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다음 날 아델은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찾아왔다. 달콤한 디저트를 한가득 들고 있는 아델에게 세상 모든 벌들이 꼬일 것만 같았다. 달콤하다 못해 쓰게 느껴지는 단향이 번져갔다.
카운터에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돈 계산을 하고 있는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깜짝 놀라 아델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분명 갱이라고 확신했다. 걸음걸이부터 옷차림 전부 일반인과는 거리감이 상당했으니까.
그런 아델은 갱이 할법한 짓들은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한 손님과 가까웠다. 아, 물론 리를 범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런 아델이 양손 가득 어린애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사 왔고 이안은 아델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리를 무자비하게 범한 걸로도 모자라 오늘까지 오픈 전에 와서 기분 나쁜 미소로 웃고 있다니.
어젯밤에 기절한 리는 꼬박 새벽 내내 앓아야 했다. 이안은 그런 리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문밖에서 리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델을 말리지 못했다. 작고 여린 리가 당하는 걸 보면서도 제 실속을 채우기 위해 묵살했었다. 이안은 돈이 필요했고 리는 인내심이 강했으니까. 착한 리를 이용하는 것이 마음이 쓰였지만 제 처자식이 우선이었다. 이안은 다시 나쁜 생각을 품은 채 아델을 바라보았다.
“뭘 봐. 안내해.”
이안은 어색하게 웃음을 걸고 발걸음을 돌렸다.
“강간은 하지 마시라고요. 우리 오빠 몸이 약해. 어제 봐서 알겠지만…….”
이안은 조금의 죄책감으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제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쉬지 않고 할 생각이었다.
아델은 걱정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어젯밤 리를 그렇게 버려두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제 집에 데려갔어야 했다. 중심도 잡지 못해 방황하는 리를 방치하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아마 어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약쟁이를 상대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몇 번의 사정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미안함이 들었다. 그래서 오픈이 되기도 전에 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델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허름한 이불 위에서 리는 골골거리고 있었다. 잔기침을 토하며 추운지 담요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델은 리의 담요를 걷어찼다. 제가 리에게 느끼는 감정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첫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자꾸만 마음이 아프게 만드는 남자가 싫었다.
매춘부 주제에 낭만을 쫓게 하는 거만한 눈빛도 싫었다. 작은 입술로 속삭이는 듯이 말하는 사근거림도 싫었다.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훈수를 두는 것도 꼴불견이었다. 그러나 왜 제 꿈속에 나와 자장가를 불러주었는가. 남자는 자장가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노랫말 같았다.
“야, 일어나.”
리는 아델의 목소리에 몽롱한 듯 눈을 부르르 떨었다. 아델은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리를 알아봤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싸구려 비누 향과 쇄골 아래의 상처. 이상하리만큼 리를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젯밤 제가 리에게 남긴 자국은 생각보다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아델은 리에게 장애를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아델은 아랑곳 않고 리의 몸을 당겨 안았다. 리가 보고 싶어 아침부터 달려왔는데 환대는 처참했다. 그럼에도 눈요기는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는 커다란 셔츠에 드로즈만 입고 있었다. 누구를 유혹하려고, 잠 못 들게 하려고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을까.
아델은 리를 몸을 훑듯이 바라보았다. 그런 아델은 무언가 쎄한 이안의 말을 떠올려야 했다. 리의 방은 너무도 가정집과 비슷했다. 매춘을 전용으로 만들었다기엔 살림살이가 너무도 정교했다.
[매춘까지는 아니고… 음… 그런 게 있어!]
이안의 말처럼 리는 매춘부가 아닌 것일까. 아델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남창 맞지?”
“…….”
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머뭇거릴수록 아델은 초조해졌다. 설마, 매춘부가 아닌 남자를 건드린 걸까. 아델은 리를 재촉했고 리는 정체를 들킨 것에 조급함을 느꼈다. 아델은 대답 없는 리의 모습에 눈빛이 흔들거렸다. 리는 황급히 아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하반신을 붙이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이 올라 목구멍이 뜨겁고 두 뺨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지만 아델이 의심하게 둘 수 없었다.
