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물질은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다 3화 (3/29)

3.

진수환이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했다.

동기들과 술을 마시면서 승현은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진수환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를 봐도 더 이상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순간 떠오른 감각을 떨쳐내려는 듯이 승현은 눈앞에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오, 승현. 오늘 삘 받았어?”

“하…….”

“그래, 그래. 마셔, 마셔. 쭉쭉!”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찬우가 시뻘게진 얼굴로 승현의 잔에 맥주를 잔뜩 따랐다. 이미 동기들은 하나같이 거나하게 취한 모양새였다.

평소였다면 이런 날, 승현은 되도록 술을 줄이고 동기들을 챙겼을 텐데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맥주잔을 기울이는 승현을 누군가가 툭 쳤다.

“……?”

“안녕?”

맥주잔을 든 채 승현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누군지 알면 똑같이 인사라도 하겠는데, 공교롭게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승현의 난처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아, 나는 영문과인데. 저쪽에서 술 마시고 있었거든. 전부터 너랑 말하고 싶어서.”

“그래서?”

“어?”

맥주잔에서 입술을 뗀 승현이 불청객을 똑바로 쳐다봤다. 당황하는 남자에게 승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말은 이미 했잖아. 이제 뭐 어쩌려고?”

“어? 아니, 그게…….”

호기롭게 말을 건 것치고 남자는 지나치게 당황했다. 그는 예상보다 위압감이 풍기는 승현을 보고 놀란 참이었다.

승현은 그 예쁜 외모만큼이나 대학에서 유명한 편이었다. 그가 오메가라는 것도 유명세를 탄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제 억제제가 완벽에 가까워져 오메가를 차별하는 풍조는 없어지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히트 사이클을 겪는 오메가들은 음란하고 문란할 것이라고, 잘 모르는 베타들은 멋대로 생각하곤 했다.

이전의 승현은 이런 취급에 그저 당황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고작 이렇게 쏘아붙이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된 대답 한번 못 하는 병신들 때문에 마음고생이나 하고.

한숨을 푹 내쉰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승현, 어디 가?”

“바람 좀 쐬러.”

멍청하게 입을 벌린 이름 모를 남자와 만취한 채 자기들끼리 얘기하기 바쁜 동기들을 내버려 두고 승현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무시당한 남자가 눈치 없이 따라 나오는 기색은 없었다.

“후.”

담벼락에 등을 기댄 승현이 뻑뻑한 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멀어지니 그나마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때 문득 진수환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넋을 놓고 있으니 또 진수환을 생각한다. 승현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손에 들었다.

망설이던 승현이 앱을 하나 켰다. 잠시 뒤, 로딩 화면과 함께 심플한 배경이 떠올랐다. 몇 개의 단어가 화면에 뜨고, 승현은 ‘집’이라고 쓰여 있는 걸 터치했다.

이윽고 익숙한 화면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바로 진수환의 집에 설치해 놓은 CCTV였다.

사람들이 집에 CCTV를 설치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부분은 안전을 위한 방범용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승현이 그곳에 CCTV를 설치한 이유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자신을 강간하려는 놈의 증거를 수집하려고 CCTV를 달다니. 승현 본인도 달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어쨌든 한 번은 그놈에게 당하긴 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다시 같이 살게 된 진수환은 승현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우습게도 손가락 하나 닿을라치면 움츠러들고, 피하고, 기겁했다. 오히려 안달이 나서 그를 도발한 건 승현이었다.

원하던 대로 진수환이 먼저 자신에게 손을 댔지만, 겨우 한다는 짓이 어린애도 안 할 뽀뽀였다. 그마저도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히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장난해? 화가 난 승현이 먼저 이성을 잃고 키스를 퍼부었을 정도로, 그때의 승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 모든 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

초조함을 느낀 승현이 CCTV의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진수환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승현이 매시간 반복해 오던 일이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가면을 집어 던진 수환이 뭔가를 하지 않을까 하고 저녁마다 감시하곤 했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감시한 결과,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수환이 한 행동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씻고, 밥을 먹고, TV를 좀 보다가 가끔 누구와 통화하고,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잠들고…….

정말 평범한 사람이 할 만한 루틴이었다. 승현의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속지 않을 거라고, 기를 쓰고 살펴봐도 수환은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방심하게 만들고 거하게 뒤통수를 때릴 생각인가? 그런 의심은 TV를 보며 멍청하게 웃는 수환의 모습을 보면 눈 녹듯이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은 수환이 평소와 다른 일을 하는 게 승현의 눈에 띄었다.

“……맥주?”

냉장고를 뒤지던 수환이 맥주를 가지고 거실로 돌아갔다. 동거를 다시 시작한 이후 이상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아니었다.

진수환은 술을 마시면 개가 된다. 그야말로 미친개. 그의 할아버지이자 화명의 오너인 진길영마저 진수환이 술을 마시면 상대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어련하겠어. 이제 술을 마시면 진짜로 본색을 드러내겠지. 승현은 안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진수환에게 뭘 기대했던 건지. 승현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CCTV 앱을 종료하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한창 술자리가 벌어지는 곳으로 돌아갔다.

