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히든 캐릭터
[히든 캐릭터는 호감도가 세 개가 되었을 때 플레이어님의 앞에 나타납니다.]
나는 얼마 전 들었던 튜토리얼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감고 어제를 되짚었다. 내가 뭘 했더라. 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여느 때와 똑같이 네 사람과 즐겁게 놀다 집으로 돌아온 기억뿐이었다. 그 외에 무슨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수학 시간……?”
문득 떠오른 기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점심시간까지 시무룩한 현이를 좀 놀리다가 수업 때는 계속 시간을 빠르게 조절했었다. 그러다가 한 번 속도가 느려지며 선택지가 뜬 적은 있었다. 강수하와 관련된 선택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선택지가 뜬 건 수학 시간이었다. 웬일로 자는 사람도 별로 없이 다들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수업을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나야 속도 조절 중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이 갑자기 정상 속도로 돌아온 것은 순간이었다. 잠시 의아하게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내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지헌?”
수학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 언제 외우셨어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전학 왔던 날도 전학생을 찾더니 이제는 내 이름을 기억까지 하고 있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네?”
“전학 온 지 일주일 정도 됐나? 학교생활은 어때?”
사실 처음에는 전학생의 적응 여부를 묻는 선생님의 작은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반 애들도…… 다 친절하고.”
“그래? 수업은 따라갈 만하고?”
“아……. 네. 뭐. 그냥저냥…….”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수업 얘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나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래.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이 문제 답이 뭔지 한번 맞춰 볼까?”
선생님은 칠판에 적은 문제를 톡톡 두드렸다. 아, 망했다. 나는 얼굴을 확 구길 뻔했다. 첫날에도 그러시더니 진짜 저한테 왜 그러세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칠판과 선생님을 번갈아 봤다. 내가 직접 보지 않아도 아마 사정없이 동공이 흔들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싱긋 웃는 채였고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어언 5년. 애초에 수학이라면 질색을 했던지라 5년 전이었어도 풀어내기 어려웠을 터였다.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어, 그……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헤집었다. 그 순간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앞에 선택지가 떴다.
[2……?]
[1……?]
주관식 문제가 객관식이 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확률은 반반으로 줄어들었다. 솔직히 선택지만 봐도 자신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어서 썩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찍을 수 있는 게 어디야. 나는 고민 끝에 1로 가자고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내가 막 입을 달싹였을 때 강수하가 손을 움직여 내 교과서에 2를 휘날리듯 적었다.
“2……?”
내가 말하려던 선택지가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찍은 것 같은데.”
“하하.”
풀이 과정은 하나도 없이 다짜고짜 뱉어 낸 답에 나와 강수하를 한 번씩 쳐다본 선생님이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뭐 어쨌든 맞았어. 풀었다고 믿을게.”
어쨌든 강수하 덕분에 나는 위기를 넘겼다. 나는 그제야 강수하를 바라보며 ‘고마워’ 하고 입 모양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강수하는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그게 이벤트의 전부였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강수하의 매력을 더 보여 주는 이벤트인가? 막 그 상황이 끝났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컴퓨터로 게임을 할 때만큼은 자주 확인하지 않게 되는 호감도를 아침 등굣길에 무심히 확인하던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작 내가 이벤트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강수하는 두 개 반의 호감도 그대로였고 뜬금없이 히든 캐릭터의 호감도가 세 개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떠오른 것이다. 세 개가 되는 순간 내 앞에 나타난다는 그 히든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
나는 괜히 내 주위를 둘러봤다. 유난히 이른 시간에 나온 탓에 아직 새벽의 공기가 가득한 학교에는 사람이 없었다. 왠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교실로 가면 강수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녀석이 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생각만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우리 반이 있는 3층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정말 신기하게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내 두려움을 더 부채질했다. 그에 비례하듯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그리고 막 3층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나는 안도했다.
어두운 청록색 머리카락의 남학생이 창가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진 나는 터벅터벅 교실을 향해 걸었다. 저 아이를 지나쳐 가야만 교실로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에 멀리서 슬쩍 쳐다보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렇게 막 녀석을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
“안녕.”
작은 인사 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는 귀에 쉽게 꽂혔다. 나는 바로 걸음을 멈췄다. 나한테 한 건가.
나는 외면했던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그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마주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헉.”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청록색의 어두운 머리카락에 새카만 눈동자, 선이 가늘어 소년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봐도 내가 공략하고 있는 캐릭터들과 비등한 외모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공략 캐릭터들 중에서는 분명히 없는 인물이었다.
“아……. 안녕.”
나는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었다. 한번 높아진 심장 박동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심장에 해로운 얼굴이었다.
“아……. 어? 응! 안녕!”
여전히 동그랗게 나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곧 정신을 차린 듯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어찌나 반가운 기색을 보이는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영 얼떨떨했다. 공략 대상이 아니라고? 이렇게 생긴 애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해진 내 머리를 정리시켜 주려는 듯 눈앞에 도움말이 떴다.
[축하합니다. 히든 캐릭터를 만났습니다.]
……히든 캐릭터……? 밝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드는 남자를 한 번, 그리고 도움말을 한 번 보다 입을 딱 벌렸다.
“…….”
“……?”
“……너 귀신?”
“……!”
[히든 캐릭터의 공략은 모든 캐릭터들을 한 번씩 공략 완료했을 때부터 가능합니다. 히든 캐릭터 한 명의 공략에 성공하면 그다음 다른 히든 캐릭터를 만날 수 있으며, 실패하는 경우 다른 히든 캐릭터는 만나 볼 수 없습니다.]
문득 지난번 들었던 튜토리얼의 안내가 귓전을 울렸다.
[학원 로맨스에서는 캐릭터들을 공략하는 플레이어님께 재미를 더하고자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하였으며, 여덟 번째 공략 캐릭터이자 첫 번째 히든 캐릭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놀란 듯 커진 눈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확하게는 ‘귀신’입니다. 슬픈 사연을 가진 캐릭터로 그 상처를 보듬어 줄수록 히든 캐릭터의 호감도는 올라갈 것이며…….]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귀신이니 판타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고 화를 냈던 것 같다. 나는 순간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귀신이었다. 공포 영화를 왜 돈 주고 봐? 틀어 줘도 안 보는 걸? 하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할까. 무서운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그날 잠도 못 자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래서 히든 캐릭터는 절대 공략 안 하려고 했던 건데…….
“귀신 맞다는 거지?”
“……응. 진짜 어떻게 알았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흘리고 있다든지 얼굴은 새하얗고 눈만 까맣다든지 TV나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귀신들을 상상했던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근데 저렇게 생긴 귀신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저렇게 잘생긴…… 귀신. 상황 파악이 끝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가 어색하기까지 했다.
나를 보고 있는 녀석에게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하나둘 학생들이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결국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정해진 곳은 옥상이었다.
“근데 진짜 귀신 맞아? 진짜?”
옥상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도 나는 녀석에게 재차 물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얘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 귀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람 같잖아…….
“만져지잖아. 귀신 아닌 것 같은데?”
“어? 너는 왜 나 통과 안 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기지가 않아서 손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사람을 잡는 것과 똑같은 촉감이 느껴지며 어깨가 잡혔다. 당황한 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제가 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
하지만 머릿속을 점점 채워 들어가던 의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금까지 멀쩡한 사람으로 보이던 녀석이 옥상 문을 그대로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옥상의 문이 열리고 다시 한번 얼굴을 보인 녀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 그래?”
아마도 문을 열어 주기 위하여 벽을 넘어간 모양이었다. 와, 진짜 귀신이었어. 갑자기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어지러워? 괜찮아?”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온 녀석이 내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 나를 잡을 수도 있는데 귀신이라니, 진짜 말도 안 돼서 헛웃음까지 나왔다.
나는 금방 고개를 젓고 일단 옥상 안으로 들어섰다.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는 녀석의 시선이 어색했다.
“괜찮아.”
방금 전 옥상 문을 통과하던 그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현되었다. 돋아난 소름은 원래대로 잘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녀석이 귀신이라는 게 이상했다.
옥상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도 옆에 앉았다. 우리는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잠시 이어지던 침묵은 녀석에 의해 깨졌다.
“근데 어떻게 너는 나를 보는 걸까?”
순수한 질문이었다. 무척이나 궁금한 듯 동그래진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진짜 잘생겼다. 그 이중적인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귀신이라 무서운데 그 와중에 너무 잘생겨서 얼굴에 자꾸 시선이 갔다. 나도 참 나다.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그러게…….”
별달리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게 게임이라서 그래 하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 다행히도 녀석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그럼 아까 나 귀신인 거 어떻게 바로 알았어? 나 귀신 같아?”
궁금한 것도 많다. 궁금증을 가득 담은 말간 얼굴이 보였다. 나는 두 눈을 굴렸다.
“어……. 조금?”
“아, 그렇구나. 다른 귀신들이 나는 사람 같다고 했었는데.”
녀석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이상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표정이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게임 회사에서 이 히든 캐릭터에 영혼을 갈아 넣은 건 아닐까. 이상하게도 저 표정 하나에 죄책감이 들끓었다.
“아냐, 진짜 조금 그래 보였어. 내가 좀 어……. 남달라서 그래. 신기가 좀 있어서.”
그 표정 때문에 나는 진짜 누가 듣기에도 이상할 개소리를 시전하며, 이 귀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해하던 녀석은 좀 나아졌는지 나를 보며 말갛게 웃어 보였다.
“아, 너 한지헌이지? 나 너 보러 자주 갔었어.”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도가 세 개가 됐다는 건 혼자서 나를 보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당연히 나를 알고 있을 터였다.
“너 일주일 전쯤 전학 왔잖아. 전학 오던 날 다른 귀신들이랑 구경 갔었는데!”
하지만 주억거리던 고개는 순간 멈췄다. 아, 구경을…… 다른 귀신들이랑……. 왠지 떨떠름해졌다. 그러니까 귀신들한테 구경거리가 됐다는 그 느낌이 썩 좋지만은 않다고 할까.
“그날 선생님이 소개하라고 했는데 너 아무 말도 못했었잖아.”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으며 녀석이 말했다.
“같이 구경 갔던 누나가 우물우물하는 게 붕어 같아서 바보 같다고 했거든.”
녀석이 덧붙인 말에 내가 헛웃음을 쳤다. 아, 우물우물……. 붕어.
“근데 나는 네가 좀 귀여웠어. 얼마나 쑥스러웠으면 말도 못 하고 저러고 있을까 싶더라고.”
뭐랄까.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공격당한 기분이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전학 왔던 날 바로 호감도가 올랐었지. 그게 귀여워 보여서 하트가 하나 생겼던 건가. 별난 취향이네, 이 귀신.
“근데 너 이름이 뭐야?”
나는 아마 물어보려고 했다면 진작 물어봤어야 할 질문을 이제야 던졌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던 녀석은 곧 웃어 보였다.
“내 이름은 이유한이야, 이유한.”
이유한. 나는 곱씹듯 다시 그 이름을 되뇌었다. 내가 살다 보니 귀신하고 통성명도 해 보는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아침 조회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가야 돼. 조회 시간이야.”
“응. 아, 지헌아.”
“응?”
시간이 조금 빠듯하겠다 싶었다. 걸음을 재촉해 막 옥상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 이유한이 나를 불러 세웠다. 옥상 문고리를 잡으며 돌아서니 이유한은 정말 귀신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말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또 와. 나는 거의 여기에 있어.”
그 말간 얼굴에 나는 얼떨결에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영화에서나 봤던 귀신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알 리 만무하지만 내가 상상하고 있던 모습은 아니라 자꾸만 기분이 오묘해졌다. 아까 전 옥상 문을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의심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이유한을 뒤로하고 나는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교실로 내려왔다. 다행스럽게도 교실에 막 도착했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디 갔다 와?”
“맞아. 가방도 두고 어디 갔었어?”
찬 숨을 내어 쉬고 자리에 앉으니 김현과 강수하가 물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 옥상에 갔었어. 바람 좀 쐬어 볼까 해서…….”
“어? 옥상 폐쇄되어 있지 않아?”
“……응. 폐쇄되어 있더라고.”
나는 김현의 놀란 눈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이유한이 먼저 들어가서 열었던 이유가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근데 보통 귀신이 그런 것도 할 수 있나?
“무슨 일 있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내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강수하가 물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근데 옥상은 왜 폐쇄해 둔 거야? 위험해서?”
“아, 한 3년 전인가 누가 거기에서 떨어졌대. 그래서 폐쇄했다던데.”
김현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사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하고 웃어 버리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의 여기 있어’ 하던 이유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
조회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반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 애들 모두가 조용해졌다. 나는 심드렁하게 앉아 있었다.
“중간고사 2주밖에 안 남은 거 알고 있지?”
하지만 그 표정은 선생님의 말에 바로 무너져 내렸다. 중간고사 얘기에 반 아이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중간고사?”
다시 한번 되짚어 봐도 시험 얘기였다. 아니, 이 게임에 중간고사 같은 이벤트는 없는데……?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그런 건 없었다.
뭐야, 생긴 거야? 베타 테스트에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한숨이 툭 튀어나왔다. 뜬금없이 판타지를 가미하겠다고 귀신을 넣었으면 이런 리얼한 이벤트는 넣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뜬금없이 공부를 하게 생겼다.
“중간고사 끝난 바로 다음 주에 체육 대회인 것도 알고 있고?”
선생님은 내게 연달아 처음 듣는 소식을 알려 왔다. 친절하기도 하시지. 나는 작게 실소를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실의 분위기는 중간고사의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달리 눈에 띄게 밝아졌다. 특히 김현이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와! 체육 대회!”
