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며칠이 더 지난 후, 수환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수환의 러트는 빨리 가라앉았지만, 문제는 승현의 히트 사이클이었다. 억제제가 그나마 역할을 좀 해냈는지 전의 히트 사이클보다는 빨리 진정되었으나, 고작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수환은 안팎으로 체액에 푹 젖은 채 눈을 떴다.
“형, 괜찮아요?”
“응.”
걱정스러운 눈길에 수환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지만, 죄책감 어린 승현의 눈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 괜찮아.”
“미안해요. 내가 또…….”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설핏 웃던 수환이 미간을 찡그렸다. 힘을 풀어 버리니 그새 속 안에 든 정액이 울컥하며 흘러내려 허벅지를 적셨다.
“나 씻고 싶어.”
“알았어요. 나한테 기대요.”
“응.”
기꺼이 제 어깨를 내어 준 승현에게 수환이 몸을 기댔다. 수환이 한 것이라곤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배에서 느껴졌다.
“흣……!”
“어디 아파요?”
“으… 배가 너무… 아파.”
“어떡하지. 안에 걸 우선 빼내야.”
“악……!”
“형!”
통증을 참지 못한 수환이 몸을 구부렸다. 보통 일이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수환이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흐… 진짜, 너무… 아파, 승현아.”
“잠깐 기다려요. 구급차 부를 테니까!”
“흑…….”
다시금 덮친 충격에 수환이 눈을 꾹 감았다. 당황한 승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곧 고통을 견디지 못한 수환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승현의 품에 쓰러진 수환이 무의식중에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곧 구급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다가왔다.
***
“그러니까…… 이런 일은 저희로서도…….”
“…….”
작게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수환이 눈썹을 찌푸렸다. 잔뜩 혹사당한 몸은 아직도 휴식을 원했다. 그러니 좀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다. 눈썹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자, 주변의 소음이 뚝 끊어졌다.
“하아…….”
“…형?”
“수환아?”
“……?”
익숙한 목소리들이 귀에 꽂혔다. 수환이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에 힘을 줬다. 그러자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윽.”
“형, 정신이 들어요?”
“수환아, 정신이 드니?”
머리맡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울렸다. 각기 다른 목소리지만 말하는 내용은 똑같았다. 수환은 눈을 깜박이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승현이? …누님?”
승현과 화련,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수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낯선 풍경에 당황한 수환은 그저 두 눈을 깜박였다.
“후, 잠시 나와 주시죠.”
피곤함이 풍기는 음성으로 말한 사람이 승현과 화련을 제치고 수환에게 다가왔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었다. 의사 선생님이구나. 그럼 여긴 병원인가? 뒤늦게 깨달은 수환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설면서도 세련된 방 안은 수환이 머물렀던 VIP 병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을 살피는 의사가 그때와 다른 사람이었다.
“환자분, 정신이 드십니까?”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진… 수환이요.”
수환은 의사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인지 좀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수환은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보호자 분들은… 많이 오셨고.”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의사의 목소리는 어딘지 진절머리 난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수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후로 의사는 수환에게 몸 상태가 어떤지 물었고, 수환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꼬박 하루 동안 정신을 잃었다는 말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이 있으십니까?”
“아… 네.”
“무슨 일이 있었죠?”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어요. 여기 아랫배 쪽이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날카로운 복통을 느꼈던 수환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원래 그 정보는 알고 있었던 듯, 의사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몰라서 질문했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걸 확인하려고 하는 질문에 더 가까운 것 같아 보였다.
“배가 아프기 전엔 무슨 일을 하셨죠?”
“어…….”
이번에도 솔직하게 말하려던 수환이 멈칫했다. 눈을 굴려 누군가를 쳐다봤다. 의사의 뒤에 있던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보고 수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 흠, 오메가 애인이 히트가 와서, 같이 보냈어요.”
“그러다가 본인도 러트가 오셨었고요?”
“네.”
역시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 의사는 이미 승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은 것이다. 의사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그렇게 권고를 드렸는데, 결국 이렇게 되셨군요.”
“……!”
혀를 쯧쯧 차는 의사의 얼굴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수환은 이제야 의사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승현과 자신에게 페로몬 약을 처방했던 그 의사였다.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바로 기억하지 못한 건 그 짧은 시간 동안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이 멋쩍은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페로몬 때문인가요?”
“복합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무심한 얼굴로 차트에 무언가를 적은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의 보호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곧 담당의가 정해질 겁니다. 검사도 추가로 진행할 예정이고요. 궁금한 건 다음 담당의에게 묻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놀라는 건 수환뿐이었다. 승현과 화련은 이미 들었던 내용인 듯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직 수환만이 얼빠진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부인과 담당의로 바뀔 겁니다. 그리고 복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라서 형질과 쪽에도 문의하셔야 할 듯합니다. 저는 페로몬과 담당이라…….”