“이렇게 허리를 잘 돌리는데 아니긴.”
아델은 이미 카일의 명령을 뒷전으로 하고 리의 품 안에서 놀아나고 싶었다. 약이 아닌 맨 정신으로 리의 구멍을 헤집고 제 정액을 전부 싸지르고 싶었다. 이렇게 첫사랑과 닮은 상대에게 화풀이를 한다면 그 청춘을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네… 맞아요. 이 일이 아니면 어떻게 먹고살겠어요.”
리는 갈비뼈가 부풀어 오를 만큼 마른 기침을 시작했다. 허리를 돌리던 것을 멈추고 아델의 품에 쓰러졌다. 말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지 기절할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아델은 리의 몸짓이 안쓰러웠다. 아델은 망설임 없이 리를 감싸 안아 침대 위로 앉혀두었다.
리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젖은 리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리를 다른 남자들이 탐닉했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자신의 전용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아델은 제가 리에게 품는 감정이 ‘순결’임을 깨닫고 좌절해야 했다. 3년 전 첫사랑과 함께 죽어버린 감정을 부활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카일이 가장 경계하라고 했던 그 감정이 되살아날 것 같았다. 무릇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것은 사랑과 이어졌으니까.
아델은 살짝살짝 열이 올라옴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어 이마가 따끔거렸다. 리가 다른 남자랑 붙어있는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델은 리의 드로즈를 내리고 안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가 첫 손님인 듯 그곳은 뻑뻑하기만 했다.
“피가 아직까지 붙어있네. 더럽게. 장난해? 씻든지 입으로 하든지.”
아델은 피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을 보며 애써 독한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마음이 들킬 것만 같았다.
리는 비적비적 아델의 하반신으로 기어가 아델의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뜨거운 리의 숨결이 느껴졌다. 펠라를 하지 않아도 발기가 될 것 같았다. 아델은 흔들리는 리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리는 속절없이 아델의 손길에 쓰러져 기침을 토해냈다. 아델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리를 끌어안았다.
“감기 옮을지도 몰라요.”
아델은 리의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제 하반신에서 머무르고 있는 머리통을 조심스럽게 쥐어보았다. 작고 동그란 머리였다.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고 흑발은 부드럽게 제 손끝을 파고 들었다.
“허리를 조금 펴 주셔야…….”
리는 연신 제 머리를 쓰다듬는 아델의 자세가 불편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애처로운 숨결을 뱉고 있었다. 아델은 리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뒷모습만 보고 있기 아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친 입맞춤. 리의 얇고 뜨거운 숨결이 섞였다. 뜨거운 혀가 휘감으며 온몸을 전율시키기 시작했다.
리는 더 이상 힘이 없는지 아델의 허벅지를 짚고 눈을 감았다. 아델의 허벅지 위로 리의 눈물 자국이 느껴지는 듯했다. 왜 당신은 아픈 것일까. 왜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까. 기분 나쁜 불안감이 들었다. 낯선 남자와 카일. 두 사람의 눈빛이 닮아 있었다. 아델은 사무치도록 괴로웠다.
리는 숨이 모자랐던지 헥헥 거리며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델은 리의 안쪽을 부드럽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리의 방문이 열렸다. 리의 목덜미를 잡아챈 건 카일의 오른팔이었다.
아델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품는 부하. 카일이 총애하던 그 남자였다. 부하는 아델과 리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듯 리의 멱살을 더욱 세게 잡았다. 아델은 리를 놓치기 싫다는 듯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사랑스럽고 가여운 남자였다. 그리고 연인이 되길 소망하는 두 번째 사람이었다. 카일의 부하는 눈 옆의 칼자국을 보이며 웃어 보였다.
“도련님.”
그 목소리에 아델의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리는 힘겨운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델의 품을 찾았다.
“보스의 명령 듣고 계십니까?”
카일은 대표님. 명령은 사람을 죽이는 일. 아델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자조적인 반성과 함께 현실 판단을 하는 눈빛이었다.
