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9/10)

Chapter 8 

카일은 약통을 뒤졌다. 차 속에 숨겨져 있는 약통을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입속에 털어놓았다. 리를 만나고 나면 카페인을 다량으로 섭취한 것 같은 떨림이 느껴졌다. 리는 아델뿐만이 아닌 제 정신도 옭아맸다. 눈이 침침했다. 조금 쓰라린 것 같기도 했다. 리를 보았을 때 깜빡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한참 후에야 핸들을 잡을 수 있었다. 카일은 흐트러진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은 전부 흩어진 이후였다. 창백한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이럴 때면 꼭 제 아들 같았다. 늘 겁에 질린 얼굴로 리를 찾던 얼굴. 아델의 가여운 얼굴이 떠올랐다. 제니의 어느 곳도 닮지 않은 아들이었다. 제가 뿌린 수많은 씨 중에 가장 저를 닮은 아들이었다. 하필 그런 것까지. 리를 사랑하는 것까지 닮을 필요가 있었을까. 카일은 손에 쥔 시계를 붙잡았다. 으스러진 유리는 카일의 손바닥에 한가득 박혀왔다. 

* * *

저택은 음산했다. 늘 이곳은 적막에 쌓인 듯 싸늘하기만 했다. 사람이 있어도 없어도, 발자취가 있어도 그만인 곳이었다. 카일은 계단을 올랐다. 아델이 내려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약에 취했거나 유우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델은 남을 해할 줄 몰라 스스로를 망치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에도 강압적인 아버지를 해치지 못해 스스로를 자학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였다. 아델은 창문에 반쯤 걸터앉아 화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흰 셔츠는 단추가 엇갈려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환각제. 제대로 세상을 볼 자신이 없는 가여운 아델을 마주했다. 하루아침에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아버지한테… 그 새끼 냄새가 나요. 걘 맨날 싸구려 비누를 쓰니까. 코를 찌를 듯한 열대과일 향. 마트에서 파는 그런 거요.”

아델은 풀린 눈으로 화분을 만지작거렸다. 작은 선인장이 아델의 손끝을 찌르고 있었다. 카일은 제 손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이미 손목시계는 제 구실을 잃은 지 오래였다. 리를 벗어나고 시간 속에 갇힌 카일처럼. 그리고 지하실에 갇혔던 아델처럼.

카일은 아델의 뺨을 쓸어보았다. 제 손바닥에 박힌 유리가 아델의 흰 얼굴을 찢어내고 있었다.

“우리 아들 일처리가 늦어서.”

카일은 부드럽게 웃었다. 아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아델은 카일을 선망하고 동경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했다. 그것은 아델이 카일에게 갖는 기본적인 혐오감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을 아들로 만든 카일이. 리의 환심을 샀을 것인가. 아델은 불길함에 치를 떨었다.

“아버지.”

아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일에게 속삭였다.

“걔랑 잤어요?”

카일은 심장에 커다란 숨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꽉 막혀왔던 심장에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 아델의 목소리가 박혀왔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피가 흘렀고 손바닥의 피와 맞물려 응고된 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떨 것 같은데?”

카일은 덤덤하게 답했다. 아델은 딱딱한 창틀에서 내려와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귀여운 자식.’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해 소파에 의지하는 꼴이라니. 카일은 어린 아델이 귀엽기만 했다. 

“하…. 그럴 줄 알았어요. 걔가 우리 구역, 아니 이 미국에서 안 잔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요. 하…. 난 앞이 안 보여도 걘 꼴려. 그거 하나는 알겠어.”

아델은 손끝을 떨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미련 없이 뱉어내는 말과 달리 목소리엔 급박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약까지 이기는 사랑이란. 

카일은 아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델은 여전히 술집 창부가 리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병신 같은 제 아들이 리를 기억해낼 리가 없었으니까. 

“질투야 아니면 아버지와 구멍이 공유된 유감이야?”

카일은 아델을 달래듯 물었다. 아델은 그럴수록 가슴이 메어오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카일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되었지만. 카일은 다정하게 아델의 뺨을 닦아주었다. 이 눈물의 의미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카일에 대한 분노임을 그가 알까. 아델은 그대로 소파에 엎드렸다. 

“그런 싸구려한텐 관심 없어요.”

아델은 눈물을 닦아내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카일은 여전히 아델의 뺨을 닦아내고 있었다. 마치, 더 울라고 보채는 것처럼. 재밌는 서커스에 빠진 관객처럼 유희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래. 넌 언제나 리를 좋아했지.”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아델은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새까매지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면 늘 손가락은 기하학적으로 늘어났으며 바닥은 음표들로 가득해졌다. 아델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환각에 시달리다 보면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나는 패배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분명 3초 전까지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시계를 바라보니 3시간이 훌쩍 흐른 이후였다. 아델은 카일의 손목에 걸려진 시계를 기억해냈다. 제가 남자에게 주었던 그것. 남자는 늘 자신이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방어하곤 했다. 그것이 방어라고 느껴진 이유는 그는 늘 온 힘을 다해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남자의 손목에서 시계를 빼온 카일은 얼마나 능숙한 사람일까. 그가 허락했을까. 아델은 조금 슬퍼졌다. 원초적인 슬픔이 들었다. 

카일이 말했던 ‘리’를 남의 입으로 듣는 첫사랑은 가혹하기만 했다.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이제 술집에서 만난 남자와 리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떨리지 않았다. 죽은 리는 슬픔 그 자체였다. 제 손으로 죽여버린 첫사랑. 이젠 사랑하지 않았다고 합리화를 시작했다. 

카일과 구멍을 공유한 기분이 어떻냐고? 카일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아들과 구멍을 공유하는 기분이 어떻냐고. 