“자, 잠깐만요.”
의사의 설명을 듣던 수환이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수환을 응시했다. 수환이 당황하며 물었다.
“산부인과라뇨? 제가 왜…….”
“음.”
의사는 잠시 할 말을 고르려는 듯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당황한 수환을 훑다가, 흉흉한 얼굴의 화련, 그리고 잔뜩 굳어 있는 승현에게 멈췄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저도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만.”
“……?”
“진수환 환자분의 몸에서 자궁 기관이 발견됐습니다.”
“…네?”
수환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기관? 그게 왜 내 몸에 있지? 난 알파인데…….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의사의 담담한 말이 둥둥 떠다녔다. 의사가 넋이 나간 수환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화련과 승현에게 몇 마디 더하고 병실을 나갔다.
“수환아.”
“아.”
화련이 다가와 수환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 겨우 정신을 차린 수환이 화련을 쳐다봤다. 병실 안에서 화련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왜인지 수척해진 화련의 얼굴을 보며 수환이 입술을 달싹였다.
“누님, 저, 그게.”
“괜찮아. 아직 검사가 다 끝난 건 아니지만… 몸에 직접적인 이상은 없을 거라고 하더구나.”
“…그래요?”
의사가 한 말과 화련의 말을 곱씹었다. 몸에 큰 이상은 없지만 자궁이 생겼다. 자궁. 아이를 낳는 기관. 알파의 몸에는 없어야 할 것이었다.
순간 뒤에 있는 승현에게 시선이 갔다. 그와 했던 일들이 이렇게 되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나 안이하게 생각했었던 건지. 수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화련의 시선 역시 승현에게 향했다.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녀의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다 이 빌어먹을 오메가가 문제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수환에게 그런 짓을……. 게다가 결국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작용을 겪게 만들어?
화련은 차분한 얼굴로 승현을 죽이는 상상을 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없었던 일로 만들고 수환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지금은 이 오메가에게 홀려서 수환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지만, 곧 깨닫게 될 거다.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일을 한 것인지 말이다.
비록 당분간은 실의에 빠지겠지만, 각인만 하지 않았다면 수환도 금방 훌훌 털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누님, 저…….”
“응?”
“승현이랑 각인했어요.”
“…….”
수환이 수줍은 얼굴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왠지 화련이 승현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아 한 말인데, 생각보다 화련은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삐걱거리는 녹슨 인형처럼 수환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때 진 회장을 방해하는 게 아니었는데. 화련은 뒤늦게 후회했다.
이 일은 애꿎은 오메가만 비난할 게 아니었다. 수환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화련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선은 검사를 다 받아 보고 더 얘기하도록 하자.”
“네, 누님.”
“하아.”
손을 뻗은 화련이 수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환은 화련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왜인지 또 잠이 몰려왔다. 링거를 맞고 있기 때문일까? 몽롱한 기분에 화련의 말이 점점 멀리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일단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렴.”
“응… 누나.”
“……!”
수환은 저도 모르게 전생에서 익숙하게 썼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친누나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은 다르지만 화련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무의식적으로 편한 호칭이 나오고 말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수환이 놀란 눈으로 화련을 쳐다봤다.
“아니, 그게.”
“…….”
어쩔 줄 모르는 수환을 내려다보며 화련이 찬찬히 곱씹었다. 누나. 누나라. 그동안 수환이 썼던 딱딱한 호칭은 수환과 자신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이 종용했기에 굳어진 것뿐이었다.
수환은 곧이라도 혼날 것 같아 몸을 움츠렸지만, 화련의 생각은 달랐다. 혼내기는커녕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수환이 겪은 부작용에 화가 나 누군가를 묻어 버릴 생각까지 했었지만 말이다.
“좋은 것 같다. 누님이라는 딱딱한 호칭보다는.”
“어… 그래요?”
“그래. 이제 정말 가족 같구나.”
가족. 화련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수환은 안심했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그도 지금까지 한편으로는 화련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자신은 진짜 진수환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를 기만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쉬고 있으렴.”
“네, 누… 나.”