“나 이만 돌아갈게.”

“어? 승혀언, 벌써 가?”

“어, 적당히 마시고 가라.”

이미 술에 취해 발음이 꼬일 대로 꼬인 동기들은 하나같이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승현은 일단 당부의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술집을 나온 승현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승현이 그토록 원하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그동안 진수환의 달라진 모습에 휘둘리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

그래도 언젠가는 끝내야 할 일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늦어졌을 뿐. 승현은 마음을 다잡으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띠, 띠.

삐리릭.

거실에 있을 수환을 찾아 승현은 곧장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소파에 앉은 수환의 모습이 보였다. 승현은 조금 긴장한 채 그에게 다가갔다.

“아….”

“……!”

그때 눈물이 한 방울 수환의 눈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긴장하며 다가갔던 승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울고 있어? 진수환이?

기분 나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승현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울어요?”

“…….”

대답하지 못하는 수환에게 승현이 성큼 다가갔다. 방금까지 마셨던 술 때문인지, 뒤늦게 취기가 돌아 머릿속이 무겁게 느껴졌다. 수환의 앞에 선 채로 승현이 다시 물었다.

“왜 우냐고요.”

“그게…….”

수환이 고개를 푹 숙이는 게 보였다.

순간 눈앞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승현은 두 손으로 수환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이를 갈며 말했다.

“왜 우냐고, 진수환.”

“……!”

수환은 놀랐다. 울고 있는데 승현이 갑자기 집에 온 것도 놀랐고, 그를 보자 눈물이 그치기는커녕 더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들여다보고 있는 승현의 행동이었다.

“스, 승현아.”

“…….”

“흑…….”

대체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한번 터진 눈물은 봇물 터지듯 그칠 줄을 몰랐다. 서럽게 우는 수환의 얼굴을 승현이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요한 눈길이 수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따라 내려갔다.

멈춰 있던 승현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수환의 눈가를 더듬었다. 물기 어린 감촉이 느껴지자 그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굳었다.

진수환이 그의 눈앞에서 울고 있었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그 광경은 승현의 망막에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울지 마요.”

“읏.”

승현의 손가락이 수환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눈물을 닦아 주는 그 자상한 행동에 수환은 오히려 더 눈물이 났다.

“울지 말라니까.”

“흣, 그치만.”

무언가를 말하려 오물거리는 입술을 승현이 지그시 응시했다. 탐스러운 입술이 달싹거리자 순간 거센 충동이 몰아쳤다.

울어서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일까. 수환의 눈물에서 페로몬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승현은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수환의 눈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윽……!”

수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축축한 감촉이 눈가에서 느껴졌다.

‘하, 핥고 있어? 내 눈을?’

깜짝 놀란 수환이 몸을 굳혔다. 너무 놀라서 몸이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꼼짝없이 승현의 혀를 받아 내며, 수환은 몽롱한 머릿속으로 이게 정말로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눈가를 간지럽히던 감촉이 떨어져 나가고, 수환은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이제 그쳤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수환은 그저 멍한 눈으로 승현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은 도무지 방금까지 자신의 얼굴을 개처럼 핥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까는 너무 놀라서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참을 수 없이 민망해졌다.

다 큰 남자가 엉엉 운 데다가,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이다니. 게다가 그걸 본 승현이 눈물을 핥, 핥기까지……. 수환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음미하듯이 내려다보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울었어요?”

“어? 그게…….”

승현은 기어코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물었다. 수환은 다시 난감해졌다. 울었던 이유를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여기가 사실은 책 속의 세계고, 곧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에게 빙의해서 불안하다고 말하면 승현이 얼마나 황당해할까. 가뜩이나 안 좋은 이미지가 잔뜩 박혀 있는데, 정신 이상자 취급까진 받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승현의 눈길을 피하려 애쓰며 수환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승현에게 얼굴이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진수환의 몸은 알파다. 수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환은 그렇게 과격하게 승현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순간적으로 변명을 지어 내뱉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혼자 술 마시고 좀 취해서…….”

“…….”

“기분이 좀 나빠졌었나 봐. 그래서 그랬어.”

한참이나 수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승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응.”

혹여 거짓말인 걸 들킬세라 수환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승현은 더 이상 캐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환은 속으로 안도하며 두 눈을 데룩 굴렀다.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간신히 제정신이 드니 승현과 마주 보고 있는 자세가 상당히 민망했다. 게다가 승현은 왜인지 아직도 수환의 얼굴을 붙잡고 놔주지를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멈칫거리며 승현을 쳐다보던 수환이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저기.”

“네.”

“나 이제 괜찮은데.”

“그래서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승현 때문에 수환은 말도 잇지 못하고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래서라니. 이 자세가 민망하지도 않나? 수환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부탁했다.

“이제 좀… 놔줄래?”

그러나 승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수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승현이 툭 내뱉듯이 대답했다.

