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수가 이물질에게 집착하는데요 1권
목차
이물질은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다
1.
삐빅.
[AM. 08:00]
탁상 위에 올린 전자시계에서 알림음과 함께 현재 시각이 작게 떠올랐다. 잠에서 막 깨어난 수환은 잠시 동안 무감한 눈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 위에 떠오른 몇 글자가 수환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이따가 봐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문자가 화면에 떴다가 사라졌다. 글자가 사라지자 수환은 참았던 숨을 짧게 토해냈다.
“하아.”
이날이 빨리 왔으면 하면서도, 동시에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중적인 마음이 갈수록 심해져서 큰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트는데, 반대편 거울에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흠칫, 저도 모르게 몸을 떤 수환이 놀란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봤다. 놀란 표정의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수환의 움직임을 똑같이 따라 했다.
“…하.”
이제 슬슬 적응할 때도 됐건만, 수환은 아직도 거울 속의 남자가 끔찍이도 낯설었다.
이 몸에 빙의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 이 몸으로 눈을 떴을 땐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눈을 뜨니 어딘지 모를 뒷골목 전봇대 밑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이곳은 BL 소설 속 세상이었다. 수환이 그걸 깨달은 건 빙의하고 정확히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몸 주인에 관한 기억은 없었지만, 주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수환은 사실 빙의 전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텅 빈 머릿속에 표표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우습게도 전생의 자신이 읽었을 거라고 짐작되는 소설 내용이었다. 그것도 19금 피폐물 BL 소설.
제목은 떠오르지 않고, 오직 그 피폐한 내용과 등장인물들 이름만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은 그 소설 속 서브공과 이름이 똑같았다.
서브공? 아니, 그놈은 서브공 취급도 받지 못한 이물질이었다. 메인수에게 집착해서 억지로 약혼하고 감금에 폭행까지 일삼은 범죄자 새끼였다. 수환은 또다시 떠오른 소설 내용에 눈살을 찌푸리며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
틀자마자 적당한 온도의 물이 곧장 수환의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잘 짜인 근육에 물이 닿자 작게 꿈틀거렸다. 이제는 자신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차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진수환. 열등감이 심한 열성 알파. 재벌 3세로 태어났는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열성인 스스로를 혐오해서 주변에 화풀이만 하다가 우성 오메가인 메인수에게 그 열등감을 드러내며 집착한 이물질.
수환은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빙의하기 전의 자신은 아마 제정신 똑바르게 박힌 소시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자신이 진수환의 몸에 빙의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그리고 기겁했다.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빙의했으면 좋으련만, 이미 진수환은 메인수인 이승현을 만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았을 때 수환은 가슴이 철렁했다. 필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지금이 어떤 시점인지를 알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수환이 아직 미친 기행을 저지르기 전이었다는 것이다. 까딱 잘못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자신이 감당해야 했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수환은 정말 운이 좋았다. 다행히 진수환이 메인수를 덮치기 딱 하루 전에 빙의했으니까 말이다.
끼릭.
샤워기 버튼을 반대로 돌려 물길을 막은 수환이 터벅거리며 욕실을 벗어났다. 모노톤의 깔끔한 벽지로 도배한 호텔 방 안은 한 달 동안 살았다고 그럭저럭 눈에 익숙해져 있었다.
수환은 빙의하자마자 메인수와 동거하고 있던 집을 뛰쳐나왔다. 혼란스러웠던 그는 자신을 죽게 할 메인수를 도저히 제정신으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잘못된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기 시작했다. 한 달간 호텔 방에 머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수환, 이 미친놈은 소설 초반에 메인수를 가지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집안 권력을 이용해서 억지로 메인수와 약혼하고, 메인수 집안을 쫄딱 망할 뻔하게 해 그를 억지로 자신과 동거하게 만들었다.
그 후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메인수를 감금하고 강제로 취했다. 19금 소설답게 온갖 말 못 할 짓들을 메인수에게 저질렀다. 이물질임에도 참 만족할 정도로 놀아났지. 물론 그 끝은 죽음이었지만.
진수환이 결국 메인공에게 죽임당하는 걸 떠올린 수환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빙의했으니, 이제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이었다. 메인수가 억지로 자신과 약혼하긴 했지만, 그는 아직 순결하며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다. 진수환 그 새끼가 딱 준비 만반이었던 전날 밤에 자신이 빙의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수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기쁨에 취했기 때문일까. 거나하게 취한 진수환은 더러운 뒷골목에서 전봇대에 머리를 들이박고 그대로 기절했다. 워낙 후미진 곳이라 아무도 그가 쓰러진 걸 발견하지 못했고, 아침에 일어난 진수환은 더 이상 ‘진수환’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뭐, 그대로 골로 갔었나 보지. 이제 그 ‘진수환’이 된 수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토스트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식빵을 입에 물었다.
이 한 달 동안 참 바쁘게 살았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메인수와 멀어져야 했다. 진수환은 멍청하게 메인수에게 집착하다가 메인공에게 죽고 말았으니까.
약혼 전에 빙의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해버린 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약혼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했다. 애초에 메인수의 집안이 그리 빵빵하지 않아서 진수환의 집안 쪽에서는 탐탁지 않아 했었다. 워낙 진수환이 그 못된 성질머리로 난리를 치니 마지못해 허락한 거였지. 메인수가 우성 오메가이기도 했고.
집안 어른들을 다시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약혼이 그리 쉬운 거냐고 면박을 주던 진수환의 할아버지이자 대기업 회장인 진길영은 자기가 주선한 오메가 세 명과 선을 보면 파혼을 허락해 주겠다고 했다. 그 허락을 받고 주변 정리를 하기까지 딱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차.”
