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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2)화 (2/138)

2화

적요한 걸음이 이어졌다. 저잣거리를 지나 좀 더 가자 길게 이어진 담장 너머 호를 그리는 처마의 자태가 도드라진 부촌에 다다랐다. 소년이 손짓하며 가리켰다.

“저 끝에 청기와 지붕이 함 장군님 댁이에요.”

청년이 앞으로 향했다. 자신을 지나쳐 가는 청년의 등에 대고 소년이 거듭 물었다.

“정말 가시려고요? 근래 함 장군님 댁에 큰 우환이 들어 객을 반기지 않을 거래요. 쫓겨나면 어쩐대요?”

“······그래도 가야 해.”

청년이 어깨에 멘 기다란 짐을 추어올렸다.

“줄 게 있어서.”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길잡이 소년도 등을 돌렸다.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무슨 일이 생겨도 몰라요.”

마지막 경고를 남긴 소년이 떠나고 홀로 남은 청년은 긴긴 돌담을 따라 걸었다.

사라진 황제의 피붙이가 머무는 저택.

정사를 돌보는 충신들은 패왕의 귀환을 기다리며 지금도 옥좌를 비워 두고 있었다. 함 장군 일가 또한 그에 준하는 권세를 누릴 법했으나, 도성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대신 이곳 호명성에서 안분지족하길 택했다.

함 장군의 저택은 부촌의 여느 가옥이 그러하듯 넓고 거대했지만, 황제의 친가임을 고려하면 초라할 정도로 검소한 모양새였다.

우뚝 선 솟을대문으로 향하던 청년은 기묘한 점을 발견했다. 빗장을 끼워 넣는 둔테가 널문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는 문을 잠그는 의미가 무색해진다. 문밖에 빗장을 걸어 봤자, 누구든 손쉽게 열고 들어갈 수 있잖은가.

도둑 들 걱정은 않는가? 하기야 제정신 박힌 도둑이라면, 감히 패왕의 친가를 털 엄두는 못 내겠지. 저 우스꽝스러운 문은 밤손님이든 누구든 올 테면 와 보라는 자신감의 발로일는지도.

청년이 대문을 유심히 살피자 근처에서 비질하던 하인이 냉큼 달려왔다. 앞을 막아서는 모양새가 꼭 수문장 같았다. 청년이 눈을 굴려 하인을 곁눈질했다. 그가 암말도 없자 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 일로 오셨소이까?”

“······용건이 있어서.”

“그 용건이 뭐냔 말이오.”

“이 댁 주인한테···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은데.”

청년은 네까짓 게 감히 내 용건을 캐묻냐는, 하인을 무시하는 투가 아니었다. 아랫사람에게 적당히 넘기지 못하고 직접 전해야만 하는 신세가 스스로도 번거롭다는 양 갑갑한 숨을 토해 냈다.

“방문객을 아뢸 테니 함자를 알려 주시구려.”

“······아무개?”

“뭐요?”

“함자··· 아무개면 될 것 같은데.”

하인은 ‘뭐 이런 게 다 있어’라는 얼굴이 됐다. 이름이 아무개라니, 장난하나?

농담에도 적기가 있는 법이다. 근래 장군 댁이 골머리 앓는 우환을 안다면, 이런 시답잖은 농지거리를 받아 줄 때가 아님을 진즉 알 터인데.

“허면 아무개가 뵙고자 한다고 아뢰겠소.”

하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문 안으로 건너갔다.

청년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로 길쭉한 백지장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환(還)?”

짧은 순간, 청년은 백지장에서 은은히 빛나는 글귀를 포착했다. 분명 환(還)이라고 쓰여 있었다.

혹 저것이 소문의 ‘소환부’일까?

희멀건 백지가 허공에 그리는 궤적을 멀거니 좇고 있자니 대문이 재차 열렸다. 좀전의 하인이 나와 엄격한 얼굴로 고했다.

“지금은 기다리는 손이 있어 다른 객을 받을 여력이 없다 하셨소.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다음을 기약하시구려.”

“······안 되는데.”

청년이 우물거렸다.

“빨리··· 전해야 하는데.”