그 엄청난 리액션에 웃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관심 없다는 듯 턱을 괴고 멍하니 책상만 쳐다보고 있는 강수하가 보였다. 이게 바로 온탕과 냉탕일까. 양옆에서 느껴지는 온도 차이가 극단적이었다.
“어떤 종목을 할지는 학생들의 참여로 정한다고 하니까 하고 싶은 종목 있으면 미리미리 반장 통해서 말해 놓도록 해. 반장은 수합해서 정리됐으면 가지고 오고. 알겠지?”
“네.”
“그래,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 하자.”
선생님은 인사를 받고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교실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체육 대회 소식에 특히 신이 난 듯한 김현이 몸을 내 쪽으로 확 틀더니 환하게 웃었다.
“난 달리기 나갈 거야!”
“달리기 잘해?”
“응. 축구도 나가야지. 강수하! 너도 축구 할 거지?”
“글쎄.”
강수하는 김현과 정반대였다. 그러니까 전혀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를 대신하여 나는 기쁨과 기대감을 숨길 수 없었다. 김현하고 강수하가 축구에……?
“둘 다 나가면 좋겠다. 축구. 완전 멋있겠다.”
운동장을 누비는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 내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치? 멋있겠지?”
“응!”
김현은 내가 반응을 보이자 더욱 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연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멋있는데 운동하는 모습은 더 멋있을 터였다. 안 그래도 이 게임에 캡처 기능 없는 것이 지금보다 더 안타까워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거봐. 지헌이도 멋있겠다고 하잖아. 할 거지, 축구?”
“……그래.”
강수하가 나를 힐끗 보더니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한껏 들뜬 김현과 나는 쾌재를 불렀다.
“좋아. 나 말하고 올게!”
김현이 빠른 걸음으로 반장에게 다가갔다. “강수하랑 나랑 둘 다 축구 들어갈 거고, 나는 달리기도 할 거야!” 하며 해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반장은 지금은 종목만 수합하고 있으니 참가 신청은 나중에 하라고 단호하게 김현을 돌려보냈다.
“아직 참가 신청은 안 한대.”
김현이 시무룩하게 돌아왔다.
“조회할 때 뭐 들었냐.”
강수하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에 김현이 곧장 입술을 비죽였다. 그 표정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내가 킥킥 웃으니 그제야 제 머리를 긁적거린다.
“그런 말을 했어?”
아마도 김현은 체육 대회를 한다는 말 이외에는 귀를 닫고 모두 흘려보낸 모양이었다.
“아, 근데 강수하, 너 농구도 잘하잖아. 그것도 종목으로 넣어 달라고 할까?”
“됐어.”
“왜. 해! 넣자. 넣어 달라고 하자.”
강수하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김현은 내 말만 듣고 부리나케 반장에게 다가갔다. 강수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엄청 멋있지 않을까?”
그 얼굴에 내가 부러 웃으며 녀석에게 말하자 강수하는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딱히 부정하지 않는 게 굳이 불참 선언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 지헌이 너는?”
금세 농구도 종목으로 추가하고 온 김현이 이제 내게 물었다.
“아냐, 난 운동 못해.”
“그래? 그래도…… 아, 맞다. 지헌이 너 체력 저질이지.”
김현이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동네에서 만났던 날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은 네가 너무 빨랐던 건데,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체력이 저질인 것도 사실이라 관뒀다.
“운동 좀 할까? 나랑 같이하자.”
“어……. 아니.”
김현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운동은 싫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너무 단호한 거절이라 당황한 듯했던 김현은 이내 아하하거리며 웃었다.
“나 너 이렇게 단칼에 자르는 거 처음 봐.”
“그러게.”
턱을 괴고 나를 보고 있던 강수하가 김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목소리에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니, 무슨 턱만 괴고 있는데 모델 같지. 시선을 돌렸던 이유도 잊고 나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
강수하는 굳이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턱을 괸 그대로 나를 가만히 보고 있는 그 시선 때문에 결국 민망해진 건 나였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저렇게 빤히 보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금방 마음이 일렁거렸다.
나는 티 안 나게 심호흡을 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김현이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김현도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피하거나 하는 것 없이 그저 눈웃음을 쳤다.
아, 이쪽도 안 되겠는데…….
나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고개를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고장 난 기계처럼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양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보던 두 사람에게서 결국은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놀리는 게 분명한 웃음소리였지만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선뜻 고개를 돌리지도 입을 열지도 못했다
***
“좋아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딱히 숨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학교가 끝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이유한과 이야기라도 좀 나누고 갈까 싶었기에 강수하와 김현을 먼저 보내고 옥상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채 올라가기도 전 4층에서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쳐 갈 생각으로 굳이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자애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온 순간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심결에 올려다보니 얼핏 두 사람이 보였다. 나는 움찔거리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사실은 예전부터 꼭 말하고 싶었는데…….”
아,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기를 써 가며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걸 듣고 있는 게 민폐인 것 같아서 빨리 내려가고 싶었는데 누가 있다는 걸 알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사실 그냥 후다닥 내려가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고백을 받고 있는 남자가 문제였다.
“용기가 안 나서 말을 쭉 못했었어.”
여자아이는 뒤돌아 있었기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똑똑히 봤다. 김준이었다. 하필이면. 그래서 더더욱 내가 여기 왔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게 얼마나 조용했는지 분명 누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윽.”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다리에 쥐가 났다. 나는 휘청이며 난간을 붙잡았다. 세 계단만 내려가면 될 것 같은데 잘 오지도 않던 쥐가 좀체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 저 상황이 끝날지 모르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 했다.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다리를 나는 급하게 주물렀다.
“준아, 좋아해.”
아, 진짜…….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진짜 내가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여전히 고통스러운 다리를 참아 가며 꾹꾹 주물렀다. 여자아이의 말에도 김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너무 오래 대답을 안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그때 내 귀에 익숙한 김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아.”
“정말 미안해.”
“……응. 그래. 부담스럽게 했다면 미안해. 사실 나는 너도 나한테 마음이 좀 있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꾸역꾸역 움직여 세 칸의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 내가 안 보일 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주저앉았다. 곧 저 여자아이가 내려올 것 같았기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의도치 않게 다 듣게 됐지만 모르는 척하면 된다. 어차피 저 여자애 얼굴도 못 봤으니까.
“그렇게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
김준의 거절이 다시 한번 귓가에 들려왔다. 생각해 보면 김준이 워낙에 다정한 성격이라 저 여자아이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오해할 만하게 행동하긴 하지, 김준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먼저 갈게.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이 들리고 동시에 탁탁탁탁 하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은 순식간에 나를 스쳐 지나갔고 1층까지 내려갔는지 점점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쥐가 아직도 가시질 않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저 여자아이와 마주친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뭐 해?”
하지만 김준을 만나는 것도 불편했는데…….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바로 머리 위에서 김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내려왔지? 소리 못 들었는데.
“아……. 안녕, 준아.”
“응. 안녕.”
내 머저리 같은 인사에 김준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한 얼굴이라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누가 봐도 엿듣고 있었던 거 같은 모양새였다.
“왜 복도에 그러고 앉아 있어?”
내 머릿속은 복잡한데 김준은 오히려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 그제야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쥐가 났어.”
“쥐 났어?”
“응. 갑자기 쥐가 나서……. 미안해. 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목소리가 민망함에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김준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
내게 웃어 보인 김준이 금세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그러고는 내 쥐가 난 다리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아파!”
“많이 아파? 지금 풀어 줄게. 좀만 참아.”
김준은 마치 제가 더 아픈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아픔에 몸부림을 쳤지만 그 덕인지 다리의 쥐가 조금씩 가시는 것 같았다.
“어때? 좀 괜찮아?”
“응.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네.”
“너 운동해서 그런가. 이런 것도 엄청 잘 풀어 주네.”
“아무래도 그렇지.”
김준이 짐짓 쑥스러운 체를 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좀 잡고 가는 게 좋겠다며, 자기 팔을 직각으로 만들고는 제 팔을 잡게 했다.
다정하기도 하지. 방금 전 들었던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왠지 다시 한번 들리는 것 같았다. 너도 나한테 마음이 조금 있다고 생각했어……라고 했지. 왠지 수긍이 갔다. 이렇게나 다정하니까.
“넌 진짜 다정하다.”
나는 불현듯 김준이 내게 가지고 있는 호감도의 개수를 떠올렸다. 한 개였지. 내게 가진 감정이 지금은 좋은 친구 정도일 텐데도 유난스레 다정했다. 내 말에 김준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내가?”
“응. 너무 다정해.”
솔직히 이렇게 잘해 주면 반칙 아닐까. 내가 공략을 하는 게 아니라 김준이 나를 공략하는 것 같다고 할까. 물론 김준은 별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이겠지만 말이다.
“쓸데없이 다정해.”
여전히 웃고 있던 얼굴이 내 말이 당황스러웠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몰래 들어서 진짜 너무 미안한데.”
“응.”
“방금 그 여자애도 다 네가 이래서 좋아하게 된 걸 거야.”
얼굴도 이렇게 잘생기고 몸도 좋은데……. 가만히만 있어도 여러 사람들이 끙끙 앓을 것 같은데 다정하기까지 하니. 방금과 같은 고백은 비일비재했겠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확신에 찬 내 말에 김준이 푸흐흐, 웃었다.
“나 되게 진지하게 한 말인데…….”
“아, 진짜? 진지하게 한 말이야?”
김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럼 너는 내가 안 다정했으면 좋겠어?”
김준이 물었다.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건 아니긴 한데…….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김준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너한테만 다정했으면 좋겠어?”
“어?”
“그런 거야?”
나는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말만 해. 그렇게 할게.”
“……아냐. 하던 대로 해. 내가 좀 오버한 것 같아.”
나는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왠지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쪽이든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어?”
“어느 쪽이 좋아?”
김준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게 덧붙였다. 무척이나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아니……. 그냥 하던 대로…….”
“아하하. 당황하긴.”
김준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보통 친구 사이의 호감도로 저런 말을 하던가. 당황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
혹시나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김준의 말을 외면하며 호감도 창을 확인한 나는 짧게 탄식했다. 분명히 하나였는데……. 김준과 눈이 마주쳤다. 김준은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예쁘게 웃었다.
왜 김준 호감도가 갑자기 세 개가 됐지?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왜?”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김준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는 애써 도리질 쳤다. 어째서 갑자기 호감도가 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결론은 한 가지였다. 김준은 호감도가 세 개가 됐고 김현과 똑같이 제 마음을 눈치챘다. 그게 어떤 감정으로 눈치챈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추측해 보자면…….
“귀여워.”
그러니까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감정. 친구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아마도.
***
“이유한!”
아직 학생들이 등교를 하기엔 너무나도 이른 아침에 나는 옥상 문 앞에 서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굳게 닫힌 옥상 문이 순간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헌아!”
그리고 내 손으로 옥상 문을 여니 여전히 말간 얼굴의 이유한이 나를 보고 웃었다. 이유한을 우연히 마주하게 된 지 3일. 나는 그날 이후로 등교 시간을 한 시간 정도 앞당겼다. 거의 옥상에 있다는 이유한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근데 어떻게 옥상 문은 여는 거지.
이유한이 연 문을 지나쳐 들어가며 나는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른 물체는 다 이유한을 통과했다. 그 어떤 것도 이유한은 만지거나 힘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옥상 문만큼은 예외였다.
순간 옥상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다던 김현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게 너일까?
“아침마다 고마워.”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 없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옥상 위에 올라올 때마다 우리는 늘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차례 사고가 났던 탓인지 옥상은 폐쇄로도 모자라 높게 방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유한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쪽으로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었다.
“고마울 것도 많다.”
“나는 네가 사실 매일 찾아와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이유한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가 싶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이유한을 힐끗 보고는 따라서 누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하늘도 좋고, 공기도 좋고. 한숨 자고 가면 딱 좋겠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으며 이유한을 마주 봤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한은 청량했다. 무슨 CF의 한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리고 병약한 느낌도 아니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왜?”
“……그냥 네가 신기해서.”
“그래? 나는 네가 더 신기한데.”
뒹굴거리며 이유한이 엎드려 누웠다. 좀 더 가까워진 얼굴을 나는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내가 뭐?”
“나를 보고, 나랑 이야기하고. 이렇게 손대면 만질 수도 있고. 신기하잖아.”
배시시 웃으며 이유한이 살짝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역시 귀신처럼은 안 보인단 말이지. 녀석이 건드린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움직였다.
“이 느낌까지 이렇게 생생하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그러면서 하는 말에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내 머리카락을 흩트린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래, 신기하지. 다시 한번 손이 내 머리카락을 훑었다. 살갗에 닿는 이유한의 손가락이 차가웠다. 그게 보통의 사람이라고 하기엔 움찔 몸이 떨릴 정도로 차가워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맨날 넌 여기서 뭐 해.”
나는 애써 무심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물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물렁물렁해졌다. 사실 히든 캐릭터가 귀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이유한을 직접 만나게 됐을 때도 여전히 공략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썩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녀석에게 시간을 들이는 건…….
이유한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마주했다. 저 눈 때문이었다. 저 끝도 없이 말간 눈.
“보통 옥상에 있어. 가끔 너처럼 전학 온다든지 뭐 그런 소식 들리면 구경 가긴 하는데……. 난 옥상이 제일 편하더라고.”
“옥상이 편해?”
“응. 학생들도 안 오고, 귀신들도 여긴 잘 안 와. 다들 시끌시끌한 게 좋대. 나는 조용해서 여기가 더 좋은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지만 이유한의 머리카락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 이상한 느낌에 마음 한구석에서 찌릿찌릿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그래.”
