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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73화 (73/129)

73화. 햄스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3)

내가 햄스터로 돌아왔을 때, 이미 상황은 한차례 정리된 뒤였다. 숲 바깥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다행히도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블레이크 기사단과 합류했다.

“전하가 곧 돌아가실 거래.”

센의 목소리에는 어떤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켜 버린 것만 같았다.

“날 지키려다가……. 슈, 내가 그곳에 없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한탄하는 듯한 목소리는 한없이 슬프게 들렸다.

“그냥 원수였는데. 원수의 아들이었을 뿐인데. 그러니까 이용만 하다가, 버려 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 건지…….”

그녀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사랑이 이렇게 불행한 감정인 줄 알았더라면 난 절대로 전하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로렌츠 황자의 말이 옳아. 사랑은 약점일 뿐이지. 사람을 구차하게 하고, 비참하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나는 비겁하게도, 지금 내가 햄스터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내 처지 뒤에 비겁하게 숨어 침묵했다.

센도 내게서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닌 듯,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지난 모든 아픔을 끝없이 곱씹을 뿐이었다.

알고 있다.

나는 무능하고 미숙하다. 결국, 벨리알과 로렌츠의 사이에서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망설이다가, 벨리알에게 예정된 죽음을 막지 못했다.

책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지워진 또 다른 책임의 무게가 무거웠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70일 남았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은 단 하나뿐이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카일의 수명이 줄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은 더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스템 창을 다시 불러 보았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0일 남았습니다.]

벨리알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느리게나마 오르내리는 가슴팍의 움직임은 점점 미약해지고 있었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마차에서 지혈제를 찾았습니다. 잠시…….”

숲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한 의무병이 다가왔다. 벨리알을 치료하겠다기보다는, 그저 아주 잠시라도 더 붙잡아 보겠다는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넋이 나간 듯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센의 옆얼굴은 울고 있지 않았지만, 꼭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힘겹고, 비참한 순간으로 가득한 건지.

[‘불러오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처음으로 그 문구가 반갑지 않게 느껴진 아침이었다.

*

다시 ‘불러오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나는, 사람으로 돌아가 여분의 옷을 빌려 입었다.

나는 카일이 건넨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 불을 쬐고 있었고, 마지막에 따로 빠져나온 기사가 동료의 시체를 찾아와 다른 이들과 장례에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카일은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제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러멨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썩 보기 좋은 꼴이 아닐 거라며 점잖게 거절했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앓는 소리 한번 없이 익숙하게 처리한다. 마치,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난 것처럼 보여 속이 쓰렸다.

“이곳에 있었군.”

그때, 정비를 마치고 숲의 입구로 빠져나온 로렌츠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카일과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검을 쥐자, 그가 손을 설레설레 흔들어 보였다.

“어디 보자…….”

로렌츠의 눈동자가 카일의 어깨 너머를 훑었다. 센은 죽어 가는 벨리알의 몸을 끌어안은 채 로렌츠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슬픔이 흘러넘치는 눈빛이었다.

벨리알의 상태를 확인한 로렌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벨리알은 손수 목숨을 끊어 낼 가치조차 없다. 가만히 두면 어련히 죽을 것이다. 무엇보다, 블레이크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이곳에서 굳이 위험을 부담할 필요가 있을까.

로렌츠는 나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벨리알 황자의 변고 탓에, 아무래도 이 사냥의 승자가 정해진 것 같군.”

호쾌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 동생을 찌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비통함이라고는 한 조각도 묻어나지 않는 그의 음성은, 오히려 이 순간만을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듯 환희에 잘게 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센을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벨리알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아니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켠 뒤, 내 옆에 나동그라져 있던 자루를 질질 끌고 로렌츠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 묵직한 자루를 거꾸로 뒤집었다.

‘증표’가 와르르 쏟아졌다. 마수의 핵. 마수의 사체에서 뽑아 온 푸른 광석이 마치 모든 비탄을 머금은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더 많이 가져오는 쪽이 이긴다고 하셨잖아요?”

