니는 우셨고,
첫째형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자식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검을 휘두른 철없는 황태자주제에.
그리고 떠나는 나의 손을 잡아준 것은 나의 둘째형.
아름다운 사리엘왕자.
하얀 두건을 쓰고 나의 시종으로서 이곳을 오기로 결정한 고마운 형.
“힘낼 거야, 형.”
“그래야지.”
헤헷. 고마워 형. 겨우 이런 일로 기죽을 순 없지.
어렸을 적 그때도 후안님은 내게 눈길을 주지 않으셨는걸.
하지만 지금 나는 반려야.
비겁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그 사람에게 다가갈 거야.
그리고 친구가 되어야지.
연인이 되어야지.
... 그의 진정한 반려가 되어야지.
******
“으음?”
여러 가지 일로 밀려있었던 서류를 확인하느냐 새벽에야 잠들어,
조금 늦게 서야 눈을 뜬 후안의 보인 것은
“왜 네가 여기에 있지?!”
-슈엘이었다.
신경질이 짙게 베어진 말이었음에도 녀석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슈엘. ... 이 망할 녀석.
지금 허락도 받지 않고 어딜 들어와 누굴 보고 있는 거냐.
녀석을 노려보았지만 생긴 것만치 둔한 놈은
꿈쩍도 않고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음만 짓는다.
아아. 그런 웃음은 그만두시지요.
환영받지 못하는 반려여.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물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준비되있는 상의를 걸치며 묻자
녀석이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낸다.
그러고는 다시 생글.
... 머리가 다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바보 같은 웃음은 나올 리가 없지.
“아침인사를 하러 왔어요. 후안님.”
“아침인사따윈 받고 싶지 않고 침실로 오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어서 나가.”
“... ...”
뭐지.
아주 잠시지만, 미소가 사라지는 저 표정은...
묘한 표정이다.
한순간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바보 같던 그 까만 눈동자가.
하지만 그것은 잠시.
또다시 생글 웃으며 말을 잇는다.
“좋은 아침입니다, 후안님. 새소리가 참 예쁘군요.”
“... ...”
바보에다가 쓸데없는 고집에다가, 눈치까지 없군.
길게 나온 것은 한숨이었고, 한숨소리가 들리자 눈 깜짝할 새
다시 나를 본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지금. 후안님, 지금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
“한 숨을 쉬시다니!
한숨 한번 쉴 때마다 수백 개의 행운이 빠져나간다는 걸 모르세요?!“
“뭐...?”
황급히 녀석인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입을 열었다.
벙긋 벙긋. 소리 내지 않고 말하는 녀석의 입 모양이 말하고 있었다.
잔뜩 심각한 얼굴로.
『 쉿! 그만 말하세요! 』
“그러니까, 대체 무슨...”
여전히 벙긋벙긋.
소리 내지 않는 녀석의 입 모양이 너무도 정확히
내 눈에 보인다.
『 비밀로 해드릴게요! 한숨쉬신 것, 저 밖에 못 봤으니까.-』
“... ...”
...............................쿡.
“쿡쿡. ㅋ... 아.. 아하하!! ”
나도 모르는 새에 웃음이 나왔다.
뭐냐... 그 진지한 얼굴은!
겨우 한숨 하나에 그런 심각한 태도는!
어째 서지?
이 녀석은 나의 반려가 아니야. 노리개조차도 될 수 없어.
처음 보자마자 버린 쓰레기일 뿐이었을 텐데.
-슈엘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녀석의 행동은 왠지 화낼 수 없었고,
이제 와서 화내봐야 체면 차리긴 글렀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또 하나.
황제에게의 웃음에 준 녀석에게 줄 벌은 없지 않은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나의 체면은.
대제국의 황제로서의 위엄은 어딜 간 거지.
늦게 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꾸욱 다물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후안을 바라보는 슈엘의 얼굴엔 가득
미소가 띄어 있었으니까.
슈엘. 이상한 녀석이다.
목을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함부로 나의 침실을 들어오는 일, 명을 어긴 일, 모두.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바보짓이라도 내 앞에서 했다간
가벼운 장난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은 결코 성군이 아닌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저 멀어진 각도로 빗나간 것이다.
처음엔 불쾌했던 마음이 재미로-
유쾌함으로 바뀌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녀석의 멍청한 행동에 웃음이라니.
아아. 이럴 순 없는 거야.
겨우 하루. 슈엘녀석이 온 지 겨우 하루.
그런데 어째서 그 녀석의 그 눈동자가 왜 그렇게 편안한거지?