“후후.”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수환의 머리를 쓰다듬던 화련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화련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성큼 걸어간 화련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승현의 멱살을 잡은 화련이 수환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만약 수환이의 몸이 잘못된다면, 내 모든 걸 걸고 당신과 HS를 철저히 무너뜨릴 겁니다. 흔적도 남지 않게.”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승현이 굳은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도 아무렇지 않게 짓눌렀던 그는 일반 알파인 화련의 박력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수환의 가족이기 때문에 봐주고 있는 게 아니었다. 화련은 그 존재만으로 타인을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환을 과보호하는 탓에 압박감이 훨씬 심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여러모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화련은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승현을 노려보며 잡았던 멱살을 풀었다. 그리고 뿌리치듯이 승현을 밀쳐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비서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일이 바쁠 텐데 그걸 다 제쳐 두고 병원에 들른 것 같았다. 수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병실을 나서는 화련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형.”
“아, 승현아.”
수환은 이제야 승현과 제대로 마주 보았다. 각인을 하고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했는데, 그저 평소와 똑같았다. 여전히 승현은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이었다. 수환이 링거를 꽂지 않은 손으로 승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괜찮아요? 정말 어디 아픈 데 없어요?”
“괜찮다니까. 너는 어때? 부작용 같은 거 없대?”
“저는 괜찮아요.”
승현의 몸은 멀쩡했다. 그렇게 페로몬 수치가 높아 미쳐 날뛰는데도 어디 하나 잘못된 곳이 없었다. 부작용은 오직 수환의 몸에만 나타났다. 승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게 왜 네 탓이야.”
깜짝 놀라며 수환이 말했다. 한 번도 승현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승현이 스스로 자책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수환이 얼른 손을 올려 승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우리 후회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기억 안 나?”
“그건.”
“나… 너에게 안기는 게 좋단 말이야.”
이제야 수환은 자신의 몸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파니, 체면이니, 그런 것들을 다 떠나, 그저 승현이 좋았다. 그리고 그에게 안겨 기분 좋았던 일들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예전에 했던 고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내가 아이도 낳고 싶어.”
“뭐라고요?”
하지만 승현의 생각은 다른 듯, 그의 결 좋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흔쾌히 그러자고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라서 수환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누나도 우리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했고…… 난 계속 너에게 안… 기고 싶고. 검사받고 괜찮다고 하면 내가…….”
“안 돼요.”
“왜?”
승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설마하니 수환이 이런 말을 하다니. 차라리 화를 내며 원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승현이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하는 검사로는 괜찮다고 해도, 나중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부작용으로 생긴 자궁에 애가 들어서면 얼마나 위태롭겠어요. 너무 위험해요.”
“…….”
조목조목 맞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말주변이 부족한 수환은 딱히 받아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아 연신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내가 할게요. 직접적으로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임신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더 안전해요.”
다른 알파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치가 떨리게 싫겠지만, 상대는 수환이다. 그의 아이라면 얼마든지 품고 낳을 수 있었다. 지금은 딱히 제가 수환보다 아이를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와 함께하기 위해선 화명의 대를 이을 우성 알파를 낳아 줘야 한다. 그에 큰 불만은 느끼지 않았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생기다니. 심지어 수환이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굴고 있었다. 안 될 일이었다. 그가 위험해질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 절대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안 돼? 아직 검사 결과도 안 나왔잖아.”
검사 결과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승현의 생각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상심한 얼굴로 물어보는 연인에게 마음이 약해졌다.
“…알았어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대답하자, 수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사랑해, 승현아.”
“나도 사랑해요.”
반사적으로 답하며 병상 위에 누운 수환의 가슴께를 토닥거렸다. 각인을 했기 때문인지 서로의 감정을 더욱 세세하고 긴밀하게 알아챌 수 있게 되었지만, 어차피 예전부터 집요할 정도로 수환을 관찰하고 주시했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승현은 수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상냥하고 따뜻한 페로몬을 맡으며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분명히 이 일은 제 생각대로 흘러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시간이 훌쩍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다. 추운 겨울 한가운데에, 연이은 폭탄 같은 소식이 작은 땅을 뒤흔들었다. 한성의 몰락과 HS의 귀환. 마치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한반도가 들썩거렸다.
그렇게 여러 차례 폭풍이 몰아쳤지만, 수환의 주변은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표면상으로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이 회사를 쉬는 동안 온갖 일들이 몰아치고, 다시 잠잠해졌다.
HS의 신약이 유럽의 유행병을 치료할 무렵, 수환은 퇴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진행한 검사를 모두 받고, 부작용에 대한 주의사항을 귀에 박히도록 들은 다음에야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승현은 그런 수환의 곁을 한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HS에서 만든 신약 연구원 목록에 정식으로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승현의 이름도 올리려고 했지만, 아직 새내기에 불과한 대학생이 연구원으로 신약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어떤 여파를 불러올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승현이 거절했다. 재현은 안타까워했지만 승현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폭풍의 눈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주변은 돌풍이 몰아쳐도 두 사람은 꽤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한성이 오너리스크로 몸살을 앓는 것도, 화명과 HS가 손을 잡는 것도 어딘지 먼 곳의 얘기처럼 들었다.
