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맑은 오후였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5월 초순. 온 세상에 꽃내음이 진동하는 계절이 다가왔다. 그 축복 같은 온화한 날씨 속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한국을 넘어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화명. 그 계열사 호텔의 그레이트 홀이 환히 열려 있었다. 웬만한 부자들도 예약을 잡지 못한다는 그레이트 홀에선 오늘 결혼식이 열린다. 대통령의 자식이나 친인척도 이곳에 예약을 잡으려면 몇 년을 대기해야 할 거라는 말도 있는 곳이 오늘은 옥상의 야외 가든 홀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 결혼식의 당사자 중 한 명이 야외 결혼식을 선호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당사자 중 한 명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러 사람이 그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
수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화련에게 결혼식을 올린다면 야외가 좋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장소가 이곳이 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어마어마하게 모이는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의 새가슴을 계속 조여들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수환은 할 수 있다면 양측의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모인 소박한 결혼식을 치르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의 생각보다 화명이 너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데다가 계열사로 들어온 HS가 매년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임원들과 투자자들은 이러다 합병했던 HS가 독립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그들의 관심은 화명 회장의 사촌 동생과 HS의 차남에게 향했다. 오랫동안 약혼을 유지한 두 사람에게 은근히 결혼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에 틈만 나면 승현을 죽이고 싶어 했던 화련도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만천하에 당당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아.”
결혼. 물론 수환도 당연히 승현과 결혼을 하고 싶었고, 지금도 무척 기쁘지만. 부담스러운 건 부담스러운 거였다. 좋은 날임에도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에는 제대로 꾸미지 않아서 그런가, 검은 턱시도를 차려입은 자신이 마치 TV 속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이 멋있다고 하는 말도 단순한 인사치레로 받아들였지만 작정하고 꾸민 오늘은 그런 말을 들어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환아.”
“아.”
그렇게 거울 속의 제 모습에 한껏 취한 사이, 누군가가 수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결혼식 하객룩을 적절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놀란 눈으로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진짜 멋지다.”
“고마워.”
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마치 자식을 잘 키운 부모처럼 뿌듯해 보였기에 수환은 괜히 부끄러워졌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은 소설 속의 캐릭터고, 희영은 그런 자신을 만든 작가였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부모는 희영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이제 새삼스러웠다. 빙의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가, 희영은 이제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승현이도 보고 왔어?”
“아니.”
“왜?”
수환은 사실 지금 당장 승현이 너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웨딩 로드를 밟기 전에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보러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희영에게 승현이 어떤지 물어보고 싶은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연구실에서 볼 텐데 뭐 하러 봐.”
“하하.”
약학대 6년을 같이 다니고, 이제는 HS의 연구원이 된 희영은 부쩍 승현을 꺼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녀는 승현에게 별로 애정을 갖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수환만큼이나 승현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 그의 어두운 면모도 익히 겪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은 그런 승현의 모습마저 사랑한 반면 희영은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난 승현이 보고 싶어.”
“이따가 웨딩 로드에서 실컷 봐.”
“웨딩 로드…….”
곧 만날 승현을 생각하며 수환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오늘의 승현이 얼마나 예쁘고 멋질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다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도 꾸며 놓으니 이렇게 딴사람 같은데, 평소에도 예뻤던 승현은 오죽할까. 웨딩 로드 앞에서 마주쳤을 때 자신이 기절하면 어쩔까 고민될 정도였다.
“하여간.”
그 모습을 보던 희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설정하긴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승현에게 푹 빠져 있는 수환을 보니 기가 막히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승현도 여전히 이런 수환에게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천생연분. 그런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앞으로도 변치 않을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희영은 슬쩍 미소 지었다.
“신혼여행은 유럽으로 간다고?”
“응, 한 달 동안.”
“그리고 바로 미국 가는 거야?”
“맞아.”
희영의 물음에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의 유학은 이미 예전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면 결혼이 또 미뤄지기에,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미국의 대학은 가을쯤부터 개강하기 때문이 시기가 딱 적절했다.
물론 수환 역시 따라간다. 결혼하자마자 독수공방할 수는 없으니까. 마침 화명이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면서 미국 시장에도 크게 진출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수환은 화명의 미국 지사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앞으로 할 새로운 생활이 기대되기도 하고, 잘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 수환을 보며 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수환은 활짝 웃었다. 앞으로도 자신의 곁에는 항상 승현이 있을 테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식어가기는커녕 더 커져만 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환 씨, 결혼 축하해요!”
“윤현 본부장님.”
윤현을 앞세운 회사 사람들이 대기실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껏 꾸민 수환을 본 회사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수환은 이제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망나니라는 이미지를 벗어 버린 지 오래였다. 특히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망나니 진수환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진짜 축하드려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세기의 커플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린다니, 감동적이에요.”
“하하.”