청년이 팔짱을 꼈다. 빨리, 서둘러 등등 같은 말만 되뇌는 그를 하인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무슨 사정이든 간에 오늘은 아니 되오.”

이 음울한 청년의 장난을 즉각 내치지 않고 어울려 준 것. 그의 무례함에도 끝까지 예를 지킨 것. 모다 함 장군 댁에서 아랫것들을 철저히 교육한 결과였다. 이리 강경히 말하였음에도 또 장난질을 치려 든다면, 더는 참지 않을 셈이었다.

“···언제쯤이면 되는데.”

다행히도 청년은 마지막 선을 넘지 않고 한발 물러섰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기약하라는 다음이 언제인지 묻는 그에게 하인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나 같은 놈이 윗분들 사정을 어찌 다 알겠소? 기다리는 손께서 얼른 오셔야 댁한테도 차례가 돌아갈 터인데. 그분이 언제쯤 당도하실는지 아무도 몰라서 말이오.”

청년이 팔짱을 더욱 꽉 끼었다. 그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럼, 최대한 빨리 보려면······.”

“정 급하거든 손이 오실 때까지 예서 기다리던가.”

청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인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으나 곧 떨떠름한 낯으로 돌아갔다. 닫히는 대문 너머로 청년을 흘깃하면서도 설마 했다.

설마, 정말로 기다리진 않겠지?

비꼰 것뿐이잖아. 곧이곧대로 듣고 행하는 바보천치는 없을 거야. 속으로 그리 되뇌며 하인은 남은 일거리를 마저 하러 갔다.

한편 곧이곧대로 듣고 행하는 바보천치 아무개는 대문 옆 담벼락에 기대어 옹송그리고 앉았다. 등에 멘 짐을 풀어 가슴팍에 끌어안고 다시 팔짱을 꼈다.

시간이 흘렀다. 나무 그늘조차 없는 담장 아래에서 뜨거운 볕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기다렸다. 젖은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다 말라 버렸다.

일하느라 몇 번인가 대문 안팎을 드나들던 하인은 아무개를 발견할 때마다 소스라쳤다. 이놈이 아직도 있어? 혹시 지금도? 설마 아직까지? 매번 그 믿음에 보답하듯 아무개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한나절이 지나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노을이 졌다. 저녁을 먹고 나온 하인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 않는 아무개를 보곤 혀를 찼다.

“마님께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손은 날이 저물도록 오질 않고. 초대한 적 없는 불청객만 이리 기다려 봤자 아무도 반기지 않소. 그만 돌아가고, 다른 날을 찾아보쇼.”

“······.”

“댁이 몰라서 그러나 본데, 지금 저 안에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아시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바로 이거로구나, 자칫 책잡혔다간 뼈도 못 추리겠구나, 싶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더만.”

“······.”

“아 글쎄 텄다니까? 까딱 잘못하면 나나 댁 같은 치들만 욕보는 거요.”

아무개는 묵묵부답으로 팔짱 낀 손에 더욱 힘을 줄 따름이다. 하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도로 들어갔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떨어질 즈음, 외거노비가 우르르 나왔다. 그들은 아무개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마지막으로 나온 노비가 널문을 닫고 밖에서 빗장을 걸었다. 둔테에 단단히 끼워 넣은 빗장을 확인한 그들이 서둘러 흩어졌다. 무어 그리 급한지 흡사 추노꾼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양했다.

어수선하던 저택에 괴괴한 정적이 고였다. 으스름한 달이 머리 위로 차오를 때까지 아무개는 기다렸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손이 있다는 게 참말인 듯, 함 장군의 저택은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개가 앉은 담장 아래로는 그 빛이 닿지 않았다.

찬 바람이 시리게 파고드는 이슥한 밤. 아무개는 돌담이 드리운 그늘에 숨듯 몸을 옹그렸다. 며칠째 잠들지 못한 머리가 몽롱하여 시간 감각마저 희뿌옇게 번질 즈음.

인기척이 느껴졌다.

“······.”

거친 호흡이 담벼락 뒤편에서 들려왔다. 아무개는 무르팍에 묻은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계시나요?”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

“의원님.”