마치 원래 제 정부인 것 마냥 으스대고 있는 카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남자를 처음 발견한 것은 자신이었고 카일은 야만스럽게 빼앗았을 뿐이었다. 죽은 리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만난 남자는 제가 먼저 발견한 것이라고. 아델은 이를 갈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오늘은 정령 남자의 사업장을 뒤집어야 했다. 카일은 제가 손봤다는 말과 달리 다시 한 번 아델에게 기회를 주었다. 아델은 그것이 무척이나 이상했지만 다시 한 번 그를 볼 수 있어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그를 만난다면 일단 손목부터 잘라야 할까. 제가 기억할 수 있게 시계를 채워줬는데 그걸 카일에게 홀라당 주고 말았으니까. 아델은 손목시계를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만약 그가 다른 옷을 입는다면, 비누 향을 바꾼 다면 평생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하기에는 자신은 너무도 병신이었다. 아델은 비적비적 방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수천 개의 칼로 썰린 것 같았다.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었다.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리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글이 떠올랐다. 리의 상냥한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3년이 지나도록 잊을 수 없는 기도문이었다. 아델은 찢어질 듯한 심장을 붙잡았다. 

‘하늘의 따뜻한 바람이 그대의 집에 부드럽게 불기를.’

‘위대한 정령이 그 집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시기를.’

‘너의 가죽신이 눈 위에 행복한 발자국을 남기기를.’

‘그리고 무지개가 항상 너의 어깨에 닿기를.’

보라색 물결이 일렁거렸다. 뜨겁게 응고되어 있던 피가 녹아내리고 온몸이 노곤하게 풀려갔다. 아델은 깊은 잠에 들었다. 

* * *

“왜 파더퍼커는 없는 거지?”

분명 어젯밤 카일이 다녀갔는데. 아델은 보란 듯이 카운터에서 영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한참을 소리를 내지르다 이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방으로 들어갔다. 리는 황급히 아델의 뒤를 따라갔다. 

“아빠가 싫어?”

여자들은 능숙하게 아델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파더퍼커야. 우리 엄마는 잘못 없어. 아빠… 시발. 난 아빠가 싫어.”

아델은 이미 낮부터 거나하게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아델의 가슴팍에서 두툼한 지갑을 꺼내었다. 몇 장의 지폐를 꺼내고 아델에게 몸을 기대어 왔다. 리는 여자들의 손목을 잡아 조심스럽게 입구로 등을 떠밀었다. 이안은 어디에 있는 건지 보이지 않았고 여자들은 전부 초면인 사람들뿐이었다. 

아델이 데려온 여인들이거나, 이안이 불법적으로 가두어 놓은 여자들이거나. 둘 중 어느 것도 리가 원치 않는 장사였다.

“말했잖아요. 여긴 매춘하는 곳이 아니에요. 그냥 술 마시고 돌아가세요.”

리는 지친 목소리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히죽히죽 웃으며 몸을 틀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카일에게 약속한 것이 있는데, 제 본분이 주어진 기분이었다. 잔소리와 인생 조언까지. 최악이었다. 이런 곳에 오지 말라고 자신 같은 사람이랑 노닥거리지 말라고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네 얼굴부터 발끝까지 전부 팔 것밖에 없는데. 이해가 안 되네.”

아델은 소파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물먹은 솜처럼 흔들거렸다. 고작 이틀 사이에 살이라도 빠진 건지. 수분감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아델은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꺼내었다. 여자들이 훔친 지갑은 위장용이었던지 매끄러운 가죽 지갑을 탈탈 털었다. 신분증과 여권. 위조된 아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수표를 꺼내 리의 머리에 뿌리기 시작했다. 돈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리의 시야 사이로 돈과 반지가 떨어졌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리는 머리에 얹어진 지폐를 털어내었다. 

“나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

아델은 숙제를 검사 맡는 어린아이처럼 한껏 들떠 보였다. 씨익 웃으며 돌연 옷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델이 옷장 문을 여는 순간 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곳엔 테이프로 칭칭 묶여있는 이안이 있었다. 리는 충격에 휩싸여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은 리를 보며 아델은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이안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아델은 리의 손목을 붙잡고 소파에 결박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중이잖아.”

아델은 단어를 씹어내기 시작했다. 돌아가라는 리의 말이 불쾌했다. 아델은 더욱 사악한 짓을 저지를 것처럼 광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남의 약을 맘대로 팔아. 짜증나게.”

아델은 숨을 죽이고 있는 리를 일으켰다. 짜증나리만큼 신음 한 번 안내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랑했던 그 사람처럼. 모든 일을 묵묵히 견디는 그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아델은 가슴팍의 총을 뽑아 들었다. 풀린 눈은 온데간데없이 정확한 각도로 총을 들었다. 테이프로 칭칭 감겨있던 이안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웅웅거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이안은 정신없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탕! 아델은 옷장 손잡이에 총을 쐈다. 이안은 소스라치며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안의 가랑이 사이로 축축한 액체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더럽게.”

아델은 이안의 다리를 향해 조준했다. 소변이 흥건하게 묻은 이안의 가랑이 사이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곳엔 테이프로 온몸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델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하지 마!”

리는 아델의 총구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아델은 무슨 짓이냐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건방지게 나선다는 듯. 카일과 닮은 잔혹한 목소리로 리를 위협했다.

“핥아봐.”

“뭐?”

아델은 리의 입술에 총구를 조준했다. 이안은 여전히 웅웅거리는 비명을 내질렀고 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턱을 들었다. 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감상이라도 하듯 뜯어내는 눈빛이 몹시 날카롭게 빛났다.

“네 친구 살려줄게. 핥아봐.”

아델의 의도가 무엇일까. 리는 생각에 잠겼다. 아델은 눈을 돌리는 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겁을 주는 듯 총알을 흔들었다. 리의 귓가에 울먹이는 이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총알 속에 이안이 있는 것처럼. 제 눈빛과 목소리에 이안의 목숨이 달려있는 사실이 실감났다. 

리는 아델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아델은 리의 정수리에 총을 대었다가 우악스럽게 입속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리는 무릎을 꿇고 아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총구를 입에 무는 그 순간, 아델은 신경질이 났는지 총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거칠게 리를 밀치고 걸어가 이안의 옆구리에 칼을 꽂아 넣었다. 리는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짜증나게 왜 그렇게 담담해?”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총구를 입에 넣는 리의 모습이 싫었다. 왜 마지막일 것처럼, 삶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구는지. 그의 태도가 역겨웠다. 그리고 삶에 미련이 없던 단 한 사람. ‘리’가 떠올랐다. ‘리’를 회상하게 하는 남자가 미치도록 싫었다.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근데 왜!”