나는 급하게 이유한의 시선을 외면했다. 맑은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보는 이유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하늘만 바라봤다. 선뜻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아쉽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
“요즘은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르겠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을 때도 나는 하늘만 보고 있었다. 아직 채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느새 아릿해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한지헌?”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옥상에 누가 올라올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유한과 내 시선이 동시에 옥상의 문으로 향했다.
“……장우진?”
옥상 문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장우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아니, 그러는 너야말로…….”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떠 그를 응시했다. 이유한은 내가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나와 장우진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한번 던졌다가 다시 장우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장우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
“너 누구랑 얘기하고 있지 않았어?”
장우진은 옥상을 한번 둘러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덩달아 이유한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 아무하고도 얘기 안 했는데.”
“누구랑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에이, 잘못 들었겠지. 아무도 없잖아.”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장우진이 다시 옥상을 훑어봤다. 다시 한번 둘러봐도 옥상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유한만 있었을 뿐. 그 시선에 이유한이 조금은 쓰게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내려가자.”
“응?”
“옥상 폐쇄되어 있는데, 왜 열려 있는지 모르겠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하늘도 좋고 공기도 좋고…….”
“……내려가자. 응?”
별스럽게 평소 같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쩍 마주한 이유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너는 말해도 되는데……. 어차피 안 들릴 텐데.
굳이 자체 음소거를 하고 손만 흔드는 이유한을 보며 나는 티 안 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장우진을 따라 옥상 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내 손목을 쥔 장우진은 빠른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급한 일 있어?”
“어?”
“아니, 바쁘게 내려가길래.”
그제야 장우진이 걸음을 늦췄다. 조금 어색하게 눈을 굴리는 게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장우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고소 공포증 있어.”
“어?”
“고소 공포증 있다고.”
……거짓말. 그냥 듣기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고소 공포증 있는 애가 애초에 옥상을 왜 올라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장우진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옥상 위의 이유한, 그리고 옥상이 폐쇄된 것을 알면서도 올라왔던 장우진. 둘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걸까? 게임상의 스토리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애초에 히든 캐릭터의 스토리의 일부일 수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물어보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게임 속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주말이었다. 매일 비슷하지만 다른 일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유한에게는 여전히 아침마다 찾아가고 있었고 수업 시간에는 강수하와 김현과 함께였다.
점심때는 늘 네 사람이 함께였다. 이 상태로 3개월을 지내게 된다 해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울 터였다. 덕분에 누군가 한 사람을 공략해야겠다는 생각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이렇게 지내면 안 되나. 한 명을 선택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쉬웠다. 정말 일생일대의 고민 수준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복병이 생겼다. 그러니까 아침 조회 시간, 선생님이 던진 폭탄 때문이었다.
“너희들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야.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이번 중간고사 성적 봐서 야간 자율 학습까지 시작하게 될 수 있어.”
게임이면 게임답게 갈 수는 없었을까. 자율 학습이라니. 곧 죽어도 싫었다. 애들하고 만나서 놀지는 못하더라도 학교에 메어 있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 내려 드리면 될까요?”
차가 멈추고 기사님이 살갑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차 밖으로 내리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결국은 서점 앞이었다. 공부는 좀 해야겠는데 마땅히 볼 만한 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벼락치기가 따로 없다 싶었지만 보기라도 하겠다고 서점에 방문한 것이 어디냐 위안했다.
“뭐가 뭔지…….”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많은 책 종류에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나는 문과였다고. 이과 공부 같은 거 손에서 놓은 지 한참 됐는데…….
그냥 다 찍을까, 야자 하는 거야 뭐……. 속도 조절해서 빨리 돌려 버리면 되는 거 아닐까. 빛보다 빠른 속도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뭐 해?”
막 손에 들었던 참고서를 내려놨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듯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하야.”
“뭘 그렇게 놀라. 죄진 거 있어?”
아, 당황스러움에 저절로 입이 뻐끔거렸다. 그래, 뭐 만날 수도 있긴 한데 막 좌절하던 차라 더 그랬다. 나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기서 다 만나네.”
“그러게. 서점에서 널 만나네.”
은근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공부는 해야 될 것 아냐.”
“그래서 이제 책을 사려고?”
“…….”
강수하는 묘하게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너도 학교 안 가는 날은 기분이 좋구나.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예의상 사야 할 것 같아서. 근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흠, 무슨 과목 볼 건데?”
“어……. 전 과목?”
강수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를 보는 시선이 왠지 민망스러웠다.
“왜……? 너무 많아?”
“……시험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 전 과목은 어차피 보지도 못해.”
단호한 어투였다. 그치, 그건 그렇긴 하지. 금세 수긍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니 강수하가 헛웃음을 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골라 줄까?”
“진짜?”
“어려운 거 아니니까.”
나는 그제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수하가 골라 준다면야 나야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신이 난 티를 그대로 내며 붕붕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강수하가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너한테는 그렇게 큰 점수 기대 안 하실 거야.”
“응?”
시선은 책에 고정한 강수하의 뒤를 졸졸 쫓았다. 퍽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흘렀다.
“전학 온 지 얼마 안됐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아아…….”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 정도만 보면 될 것 같다. 이것도 좀 많은 것 같긴 한데…….”
금세 한 바퀴를 돈 강수하는 벌써 손에 네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퍽 진지한 얼굴로 책을 훑어보는 강수하의 얼굴을 나는 멍하니 보기만 했다.
“……왜?”
“아, 아니.”
그냥 새삼스럽게 너무 잘생겨 보여서. 나는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삼키고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긴 했지만 다행히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고마워.”
나는 인사를 건네며 강수하가 들고 있는 책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힐끔 한 번 내려다본 강수하가 책을 건네는 대신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밥 먹으러 가자.”
“응?”
“배고파.”
강수하는 여전히 제 손에 책을 들고 앞서 걸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오지 않자 자리에서 뒤돌아섰다.
“안 가?”
“……아. 가, 갈게. 가자.”
얼빠진 얼굴이 무척이나 멍청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걸음을 빠르게 옮겨 강수하의 옆에 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강수하는 유독 눈에 들어왔다. 괜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강수하의 시선이 오묘해졌다.
“왜?”
“이제 책 주…….”
“손잡고 싶어서?”
책을 향해 뻗은 손에 책 대신 강수하의 손끝이 닿았다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손끝의 감촉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강수하는 낮게 웃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장난이야. 뭐 먹고 싶어?”
“와, 너도 그런 장난치는구나.”
당황을 감추려 부러 장난스레 하는 말에 강수하가 헛웃음을 쳤다.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이 이러다가 꼭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뭐 먹을 거냐고.”
“음. 글쎄. 뭐 먹지.”
나는 강수하가 툭 치며 말을 건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도리질했다. 문제는 이게 단 한 사람에게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겠지.
“어? 지헌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게 무슨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아는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강수하와 나는 동시에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쌍둥이들이었다.
“어? 강수하도 있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두 사람이 다가왔다. 밝은 얼굴에 빠듯하게 부풀었던 풍선이 견디지 못하고 펑 터진 기분이었다.
[호감도 세 개 이상의 캐릭터가 네 명이 되었습니다.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그 순간 눈앞에 도움말이 떴다. 그 내용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호감도 세 개? 이벤트?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뭐야.”
“둘이 뭐 해?”
강수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세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음에도 나는 어떠한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김현이 내 눈앞에 손을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어, 어디 가고 있었어?”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제야 김준과 김현이 배시시 웃었다.
“우리 운동이나 할까 하고. 너희는 뭐 해? ……공부하려고?”
김준이 힐끗 강수하가 손에 쥔 책을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공부를 한다고?’ 되물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생각하는데 강수하가 입을 열었다.
“시험 일주일 남았잖아. 근데 운동을 하러 가?”
“시험 일주일 남았어?”
다시 한번 김현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아니, 나도 알고 있는 걸 너는 왜 또 몰라. 그 단순한 머릿속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같이 공부하려고 한 건 아니었고 밥이나 먹으려고. 공부 같이해 주면 나는 좋고.”
나는 웃으며 강수하를 봤다. 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어……. 우린 운동하러 갈 건데.”
“가.”
“…….”
어정쩡한 김준의 말에 강수하가 미련 없이 대답했다. 김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툭 김현을 치며 말했다.
“일단 밥만 같이 먹을까?”
“그럴까?”
그러더니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강수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 같았지만 나조차도 두 사람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하 너 너무 싫은 티 내는데.”
“알면 좀 가지.”
강수하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내 팔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바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 할 새도 없었다. 그 뒤로 김준과 김현이 따랐다. 두 사람은 킥킥거리고 웃고 있었다.
***
강수하가 들어선 곳은 서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분식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배가 고팠던지라 금방이라도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릴 것 같아 나는 배를 붙잡았다. 우리는 조금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먹을래?”
“음. 맛있는 걸로 시켜 놔. 나 화장실 금방 다녀올게.”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밥을 먹기 전에 미리 확인할 게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의 도움말. 일단 나까지 넷이서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바로 호감도를 확인하기가 어려운 탓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호감도가 세 개인 사람이 네 명이 됐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유한, 김준, 김현……. 그렇다는 건 지금 강수하도 세 개가 됐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나는 잽싸게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로 남자 친구 탭을 열었다.
“아…….”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강수하의 호감도는 어느새 하트 세 개가 되어 있었다.
이벤트가 일어난다고 했지.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도대체 무슨 이벤트가 생긴다는 걸까. 이렇게 저 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게 이벤트라는 걸까? 여러 예상을 해 보려 했지만 선뜻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예상되는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가 보면 알겠지. 나 혼자 생각만으로는 무슨 결론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식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세 사람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정작 눈길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차마 그 자리에 끼어들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치며 걸음을 빨리했다.
“심각하게 무슨 애기해?”
내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 사람이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그러지? 나는 빈자리에 앉으며 지나가듯 물었다.
“응? 무슨 얘기 했는데 그렇게 놀라?”
“아냐. 안 놀랐어.”
“……놀라던데.”
내 물음에 다급하게 세 사람이 부정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더 이상해졌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세 사람을 봤다. 셋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밥 먹고 뭐 할지 생각 중이었어.”
“밥 먹고?”
내가 가만히 눈을 굴렸다. 나 아까 강수하랑 공부하러 간다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무심결에 강수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주말이잖아. 지헌이 너도 공부하느라 피곤할 것 같기도 하고…….”
“……응?”
“그러니까 밥 먹고 놀러 가면 어떨까 싶어서.”
“중간고사 일주일 남았다니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어떻게 살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어.”
불퉁한 얼굴로 김현이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어쩐지 이 이벤트라는 거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수하 대 쌍둥이로 싸운 거야? 밥 먹고 뭐 할 건지로?”
“아니, 싸운 건 아니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는 김준이었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럼?”
“음. 약간의 의견 충돌?”
나름대로 그럴싸한 포장이었다. 나는 아예 턱을 괴고 있었다.
“지헌아, 나랑 놀자.”
“응?”
“꽃구경 가고 싶어.”
“꽃구경?”
“응.”
뜬금없는 소리였다. 갑자기 웬 꽃구경인가 할 새도 없이 김준이 툴툴거렸다.
“꽃 다 졌다니까. 나랑 스케이트 타러 가자. 이 근처에 스케이트장 생겼단 말이야.”
“……스케이트?”
“응. 요즘 덥잖아. 그 안은 시원해. 응?”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아, 쌍둥이들끼리도 의견이 갈렸구나, 하지만 둘이서만 놀고 싶다는 은근한 소유욕에 웃음기가 걷히는 것도 금방이었다.
“시험 끝나고 놀라니까.”
김준의 의견도 강수하에 의해 묵살당했다. 나는 말없이 두 눈만 굴렸다. 셋이서 이렇게 심각한 얼굴로 투닥거리는 장면을 놓친 것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곧 내게 닥칠 선택의 기회에 쉽게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강수하]
[김준]
[김현]
어김없이 선택지가 띄워졌다. 결국 이벤트라는 것은 누군가 한 사람을 택하는 것이었다. 호감도를 전체적으로 올리는 걸 방지하려는 나름의 장치는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만 달싹였다.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사람만 매력 있게 설정했다면 좋으련만. 나는 누구 하나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좋았다. 그 어떤 우선 순위 없이.
나는 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선택지 오른편으로 도움말이 떴다.
[선택하는 공략 캐릭터에 따라 이벤트가 발생되오니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오늘은 꼭 누군가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할 모양이었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주문을 마쳤는지 음식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그 음식들을 뒤적거리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나 오늘은 진짜 공부하려고 했거든.”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였다. 누가 더라고 할 것 없이 좋았고 거기에 이벤트가 발생한다는 말은 결국 호감도가 올라갈 것이라는 의미가 됐다. 그래서 더 고민스러웠다. 결국 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으로 선택했다. 그러니까 시험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그 상황으로…….
내 대답에 김준과 김현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무룩한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었다.
“어쩔 수 없지, 뭐.”
“같이 갈 거야?”
강수하가 물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운동이나 할래.”
나와 강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미안한 감정이 많이 앞섰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누군가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꼭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오겠지, 적어도 어장 관리라는 이벤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문득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지만 김밥에 떡볶이, 순대, 튀김까지 골고루도 시킨 음식을 먹으며 나는 굳이 지금은 하지 않아도 될 것 생각을 한참 후로 미루기로 했다.
곧 젓가락이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녀석들이 금세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단순함에 킥킥 웃음이 배어 나왔다. 역시 그냥 여기서 눌러살고 싶다.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가. 월요일에 보자.”
“응. 지헌아, 나중에는 나랑 같이 놀아야 해. 꼭.”
“아하하, 알았어. 시험 끝나고 놀자.”
“약속했다. 진짜.”