“싫은데요.”

“뭐?”

“싫다고요.”

“…왜?”

수환의 물음에 승현의 모양 좋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유라. 이유는 그 누구보다 승현 자신이 더 알고 싶었다. 왜 이렇게나 강한 충동이 드는 건지. 왜 눈앞에 있는 알파를 놓지 못하고 있는지.

조금만 더 파헤쳐 보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승현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어?”

승현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 게 보이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알코올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그게 비단 술 냄새만이 아니라는 걸 수환은 뒤늦게 깨달았다.

입술에 닿은 숨결에서 아릿하고 달콤한 시트러스 향이 풍겼다. 숨을 한 번 쉬는 것만으로도 승현의 페로몬이 폐 속 가득 들어찼다.

“읏……!”

“하아.”

페로몬에 푹 절여진 뇌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낯선 감각이 수도 없이 수환을 들쑤셨다.

수환의 몸은 알파였다. 비록 열성이긴 했지만 건장한 알파였고, 가뜩이나 페로몬에 취약한 수환은 눈앞에 있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흐, 아아.”

벌벌 떠는 수환을 코앞에서 내려다보던 승현이 혀를 내밀어 수환의 입술을 핥았다. 마치 그게 기폭제라도 된 듯, 수환의 몸에서 꽉 막혀 있던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의 페로몬 향이 공중에서 뒤엉켰다.

***

뜨거운 열락 속에서 수환은 눈을 떴다. 어쩐지 머릿속이 흐릿하고, 자기 전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순간 정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그리고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직 눈앞이 흐릿해서 수환은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추웁, 춥, 질척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어지럽혔다.

뭐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힌 수환이 시선을 내렸다. 제일 먼저 흐트러진 연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또다시 무언가를 춥, 하고 길게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하고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한 그 순간, 수환의 허리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으읏!”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환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왜, 왜…….”

수환은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곧게 뻗은 다리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승현이었다. 수환의 목소리가 들리자 흘끗 위를 쳐다본 그는 보란 듯이 무언가를 거세게 빨아올렸다.

“하윽!”

몸속의 모든 피가 아래로 몰린 듯한 느낌이었다. 강렬한 쾌감이 머릿속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허벅지를 덜덜 떨며 수환이 기겁한 눈으로 승현을 내려다봤다.

승현의 입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건 분명, 수환의 분신이었다. 제 성기를 입에 문 승현의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으로 보였다.

“자, 잠깐… 흑!”

수환의 말을 무시하며, 승현은 계속해서 펠라를 했다. 부드럽고 뜨거운 점막이 피가 몰린 중심을 감싸며 압박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쾌감이 수환의 머릿속을 점점 새하얗게 만들었다.

“안 돼, 잠깐… 윽!”

사정감을 참을 수 없게 된 수환이 애원하듯 말했다. 허리를 비틀어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꽉 붙잡고 있는 승현의 두 손이 그 움직임을 방해했다.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쾌감에 수환이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무자비한 손길이 수환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수환은 하는 수 없이 허벅지에 힘을 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으윽……!”

이윽고 참을 수 없게 된 수환이 길게 신음하며 사정했다. 해방감과 함께 머릿속이 녹아내릴 것 같은 쾌락이 느껴졌다. 한껏 경직되었던 몸이 어느 순간 탁 풀어졌다.

기운 없이 소파 위에 몸을 축 늘어트린 수환이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흐릿한 시선 너머로 테이블 위에서 굴러떨어진 맥주캔이 보였다. 멍하니 그걸 보며 숨을 헐떡이던 수환이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수환의 감각이 점점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무려 승현의 입속에 사정하고 만 것이다. 수환의 정액을 다 삼키지 못했는지, 승현의 입에서 하얀 정액이 침과 함께 주륵 흘러나왔다. 손바닥 위에 정액을 뱉어낸 승현이 눈을 들어 수환을 응시했다.

“…잠깐, 이라고 했는데.”

민망해진 수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어나 보니 승현이 자신의 것을 빨고 있고, 그 입속에 사정하다니.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무작정 도망가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혹시 이건 꿈이 아닐까? 자신은 지금 술을 마시고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런 기분은 승현의 손이 닿지 말아야 할 부분에 닿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승현은 정액에 젖은 손가락으로 수환의 뒤를 더듬었다. 꽉 막혀 있는 애널 주변을 살살 문지르자, 수환이 기겁하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 마!”

사정한 직후라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알파의 체력이다. 근육질의 다리로 몸을 밀어대며 꽤 격렬한 저항을 하자, 혀를 찬 승현이 손가락을 빼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진짜 싫어요?”

“싫어, 진짜 싫어.”

수환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이지만, 그래도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했다. 설령 하더라도, 왜 자신이 아래란 말인가. 알파는 자신인데!

사실 처음 승현과 키스했을 때부터, 수환은 은연중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자신이 아래에 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가 알파인데……! 내가 공인데……!’