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눈물을 살짝 흘렸다. 칼에 찔려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말을 더듬거렸다. 제 목숨보다 남의 목숨이 더 소중한 사람. 아델은 리가 측은했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역겨웠다. 

“그걸 믿었어? 어차피 난 내일이면 네 얼굴도 기억 못해.”

아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이안은 죽여야 했다. 만약, 오늘도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카일이 방문할 것이었다. 그러면 리를 해칠 테고. 리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리를 향한 선택이었다.  

“하…….”

리는 쓰디쓴 한숨을 내뱉었다. 이안을 향해 걸어가 테이프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아델은 묵묵히 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의 뼈가 도드라지고 허리가 굽은 몸. 바람 스치는 소리가 나게 걷는 남자. 아델은 눈을 감고 ‘리’를 떠올렸다. 

리는 이안의 몸에 감겨있는 테이프를 전부 뜯어내었다. 다행히 테이프 덕분인지 칼이 장기까지는 침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는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들었다. 손에 익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소독약을 쏟아 부으며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더러운 거 만지지 마.”

아델은 리에게 다가갔다. 리의 마른 어깨를 손으로 쥐고 세게 누르기 시작했다.

리는 뜨거운 촉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쳤어요?”

리는 아델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아델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칼질에 있어서는 베테랑인 아델의 손바닥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델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곧 이안의 치료를 도와줄 동료들이 도착했고 이안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리는 아델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기 시작했다. 아델은 대답 없이 리의 입술만 바라볼 뿐이었다. 가만히 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리는 황급히 아델을 데리고 왼쪽 방으로 들어섰다. 리의 청소 도구함과 각종 재고가 쌓여있는 곳이었다.

리는 아델을 앉혔다. 낡은 식탁이었지만 아델을 치료하기에는 이곳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 순간 식탁 밑에 감춰두었던 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툭. 바닥엔 흰색 가루가 흥건하게 낙하했고 리는 그제서야 이안이 이곳에 숨겨두었음을 깨달았다.

“이안 대신 사과할게요. 다신 이런 짓 안 하게 내가 막을 게요.”

리는 바닥에 떨어진 가루들을 손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아델의 것을 건드렸으니. 아델이 그만큼 화를 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순간 아델은 리의 팔뚝을 끌어당겼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

리는 아델과 눈을 맞췄다. 전부 원하는 대로 약을 회수하고 장사를 접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오래 하지 못할 것을 알았고 더 이상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카일의 말마따나 아델을 흔들 생각도 없었고 카일이 자신을 흔들지 말았으면 했다. 

“말하기 싫어?”

리는 천천히 아델을 달랬다. 아델은 초조한 눈빛으로 리를 쫓았다. 

“아니. 하고 싶어.”

그 순간 아델이 리의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아델의 손가락이 엉망으로 떨려오고 있었다. 리는 붙잡힌 머리를 빼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아델은 슬픈 눈으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리는 아델의 어깨를 밀어냈다. 

“거부하지 마.”

“제발 거부하지 마…….”

아델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리의 허리를 당겨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리는 아델의 등을 어색하게 두들겼다. 그 순간 낡은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감이야. 구멍을 공유하게 돼서.”

아델은 뒤를 돌아보았다. 카일은 한껏 비웃는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는 목덜미부터 뺨까지 전부 달아올라 식을 줄을 몰랐다. 카일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총으로 리의 허리를 밀치며 벽으로 끌고 갔다.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려고 했어!”

리가 카일에게 소리쳤다. 카일이 말했던 구멍에 대한 공유. 자신을 폄하한 말은 어째도 좋았다. 그러나 카일의 요구를 행하기 위한 노력까지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아델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까지 벌였는데. 

카일은 같잖다는 듯 리를 바라보았다. 카일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계약서에 도장 찍어.”

카일은 바닥에 계약서를 던졌다. 구둣발로 툭 건드렸다. 귀찮은 것이 아닌 리를 깔보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행동이었다.

“아버지.”

아델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카일은 아델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아델은 두 손을 허공에 올린 채로 종이에서 손을 떼었다.

“몸값으로 대신해. 네 사업장에서 벌인 일, 전부 눈감아줄 테니까.”

아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말로만 듣던 몸으로 갚는다는 것. 리를 전용 남창으로 전락시키려는 말이었다. 아델은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요.’ 아델의 눈빛이 파리하게 흔들렸다. 카일은 마음먹은 일은 기어이 해내는 사람이었다. 카일의 사전에 윤리란 없었다. 

카일은 냉정한 얼굴로 돈의 단위를 불렀다. 이자율에 피해 보상금까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금액에 아델은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손해가 발생한 건 분명했지만 이렇게까지 천문학적인 금액은 아니었다. 그리고 왜 리가 인질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사고 친 새끼는 제가 찔렀어요. 얘는 아마 종업원,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애입니다.”

아델은 횡설수설했다. 카일의 무릎에 가까이 닿을 만큼 고개를 숙이고 말하기 시작했다. 리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아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순간 카일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갔다. 카일은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는 이안의 시체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안은 치료 중에 들이닥친 카일의 부하들에 의해 이미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안을 치료해준 사람들도 전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죽은 이안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그를 치료하던 동료들의 피가 리의 발치까지 번져 흘러오고 있었다. 

“사인해.”

종이의 끝자락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리는 현기증이 나는 듯 서랍장에 몸을 기대었다. 아델의 무릎이 피로 젖어가고 있었다.

“카일…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리가 카일에게 다가왔다. 몹시 자연스러운 말투에 아델은 놀란 듯 리를 바라보았다. 카일은 여전히 분노에 못 이기겠는지 더욱 싸늘한 얼굴로 계약서를 들이밀 뿐이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아델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핏물로 흥건한 바닥에 아델의 검정 머리가 닿았다. 머리는 삽시간에 핏물로 젖어가고 있었다. 카일은 아델을 무시하고 계약서를 리 쪽을 향해 밀었다. 리는 어쩔 수 없이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정말 내가 필요해?”