어째서. 그런 녀설 앞에서 웃었던 것일까....
“폐하?”
“아... 아무 것도 아니다.”
시선을 받자 내게 안겨있던 긴 금발의 남자가
금새 순수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몇 십번, 혹은 수백 번 남자에게 안겼을 남창.
아름다운 얼굴.
블루의 눈동자가 아이처럼 빛나지만 이것은 가면.
순진한 표정도 가면.
처음인 듯한 신음소리도 모두 가면이다.
후훗. 남자를 홀리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로군.
가는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녀석이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아. 장미의 향이 난다.
매혹적인 향.
작지만 부드러운 혀가 능숙히 나의 혀를 애무한다.
춥-. 이성을 마비시키는 소리.
서로를 몇 번을 휘감은 뒤 떼어진 혀엔 포도향이 가득 베어있었다.
방금 전까지 마셨던 와인의 향이었다.
그가 익숙하게 내 입술에 에 뭍은 체액을 핥는다.
가까이 보이는 선명한 분홍빛 입술을 보자
이상하게 그 녀석이 생각났다.
벙긋-거리던 그 녀석의 입술.
생각해보니. 그 녀석 어울리지 않게 예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예쁜 색.. 이었어.
-... 쓸데없는 잡생각이로군.
후안의 입술을 말끔히 닦은 남자는 후안에게 생긋이
미소를 보여주곤 고개를 숙였다.
쾌락. 을 주는 그의 일을 시작하려는 셈으로.
후안의 다리사이로 남자의 머리가 파묻힘과 동시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 잠자리 상대를 들여보내면,
그 상대가 일을 마치고 방을 나갈 때까지
침실은커녕, 내 방안 어디든 들어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밤 후안의 방을 노크할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알스로부터 온 그 녀석을 빼고는.
“후안님. 잠이 드신 건가요?
아직 늦은 밤이 아니라 찾아왔습니다만.”
낮 동안 슈엘은 후안은 쫄랑쫄랑 따라다녔다.
철저히 무시해버리겠다는 후안의 의지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커다란 덩치를 해 가지고는 어울리지 않은 강아지 같은 눈동자로.
그런 녀석을 향해 휙 돌아보며 후안은 노여움이 폭파했다.
[시끄럽고 귀찮으니 당장 별궁으로 돌아가!]
녀석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고,
또다시 까만 눈동자엔 감정이 가득이었다.
... 울 것인가.
눈물이 고일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던 녀석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은 웃고 있었다.
생글. 변함없는 생글.
당신 언제 나한테 화냈어요? 라는 표정.
[알았어요, 죄송해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한마디만 하고 후궁으로 돌아갈게요.]
또다시 아이의 얼굴이 되어있었다.
노래를 부르듯, 소리 내지 않고 벙긋 되던 입술.
『 행복한 하루 되셔야 해요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나.
녀석이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참아냈던 것은 웃음.
... 뭐냔 말야. 저 녀석은.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 거지?
왜...화낼 수 없는 걸까.
내가 원했던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
내가 원했던 건
“폐하. 문을 열까요...?”
금발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왕자였다.
-내 앞의 이 남자와 같은.
고개를 들고 자신에게 여쭈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밤에 침실에 찾아 온 것은 분명한 무례.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슈엘녀석은 나의 반려다.
어떤 얼굴을 할까?
다른 남자를 안고 있는 날 보는 순간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글 웃는 녀석의 얼굴을 생각하자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녀석.
... 상처 주려고 남게 아니었나.
이대로 문을 열어도 재미있겠군.
“이대로 내 품에 있도록.”
“예.”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요염한 인형.
그를 보며 작게 웃고는 후안은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좋다.”
그래. 나의 반려여.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 셈이지?
달칵.
문이 열리자 어느새 익숙해진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 ...”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린 슈엘은 멍하니 후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침대 위의 소년은 관심 밖이라는 듯이
침착한 표정으로 후안의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한참 후 에야 입을 연 녀석이 말한다.
“저... 지금. 용건을 말해도 될까요.”
... 이런 기분은 뭐지...?
장난으로 한 행동이었고,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녀석을 비웃어주기 위함이었다.
기껏 밤의 반려로 온 주제에 순수한 얼굴을 하는 멍청한 왕자.
녀석에게 네 형이 왔다면 했어야 할 일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소리를 지르거나, 울게 되면.
싸늘하게 웃어 보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무표정.
피하지 않는 시선.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
... 기분이 나빠진다. 오히려 침착한 저 모습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미한 녀석의 웃음이 보였다.
슈엘이 꺼내든 것은 붉은 색 주머니였다.