음식을 전부 다 먹어 치운 후의 분식집 앞, 김준과 김현은 몇 번이나 내게 약속을 받아 내고 나서야 손을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 강수하와 나는 걸음을 옮겨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카운터 앞에 서서 강수하가 물었다. 어쩐지 아르바이트생이 강수하를 빤히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저쪽 입장이라도 그럴 것 같아서 나는 그 시선은 외면하고 강수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아이스 초코 먹을래. 생크림 많이 해서.”
“응. 아이스 초코로 생크림 많이 올려서 한 잔이랑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네. 만육백 원입니다.”
그 말에 카드를 내밀려 했지만 나보다 강수하가 조금 더 빨랐다. 아, 내 거 써야 되는데. 우리 집 완전 부잔데, 잠시 머리에 헛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빠르게 털어 냈다. 나중에 사면 되지, 뭐.
“근데 아메리카노가 맛있어?”
진동벨을 받아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내가 물었다. 강수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코 많이 먹으면 이빨 썩어.”
“……내가 애야?”
“좀 애 같아.”
강수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유난히도 자주 웃는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학교에서 늘 보는 무심한 표정이 아닌 웃는 얼굴을 보니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그동안 못 봤던 웃는 얼굴을 다 몰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녀석을 따라 웃었다.
“어, 벨 울린다.”
“내가 갈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벨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드르륵, 소리에 또다시 움직인 것은 강수하였다. 데이트하는 것 같네.
“고마워.”
얼마 지나지 않아 쟁반에 곧 흘러넘칠 듯한 생크림이 올라간 아이스 초코가 도착했다. 어찌나 높게 쌓았는지 툭 치면 떨어질 것 같을 정도였다.
“수하 네가 대단하긴 대단하네.”
“뭐가?”
“……아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결국 웃음 지었다. 잘생긴 애들하고 다니면 지나가다가도 떡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공부해야지. 뭐부터 시작해야 될까.”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수하가 제 가방에서 주섬주섬 두어 권의 책을 꺼냈다. 나는 수하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사실 벌써 하기 싫은데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애꿎은 생크림만 빨대로 퍼다 입으로 집어넣었다.
“영어는 잘하지?”
일말의 의심도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서도 꾸준히 했던 게 영어라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국에서 살다 왔을 정도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수하는 그 정도의 실력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썩 잘하지 못해.”
“뭘 또 이런 데서 단호해.”
강수하가 어이없이 웃었다. 수하는 잠시 고민하듯 오늘 새로 산 내 참고서를 훑었다. 뭘 먼저 시작할지 생각하는 투였다. 나는 가만히 강수하를 보고만 있었다.
“과학을 하는 게 낫겠지?”
한참 만에야 고민이 끝난 듯 몇 권의 책 중 한 권을 녀석이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벼락치기는 암기 과목이 제일 쉬우니까.”
너한테 뭔들 쉽지 않겠냐만 그 의견에 나도 이견은 없었다. 내 앞에 내밀어진 책을 받아 들었다. 빳빳한 첫 장을 넘기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내용이 쭉 펼쳐졌다. 아, 물리…….
“수하야.”
“어?”
“물리 말고 다른 거 없어?”
“왜?”
“……나 물리 싫어.”
나한테 물리는 수학과 진배없는 거라고. 차마 거기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나는 입만 비죽거렸다. 그 표정에 웃음이 터진 강수하가 내게 건넸던 책을 다시 끌어당겼다.
“그거 말고는 지구 과학 있는데, 이거 줄까?”
“……차라리 그게 낫겠다.”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책을 바꿔 받은 내가 다시 책장을 펼쳤다. 자동으로 한숨이 먼저 새어 나왔다. 앞자리에서 강수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하기 싫어?”
아무래도 내 표정에 무척이나 싫은 티가 났었던지 강수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딱히 부정하지도 않고 입만 비죽거렸다.
“아까 현이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어.”
아마도 아까 전의 김현과 똑같은 얼굴이 아니었을까. 결국 강수하가 제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막상 빵 터져 버린 강수하를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내 입꼬리도 올라가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귀엽게 굴지 마.”
한참을 웃던 강수하는 내게 툭 던지듯 말했다.
“어?”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공부하자.”
하지만 강수하는 다시 한번 말해 줄 의향은 없는지 제 앞에 펼친 책에 시선을 옮겼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이 건네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엽게 굴지 마. 하지만 머릿속에는 방금 전 수하의 말이 둥둥 떠다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빤히 쳐다보면 눈을 도르륵 굴리던 강수하였는데…….
호감도가 세 개가 된 아까 그 순간부터 강수하가 조금 더 편하게 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뭐라고 할까…….
“집중 안 하지.”
“어? 티 나?”
“……네가 지금 보고 있는 페이지 좀 봐 봐.”
나는 그제야 내 책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아아, 목차.
“원래 모든 책은 목차부터 보는 거야.”
“……아, 그래?”
“……지금부터 할 거야. 공부.”
민망함에 저절로 삐죽대며 나가는 목소리에 강수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제 책으로 녀석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부끄러웠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자꾸만 부끄럽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친구가 아니라 호감 있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행동들이 나를 수줍게 만들었다.
나는 받은 책의 첫머리를 의미 없이 읽었다. 연애를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해 봤다고 하기에도 애매해서 이런 감정이 낯설었다. 심지어 이건 게임인데. 게임 캐릭터한테 이렇게까지 설레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설레라고 만든 캐릭터니까 마음껏 설레는 게 맞는가 싶기도…….
“딴생각만 하고 있지.”
“……티 나?”
“참나.”
한껏 복잡했던 머릿속이 강수하의 목소리에 갑자기 확 사그라졌다.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강수하를 똑바로 봤다.
“왜 또 그렇게 봐.”
“그냥.”
그냥 내가 이 기분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 아닐지 고민 좀 하느라고. 나는 찬찬히 강수하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 또한 내 눈을 굳이 피하지 않고 있었다.
“수하야.”
“어.”
“우리 30분만 놀고 할까?”
나는 강수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를 빤히 보고 있던 강수하는 헛웃음을 쳤다. 그래, 뭐 그렇게 되라고 만든 건데…….
“그래, 뭐 하고 놀까.”
강수하가 예쁘게 웃었다. 심장이 욱신거린다 싶을 정도로 떨려 오고 있었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이 기꺼운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설렘을 느끼고자 내가 여기 들어온 거니까…….
“진짜지? 놀아 주는 거지?”
“네가 그러자는데 뭐.”
아주 조금은 더 솔직해진 강수하를 보며 나는 웃었다. 받아들여 보자. 이 떨리면서 기분 좋은 감정이 얼마나 커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보고만 있어도 좋으니까.
“대신 나 시험 망하면 네가 책임져.”
장난스러운 말투로 강수하가 덧붙였다. 나는 당연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책임질게.”
“……뭘 또 책임진대.”
그 해맑은 대답에 강수하가 제 두 눈을 가리고 웃었다.
***
“맛있냐, 그게?”
“응. 적어도 네가 먹는 것보다야…….”
일요일이었다. 어제 강수하와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나니 그래도 새록새록 기억나는 것도 꽤 있었다. 그래서 기왕 시작한 것 제대로 한번 벼락치기를 해 보려는 생각으로 집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원래 집에서는 공부가 잘 안되는 거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오늘도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심도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금방 충족됐다. 카페 안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장우진을 만난 것이다.
“너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도 네가, 그것도 책을 들고 카페에 올 줄은 몰랐어.”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하여튼 꼭 한 번씩 시비지. 꿍얼거리며 아이스 초코의 생크림을 떠먹었다. 입에서 풍기는 단맛에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혀가 마비될 것 같지 않아?”
“……전혀 아니거든.”
불퉁하게 하는 내 대답에 장우진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야말로 강수하나 장우진이 무슨 맛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말해 봐야 내 입맛이 어린애라 그렇다는 답만 돌아올 테니.
“공부하러 온 거지?”
“응. 너도?”
“그것도 그렇고 집에만 있기 답답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덕분에 장우진을 우연히 만나게 됐으니 다행이었다.
“근데 난 너 공부 안 할 줄 알았는데.”
아니, 다행이 아닌 것 같았다. 시종일관 툭툭 내뱉는 말이 놀리려는 의도가 가득해서 결국 내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녀석을 노려봤다. 내 눈빛에 장우진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웃었다.
“안 할게.”
“……짜증 나. 나도 야자 한다고 안 했으면 공부 안 했어.”
비죽거리며 뱉은 말이었다. 장우진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야자?”
“응. 이번에 성적 안 좋으면 야자 시킬 거래서.”
“아, 너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시킬까?”
“시킬 수도 있잖아.”
그런가? 장우진은 여전히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그러다 곧 수긍한 모양이었다.
“그럼 공부해야겠네. 잘못하면 너만 야자 할 수도 있으니까.”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장우진이 말했다.
“나만?”
“응. 강수하는 공부 잘하잖아.”
“현이는…….”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김현의 이름을 읊조렸다.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설마 싶다가도 자꾸만 전학 첫날 칠판에 나가서 수학 문제를 풀던 그 뒷모습이 떠올라서 불안해졌다.
“걔가 좀 멍청해 보여도 야자 해야 할 정도는 아닐걸.”
“……망했어.”
나는 진심으로 슬퍼졌다. 그래, 사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확인 사살을 받고 나니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니까…….
뭐, 어제 강수하 말처럼 전학생이니까 너무 빡빡하게 굴진 않으실 거야…….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나는 아이스 초코를 쭉 들이켰다.
“공부나 하자.”
“……생각보다 빨리 회복하네.”
장우진이 턱을 괴고 나를 보며 웃었다. 아, 방금 딱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웃음 띤 얼굴에 나는 공부하려던 것도 잊고 녀석을 가만히 보고 말았다. 이것도 정말 중증이었다.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으니.
“뭘 봐. 공부나 해.”
부러 툴툴거리며 말을 뱉었지만 장우진은 그저 웃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나는 그 시선을 선뜻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왜, 뭐.”
“아, 너 머리…….”
순간 웃으며 나를 보고 있던 장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내 머리에 제 손을 가까이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이 안에서는 너무나 잦은 일이라서 익숙해진 탓이었다.
내 머리카락에 유난히 길고 하얀 손가락이 다가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단순히 쓰다듬어 준다는 느낌이 아니라 정리를 해 주려는 목적이 있는 손길이어서인지 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졸려.”
분명히 머리카락이라면 금방 다 정리가 되었을 텐데도 장우진의 손길은 계속해서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나는 카페 테이블에 엎드렸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엎드린 채 그 손길을 계속 받으니 나른해졌다. 뭘 했다고 잠이 오지,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넌 학교 옥상이 왜 싫어?”
그러니까 요 며칠. 장우진을 우연히 옥상에서 만난 그날 이후로도 나는 옥상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이유한은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과 이렇게 학교에 있게 된 지 2년쯤 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유한에게는 그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억하는 게 없었으니까. 결국 이유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와 관련이 있는 걸로 추정되는 장우진을 캐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됐다.
사연이 있는 히든 캐릭터. 그때 튜토리얼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 사연을 어디에서부터 알아 가야 알 수 있는지 나는 지금 가늠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가 저번에 옥상에서 고소 공포증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 댔었잖아.”
“뭐가 말도 안 돼. 고소 공포증 있다니까.”
“퍽이나.”
“…….”
“그래서 혹시 옥상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나 했지.”
최대한 돌려서 나는 장우진에게 물었다. 여전히 나는 엎드려 있었기에 장우진의 표정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 순간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멈췄다.
나는 머리 위에서 미동도 없는 장우진의 손에 내 손을 겹쳐 올려 토닥였다. 녀석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냥 혹시라도 내 예상이 맞다면 별로 내키지 않는 질문이었을 테니, 그에 대한 사과의 마음이었다.
“뭐, 아니면 말고.”
“…….”
장우진은 말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했나. 아니면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건가. 한숨이 저절로 잇새로 나오던 그때 장우진의 손이 내 겹쳐 있던 손을 잡아 왔다. 그 손길에 내가 멈칫거릴 새도 없이 장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 옥상에서 아는 형이 떨어졌어.”
“어?”
나는 귓가에 들린 말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 시야에 보인 것은 무표정한 장우진의 얼굴이었다.
“무척 좋아하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나서 좀 힘들었어.”
“어…….”
“그래서 누가 거기에 올라가 있으면 좀 무서워. 똑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아.”
“그러니까 올라가지 마. 너.”
어쩐지 결론이 옥상에 올라가지 말라는 것으로 나긴 했지만 나는 별 부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아는 형이라는 게 이유한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옥상에서 떨어진 게 이유한이 맞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다음은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한 장우진의 굳은 얼굴과 이유한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
중간고사는 당장 다음 주로 다가왔고 오늘의 마지막 수업이 막 끝나고 하교 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나름대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고작 일주일 정도의 공부를 가지고 시험 점수가 잘 나올 리가 없었기에 나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지, 싶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갑작스레 들이닥친 김준과 장우진 덕분에 나는 빈 가방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등장에 강수하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웬일이야?”
“공부하러 가자.”
강수하의 물음에 김준이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해맑게 내뱉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무슨 또 공부를……. 이제 공부의 ‘공’ 소리만 들어도 급격히 몸이 피로해졌다.
“그래도 기본 점수는 나와야 하거든. 가자. 얼른.”
하지만 내 마음을 모르는 김준은 그저 해맑았다. 장우진도 동의했으니까 온 거겠지? 나는 강수하와 김현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다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하지도 않았다. 꼼짝없이 가겠구나…….
나는 결국 슬그머니 가방에 책 한 권을 끼워 넣었다. 정말 공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지라 가방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왜 이제 넣어.”
그걸 또 그새 봤네. 몰래 넣은 건데……. 삐딱하게 말하는 장우진을 살짝 째려보며 나는 빠르게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이미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날이 갈수록 능청이 늘어.”
“내가 뭐.”
