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물질은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다 2화 (2/29)

2.

머릿속까지 과일 향이 꽉 차 있었다. 그것도 수환이 너무나도 좋아해서 참을 수 없는 감귤계의 과일 향. 뇌까지 푹 절어 버릴 정도로 잠식한 페로몬은 수환의 몸을 속절없이 이끌었다.

“흣.”

입안이 무언가로 꽉 차 있었다. 물컹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수환의 혀를 쓸어 올렸다. 수환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혀를 옭아매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아!”

질척한 소리와 함께 뜨끈한 액체가 수환의 목구멍 안쪽으로 넘어갔다. 수환은 달콤한 그 액체를 무의식적으로 꿀꺽 삼켰다. 그러자 입안을 꽉 채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다 막아 버릴 기세로 안쪽까지 훅 들어왔다.

“으, 읏.”

바르작거리며 수환의 손이 자신을 덮치고 있는 누군가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제정신이 아닌 수환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기분 좋아. 미칠 것 같아. 더 해 줘.

그렇게 생각하며 누군가의 옷깃을 더욱 꽉 쥐었다. 그러자 그에 호응하듯 상대방이 수환의 몸을 바스러질 정도로 끌어안았다.

“아, 흣.”

누가 이렇게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는 거지. 수환은 머리 한구석이 저릿한 것을 느끼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순간 수환이 멈칫하자 입안에 들어찬 혀가 타박하듯 농밀하게 입천장을 문질렀다. 숨쉬기가 버거워진 수환이 한껏 입을 벌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흣, 스… 승…….”

“하아, 왜요?”

그제야 느릿하게 입술을 뗀 승현이 열감 있는 눈으로 수환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던 수환은 뒤늦게 눈앞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승현의 두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먼지마저 빛나 보였던 오전과 달리, 지금은 마치 야수의 눈처럼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자, 잠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자신이 왜 메인수와 이렇게 입 맞추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수환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내려고 하자, 승현의 손이 수환의 목덜미를 잡고 휙 끌어 올렸다.

“안 돼요.”

“흐읏!”

또다시 빈틈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축축한 혀가 수환의 입술을 열고 들어와 치열을 훑고 입안 곳곳을 핥았다. 이런 경험이 전혀 없는 수환은 그의 혀를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알파에겐 오메가의 모든 체액이 달콤하게 느껴진다더니 진짜였다. 승현에게서 넘어오는 타액은 마치 농축된 향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농염한 키스만으로도 벅찬데 달콤한 향이 머릿속을 계속 잠식하니 죽을 맛이었다.

“으응, 읏.”

“하, 왜, 이렇게…….”

짐승처럼 수환의 입술과 혀를 쭉쭉 빨면서도 승현은 자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드문드문 혼란을 내포한 말을 내뱉었다. 그는 이제 두 손으로 수환의 얼굴을 붙잡고 열정적인 키스를 이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분명 수환이 시작했다. 그가 먼저 고개를 들어 승현에게 입을 맞췄다. 그때만 해도 승현은 자기 생각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비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었다. 이대로 자신의 페로몬에 홀린 수환이 본색을 드러내고, 자신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수환이 한 건 입술을 스치듯이 비빈 버드 키스가 끝이었다. 요즘 초딩들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깃털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것마저도 하고 나서 부끄럽다는 듯이 수환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대체, 이게…….

의외의 행동에 놀라 벙찐 승현은 코를 맴도는 은은한 향에 눈살을 찌푸렸다. 베이비파우더 같은 달큰하고 포근한 향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승현은 곧 이게 자신의 아래에 깔린 알파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인 걸 깨달았다.

승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열성 알파인 그의 페로몬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우성 오메가인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인지 진수환은 그렇게 치대면서도 한 번도 향을 풀어낸 적이 없었다. 한 번쯤 상상했을 땐, 그의 페로몬에선 심한 악취가 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런 상상도 하지 못한 보드라운 향이라니. 충격을 받은 승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조금 열기를 띤 얼굴을 마주하자, 그대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승현은 미친 듯이 수환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증오하던 수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며 짐승처럼 신음했다.

“스, 승현, 아, 그만.”

“하아, 하.”

밀어내는 손에서 그다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승현은 그만하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그도 분명 자신처럼 머리 한구석이 녹아내릴 만큼 기분 좋을 것이다. 승현은 확신하며 수환의 두 볼을 잡으며 혀끝을 살짝 물었다.

“아!”

혀끝이 깨물려 알싸한 아픔을 느낀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런 아픔마저도 지독한 쾌감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대로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환은 승현의 무릎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을 때, 잠이 확 달아나듯 제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깜짝 놀란 수환이 놀라운 힘으로 승현을 팍 밀어냈다.

“으악!”

“어?”

수환의 팔에 떠밀려 한순간 침대 끝으로 밀려나 주저앉은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놀란 얼굴마저도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방금까지 흉흉하게 무서운 모습도 어울리더니, 대체 이 메인수의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수환은 아직까지 쿵쾅거리는 가슴을 꽉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 미안!”

“잠…….”

승현이 붙잡을세라 수환은 얼른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열고 침실을 나왔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수환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피해 봤자 어차피 같은 집 안이라 승현이 쫓아올 수도 있으니 진수환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허억, 헉.”

잠근 문에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너무 크게 울려서 귀까지 먹먹하게 아플 정도였다.

“후우.”

등 뒤로 아무도 다가오는 기색이 없자 수환은 그제야 안심하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알파와 오메가는 짐승이라더니. 욕정에 휩쓸리면 이성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수환은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성을 너무 쉽게 봤던 거였다. 첫날부터 이 꼴이면 한 달을 어떻게 버티라는…….

‘……응?’

자괴감에 휩싸여 있던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현은 자신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결백함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미…… 이미 선을 넘은 게 아닌가?

눈을 깜박인 수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하루 만에 결백은커녕 짐승처럼 달라붙다니, 최악이었다. 그러면 이제 파혼은 물 건너간 거 아닌가……?

수환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오직 승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뒤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파혼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약혼을 계속 이어 가야 하는 건가? 그러나 그건 승현도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으, 머리 아파.”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수환은 고개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오후에 졸았던 소파 같은 의자로 다가갔다. 여기서 좀 있다가 담요를 가지고 나가 거실 소파에서 잘 생각이었다. 수환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탁.

