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세간에 소위 사대귀인이라 손꼽히는 위인이 있다.
만물점주, 수호지신, 영화단주, 유랑술사.
그중 민초와 가장 가까운 이가 유랑술사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홀연히 나타나 아무 대가 없이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술사. 그의 행적은 힘없고 빈천한 이들에게 존경과 경애의 대상이었다.
출신도 성명도 불분명한 그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삿갓을 쓴다.
유랑술사는 삿갓을 썼다. 해가 진 밤에도, 사방이 막힌 실내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항상.
둘째로 백지 부적을 사용한다.
유랑술사는 실제 손을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의 수족을 대신하는 건 순백의 부적이다. 좀 전에 몽둥이를 휘두르던 장정을 막았듯이.
여기에 한 가지 더. 지금에 와서는 잊혔으나,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문이 있다. 그가 온 땅을 떠도는 이유.
유랑술사가 제자를 구한다는 것이다.
‘마땅한 재목이 없어 친히 찾으러 다닌다는 풍문이었지.’
아무개는 소반에 놓인 찻잔을 감싸 쥐었다. 찬 이슬 맞으며 밤을 지새우느라 곱아든 손으로 잔의 온기가 옮겨붙었다.
“사정이 급한 듯하여 지체 않고 왔습니다만, 이른 아침부터 폐를 끼쳤군요.”
유랑술사는 네모반듯한 종이를 꺼내 소반 위에 스윽 올렸다. 함 장군 댁 위치와 더불어 내방을 간곡히 청하는 글월이 쓰여 있었다.
역시 저 종이가 소환부였나. 저리 작은 종잇장이 곳간 한 채 값이자 황금 기둥과 맞먹는 귀중품이었다.
“폐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이리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어요.”
맞은편에 자리한 부인이 진심을 담아 화답했다. 잠시 빤한 인사치레가 오갔다.
아무개는 그들의 대화에서 완벽히 소외되었으나 별스럽지 않았다. 따스한 잔을 어루만지며 유랑술사가 읊는 말소리에 가만가만 귀 기울일 따름이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흔쾌히 응해 주어 감사하오.”
부인의 곁에 나란히 앉은 함 장군이 진중하게 운을 띄웠다.
“소환부를 보아 대강 알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소이다. 아무래도 내 여식에게 고약한 악령이 붙은 듯싶소. 아직 조반도 들지 못한 이른 시간이나, 괜찮다면 바로 아이를 보러 가는 게 어떨까 하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먼저 이분과 말씀 나누는 게 어떨지요.”
이분. 장군 부부의 시선이 그제야 아무개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화제의 중심이 된 아무개는 눈만 끔뻑거리다가 힐끔 곁눈질했다. 우측에 자리한 술사는 소문대로 내실에서도 삿갓을 쓰고 있었다. 그가 손등으로 삿갓의 깁을 슬며시 걷어 내자 곧은 턱선과 모양 좋은 입매가 드러났다.
어쩐지 목이 타는 듯해서 아무개는 쥐고만 있던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한데 찻잔이 닿는 순간 따끔하더니 턱밑으로 피가 주룩 흘렀다.
“아···.”
아무개는 잠시간 제 꼴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대신 호들갑을 떨어줬다.
“세상에, 피가!”
“아범, 게 있나? 면포와 지혈제를 가져오게!”
“예, 나리.”
장지문 너머 행랑아범의 그림자가 멀어졌다. 술사가 아무개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찻잔을 가져갔다. 손과 손이 스치는 감각에 아무개가 움찔했다. 피 칠갑한 찻잔을 살펴본 술사는 저런, 하고 혀를 찼다.
“가장자리에 이가 나갔네요. 여기에 입술이 찢어진 모양입니다.”
“그, 그럴 리가요. 아랫것들에게 손님 맞을 채비를 하라 단단히 일렀거늘···.”
무심코 변명을 입에 올리던 부인이 뒤늦게 아차 하며 입매를 가렸다. 부인은 번잡한 핑계를 떼어내고는 말끔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처신이 부족하여 귀한 손님께 누를 끼치고 말았어요. 상처가 회복되도록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부주의하여 하품을 손님상에 올린 것은 일벌백계할 터이니 귀빈께서는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어요.”
“됐,”
됐어. 라고 하려던 아무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입을 열기 무섭게 살갗이 벌어지고 피가 울컥 쏟아진 탓이다. 반사적으로 소매를 들어 입술을 닦자 허름한 삼베옷에 혈흔이 스몄다.
참, 이거. 빌린 옷이었지.
난감해하던 찰나 행랑아범이 돌아왔다. 그에게 받은 면포로 입술을 눌러 지혈하면서도 아무개는 피 묻은 옷소매를 힐끔 했다. 이를 눈치챈 부인이 명했다.
