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햄스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4)
생각이 복잡했다.
벨리알과 로렌츠의 싸움에 조금 더 일찍 개입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이유와 신념과 감정으로 비롯한 선택을 내렸을 때, 나 혼자 그 사이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건 뼈아픈 후회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우유부단함이 부끄러웠다.
“괜찮다.”
내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내내 침묵하기만 하자, 카일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슈.”
“……안 괜찮아요. 멍청한 선택이었다고요.”
그러자,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 생과 사의 기로에서 얼마나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평범함.
그가 내게 지켜 주고 싶어 했던 ‘평범함’이란 대체 뭘까.
모든 아귀다툼에서 한 걸음 정당히 떨어질 수 있는 권리? 아니면, 타인의 죽음을 관조하고 외면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면죄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진작 벨리알을 구했어야 했다. 비록 온전한 아군은 될 수 없을지언정 로렌츠와 벨리알 중 카일에게 덜 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벨리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벨리알은 센이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너무 늦게 손을 뻗었다.
“괜찮아.”
그때, 조금 전 들었던 그 말이 다시금 건네졌다. 나는 조금 놀라 고개를 들고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센의 녹색 눈동자는 우울과 체념을 담고 있었다.
“슈. 넌 네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은 선택했어. 카일 전하의 곁을 지키기로 했잖아.”
“…….”
“그리고 나를 지켰고. 네가 날 밀어내지 않았으면, 난 분명히 화살에 맞았을 거야. 아니, 분명히 맞았겠지.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 화살이 사라졌더라.”
센이 몸을 더 조그맣게 웅크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해해. 그러기로 했어. 사람은 모든 것을 하며 살 수 없어. 하나를 해내면 다른 하나를 놓칠 수밖에 없지. 최선을 다했는데 우리끼리 원망하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녀의 말이 옳았다. 원망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우리끼리 놓친 것을 헤아리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말없이 센을 응시했다.
그녀는 벨리알을 끌어안고 있었다. 의식을 찾지 못한 그는, 수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0일 남았습니다.]
며칠 동안 벨리알의 남은 시간은 내내 0일이었다. 마치, 그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죽은 건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벨리알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우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짐마차에는 그의 관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마인하르트의 황자인 그에게 초라한 죽음이 되지 않길 바라서.
센이 벨리알의 차가운 뺨을 쓸며 말했다.
“왜…….”
그녀의 목소리가 슬프게 떨리고 있었다.
“인간은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
그건 로렌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고, 벨리알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복수를 버리지 못했던 저 자신을 비웃는 말 같기도 했다.
“왜 인간은 끝내 서로를 사지로 밀어 넣어야만 만족하고 말까…….”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감히 깨뜨릴 수 없는 먹먹한 슬픔이 마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가 피투성이인 거겠지.”
냉소적인 말이었다. 숱한 생존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은 남자가 말했기에 더욱 처절하게 들렸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처참하게 망가뜨린다.”
카일이 작은 차창을 밀어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
“휴식이 필요하겠구나, 센.”
센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웅크렸지만, 카일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벨리알이 네게 남기려던 것이 있다.”
*
마차는 본래 예정했던 길에서 이틀 정도 더 서쪽으로 빙 돌아갔다. 목적지는 황성에서 서북부로 한참을 올라가야 나오는, 외곽의 한적하고도 작은 마을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차창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완만한 흙길에 부드럽게 자란 풀, 그리고 소담하게 핀 꽃송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곧게 솟은 전나무는 고개를 바짝 들어도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높았는데, 나뭇잎이 촘촘히 자라 있는 것에 비해 가지 사이로 드는 볕은 퍽 따뜻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졸졸 흐르는 물은 깨끗하고 맑았다.
“센, 이쪽 좀 봐.”
줄곧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센이 내 부름에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달싹여,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름답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거야.”
“응.”
센의 시선이 손에 쥔 종이에 닿았다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쥐고 있던 구깃구깃한 종이는 벨리알이 카일을 통해 센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지도였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한 지점을 단출히 표시한 물건이었다.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거기서도 약간 떨어진, 너른 들판 위에 조금 외롭게 지어진 소담한 집 한 채.
그건 벨리알이 센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반지나 드레스, 보석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조그마한 통나무집은 오랜 증오에 지쳐 있는 그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모진 비바람도, 해묵은 원한도, 까마득한 절망도 감히 들어서지 못할 법한 울타리는 세상 무엇보다 따뜻하고 든든해 보였다.