이미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수환은 쓸모없기 그지없는 자존심을 세웠다. 그런 수환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저 건들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요.”

“뭐?”

어지러운 머리로 수환이 언젠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자신이 승현의 털끝 하나도 손대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그걸 떠올린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했는데… 그게 왜?”

두 눈을 끔벅이는 수환을 내려다보며 승현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이런 상황에서도 빛이 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수환은 불안한 느낌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선배님이 깔려야죠.”

“뭐?”

멍청하게 입을 벌리는 사이, 말 못 할 통증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승현의 손가락이 불시에 다시 애널 안을 파고든 것이다.

“하윽!”

“어쩔 수가 없잖아요. 선배님이 그런 약속을 하셨으니…….”

느릿하게 말한 승현이 다소 거칠게 수환의 안을 휘저었다. 내벽이 손가락에 딱 달라붙어 조이기 시작했다.

“제가 선배님께 박을 수밖에요.”

“아앗, 앗!”

승현의 손가락이 애널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안을 침범했다. 긴 손가락이 다시 안쪽까지 깊이 들어와 애널 안을 농락했다.

“흣, 싫어, 아!”

싫다는 말에도 승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수환의 허벅지를 벌려 손가락이 더 잘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수환은 다리를 한껏 벌린 채 얼굴을 붉혔다.

손가락이 두 개째 파고들었을 때, 술에 취해 몸에서 힘이 빠진 수환은 저항할 의지를 점점 잃어버렸다. 그저 승현의 움직임에 맞춰 움찔거리면서 신음을 내뱉었다. 물론 좋아서 내는 신음은 아니었다.

“흐읏, 윽.”

알파의 몸은 뒤로 잘 느끼지 못한다. 젖지 않는 내벽 안에 체액을 묻혀 길들여도 길은 여전히 좁기만 했다.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결코 알파를 제 아래에 깔면서 흥분하는 이상 성욕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오메가로서 알파에게 끌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가끔 자신을 유혹하듯이 풀어내는 알파의 페로몬 향은 그저 역하기만 했다. 승현은 자신이 일반적인 오메가들과 다르다는 걸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흥분되는 건 수환이 알파라서가 아닐 것이다. 형질 따위는 상관없이,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가 아닌, 그저 자신이 눈앞에 있는 수환을 안고 싶은 것뿐이다.

“하읏, 앗!”

어느 지점을 꾹 누르자 수환의 신음이 달라졌다. 자신도 이런 소리를 낼 줄 몰랐다는 듯, 수환이 당황한 얼굴로 신음을 내뱉은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제 커다란 손으로 붉어진 얼굴도 가렸다.

“읏, 싫어, 거기…, 싫어, 아…!”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며 더듬더듬 말하더니 거칠게 도리질을 친다. 그러나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수환의 페니스는 다시 기운을 받아 꼿꼿이 일어섰다.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승현의 손가락이 집요하게 스팟을 문질렀다.

“여기가 좋아요?”

“흣, 아, 아니… 앗……!”

바짝 선 성기 끝에서 프리컴이 질질 흘렀다. 이런 모습을 하고 차마 더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수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승현은 집요했다. 어느새 손가락을 세 개나 집어넣어 수환의 구멍 안을 마음껏 헤집었다. 기가 막히게도 수환은 자신의 안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선 안 되는 곳에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꽉 들어차 안을 넓히는 감각은 생경하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기 위해 소파에 올려 둔 발에 힘을 줬다.

그리고 그 순간, 파도처럼 승현의 페로몬이 수환을 덮쳤다. 흥분한 수환이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흘리자, 승현도 참지 못하고 페로몬을 풀어 버린 것이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한순간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흐읏……!”

수환이 페로몬에 잠식되어 허덕이고 있을 때, 아래를 괴롭히던 손가락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온몸이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손가락이 안에서 다 나간 후에도 몸이 굳어 있었다. 수환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소파 위에 축 늘어졌다.

이제 끝났나? 수환이 땀에 젖은 멍한 얼굴로 순진하게 생각했다.

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치워졌다. 수환의 한쪽 손을 잡아 소파 위에 내리누른 승현이 몸을 구부리며 수환을 내려다봤다.

“이제 들어갈게요.”

“……?”

들어가……? 어디를……?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생각을 하던 수환은 뒤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자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윽……!”

“하, 좁아….”

둥근 귀두가 먼저 삽입되고, 이윽고 굵은 기둥이 여린 살을 가르며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내벽 때문에 딱 달라붙은 페니스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승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아픈 것은 수환도 마찬가지였다. 승현의 아래에 짓눌린 수환이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외쳤다.

“흣, 아, 승현, 아, 아파, 흑……!”

더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수환이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오메가면서 승현의 페니스는 너무 크고, 자신은 깔리는 게 익숙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은 무리라며 입술을 깨물고, 무서워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윽, 너무 아파아.”

“…….”

수환의 눈꼬리를 따라 투명한 눈물이 길게 떨어져 내려갔다. 승현은 움직임을 멈추고 소파에 뚝뚝 떨어진 눈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계속해서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승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수환의 눈가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미안해요. 근데…….”

