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북부대공도 석 달이면 햄스터 말을 알아듣는다 (1)
봄이 지났다.
사람들은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존재감에 비해 허무하리만큼 쉽고 간단하게.
그건 마치 그의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나는 벨리알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덜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는 황제가 되었다. 그의 행적은 제법 놀라웠다. 비겁하다고 평가받았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전례 없는 공포 정치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 가는 그는 숱한 피를 불렀다. 로렌츠의 뒤에는 클라인 공작 가문이 있었고, 그에 대항할 만한 명분을 가진 이들은 손에 꼽혔다.
벨리알이 있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어쩌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벨리알은 오만했지만, 제 통제에 있는 것에는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성미의 소유자였으니까.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다만, 로렌츠는 사냥에서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북부를 어떤 방식으로든 압박하지 않았다. 물론, 세력 다툼에 지친 귀족들은 북부와의 협상에 소극적이었으나 카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일은 하루를 열흘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북동부 지역의 캐스터네츠 남작을 만나 교역을 성사하고, 그의 부재로 인해 혼란스러워졌던 영지를 돌보았다. 곧 찾아올 혹한을 대비하고, 마수의 남침에 대비하며 방비를 강화하기도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북부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카일은 그 모든 일을 한마디 불평 없이 해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일은 조금도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피곤해서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웃었다.
그런 사람이니, 이 척박한 북부를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 낸 거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는 많은 일을 해냈다.
개인 단위로 이루어지던 불완전한 교역을 영지 단위의 것으로 바꾸고, 사회적인 안전망 속에서 영지민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전례 없는 공포 정치에서 살아남은 영지. 누구보다 긴 겨울에 시름하면서도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는 불굴의 땅. 숱한 노력 끝에 점점 풍족해지는 북부의 요새.
마인하르트 제국의 사람들은 그 불모지의 과거를 잊고, 차가운 땅의 사람들이 거머쥔 위태로운 평화를 부러워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카일 블레이크를 부러워하거나, 혹은 카일 블레이크를 질투하거나.
언제 무엇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멍청한 관조자로 봄을 보냈던 내가 한 일은…….
밥을 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안 그래?
“마수학자님. 어디 가십니까?”
내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몸까지 돌렸다가는 들고 있는 것을 고스란히 쏟을 테니, 대답은 건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배달 갑니다.”
“대공 전하께 말입니까? 집무실에 계실 텐데요.”
“어라? 아니던데. 아까 지하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대련하고 계셨습니다.”
“엥? 새 갑옷을 들이는 문제 때문에 재봉사와 상담하시던데…….”
“아! 그래서 어디 있다는 겁니까!”
집무실에 있다는 거야, 아니면 연무장에 있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응접실? 성 밖? 창고?
카일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가 어느새 나타나곤 했다. 몸이 열 개라고 해도 그보다 빨리 나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슈 님.”
“슈.”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영지에서 약간 이질적인 존재였다.
누군가는 나를 마수학자로, 괴상한 이방인으로, 대공 전하와 언제나 함께 있는 수상한 사람으로 알았다. 모두가 내 정체를 궁금해했고, 아무도 정답을 몰랐다.
그래도 다들 적당히 넘어가 줬다.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인데도, 다들 내가 북부와 카일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넘어가 주었던 거다.
‘그러니까, 갈 곳 없는 이들까지 품을 수 있었던 걸까.’
물론 히든 퀘스트를 깨고 받았던 ‘북부의 대부’ 효과 덕도 어느 정도 있을 테지만, 아마 카일이 나를 신뢰한다는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일전에 카일에게 왜 나를 의심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꽤 담백하리만치 간단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북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황성에서 섞이지 못하고 내쫓긴 사람이나, 모든 걸 잃고 흘러들어 온 사람 말이다. 나조차도 그랬지. 그래서 억지로 캐내지 않은 거다. 물론 넌 좀 많이 수상하고, 특이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카일의 앞에서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는 것은 비밀에 부칠 이야기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내 운명 공동체를 굶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금 식은 음식이 담긴 그릇을 들고,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탁, 타닥, 탁. 타닥…….
타닥, 타닥.
규칙적으로 울리는 걸음걸이에 다른 소리가 섞여들었다. 조금 더 묵직하면서도, 내가 내는 소리보다 조금 띄엄띄엄하게 들려왔다.
나는 아, 하고 탄식하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이 먹고 숨바꼭질이나 하러 다녀야겠습니까? 숨기는 또 얼마나 잘 숨으시는지. 성을 한 바퀴 다 돈 것 같다고요. 시간 다 되어서 서재에 적당히 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낮은 목소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숨은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한 시간이 넘게 찾아다녀도 안 보여요?”