그래도 화련과 재현에게 가끔 직접 소식을 듣기로는, 조만간 HS가 화명과 합병해서 바이오산업 계열사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HS의 장남인 재현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너로서의 재능이 없는 연구원 체질이었다. 승현 역시 마찬가지다 보니 그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겨울이 지나, 봄이 성큼 다가올 무렵. 수환은 오랜만에 밖에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승현과 처음 만났던 카페였다.
[D.Clare]
“…….”
이제는 익숙한 간판을 슬쩍 보고 수환은 문을 열었다. 딸랑, 귀에 익은 방울 소리가 들리고 훈훈한 분위기가 풍기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직원과 눈이 마주친 수환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직원은 이제 수환을 보고도 놀라거나 떨지 않았다. 수환과 마찬가지로 활짝 웃으며 계산대에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혼자 오셨어요?”
“오늘은… 친구 만나러 왔어요.”
“그렇구나. 아, 신메뉴 나왔는데 그거 드셔 보실래요?”
“신메뉴요?”
“네, 감귤 베이스라 좋아하실 것 같아서 추천하고 싶었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말한 직원이 강추라는 말을 덧붙였다. 수환이 웃으며 신메뉴를 주문했다. 신용 카드와 도장이 빽빽하게 찍힌 쿠폰을 같이 내밀었다.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카드와 쿠폰을 돌려받은 수환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직원이 음료를 만드는 동안 좁은 카페 안을 휙 둘러봤다. 구석 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혼자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음료를 받은 수환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앉아 있던 사람이 수환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수환아.”
희영이 눈을 크게 뜨며 수환을 쳐다봤다. 수환 역시 그녀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야.”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희영이 수환과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는 머그잔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새카만 아메리카노가 담겨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수환이 생크림과 초콜릿 칩이 화려하게 토핑된 음료를 내려놓았다.
“잘 지냈어?”
“응. …너는?”
“나도 잘 지냈어.”
“정말?”
희영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안색도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다. 그동안 정신이 없었단 핑계로 원작자인 희영에게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았고, 뒤늦게 생각났다. 수환은 이제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락 정도는 좀 할걸.
“정말이야. 나, 승현이랑 각인했어.”
“아, 각인.”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희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메가버스 소설에서는 승현과 수환이 맺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오메가와 알파인 두 사람은 시기가 맞으면 각인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승현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희영은 걱정을 다 떨치지 못하며 물었다.
“정말 그걸로 해결된 거야? 네가 이렇게 밖에 나온 걸 보니 잘된 거 같긴 한데.”
“응, 정말이야.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수환은 음료를 한 모금 쪽 빨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머뭇거리는 수환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희영이 다시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있잖아.”
수환은 고개를 들어 현재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털어놓았다. 병원에서는 이미 확실한 진단을 내린 뒤였다. 수환은 알파면서, 임신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이게 정식으로 발표되면 형질을 연구하는 학계가 뒤집힐 만한 일이기에, 화련은 철저하게 관련자들의 입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수환은 그 외에는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다. 수환은 그저 이 일이 원작자인 희영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희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어진 입에서 채 말이 되지 않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원작자인 희영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게, 무슨…….”
“하, 너도 모르는 일이었구나.”
“정말이야? 정말…… 네가……?”
“응.”
“…….”
희영은 할 말을 잃고 수환을 응시했다. 머그잔을 쥔 그녀의 손이 움찔 떨렸다. 희영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 원래 너희들 포지션이 그렇긴 했지만,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뭐?”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희영의 말에 수환이 놀라며 되물었다.
기가 막혔다. 원래 세상에서도 수환이 승현보다 더 키가 크고, 몸도 더 컸다. 스트레스로 인해 승현이 음식을 잘 먹지 않아 빼빼 말라서, 지금보다 그 차이는 더 두드러졌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포지션이, 자신이 아래였단 말인가. 수환은 뒤늦게 억울해졌다.
“대체 왜? 내가 승현이보다 더 큰데, 그리고 생긴 것도…….”
알파로 발현한 지금의 몸이 더 크긴 했지만, 원래 세계에서의 수환 역시 또래에 비하면 큰 편이었다. 그때의 얼굴이 더 순한 편이었긴 해도, 생긴 것 자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설정한 희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수환의 생각을 눈치챈 희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내가 미인공, 미남수 조합을 좋아하거든.”
“……?”