식빵을 입안에 욱여넣던 수환은 약속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서둘러 재킷을 들고 호텔 방을 나섰다.
이제 메인수를 만나 파혼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도 곁들여야지. 비록 자신이 한 짓은 아니지만 손이 닳도록 사죄해서 메인수와 남남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윽고 약속 장소로 정한 카페가 눈에 보였다.
[D.Clare]
메인수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였다. 수환은 갈색 벽돌로 둘러싸인 멋스러운 카페를 눈으로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딸랑.
카페 안에 맑은 방울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수환은 작고 아담한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대학가에 위치한 카페는 커피가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곳이지만 아직 방학이고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곧 수환의 눈에 창가 자리에 앉은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을 받으며 아름다운 남자가 창밖 너머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주변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빛을 받아 반짝이며 부유하는 먼지들마저 남자를 돋보이게 해 주는 장치처럼 보였다.
이승현. 이 소설의 메인수이자 진수환이 집착하여 너덜너덜해졌던 피해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원래의 진수환과 달리 자신은 이승현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겨우 떠올린 기억에 의지해 집에 돌아가 마주한 그를 보고 놀라서 바로 집을 뛰쳐나왔으니까.
지금은 아직… 권력을 이용해 억지로 약혼한 쓰레기? 지긋지긋한 스토커 정도?
‘퍽이나 안심이 된다.’
씁쓸하게 소설의 내용을 떠올린 수환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걸어갔다. 곧 그를 발견한 승현이 밝게 빛나는 갈색 눈을 들어 수환을 쳐다봤다.
‘와, 무슨 눈까지 반짝거려.’
이게 바로 메인수의 위엄인가. 수환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승현을 응시했다. 눈은 크지만 쌍꺼풀이 진하고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어서 그런지 약간 고양이상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아주 앙칼진 느낌은 아니고 기품 있는 페르시안처럼 고고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게다가 우성 오메가라 그런지 오메가치고는 떡 벌어진 어깨하며 튼튼한 골격은 열성 알파인 진수환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주 서면 겉으로는 이승현이 더 알파처럼 보이지 않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승현의 앞에 앉았다.
“늦어서 미안.”
흘끗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는 수환을 묘한 눈으로 보던 승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막 왔어요.”
“아… 그래?”
얼마간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수환은 수환대로 승현의 눈치를 살피고, 승현은 어딘가 달라진 수환의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메인수를 눈앞에 두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째 한 달 전 마주쳤을 때보다 외모가 더 빛나는 것 같았다.
“…나도 주문하고 올게.”
“그래요.”
정신없이 승현의 외모에 홀렸던 수환은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기 몫의 음료를 주문하고 다시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간신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흠, 저기.”
“왜 집에 안 돌아와요?”
“…응?”
본격적으로 얘기를 꺼내려던 수환은 승현의 물음에 흠칫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메인수의 말이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타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설마, 착각이겠지. 수환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좀, 일이 바빴어.”
“인턴한테 일을 그렇게 많이 시킨다고요?”
“그게…….”
수환은 현재 자기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말이 인턴이지 한량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졸업하고 사원으로 설렁설렁 다니다가 초고속 승진을 할 테니 회사에서 일을 많이 시킬 리가 없었다. 승현도 그걸 꿰뚫어 보고 한 말이지만 수환은 일단 얼버무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할 말이 있어.”
“……?”
말하기 전, 목이 탄 수환은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그는 시원한 자몽 에이드를 시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살짝 쓴맛이 나는 차가운 음료가 수환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자마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정말 미안했어. 내가 진짜…… 너한테 못 할 짓을 했어.”
“……!”
“정말 미안해.”
눈을 질끈 감고 사과의 말을 내뱉은 수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승현이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환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우리 파혼하자.”
“…뭐라고요?”
승현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놀라는 얼굴조차 그림처럼 예뻤다. 그래서 진수환이 그렇게 집착했나 싶었다.
수환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뭘 예쁘다고 감탄하고 있어? 추잡한 진수환도 아니고.
흠흠, 헛기침을 하며 수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파혼하자고.”
좋아할 줄 알았던 승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눈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이 부채처럼 넓게 퍼졌다. 어쩐지 방금 음료를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목이 말라서 수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파혼이요.”
“응.”
읊조리듯 조용히 중얼거린 승현이 눈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눈 속에는 미약한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화가 난 듯한 얼굴이라 수환은 당황하며 눈을 깜박였다.
“당신은 참 쉽네요.”
“뭐?”
“약혼도 제멋대로 하고, 그 집에도 억지로 불러들이고선, 이번엔 파혼이요? 지금 장난해요?”
“아니, 그…….”
생각해 보니 승현의 입장에선 갑자기 파혼하자는 것도 열 받을 만한 일이었다. 약혼이 장난이냐고 소리치던 진수환의 할아버지, 진길영의 음성이 문득 떠올랐다. 무작정 메인수와 손절하고 멀어질 생각에 그의 마음을 섬세하게 보살피지 못한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단 말밖에 못 해서 미안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보상해 줄게.”
“…….”
“그리고 그 집은 너 가져. 보상이 아니고 그냥 주는 거야. 난 절대 안 갈 테니까 안심하고.”
보상 문제가 나오니 한 말인데 승현의 얼굴이 또 미묘해졌다. 가족의 사업이 담보로 붙잡혀 있어 어쩔 수 없이 진수환의 집에 스스로 들어갔던 승현은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집은요?”
“…거기 이미 딴 사람이 살고 있더라.”
“하.”