“내 목숨 따위 당신의 마약에 비할 바가 못돼.”

“밑지는 장사를 왜 하는 거야?”

리의 심정은 복잡했다. 카일은 리가 사인을 마치자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아델을 일으켰다. 아델은 이미 근육이 굳었는지 일어서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아델의 얼굴은 눈물로 한가득 젖어있었다. 

“따라와.”

카일은 아델이 아닌 리에게 손짓했다. 아델은 멀어져 가는 리를 바라보았다. 허망했다. 절망적인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아델은 셔츠를 부여잡았다. 3년 전 죽은 리를 바라봤던 그날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아델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아델은 저택에 실려왔다. 수액과 비타민 그리고 아로마로 온 정신을 진정한 이후에야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비몽사몽했다. 금방 잠에서 깨어나 약기운이 달아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엇엔가 홀린 듯 저택을 정신없이 뒤졌다. 

카일과 리. 아델은 두 사람을 같이 둘 수 없었다. 카일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단순히 자신을 벌주기 위해서 데려왔다기엔 꺼림칙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주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초조했다. 

아델은 카일의 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다행히도 수상한 소리 따위는 나지 않았다. 그는 섹스를 할 때도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었으니 안심하기는 일렀지만. 그러지 않길 바라야 했다. 

아델은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막연히 아름답다는 것 외에 기억할 것이 필요했다. 남들처럼, 장애가 없이 그를 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아델은 패배감이 들었다. 카일은 가졌지만 자신은 없는 결정적인 그것. 바로 눈이었다.

아델은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의 숨소리만큼은 구별할 수 있었으니까. 제가 하는 이 관음이 무척이나 소년스럽게 느껴졌다. 성인이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늘 카일과 연결된 일엔 아이가 되어 버렸다. 그 순간 카일의 방문이 열렸다. 리는 문틈에 기대어있던 아델과 부딪혔다. 그 소리에 침대에 누워있던 카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문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아델을 내려다보았다. 아델은 이제 남자가 낯선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을 만큼은 학습하고 있었다. 그의 향기와 쇄골 밑의 흉터를 보고 알아차렸다. 결정적으로 카일의 방에서 나올 남자는 그가 유일했다.

“나한테 볼 일이 있나?”

카일은 이제 독사 같았다. 아주 빠르고 부드럽게 아델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로 아델을 우롱하고 있었다. 카일의 물음에도 아델은 오로지 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운 듯 하얀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입 주변은 부르튼 자국이 선명했다. 카일과의 시간이 스트레스였는지. 하룻밤만에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아델은 리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살폈다.

“오버하지 마. 건들지 않았으니까.”

카일은 리의 구멍까지 탐색할 기세인 아델에게 경고했다. 그제서야 아델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당황스러움에 떨고 있는 리를 놓아주었다. 리는 아델을 올려다보았다.

“카일이랑… 아니 우리 밥 먹을 건데, 먹을래요?”

이 집의 가사를 담당하는 것은 오래된 메이드들이었다. 감히 카일이 사온 남창이 담당할 일이 아니었다. 아델은 기가 찬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성당에서의 리처럼. 제 어미라도 만들어 주고 싶은지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곧장 리는 카일의 방문을 닫고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델은 리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조심해.”

“뭘요?”

“우리 아버지… 카일을 조심하란 말이야. 그 반말은 또 뭐고! 카일을 알아?”

아델은 무방비한 리에게 소리쳤다. 아무리 무던하고 속을 알 수 없는 그였지만 마피아의 대부인 카일에게까지 반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필 그 얼굴이 예뻐서 아델은 리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반말해도 된다고 하시던데요?”

리가 포근하게 웃었다. 그렇게 리가 사라질 때까지 아델은 멍하니 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동거는 계속되었다. 리는 밤마다 카일의 방에 들어갔고 아침마다 카일의 방에서 나왔다. 아델은 인상을 찌푸리며 리를 바라봤지만 리는 행복한 미소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새벽에 나와 혼자 울기도 하고. 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수상한 남자였다. 

“남창이 적성에 맞아?”

“진작에 이럴 걸 그랬어.”

아델의 폭언에도 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식사를 챙겨주거나 필요한 게 없는지 물을 뿐이었다. 사건은 그날 터지고야 말았다. 근처 볼일이 있어 새벽에 귀가하던 참이었다. 하루 종일 땀나게 뛰어다닌 탓에 온몸이 흠뻑 젖었으며, 넥타이는 목을 거세게 감싸 안아 찝찝할 뿐이었다. 

아델은 피곤한 눈을 누르며 일층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세하게 세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아델은 홀린 듯이 이층 계단으로 걸어갔다. 철저한 사각지대. 카일의 방문이 훤히 열려 있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구도였다. 관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최상의 장소. 

아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피곤함과 피로함, 신경질적임은 전부 없어지고 오로지 초조함만 자리 잡고 말았다. 

“해저든… 해저든. 하…….”

리의 앓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에게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환희에 흠뻑 젖어든 야릇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 커다란 저택에 오로지 리의 신음소리만이 온전했다. 

아델은 멍하니 그곳에 서있었다. 그때 아델은 제 영혼이 두 번째 죽는 날이라고 감히 판단했다. 첫 번째는 리를 죽였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카일의 위에서 교성을 흘리며 허리를 흔드는 리를 보았을 때. 아델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해저든… 카일!”

끊어질 것 같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아델의 앞섶이 불끈 튀어 올랐다. 카일 해저든, 아델 해저든. 아버지의 성을 부르며 열중하는 교미 속에서 아델은 발정하고 말았다. 

마치 제 이름을 부르짖는 리와 섹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제 몸에 올라탄 리가 새하얀 허리를 흔들며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리의 허벅지를 붙잡고 자국이 생길 때까지 누르면…!