침실 문이 닫히고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흐릿해져 있던 승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자괴감을 느낀 승현이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오메가치고는 굵직한 손가락 사이로 금갈색의 눈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어떤 것도 자신의 의도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한 달 만에 만난 진수환은 너무나도 이상해져 있었다. 추잡한 욕망이 그득그득 붙은 그 얼굴이 역겹기만 했는데, 버드 키스를 하고 부끄럽다는 듯이 붉힌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니. 덩치 큰 알파가 귀엽다니!

“하아.”

고개를 숙인 승현이 난감한 얼굴로 제 중심을 응시했다. 알파의 페로몬에 오메가가 흥분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꼿꼿하게 선 중심을 느꼈을 때 들었던 충동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진수환은 알파이고, 자신은 오메가인데, 대체 왜.

왜 이걸 그 안에…….

“미치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승현이 열기를 식히려는 듯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눈을 감은 그가 찬찬히 10,000에서 7씩 빼며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숫자를 외는 사이 부풀었던 중심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와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대로는 계획은커녕 이상한 충동에 자신이 먼저 선을 넘을 것 같았다.

승현은 눈을 들어 침실 구석을 살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형 카메라가 지금도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방금 자신과 수환의 모습이 어떻게 찍혔을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후.”

눈을 돌린 승현이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침대 중앙에 누워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새삼스럽게 혼자 자기에는 지나치게 큰 침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주말 내내 승현은 어디를 갔는지 아침부터 나가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괜히 그와 마주칠까 봐 지레 겁먹었던 수환은 일요일 저녁이 되자 혼자 또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민망한 키스… 에 대해 말은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당사자를 만나질 못하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승현은 그걸 그냥 넘어가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웃한 수환이 책상 위에 던져놨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캘린더를 열어 보니 9월 일정이 드문드문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개강이네.”

수환은 승현과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과는 다르다. 수환은 경영학과고, 승현은 약학과였다. 둘의 접점은 같은 동아리뿐. 그것마저 반 학기만 다니면 졸업인 수환은 얼굴을 비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대학에서 승현과 마주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지난 방학 때 수환은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중간고사만 끝나면 학교에 취업계를 내고 설렁설렁 다니게 될 것이다. 기말고사는 리포트로 대체하면서 본격적으로 회사에 나가게 되겠지.

덤덤하게 일정을 살피던 수환이 눈썹을 찌푸리며 방을 빙 둘러보았다.

여기도 넓은데 그냥 매트리스를 하나 살까. 계속 소파에 몸을 구기고 자려니 허리가 슬슬 아파지기 시작했다.

“음.”

고민하던 수환이 캘린더를 닫고 쇼핑몰 앱에 들어갔다. 어차피 한 달 정도 쓰고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수환은 대충 방 크기에 맞는 걸로 하나 주문했다.

***

밖으로 나오니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수환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라 더웠던 것 같은데, 날씨 변화가 참 빠르다.

게다가 개강 전날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기까지 했다. 눅눅한 땅을 밟으며 수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개강 첫날. 오늘 수환은 교양 수업 하나만 들으면 된다. 마지막 학기의 여유로운 시간표 덕분에 오후 시간대에 나와 발걸음을 보채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학교 가까이 다다랐을 때, 수환의 눈에 작은 카페가 들어왔다.

D.Clare. 얼마 전 승현과 만났던 카페, 그가 일하는 곳이었다.

“음.”

카페 앞에서 수환은 조금 망설였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인데 여기서 음료를 사 갈까. 이곳 말고 다른 카페를 가려면 맞은편까지 가야 했다.

망설이던 수환은 그냥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개강을 했으니 승현은 지금 카페에 없을 터였다.

딸랑.

작은 방울 소리가 카페 안을 울리고, 수환은 천천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어서 오…….”

카운터 근처로 가자마자 수환은 메뉴판을 응시했기에, 직원이 그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수환이 진지한 눈으로 멋스러운 필체로 적힌 메뉴판을 훑었다.

일단 커피는 못 마시기 때문에 커피 종류는 다 패스. 아침을 안 먹어서 에이드 종류는 패스. 속이 더부룩하기 때문에 라떼 종류는 다 패스.

그렇게 고르면 결국 마실 수 있는 게 얼마 남지 않았다. 레몬차냐, 자몽차냐. 일생일대의 중대사인 것처럼 신중을 기하던 수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자몽차 뜨거운 걸로 주세요.”

“……네?”

“네?”

그제야 수환은 놀란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베타로 보이는 여성이 흔들리는 눈으로 수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보지? 얼굴에 뭐 묻었나?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제 볼을 쓱 쓸어내리던 수환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는 승현이 일하는 카페였다. 빙의 전, 진수환이 승현이 일하는 카페를 한 번도 안 찾아왔을까? 그 성격이면 제집 드나들듯이 오가며 민폐 짓을 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직원이 마치 불한당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수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떤 난리를 쳤으면 직원이 저런 눈으로 보는 건지. 수환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자몽차 뜨거운 거요. 네.”

“…….”

“사, 사천오백 원입니다.”

애써 표정을 수습한 직원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수환은 차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며 카드를 넘겼다.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망할 이물질 같으니. 메인수뿐만이 아니라 주위에까지 민폐나 끼치고.

카운터를 벗어난 직원이 음료를 만드는 동안 수환은 입술을 짓씹으며 가까스로 눈길을 피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

“아, 네.”

수환의 감사 인사에 직원은 자몽차를 주다 말고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인사말에도 놀랄 정도구나.

속으로 혀를 찬 수환이 음료를 받으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세요.”

“예? 네, 안녕히… 가세요.”

수환의 인사를 받은 직원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귀신을 보듯 놀란 눈길을 받으며 수환이 얼른 카페를 벗어났다. 이제 여기는 승현이 있든 없든 다시는 오지 말자.

다짐하며 나온 수환이 뜨거운 자몽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아, 그래도 음료 맛은 좋네. 밍밍하지도 않고.

집에서 가까우니까 학교 가는 길에 들러서 음료 마시기 딱 좋은데. 눈썹을 축 늘어뜨린 수환이 속으로 투덜댔다. 진수환은 왜 이렇게 업보가 많아서 가까운 카페도 못 가게 만드나.

후우, 한숨을 내뱉은 수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 학교로 향했다. 흘끗 시간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도 뜨거운 자몽차를 호로록 마시며 정문을 향해 바쁘게 걸어갔다.

불행하게도 아직 그의 하루는 시작도 하지 않은 채였다.