부러 불퉁하게 툴툴 내뱉으니 장우진이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부스스해진 머리에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을 째려봐야 했다.
주말 이후로 미묘하게 행동이 바뀐 것 같은 장우진이었다. 얼핏 보면 평소와 똑같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툭툭 말을 던지면서도 다정하게 굴었다. 그에 혹시나 싶어 호감도를 확인했다. 행동이 달라진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강수하가 호감도 세 개 반,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세 개.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장우진도 결국 호감도 세 개를 넘긴 것이다.
“학교 앞에서 할까?”
“그래.”
금방 행선지는 정해졌다. 나는 힐끗 네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호감도가 세 개가 되면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요 며칠이 지나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감정의 확신 같은 거.
“이 앞에 괜찮은 카페 있어.”
덕분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얼마 전 강수하, 김준, 김현까지 셋이서 만났을 때처럼 누군가 한 사람을 정하는 이벤트가 계속해서 나올 것 같았던 탓이었다. 그때마다 선택을 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도 노선을 정하지 못했다.
“지헌아, 무슨 생각해?”
“응? 아, 별생각 안 해.”
“공부하기 싫다고 생각한 거 아냐?”
김현이 킥킥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나는 “아니거든!” 하고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김현을 따라 웃었다. 누구와 함께 있든 너무 즐겁고 좋은데……. 차라리 몇 번이고 다시 게임을 할 수 있다면 금방 한 사람을 정할 것 같은데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고 하니 더 조심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말이 없지? 진짜 무슨 생각해? 무슨 일 있어?”
김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냐, 그런 거.”
금방 고개를 저었다. 녀석들의 모든 신경이 나한테 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 마음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기분 좋은 걸 보면 나도 참 답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걸음을 옮긴 곳은 학교 앞의 조금은 큰 카페 안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그래도 꽤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는 창가 쪽 조금 넓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딴짓도 못 하겠네…….”
“앉자마자 무슨 딴짓할 생각을 먼저 해.”
울상을 하고 내뱉은 말에 장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양옆에는 강수하와 김준이, 바로 맞은편에는 장우진과 김현이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한눈팔면 모두가 바로 알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이럴 땐 구석이 좋은데……. 나는 무심코 강수하를 바라봤다. 미련 가득한 시선에 강수하가 의아하게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리 안 바꿔 주겠지……. 결과가 뻔한 생각이었다.
“공부하자.”
김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김현도 공부를 좀 한다는 거지……. 어쩐지 여기서 나만 바보가 아닐까 싶어졌다.
음료 다섯 잔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다들 한 모금씩 마시는가 싶더니 금방 각자 들고 온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나만 빼고. 나는 책을 보는 척하며 녀석들을 구경했다. 이쪽 구경이 좀 더 재미있었으니까. 공부보다야 뭔들 재미없겠냐만.
테이블은 조용했다. 아니, 카페 전체가 조용했다. 마치 독서실을 방불케 했다. 나는 결국 흥미 없는 책을 펼쳤다. 하필 들고 온 책이 또 물리였다. 첫 페이지부터 나는 불씨처럼 가늘게 남아 있던 흥미를 잃었다.
“강수하, 이거 풀어 봐.”
하지만 다른 네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읽히지 않는 책을 읽고 있었다. 한참을 말도 없이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 들리고 있었을 때 그 침묵을 깬 것은 김현이었다. 그나마도 공부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 목소리마저도 반가워 나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이거 미분하면 2분의 5에서 극댓값하고 극솟값을 가질 수 있는데…….”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김현이 내민 문제를 살펴본 강수하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수학 문제 푸는 남자가 섹시한 건 알겠다. 무심코 든 생각에 나는 헛웃음을 쳤다.
“침 흐르겠다.”
“응?”
“문제 푸는 게 신기해? 완전 그런 얼굴인데.”
김준의 웃음기 섞인 말에 나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났나, 부끄러움이 물밀 듯 들어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
“……티 나?”
“응. 좀.”
킥킥거리고 웃는 김준을 따라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나름대로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다 티가 났던 모양이다.
“잘 안 되는 거 있어?”
언제 다 풀었는지 강수하가 다가왔다. 그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워서 나는 무심코 뒤로 살짝 물러났다.
“아, 아냐.”
멍청한 대답도 함께였다. 방금까지 분명히 다들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네 사람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부해.”
몰린 시선이 부끄러워 어색하게 손사래를 쳤다.
“좀 쉬었다가 하자.”
하지만 다시 책을 볼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김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공부하자고 했으면서 빠른 태세 변환에 네 사람이 웃음을 흘렸다.
“귀엽긴.”
김준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귀엽다고 즐거워하는 건 내가 이 게임의 플레이어라서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를 귀여워할까.
“지헌아, 그거 맛있어?”
“응? 응. 맛있어. 아메리카노보다는 분명히 맛있을 거야.”
음료를 마시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김현이 묻는 말에 강수하와 장우진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음료 중 왜 마시는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메리카노였다.
쓰기만 한데……. 왜 마시는 거지? 개인의 취향이라지만 사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덕분에 잘 마시고 있던 음료를 저격당한 강수하와 장우진이 헛웃음을 쳤다.
“네가 초딩 입맛인 거야.”
“초코는 너무 달아.”
사실 나는 오늘도 생크림을 잔뜩 올린 아이스 초코였다. 공부할 때는 당이 떨어지니까 단걸 먹어 줘야 하는 건데……. 어쨌든 내 말에 장우진은 발끈했고 강수하는 무심하게 내 음료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내 취향이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달지 않아? 거기에 생크림까지 올려서 더 달 것 같은데.”
“단게 맛있는 거야.”
“그래? 나 마셔 봐도 돼?”
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김현 쪽으로 내밀었다. 바로 빨대를 문 김현이 쪽쪽 소리를 내며 음료를 마시고 입을 뗐다.
“달긴 엄청 달다.”
“그걸 꼭 마셔 봐야 아냐.”
김준이 웃으며 김현에게 말했다.
“바보냐. 간접 키스 몰라?”
김현은 바로 킥킥거리고 웃었다. 순간 우리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그 자리에서 오로지 김현만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닫자 바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뭐야, 그래서 마신 거였어? 김현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김현은 웃고 있었다.
“아, 아아…….”
나는 아마 무척이나 멍청한 얼굴이었을 거다. 나는 왜 끄덕이는지도 모르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와. 김현…….”
김준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쳤다. 순간 강수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갑자기 일어선 녀석 때문에 깜짝 놀라 가슴을 부여잡았다. 강수하는 그런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운터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뭘 하는 거지, 생각할 때 맞은편에서 장우진의 짜증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카운터에서 돌아온 강수하의 손에 새로운 빨대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고맙…….”
강수하는 미련 없이 원래 꽂혀 있던 빨대를 쟁반 위로 던졌다. 나는 무심결에 김현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 눈에 예쁘면 남들 눈에도 예쁜 거라더니…….”
김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내 귀에도 너무나도 잘 들리는 혼잣말이긴 했지만.
***
“드디어 끝났다.”
나는 찌뿌둥해진 몸을 곧게 폈다.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다. 몇 주 전부터 그렇게 내 멘탈을 괴롭히던 게 막상 끝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잘 봤어?”
김현이 웃으면서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보진 않았는데 그래도 야자는 안 해도 될 것 같아.”
“잘 봤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이 있었는지 예전에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아예 망쳐 버리진 않은 것 같긴 했지만……. 김현이나 강수하에 비하면 당연히 턱없는 점수였다. 뭐, 그 정도는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체육 대회 종목 나왔어. 참가하려는 종목에 신청만 하고 집에 가래. 종례 없다고.”
종례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반 애들이 저마다 어떤 종목에 참가할지로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방금까지 봤던 시험은 기억 속에서 지운 사람들 같았다. 물론 김현도 그런 반 애들의 변화에 합승한 상태였다.
“나 달리기!”
“계주?”
“몰라, 뭐든 다 좋아.”
김현은 해맑게 말했다. 달리기가 왜 좋지? 아니 운동이 왜 좋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장은 김현의 뭐든 좋다는 말에 100미터, 2백 미터, 계주까지 온갖 달리기에 김현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체육 대회 내내 달리기만 하려는 걸까……? 나는 신이 난 듯 방방 뛰는 김현을 가만히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현아. 축구 한다고 했잖아.”
“아, 맞다. 나 축구도 넣어 줘!”
“축구랑 100미터랑 시간 겹쳐. 100미터는 강당에서 한대.”
반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단호한 말에 김현은 바로 시무룩해졌다.
“그럼 100미터를 하지 말고 축구를 나가. 어차피 달리기 두 개나 더 들어가 있으니까.”
“음, 그럴까?”
잠시 고민하던 김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나 100미터 빼고 축구에 넣어 줘. 아, 강수하도 축구에 같이. 강수하, 할 거지?”
“어.”
참가 종목이 금세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렸다. 축구하는 거 구경할 수 있겠구나. 왠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강수하와 김현이 상상이 돼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에다가 강수하는 농구에도 추가됐다. 어쩐지 체육 대회는 내 관광 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지헌. 너는 뭐 할 거야?”
거의 대부분의 종목에 반 애들의 이름이 들어차고 있었다. 잠시 그 종목을 보고 있던 반장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운동 못해.”
“그래도 한 개 이상은 나가야 해. 선생님이 그러라고 하셨어.”
난 그 말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 나 운동 진짜 못하는데. 당연히 나갈 생각 없던 나는 그제야 남아 있는 종목을 확인했다. 단판으로 빨리 끝나는 팔씨름 같은 사소한 종목은 이미 다 꽉 차 있었다.
……아, 내가 축구나 농구를 할 수도 없고. 그런 거 하면 구경도 못 할 텐데…….
“100미터 달리기 비었는데, 이거 할래?”
“나 달리기 잘 못해.”
“괜찮아. 져도 돼.”
반장이 웃으며 말했다. 100미터 달리기랑 축구랑 겹치는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칠판 위 100미터 달리기에 내 이름이 적혔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달리기는 빨리 끝나니까.
“그럼 우리 축구 보러 못 와? 준이랑 장우진도 축구 한다고 했는데.”
김현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아쉬운 쪽은 내 쪽이었다. 엄청 기대했는데. 하지만 나는 별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방 뛰고 구경 갈게.”
그래도 남아 있는 종목 중 가장 빨리 끝나는 게 달리기니까.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시험도 끝났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했던 한 주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체육 대회 당일. 완전히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반에서 맞춘 반티를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봄의 햇살이라기에는 좀 따가운 햇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게임이든 현실이든 변하지 않는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 말씀을 들었다.
“덥다.”
“응. 그리고 지루해.”
애꿎은 운동장을 발로 툭툭 차며 김현과 내가 말을 주고받았다. 벌써 김현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엊그제만 해도 좀 쌀쌀했던 것 같은데.
“이상입니다.”
다행히도 끝을 모르고 길어지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났다. 그 덕에 우리 표정이 급격하게 환해졌다. 줄을 맞춰 서 있던 학생들은 다 각자 지정된 스탠드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 넓은 운동장에서 그늘이 있는 곳은 그곳뿐이라 다들 조금은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자, 먹어.”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강수하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각 반마다 한 박스씩 제공된 모양이었다. 나는 반갑게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고마워.”
“아, 한발 늦었어.”
아이스크림을 받자마자 강수하의 등 뒤에서 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상인 얼굴로 서 있는 녀석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나를 주려고 가져온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체육 대회 첫 종목은 피구와 발야구였다. 운동장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피구와 발야구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그 종목에 출전하지 않는 학생들은 스탠드에 앉아 자기 반을 응원하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우리 반은 아직 차례가 아니라 가만히 스탠드에 앉아 있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저 종목들이 끝나면 강수하와 김현은 축구를, 나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러 가야 했다.
“한지헌!”
그 기다림이 무료할 법도 하지만 양옆의 강수하와 김현 덕분에 딱히 그렇진 않았다. 별생각 없이 두 사람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리고 있었을 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유……!”
그 소리에 뒤돌자 보인 것은 밝은 얼굴로 서 있는 이유한이었다. 나는 무심코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문득 이유한은 나에게만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덕이었다.
“누구 있어?”
“아, 아니?”
이유한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들 반티나 체육복을 입고 있는데 혼자만 교복을 입고 있어 유난히 눈에 띄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많은 사람들 중 나뿐이라 기분이 오묘해졌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같이 갈까?”
“아냐. 금방 갔다 올게.”
“응. 갔다 와.”
나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이유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주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아 바로 말을 걸 수는 없었다. 나는 이유한에게 눈짓했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다행히도 이유한은 별다른 말없이 나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나는 이유한을 편하게 마주 볼 수 있었다.
“웬일이야?”
“아, 체육 대회 구경하러 내려왔어.”
해맑은 얼굴로 이유한이 말했다.
“친구들이랑 같이 보려고. 아, 그때 지헌이 너보고 붕어 같다고 했던 누나도 같이……!”
“아냐, 그만 말해. 그만.”
물 흐르듯 꺼낸 이유한의 말에 나는 다급하게 귀를 막았다. 하지만 이미 들을 말은 다 들은 후였다. 뭐야, 그럼 지금 여기 이유한 말고도 다른 귀신이 있다는 거야?
사실 이유한은 내가 생각했던 귀신과는 느낌이 달라서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자각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대화도 하고 그랬던 건데……. 다른 귀신이 또 있다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나는 두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어디지, 어느 쪽에 있는 거지……?
“아, 지헌아. 지금은 없어.”
“어?”
“잠깐 친구 만나고 온다고 해서 보냈어. 이따 축구 한다고 미리 구경 가 있겠다면서 다 거기 모여 있는걸.”
나는 그 말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너 귀신 무서워하는구나. 근데 나도 귀신인데……?”