집을 뛰쳐나와 호텔 방을 잡은 뒤, 정신을 차리자마자 승현이 살고 있던 원룸을 되찾으려고 알아봤었다. 그러나 약삭빠른 원룸 주인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세를 줘 버린 뒤였다. 아마 다음 학기부터 학교 다닐 대학생이겠지.
그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쩨쩨하게 다른 원룸 방을 잡아 줄 바에는 통 크게 지금 살고 있는 진수환의 집을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돈을 요구하면 그것도 최대한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이번엔 또 무슨 속셈이에요?”
수환의 말을 끊어 먹은 승현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 불신 가득한 얼굴에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멈칫했던 수환이 곧 고개를 내저으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속셈이라니. 없어. 그런 거.”
“…….”
“정말이야. 이번만 제발 믿어 주라.”
수환은 얼어붙은 입술을 움직이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승현의 차가운 얼굴 위로 켜켜이 쌓인 묵은 감정들이 언뜻 보였다. 불신. 그리고 경멸. 오랜 세월 진수환에게 시달렸던 그에게는 이미 수환의 말 같은 건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믿을 수 없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까지 메인수가 거부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차라리 직접 만나지 말고 서면으로 연락을 해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을 무렵,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증명해 봐요.”
“증명?”
고개를 들자 잠잠해진 갈색 눈이 수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마주하며 수환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어떻게?”
“말뿐인 걸 어떻게 믿어요. 각서도 법적 효력이 없고.”
“으, 응, 그렇지.”
의외로 날카로운 말을 하는 승현을 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니, 승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몸으로 증명해 봐요.”
“몸?”
예상치 못한 말에 수환의 눈이 커졌다. 좀 야릇한 쪽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이긴 한데. 어쨌든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건가? 근데, 어떻게? 계속 의문을 표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승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한 달간, 제 히트 사이클이랑 그쪽 러트가 한 번씩 올 때까지 같이 살아요. 그래도 제 몸에 손대지 않으면 믿어 줄게요.”
“어?”
수환은 이번에도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승현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응?’, ‘어?’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머저리도 아니고 이게 뭐야.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다음에 겨우 승현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메가와 알파는 자기 페로몬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간을 주기적으로 겪는다. 그걸 각각 히트 사이클, 러트라고 부른다.
빙의하고 나서 수환은 딱 한 번 러트를 겪었다. 하지만 진수환은 페로몬이 약한 열성 알파였다. 처음엔 좀 괴로웠지만, 진수환이 가지고 다니던 억제제를 먹으니 참을 만했다. 그냥 감기 기운이 있는 것처럼 조금 멍하고 몸에 기운이 없는 정도? 그래서 차라리 열성 알파의 몸에 빙의한 게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승현은 오메가라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우성이니까 자기 페로몬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승현에게 아무 사심 없는 자신만 러트를 잘 관리하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약속한 한 달만 무사히 넘기면 승현도 납득해 주겠지. 정말 자신이 개과천선했다는 걸 말이다.
속으로 얄팍한 계산을 끝내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정 못 믿겠으면 그렇게 하자.”
분명 승현이 바라는 대로 해 주겠다고 했는데, 또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래서 멀뚱히 쳐다보자 눈살을 찌푸린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당장 집으로 돌아오세요. 전 이제 일할 시간이라.”
“아, 그래.”
얼떨결에 같이 일어난 수환이 마시다 남은 음료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승현이 자기가 치우겠다며 가지고 가 버렸다. 습관적으로 고맙다고 중얼거렸는데, 듣지 못한 건지 대답하기도 싫은 건지 그대로 매정하게 멀어졌다.
그래도 그 모습이 전혀 미워 보이지 않는 건 자신이 진수환의 몸에 빙의했기 때문인가.
속으로 중얼거린 수환이 몸을 돌렸다. 대화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끝을 맺긴 했지만, 다시 한 달만 잘 버티면 그는 원작에서 하차하여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오직 그 생각을 하며 짐을 챙기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 그는 결심하면 실행력이 꽤 빠른 편이었다.
딸랑.
작게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에 승현은 방금까지 얘기하던 남자가 카페를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개수대에 남은 음료를 버린 승현이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진수환. 도무지 그자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악을 지르는 미친개마냥 굴더니, 오늘 본 진수환은 꼬리를 만 개 같았다. 깨갱거리며 무슨 말이라도 다 들을 듯한 작은 강아지.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한 생각에 승현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자가 자신에게 했던 짓들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다시금 다짐하며 머그잔을 씻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수환을 확실하게 처리할 것이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몰라도 분명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코웃음을 친 승현이 빠르게 머그잔을 정리하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함께 아침 근무를 하는 직원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했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아침 근무는 당분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 없는 텅 빈 카페를 빙 둘러보던 승현은 손목을 들어 셔츠 속에 있는 상처 자국을 흘끗거렸다.
불과 몇 달 전, 진수환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승현에게 같이 죽자며 달려들다가 생긴 상처였다. 왼쪽 손목에는 아직도 선명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진수환은 그냥 미친놈이었다. 열성 알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승현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세상 살면서 열등감 하나 품지 않는 사람도 있나. 그 자식은 정도가 너무 심했다.
차라리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바람에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쓰레기로 자라고 말았다.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승현이었다. 번번이 목숨의 위협까지 받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승현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저렇게 바뀐 태도는 당황스럽지만, 그렇다고 계획을 바꾸지는 않을 거다.
분명 진수환은 얼마 가지 않아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자신을 가지기 위해 그 시커먼 욕망을 꺼내 추악하게 변하겠지. 어쩌면 굳이 히트 사이클이나 러트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승현이 원하는 바였다. 이번에야말로 증거를 철저히 수집해 진수환을 고소할 것이다. 대기업이 뒷배로 있든 말든 이젠 상관없었다. 승현도 이만하면 많이 참은 거였다.