“내가 할 말을.”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걸음을 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나를 따라 걷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때때로 헛돌다가도, 항상 서로를 찾아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니까.
“이번엔 또 뭘 만들었지?”
“해산물 스튜요. 토마토 잔뜩 넣어서.”
여름 보양식 하면 고기라지만, 블레이크에 고기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았다.
얼마 전 캐스터네츠 상단 북부 지부를 통해 얻어 온 해산물이 조금 들어왔길래, 여름 보양식을 대신해서 푹 끓였다.
나를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그 역시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나와 걸음을 맞추었다.
“맛있나?”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하죠. 저 못 믿습니까?”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아니, 그것보다도 항상 내가 하는 음식을 잘만 먹었으면서 그런다. 꼭 내가 발끈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니나 다를까, 카일은 그 시답잖은 이야기조차 재밌는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내게 부드럽게 드리웠다.
“같이 먹을까.”
“시간이 애매해요. 십 분 남았나.”
“아쉽군.”
“그러니까, 다음엔 좀 얌전히 기다리고 계세요.”
핸드폰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이곳의 생활에 퍽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럴 때마다 과학 기술이 그리운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노력하지.”
노력은 무슨.
우리는 또 다음에도 헛돌 거다. 카일은 얌전히 앉아서 내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기다릴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그렇다고 그가 일을 미루고 식당에 와서 식사하기를 바라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만나겠지. 식은 음식 앞에서도 킥킥거리며 웃고, 서로를 만나러 어딜 다녀왔는지 투덜거릴 거다.
그렇게 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블레이크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눈으로 보고,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시간조차도 소중하니까.
“팔 떨어지겠어요.”
내가 부러 엄살을 부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좀 받아 주세요.”
“그래.”
내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손이 뻗어져 나왔다.
한쪽 손으로는 내 손에 겹치듯이 쟁반을 함께 쥐고, 다른 팔로는 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았다. 어깨에 턱을 괴듯 몸을 붙이더니 뺨에 입을 맞추는 몸짓이 물 흐르듯 다정했다.
눈을 내리감아 웃는 그는 즐거워 보였다.
“고생했군.”
“그렇게 아쉬워하실 것 없습니다. 전 내일도 오잖아요.”
“그 말은 꼭 떠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어차피 계속 함께 있을 것 아닌가?”
“……허어.”
나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되물었다.
“누가 함께 있어 준답니까?”
“응.”
“…….”
농담은 또 귀신같이 알지. 오해를 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면 가끔 얄밉다.
내 입은 댓 발 나왔건만, 카일은 그마저도 좋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꼭 소년처럼 짓궂게도 웃는다.
그의 미소가 쟁반 위에 놓인 반질반질한 식기에 비쳐 보였다. 그 식기가 반짝거리는 건, 비단 잘 닦아 냈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나는 괜스레 속이 간질거리는 걸 모른 척하기 위해 투덜거렸다.
“잘 잡기나 하세요. 귀한 식료품으로 만들었는데, 엎으면 무슨 소용이랍니까.”
흉터투성이의 손이 쟁반을 꽉 쥐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거칠어졌다. 손등을 길게 가로지르는 새 흉터도 생겼다.
하지만, 그게 조금도 이상해 보이거나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카일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는지를 증명하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를 좋아하는 수십 가지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저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서재로 오세요.”
“같이 있으면 안 되나?”
“저 모퉁이만 돌면 서재거든요. 일 분이면 오는 거린데.”
“일 분이나 가야 하는 거리로군.”
“어이구, 정말.”
[`(*>﹏<*)′]
나는 신이 나서 주책맞게 들썩거리는 시스템 창을 건성으로 치우며 말했다.
“알았어요. 주머니에 들어가 드릴 테니까, 빨리 가서 음식부터 먹읍시다.”
어디 가서 굶고 다니지 마라. 한국인에게 끼니란 목숨만큼 중요하다.
이렇게까지 안 하면 그는 영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바쁘니 어쩔 수 없는 건 안다지만, 그렇게 무리해 봤자 몸에 좋을 리가 없지.
카일은 내 잔소리조차도 좋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내가 가져다주는 음식은 거르는 일 없이 꼬박꼬박 먹어 치우니, 주는 사람 입장에서도 제법 뿌듯했다.
[앞으로 1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이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흰빛이 나를 감싸고, 나는 잘생긴 연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주머니에 쏙 들어가 드렸다.
그는 쟁반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주머니를 조심스레 더듬어 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지 끝으로 내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야흐로, 블레이크 영지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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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