이유한이 곱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아, 근데 너같이 잘생긴 귀신이 또 있겠냐고. TV나 영화에서 봤던 피가 철철 흐르는 귀신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라서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지헌이 너는 뭐 나가? 혹시 축구 나가?”
“아니, 난 안 나가.”
“그럼?”
“……어……. 달리기?”
조금은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솔직히 이유한이 구경 오겠다고 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런 것도 있었는데…….
“진짜? 언제? 100미터? 나 구경 갈래.”
안타깝게도 내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나 달리기 못해.”
“근데 왜 나가?”
“무조건 하나는 나가라고 해서.”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본 이유한은 아하하 거리며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나 분명히 꼴등 할 거야. 그러니까 구경 오지 마.”
“그렇게 말하면 더 보고 싶지. 이따 축구 할 때 하는 거 맞지? 강당에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스케줄을 또 이렇게 꿰고 있어…….
“그럼 내가 이따 강당으로 바로 갈게.”
“안 왔으면 좋겠는데…….”
“이따가 또 봐. 알겠지?”
이유한은 방긋 웃더니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역시 사람 같아. 내가 아는 TV 속의 귀신들처럼 투명해진 게 아니라 뛰어서 사라지는 이유한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봤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문득 정신이 확 들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우리 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은 빠른 걸음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돌아오자마자 어김없이 김현이 물었다. 은근히 툴툴거리는 얼굴이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곧 경기 시작해서 너 얼굴도 못 보고 가야 되는 줄 알았어.”
덧붙인 말이었다. 어디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뭘 또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불퉁해진 얼굴에 그런 생각마저도 금방 잊혔다.
“그랬어? 무슨 경기 시작한대?”
“축구. 곧 할 것 같아.”
“진짜?”
강수하의 대답을 증명하듯 1차 피구 경기가 끝이 나 정리되고 있는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말은 곧 나도 달리러 가야 한다는 말이네. 어쩐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싫어?”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그냥 하지 말래? 지금이라도 바꿔 달라고 할까?”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김현이 바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하기로 했는데.”
“넘어지면 어떡해.”
아마도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안 넘어져. 빨리도 안 달릴 거야.”
“진짜지?”
“응. 우리 반은 비록 지겠지만…….”
“상관없어.”
어찌나 단호한지 강수하의 말에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반장이 힐끗 이쪽을 보는 것 같았지만 둘 다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곧 축구 경기 예선 및 100미터 달리기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출전하는 학생들은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딱 그때 즈음에 운동장 내 방송을 통해서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도 바로 예선 시작하나?”
“아마 곧 할걸. 데려다줄까?”
“……내가 애야?”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대하듯 하는 말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선 강수하에 나는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됐어, 너희도 운동장에 곧 나갈 것 같은데. 다치지 말고. 나 빨리 뛰고 올게.”
“……흐음. 응. 그래.”
“넘어지지 마, 알겠지?”
“알았어.”
“천천히 뛰어.”
“알았대도.”
두 사람에게는 내가 정말 애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저었다.
“잘해. 금방 올게.”
“어, 지헌아. 같이 가. 상원아. 달리기하러 가자.”
다행히도 나와 같이 출전하는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덕분에 반장, 나 그리고 같이 출전하는 애를 포함한 몇몇이서 강당으로 향했다.
수하나 현이를 제외하고 그렇게 많이 말을 섞어 보지는 않았던 터라 조금 어색했지만, 혼자서 강당에 가야 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거리는 강당 안. 꽤 많은 학생들이 들어차 있었다. 달리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각 반마다 두 명씩이었는데 아무래도 응원하는 애들이 많은 듯 보였다. 그제야 갑자기 긴장감이 밀려왔다. 이 많은 애들 앞에서 거북이처럼 뛰어가는 내 모습이 상상되어서였다.
“지헌아, 긴장하지 마. 꼴등 해도 돼.”
그 긴장감을 알았는지 반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지만 오히려 더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으, 생각만 해도 창피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헌아!”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사를 건넬 수는 없어 나는 반장에게 구석에서 좀 쉬겠다고 대충 설명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는 굳이 구경 오지 말았으면 했는데 막상 이유한이 오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대기 줄에서 빠져나와 이유한과 대화할 만한 구석으로 향했다. 그 뒤를 이유한이 쫄래쫄래 따랐다.
“나 너무 긴장돼.”
“긴장돼?”
조금 무리에서 떨어진 구석에 다다라서야 나는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이유한이 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나 달리기 진짜 못하는데.”
“아냐, 못하면 뭐 어때.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래도 꼴등은 너무 창피하니까. 나는 다리를 동동 굴렀다. 차고 넘치는 긴장감이 좀체 가시질 않았다. 이유한이 나를 달래듯 내 손을 잡아 왔다. 갑자기 차가운 손이 닿자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괜찮아. 못해도 돼.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하하.”
“뭐라고 하면 내가 혼내 줄게.”
“네가?”
“음. 귀신 붙는 게 어떤 건지 보여 줄까?”
꽤 진지한 말에 긴장하던 것도 잊고 웃음이 터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은근히 위안이 됐다.
그때 출발선에 각 반의 대표들이 섰다. 아마 1차 예선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나와 같이 출전한 우리 반 대표가 출발선에 서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모았다. 제발 네가 본선에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떨어져도 덜 민망할 것 같으니까.
두 손까지 모은 내 옆에서 이유한이 소리 내 웃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기에 나처럼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이유한은 그저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 마.”
“왜애. 머리카락 부드러워.”
“아, 진짜…….”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됐다. 각 반의 대표들이 달리기 시작하고, 주위에 몰려든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제 반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는 이유한이 내 머리를 만지거나 말거나 그 경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100미터 달리기의 1차 예선은 단 15초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와, 진짜 다행이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반 대표는 예선을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제야 나를 누르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반에 단 한 명만 본선까지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뭐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나 이제 가야 해.”
“응. 1등 하고 와.”
이유한이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물론 나는 바로 도리질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방금 경기 이후로 바로 내가 뛸 차례였기에 나는 출발선에 섰다. 이유한에게 멀어져 출발선에 가까워지니 겨우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거 나간 적 없었는데.
머릿속이 투덜거림으로 가득 찼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꼴등만 하지 말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지헌, 파이팅!”
달리기를 구경 온 우리 반 애들이 나를 응원하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저절로 오그라드는 소리였지만 그보다 더 귀에 크게 꽂히는 것은 저 멀리서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이유한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유한을 보며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방방 뛰고 있는 게 자꾸 시선이 갔다. 하지만 곧 출발 신호가 떨어질 것 같아 나는 결승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듣자마자 나는 최대한 열심히 뜀박질을 시작했다. 아마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 뜀박질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멀기만 하던 결승선이 거의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싶었다. 느낌상 꼴등도 아닌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뛰면 끝난다, 하는 생각이 막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악!”
하지만 그때, 우당탕탕 하는 큰 소리를 내면서 나는 강당 바닥을 굴렀다. 넘어져 버린 거였다. 보통 넘어지면 부끄러움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데, 다리를 어떻게 찧었는지 부끄러움이고 나발이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나는 내 다리를 움켜쥐고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헌아! 괜찮아?”
“어떡해, 선생님!”
주위로 사람이 모여들었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진짜 부러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대답할 여유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나는 다리를 잡고 아예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주위에 몰린 사람들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듯 웅성거리기만 했다.
“어떡, 어떡해……. 지헌아, 지헌아…….”
그러던 중 귀에 꽂힌 것은 이유한의 목소리였다.
“병원 가야 되는데, 양호실이라도……. 보고 있지만 말고 좀. 아.”
나는 그 목소리에 눈을 떴다.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그 잠깐 사이 눈물범벅이 된 이유한이었다. 우왕좌왕 움직이는 애들이 이유한을 마구잡이로 통과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를 잡지도 옮기지도 못하고 덜덜 떨며 내 무릎을 짚은 이유한의 손은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마음이 서늘해져 왔다.
“괜찮, 괜찮아.”
식은땀을 질질 흘리면서 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이유한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주위에서 반응을 보여 왔다. 어느새 내게 다가온 선생님은 나를 양호실로 옮겨 달라 주변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반장과 우리 반 아이 중 한 명이 나를 들쳐 업었다.
“괜찮아?”
“응.”
아릿아릿한 다리가 계속 통증을 일으켰다. 부러진 건 아니겠지? 아니, 부러졌다면 이보다는 훨씬 아플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이유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큰 눈에 눈물을 퐁퐁 흘리며 나를 따라오는 이유한이 안쓰러웠다. 왜 그렇게 울어. 달래고 싶은데 달랠 수가 없어서 더 마음이 쓰였다.
“선생님! 넘어졌어요!”
양호실 문이 열리자마자 반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거의 들려 오다시피 한 나를 양호 선생님은 바로 침대에 앉혔고 발목과 무릎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다행히 부러진 건 아닌 것 같고 조금 삔 것 같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다행히 심각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반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고도 없이 선생님은 냉동실에서 얼음주머니를 꺼내 내 발목에 가져다 댔다.
“악!”
“엄살은…….”
아, 엄살 아닌데. 억울함에 입을 삐죽거렸다. 당연하게도 내 비명 소리에 이유한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달래야 할 것 같은데……. 저러다가 숨넘어갈까 걱정까지 됐다.
“먼저 가. 나 여기서 좀 쉬고 갈게. 선생님께 말씀 좀 드려 줘.”
“괜찮겠어?”
“응, 괜찮아. 고마워.”
두 사람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어서 결국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먼저 나가고 다행히도 양호 선생님도 운동장에 나가 봐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양호 선생님도 배웅했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선생님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절대 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그제야 양호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다들 사라져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여전히 눈물을 쏟아 내는 이유한을 내 옆으로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울어. 응?”
“많이 아프지…….”
달래기 위해 건넨 말인데 이유한은 어쩐지 더 울먹였다. 쉬이 울음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심장을 누가 쿡쿡 찌르는 것 같아 ‘나 많이 다친 거 아니라잖아, 진짜 괜찮아’ 하며 다시 한번 달래 봤지만 퐁퐁 쏟아지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얼음찜질 좀 하고 쉬면 괜찮을 거야. 아까는 진짜 막 넘어져서 아팠던 거고. 괜찮아. 정말이야.”
“미안해. 너무 놀라서……. 이렇게 울 게 아닌데 지금.”
여전히 눈물을 쏟아 내던 이유한이 참아 보려는 듯 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어떤 포인트에서 터져 버린 건지 결국은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기 시작한 터라 나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괜찮은데……. 울지 마. 진짜.”
“나는……. 윽. 나는 왜 살아 있지 못해서. 끅, 바로 양호실에, 데려왔어야 하는데……. 보는 것밖에, 윽. 못 하고.”
이유한은 아까 전 강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나는 애써 웃었다.
“아니야. 응? 나 진짜 괜찮아. 유한아.”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이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유한은 내게 한참 동안 미안하다고 말했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닌데 뭐가 그렇게도 미안한 건지,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계속 움직였다.
한참 만에야 조금은 감정이 추슬러졌는지 이유한이 안정을 찾아갔다. 푸후, 하고 숨을 내어 쉰 녀석이 곧 나를 마주했다.
“미안해. 울기나 하고…….”
아마 한참을 울고 나니 그제야 좀 머쓱해진 모양이었다. 제 머리를 긁적이는 이유한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다 울었어?”
“……내가 원래 잘 안 우는데…….”
“완전 울본데 무슨.”
“아니야. 내가 아까 너무 놀라서 그런 거지, 진짜 잘 안 울어.”
애써 부정하며 이유한이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신경 쓰이는지 얼음찜질을 하고 있는 내 다리에 손을 가져갔다. 조심스레 움직이는 그 손을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다시는 다치지 마.”
“……응.”
“진짜 다시는.”
“그래.”
이유한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당부했다. 사람 다치는 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유한에게는 꼭 그렇게 하겠다 약속하는 것밖에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이런 걸까. 나는 가만히 이유한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텐데……. 아직은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그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울어 준 녀석에 대한 감사의 인사뿐이었다. 겨우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내 말에 이유한은 해사하게 웃었다. 대답을 하려는지 이유한이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때, 드르륵 소리를 내며 양호실의 문이 열렸다.
“지헌아!”
양호실의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강수하와 김현이 보였다. 그 뒤로 장우진과 김준이 이어 들어왔다.
“괜찮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시키는 건데, 달리기. 이게 뭐야.”
“다리 부은 것 좀 봐. 어떻게 넘어진 거야.”
어떻게 알고 넷이 다 같이 왔지, 생각할 새도 없이 호들갑스레 내 다리를 확인하는 네 사람에 나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더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응? 응. 괜찮아.”
괜찮다는데도 썩 믿음이 안 가는지 여기저기 확인하는 손길이 닿아 왔다. 나는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그사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유한이 일어서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나도 고마워. 지헌아.”
이유한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양호실에서 빠져나갔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달싹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유한이 사라진 문을 멍하니 보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양호실은 넓지 않았다. 그것도 유난히 큰 고등학생 남자애들이 다섯 명이나 들어와 있기에는 비좁은 수준이었다. 나는 덩치 큰 아이들 사이에서 마치 큰 병에 걸린 환자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너희 다 가 봐야 하지 않아?”
“안 가도 돼.”
“나 양호 선생님 다시 오실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 출전하는 거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냥 좀 접질렸을 뿐인데 마치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는 게 말이다. 하지만 내 말에 아주 단호하게 김현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선생님 오실 때까지 나도 여기 있을래.”
그 대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뒤로 출전하기로 한 게 여럿이면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저절로 나온 한숨이었다. 그러자 김현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너네 다 안 가면 나 때문에 우리 반 다 질 수도 있잖아.”