아, 카일이 알아차렸구나. 아델은 심장이 떨려왔다. 카일이 눈치챈 것이다. 리를 방문하며 품은 연정을 파괴하려는 듯이. 카일은 지금 자신과 거래하고 있었다. 부하를 시켜 제 마음을 미친 듯이 쥐어 짜내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그런 충고를 들을 만큼 등신으로 보이십니까?”
아델은 부하에게 총을 들이밀었다. 카일에게 배운 정교한 자세였다. 아델은 부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대로 부하의 머리를 날리고 '제 직감이었습니다.'라고 카일에게 말한다면 모든 것이 용서될 것이다. 그는 제 아버지였으니까. 그 순간 꾸벅꾸벅 졸던 리가 아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하지 마. 하지 마요.”
리는 총을 쥔 아델의 손을 감싸 안았다. 아델은 리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듯 총을 미련 없이 거두었다.
“나가.”
리의 반말에 부하는 씨익 웃으며 아델을 뒤로했다.
* * *
카일은 냉기가 철철 흐르는 미소를 지었다. 부하는 우물쭈물 거리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명령을 지키지 못해 실로 유감이라는 듯 불편하게 서 있었다. 카일은 부러진 골프채를 닦아내고 있었다. 3년이 넘은 골프채는 아델의 피를 먹고 자라고 있었다.
“년인지 놈인지, 붙어먹고 있던데요.”
마침내 부하는 입을 열었고 카일은 활짝 웃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 정도로 웃어보였다. 카일은 골프채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곤 부하의 눈빛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부하는 온몸의 힘이 빨리는 기분이었다. 부하의 기운을 빨아들여 카일의 눈빛은 더욱 총명해졌다.
“몇 살인데 그것 하나 구분 못하나?”
부하는 카일의 지적에 쩔쩔맸다. 카일은 이내 상급자처럼 포근한 미소를 걸고 골프채를 쥐었다.
“그건 내가 확인해보면 알겠지.”
부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카일의 방을 나섰다. 년인지 놈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면 여자보다 아름답고 묘한 중성의 매력이 흐르는 사람일 텐데. 카일은 단번에 리를 떠올렸다. 그 대목에서 불쾌해진 것도, 심장이 떨리는 스스로가 역겨워진 것도 전부 이 때문이었다.
아델에게 명령을 내린지 어느덧 두 달이 흐르고 있었다. 아델은 무엇에 홀린 건지 정신 빠진 상태로 아침마다 그곳으로 출근했다. 주어진 일은 무리 없이 처리했지만 유난히 '그 안건'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카일은 아델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살인이라도 저지른 건지. 아델의 태도가 몹시 수상했지만 인내심 있게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아름다운 의심이 들었다. 아델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제 발로 아델이 찾아왔다. 옆구리엔 카일이 즐겨 마시던 와인을 들고 있었다. 로맨틱한 리본까지 묶은 상태였다. 사죄 혹은 협상을 하러 온 모습이었다. 잘 키운 아델. 카일은 만족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악랄하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샅샅이 캐낼 생각이었다.
“식사 전이신가요?”
“아니, 근데 넌 허기져 보이는군. 힘을 빼고 와서 그런가?”
카일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델은 등골이 서늘했다. 예상했던 태도였다. 끔찍한 재앙이 일어난 것처럼 굴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여전히 카일 앞에 서는 것은 긴장되었다.
“창녀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평생 책임질 거 아니라면. 아랫도리 간수는 말이야, 창녀가 아니라 네가 해야 돼.”
카일은 더 이상 아델을 시험하는 일을 멈추었다. 차라리 이런 태도가 아델을 한결 편하게 만들었다. 아델은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카일은 아델의 정신을 빼놓은 사람이 '여자'임을 스스로 세뇌해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실로 나쁜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아델은 카일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지 초조해졌다.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창녀도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같이 있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환각제 같은 새끼죠.”