“후우.”
이른 아침인데도 뻐근한 목을 손으로 주물러 풀며 숨을 내쉬었다. 바보같이 그놈에게 스토킹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을 때도 변변한 항변 한번 하지 못한 자신이 새삼 기가 막혔다. 왜 진작 맞서 싸울 생각을 못 했을까.
얼마 전부터 기묘하게 그의 머릿속을 둔하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한층 거둬진 느낌이었다. 이제는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근자감이라고 하는 건가. 속으로 중얼거린 승현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완벽하게 카페 점원의 모습이 된 승현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수환에게는 한 달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승현은 그와 끝나는 시간이 더 빨리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서로가 바라는 끝의 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이때의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음, 이 정도면 되나?”
호텔 방에 돌아와 대충 짐을 싼 수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부분은 호텔에서 지급되는 용품으로 해결하다 보니 챙길 짐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돌아가면 진수환의 물건이 있을 것이다. 거기는 원래 진수환의 집이었으니까.
“하아.”
솔직히 아직까지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저 업보가 많으니 힘들게 청산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한숨을 내쉰 수환이 조그마한 가방을 들고 다시 호텔 방을 나섰다.
집에 돌아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한 번 찾아가 봤다고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환은 긴장한 얼굴로 문 앞에 섰다. 승현은 아직 아르바이트가 끝나지 않아서 집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인지 긴장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건 마치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사를 만나기 전에 긴장하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한숨을 내쉰 수환이 도어락에 손을 뻗어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띠띠띠띠, 띡.
삐리릭.
다행히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0912. 어쩐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던 번호를 누르자 도어락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음, 흠.”
괜히 한 번 헛기침을 하고 수환이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아무 저항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알싸한 시트러스 향이 수환의 코를 스쳤다. 현관에도 디퓨저를 놓아두는 건가? 고개를 휘 둘러보았으나 디퓨저 같은 건 어디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하긴, 진수환은 그리 섬세한 성격이 아닐 터였다. 승현도 남의 집인데 부러 신경 쓰지 않을 테고. 기분 탓이라 생각하며 수환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현관과 이어진 복도를 지나 터벅터벅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와…….”
복도를 지나자마자 넓은 거실이 수환을 반겼다. 진수환이 하도 집착광공 같은 짓을 많이 해서 집이 살풍경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벽지는 베이지색이 은은하게 감돌아 포근한 느낌을 주었고, 가구들은 진한 갈색으로 맞춰 안정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집 안 풍경에 수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박.”
한강변에 위치한 비싼 타워팰리스 꼭대기 층은 거실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햇빛이 마구 들이치고 있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푸른 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맛에 부자들이 비싼 집에서 사는구나. 수환은 어쩐지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진수환으로 사는 거, 나쁘지 않겠어.”
그동안은 열심히 살 궁리만 하느라 잘 몰랐는데, 역시 자본의 힘이 최고다. 수환은 괜히 입맛을 쩝쩝 다셨다. 한 달 전에 이 집에 왔을 땐 느낌이 달랐다. 진수환이 밤새 들이부은 술이 채 다 깨지 않았고, 머릿속이 누군가 주물러 놓은 것처럼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에서 거실로 나온 누군가가 자신을 보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진수환?’
‘헉!’
처음으로 메인수를 본 수환은 꼴사납게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를 보니 어쩐지 거센 충동이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너무나 낯선 감정이라, 수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뒤를 돌아 무작정 집을 벗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서성거리자 소설의 내용이 하나둘씩 수환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수환은 메인수가 있는 진수환의 집으로는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 근처 호텔에서 지내게 되었다.
“음.”
다시 회상해도 참 바보 같았다. 진짜 진수환이 그 모습을 봤다면 당장에 혀를 차며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놈 입장에서는 다 된 밥상이 떡하니 차려져 있었던 건데, 자신이 그걸 뻥 차버린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대로 거센 충동에 휩싸여 진수환과 똑같이 메인수를 범했다면, 빼도 박도 못하게 데드 엔딩이 확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목숨 보전할 수 있다면 수환은 얼마든지 멍청하게 살 수 있었다.
“근데, 내 방이…….”
거실을 어슬렁거리던 수환이 자신의 방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걸어가자 거실과 이어진 긴 복도가 보였다. 복도 끝에 닫혀 있는 문이 하나 있고, 중간에 각각 복도 한쪽에 문이 하나씩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문도 다 닫혀 있었다.
고민하던 수환은 제일 처음 보이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이곳에서 익숙한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관에서 처음 맡았던 상큼한 시트러스 향. 그리고 거실에도 은은히 퍼져 있었던 향이다. 그런데 이 문 너머에서 향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설마…….
수환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들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금 힘을 주니 달칵, 하고 쉽게 문이 열렸다. 수환은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끼익.
문을 열자마자 감당하기 힘든 향이 수환에게로 훅 끼쳐왔다. 수환은 저도 모르게 무릎이 확 꺾이는 걸 겨우 참았다. 손으로 코를 막고 간신히 밭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건 단순한 디퓨저 향이 아니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다.