그 음성이 차츰 방향을 달리했다. 아무개의 시선이 담장 너머 기척을 좇듯 따라 움직였다.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

“거기 계시나요?”

쿵. 쿵. 쿵.

“의원님··· 의원님···.”

쿵, 쿵, 쿵쿵, 쿵쿵쿵⎯···

“거기 있지?”

쾅!

“거기 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콰앙⎯! 쾅, 콰강!

너른 판문이 마구잡이로 뒤흔들렸다. 그 서슬에 끼익, 끼긱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개는 부서질 듯 울리는 대문과 바깥에 걸린 빗장을 보았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무언가를 막기 위함이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스산한 음성이 귓가에 저며 들었다. 아무개는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도로 고개를 무르팍에 묻었다.

“죽여 버릴 거야. 당신,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왈, 왈왈!

문 안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강아지가 낑낑대며 애쓰는 기색이자 의원을 저주하던 소녀의 절규가 차츰 잦아들었다. 이윽고 한 사람과 한 마리의 기척이 멀어졌다.

그 후 아무개는 미동도 않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새벽이슬이 옷깃을 적실 무렵까지.

“아직도 예 계셨소?!”

이른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빛이 번지는 가운데 비질하러 온 하인이 아무개를 발견하고 기함했다. 지난날 수차례 주의를 주었던 그 자였다.

“어휴,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긴 작자일세.”

밤을 꼬박 지새워 퀭한 몰골이 꺼림칙한 듯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하인이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긴한 곡절이 있는 듯하니 내 한 번만 더 여쭙고 오겠소. 딱 한 번이오. 이번에도 아니 된다 하시면 제발 물러가시오.”

그러나 하인보다 먼저 나온 것은 힘깨나 쓸 법한 장정들이었다. 그들을 거느린 염소수염 사내가 아무개를 향해 일갈했다.

“웬 버러지가 예서 얼쩡거리는 게야? 부정 타기 전에 썩 꺼져라!”

안절부절못하고 발만 구르던 하인이 울상을 지으며 아무개를 돌아봤다. 그러게 내 뭐랬소. 지금 한창 살벌하다고, 까닥 잘못하면 욕볼 거라 하지 않았소? 그리 토로하는 듯한 얼굴이다.

“말로 해선 못 알아먹을 놈이로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내치지 않고!”

몽둥이를 움켜쥔 장정들이 성큼 다가왔다. 아무개는 일어나려 했으나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웅크린 탓에 다리가 뻣뻣했다. 아무개는 팔짱을 낀 채로 나동그라졌다.

몸이 굳은 탓에 본의 아니게 자빠진 셈이나,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에겐 배 째라며 벌러덩 드러누운 꼴로 보였다. 염소수염이 사납게 눈을 치떴다. 불청객을 둘러싼 장정들이 몽둥이를 높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팔짱을 푼 아무개가 손을 빼냈다. 바로 그때.

“이런.”

차르륵⎯ 새하얀 부적이 날아와 장정들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눈코입이 별안간 희멀겋게 뒤덮이자 장정들이 기겁했다. 몽둥이도 팽개치고 종잇장부터 떼려 했으나, 어인 영문인지 꿈쩍도 않았다.

얼굴을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장정들 사이로. 낯선 음색이 흘러들었다.

“공사다망하신 중에 외람되나, 급하지 않으시거든 후일을 기약하는 게 어떨까요.”

차가운 밤을 몰아내고 새벽 동이 텄다.

염소수염과 하인, 장정들까지 모두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개는 맨땅에 볼이 짓눌려도 개의치 않고 저를 둘러싼 발 틈새로 엿보았다.

그는 밝아 오는 여명을 등지고 서 있었다.

깊게 눌러쓴 삿갓. 그 위로 늘어뜨린 엷은 깁이 얼굴을 가리었다. 역광에 삼켜진 그의 도포 자락만이 어렴풋한 윤곽을 그렸다.

“오셨습니까, 술사님.”

아무개를 윽박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염소수염이 공손히 인사했다.

어리둥절하던 하인과 장정들도 허겁지겁 따라서 고개 숙였다. 아무개는 멍하니 삿갓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장군 댁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객이 마침내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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