그 순간 아델의 검정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관음 끝의 사정이었다. 아델은 얼굴을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수치심과 패배감이 몰려왔다. 자기 혐오감에 허덕거려야 했다. 아버지의 품에서 흔들거리는 남자의 신음을 듣고 발정하는 꼴이라니. 제 처지가 너무도 기구했다. 이번에도, 역시 이번에도 변함없이. 카일에게 뺏기고 만 사랑. 

배덕감에 숨이 가빠졌다. 손에 묻은 끈끈한 액체를 닦아내었다. 관음의 최후였다. 

그 순간 아델은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카일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주 또렷하게.

* * *

아델은 심하게 앓았다. 감기인지, 독감으로 이어질 열병인지. 새벽부터 몸이 찌뿌둥한 게 아침이 되니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어젯밤 몽정을 끝으로 몸이 허약해진 탓이었을까. 꿈에 리가 나왔다. 악몽을 세는 일을 그만두고 잠을 청하려 했을 때. 마침내 죽었던 리가 말을 걸어왔다. 

잘 지내? 잘 지내? 리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풍기는 악취. 술집에서 만난 이름 모를 창부의 대걸레 냄새가 흘러나왔다. 작은방에서 제게 범해져 엉망으로 울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라고 했을 텐데요.]

그 순간 대걸레를 든 창부의 얼굴에 리가 겹쳐졌다. 아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 손을 잡고 있는 사람. 술집 창부, 아니 리가 3년 만에 제 눈앞에 서있었다. 아델은 믿을 수가 없었다. 헤드로 기어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리가 보일 리가 없는데, 분명 내가 죽였는데. 지하실에서 총을 쏘고 그를 가루로 만들었는데.’ 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리… 와일러.”

아델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손을 뻗었다.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술집 창부는 리였다. 제가 3년 전에 죽인, 시릴 만큼 간절했던 첫사랑. 리였다.

“아델… 괜찮아요?”

“대답해요. 리… 맞아요?”

아델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마에선 열이 펄펄 끓고 있었고 숨소리는 불규칙했다. 리는 아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팠어요?”

리의 사근거리는 목소리, 보랏빛의 눈동자. 이걸 몰랐다니. 아델은 리의 손을 맞잡았다. 하얗고 가늘고 상처가 많은 손. 그런 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걸까. 그때 죽인 리는 리가 아니었다. 단순히 리를 닮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 카일이 제 장애를 이용한 해프닝이었을 뿐이었다. 리를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죽이기 위해서 잔인하고도 반인륜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아델은 카일의 악독함에 치가 떨렸다. 그럼에도 리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죽은 게… 죽은 게 아니었어요?”

아델은 리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얇은 눈썹부터 보라색 눈, 하얀 피부와 턱 선까지 전부 리였다. 제가 사랑했던 그 모습인데 제 장애 때문에 확신하지 못했다. 그에게 끌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첫사랑을 떠올렸다. 가슴 떨림을 느낀 주제에 모른 척하고 괴롭히기만 했다. 그렇게 그를 괴롭힌다면 이 마음이 사라질 것도 같았다. 죽은 리를 그리워하며 새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 리에 대한 진정성이 없어지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두 번 사랑하게 된 남자는 결국 같은 사람이었다. 리는 눈물이 흐르는 아델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제 품에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아델의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이 맺혔다. 

“안 죽었어요. 아델이 날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기억이 났나 봐요?”

리가 웃었다.

“아팠어요. 한동안 아파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 알고 있어요.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거죠?”

아델은 리의 허리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위로가 받고 싶었다. 리가 너무도 보고 싶었는데, 지하철에서 맨몸으로 철제에 뛰어들 정도로 리를 그리워했는데. 제가 리를 죽였다고 생각해도 리가 어디선가 남아있을 것 같아서 그 희망을 놓지 못해서 미쳤었는데. 그동안의 사랑이 질서 없이 튀어나와 서러웠다. 

“죽은 줄 알았는데… 리가 죽은 줄 알았어요. 내가 리를 죽였는데.”

아델은 줄곧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말간 소년처럼 달아올랐다. 미아처럼 처절하고 아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리에게 쓰러졌다. 

리의 허벅지에 닿은 아델의 머리가 뜨거웠다. 리는 차가운 손을 아델의 이마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까지 나쁜 척, 사악한 척한 거였구나. 리는 그런 아델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아델은 원래 선한 사람. 아델은 결코 누군가를 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리는 아델이 잠든 틈을 타 약을 지어왔다. 다행히도 단순한 감기인 것 같았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에 강하다던데. 여름에 태어난 아델은 겨울만 되면 마른 기침을 하곤 했다. 

열감기는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델은 심하게 앓고 있었다. 

리는 정성스럽게 아델을 간호했다. 저녁이 될 때까지. 물수건을 갈고 몸을 닦아주었다. 팔뚝과 다리를 반복적으로 닦아내었다. 아델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낯선 남자, 아니 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간호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어른이 되고 싶게 만든 사람이었다. 늘 리의 앞에만 서면 철없는 학생으로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에게 어른으로, 남자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리는 죽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제 앞에서 예쁜 얼굴로 다가오는 리를 보면 다시 한 번 ‘희망’이 무엇인지 품게 되었다.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카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일은 리를 교도소에 보내고 모른 척 리를 데려왔다. 한낱 남창 취급을 하며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고 노예로 부려먹었다. 카일은 언제까지, 어디까지 리를 추락시킬 것인가. 

아델은 속이 답답해졌다. 갈증이 일었다. 목을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카일에 대한 혐오감이 차올랐다.

“깨어났어요?”

아델은 미세하게 눈을 떴다. 리는 다리가 저리는 듯 허벅지를 작게 두들겼다.

“내가 구해줄게요. 이번에는 꼭 구해줄래요.”

리의 허벅지 사이로 아델의 눈물이 떨어졌다. 교도소에서 제 손을 붙잡고 했던 고백처럼. 아델은 힘겹게 눈을 떴다. 리는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구해줄 게 없는데요?”