코를 마비시키는 시큼털털한 향에 수환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침에 만났던 승현에게서는 아무런 향도 느끼지 못했다. 그건 그가 페로몬 향을 능숙히 숨기는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달이나 살던 집 안에는 은연중에 흘린 페로몬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
승현의 페로몬은 머릿속까지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분명 그처럼 차분하고 음전한 느낌의 페로몬인데, 왜 이렇게 미친 듯이 흥분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득 수환은 자신이 누군가의 페로몬에 면역력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메가 애인을 하루가 멀다고 갈아치웠던 진수환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이제 막 알파의 몸에 빙의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곳에 빙의한 지 한 달. 그중 일주일은 호텔 방 안에 처박혀 상황을 파악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회사에서 인턴으로 슬렁슬렁 일하다가 어른들을 만나 파혼 허락을 받았다. 회사 사람들은 대부분 알파 아니면 베타였기 때문에 수환이 오메가를 만난 건 승현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들었다. 자신이 과연 오메가의 페로몬에 휘둘리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직접 마주하니 겁이 몰려왔다. 페로몬에 휘둘리는 괴물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읏!”
덜컥 겁이 난 수환은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무릎을 간신히 펴고 뒤로 물러났다. 방 안의 풍경이 어땠는지는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뒷걸음질을 친 수환은 무작정 방을 나와 복도 반대편 방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헉…….”
마치 호텔 방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무채색의 방이 수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아서, 수환은 마음껏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조금 진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은 감귤 향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수환은 힘없이 걸어가 회색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끙,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래서야 한 달 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을지…….
불안한 생각에 몸을 떨던 수환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승현과 약속하지 않았는가. 한 달 동안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걸로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지금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메인수의 말을 듣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페로몬의 유혹을 견뎌내야 한다.
굳게 결심한 수환은 우선 짐을 풀었다. 땀이 좀 나서 다시 씻고 소파 같은 가죽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곧 승현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환이 슬금슬금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눈으로만 봤던 주방으로 들어갔다.
되도록 승현과 마주치지 않고 사는 게 좋겠지만, 첫날인 오늘은 밥이라도 한 끼 먹으며 분위기를 풀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자고로 한국인은 밥 한번 먹으면 어느 정도 친한 사이가 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주방에 간 수환은 금방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 아무것도 없지?”
보통 이런 비싼 집에는 시간 될 때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와서 밥해 주고 가시지 않나? 설마 진수환이 제 손으로 밥을 해 먹었을 리는 없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수환은 아, 하고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가정부라니. 사람을 감금시키려고 마음먹었는데 집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계속 두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수환은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진수환이 가정부를 쫓아냈을 거라고 짐작했다. 소설에서는 메인수의 피폐한 상황만 나왔기 때문에 무언가를 먹는 건 잘 묘사하지 않았다.
설마 이 양심 없는 새끼가 메인수를 쫄쫄 굶겼던 건 아니겠지? 눈살을 찌푸린 수환은 텅텅 빈 냉장고를 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진수환 놈은 그렇다 치고, 한 달 동안 이곳에 살았을 승현은 어떻게 한 것일까. 식자재가 아무것도 없는 걸 보면 여기서 요리해 먹고 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하는 데서 먹고 오는 건가? 아니면 배달 음식?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삐리릭.
절로 긴장해서 손가락 끝이 굳었다. 수환은 냉장고를 닫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타박거리는 작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
냉장고 앞에 선 수환을 본 승현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밝은 갈색 눈이 뻘쭘하게 서 있는 수환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을 참지 못한 수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와.”
“…네.”
어색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짧은 인사 끝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번에도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수환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냉장고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냉장고 안에 아무것도 없던데.”
그러자 승현의 눈이 커다란 냉장고를 향했다. 저 큰 냉장고에는 물과 맥주 이외에 무언가가 들어간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이곳에 있던 한 달 정도 동안은.
“네, 그렇던데요.”
마치 자신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무심한 말투였다. 당황한 수환이 겨우 물었다.
“그럼 너 밥은?”
“전 밖에서 먹고 와요.”
“아, 그렇구나.”
그렇게 또 대화가 뚝 끊겼다. 아니, 그래도 원작을 생각하면 승현과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해야 할 판이었다.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승현 역시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연신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수환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럼 나도 알아서 먹을게.”
수환은 그 시선을 피하며 주방에서 나가 거실로 갔다. 대충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어야겠다. 다행히 종종 배달 음식을 시켜 먹던 호텔이 가까워서 주소만 좀 바꿔서 시키면 됐다.
거실 소파에 앉아 배달을 시키는 수환을 얼마간 쳐다보던 승현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수환은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앞으로 밥은 같이 먹긴 힘들겠구나. 조용히 속으로 되뇌며 혼자서 배달시킨 밥을 먹었다.
배가 부르자 수환은 또 꾸벅꾸벅 졸았다. 이상하게 이 집에 오니까 자꾸 잠이 밀려들었다. 은연중에 이 몸이 호텔을 불편해하기라도 한 건가. 수환은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감고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으음.”
잠시 뒤 깨어난 수환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목이 칼칼한 게 물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소파에서 일어나려던 수환은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절그럭.
“……?”
금속이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가 들렸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킨 채로 수환이 제 몸을 내려다봤다.
그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어? 이게 왜…….”
수환은 반쯤 뜬 눈으로 수갑을 보며 중얼거렸다. 불빛 아래에서 차가운 빛을 내는 은색 수갑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멀거니 수갑이 채워진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는데, 머리 위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깼네요.”
“……!”
그 목소리에 수환은 잠이 확 달아났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승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 승현… 왜?”
너무 놀랐기 때문인지 말이 두서없이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 집에는 승현과 자신 둘뿐이기 때문에 수갑을 채울 사람은 눈앞에 있는 승현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왜 메인수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라뇨.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하… 장난하지 말고 이거 풀어 줘.”