***

승현은 전공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했다.

“승현아!”

제일 먼저 승현을 발견한 동기가 손을 번쩍 들며 활짝 웃었다. 승현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들 일찍 왔네?”

“승현이, 하이~”

손톱에 화려한 네일을 한 민가현이 손을 흔들었다. 앞서 승현에게 손을 흔든 백찬우가 친밀하게 승현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방학 잘 보냈냐? 이 새끼, 방학 내내 연락 두절이야. 아주, 어디 팔려 간 줄 알았다?”

“야, 승현이가 너처럼 맨날 놀았겠냐? 연락이 끊기면 다 이유가 있는 거니 반성부터 해라.”

“뭐, 이 자식아?”

같은 동기인 하은찬과 한차례 투닥거린 찬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리에 앉은 승현은 동기들의 호들갑이 익숙하다는 듯이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하, 나만 걱정한 거 아니다? 희영이도 얼마나 걱정했는데, 한 달 전부터 매일 나한테 연락해대고, 다른 동기들한테도 승현이 안부 묻고…….”

“그랬어?”

찬우의 말에 승현이 의아한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권희영은 어쩐지 평소보다 희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승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진짜… 괜찮아?”

“응? 뭐, 보시다시피.”

어쩐지 아침부터 호들갑을 떠는 동기들을 보며 승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방학하고 동기들과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하며 살긴 했다. 이유는 역시 진수환 때문이었다. 방학하면서 집착이 더 심해진 진수환은 심심치 않게 친한 동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댔다. 그래서 일부러 동기들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게 오히려 친구들을 더 걱정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진짜 괜찮다니까. 아무 일 없었어.”

아마도, 아직까지는.

속으로 말을 삼킨 승현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동기들은 안심하면서도 걱정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하고 저희끼리 수다를 떨었다.

“난 그 미친 새끼가 드디어 일 저지른 줄 알았잖아.”

“야야, 불길하게 그 자식 얘기는 왜 해.”

“뭘, 시발. 지가 재벌이면 다야? 인성은 존나 말아 먹어선.”

도마 위에 오른 인물이 누군지 승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승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동기들끼리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꼴에 알파라고 으스대던데, 열성이 보통 알파랑 똑같냐? 베타랑 다른 것도 없으면서.”

“그러면서 성격은 엄청 더럽잖아. 승현이한테도 존나 들이대고. 추잡한 새끼.”

“어쩜 그렇게 주건율이랑 다르냐.”

“야, 그런 천상계랑은 비교하면 안 되지.”

“그치?”

주건율은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진수환과 같은 학과의 신입생, 우성 알파인 데다가 예의가 바른 편이라 이렇게 심심치 않게 진수환과 비교가 되곤 했었다. 물론 쓰레기 같은 진수환은 안 좋은 쪽이고, 주건율은 좋은 쪽으로 말이다.

승현 역시 주건율과 같은 동아리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알파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한 탓에 무의식적으로 그를 피하곤 했다. 그리고 진수환과 달리 주건율은 끈질기게 승현을 따라다니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그은 선을 지키겠다는 듯, 그 밖에 서서 승현을 관찰하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아, 나 방학 때 주건율이랑 마주친 적 있었는데, 걔도 승현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묻더라.”

“진짜?”

손톱 위에 올린 스와로브스키 파츠를 후후 불며 가현이 말하자, 동기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승현이 앉은 쪽을 힐끔 보며 이어서 말했다.

“응, 그냥 지나가듯이 묻긴 했는데. 이따 동아리방에서 만나면 걔한테도 괜찮다고 말해 줘.”

“아, 그럴게.”

승현이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같은 과도 아닌데 왜 자신을 챙기나 싶었지만, 같은 동아리에다가 나이가 같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어느새 승현의 머릿속에서는 주건율에 대한 생각이 싹 사라졌다.

***

“으아,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학식 고?”

개강 첫날임에도 수업 시간을 꽉꽉 채운 전공 교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강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남은 동기들의 얼굴은 시체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 다음이 교양이었나?”

약학대와 가까운 학교 식당으로 향하면서 잠이 덜 깬 얼굴로 찬우가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걷고 있던 은찬이 비슷하게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뜨며 대답했다.

“어, 강의 이름이, 그러니까…….”

친한 동기들끼리 으레 그렇듯 시간표를 맞춰 수강 신청을 했었다. 승현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영화로 보는 시대상’이야. 얘들아.”

“아, 맞다!”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찬우가 손뼉을 짝 쳤다. 비록 1학년이지만, 한 학기 만에 쉼 없이 몰아친 수많은 전공 수업과 이론에 지친 그들은 선택 가능한 교양 수업이나마 편히 들을 수 있는 걸로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고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견이 맞춰진 게 바로 영화도 보고 두뇌 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교양 수업이었다.

“그거 아는 형이 말했는데 개꿀이래.”

“맞아. 과제도 그냥 영화 보고 감상문 제출하는 거라더라.”

“헉, 개꿀, 핵꿀.”

이렇게 좋은 강의는 경쟁률이 치열하기 마련인데, 다섯 명이 다 함께 수강 신청에 성공한 건 무척이나 운이 좋은 일이었다. 시시덕거리며 걸어간 동기들과 함께 학식을 먹고, 승현은 교양 강의가 있는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그 새끼 없겠지?”

“응? 누구?”

강의실에 다다르자 주위를 살피며 찬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피는 찬우를 보며 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진수환 그 미친 새끼 말이야. 저번 학기에도 승현이 겁나 따라다녔잖아.”

곧 졸업하는 선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욕까지 했으나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행을 떠올린 동기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워졌다.

진수환의 집착은 이미 교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승현과 같은 수업을 들으려고 돈까지 써서 수강생들을 쫓아낸 이야기는 잊을 만하면 에타에 한 번씩 올라오곤 했다.

과가 달라서 전공 강의까지는 따라오지 못했으나, 얼마 없는 교양 강의를 같이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린 동기들이 무표정한 승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진짜. 불길하게 그딴 얘기하지 말라고. 그리고 있으면 어때. 지가 뭐 어쩔 거야?”

“맞아. 우리가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승현아.”

명백히 자신보다 약할 것 같은 베타 여성인 가현의 말에 승현은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고마워.”

베타들은 흔히 오메가를 자신들보다 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무래도 착각이 분명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오류를 잡아 주지 않고 승현은 조용히 걸어갔다. 그리고 곧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어?”