“애초에 네가 응원할 줄 알고 신청한 건데…….”
김현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나 때문에 또 다른 경기를 망치는 건 사양이었다. 체육 대회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수하와 김현이 돌아가지 않으면 농구, 2백 미터 그리고 계주까지 망할 판이었다.
“내가 이후에 출전할 거 없으니까 여기 있을게.”
뭐라고 말해야 다들 내 말대로 할지 고민하던 차에 조용하게 있던 장우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 내가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그래. 양호 선생님 오시면 바로 응원하러 갈게. 응?”
“그래도…….”
김현만 장벽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수하가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기에 김준도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쟤네들한테 설득당하겠구나, 싶어진 나는 다급해졌다.
“어……. 나가서 뭐, 우승이라도 하면 내가 뭐 해 줄까?”
다급하게 내던진 말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순간 세 사람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뭐, 소원 같은 거?”
슬쩍 눈치를 살피며 툭 던진 말에 잠시 고민에 잠긴 것 같았던 세 사람이었다. 문득 김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출전하는 거면 다 상관없는 거야?”
“어, 응!”
“흠. 소원까지 걸면서 가라니까 가긴 가는데.”
김준이 힐끗 장우진을 봤다. 장우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소원 들어 준다는 거 꼭 지켜야 된다.”
“응. 나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참나.”
배시시 웃는 내 얼굴에 김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강수하와 김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호 선생님 오시면 바로 스탠드로 와. 알았지?”
강수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좁았던 양호실에 강수하, 김준, 김현이 빠지고 나니 한산해졌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다 안 간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러게.”
한숨 쉬며 뱉은 말에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장우진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긴 하지만 오늘은 왠지…….
“우진아.”
“응.”
“무슨 일 있어?”
뭔가 더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내 물음에 장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작은 한숨도 함께였다.
“왜 그러는데.”
“아.”
그리고 또 한숨.
“응?”
“아니, 그냥 조금 놀랐어. 다쳤다고 해서.”
장우진이 금세 제 머리를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그 대답에 내가 민망하게 웃었다. 큰 사고라도 난 줄 알았나 보다, 그 민망함에 나 또한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뭐. 놀랐어?”
“크게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짧은 대답도 함께였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놀란 것 같긴 한데 뭔가 무표정한 얼굴이 복잡한 기색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우진아.”
“응.”
가라앉은 얼굴.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방금 전 양호실을 빠져나갔던 이유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옥상에서 아는 형이 떨어졌어.’
‘무척 좋아하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나서 좀 힘들었어.’
그리고 며칠 전 장우진이 카페에서 내게 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많이 놀랐겠다.”
무심결에 중얼거리듯 내가 말을 내뱉었다. 마음을 쓰고 있는 사람이 다치면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할까. 다른 세 사람만 봐도 사색이 되어서 달려왔었다. 하물며 소중한 사람을 사고로 잃어 본 사람은 어땠을까. 어떤 마음으로 내게 달려왔을까.
나는 막 양호실에 들어오던 장우진의 새하얀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지었다.
“나 보다시피 괜찮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나는 장우진을 보며 조심스레 웃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던 장우진이 옅게 웃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조심스레 흐트러진 장우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때…….”
“응?”
“옥상에서 떨어진 건 사고였어.”
나는 가만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다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손끝이 떨려 왔다. 썩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을 보여 왔던 이야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장우진이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아 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맞잡은 손에 옅게 힘이 들어갔다.
“사실은 잘 몰라. 사고라고는 하는데, 정확하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
“같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
“항상 길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러지 못한다는 게 어린 마음에 무서워졌었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장우진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까만 눈동자에 심장이 억눌렸다.
“사실 지금도 조금 무서워.”
“…….”
“정말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장우진이 중얼거리듯 말하며 내 어깨에 머리를 묻어 왔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지금 장우진의 말이…….
“깨어나겠지 믿고는 있는데 불안해서…….”
다시 한번 속삭이는 듯한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터졌는지 얼굴을 묻은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장우진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천천히 장우진의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을 거야.”
한참 만에야 나는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실 장우진이 한 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우진이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봐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뿐, 죽었다는 의미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그것을 차마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다시 한번 되묻는 대신 위로를 택했다.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별로 없었다. 내 목소리에 장우진이 웃는 것인지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 괜찮겠지. 금방 일어나겠지.”
장우진의 등을 두드리는 손이 벌벌 떨렸다. 죽은 게 아니었다. 이유한에 대해서 장우진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이유한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순간 드르륵 소리를 내며 양호실의 문이 열렸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장우진이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 뭐 해? 어? 너 울었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양호 선생님이었다. 어깨에서 떨어진 장우진의 눈가는 발갛게 부어 있었다. 누가 봐도 울었구나, 하는 티가 나고 있었다. 덕분에 선생님의 시선도 바로 그 눈으로 향했다. 장우진은 벅벅 제 눈가를 문질렀다.
“안 울었어요.”
“어어, 지헌이 많이 안 다쳤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안 울었는데요.”
장우진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그와 상반되게 선생님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렸다. 아무래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실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안 울었다고 치고 지헌아, 다리 좀 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가 장우진이 억울한 기색을 보였지만 나도 선생님도 그것은 외면했다. 선생님은 내 다리를 이리저리 한번 돌려 보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도 될 것 같아. 파스 뿌려 줄 테니까, 웬만하면 오늘은 이쪽에 힘주지 말고. 알았지?”
“네.”
“당연히 달리면 안 돼. 알지?”
“네.”
선생님의 신신당부를 몇 번이나 받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제 가 봐.”
“네.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우진은 내가 일어서자마자 곧바로 내 팔을 붙잡아 왔다. 하지만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기에 나와 선생님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귀엽기는.
“운동장으로 갈 거지?”
양호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장우진이 묻기에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는 다른 의미로 복잡했다. 그러니까 이유한이 죽은 게 아니라면, 장우진이 말하는 그 형이 정말 이유한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몸은 살아 있다는 건가. 그럼 생령 같은 건가. 몸은 식물인간 상태고. 복잡한 머릿속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걸 알았다 한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탓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참을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장우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가만히 장우진을 바라봤다.
“우진아.”
“응.”
“아까 말한 그 형 있잖아.”
“응.”
“그럼 병원에 계시는 거지?”
“응.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생각하고 있었어?”
장우진이 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하게는 이유한에 대해서 생각한 거였지만.
“나중에 같이 보러 갈래?”
“……그래도 돼?”
“그냥, 사람이 많이 왔다 갔다 하면 더 빨리 깨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은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많이 왔다 갔다 하면……. 그럴까. 나는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어느 병원에 계신데?”
“아, 이 근처. 사랑 병원이라고.”
“응. 그래. 같이 꼭 한번 가자.”
나는 지금 자연스러웠을까. 나는 다시 한번 병원의 이름을 곱씹었다. 혹시 누워 있는 이유한의 몸을 직접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도해 봐야 했다. 이게 현실이라면 모를까. 만들어진 세상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우진과 나는 그대로 우리 반이 있는 스탠드로 향했다. 체육 대회는 막바지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내가 다가서자 멀리서 나를 발견한 김현과 강수하가 다가왔다.
“지헌아, 괜찮아?”
무척이나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온 김현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하 농구 졌어. 소원 물 건너갔어.”
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한 김현은 내게 비보를 전했다. 직접 보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데 돌아오자마자 그런 소식을 듣다니 더 마음이 안 좋아졌다. 나는 강수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수하는 김현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아! 왜 때려.”
“결승에서 졌어. 짜증 나게.”
강수하 답지 않은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나를 부축하고 있던 장우진마저도 그 안타까운 소식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리고 김준도 축구 졌어. 결승에서!”
김현은 한 대 쥐어박히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연달아서 비보를 전해 왔다. 참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물론 그중에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가 그 두 경기를 다 못 봤다는 거겠지만.
“어, 지헌아 왔어? 괜찮아?”
순간 뒤에서 김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에 반가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막 제 반에서 달려온 참인지 살짝 가파른 숨을 내쉬던 김준이 곧바로 한쪽 다리를 굽히더니 내 다리를 살폈다.
“파스 뿌렸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앞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다리를 살피는 김준을 보니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나는 슬쩍 내 다리를 잡아당겼다. 김준이 나를 올려다봤다. 두 눈이 마주치니 준이 눈을 휘며 웃는다.
“곧 계주가 시작됩니다. 출전 학생들은 운동장 가운데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웃음에 어색하게 눈을 돌리는 것도 잠시, 타이밍 좋게 운동장을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득 메웠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 놓쳤어도 계주는 볼 수 있겠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 가야겠다.”
김현이 다리를 툭툭 털며 말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아, 잘하고 와.”
“응. 소원 들어줄 준비나 하고 있어.”
“참나. 넘어지지나 마.”
해맑은 김현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현은 ‘내가 너야?’ 하고 킥킥거리더니 빠르게 운동장 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나는 그나마 강당에서 넘어져 좀 붓는 정도로 끝났지만 이 운동장에서 넘어지면 많이 다칠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 들고 있었다.
“앉아서 보자.”
괜히 김현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강수하가 내 팔을 잡아당겨 스탠드에 앉혔다. 그 양옆으로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멀리 보이는 장소에 도착한 김현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기겠지?”
손을 흔드는 김현을 향해 나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가운데 김현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네 번째 주자였다.
“졌으면 좋겠다.”
순간 김준의 답지 않은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내가 김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을 마주한 김준이 씩 웃었다.
“그냥, 내가 생각보다 속이 좀 좁네.”
여전히 김준은 웃는 얼굴이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내 머리카락을 김준이 장난스레 흩트렸다.
“너희 안 가냐?”
그때 강수하가 문득 한마디를 툭 던졌다. 김준과 장우진을 향한 말이었다.
“왜 쫓아내.”
“너희들 반도 계주 뛰잖아. 왜 여기 있어?”
불퉁하게 대답하는 김준에게 강수하가 무심하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제야 나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같이 앉아 있어서 우리 반인 줄 알았다.
“아, 나는 현이 응원하려고.”
김준이 능청스레 대답했다. 방금까지 지라고 하지 않았나, 무척 갑작스러운 태세 변환이었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무심히 장우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진이 헛웃음을 쳤다.
“나 쫓아내, 지금?”
“어? 아니.”
“그런 것 같은데. 양호실에서 여기까지 데려다 놨더니.”
“……계주 시작하려나 봐.”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미간을 찌푸린 장우진을 외면했다.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지만 나는 꿋꿋하게 모르는 척했다. 운동장은 이미 계주를 시작할 준비가 다 완료된 모양이었다. 네 번째 주자인 김현은 운동장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느새 첫 번째 주자들은 준비를 끝내고 출발선에 서 있었다. 나는 금세 그 경기에 집중했다. 장우진이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무자비하게 흩트리는 바람에 잠시 녀석을 노려보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시작한다.”
출발 선상에 있던 선생님이 경기 시작을 울리는 총소리를 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주자들이 뛰었다. 시작은 우리 반이 2등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반 애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옆에 앉은 김준과 장우진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잘 안 보이는데…….”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때 두 번째 주자로 배턴이 넘어갔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나를 다시 끌어 앉히는 대신 내 팔을 붙잡았다. 덕분에 나는 일어서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그사이 2번에서 3번으로 배턴이 넘어갔다. 이대로만 가면 김현이 1등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
하지만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 번째 주자가 순식간에 4등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반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울려 퍼졌다. 점점 간격도 벌어지기 시작한 터라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진지한 얼굴로 자기 레일에 서서 배턴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김현을 바라보았다. 1번부터 3번 주자까지는 운동장을 반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주자는 한 바퀴를 전부 뛰는 게 규칙이었다. 김현이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저 간격을 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와, 김현 진짜 빨라.”
그런 내 생각은 김현이 배턴을 잡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사라졌다. 격차가 꽤 벌어져 있었음에도 배턴을 잡은 지 반 바퀴 만에 김현은 2등으로 치고 올라왔다. 우리 반에서 와아아, 하는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1등과 2등의 거리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승선까지는 어느새 대략 15미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결승선까지의 거리만 좀 더 있었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와아아아!”
순간 1등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발을 동동 굴리던 내 얼굴이 급격하게 환해졌다. 김현이 그 짧은 거리, 1등과 2등의 폭을 기어이 좁혔다. 그러니까 1등은 김현, 즉 우리 반이었다.
“김현이 1등 했어! 진짜로!”
“와, 미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박수까지 쳤다. 진짜 엄청난 역전극이었다. 한 바퀴 만에 어떻게 4등에서 1등까지 치고 올라올 수가 있지. 손에서 박수가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 반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물론 그럴 만도 했다. 반을 그렇게 흥분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김현이 결승선을 통과하여 바로 우리 반을 향해 뛰어왔다. 나는 김현을 향해 팔을 벌렸다. 김현은 해맑은 얼굴로 내게 그대로 달려와 나를 푹 안았다.
“나 1등 했어.”
“진짜 대단하다, 현아.”
“와, 소원권 받았다!”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김현은 나를 들고 방방 뛰었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바람에 떨어질 것 같아 다급하게 김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허리를 감은 손이 더 단단하게 나를 안아 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 있던 세 사람이 우리를 떨어트렸다. 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채였다.
“아, 진짜 1등 했어.”
김준이 짜증스레 김현을 떼어 내며 말했다.
“부럽지? 1등 하지 그랬어.”
“나는 단체전이었잖아.”
“나도 단체전이었거든.”
딱히 이견을 낼 수 없는 말이었다. 결국 김준이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좋은 듯 김현은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좋아?”
“응. 엄청 좋아. 소원 뭐 빌지? 아, 완전 신나는데.”
1등이 좋은 게 아니라 소원권이 좋은 거야? 나는 김현을 바라보다 어이없이 웃었다. 핀트가 조금 어긋난 것 같았다.