그러나 수환의 말에도 승현은 여전히 멀뚱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수환이 어떤 행동을 할지 관찰하려는 것처럼 집요한 눈길이었다.
수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풀어 달라는 듯이 내민 두 손을 살짝 흔들며 승현을 올려다봤다. 승현의 금갈색 눈이 물끄러미 수환의 손을 응시했다.
승현이 손을 내밀어 수갑과 이어진 짧은 쇠사슬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다지 힘을 주고 있지 않던 수환의 손은 그가 누르자 밑으로 축 처졌다. 수환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승현을 올려다봤다.
“이거, 나한테 쓰려고 가지고 있던 거잖아요.”
“뭐?”
“아니에요? 이 집에 있던데.”
그 말에 수환은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은색 수갑을 응시했다.
자신은 분명 처음 보는 물건이다. 당연하다. 미쳤다고 이런 걸 돈 주고 샀겠는가. 승현도 마찬가지다. 19금 피폐물 BL 소설의 음전한 메인수가 가지고 있을 리 없는 물건이다. 이건 망할 진수환이 승현에게 쓰려고 사 두었던 물건이 분명했다.
“아니, 이건…….”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기 물건이 아니라고 하기엔 여긴 진수환의 집이고, 자신이 바로 그 진수환이었다. 자신이 산 게 아니지만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 버렸다.
아마 진수환은 이걸로 승현을 구속하려고 했었겠지. 쓸데없이 이럴 때 소설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글로 적힌 소설이건만, 왜인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침대에 묶여 수갑을 차고 있는 승현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읏.”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 승현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진수환 이 미친 새끼. 수환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을 속으로 욕하며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로 날 묶어서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그게, 오해야.”
“오해?”
고개를 갸웃하며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승현의 얼굴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표정은 살얼음이 낀 듯 차갑게 얼어붙었으나 미모는 여전했다. 수환은 당황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메인수의 냉정한 얼굴마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수갑 말고도 더 있던데.”
“아.”
“알고 있죠?”
시발…….
수환은 승현이 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을 스친 승현의 모습에서 보았던 물건들 말고도 진수환의 집에는 갖가지 골 때리는 어른의 장난감들이 있을 것이다. 진수환은 이 시기쯤 한 오메가 섹파를 만나 BDSM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감금한 승현을 농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시 알고 있나 보네.”
“아니, 잠깐, 그런 거 아니야.”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수환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취향이 있는 건 진수환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은 맹세코 승현에게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제 손을 옥죈 수갑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리는데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건 수환의 생각이고, 진수환의 개짓거리를 익히 경험한 승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언제까지 저 기분 나쁜 연기를 계속할 생각인지. 승현의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는 경멸을 숨기지도 않고 수환을 노려봤다.
“변태 새끼.”
“……!”
메인수의 분노 앞에서 수환은 그저 어쩔 줄 몰라 했다. 오해받는 건 억울한 일이지만 승현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진수환에게 이미 충분히 시달렸을 테니까.
소설의 시작이 정확히 어디서부터였는지 수환은 몰랐다. 그가 선명히 기억하는 건 승현이 진수환과 억지로 약혼해 그의 집에 감금당한 시점부터였다.
하지만 승현의 시점은 그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을 터였다. 승현과 진수환은 과는 다르지만 동아리가 같았다. 그곳에서 진수환을 처음 마주친 후로 계속 시달려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진수환 그놈은 충분히 그럴 놈이었다.
“…미안해.”
그래서 수환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진수환은 지금 4학년 졸업반이고, 승현은 이제 막 1학기를 끝낸 새내기였다.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승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불쾌한 일들을 많이 당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수환은 자신의 억울함보다는 승현을 측은해하는 마음이 더 많이 들었다.
“근데, 그것들 진짜 너한테 쓰려고 산 거 아니야. 우연히 얻은 건데, 나도 불쾌하니까 다 버릴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승현의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수갑을 포함한 각종 도구를 승현에게 쓰려고 한다는 오해를 계속 받으며 같이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버리겠다고 하니 승현의 표정이 또 오묘해졌다.
“우연히 얻었다고요?”
“응.”
수환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승현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누구한테?”
“어? 누구냐고?”
수환은 당황했다. 진수환이 소설에서 승현을 상대로 도구 플레이를 했을 때, 그저 짤막하게 그가 BDSM 플레이에 관심을 가지게 한 오메가 섹파가 있었다는 짧은 서술만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수환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음, 그냥… 아는 사람?”
그래서 꽤 허접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승현이 그런 허술한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불신을 담은 그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지자 수환은 더더욱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우물쭈물하는 수환의 귀로 드르륵, 하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협탁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환이 졸기 전에 올려둔 핸드폰이 있었다. 전화가 온 건지 사나운 진동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전화가…….”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받아도 되는 건지. 수환은 괜히 승현의 눈치를 보았다.
“받아요.”
승현은 협탁 위의 핸드폰을 집어 수환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수환의 손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다. 이대로 전화를 받으라고? 순간 생각했으나 수환은 아무 토를 달지 않고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혹시 회사나 집안 어른들의 전화일 수도 있으니 우선은 그냥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핸드폰 화면 위에는 낯선 이름이 떠 있었다.
[김희민]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한 달 남짓 진수환으로 살면서 온갖 전화가 다 왔었다. 번호만 뜨면 대부분 스팸 전화였고, 이렇게 이름이 뜨면 그나마 상황 파악을 해주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왜인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하는 건 대부분…….
‘아차.’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딴생각을 하던 수환은 이대로 있으면 전화가 끊어질 것 같기에 얼른 받았다.
“여보세요.”
―아, 수환 씨?
“네, 그런데요.”