곧 강의가 시작될 교양 수업 강의실 앞에서, 승현은 수환과 마주쳤다.

자몽차를 든 수환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강의실 바로 앞에서 승현과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동기로 보이는 친구들이 양옆에 서서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 그러니까…….”

수환은 당황했다. 남은 학점 대충 채우려고 선택한 교양 강의가 설마 승현과 겹칠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딱 이름만 봐도 쉽게 학점을 받을 것 같아서 홀린 듯이 신청했는데…….

사람이 몰릴 것 같은 강의 신청을 한 번에 성공하고 호텔 방 안에서 기쁨의 춤을 추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아니라고 했으면서, 이러면 마치 자신이 승현을 스토커처럼 따라온 것 같지 않은가. 원작의 진수환은 미친놈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 승현이 신청하는 강의를 귀신같이 알아낸 다음에 똑같이 신청해서 따라다니곤 했다. 만약 신청하지 못하면 정정 기간에 돈을 써서 다른 학생을 취소하게 만든 다음 자기가 억지로 들어가곤 했다.

아마도 지금 승현과 친구들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보일 거라고 생각하니 창피함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결국 참지 못한 수환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 강의는 그냥 포기하자. 그리고 다른 거로 바꾸자. 어차피 성적 잘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대충 아무거나, 이승현과 겹치는 거 말고!

“어어?”

승현의 동기들은 처음엔 수환을 알아보지 못했다. 회사를 가지 않는 날에도 과시하듯이 고가의 정장을 입고, 무스를 잔뜩 바른 포마드 머리를 고집하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편안한 후드에 청바지, 그리고 앞머리를 내려 훨씬 어려 보이는 수환의 모습에 동기들은 두 눈을 깜박였다.

“방금 그거 진수환 맞… 어? 승현아!”

당황하던 동기들은 수환이 뒤돌아 달려가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수환이 도망치듯 강의실 앞을 벗어나자마자 승현 역시 따라서 뛰어가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동기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승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그리고 희영이 뒤에서 그 모습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수환의 패착은 계속 들고 있던 자몽차였다. 덜 마신 자몽차를 흘릴까 봐 빨리 뛰지 못했고,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승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어디 가요?”

“아!”

설마 승현이 자신을 따라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수환은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자몽차를 들지 않은 손이 승현에게 붙잡혀 있었다. 수환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눈으로 승현을 쳐다봤다. 왜 따라온 거지?

“어디 가냐고요. ‘영화로 보는 시대상’ 강의 들으러 온 거 아니에요?”

“맞긴… 한데.”

근데 너 스토킹한다는 욕 안 먹고 싶어서 수강 포기하려고.

뒷말은 삼킨 채 수환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괜히 팔을 잡고 있는 승현의 손이 신경 쓰였다. 아직도 뜨끈한 자몽차보다 승현의 손이 더 뜨거운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팔을 움찔거리자, 승현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아, 이건, 그러니까!”

승현의 시선이 자몽차에 닿았다는 것을 깨닫자, 수환이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몽차가 담겨 있는 테이크아웃 컵과 홀더에는 D.Clare라는 상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건, 너 보려고 간 게 아니고, 그냥 음료가 마시고 싶어서……! 네가 없는 거 알고 간 거야. 오해하지 마.”

수환은 또 스토커 짓을 한다고 욕을 먹을까 싶어서 울상을 지었다. 개강 첫날부터 잘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 카페 직원도 오해했을 테고, 저 강의실 앞에 있는 승현의 친구들에게도 미운털이 또 박혔을 테고, 무엇보다 눈앞의 승현도 자신에게 질렸을 것이다. 더 조심해야 했는데. 파르르 떨리는 눈이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반면 승현은 지금 수환의 생각과는 달리 그다지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강의실 앞에서 만난 진수환을 보며 얼굴을 구겨야 하는데,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놀라서 달아난 수환을 붙잡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승현의 시선이 잠깐 자몽차에 머물다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 무슨 말을 웅얼거리고 있는 붉고 두툼한 입술에 시선이 갔다. 저 앙증맞은 입술을 깨물면 과일의 과즙이 터지는 것처럼 달달한 맛이 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승현아?”

“아.”

흠칫 놀란 승현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강의실 앞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이기 때문에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승현이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돌아가죠.”

“뭐? 아니, 난…….”

“강의 들어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아.”

수환은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강의실 바로 앞에서 손을 놓아준 승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기들을 다독이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수환도 홀린 듯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가 많아 1초 만에 수강 신청이 종료되었던 교양 수업의 강의실 안은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공교롭게도 강의 시작 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와서 남아 있는 자리가 얼마 없었다. 수환은 눈치를 보다가 승현 일행이 앉은 바로 뒤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야, 저기 뒤에…….”

승현의 동기 중 한 명이 뒤를 흘낏대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불편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아까처럼 다짜고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배님, 여기 자리 있나요?”

“아니, 없…….”

무심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수환은 깜짝 놀랐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굵은 뿔테 안경을 쓴 여자애가 수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승현의 동기 중 한 명인데, 왜 여기…… 아, 이름이 뭐였지? 희… 희 뭐였는데.

당황하는 수환을 보며 희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자리 없으면 제가 앉아도 될까요?”

“아, 그래.”

수환의 옆자리에 희영이 앉았다. 차분한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수환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앞을 쳐다봤다.

승현의 동기들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희영에게 열심히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너 왜 그러냐고. 그러다가 네일이 화려한 여자애가 수환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해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지……. 얘는 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거지.

수환은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때마침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강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조금 늦었다며 멋쩍게 웃는 얼굴을 노려보듯이 응시하는데, 희영과 나란히 앉은 자신을 승현이 흘끗거렸다.

수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진수환, 진수환 이 망할 자식아. 너 혹시 승현이 동기들한테도 손댔니?

오메가 섹파만 만든 줄 알았는데 베타에게도 손을 대고 그랬나? 하지만 아무리 소설 내용을 떠올려 봐도 진수환이 베타와 어울린 기억은 없다. 아니, 아니지. 소설의 내용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소설에선 진수환의 과거까지 자세히 나오지 않으니까.

침을 꿀꺽 삼킨 수환이 어색하게 손을 움직여 뒤늦게 필기도구를 꺼냈다. 얼굴 한쪽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옆에 앉은 희영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선배님.”

“어, 어? 응?”