“읏.”

“난 멈추지 못할 것 같아.”

“아윽……!”

그 말과 동시에 승현이 허리를 쳐올렸다. 기다란 페니스가 단번에 수환의 안을 파고들었다. 분명 귀두 끝만 간신히 들어갔었는데, 기둥 절반이 순식간에 처박혀 안을 가득 채웠다. 둥글게 벌어진 수환의 입술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눈가를 지분거리던 승현의 입술이 밑으로 내려갔다. 소리를 내지르는 수환의 입술을 막고 거칠게 빨아들였다. 수환은 얼얼한 아래에 신경을 쓸 새도 없이 승현과 키스를 이어 나갔다.

“흐읏, 흡.”

“하아.”

승현의 타액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자 또다시 흥분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알파의 몸은 안을 침범한 페니스에 적대적이면서도 페로몬에 반응해 금방 흐물흐물해졌다. 마치 오메가의 모든 걸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그렇게 수환의 머릿속도 금방 녹아내렸다. 달콤한 시트러스 향이 가장 먼저 후각을 상실시키고, 기어코 뇌도 꿀에 절여 버리고 말았다. 아, 기분 좋아. 몸이 아픈 감각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수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승현의 입술을 빨면서 수환의 허리가 저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읏.”

“하아, 하… 승현아…….”

승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뗐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타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붉은 입술을 깨문 승현이 야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수환의 얼굴을 노려봤다. 가뜩이나 참고 있었던 승현은 가벼운 자극에도 쉽게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선배.”

낮은 음성은 마치 굶주린 짐승이 내는 소리 같았다. 승현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를 갈 듯이 말했다.

“이제 움직여도 되는 거죠?”

“잠깐, 하읏!”

승현은 수환의 다리를 더 벌리게 하고 허리를 힘껏 앞으로 밀었다. 아까보다 한층 수월하게 열린 내벽은 뿌리까지 박힌 승현의 페니스를 반기듯 꾸물꾸물 달라붙었다. 승현이 만족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으, 아앗.”

옆으로 기울여진 수환의 얼굴에서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미간을 따라 흘러내린 땀이 눈가를 따라가서 언뜻 보면 또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걸 보던 승현이 홀린 듯이 수환의 땀을 핥았다. 거기서도 단맛이 느껴졌다. 미친 듯이 달았다.

그제야 기이한 충족감이 승현을 채웠다. 자신의 모든 걸 받아 낸 수환이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힘겨워하며 밭은 숨을 내쉬는 도톰한 입술까지 진득하게 빨아올린 승현이 배부른 짐승처럼 미소 지었다.

이건 내 거다. 내 알파다.

비록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승현이 본격적으로 허리를 쳐올리며 몸을 움직였다.

“흣, 아, 아아, 앗!”

“읏, 선배.”

승현의 빠른 움직임에 수환의 몸이 들썩거렸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적나라한 소리가 거실에 가득 퍼졌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 사이로 길고 굵은 성기가 연신 들락날락하며 피스톤 질을 했다.

제 안을 파고드는 페니스가 안쪽을 찌를 때마다 수환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갈 곳을 잃은 두 팔로 허공을 휘젓다가 승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이던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신경이 죄다 아래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페니스를 뜨겁게 감싼 수환의 안이 미치도록 기분 좋았다.

“흐, 천천, 천천히……!”

손톱을 세운 수환의 손이 승현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그러자 제법 날카로운 손톱이 승현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삽질을 계속했다. 천천히 하라는 수환의 애원은 그에게 잘 들리지도 않았다. 예상치도 못하게 깨닫게 된 쾌락에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속을 파고드는 성기가 배 속을 긁을 때마다 이상한 열감이 그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그 열이 점점 몸 전체로 퍼져 나가 머릿속까지 잠식했다. 조금만 더 천천히 하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승현은 자신의 말 따위 듣지 않고 무자비하게 배 속을 쑤시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온 귀두 끝이 수환의 안 어딘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곳을 조금만 스치기만 해도 수환은 움찔 놀라며 몸을 파드득 떨었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던 승현은 그런 수환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흥분한 페니스로 안을 파고들며 그곳을 중점적으로 찔렀다. 움찔거리기만 하던 수환의 몸이 쾌락을 느끼며 점점 변해갔다.

“앗, 아, 거기, 흑…, 앗!”

“여기, 후, 좋아요?”

거친 숨을 내쉬며 승현이 물었다. 그러나 수환은 대답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는 투명한 침을 질질 흘리며 신음을 흘리기 바빴다. 승현이 수환의 귓가에 입술을 대며 집요하게 물었다.

“응? 좋아?”

“흐으으, 좋아…, 앗! 아앗!”

커다란 알파의 몸이 쾌락에 젖어 부르르 떨었다. 열성치고는 제법 많은 페로몬이 흘러나와 승현을 감쌌다. 여지없이 잔뜩 흥분해 있다고 피력하는 듯한 향이었다. 마치 러트를 겪고 있는 알파가 발산할 것 같은.