사실이었다. 리가 제 호기심을 자극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떨리고 아프고 오락가락하는 순정에 대해선 털어놓을 필요 없었다. 카일은 그것을 받아 줄 자격이 없었고 카일의 명령을 어긴 것은 명백한 제 잘못이었으니 자잘한 변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꽤 설렜다는 말로 들리는데?”
카일은 아델의 손에서 거칠게 와인을 빼앗았다. 아델의 침묵이 이어졌다. 카일의 손에서 경쾌하게 마개가 열렸다. 카일은 아델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든, 지하실 방에 갇히든 진실을 토로하든.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일종의 압박이었다. 카일은 와인병을 쥐고 아델에게 다가섰다. 아델의 입을 벌리고 와인을 쑤셔 넣었다. 아델의 입가와 셔츠가 붉은빛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보랏빛에 가까운 적자줏빛 와인이 흰 셔츠를 가득 뒤덮었다. 약기운과 섞여 단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카일은 골프채로 바닥을 두들겼다.
“지하실에 가야지. 마이 썬.”
아델은 고개를 흔들었다. 두 발이 휘청거렸지만 중심을 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결혼이 하고 싶어졌어요.”
아델은 풀린 눈으로 진실을 토로했다. 카일은 커다랗게 웃었다. 그리곤 아델이 가엽다는 듯 포도주에 젖은 두 뺨을 감싸 안았다
“아이를 갖고 싶어요.”
자신이 리에게 했던 멍청한 말을 아델도 하고 있었다. 창녀 아니, 그 남창은 도대체 어떤 놈일까. 어떤 자식이길래 3년 만에 아델의 정신을 쏙 빼어 놓은 것일까. 카일은 속이 후련함과 동시에 먹먹해졌다. 아델에게 진실을 들었으니 한결 불쾌함은 가라앉았지만 다시 지하실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슬픈 예감일까. 올바른 훈육일까.
“마피아인 나도 그건 어쩌지 못해. 애는 혹이야.”
“아쉽게 됐어, 마이 썬.”
[애는 혹이야, 넌 혹이야. 아델, 넌 죽었어야 해.]
아델은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카일의 사무실이었고 포도주에 흠뻑 젖어 있었는데 어느새 제 몸은 말끔하게 씻겨 있었다. 그리고 카일에게 내뱉은 리에 대한 마음들. 아델은 후회가 밀려와 침대에 엎드렸다. 아델은 몸을 오른쪽으로 뉘었다. 그 순간 느껴지는 타인의 살결. 아델은 귀찮은 듯 총을 들었다. 그리고 제 옆 그림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안녕, 아델.”
애교 섞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아?”
아델은 신경질적으로 총을 내려놓았다. 제 장애를 인식했더라면 아델에게 먼저 이름을 말하는 것이 배려였다.
‘안녕 아델. 이라니.’
아델은 한결같이 배려 없는 유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델은 힘없이 총을 내려놓았다. 얼굴은 낯설었지만 목소리만은 익숙한 여자. 3년 전 지하실에서 나온 후 카일이 소개해준 여자였다.
‘아리카 유우.’
발작 증세를 보이던 날에 카일은 예외 없이 제 방에 그녀를 넣어두곤 했다. 유우와는 아무런 대화 없이 밤을 보내거나 난교 파티를 열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카일은 제 정부를 만들어줄 생각이겠지만, 아델은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카일이 확인하고 싶은 건 '호모가 아닌 아들'이었을 테니까. 이미 증명할 대로 증명했으니 꿀릴 것도 없었다.
“그래. 네가 사람 구별 못하는 등신인 건 알았지.”
유우는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아델은 잠이 깨 예민해진 탓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총을 바닥에 던지고 시트를 끌어당겼다.
카일은 사람 구별 못하는 병신인 자식을 배려해 일본 여자를 넣어 주었다. 다행히도 수많은 미국인 중 일본여자를 구별하는 일은 버겁지 않았다. 그리고 유우 특유의 억양은 첫날부터 뇌리에 박혀 손쉽게 그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기억할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왜 리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건지. 아델은 스스로를 자책해야 했다. 3년 만에 오늘은 쓰라린 밤이 될 것 같았다.