“손님께 새 의복을 내어드리게. 지금 집은 옷은 세탁해드리고, 중한 잘못을 저지른 것들은 단단히 문책하도록.”
“아니···.”
아니라고, 그쪽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벌리자마자 피가 터져 나왔다. 도로 입을 닫으니 혓바닥이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이건 내 잘못이야.’
아무개는 모다 제 탓으로 여겼다. 사실이 그러했다.
‘내가 운이 더럽게 없어서지.’
“술사께선 저자와 대화를 권하셨으나, 이래서야 당장은 힘들겠소.”
장군은 침통한 어조로 두 객에게 제안했다.
“상처가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아이를 봐주지 않겠소? 남은 대화는 후에 이어가도 되지 않소이까.”
“그럴까요?”
술사의 물음은 장군이 아닌 아무개를 향했다. 아무개는 그걸 왜 내게 묻는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장군과 부인, 유랑술사까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나가고 아무개만 멀뚱히 앉아 있으니 행랑아범이 은근히 눈치를 줬다. 하는 수 없이 아무개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들은 내별당으로 안내받았다. 아무개는 일행의 맨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갔다. 사람을 물린 별당에는 강아지 한 마리만 남았는데, 마당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던 녀석의 귀가 새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쫑긋했다.
홀로 뒤처진 아무개는 제일 늦게 중문 너머로 들어섰다. 바로 그때.
크르르릉······
벌떡 일어난 개가 이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꼬리를 수직으로, 귀를 앞으로 세우며 명백히 경계하는 자세로 별당을 지키듯 막아서기까지 했다. 당황한 부인이 급히 다가갔다.
“덕구야, 착하지? 손님께 버릇없이 굴면 아니 된다.”
어르고 달래도 무용했다. 부인이 덕구를 쓰다듬으려다 도리어 물릴 뻔하기도 했다. 결국 장군이 하인들을 시켜 개를 데려가게 했다.
“아휴, 덕구가 왜 이러지?”
“사람을 하도 좋아해서 도둑이 들어도 꼬리 흔들 녀석이. 오늘은 어쩐 일이래.”
하인은 저들끼리 속닥거렸지만, 아무개는 똑똑히 들었다. 강아지는 덩치 큰 하인에게 번쩍 들려 안기고도 뒷덜미 털을 곤두세우고 연신 짖어 댔다.
아무개는 멀어지는 개를 물끄러미 보았다. 동그랗고 까만 눈 속 큼직하게 확장된 검은 동공까지.
“죄송합니다. 덕구가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행랑아범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아무개는 됐다고 손을 내저으며 장군 내외와 유랑술사를 따라 별당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산발한 소녀가 누워 있었다. 봉두난발한 꼴과 달리 눈에 감은 붕대는 반듯하고 깔끔했다.
“아휴, 애기씨.”
안타깝다는 듯 행랑아범이 소리 죽여 소녀를 불렀다. 보아하니 저기 귀신 꼴을 한 소녀가 풍문으로 들은 애기씨인 모양이다. 어느 날 돌연 정신을 놓아 버린, 장군 댁의 곱디고운 금지옥엽.
애기씨는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아무개는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병풍을 걷어 내고 깨질 위험이 있는 도자기나 모서리가 각진 가구 따위는 모조리 치워 휑했다.
“따님께 깃든 악령을 쫓아달라셨죠?”
유랑술사는 잠든 애기씨와 허전한 실내를 둘러보고는 결론지었다.
“악령은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기울어진 삿갓. 반쯤 걷힌 깁 너머로 술사가 사근사근 설명했다.
“귀댁 아씨는 물론, 인근 어디에도 삿된 망령이 다녀간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그럴 리가요!”
부인이 다급히 되물었다.
“농이시죠? 진심이 아니시지요?”
“부인, 진정하시오.”
“진정? 지금 진정하라고 하셨어요? 차라리 가짜라고 해 주셔요! 저 사람, 사기꾼이죠? 유랑술사가 아니지요?!”
“부인!”
“유랑술사가 다른 무능한 술사들과 같은 소릴 할 리 없잖아요!”
제발 거짓이라고 해 주셔요.
고운 얼굴을 울 것처럼 일그러트린 부인이 돌연 휘청였다. 허물어지는 몸을 받아 낸 장군이 목청 높여 하인을 불렀다.
덜컹!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급히 열리고 쓰러진 부인이 조심스레 옮겨졌다. 어수선한 가운데 누군가 이불 끝자락을 밟았다. 반듯한 이불이 흐트러지고 애기씨 손목이 드러났다.
왼손 소지와 이어진 손 허리가 시퍼런 피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 거스러미도 군데군데 박힌 것이, 목재로 만든 무언가를 두드리다 생긴 상처 같았다. 예를 들어··· 널판으로 짠 대문이라던가.
그 모든 것을 아무개는 묵묵히 관조했다.