수환과 승현의 러브 스토리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두 사람은 겉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알파와 오메가 커플이었고, 약혼했을 때부터 마치 결혼한 사이인 양 꿀이 떨어지는 것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보통 로열패밀리의 정략결혼은 사랑보다는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에 삭막한 쇼윈도 부부가 되기 마련인데,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바닥까지 떨어졌던 HS가 극적으로 오명을 씻고 부활한 일화도 큰 화제가 되었다. 수환은 HS가 희망이 없었을 때부터 오직 사랑만으로 승현과 약혼한 세기의 사랑꾼이 되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약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채 이득을 본 게 아니냐는 말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수환은 과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세기의 커플. 세기의 사랑꾼. 어쩐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낯부끄러운 호칭에 수환은 그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물론 마냥 기뻐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흑흑, 수환 씨. 결혼하지 마요.”
“하민 씨.”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하민을 수환이 난감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사실 이 5년 동안, 하민과의 일화도 빠질 수가 없었다. HS의 신약이 유럽의 유행병을 치료하는 걸 본 하민은 삼영의 회장을 설득해 적극적으로 화명과 협업을 이뤄냈다. 화명 역시 바이오산업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삼영과 협력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하민은 포기하지 않고 수환에게 계속 치근댔다. 하지만 번번이 승현에게 밀리고, 수환의 마음도 굳건해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이 지나 결혼식장 안에서까지 우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고, 좋은 날인데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저희는 이만 나가죠.”
“임자 있는 알파는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요!”
“하하하.”
윤현은 못 들은 척하며 하민을 데리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수환이 더욱 어쩔 줄 몰라 하자, 희영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하객석에서 기다릴게.”
“아, 응. 이따 봐.”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수환은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깨닫고 보니 안내하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대기실을 나온 뒤였다. 그때부터 또 심장이 미칠 듯이 쾅쾅 뛰었다. 분명 긴장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긴장할 줄은 몰랐다. 야외 식장은 주변이 뻥 뚫려 있지만, 수환은 꽉 막힌 실내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화려한 꽃장식도, 붉은 주단이 깔린 길도, 양쪽 하객석에 앉아 있는 무수한 사람들도, 엄선해 들여보낸 몇몇 기자들도, 수환의 눈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수환에게 다가왔다.
“아.”
마치 색이 바랜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 색을 입힌 느낌이었다. 자신과 달리 하얀 예복을 입은 승현이 수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서로가 예복을 입은 걸 한 번씩 봤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그리고 지금은 특히 더 그랬다. 햇살을 빚어 만든 것 같은 밝은색의 머리카락과 하얀 예복은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렸다. 태양 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옥상에서는 더욱더.
수환은 홀린 듯이 승현에게 다가갔다. 그도 자신을 어딘가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 승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예식용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수환 역시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맨손을 잡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례 앞으로 가는 길이 꽤 길었다. 이곳에 답사를 와서 웨딩 로드를 걸을 때는 생각보다 짧다고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또 아니었다. 수환은 자꾸만 발이 꼬이는 걸 겨우 제대로 움직이며 천천히 걸어갔다. 다행히 옆에서 걷고 있는 승현이 발걸음을 맞춰 주었다.
“평생 서로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주례의 말이 조금 아득하게 들렸다. 수환은 자신이 먼저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조금 긴장한 투로 맹세한다고 말했다.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곧 승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맹세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수환이 감격한 눈으로 그를 보는 사이, 순서가 빠르게 넘어가 반지를 교환하는 시간이 됐다. 수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한 쌍의 반지를 꺼냈다.
이미 커플 반지를 맞춰서 몇 년 동안 끼고 다녔었는데, 결혼반지는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해 보였다.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를 내려다보던 수환은 이내 승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이상하게 지금은 전혀 떨리지 않았다. 승현의 손가락에 꼭 맞는 결혼반지가 빨려 들어가듯이 약지에 끼워졌다.
그렇게 서로 반지를 교환한 후,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맹세의 마지막은 키스였다. 당연한 것처럼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그리고 그 순간, 수환의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열일곱의 승현이었다. 낡은 구교사 안에서 처음 키스했을 때는 수환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치 그때처럼 수환의 가슴이 설렜다.
그다음에는 스무 살의 승현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때의 첫 키스는 그다지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떠올리면 가슴 속이 쿵쾅거렸다. 수환이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스물여섯의 승현은 여전히 아름답고, 또 어딘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반지를 낀 손을 서로 잡으며 깍지를 꼈다. 수환이 먼저 고개를 기울이자 승현도 따라서 얼굴을 틀었다. 입을 맞추는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입술이 떨어진 순간, 수환은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사랑해, 영원히.”
“……!”
그에 승현이 놀란 눈으로 수환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순간 햇살이 부서지며 승현의 얼굴 위에 떨어져 내렸다.
“나도, 영원히 사랑해요.”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또 입을 맞췄다. 비록 두 번이나 맹세의 키스를 나눴다고 지인들에게 놀림을 받겠지만, 지금 이 순간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이곳에 둘만 있는 것처럼 입을 맞췄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에게 커다란 박수갈채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작은 꽃잎들이 두 사람을 축복하듯 흩날렸다.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고 행복하기를. 수환은 속으로 읊조렸다.
5월의 햇살이 이들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메인수가 이물질에게 집착하는데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