아델은 가슴이 사무치도록 슬퍼졌다. 카일이 벌인 이 일에 대해서 전부를 캐내고 싶었다. 그 순간 아델의 방으로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아델은 서둘러 리를 불렀다. 리는 왼쪽으로 돌렸던 얼굴을 아델에게 고정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아델은 진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카일이었다. 그의 그림자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잠든 카일을 덮치고 칼을 찔러 넣을 수만 있다면. 환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니에요, 리.”

아델은 리의 턱을 쥐었다. 부드럽게 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비릿하게 카일이 웃었다. 

* * *

리는 카일의 옷을 받아들었다. 카일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축 가라앉은 얼굴로 담배만 물고 있었다. 불을 붙일 힘도 없는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는 카일에게 슬쩍 다가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런 거 할 필요 없어.”

카일은 리의 손을 쳐냈다. 리는 민망해진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왜 숨어, 칼이라도 있어?”

카일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카일의 질 낮은 장난에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카일을 죽이고 싶을 리가 없었는데. 오히려 카일이 제 몸값을 요구해 저택에 데려왔을 때 일말의 기대를 하곤 했다. 

창피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밑바닥이었다. 카일은 성당에 가둔 그날처럼 코트를 건네고 일상적인 일을 맡겼다. 다만, 전과 달리 거칠어진 정사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카일은 기묘한 체위 혹은 야외에서의 섹스를 즐기지 않았었다. 

과감하게 무언가를 할 정도로 열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카일이 부쩍 자극을 쫓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 이곳에 오고 나서 늘 무리한 것을 요구하곤 했다. 섹스에 열정 없던 카일이 달라졌다. 사인을 하고 난 후 순탄치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 카일이 자신한테 ‘사랑’을 주기 위해 계약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구멍’, ‘남창’, ‘몸값’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카일이 어떤 용도로 자신을 데려왔는지. 리는 생각했다. 어색한 파트너보다 10년을 굴린 자신이 편할 것이라고. 이미 자신도 구를 대로 구른 터라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몹시 비참해질 것 같았다.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럴 때면 리는 이를 악물고 사랑을 고백하곤 했다. 자신을 그저 구멍으로 생각하는 카일이라도 몇 번을 고백하다 보면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런 순수한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스스로를 향한 고백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다. 하찮고 볼품없는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다. 생존할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널 왜 데려왔다고 생각해?”

카일은 가뿐하게 리의 고백을 무시했다. 애써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리의 눈동자에 집중하지 않도록 불량식품에 기댈 생각이었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곱게 개진 신문을 들었다. 리는 얼굴을 붉혔다. 제가 아침에 개어 놓은 신문을 카일이 만진 것만으로도 그의 쓸모를 찾았다고 여겼으니까. 순수하고 선량하고 착한 리. 카일은 늘 그 얼굴을 찢어내고 싶었다.

“내 친구를 죽이고 남은 건 나밖에 없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리는 어긋나곤 했다. 사랑해서, 아델에게 빼앗기는 꼴을 보기 싫어 투정을 부린 것뿐인데. 리는 몹시 이성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사랑을 어리광처럼 부리던 리가 아니었다. 카일은 실소했다. 갑갑한지 넥타이를 풀고 침대 위로 늘어졌다. 카일은 리에게 손짓했다. 검지와 중지를 까딱거렸다. 리는 익숙한 듯 카일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버지가 되니 자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결혼 안 하잖아.”

“그리고 너도.”

카일은 말을 멈추었다. 리는 카일을 한참 바라보았다. 거칠어진 카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우리의 공백은, 자신의 공백은. 한참이나 방치되어있던 인생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만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나은 꼴로 있었을 텐데. 카일이 자신한테 부채감을 느끼는 사실이 괴로웠다. 조금 더 처지를 비약하게 만드는, 나약하게 만드는 마법 같았다.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카일의 뺨 위로 리의 눈물이 떨어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오히려 카일이 자신을 동정한다면 더욱 비참해질 것 같았다. 

카일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듯 턱을 쓸어보았다. 제 뺨에 올려진 리의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카일의 중지 위에 투명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카일은 붉은 혀로 눈물을 핥았다. 카일의 혀에 리의 눈물이 섞여들었다. 리는 여전히 처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일은 리가 감히 거룩하다고 생각했다. 신성한 존재라 제가 훔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늘 자부해왔다. 리의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늘 제가 리에게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아마 아델은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걸까?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람들은 욕망하니까. 막상 가지면 별거 없을 텐데.”

리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역시 카일은 진심을 숨기고 리의 마음을 찢는 쪽을 택했다. 

“가진 자의 여유일까, 건방일까.”

리는 애써 표정을 숨기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건 지금까지의 상처와 다른 종류였다. 생각보다 꽤 아픈데. 리는 카일이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카일은 지금 위험한 고뇌에 빠진 것이었다. 자신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둘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거나 새로이 창조를 하려는 시도였다. 리는 기분이 이상했다. 다행히 ‘상했다.’가 아니라서 무척이나 안심이었다.

“날 왜 데려왔어?”

처음 만난 날과 같은 질문이었다. 왜 잘 살고 있는 나를, 그곳에서 죽으면 되는 나를 데려왔어? 리는 언제나 카일을 기다리는 것이 힘에 부칠 때 그렇게 소리치곤 했다. 그대로 죽으면 될 것을. 왜 사랑하게 만들었어. 리는 눈물을 흘렸다. 리는 그대로 카일의 가슴팍에 쓰러졌다. 조금 더 밑으로 몸을 움직여 심장 소리를 들었다. 

쿵쿵쿵쿵. 언젠가 리가 남자여서 바짝 껴안아야 한다는 카일의 말이 떠올랐다. 다정하고도 달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는데. 후회만 남은 과거가 눈물겨웠다. 왜 현재에서 카일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가. 애초에 사랑하지 않게 만들었으면. 

리는 카일의 허리를 껴안았다. 딱딱한 가슴팍에 뺨을 대었다. 

“넌 왜라고 생각하는데?”

“말 돌리지 마.”

지긋지긋했다. 카일이 늘 ‘왜’라고 묻는 것이. 카일은 품에 안긴 리를 떨어뜨렸다. 그리곤 침대 위에 제가 놓은 신문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손톱 속으로 신문을 찔러 넣었다. 엄지손톱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신문이 축축하게 굳어갔다.