우리는 수많은 핵을 모았다. 그건 아마도 그 빌어먹을 마법사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강화 마수를 끝없이 보냈다는 것과 같은 뜻이리라.

그들은 호시탐탐 벨리알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테니, 제대로 된 사냥을 했을 리가 없다.

아니, 제대로 사냥했다고 하더라도 절대 카일만큼 필사적으로 마수를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블레이크 영지의 기사들이 이 거지 같은 마수에게 품은 분노와 증오는 상상을 초월하니까.

차르르.

광석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로렌츠의 발치에 쌓였다. 로렌츠는 그 돌이 몇 개나 되는지 세지 않았다. 아니, 셀 필요도 없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마치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사냥꾼 같기도 했고,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 두고 언제 삼킬지 가늠하는 뱀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난 그가 친 덫에 얌전히 걸려 줄 생각도, 그 배 속에 들어가 죽어 줄 생각도 없으니까.

“그렇군. 실질적인 승자, 라는 거지. 바라는 것이 있나?”

“…….”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그러자, 카일이 다친 어깨를 붙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카일 블레이크입니다.”

그 말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마인하르트의 황자’가 아닌, ‘블레이크의 대공작’으로 두고 있다는 뜻이리라.

카일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있다고 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그게 사냥의 규칙이니까.”

“제 영역에 침범하지 마십시오. 어떤 방식으로든.”

카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짐승 같은 그 목울음에 로렌츠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이 일순 검을 뽑을 것처럼 움찔거렸다.

하나, 로렌츠만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부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인가?”

“북부와 북부의 이주민들, 그리고 제 사람들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하신다면, 전하와 대적할 핏줄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반쪽짜리일지라도.”

“흐음.”

로렌츠의 시선이 카일과 센, 그리고 기사단을 지나 내게서 멈추었다. 그대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조하지. 나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는 카일 블레이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

로렌츠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일은 나를 이끌고 걸었다. 짐을 정리하고 있던 기사들이 사상자를 마차에 옮기고, 말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었다.

“돌아간다!”

카일을 따라가던 나는 고개를 돌려 로렌츠가 아주 멀어 보일 때까지 그를 노려보았다. 잔혹하고 뻔뻔한 그 남자는 아직도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완벽한 승리를 자축하듯이.

*

사냥으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내내 병상을 지키던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

당연하게도 그 빈 자리를 계승한 이는 1황자,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였다. 황성에 도착한 우리가 간단한 물건을 챙겨서 북부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즉위식은 더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길마다 화려한 장식을 하고, 황성에서는 술과 음식을 부족함 없이 풀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집에서 나와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새로운 시절이 도래함을 기뻐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한 나라의 황자가 형제와의 전투로 사선을 넘나드는데도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아무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지만, 시기가 너무나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도 그 죽음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황제의 부재로 인해 혼란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섭섭해하는 이보다 후련해하는 이가 더 많았던 까닭이었다.

“백성들은 벨리알을 더 지지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내가 그 왁자지껄한 거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카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권력에 편승하는 것이지. 힘없는 백성들은 그저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그들도 살길을 찾는 거다. 이미 기세는 기울었어. 힘없는 백성들의 삶은 대체로 그렇게 흘러간다.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

벨리알의 패배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건 아니었다. 그가 황제가 된다고 해서 마인하르트 제국이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때 믿었던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 버리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그렇게 잊히는 삶은 너무 비참하고, 외롭지 않을까.

나는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어느 때보다도 화창하고 행복해 보이는 제국의 전경을 뒤로하자, 먹먹한 적막이 나를 반겼다. 센과 카일은 그 새카만 그늘 속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내 손을 뻗은 나는, 마차의 커튼을 닫아 그 화려한 풍경과 우리의 존재를 분리해 버렸다.

덜컹. 덜컹.

황성을 떠나는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불행한 얼굴의 세 사람을 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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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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