잠시 뒤, 사정감을 느낀 승현이 이를 악물었다. 벌써 사정하고 싶진 않지만, 서로 지나치게 흥분한 게 문제였다. 수환은 참지 못하고 먼저 새하얀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읏, 선배…, 윽.”

“하으, 아아앗……!”

결국 수환이 먼저 사정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수환의 두 다리가 승현의 허리를 감았다. 두 번째 사정에 수환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박히면서 사정한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시에 꽉 조여드는 내벽에 승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덩달아 사정할 뻔했다. 수환의 배를 한 손으로 꾹 누르며 허리를 더욱 밀어붙였다. 그러자 안쪽 깊숙한 곳까지 승현의 페니스가 박혀 들어갔다.

“흐으읏!”

“읏, 먼저 가면, 하아…, 어떡해요?”

“흐읏…, 미, 미안…, 아!”

타박하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수환은 자신이 뭐 때문에 사과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열락이 꽃핀 얼굴은 그저 쉴 새 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윽, 나도 이제…….”

“아, 승현…, 아, 하읏……!”

빠르게 추삽질을 하던 승현이 마지막으로 힘껏 허리를 밀어붙이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줄곧 참고 있던 욕망을 터트렸다. 뜨거운 감각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수환은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뜨거운 물줄기가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생경한 느낌에 몸을 굳혔다. 승현이 자신의 안에서 사정하고 있었다.

“하아…, 아…….”

“윽…….”

파르르 떨던 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얼굴은 이런 순간마저도 지독히 아름다웠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정하는 승현의 얼굴이 망막에 새겨졌다.

“하아…….”

사정이 끝난 승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이 수환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수환은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승현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승현이 목이 마른 사람처럼 수환의 입술을 가르고 혀를 집어넣었다. 여전히 달큼한 향을 풍기는 오메가의 혀가 수환의 입안을 헤집었다.

이번에는 수환도 팔을 뻗어 승현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탈력감을 느끼는 몸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뒤늦게 취기까지 몰려오는지,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수환은 오메가의 페니스를 안에 품고 입술마저 내어 준 채, 온몸을 잠식하는 수마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선배?”

“으…….”

이상함을 눈치챈 승현이 입술을 떼고 물었으나, 수환은 이미 대답할 수 있는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윽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수환은 그렇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으음.”

몸을 작게 들썩이던 수환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콜록.”

목이 막힌 수환이 작게 기침을 했다. 아마도 자다가 목이 말라서 깬 게 아닌가 싶었다. 수환의 기침 소리에 별안간 뒤쪽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목말라요?”

“……응?”

수환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누구지? 순간 두려운 느낌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하고 스탠드 불이 켜졌다. 그러나 희미한 불빛을 보면서도 수환은 그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았다.

“조금 기다려요.”

“어? …어.”

얼떨결에 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리고,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제야 조금 제정신이 든 수환이 고개를 돌렸다.

수환은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있는 작은 스탠드에서 쏟아진 불빛이 주변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말하기 민망한 부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읏.”

왜 여기가 이렇게…… 아프지? 그리고 머리도 너무 아팠다. 수환이 끙끙거리며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신음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수환의 몸을 작게 흔들었다.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뜬 수환은 얼굴 옆에 가져다 대어진 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셔요.”

“응.”

겨우 몸을 일으킨 수환이 아이처럼 물을 받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 안으로 넘어가자 점차 제정신이 들었다.

“음…….”

“다 마셨어요?”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이 입에 대 주고 있던 컵을 협탁 위에 올려놨다.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보던 수환의 얼굴이 점차 달아올랐다.

욱신거리는 아래에서 아직도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지난밤의 일이 생각난 수환이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자요. 아직 새벽이에요.”

“아니, 난…….”

승현이 자신을 씻기고 침대에까지 옮겨 준 모양이었다.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수환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내 방 가서 잘게.”

“선배 방이요?”

수환의 말을 들은 승현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비록 어두워서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거기 잘 데 없잖아요.”

“매트리스, 그거 샀었잖아.”

“아, 그거.”

작게 중얼거린 승현의 입술이 곧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그거 버렸어요.”

“뭐?”

매트리스를 버렸다고? 그걸 왜?

황당해하는 수환에게 승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불량품이더라구요. 그래서 버렸어요.”

“어? 아니… 아닌데?”

자신이 썼을 땐 멀쩡하기만 한 매트리스였다. 그런데 어디가 이상하다는 걸까. 당황해하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요.”

“하지만…….”

머뭇거리는 수환의 어깨를 승현이 살짝 밀었다. 그러자 수환의 몸이 속절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

“자요.”

스탠드 불을 끈 승현이 뒤에서 수환을 끌어안았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수환의 코끝을 스쳤다. 놀라서 몸을 움찔거리자,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라니까.”

“…….”

이러고 어떻게 자…….