“하지 마.”

리가 카일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제 입속으로 넣었다. 물컹하고 뜨거운 혀로 카일의 벌어진 손톱을 핥았다. 

“네가 두려웠어. 총도 칼도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는 네가. 착하기만 한 네가 두렵더군.”

카일은 푸념했다. 겨우 10년이 흘렀어야 말할 수 있는 진심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몇 십 년 후에나 할 수 있을까. 죽기 직전에는 가능할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지 그랬어?”

기다란 타액이 떨어졌다. 리는 굳어버린 피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카일의 손을 감싸 안았다. 리의 흰 셔츠가 묽은 핏물로 젖어갔다. 

“앞으로 네가 두렵지 않도록.”

카일은 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짓이든 해볼 생각이야”

허리를 바싹 끌어안고 눈을 맞췄다. 두려움과 직면할 생각이었다. 

“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좋아할 테니까”

“…….”

“리… 너는 창피하지도 않아?”

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가끔씩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리를 감옥에 보내놓고 카일은 그곳에 스파이를 심는 짓까지 불사했다. 스토커의 집착보다 광적이었다. 

“함부로 대해도 돼?”

카일은 리를 향해 웃었다. 어느새 신문을 접은 그는 넥타이를 바꿔 맨 상태였다. 리가 아침에 골라준 것이 아닌 검은색의 타이였다. 리는 씁쓸했지만 짧게 시선을 두었다. 카일이 질리지 않도록, 제 순정에 지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배려인데?”

리는 담요를 털었다. 카일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옷 입는 것에 열중했다.

“그럼 앞으로 묻지 않지. 널 데려온 명분은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이 시초였다. 리는 그날 카일의 회의에 끌려가 기괴하고 엽기적인 장면을 마주했다. 

리는 아무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미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회색의 인테리어 속, 약속한 듯 검정 정장을 빼입은 임원들. 그리고 회의에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야살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스무 명의 남자들의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매춘부들. 붉은 립스틱이 번질 만큼 성기를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들썩들썩. 커다란 테이블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춘부들은 정신없이 남자들의 펠라를 시작했다. 임원들은 새빨개진 얼굴로 매춘부의 머리채를 잡기 시작했다. 

임원들의 다리 사이에 올라와 있는 머리통들. 색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라가 흉흉할 때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포르노를 제작한다고 했었나. 회의 중 이루어지는 펠라. 어느 군인의 망상일까. 지루한 회장의 아이디어일까. 

난교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다리 사이에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들. 길게 뻗어 있는 테이블 아래로 들리는 질척거리는 소리들. 리는 불쾌함을 견딜 수 없어 귀를 틀어막았다.

“미쳤구나, 카일.”

리는 비적비적 카일을 향해 걸어갔다. 의자가 삐거덕 거렸다. 임원들은 리에게 눈빛을 주지 않고 서비스를 받는 것에 열중했다. 약속한 듯 흔들리는 의자, 탁해진 공기, 비릿한 정액 냄새. 리는 끔찍함에 눈을 감았다. 

“이리 와.”

카일은 가운데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리에게 손짓했다. 예쁜 강아지를 대하듯이 나긋하게 리를 불렀다. 리는 두려움에 이가 떨려왔다. 카일은 제 허벅지를 두들겼다. 그의 부하들은 발개진 얼굴로 힘겹게 볼펜을 쥐고 있었다. 카일의 양옆은 공석이었다. 리는 카일에게 곧장 가지 않고 제 가까이 있는 여자를 일으켰다.

“할 필요 없어요.”

임원은 벼락이라도 맞았다는 듯 리를 노려보았다. 제 파티를 망쳐서 기분이 상했는지 카일은 사나운 눈빛으로 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포근하게 리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느긋한 미소로 리를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여자들처럼 행동해.’

카일의 온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는 안개를 헤치고 걸어가는 듯 남자들의 검은 정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눈을 가만히 두고 있노라면 아주 막막한 어둠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리, 앉아.”

카일은 인내심 있게 허벅지를 두들겼다. 망부석처럼 서있는 리에게 카일의 오른 편에 앉아있던 부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무리 배운 게 없는 남창이라지만, 대표님한테 무슨 짓입니까?”

그는 양물을 덜렁거리며 소리쳤다. 아, 이곳에서 자신의 처지는 팔려온 사람이었다. 리는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키려 내려쳤다. 수백 번도 더 스스로 매질을 시작했다. 카일은 리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리에게 윽박을 질렀던 부하에게 건방지다는 눈빛을 보내었다. 부하는 카일의 눈빛에 겁먹은 개새끼처럼 깨갱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매춘부들은 빨던 행위를 멈추고 일제히 리를 바라보았다. 괜한 고집부리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유난을 떤다는 듯이.

“특별히 바닥에 앉는 것은 배려해주지.”

‘배려’, 그 글자를 강조했다. 허울뿐인 말장난. 

“후회할 거야.”

“그건 내 몫이고.”

리는 카일의 무릎에 앉았다. 그리고 카일은 의자를 뒤로 밀어 테이블에 손이 닿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의지할 것은 카일의 몸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리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의지할 것이 카일의 몸밖에 없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팔과 허벅지, 다리가 부산스럽게 떨려왔다. 카일은 버클을 풀고 그 속에 리를 앉히기 시작하였다. 생살이 닿는 느낌에 리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행된 회의. 리는 사색이 되어있었다.

사내들의 끊어질 듯한 목소리와 헐떡거리는 소리가 난무하는 회의 현장. 카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회의를 진행했다. 족히 서른 명이 넘는 남자들이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곧 리를 바라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카일과 한 몸이 된 리.

임원들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힘겹게 침을 삼키며 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제 성기를 물고 있는 게 리였으면 좋겠다는 듯.

한참 동안 남자는 새로운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다가오는 회색의 눈동자. 카일과 몹시도 닮은 남자, 아델이었다. 아델은 방금 전의 리처럼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만, 리와 다른 점은 카일을 향한 분노를 가감 없이 표현한다는 점이었다. 아델은 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회의를 중단시켰다. 