“매일 밤 낯선 여자가 누워있는 기분은 어때?”
유우는 담배를 물었다. 유난히 거슬리는 냄새였다. 유우는 담배 케이스부터 핑크빛으로 도배된 정신 사나운 것들을 사용했고 담배를 쥔 손톱마저 예외는 없었다. 아델은 유우의 일관된 취향에 멀미가 났다.
“발정 난 개 취급하는군.”
매일 밤 낯선 여자라니.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였다. 여자가 제 방에 찾아온 건 3년 만이었으니까.
“아, 남자인가?”
유우는 비아냥거렸다. 아델은 짜증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유우의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창문에 지져 껐다.
“일본으로 돌아가.”
아델의 말에 유우는 입을 비쭉 내밀며 아델의 품을 파고들었다. 가끔씩은 사람의 체온을 나누고 싶을 때 유우를 찾는 편이었다. 오늘 같은 날.
아델은 유우의 가슴팍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아델의 손에 넘쳐흐르는 풍만한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유우는 약속처럼 인위적인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떠오르는 리의 목소리. 아델은 유우의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파고들었다. 유우는 따가운지 아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럴 거면 여자를 만나세요…. 왜 저한테 이러세요.]
“야, 아파”
아델은 욕구 해소가 아닌 화풀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델은 갈증 난 듯 유우의 가슴을 정신없이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가슴팍이 얼얼해진 유우는 참지 못하고 아델의 머리를 떼어 놓았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는데.”
아델은 이를 세우고 유우의 가슴을 핥아내었다. 그리고 리의 빳빳한 가슴팍을 떠올렸다. 건조하고 흉터가 전부인 앙상한 가슴팍. 아델은 리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 유우에게 겹친 몸을 떨어뜨렸다. 유우에게도 리에게도 못할 짓인 것 같았다.
“무슨 날?”
“너한테 연애 상담하는 날.”
‘연애 상담.’
아델은 유우의 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귓불이 붉어지는 아델을 바라보며 유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델은 낮은 목소리로 제게 일어난 감정 변화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유우는 가만히 아델의 머리를 헤집었다. 아델은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매력이 아니더라도 유우의 마음속에 들었던 것은 단연 외모였지만. 한때 유우는 카일을 꼬시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뱀 같은 눈으로 아델의 방에 저를 던져놓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3년이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순수하고도 충격적인 고민 상담. 유우는 '의문의 창부’ 이야기를 꼬박 30분 동안 들어야 했다. 어느새 아델의 눈가가 촉촉해졌고 제 가슴팍에 젖기 시작했다.
“노을이 예쁘다고 전화해봐.”
볼품없는 유우의 솔루션에 아델은 몹시 실망한 눈빛이었다. 무엇이든 척척 내놓을 것 같았던 유우가 흔들리고 있었다.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아델의 셔츠를 걸쳐 입었다. 아델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카일이 널 보냈어?”
“응.”
아델은 진절머리가 났다. 잠자리 마저 카일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카일은 왜 유우를 불렀을까. 아델은 카일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술집 창부 따윈 잊고 평범하게 여자를 만나라는 걸까.
유우는 아델의 몸에 겹쳐왔다.
“햄버거.”
유우는 개구지게 웃었다. 아델은 유우의 웃음에도 한숨을 내쉬며 엎드릴 뿐이었다. 유우는 아델의 볼을 잡아당겼다. 몸의 칼자국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귀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나름대로 카일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아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그날 밤 아델은 불안한 얼굴로 리를 찾아왔다. 새벽을 뒤척이던 리는 아델의 총알 소리를 듣고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델은 리의 손목에 투박한 손짓으로 시계를 채워 주었다. 그리고 한겨울 밤의 도둑처럼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못해. 흰 셔츠에 시계를 차 줘. 그럼 넌 줄 기억할게.”