수환은 미칠 것 같았다. 귀를 간질이는 숨소리가 승현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메인수와 그 짓을 하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잔다고?

‘게다가 심지어 내가…….’

간밤의 일을 또 떠올린 수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있지도 않았던 알파로서의 자존심이 금세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세상에 오메가에게 안기는 알파가 어디 있을까. 수환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으음.”

그러나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자다가 도중에 깨어나서 그런지 금방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몸을 뒤척이던 수환이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승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손을 뻗은 수환이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거렸다.

번쩍, 눈이 떠졌다.

“어…….”

침대 위에 있는 건 수환뿐이었다. 넓은 침대 위에 혼자 누운 채로 눈을 깜빡이던 수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혼자 있는 게 심신에는 더 이로웠다.

순간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키며 베개에 얼굴을 붙이자, 다시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또 잠에 빠져들 찰나, 드르륵, 하는 진동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댔다.

드륵, 드르륵.

“으, 뭐야.”

짜증 어린 음성을 내뱉으며 수환이 손을 뻗었다. 미친 듯이 진동을 울리는 핸드폰을 가져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영감탱이]

“미친?”

영감탱이란, 진수환이 제 할아버지인 진길영을 등록해 놓은 이름이었다. 수환이 놀라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인마! 진수환!

“윽.”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침실 안에 크게 퍼졌다. 언제 들어도 나이에 맞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귀가 떨어질 듯해 핸드폰을 잠시 얼굴에서 떨어트린 수환이 얼굴을 작게 찌푸렸다.

“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너 인마, 대체 뭐 하는 거야? 어?

“제가 뭘요.”

기운 없는 수환의 말에 진길영이 또다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당장 회사로 튀어와!

“네?”

그렇게 말하고 전화가 뚝 끊겼다. 수환이 황당한 얼굴로 검게 변한 화면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주말인데 회사를 가야 한다니. 심지어 인턴은 방학 때 끝났는데.

억울했지만 진길영의 말을 무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얼굴을 찌푸리던 수환은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끄응.”

힘겹게 몸을 일으킨 수환이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계속해서 민망한 부위에 느껴지는 통증이 수환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힘들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씻고 오랜만에 정장을 몸에 걸쳤다. 머리도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기니 제법 태가 났다.

이렇게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으면 진수환도 꽤 우월한 알파처럼 보였다. 비록 알맹이는 소심한 서민이라 번지르르한 건 겉모습뿐이지만 말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수환이 드레스 룸을 나와 방을 지나쳤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진짜 없네.”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매트리스가 보이지 않았다. 꿈결처럼 들렸던 승현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매트리스를 버리다니. 불량품이었다고 하던데 사실일까? 자신이 쓸 땐 멀쩡하기만 했었는데.

고개를 갸웃한 수환이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더 늦으면 진길영의 호통만 더 커질 뿐이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 집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곳곳에 숨긴 초소형 카메라가 소리도 없이 그 모든 것들을 화면에 담고 있었다.

***

“도련님.”

회사에 가자 수환은 프리패스 급으로 회장실까지 안내되었다. 회장실 앞에 있던 도운이 수환에게 다가왔다.

“아, 실장님.”

도운을 발견한 수환이 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도운이 수환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묘하게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수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할아버진 또 왜 그러는데요?”

“그게…….”

도운이 얼른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환의 파혼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말하니, 진길영이 대번에 노발대발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도운은 자신이 말을 잘 전하지 못해 이렇게 되었다며 자책했다. 그러나 그 말에 수환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질질 끈 게 잘못이죠. 실장님 잘못 아니에요.”

“도련님….”

도운이 제법 감동한 얼굴로 수환을 쳐다봤다. 그가 화명에서 일한 뒤로 수환의 입에서 개소리가 아닌 사람다운 말이 나온 건 요 한 달간이 처음이었다.

처음엔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 껄끄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드디어 수환이 철이 들었나 싶어서 도운은 코끝이 찡해졌다.

“들어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아, 네.”

한숨을 내쉰 수환이 미적거리다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짙게 깔린 솔잎 향이 수환의 코를 찔렀다. 진수환의 할아버지, 진길영 역시 알파이기에 그의 페로몬 향이 회장실 안 곳곳에 깔려 있었다.

마치 맹수의 영역 안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환이 긴장하며 검은색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는 노신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 왔어요.”

“…….”

의외로 진길영은 수환을 보자마자 화를 버럭 내지는 않았다. 대신 부리부리한 눈으로 수환의 곳곳을 훑었다.

진수환의 부모는 어렸을 적 사고로 돌아가셨다. 일찍 부모를 여읜 진수환을 할아버지인 진길영이 키우다시피 했었다.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인 성격의 진길영 밑에서 자랐지만, 진수환은 착실하게 불량아가 되고 말았다. 딱히 불쌍하다고 진길영이 오냐오냐 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진길영은 나이에 비해 건장한 느낌이 들었다. 알파라서 그런지 풍채도 좋고 그 나이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디를 봐도 장성한 손자가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진수환은 그런 할아버지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것 같다. 핸드폰에 저장한 이름도 그렇고, 주건율에게 제거당할 때도 혈육인 진길영에게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메인공인 주건율이 다 손을 써 놨을 테지만.