“아파…….”

허리를 끊어질 듯 쥐고 있는 카일을 돌아보며 리는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느새 흉흉하게 커진 카일의 성기가 리의 등골을 위협하고 있었다. 리는 아델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일은 아델을 바라보며 더욱 세게 허리 짓을 시작했다. 작게 반동하던 카일의 허벅지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미쳤어.”

리는 새어나가는 신음을 참으려 주먹을 입에 물었다. 정수리에 느껴지는 아델의 당황스러운 표정. 아델의 회색 눈빛이 탁해지기 시작했다. 아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리는 카일의 허벅지를 세게 두들기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카일은 아델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와중에도 리의 허벅지를 누르며 제 성기가 더욱 꽉 박히도록 힘을 주었다.

“일의 능률을 올리는 방법이니까.”

카일은 금발의 여자에게 손짓했다. 여자는 끄덕거리며 아델에게 걸어갔다. 여자는 능숙하게 아델의 넥타이를 끌고 카일의 옆으로 안내했다. 아델은 여전히 분노에 쌓인 얼굴로 거친 숨만 내쉴 뿐이었다. 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카일의 양옆이 공석인 이유. 그는 아델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짓을 꾸민 것이었다. 리는 수치심에 몸부림쳤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델은 쥐고 있던 주먹을 툭 떨어뜨렸다.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된 리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카일은 아델의 나약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리를 테이블에 눕히고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리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부하들은 하나같이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아델과 카일 사이에 음울한 적막이 맴돌았다. 서로를 할퀴고 흠집 내는 상처뿐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일의 바지 위로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졌다. 리는 더 이상 헐떡거릴 힘도 없는지 차가운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리의 얇은 허벅지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아델은 절망적인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왼쪽에 앉아있는 부하에게 웃음을 지었다. 부하는 순식간에 허리를 바싹 세우고 카일의 눈빛에 경청했다.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듯 여느 회의처럼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 아들도 여자는 가능하지 않은가 보군. 날 닮아서.”

카일의 자학 섞인 농담 후 임원들은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카일은 임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카일은 리의 구멍에서 제 성기를 빼내었다. 뿌연 액체가 한가득 쏟아졌다. 뚝뚝. 카일의 검은 구두 위를 물들였다. 카일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리의 허리를 두들겼다. 마치 정사가 끝났다는 듯. 모든 것의 종료를 예고하는 몸짓이었다. 

임원들은 더욱 과격하게 카일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박수소리가 희미해져갈 즈음 아델은 쓰러질 듯 자리에 착석했다. 

“아버지.”

아델은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카일을 불렀다. 리는 바닥에 쓰러져 애처로운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카일은 아델의 쓰디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에게 손짓했다. 아델은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려는 여자를 저지했다. 

그 순간 카일은 아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여자의 머리채를 부드럽게 잡아내었다. 그리곤 제 품에서 칼을 뽑아내어 여자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순식간에 공중에 휘날리는 금발의 잔여물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의 머리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이러면 남자 같나?”

여자는 사라진 머리카락을 찾으려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울부짖었다. 아델은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눈빛을 굳히고 웃었다. 

마치 너의 요구대로 해주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델은 창백한 손끝으로 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이미, 회의는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으며 어색하게 웃던 임원들조차 화들짝 놀라 벨트를 채우고 있었다. 매춘부들은 벗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지켜보던 포주는 화가 난 듯 카일에게 걸어왔다. 문신이 가득한 포주는 카일의 테이블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무슨 짓입니까?”

포주는 육안으로 봐도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마피아인 카일을 대적하는 것이 두렵다는 듯 두꺼운 다리가 사정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를 애써 눌러 담는 듯 필사적이었다. 아델은 포주와 카일, 그리고 리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회의는 끝났어. 다들 돌아가.”

카일은 포주에게 건방지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카일의 불호령에 임원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보상하시죠?”

간절한 포주의 말에도 카일은 입에 담배를 물고 연기를 뿜어낼 뿐이었다. 포주는 카일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카일은 귀찮다는 듯 지루한 눈빛을 보내며 지갑을 열었다. 포주가 안심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려는 찰나. 

카일은 여자의 머리를 벗겨내었다. 포주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발망을 감싸 안았다. 머리카락이 잘린 여자는 가발이 벗겨진 상태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흔들거렸다. 카일은 불결하다는 듯 가발 위로 재를 털어냈다. 

“난 진짜만 취급해.”

카일의 말에 여자는 진짜 머리조차 잘릴까 두려워했다.

“나가.”

카일은 포주에게 돈을 던졌다. 포주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제 왼쪽 가슴에서 총을 꺼내었다.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포주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는 듯 인내심 있게 포주를 기다렸다.

“가발을 자른 것도 룰 위반인가?”

카일은 이죽거렸다. 

“날 속이고 돈을 요구한 건 너야.”

카일은 테이블 속 총을 꺼내 포주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타앙! 천장이 뚫어질 듯한 굉음이 펼쳐졌다. 리는 두 귀를 막고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겼다. 포주의 뜨거운 핏물이 흰 벽에 페인트처럼 칠해지기 시작했다. 새빨간 피는 검붉은 응어리가 되어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포주의 피 떨어지는 소리가 리의 귀를 관통하기 시작했다.

“미쳤어… 카일, 미쳤어.”

리는 카일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주인이 떠나버린 텅 빈 공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갖가지 비명을 내지르며 포주에게 달려갔다. 카일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거슬리는지 힘껏 인상을 찌푸렸다. 

“치우고 가.”

카일은 여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피로 젖어 드는 가발. 금발은 어느새 붉은 피로 잔뜩 머금어져 섬뜩한 모양새로 변해갔다. 한 폭의 흉측한 그림 같았다. 리는 돌아보지 못하고 텅 빈 카일의 의자 다리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카일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발치에 뒹구는 피에 젖은 가발을 보며 조소했다.

“인어공주가 따로 없군.”

카일은 죽은 포주의 뱃가죽에 구둣발을 닦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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