희영이 작은 목소리로 수환을 불렀다. 화들짝 놀란 수환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희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요란한 움직임에 무표정하던 희영이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흠, 왜?”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선배인데 너무 쪼는 건가 싶어서 수환은 부러 헛기침하며 물었다.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희영의 시선이 두려우면서도 괜히 아닌 척하며 표정을 다듬었다.

“요즘…… 잘 지내세요?”

“뭐?”

뜬금없는 물음에 수환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희영의 얼굴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수환의 안부를 묻는 게 일생일대의 일인 양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환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지내는데? 왜?”

“아, 그러시구나.”

왜냐고 물었더니 희영은 뿔테 안경으로 가린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제 얘기가 다 끝났나 싶어서 수환은 고개를 돌리고 자몽차를 슬쩍 들어 올렸다. 슬슬 강사가 본격적으로 얘기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전에 자몽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다시 희영이 입을 열었다.

“승현이랑은…… 아무 일 없으셨고요?”

“쿨럭, 큭.”

남아 있던 자몽차를 마시던 수환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책상 위에 자몽차를 올려놓은 수환이 강사의 눈치를 보며 희영에게 물었다.

“그, 흠,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정말 그것뿐이라는 듯이 희영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수환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혹시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이, 아니, 진수환이…… 승현에게 19금 피폐 소설에 나올 만한 짓을 하리란 걸?

“흠, 별일 없었는데.”

“아, 그러시구나.”

희영은 심드렁한 어조로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거나 관심이 사라진 게 아니고, 그냥 수환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희영의 예리한 시선에 괜히 찔려 수환은 앞으로 있을 수업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 강사를 돌아보았다.

“……어, 그리고 여러분이 궁금해하실 만한 얘기가… 아, 과제는 총 두 번 있습니다. 중간고사 전, 그리고 기말 전입니다. 과제는 쉬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친절한 건지 호구인 건지 모를 강사의 목소리가 수환의 귀를 뚫고 지나갔다. 옆에 앉은 희영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희영의 어깨를 흔들며 진수환에 대해 아는 게 있냐며 묻고 싶었다.

스윽.

“……?”

수환의 앞에 수첩을 찢어서 만든 듯한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집어 들자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숫자가 적혀 있다. 010-XXXX-XXXX. 핸드폰 전화번호였다.

의아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희영이 검은 유리알 같은 눈으로 수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무슨 일 생기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무슨 일?”

“꼭이요.”

그렇게 말한 희영이 입 모양만으로 한 번 더 말했다. 꼭.

마치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질 거라는 걸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수환은 그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로 30분 남짓 더 이어진 강사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수환은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쪽지를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작 시름 거리를 안겨 준 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강사의 말을 경청하더니 강의가 끝나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저기.”

“안녕히 계세요. 선배님.”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한 희영이 종종걸음으로 동기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마자 가현이 손을 들어 희영의 어깨를 팍팍 때렸다.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희영을 응시하던 승현이 뒤에 있는 수환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종이를 구기며 승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감추었다.

예리한 시선이 잠깐 수환에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눈으로 말한 것 같았다. 이따 집에서 보자고.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린 수환이 빠르게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다. 희영의 행동과 말에 한껏 당황했으나, 승현의 눈길 한 번에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수환은 쿵쿵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누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

“권희영, 너 미쳤어? 왜 그놈 옆에 앉고 그래?”

가현의 손이 여전히 희영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희영이 아프다고 밀어내더니 굵은 뿔테 안경을 손으로 추켜올렸다.

“진심 뭐임? 너 설마 진수환 그 새끼를…….”

“아냐.”

경악하는 찬우를 노려보며 희영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온몸으로 부정하는 기세에 찬우가 그나마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냥, 할 말이 좀 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희영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이만 나가자며 다시 입을 열려는데, 딴 곳을 보던 승현의 시선이 희영에게 되돌아왔다.

“할 말이 뭐였는데?”

“…….”

승현과 희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둘 다 평소에는 얌전한 성격이기 때문에 험악한 기류가 흐르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동기들은 둘을 보며 당황했으나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희영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검은 유리알 같은 두 눈이 렌즈 너머를 응시했다. 두꺼운 안경 속에 감춰진 눈 속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관찰자의 시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남자를 보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무덤덤한 어조로 희영이 말을 이었다.

“사실 아직은 네가 뭘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바라는 것.

희영의 말에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승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대체 희영이 뭘 알고 있다고. 진수환이 방학하자마자 자신을 협박해서 억지로 약혼을 진행하고, 동거를 시작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방학 때 동기들과 연락을 끊기까지 했었다. 승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만 가자.”

“어, 어. 그래.”

희영은 평소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기 때문에 이렇게 박력 있는 모습은 동기들에게 무척 낯설었다. 그러나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강의실을 나가는 그녀를 동기들은 주춤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승현아, 가자.”

“…그래.”

눈치를 보던 찬우와 은찬이 승현을 끌고 갔다. 다음 강의는 전공 수업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교양 강의 첫 수업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어딘가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 동기들은 어느새 불온했던 공기를 잊고 어디서 시간을 보낼지 의견을 나누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는 것.’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며 승현이 속으로 되뇌었다. 곰곰이 생각에 빠진 얼굴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잠잠해졌다. 누군가가 돌을 던져 파문이 일어났던 호수가 곧 잠잠해지듯이, 익숙하게 속내를 감춘 승현은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묻는 동기들의 말에 웃음기 띤 얼굴로 대답했다.

***

수환은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첫날이라 채 1시간도 하지 않은 교양 강의 하나 듣고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개강 첫날부터 수환은 학교에 질리고야 말았다.

“하…….”

집 안으로 들어와서야 아직도 자몽차를 손에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힘을 꽉 주고 있었는지 컵 홀더 부분이 쭈글쭈글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D.Clare의 상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수환은 지친 걸음으로 걸어가 개수대에 남은 음료를 버리고 거실로 돌아갔다.

이제는 침대만큼 익숙해진 가죽 소파에 몸을 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털어내고, 수환은 습관적으로 후드티에 딸린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표면이 거칠거칠한 무언가가 바스락거렸다.

“아.”

그제야 희영에게 받았던 쪽지를 주머니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는 걸 깨달았다. 쪽지를 꺼낸 수환은 선명한 번호를 눈으로 죽 훑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도무지 희영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한동안 전화번호를 노려보았다.