간드러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남자임이 분명한데도 곱고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시발, 어쩐지 꺼림칙하더니. 수환이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요즘 왜 연락 안 하세요? 바빠요?
“아, 그게…….”
수환은 자기도 모르게 흘끗 승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수환이 전화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팔짱을 낀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여전히 수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승현을 피해 자리에서 떠날 용기도 없어서, 그냥 짤랑거리는 수갑을 손목에 매단 채 수환은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네, 좀 바빴습니다.”
―어라, 웬 존댓말?
재미있다는 듯이 목소리의 주인이 까르륵 웃었다.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였다. 수환은 절로 치밀어 오르는 거부감을 꾹 참으며 물었다.
“왜 전화하셨죠?”
―흥… 뭐야, 재미없게.
툴툴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불쾌한 듯하면서도 제법 애교 있게 들렸다. 이렇게 말하는 게 능숙한 사람이었다.
수환은 종종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진수환은 놀랄 만큼 문란한 인간이었고, 오메가 섹파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핸드폰 안에는 평범하게 이름만 적어 놓았기 때문에 누가 섹파인지 아닌지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수환은 섹파의 전화가 올 때마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수신 차단을 했다. 자신은 진수환처럼 오메가들과 뒹굴며 살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혹시 ‘그’ 약혼자랑 있어요?
“……!”
기습적인 희민의 말에 수환은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하필 승현의 앞에서 섹파 전화를 받아서 난감한데, 이 얼굴도 모르는 오메가가 승현을 알고 있다니. 수환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가 말한 대로 잘 잡아 놓고 있어요? 아, 나도 한번 보고 싶은데, 보여 주면 안 돼요? 네?
“그게 무슨…….”
―잘못하면 상처 남으니까 조심해요. 수환 씨는 흥분하면 너무 무서워지더라. 그러면 다들 도망가요~
이 사람이다. 진수환에게 BDSM을 전파한 오메가 섹파가. 수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든 수환은 승현의 서늘한 눈과 마주쳤다.
“……!”
아, 이건 진짜 위험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수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수환의 심정도 모르고 통화 상대는 계속해서 입방정을 떨어댔다.
―지금 한창 즐기는 중이라 바쁘신가?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아니, 그러니까…….”
―저번의 약속 잊은 건 아니죠? 다음에 3p로 한번…….
“그럴 일 없습니다!”
―네? 수환 씨.
수환은 보이스 피싱을 당한 사람처럼 빠르게 엄지손가락으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방금, 이 사람…… 뭐라고 했지? 3p? 자신이 아는 그게 맞는 건지 한동안 곱씹어야 했다.
손가락 끝이 절로 덜덜 떨렸다. 파드득 놀라서 핸드폰 화면을 까맣게 끄고 나서야 수환은 겨우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저기…….”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수환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수환은 이대로 쥐구멍 안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희민이라는 오메가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승현도 다 들었을 것이다. 그가 지칭한 약혼자가 자신을 말하는 것도, 방금까지 출처를 물었던 도구들이 모두 저에게 몹쓸 짓 하려고 샀다는 것도, 승현은 모두 알아들었을 것이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환은 입안이 바싹 말라 갔다.
“정말, 내가 더 할 말이 없긴 한데.”
참담한 심정으로 수환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할까. 수갑을 찬 손이 가늘게 떨렸다.
“꽤… 친밀한 사이신가 봐요.”
“어?”
“방금 통화하신 분이랑.”
낮게 가라앉은 승현의 눈이 수환을 향했다. 밝게 빛나던 금갈색의 눈이 어쩐지 어두운색을 띠고 있었다.
조롱하는 건가? 수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를 모욕한 자와 시시덕거려서 좋냐고 돌려 말하는 것 같았다. 수환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전혀. 전혀 안 친해. 잘 모르는 사람이야.”
“선배님 이름도 친하게 부르던데요.”
“그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러나 대화를 이어 갈수록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수환은 마치 바람피워서 배우자에게 추궁받는 사람처럼 쩔쩔매기 시작했다.
“오메가 맞죠?”
“아마도?”
“왜 오메가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요?”
“…….”
“다른 오메가 연락처도 가지고 있어요?”
“…….”
추궁당할수록 수환은 자신이 쓰레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죄를 지은 건 진수환인데, 왜 자신이 이런 질책을 받아야 하는 건지.
하는 수 없이 수환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승현의 앞에서 방금 전화 받은 오메가를 수신 차단하고 연락처를 삭제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여 줘야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정리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서야 승현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이거, 이제 풀어 줄래?”
아직도 손목에서 짤랑거리는 수갑을 가리키며 수환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뒤로 찬 건 아니라서 그나마 괜찮은데, 슬슬 수갑을 찬 손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승현은 별말 없이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어 주었다. 조금 뻐근해진 손목을 좌우로 돌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승현의 모습이 보였다. 수환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마주 보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불쾌했지? 미안해.”
조금 전의 통화로 여전히 승현이 기분 나쁜 거라고 생각한 수환이 거듭 사과했다. 그럼에도 승현의 굳은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수환은 조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안 어울리니까 사과 좀 그만하세요.”
“어, 응.”
냉큼 고개를 끄덕인 수환이 고개를 비튼 승현의 얼굴을 연신 살폈다. 그래도 아까보단 좀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
어차피 그가 자신의 앞에서 기분 좋은 기색을 보일 리가 없으니, 이 정도의 쌀쌀맞은 표정 정도는 양반이었다.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한번 하고 수환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자러 갈게.”
“…….”
“그럼 잘… 자.”
“…….”
어색하기 그지없는 인사를 남기고 수환은 도망치듯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승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거실을 벗어나는 수환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후우.”