메인공을 떠올리니 또 기분이 착잡해졌다. 뻣뻣하게 서 있는 수환을 보던 진길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이 못난 놈.”

“또 왜 그러시는데요?”

그리고 진길영 역시 제 손자인 진수환을 만만찮게 싫어한다.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저렇게 인상을 구기다니. 수환이 서서 입술을 비죽이자 진길영이 노한 얼굴로 외쳤다.

“아무 오메가랑 뒹구는 그 버릇, 대체 언제 고칠 거냐?”

“네?”

“오메가 냄새가 여기까지 풍긴다. 이 썩을 놈아!”

웬 오메가?

수환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러다 곧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아, 승현이 페로몬 향이……. 하긴, 그렇게 서로 페로몬으로 샤워를 할 정도로 퍼부었는데 향이 묻지 않으면 더 이상했다. 수환이 민망함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흠,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차마 오메가를 품은 게 아니라 안긴 거라고 말할 수가 없어 수환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수환을 노려보며 진길영이 또 혀를 끌끌 찼다.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못난 놈.

“하아, 그런 거나 말씀하시려고 부르셨어요?”

한숨을 쉬며 말하자 진길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도운이 얼마 전부터 바람을 불어넣듯이 수환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진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웬 오메가 냄새나 풀풀 풍기는 꼴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진길영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HS의 오메가랑은 대체 언제 파혼할 거냐?”

HS는 한때 잘 나가던 국내의 제약회사였다. 바로 승현의 증조할아버지가 설립한 곳이었다. 그러니 진길영이 말한 HS의 오메가라는 건 승현을 말하는 것일 테다. 수환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승현이에요. 이승현.”

오메가 차별 금지법이 국회에 통과된 지가 언젠데. 보수적인 진길영은 아직도 그 오메가, 오메가, 그러고 있었다. 수환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더욱 비죽였다.

“저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놈이랑 파혼하겠다고 한 건 네놈이야!”

“아, 한다니까요.”

작게 중얼거린 수환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일이 너무 꼬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승현과 파혼해야 하는데 술김에 그…… 그 짓을 하다니. 뜨거워지는 얼굴에 힘을 주며 수환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수환을 노려보며 혀를 끌끌 차던 진길영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다음 주에 선이나 봐라.”

“네?”

“삼영의 오메가랑 선 잡아 놨다.”

“아, 할아버지!”

수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성질 급한 노인네 같으니. 진수환이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끽해야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약혼과 결혼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속내는 못내 짐작이 간다. 망나니 같은 진수환을 빨리 결혼이라도 시켜서 누군가가 고삐를 잡아 주길 바라는 거겠지. 원작의 진수환은 그 이유로 가세가 기운 HS의 승현과 약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빙의한 자신이 먼저 승현과 파혼하겠다고 말을 해 버려서, 이야기 흐름이 너무 꼬여가고 있었다. 다른 오메가와 선을 보더라도, 적어도 승현과 파혼은 하고 해야 할 게 아닌가.

“저 안 가요.”

“어쭈?”

수환이 반항적으로 말하자 진길영의 눈썹이 위로 쓱 올라갔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외쳤다.

“안 가면 그 오메가 놈부터 집에서 내쫓을 줄 알아라!”

“네?”

진길영의 으름장에 수환이 황당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진길영은 진수환에게 수도 없이 잔소리는 해대면서, 한 번도 직접 제재를 가한 적은 없었다. 그게 진수환이 삐뚤어진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묘하게 대하는 게 달랐다. 머리가 아파진 수환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알았어요. 갈게요.”

“흥, 진작 그럴 것이지.”

“승현이는 건들지 마세요. 진짜.”

거듭 당부한 후에야 수환은 피곤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진길영과 대화를 나누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였다.

“저 가요. 또 이렇게 부르지 마세요.”

“쯔쯔, 말본새하고는.”

“하아…….”

다시금 한숨을 내쉰 수환이 꾸벅 인사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도운이 수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하… 뭐, 예.”

잘은 아니지만 얘기를 나누긴 했지. 수환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그래도…….”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도운이 로비까지 따라 내려왔다. 정말 괜찮다는데도 옆에 따라붙은 도운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걷는 게 좀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피곤하신 거지요?”

“아니, 그건…….”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수환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붉어진 얼굴을 뭐라 착각한 건지, 도운이 손을 뻗어왔다. 수환의 이마를 도운의 커다란 손이 덮었다.

“음, 열은 없으신 것 같은데.”

“자, 잠깐…….”

당황한 수환이 도운의 팔을 치우려고 했을 때였다.

“……선배.”

“응?”

이런 곳에서 들릴 리 없는 낮은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수환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두운 표정의 승현이 수환과 도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