‘혹시…… 합의를 하고 싶은 건가?’

퍼뜩 든 생각에 수환이 몸을 떨었다. 희영의 의심스러운 행동은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이렇게 전화번호까지 주면서 연락하라는 걸 보면 과거의 진수환이 한 짓거리를 어딘가에 폭로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신빙성이 느껴졌다.

중요한 건 지금의 수환은 과거의 진수환이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건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메가만 건들고 다닌 줄 알았는데 베타 여성에게도 손을 대는 쓰레기였다니. 수환은 울고 싶었다. 하필이면 이런 몸에 빙의를 해서…….

지이잉.

“헉!”

갑자기 바지 주머니가 맹렬하게 춤을 췄다. 깜짝 놀란 수환이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김실장]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 작게 안도했다. 수환이 빙의하고 나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김도운 실장이었다. 진수환의 할아버지이자 화명의 회장, 진길영의 최측근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골칫덩어리였던 진수환을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막 빙의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수환을 가장 많이 도와준 인물이기도 했다. 무뚝뚝한 성격의 그는 수환이 어리바리하게 굴어도 다 그러려니 했다. 이젠 하다 하다 약까지 하는구나, 그런 생각인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아 진 회장에게 얘기하진 않은 것 같았다. 수환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안녕하셨습니까. 도련님.

“네에, 실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네.

살뜰하게 안부를 묻는 수환의 목소리가 거북한지 도운의 목소리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러나 프로페셔널한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용건을 말했다.

―회장님께서 일이 다 끝났는지 물으셨습니다. 선을 빨리 보았으면 하시는 것 같았고요.

“아.”

그제야 수환은 진 회장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승현과 파혼하는 대신 진 회장이 원하는 오메가 세 명과 선을 보기로 했었던 걸 말이다.

진 회장은 불같은 성미에다 성격이 무척 급했다. 침착하게 말을 전해 주는 도운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진수환과 진 회장의 관계는 파탄 났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재촉하는 일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다. 문제는 수환이 아직 승현에게 파혼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저, 그게…….”

물론 화명의 수장인 진 회장이라면 상대방의 의사 따위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파혼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약혼했었던 그때와 똑같이. 하지만 진 회장은 이상한 데서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다. 억지로 약혼하는 건 되지만, 그걸 또 멋대로 파혼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번거롭게 승현의 허락을 받으려는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진 회장이 또 잔소리를 하면서 귀찮게 굴 테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수환은 파혼 허락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허락을 받으려면 한 달 동안 조용히 살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잘하지 못해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참이었다.

이걸 도운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음, 사실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 많죠. 아주 많아요.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수환은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도운의 자상한 목소리에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죄다 해 버릴 것 같았다.

“오래 걸리진 않고, 한 달 정도?”

―무슨 문제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도운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서렸다. 과거의 진수환이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다소 민망한 기분이 들어 한차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 그게, 승현이가 생각할 시간 좀 달래서요.”

―이승현 씨께서 말입니까?

“네.”

―그렇군요.

떨떠름한 말투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승현이 파혼을 미뤘을 때 비슷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가까스로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께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주세요.”

―하아, 한 달이나 말입니까…….

피곤한 기색이 잔뜩 느껴지는 대답에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요? 설마 벌써 선보는 날짜까지 정하신 건 아니죠?”

―…….

“와, 진짜?”

설마 했는데 아주 기가 막혔다. 단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진 회장의 불같은 성미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렇게 급발진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직 파혼도 못 했는데 선을 보라니. 수환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언젠데요? 좀만 더 미룰 수는 없어요?”

―한번 회장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네, 잘 좀 말해 주세요.”

그래도 도운이면 말주변 없는 자신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부탁했다. 본래는 계획대로 승현과 파혼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선보는 상대들을 딱 한 번씩만 만날 생각이었다. 선을 보라고 했지 결혼하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빙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결혼은 너무 부담스러운 주제였다.

그래도 재벌가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결혼하긴 해야겠지. 마음 한구석이 괜히 불편해진 수환이 전화를 끊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자 무거웠던 머릿속이 점점 가벼워졌다. 그게 잠들기 전의 상태라는 것도 모르고 수환은 속절없이 정신을 잃어갔다.

띡, 삐리릭.

희미하게 소음이 들렸다. 감고 있던 수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음?”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뜬 수환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승현을 발견했다.

“어… 왔어?”

승현을 보자 잠이 확 달아났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제 앞에 우뚝 선 승현을 올려다봤다.

“어서 와. 일찍 왔네.”

그렇게 말했는데 살짝 본 밖이 어둑해져 있어서 수환은 조금 민망해졌다. 멋쩍은 미소를 짓자, 승현이 얼굴을 비스듬하게 내렸다.

“다녀왔어요.”

“응.”

수환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렇게 인사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그래.”

뒤돌아 방에 들어가는 승현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만나면 제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차갑게 추궁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조용히 넘어가다니 의외였다.

아니, 오히려 이게 폭풍전야일 수도 있었다. 수환은 빳빳하게 긴장하며 승현을 기다렸다.

탁.

잠시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승현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소파에 앉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수환을 흘끗 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수환은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쿵쾅거리는 건 심장인데, 왜인지 머릿속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마치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쩔쩔매며 눈치를 보고 있자, 가까이 다가온 승현이 수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앉은 승현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수환을 흘끗 쳐다봤다. 바로 옆에 승현이 앉아 있다는 게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 놀랍도록 날렵한 콧날과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눈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수환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며 승현이 입을 열었다.

“아까 학교에서, 권희영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어? 권희영?”

“…….”

“아, 아까 걔?”

수환은 그제야 아무리 떠올리려고 애써도 기억나지 않던 여자애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름이 희영이었구나. 그래도 ‘희’까지는 기억났었는데, 아깝네. 혼자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고개를 돌리니, 어쩐지 아까보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승현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별 얘긴, 안 했는데.”

괜히 뻘쭘해져서 코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리자, 승현이 대답을 재촉했다.

“뭐라고 했냐니까요.”

“아니, 그냥. 방학 때 잘 있었냐고 묻던데?”

“진짜 그것만 물었어요?”

“응.”

주머니에 넣어 둔 희영의 연락처가 자꾸만 바스락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 주듯이.

하지만 승현에게 사실대로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네 친구에게 과거에 좆같은 짓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네 친구는 자신에게 보상을 바라는 것 같다.