“낮 동안 선물을 준비했어요.”
“... ...”
... 뭐지.
방금 작은 무언가가 가슴을 찔렀어.
“받고 싶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반려가 직접 만든 선물을 거절할 정도로
나쁜 분이 될 수 없겠죠, 후안님은.”
또다시 희미한 웃음. 웃기는 말투.
하-! 나쁜 분이 될 수 없겠죠.. 라니.
그 영악한 영감탱이가 네 아버지긴 아버지로군.
-영리한 면이 있어.
귀찮다는 듯 물러가라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익숙한 모습을 해 보인다.
아아. 또 시작이냐.
들리지 않는 녀석의 메시지.
『좋은 꿈 꾸세요』
.... ...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방문을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이 기분은.
화가 났다.
기껏 녀석에게 다른 남자를 안고 있는 모습까지 보여줬는데
짜증이 나 미칠지경이었다.
“굉장한 미남이이시군요.
물론 폐하의 기품과 용모에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문장이 맘에 들었는지 꺄르르 웃으며
남자는 말했다.
“주머니를 가져올까요, 폐하?”
아무대답이 없음은 곧 긍정이었다.
곧 붉은 주머니는 후안의 손에 쥐어졌고,
후안에게 살을 받재며 남자가 말했다.
“멋진 솜씨를 가지고 계시군요, 폐하의 반려님은.”
“... ...”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새빨간 루비가 세공된 장식품.
화려하진 않았다.
... 하지만 마음에 드는 세공법.
-녀석을 닮은 단아한 디자인.
바보. 인줄만 알았던 녀석이 잘 하는 게 있었군.
보석세공품에 관해선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내게서
이런 마음이 들게 만들다니 말이야.
한참동안 그것을 본 후안이 탁자 위에
장식품을 올려놓자
속삭이듯 달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밤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남자를 유혹하는 그 얼굴에 후안은 입을 맞췄다.
하얀 속살의 온기를 안으며 후안은 그를 안았다.
그 어떤 창부보다 아름답고 흥분되는 몸으로 그는 후안에게 안겼지만
이상하게 후안은 그를 안는 것이 집중 할 수 없었다.
『좋은 꿈꾸세요』
-그 얼굴이 생각나
언제나처럼 쉽게 쾌감에 젖을 수 가 없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밤이었다.
사람을 안으면 그 피곤함과 만족감 때문에라도 깊게 잠을 잤건만
어젯밤엔 잠이 오지 않았다.
부족한 수면에 인상을 쓰며 일어났을 때, 침실엔 이미 혼자였다.
아침 일찍, 남창은 조심히 방을 나섰기 때문이다.
옷을 입으며 후안은 생각에 빠졌다.
그 남창을 다시 한번 불러야겠어.
꽤 마음에 들었다. 외모도 최상이었고.
장미향이 참 매혹적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군.
오랜만에 서재에 박혀 책을 읽어야겠어.
류쉐인의 책이 좋겠군.
귀족과 왕을 향한 직설적인 문체... 그 때문에 사형을 당했지만.
만약 내가 그 시대의 왕이었다면 그를 나의 친구로 삼았을 텐데...
“... 오지 않았나.”
여러 생각 속에 나온 말은 정작 이것이었다.
젠장. 올 리가 없잖아.
바보처럼 웃기만 해도 영리한 녀석이었다.
진짜 바보가 아니라고!
영악한 그 영감탱이의 아들, 한 나라의 왕자란 말이다!
오만한 자존심이 분명 숨어있을테고,
자존심은 상처 입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 내 앞에
보이지 않을...
똑똑-
“저어, 후안님. 들어가도 될까요.”
“... ...”
“후안님? 그냥 들어갑니다. 화내도 몰라요.”
하...하하. 저놈은 역시 바보였군.
바보중의 바보!
아니, 바보로도 설명 안 되는 녀석.
어제와 같은 얼굴로 들어온 녀석은 나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생글, 미소를 짓는다.
“후안님. 오늘도 새가 예쁘게 지저귀지요?”
“... ...”
“좋은 아침입니다.”
그제야 알았다.
다른 남자를 안고 있는 내게 무덤덤한 녀석의 그 얼굴에
내가 느낀 불쾌감의 이유
그건. 녀석이
질투.를 하지 않아서 였다는 것.
아아. 알스의 바보왕자. 네 감정이 나는 신경이 쓰여.
만난 지 겨우 이틀뿐인 네가.
노리개조차 생각되지 않는 네가.
그것은.
내가 나의 반려라서.
단순히 그것 때문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