체육 대회의 마지막 행사였던 계주가 끝나니 순간 운동장이 어수선해졌다. 체육 대회를 마무리하려는 모양이었다. 각자의 반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운동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 가야겠다.”
“응. 고마웠어.”
“어. 지헌아. 다리 조심하고.”
“알았어.”
나는 킥킥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리 두 번 다쳤다가는 아예 업고 다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조심히 다니기로 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장우진과 김준이 사라지고 우리는 스탠드에 앉았다. 곧 올 선생님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진짜 엄청 멋있었어, 현아.”
나는 김현을 보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기분 좋은 듯 웃은 김현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가 걸렸는데, 열심히 해야지.”
“소원 뭐 할 건데?”
“음, 좀 있다가 써도 돼?”
“그래. 마음대로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느릿한 걸음으로 선생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생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내일부터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해서 반 애들의 야유를 얻어 냈다. 하지만 종례만큼은 그 여느 반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선생님이 사라지고 모두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집으로 바로 갈 거지?”
“응? 아…….”
종례가 끝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설 때 강수하가 물었다. 나는 잠시 힐끗 학교의 옥상을 바라봤다. 여전히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오늘이라도 당장 이유한이 살아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기도 했다.
“응.”
하지만 나는 결국 그것을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내가 먼저 가라고 해도 절대 먼저 가지 않을 태세인 강수하와 김현 때문이기도 했다. 양호실 밖으로 혼자 돌아서던 이유한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분명히.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사랑 병원. 나는 손에 약을 들고 있었다. 절뚝이며 나타난 나를 보자마자 기함을 토한 기사님이 무조건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데려왔기에 예정에 없이 병원으로 온 참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그게 또 사랑 병원. 아마도 이유한이 잠들어 있다고 예상되는 그곳이었다.
일단 확인만 해 볼까. 움직임이 편해진 다리를 한 번 움직였다. 그래도 좀 절뚝거리긴 하지만 움직일 만하긴 한데…….
“저 혹시 저 잠깐 병실 좀 올라갔다 와도 될까요?”
“병실이요?”
“아, 친구가 여기 입원해 있다고 한 거 같아서요.”
“다리는 괜찮으세요?”
“네, 움직일 만해요.”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한 기사님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도 같이 받았고 괜찮다는 말도 같이 들은 터라 아무래도 좀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같이 가시겠어요?”
“아, 아니요. 금방 다녀올게요.”
“알겠습니다.”
결국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약봉지를 들고 먼저 차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어째선지 막상 이유한을 확인하려 하니 긴장이 몰려든 탓이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병원 안의 안내 데스크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요즘은 개인 정보 때문에 병실을 물어봐도 잘 안 알려 주던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면 나중에 장우진하고 같이 와야지, 뭐.
“저기 병실이 어디인지 확인하려고 하는데요.”
“성함이요?”
“아, 이유한이요.”
조심스레 물은 말에 다행히도 안 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심하게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직원에게서 602호에 계시네요, 하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순간 쿵쿵거리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이유한의 이름을 말했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그 말은 즉 이유한이 지금 이 병원에 있다는 결론이 됐다.
기대와 긴장에 손이 떨려 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6층으로 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설마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마음이 급한 만큼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다. 2, 3, 5……. 곧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602호.”
다시 한번 들었던 병실 호수를 되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절뚝이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마음만큼 다리가 무거운 탓인지 걸음이 한없이 느려지고 있었다.
복도의 중간. 결국 602호의 앞에 다다라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한이라 표기되어 있는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또 한 번 심호흡했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나는 병실 문고리를 잡았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잠시 보호자는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아.”
침대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누군가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미동도 없는 남자는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조금 더 남자에게 다가섰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 낯익은 듯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한…….”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이유한의 얼굴이었다. 내가 보던 얼굴은 사고가 났던 당시의 모습인지 지금 내가 직접 보고 있는 이 얼굴은 조금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소년 같은 느낌이 있는 이목구비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행이다.”
그제야 물밀 듯 들어오는 안도감에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돌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네가 이 몸으로 다시…….
[히든 캐릭터의 사연을 알아냈습니다.]
순간 작은 도움말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의문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더 이상 도움말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이유한이 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섰다. 순간 디딘 발에서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유한을 만나야겠다. 그리고 이유한을 직접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다급히 차로 돌아온 나를 기사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나는 조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한데 학교로, 학교로 다시 한번만 가 주세요.”
나중으로 미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조바심이 들었다. 당장 저 병원에 있는 이유한이 없어지는 것도, 그렇다고 학교에 있을 이유한이 없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마음이 급했다.
내 다급한 기색에 기사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내다보는 내 심장은 곧 터지기라도 할 태세였다.
차가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체육 대회가 끝나고도 시간이 꽤나 지난지라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은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차가 자리에 멈추자마자 빠르게 차 문을 열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뛰지 마세요!”
다급히 움직이는 걸음에 등 뒤에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조금 아픈 다리는 신경 쓸 게 아니었다. 나는 곧장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여기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한!”
옥상 문 앞. 여전히 굳게 잠긴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어? 지헌아. 집에 안 갔어?”
다행히도 내 목소리에 이유한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제야 나를 채우던 초조함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아, 다행이다.”
“응?”
“유한아, 가자. 갈 데 있어.”
“어? 어딜?”
앞뒤 맥락도 없이 나는 이유한을 잡아끌었다. 이유한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내게 끌려왔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내 뒤를 이유한이 따르고 있었다.
“응? 어디 가는데?”
“병원에 갈 거야.”
“병원?”
“응. 아, 혹시 유한아. 너 학교 밖에 나가면 안 된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
이유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썩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뭐……. 지박령이라든가 뭐 이런 거 있잖아.”
괜히 머쓱해진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에 그제야 이유한이 웃음 지었다.
“아냐, 갈 데가 없어서 안 나간거지. 나갈 수 있어.”
하지만 그 대답은 나까지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눈 떴을 때 여기였으니까 여기에 있었던 거야.”
“……응.”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다시 이유한을 끌었다. 빨리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기대감과 걱정이 동시에 마음을 울렸다. 곧장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다가섰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유한은 차 앞에서 얼쩡거렸다. 나는 이유한을 향해 눈짓했다. 차에 타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뛰시면 어떡해요. 염증이라도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어, 근데 기사님. 죄송한데 아까 그 병원으로 다시 한번만 갈 수 있을까요?”
“사랑 병원이요?”
“네. 부탁드릴게요.”
투덜대며 내게 한마디를 하던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이유한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사님? 아,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는 게 아니었구나.”
다리를 달랑달랑 움직이며 이유한이 웃었다.
“지헌이 너는 항상 늦게 나와서 이 차 타고 가길래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 완전 부자였구나.”
그 해맑은 소리에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꾹 눌러 참았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내가 마땅히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으니 혼잣말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근데 병원에 왜 가는 걸까. 데이트를 하러 갈 리는 없고.”
생각해 보니 상황을 설명해 주지 못했구나. 근데 또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일단 네가 죽은 건 아니라는 것 먼저 알려 줘야 할 것 같은데.
“다시 올라갔다 오실 거죠?”
“네. 금방 다녀올게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뛰지 마시고.”
“네.”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걸음 좀 잠깐 빨리했다고 무릎 언저리가 시큰거리긴 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유한이고, 기사님이고 아프다는 말에 놀랄 얼굴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누가 있어?”
걸음을 옮기는 길에 이유한이 물었다. 슬쩍 둘러본 주위에는 딱히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가운 사람이 있을 거야.”
“반가운 사람?”
“응. 아마…… 조금 놀랄 수도 있어.”
나는 두 눈을 굴렸다. 맞겠지. 이 불친절한 게임이 내게 알려 주진 않았지만, 내가 이유한을 데리고 이 병원으로 가는 게 맞는 거겠지. 그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랄 게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6층의 버튼을 눌렀다. 안으로 들어오니 사방에서 내가 비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뿐이었다. 이유한은 없었다. 나는 그 껄끄러운 장면은 외면했다.
“왠지 기대돼. 반가운 사람이 누구지?”
“하하.”
머쓱하게 웃음을 흘렸을 때 엘리베이터는 6층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고 눈앞에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에 발걸음만 옮겼다. 이유한은 가만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602호의 앞에 선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잘못되지 않을 거야. 이유한은 제 몸을 찾을 것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 문고리를 잡았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세요?”
하지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등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이유한과 내가 동시에 뒤돌아섰다. 그러자 보이는 사람은 한 중년 여인이었다.
“아…….”
나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순간 이유한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놀란 것과 상반되게 이유한은 그저 앞의 사람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인사를 하니 일단 받아 주는 모양새로 상대방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이유한과 눈이 마주쳤다. 설명이 필요한 듯 보였지만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눈앞의 여자 그리고 이유한. 그냥 보기에도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
“저는 장우진 친구 한지헌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얼굴이 내 말에 조금 풀어졌다. 아는 이름이 들렸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이유한을 한번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유한, 아니 유한이 형이랑은 전에 몇 번 봤었어요.”
“아, 그래요?”
“네, 그런데 한 번도 못 찾아왔네요.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붙은 형 소리에 이유한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경계하던, 그러니까 이유한의 어머니의 얼굴은 그새 풀어져 있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와 줘서 고맙죠.”
누그러진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이유한의 기색을 살폈다. 병실에 들어가서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생각을 잘못한 것 같았다. 어머니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일단 들어와요. 내가 너무 오래 밖에 서 있게 했네.”
어머니는 웃음을 지으며 병실의 문을 열었다. 한 걸음을 들어가면 침대 위 이유한이 누워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죄송한데 화장실에 잠깐만 다녀올게요.”
“아, 그럴래요? 알겠어요.”
마주치기 전에 일말의 설명은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나는 뒤돌아섰다. 말없이 이유한이 나를 따라왔다. 병실에서 조금 떨어진 비상구의 계단,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연 것은 이유한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다.
“설명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내가 마음이 좀 급했어.”
“으응. 괜찮아.”
“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네.”
나는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오늘 내가 알게 된 사실에 대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이유한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우진에게 들은 이야기, 내가 직접 본 병실 안의 너, 네 나이, 네 이름 그리고…….
“방금 뵌 분은 아마도 네 어머니일 거야.”
“아…….”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 여기로 너를 데려오는 게 맞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 근데 내 생각에는…….”
그러니까 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서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천천히 이유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번 해맑고 말간 얼굴만 보여 주던 이유한에게서 볼 수 없는 표정이라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한참 만에야 이유한이 입을 열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하하. 내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었는데. 진짜 많이 궁금했는데.”
“…….”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다른 귀신들은 어떻게 죽었는지 다 기억하는데 왜 나만, 모르는지…….”
그 일그러진 얼굴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한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결국 한 발자국 다가가 이유한을 품에 안았다. 멈칫거리긴 했지만 내 품에 안겨 온 이유한은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진짜로…….”
내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이유한의 등을 토닥거렸다. 어떤 기분일지 선뜻 가늠조차 되지 않는 감정이라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푸후, 하고 숨을 내어 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유한이 한 걸음 내게서 떨어졌다. 이제 조금 울음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내가 아까 양호실에서 나오면서…….”
“응.”
“다시는 네 앞에서 안 울려고 그랬거든. 너무 창피해서.”
한참을 울다 내뱉는 말치고는 너무 생뚱맞은 소리라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어째선지 이유한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애처럼 보일까 봐 진짜 안 울어야지, 했는데 또 울었어. 바보같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하는 말이었다. 나는 순간 어처구니없음에 헛웃음을 쳤다.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
젖은 속눈썹이 무겁게 가라앉은 이유한의 입이 불퉁하게 비죽거렸다. 나는 이유한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이제 들어가자. 보고 싶어. 엄마도, 나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부터 늘 재잘거리던 이유한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시 602호. 나는 이유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자.”
그 단호한 대답에 나는 그제야 똑똑, 하고 병실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어, 왔어요?”
웃는 얼굴로 어머니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제 입술을 깨물며 금세 가득 차는 눈물을 참아 보려 부단히 애를 쓰는 이유한이 시선에 걸렸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앉아요.”
이유한이 누워 있는 침대 옆, 작은 간이 의자에 손짓하신 어머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힐끗 보게 되는 이유한은 제 몸 가까이에 서 있었다. 자신을 한번, 어머니를 한번 번갈아 보던 이유한이 곧 쓰게 웃었다.
“진짜 많이 닮았네.”????
문득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 같은 그 말에 내 눈가도 시큰거렸다.
“근데 정말 한 번도 못 본 얼굴이네요.”
“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얘기는 아니지. 고마워요.”
“아니에요.”
나긋나긋한 말투를 들으며 나는 침대 위의 이유한을 살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3년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죠.”
“아닙니다.”
“근데 다리 다쳤어요? 불편해 보이는데…….”
“아, 오늘 체육 대회였는데 살짝 접질렸어요. 괜찮아요.”
“어머, 병원은 다녀왔고?”
“네. 그럼요.”
“다행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이유한과 닮은 얼굴이었다. 특히 웃는 얼굴이.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이유한과 내가 알고 있는 이유한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이유한의 몸이 흐려졌다. 깜빡이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이유한에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마나 급하게 일어났는지 의자가 우당탕하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왜,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ㄴㄴㅇ
“지헌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깜빡이던 이유한이 흐릿하게 내 이름을 내뱉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무어라 말을 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한 내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란 어머니의 손길이 내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어, 어머니. 자, 잠시만……. 잠시만요.”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진 이유한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들어간 걸까? 안으로? 제 몸 안으로? 무엇 하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어, 유, 유한아! 아, 유한아. 선생님, 선생님!”
어머니에게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삐삐삐, 울리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