그건 또 뭐야? 소설에서 언급하지 않거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 지식은 수환도 잘 몰랐기에, 희영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다 잘 끝나서 다행이다.”
“…그건 맞아.”
얼버무리는 게 명백한 희영의 말에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승현과 각인해서 그를 정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악의 축이었던 한성이 무너지고 화명과 HS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은 있었지만 해피 엔딩에 가까운 결말이었다.
“비록 예전의 기억은 없었지만, 소설 내용이 머릿속에 있던 덕분에 잘 버텼었던 거 같아.”
“아마 치트 키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희영도 수환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아마 이 오메가버스 세계가 수환을 빙의시키면서 치트 키를 주기 위해 원작 소설 내용을 남긴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그나마 미숙한 자신이 험한 길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수환은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넌 안 돌아가도 돼?”
이런저런 얘기를 더 하다가 음료를 거의 다 마셨을 때쯤, 수환이 넌지시 물었다.
자신은 지금의 승현을 버릴 수 없어 돌아가지 않는 걸 선택했지만, 희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을 텐데 괜히 자신 때문에 덩달아 남은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별로 좋은 인생이 아니었거든.”
“아… 그렇구나.”
무슨 사정인지 물어도 되는 걸까. 수환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빨대로 생크림을 뒤적거리는데, 희영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졸업하면 승현이 연구실에 내 자리 하나 만들어 줘. 그럼 충분한 보상이 될 것 같아.”
권희영은 이름 석 자만 몇 번 겨우 등장한 엑스트라지만, 아주 꿀 빠는 캐릭터였다. 나이는 더 어려졌고, 명문대의 약학과라니. 사실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물론 수환이 원했다면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알았어. 나만 믿어.”
“후후, 그래.”
수환이 눈에 띄게 기뻐하며 대답하자, 희영이 그제야 환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난 네가 행복하다면 다 괜찮아.”
“희영아.”
진심 어린 말에 수환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희영을 보며 얼굴을 끄덕였다.
“나 지금 행복해.”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수환을 보며 희영 역시 미소 지었다. 지금은 수환이 이렇게 웃는 것만 봐도 충분했다.
띠링, 띠리링…….
“아, 나 잠깐만.”
“그래.”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수환이 얼른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응, 승현아. 나 지금 카페.”
희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환의 얼굴은 정말로 시름 하나 없이 밝기만 했다. 연인과 통화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반짝반짝 빛까지 나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갈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희영에게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또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수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 나도 보고 싶어.”
“…….”
“응. 빨리 갈게.”
수줍은 얼굴로 대답한 수환이 전화를 끊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희영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오래?”
“응, 너랑은 30분만 만나라고 했었거든.”
“30분…….”
과연 정말로 괜찮은 건가. 희영은 다시금 수환이 걱정되었다. 희영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수환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집에 있는 CCTV도 다 치웠고, 위치 추적 같은 것도 이제 안 한다고 그랬어.”
수환은 이제 승현이 했던 일을 모두 알았다. 처음에는 이물질이었던 진수환에게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던 일인데, 역으로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면서 승현도 자기 스스로를 걷잡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수환과 각인하고 안정적으로 변한 승현은 반성하며 CCTV와 앱을 모두 지웠다. 팔찌의 위치 추적기도 제거한 상태였다.
“후… 그래도 좀 걱정된다.”
“괜찮다니까.”
끝까지 승현을 의심하는 희영을 보며 수환이 손사래를 쳤다. 물론 가끔은 불쑥불쑥 치미는 충동을 참기 힘든 것 같았지만, 수환은 승현을 믿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그를 사랑할 자신도 믿고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승현과 행복해질 테니까. 그게 당연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혹시 승현이는… 저쪽 세계의 일을 기억해?”
“음. 그게…….”
희영의 물음에 수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승현과 각인한 후, 수환은 그에게 넌지시 물어봤었다. 혹시 그때의 기억이 나는지 말이다. 하지만 승현은 전혀 기억하는 게 없었다. 기억이 없는 척 연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각인한 수환은 아무리 승현이 거짓말에 능숙해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은 기억 못 하는 거 같아.”
“…괜찮을까?”
언젠가는 승현도 기억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언젠가 기억을 떠올리고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승현의 곁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불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응, 괜찮을 거야.”
“…….”
희영은 밝게 미소 짓는 수환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늘 하나 없이 웃고 있는 수환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후. 그래, 알았…….”
한숨을 내쉬던 희영이 멈칫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응시했다. 그는 카페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 사람만 보인다는 듯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뒤쪽을 보며 멈칫하는 희영에 의아해하던 수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희영에게는 꽤 느린 장면처럼 보였다. 결국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며 희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완벽한 해피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