그런 정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말을 같이 사는 사람에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수환은 낯짝이 두껍지 않았다.

“희영이가 그렇게 남한테 관심 있는 애가 아닌데.”

“남은 아니지. 같은 동아리인데.”

비록 메인수 스토킹용으로 억지로 들어간 동아리지만 인연은 있는 게 사실 아닌가.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얇고 부질없긴 하지만 말이다.

승현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수환은 지금 자신이 잘 얼버무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짓말하고 있다는 티가 확 나고 있었다. 자꾸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희영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기에 조금 안심했는데, 무언가를 숨기는 듯이 행동하는 걸 보니 열이 확 솟구쳤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소, 솔직하게 말한 거야.”

“아니잖아요.”

격앙된 어조로 말하자 수환이 겁을 먹은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진수환은 이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게나 뻔뻔하고 비열했던 남자가 겁먹은 소동물마냥 구는 모습이 머리 한구석에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충동에 휩싸인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거짓말하고 있는 거 맞잖아요. 왜 자꾸 숨기려고 해요.”

“어….”

이렇게 쉽게 간파당해 버리다니. 수환은 자신이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 처음 깨달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 정돈 아닌데, 왜 자꾸 승현의 앞에서는 바보 천치처럼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괜히 속이 타는 마음에 한 손으로 제 뺨을 문질렀다. 그러자 승현이 손을 뻗어 뺨을 문지르는 손을 붙잡았다.

“저는 당신의 약혼자잖아요. 그러니까…….”

약혼자.

왠지 그 말이 수환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언뜻 애절해 보이는 승현의 눈동자 때문에 더 착각을 하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미안해. 사실…….”

수환은 어쩔 수 없이 희영이 주었던 연락처를 꺼내 내밀었다. 여전히 한쪽 손은 승현에게 붙잡혀 있어서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놓아 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쪽지만 달랑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그, 희영이란 애 연락처인데. 나한테 주더라.”

“네?”

얼굴이 잔뜩 굳은 승현이 잡고 있던 수환의 손을 놓고 두 손으로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심각한 눈으로 희영의 번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윽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아마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로 희영의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맞네요.”

승현은 그 얼굴만큼이나 목소리가 딱딱했다. 탐탁지 않은 기색이 절로 느껴졌다. 베일 것 같은 예리한 눈이 저를 향하자 수환이 기겁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오해하지 마. 그냥, 무슨 일 생기면 자기한테 연락하라고 주더라고. 절대, 다른 말은 안 했고, 그냥…….”

횡설수설한 말을 들으며 승현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아서 너무 무서웠다. 수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연락할 일, 있어요?”

마치 판결을 내리려는 판사처럼 매서운 얼굴이었다. 지금 대답을 잘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수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절대로 없어.”

“그럼 이거, 버려도 되죠?”

“응.”

너무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환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승현이 물었다.

“혹시 이미 번호 등록한 거 아니죠?”

“안 했어. 봐 봐.”

핸드폰의 연락처를 불러와 승현에게 내밀었다.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내밀었지만 승현이 정말로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승현은 정말 핸드폰을 건네받더니 연락처의 이름을 하나하나 보며 확인했다. 수환은 당황했다.

“그러네요.”

확인을 끝내고 핸드폰을 돌려준 승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핸드폰을 다시 돌려받은 수환은 그 미소에 할 말을 잃고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선배님?”

“아.”

의아한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메인수의 미모에 잠시 넋을 놓았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집요한 눈길이 수환의 얼굴을 따라붙었다.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그런 거 아니야.”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치게 간섭한 걸 수도 있었다. 승현은 이쯤에서 순순히 사과하기로 했다.

“죄송해요. 주제넘게 굴어서.”

“뭐?”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승현이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수환이 과거에 희영에게 정말로 몹쓸 짓을 했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쪽은 수환인 것이다. 수환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냐. 기분 나쁘진 않았어. 네가 오해할 만했… 던 것 같고.”

수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승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이제 승현이 희영에 대해 더 추궁하면 할 말이 없었다. 진수환이 과거에 희영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수환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저 짐작만 할 뿐. 부디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죠?”

“응.”

수환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기분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너무 순순한 게 아닌가 싶었다. 진수환의 성격이라면…….

진수환, 만약 진수환이라면…….

조금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기분 나쁜 얼굴은 금방 사라졌다.

“승현아?”

의아해하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곧바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음성이었다.

‘넌 절대로 나에게서 못 벗어나. 이승현.’

낮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진득하니 승현을 옭아매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었다.

“승현아, 괜찮아?”

그러나 어째선지 이제는 까마득한 느낌만 남아 있었다. 승현은 수환의 말간 얼굴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분명 안색이 좀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수환은 의아한 표정으로 승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곧 들려온 소리에 수환의 고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딩동.

“…뭐지?”

현관 인터폰에서 울리는 소리에 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앞으로 다가가자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택배 아저씨였다. 그를 보며 홀린 듯이 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택뱁니다.”

“네, 이쪽으로 놔 주세요.”

커다란 택배 상자를 든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현관 앞에 놔두었다. 크기를 보아하니 어제 주문한 매트리스 같았다. 총알 배송이라더니 정말 하루 만에 온 게 놀라웠다.

“안녕히 가세요.”

“예.”

무뚝뚝하게 인사한 택배 아저씨가 곧바로 등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택배 상자를 열기 시작한 수환에게 승현이 다가와 입을 열어 물었다.

“뭐예요?”

“응? 이거?”

승현의 물음에 수환이 낑낑대며 매트리스를 택배 상자에서 꺼냈다. 그리고 승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매트리스. 소파에서 자기 좀 불편해서 방에 이거 두고 자려고.”

“아….”

수환은 대답을 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매트리스가 생각보다 꽤 커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현관에서 열지 말고 방에 들고 가서 뜯을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가 들어 수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뒤에서 승현이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수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주문한 매트리스는 의외로 편안했다. 대충 눈대중으로 주문한 건데 기대 이상이라 수환은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그날 밤은 꿀잠을 잘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영화 교양 과목 이후로는 학교에서 승현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 겹치는 강의가 그것 하나뿐이라는 걸 수환은 깨달았다. 그래서 1주일이 끝나는 금요일까지 수환은 편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음.”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켠 수환은 고민했다. 오늘은 수강 신청 정정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우스를 쥔 손을 움직이자 화면 안의 마우스 커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승현, 그리고 그의 동기들과 겹치는 교양 강의를 어떻게 할지 수환은 아까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이 바꾸는 게 맞다. 앞으로 같은 강의실에서 승현과 그의 친구들을 마주친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무엇보다 그 강의에는 희영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교양 강의를 바꾸는 걸로 일이 해결될까? 희영은 수환에게 연락처를 건네줄 정도로 집요한 성격인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수환을 보고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아닌 승현에게 무언가 털어놓는다면…….