“귀한 손이시니 잘 좀 부탁하네. 아직 조반도 못 드셨으니 서둘러 챙겨드리고.”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군님께 귀한 손님이면 제게도 마찬가지입죠.”
아무개와 유랑술사는 행랑아범을 따라 근방에서 가장 호화로운 객관에 들어섰다. 객주는 행랑아범이 모시는 상전이 뉘신지 알고 있어 잇따라 허리를 굽실거렸다.
현 상황은 술사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미련을 놓지 못한 장군에게 악령은 늦은 시각에 빈번히 출몰한다고, 밤에 한 번 더 봐 드리겠다 한 것이다.
기묘하리만큼 오래 침묵하던 장군은 제의를 받아들이며 무겁게 당부했다.
「딸아이는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오. 눈만 뜨면 온갖 기행을 벌이니 객관에서 쉬고 계시오.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겠소.」
그에 술사가 응했고 아무개는 생각했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유량술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함 장군 측에서 어렵사리 모셔 온 귀한 초청객이자, 아직 용건이 남은 상대니까.
하지만 아무개는 아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얼결에 이러고 있긴 한데.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뒤늦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 무렵, 객주가 두 손을 맞잡아 비비며 여쭈었다.
“두 분은 어찌하실는지요. 한방으로 내어드릴깝쇼?”
······한, 방?
아무개의 머리가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비되어 버렸다. 술사가 대신하듯 나섰다.
“잠시 저희끼리 대화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죠!”
술사는 바짝 굳어 버린 아무개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았다. 상대의 주의를 끄는 손짓에 아무개가 정신을 차렸다. 함께 구석진 벽 모서리로 자리를 옮긴 그가 낮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해를 산 것 같죠?”
“······?”
“우릴 한 일행으로 착각한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자신을 동행으로 착각했다면, 그간의 대우가 납득된다. 새 옷을 내준 것도, 훌륭한 객잔으로 보낸 것도.
“난··· 밤새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 쫓겨날 뻔했는데. ······왜 그런 오해를···?”
피딱지가 앉은 입술은 말마디가 뭉개졌다. 아무개 스스로도 뭐라는지 영 모를 소리였으나, 술사는 용케 알아들었다.
“아침에 여러 일이 있었잖아요. 서로 말을 전할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 지금쯤이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고대하던 술사가 이른 새벽녘에 당도하고, 이 나간 찻잔으로 접대가 엉망이 되었으며, 마님이 쓰러졌다. 재난이 연달아 몰아치니 상전이고 종복이고 가릴 거 없이 정신없었을 테지.
지금쯤이면 한숨 돌린 장정들이 나리께 아뢰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개가 유랑술사보다 하루 먼저 방문한 것을. 진짜 술사의 일행이라면, 밤새 길바닥에서 고생할 거 없이 당당하게 숙식을 요구할 수 있을진대. 그리하지 않은 것도.
“그럼··· 나, 쫓겨나? ······안 되는데···.”
곤란했다. 이래서야 술사의 지인을 사칭한 꼴이잖은가. 부러 작정하고 속이려던 것도 아니건만.
“제가 갑자기 온 바람에 일이 꼬인 거죠?”
“어? 딱히······ 술사님 탓은 아닌데···? 그냥, 시기가 안 맞았던 거지···.”
아무개는 우물쭈물하면서도 나름대로 의견을 말했다.
“그때 마침 술사님이 안 왔으면······ 큰일 났을지도 몰라.”
아무개는 팔짱을 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주변에는 몽둥이를 쥔 장정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때마침 술사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아무개도 팔짱을 풀어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술사가 아무개를 자연스럽게 빼내 간 덕분에 함 장군과 안면이라도 익힐 수 있었잖은가. 그 언행이 심히 태연자약해 일행으로 오인당했지만.
“그리고, 술사님이··· 나 먼저 말할 기회도 줬잖아. ······내가 날려 먹었지.”
하필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린 바람에 본전도 못 꺼냈다. 애기씨를 뵙고는 더욱 말을 꺼낼 상황이 못 되었다. 마님이 몸져누웠는데 불청객이 제 용무를 보겠답시고 나설 수는 없잖은가.
이 난국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까. 아무개는 골몰했으나, 그럴듯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부족한 탓에 멍하고 사고가 뒤죽박죽이었다.
어쩌지. 함 장군에게 사기꾼으로 낙인찍히면 곤란해지는데. 하지만 새벽에 놈들은 내가 술사님과 동행이 아님을 알 테고.
······혓바닥을 놀리기 전에 멸구할까.
“이러면 어때요?”
음험한 아무개의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하듯, 술사가 개입했다. 그는 객주와 행랑아범을 턱짓하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진짜 일행이 되는 거예요.”
기한은 당신의 용건이 끝날 때까지. 최소한 쫓겨나지는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