“이런 걸…… 제게 전해 주려고 했다고요.”
센은 그 고요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조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제 무릎에 누워 얇은 목숨을 이어 가는 남자를 노려봤다.
“처음부터 내 미래에 전하가 없다는 걸 알고…….”
카일이 쓰게 웃으며 언덕 부근을 턱짓했다.
“묘지를 두기에는 저쪽이 좋을 것이다. 볕이 잘 드니까.”
“…….”
센은 그의 말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을 치르려면 해야 할 일이 많겠네요.”
“그 이후에도 손이 필요한 일은 많을 거다.”
카일이 침착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 만한 사람을 몇 보내마. 생활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
나는 센이 거절하거나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기보단 홀로 짊어지려 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고맙습니다, 폐하.”
센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블레이크 영지에도 종종 소식 보낼게요.”
카일이 보내겠다고 한 건, 어쩌면 센과 우리 사이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게 할 하나의 끈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 떠난 뒤로도 소원해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런 말을 직접 하기에는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카일은 조금 겸연쩍어 보여서, 나와 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어쨌건 시간은 흘러간다. 아무리 괴롭고 슬퍼도, 산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는 법이다.
그리고 분명 벨리알의 시간도, 결코 멈추지 않고 흘러갈 것이다. 얇은 호흡을 필사적으로 내쉬는 그는 지금, 이곳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생을 살아가는 중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번 사건으로 마인하르트 제국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로렌츠가 자리를 잡은 뒤, 우리와의 약속 같은 건 완전히 무시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두려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고, 더는 어떤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만 내릴게요.”
벨리알이 준비한 그녀의 집 앞이었다.
센은 간단히 짐을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부상이 심해, 오랜 여정에 힘겨워한 벨리알 측의 기사 한 명도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겠다고 보고했다.
더불어 벨리알의 상태를 살필 의사 한 명과 들것에 눕혀진 벨리알 역시 그곳에서 내렸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이별이 길어져 봤자 미련만 남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다시 만날 테니까. 직접 만날 수 없다면 편지로라도, 혹은 소문으로라도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으며 살아갈 것이다.
“…….”
센이 내리고 난 뒤, 마차는 블레이크 영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작 두 사람이 빠졌을 뿐인데, 흔들리는 마차가 유독 휑하고 넓게만 느껴졌다.
나는 창문 너머로 손을 빼 흔들어 주었다. 센의 모습이 작아지다가, 작아지다가, 이내 조그마한 점이 되어서 아예 사라져 버릴 때까지, 끝없이.
그러다가, 이제 더는 그녀가 내 손끝 하나 볼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미안해, 센.”
그녀에게 차마 건네지 못했던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나는 신이 아니다.
알고 있다. 여긴 내가 개발했던 게임 속 세상과는 다르다. 살리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다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고 해서 다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면서도 후회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숨이 턱 막혔다. 면목이 없어 건네지 못한 이 비겁한 사과의 말이 목에 걸려서.
“…….”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과는 센을 위로하기는커녕 나 자신의 죄책감도 덜어 주지 못하는, 그저 죽은 말에 불과하다.
카일의 말이 옳았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처참하게 망가뜨린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시험하듯이. 이래도 괴롭지 않을 재간이 있냐고 비아냥거리듯이.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고, 불행의 구덩이로 쑤셔 넣는다.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십 개의 감정을 꾸역꾸역 삼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힘없이 늘어진 내 팔목을 잡았다.
뜨거웠다. 죽음의 위기를 한 번 더 건너온 사람의 온기는 따뜻하다 못해 닿은 곳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그래서,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잘했다.”
카일이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잘했어, 슈. 너는 잘했다. 기어이 살아남았고, 내 곁에 남았지.”
“…….”
“앞으로는 더 잘할 거다. 최선일 수는 없지만, 더 나아지겠지. 사람은 그런 존재야. 살아남을수록 강해진다.”
“…….”
나를 틈 없이 끌어안은 열기의 주인이 속삭이고 있었다.
괜찮다고.
잘했다고.
그걸로 됐다고.
여전히, 너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언제쯤인가, 그 품에 기대서 울었던 것 같다. 점차 추워지는 땅을 따라 달리며, 모든 것을 내려 두고 가장 소중한 단 하나를 부여잡은 채로.
비정한 봄이 멀어지고 있었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일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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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