“으아아, 안 돼. 절대 안 돼.”

승현의 경멸 섞인 눈은 몇 번이나 봤지만, 분명 그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수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설의 메인수인 승현은 그런 성격이었다. 자신이 받는 상처나 고통에는 무감각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아파하는 건 참지 못했다. 만약 진수환이 희영에게 무언가 몹쓸 짓을 했고, 그걸 승현이 알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피가 마른 수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달달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겨우 움직여 수강 신청 페이지를 닫았다.

이건 감시하는 명목으로 같은 강의를 듣는 거다. 절대, 절대로 승현에게 흑심이 있거나 하는 건 아니고, 오로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뇐 수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꼭 희영이 바라는 걸 알아내야지. 보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진수환의 몸에 빙의한 이상 자신이 치러야 할 업보였다.

수환은 시계를 흘끗 봤다. 막 저녁 8시쯤 지난 시간을 확인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아직까지 승현이 돌아온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이 시간쯤 되면 왔었는데. 오늘은 과나 동아리에서 모임이라도 있는 건가?

아침부터 한 번도 진동이 울린 적이 없는 핸드폰을 보며 수환은 눈을 깜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핸드폰으로 승현에게서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날은 동거인을 위해 늦어진다는 연락 하나 정도는 해 줄 만도 하지만…….

‘메인수님께 그런 걸 바라선 안 되겠지. 이물질 따위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금에 사사롭게 연락할 친구 하나 없는 진수환의 몸에 빙의했으니, 당연히 오늘도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그냥 잠들긴 아까웠다. 그래서 수환은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뒤졌다.

“음.”

역시나 생활감이라곤 전혀 없는 냉장고 안 사정에 수환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걸 집착광공의 소양이라고 하나? 에비X과 맥주밖에 없는 냉장고를 보니 수환은 떨떠름한 기분이 느껴졌다.

“맥주나 마실까?”

혼잣말을 하며 수환은 맥주 몇 캔을 꺼냈다. 모두 외국의 유명한 브랜드였다. 냉장고 말고 다른 곳을 뒤져 보면 비싼 와인이나 위스키가 나올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빙의하기 전에 철저한 서민이었나 보다. 비싼 술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안주가 없네.”

그러나 중요한 안주가 없었다. 지금 나가서 편의점을 다녀오는 건 귀찮고…….

고민하던 수환은 달랑 맥주만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오늘은 그럴싸한 기분만 내기 위해 간단하게 맥주 한 캔만 마실 생각이었다.

대충 TV를 틀어 적당한 예능 프로그램을 켜 놓고 맥주를 땄다.

칙-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수환은 얼른 흘러넘치는 거품을 호록 마셨다.

‘근데, 진수환… 술 잘 마시겠지?’

먼저 한 모금 마셔놓고 뒤늦게 걱정이 됐다. 그러나 곧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수환은 소설에서 제일가는 망나니 캐릭터였다. 수환이 빙의했을 때도 거나하게 만취해서 뒷골목에 쓰러진 채였다. 아마 흥에 겨워 마구 마셔서 그렇지, 평소에는 잘 취하지 않을 정도로 주량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니 맥주 한 캔 정도야, 진수환의 몸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터였다. 수환은 가볍게 생각하며 맥주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듯 흘러 들어갔다. 탄산과 알코올을 품은 차갑고 자극적인 액체가 목구멍 안쪽을 자극하자 절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가 참 맛있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비록 안주 하나 없이 혼자 마시는 맥주였지만 이만하면 훌륭했다.

그렇게 한 캔을 훌훌 털어 버린 수환은 못내 아쉬워졌다. 딱 한 캔만 더 마실까? 순간 꽂혀버린 알코올의 유혹에 수환은 다시 홀린 듯이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두어 캔을 더 가지고 거실로 돌아와 버렸다.

괜찮아. 진수환은 술고래였으니까. 맥주 몇 캔 정도야.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칙, 하고 맥주를 땄다. 수환은 연이어 한 캔을 더 마시고, 곧바로 다음 맥주에 손을 댔다.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조금 아득해진 머릿속을 느끼며 수환은 중얼거렸다.

“지금 술을 마시고 싶은 건 나일까, 아니면 진수환일까.”

그러나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수환에게는 빙의 전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빙의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유독 진수환의 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한 건 그 때문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맥주를 좋아해서 술이 당기는 건지, 아니면 진수환의 몸이 알코올을 받아들이고 신나서 더 마시고 싶어 하는 건지. 취기에 알딸딸해진 수환은 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하아.”

문득 서글픈 감정이 몰려들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생판 남의 몸에 들어와서 고생하고 있는 게 뒤늦게 서러워졌다. 좀 괜찮은 캐릭터면 몰라, 심지어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쓰레기 캐릭터다.

자신을 경멸하듯 보는 눈빛, 수군거리는 목소리.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했지만 수환은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친구라도 한 명 있다면 좋았겠지만, 인성 파탄자에게 친구가 존재할 리 없었다.

“진짜 힘들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수환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러다 소설 속 진수환처럼 정말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쯤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뺨 위로 뚝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띠띠띠띠, 띠.

삐리릭.

“아.”

“……!”

곧 거실로 들어온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승현은 늦은 시간에 수환과 마주칠지 몰랐다는 듯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수환을 보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울어요?”

승현이 물었으나, 수환은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입술만 벌렸다. 수환 역시 이렇게 마주칠지 몰라 당황한 탓이었다.

그러자 승현이 성큼 다가왔다. 그도 술을 마시고 들어왔는지 씁쓸한 알코올의 향이 훅 끼쳐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수환의 앞에 승현이 다가와 삐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대답하지 않는 수환이 탐탁지 않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왜 우냐고요.”

“그게…….”

또 대답하지 못하고 수환이 얼굴을 푹 숙였다. 동시에 조금 험악한 손길이 수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왜 우냐고, 진수환.”

“……!”

마주친 갈색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환은 당황하며 그저 두 눈을 깜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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