복도로 와서 겨우 승현의 눈길에서 벗어난 수환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폭풍과도 같은 하루였다. 깜박 졸고 일어나니까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지 않나, 하필 승현의 앞에서 진수환의 섹파 상대가 전화하질 않나.
더 이상의 스트레스는 사양이었다. 수환은 힘없이 손을 들어 방 문고리를 잡았다.
“응?”
그러나 손을 올리고 난 뒤 수환은 혼자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들어가려는 진수환의 방 안에는 침대가 없었다. 책상과 그 위에 놓인 컴퓨터, 의자, 책장 등을 봐선 서재로 쓰는 방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잠을 자는 침실이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음.”
설마 저긴가? 수환의 눈이 오늘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은 복도 끝 방을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조금 찌푸린 얼굴로 보던 수환이 들어가려던 방의 문고리를 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왠지 좀 내키지는 않지만 저 방에 침대가 있는지 확인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금방 복도 끝으로 다가간 수환이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오.”
달칵, 하고 문이 열리자 넓은 방 안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방은 다른 두 방보다 확연하게 넓었다. 그리고 창문이 크긴 하지만 블라인드를 꼼꼼하게 쳐서 어둑한 편이었다. 대신 고급스러워 보이는 스탠드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는 몇 명이 뒹굴어도 될 만큼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역시 여기가 침실이었군. 방을 한번 휘 둘러본 수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곤한 몸은 자석처럼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태평양처럼 넓은 침대로 다가갔다.
“……!”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침대로 가까이 가자 미처 맡지 못했던 향이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윽.”
수환은 이제 이 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승현의 방보다는 향이 옅어서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건 분명 승현의 페로몬 향이었다. 주춤거리며 멈춰 서서 손으로 코를 막은 수환이 당황스러운 낯빛을 했다. 어째서 진수환의 침실에서 승현의 페로몬이 맡아지는 거지?
탁.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침실의 문이 닫혔다. 뒤를 돌아본 수환의 눈이 커졌다.
“너…….”
당황한 수환을 보며 승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승현을 보며 놀란 수환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네가 여긴 왜 들어와?”
“……?”
놀라는 수환을 보며 승현이 왜 그러냐는 듯이 응시했다. 수환이 의아함을 느낄 때쯤 승현이 입을 열었다.
“이 집에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요.”
“뭐?”
수환의 시선이 킹사이즈 침대로 향했다. 잘 정돈된 침대에서는 희미하게 오메가의 향이 나고 있었다.
‘아, 맞아. 여긴 진수환의 집이지.’
불현듯 떠올리며 수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놈은 이 집에 침대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동거하는 약혼자를 위해 편의를 봐 줄 생각은 없었겠지. 어차피 진수환은 저 침대에 승현을 묶어 놓고 이런저런 짓을…….
‘으아악, 미친 새끼!’
또다시 머릿속으로 19금 살색 향연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런 걸 봐도 흥분되긴커녕 질리기만 할 뿐이다. 수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그럼 내가 소파에서 잘게.”
비척비척 뒷걸음질을 치며 수환은 오메가의 페로몬이 맡아지는 침대에서 멀어졌다.
탁.
그러나 수환은 침실에서 나가지 못하고 승현에게 붙잡혔다. 놀란 수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반대로 승현의 눈은 가느다래졌다.
“어디 가요?”
“응?”
어딜 가냐니. 방금 소파에서 자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승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수환을 쳐다봤다. 마치 확신범을 보는 듯한 눈이라 수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결국 수환은 나가지 못한 채로 승현에게 붙잡혀서 침대 쪽으로 다시 질질 끌려갔다.
오메가인 승현은 의외로 힘이 셌다. 그리고 수환은 자신이 힘을 과하게 쓰면 승현이 다칠까 봐 제대로 밀어내지도 못했다.
“윽!”
그러다 침대에 다리가 걸려 뒤로 확 넘어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혀 하얀 천장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눈을 깜박이자 불쑥 익숙한 얼굴이 천장을 가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갈색 눈이 수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환은 그저 아무 말도 못 하고 승현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러려고 이 집에 나 부른 거잖아.”
“…….”
“아니야?”
승현은 두 손으로 수환의 어깨를 짓누르며 집요하게 수환의 얼굴을 훑었다. 이 집에 발을 들이고 나서 계속, 승현은 저렇게 무언가를 원하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수환으로서는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와 눈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닌데.”
“…….”
한순간 승현이 지은 표정이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김빠진 콜라를 마신 사람이 짓는 듯한 얼굴이었다. 수환은 멀뚱히 자신을 덮치고 있는 승현을 올려다봤다.
“…좋아요.”
“……?”
“언제까지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지 두고 보죠.”
화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순식간에 방 안을 점령했다. 갑작스럽게 우성 오메가가 뿜어낸 페로몬 때문에 수환은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억지로 주입되는 향긋한 향이 뇌까지 절여 버릴 정도로 몸속을 헤집어댔다.
“그, 그만…….”
수환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몸을 바르작거렸다. 사실 아무리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라고 하더라도 알파를 이렇게까지 꼼짝도 못 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진수환의 몸이 비록 열성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빙의한 수환은 페로몬에 대한 면역력이 거의 없었다. 승현의 방 안에 쌓인 페로몬의 흔적만으로도 그렇게 동요했던 수환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뿜어대는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수환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윽.”
“어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환은 겨우 눈을 떴다. 아름다운 금갈색의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시선을 조금 밑으로 떨어트리니 붉은 꽃잎 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마치 수환을 유혹하는 듯이.
곧 수환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