리는 아델이 걸어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얇은 손목에는 헐거웠다. 아델은 세심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새벽에 찾아올 정도로 로맨틱한 사람인지 아니면 제 정체를 알고 싶은 사람인지. 아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랜만에 내리는 겨울비였다. 창밖은 온통 축축한 냄새들로 가득했다. 거리의 오물 냄새, 우산에 닿는 빗소리, 질척거리는 진흙 소리까지. 오늘의 날씨는 저와 닮았다고, 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리는 침대 위에 올려진 아델의 코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겨우 세 달 만에 아델은 제 물건을 온통 리의 방에 두고 가곤 했다. 시계, 넥타이, 하물며 차키까지.
이래선 마치 동거와 다름없었다. 리는 왠지 죄책감이 들었다. 아델의 물건이 더러운 제 것들과 섞이게 둘 순 없었다. 리는 서둘러 아델의 물품을 옷장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 두었다. 그리고 몇 분 후, 리는 제 선택이 탁월했음을 깨달았다.
쾅쾅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리는 침대로 달려가 귀를 막고 몸을 숨겼다. 교도소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탓인지 리는 불규칙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슬럼가에서 생존하려면 총소리쯤엔 익숙해져야 할 텐데. 리는 나약해진 자신이 서글프기만 했다.
그 순간 이안은 눈물 섞인 얼굴로 리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리는 이안의 육중한 몸에 깔려 허덕거리고 있었다. 이안은 공포심에 절은 눈빛으로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불안한 듯 연신 뒤를 살피는 이안을 진정시켰다. 이안은 쉽사리 진정하기 어려운 듯 어깨를 힘차게 떨어댔다. 그 순간 나무 바닥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신처럼, 바람처럼 걸어 다니는 한 사람. 리는 카일을 떠올렸다. 이안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리는 당최 이안의 암호 같은 신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이안은 커다랗게 입을 벌렸고 리는 이안의 입모양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마.. 피아?”
리는 화들짝 놀라 문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커튼이 잘렸다. 카일은 작은 칼을 들고 커튼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라도 되는 양 인상을 찡그리며 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마피아가 날 말하는 것 같은데?”
카일은 손에 걸리는 커튼을 던져두고 리에게 다가왔다. 3년 만의 재회였다. 겨울이 두 번 지나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믿을 수 없었다. 카일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카일과 대면하는 것은 수많은 악몽 중에 하나였다.
리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눈동자. 리는 어느덧 축축해진 눈가로 카일을 마주했다. 눅눅하고 칙칙한 커튼 잔해 사이로 드러나는 카일의 얼굴. 3년 만이었지만 그는 변한 것 하나 없이 완벽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3년 전보다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천덕꾸러기인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 카일은 자신을 버리고 완벽한 삶을 살았을까.
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카일의 모습은 저를 무참히 감옥에 처넣은 매정한 얼굴이었다. 카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리는 불안한 듯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복역 후 3년이 흐른 날이었다. 그러나 왜 어젯밤 카일과 다투고 재회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설레었다. 반가웠다. 그리고 카일을 안고 싶었다. 어느새 원망과 그리움은 잊히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심장이 뛰어올 뿐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카일은 부하와 이안을 향해 손짓했다. 이안은 벌떡 일어나 리의 방을 빠져나갔다. 낡은 방문이 닫히고 카일과 리는 서로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었다. 리는 카일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듯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이쳤다. 낡은 창틀이 흔들거렸고 리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거지 같은 살림살이. 누추한 제 방안을 들킨 기분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리는 찬바람에 얼굴을 식히고 싶었다.
카일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는 어젯밤 피가 묻은 시트를 빨아놓은 것이 퍽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일의 주변으로 검은 먼지가 피어올랐고 리는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리의 등을 쪼아먹듯 살갗을 파고들었다. 리는 오들오들 떨며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습관처럼 카일은 리에게 제 코트를 건네었다. 리는 그의 애인처럼 코트를 받아들고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가 필요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코트를 어떻게 벗었는지, 이젠 누가 코트를 받아주는지. 리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어떻게 찾아왔냐고 추궁하기도 전,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솔직한 게 죄라면 평생 카일을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일 앞에서 마음을 숨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사랑과 마음은 결코 연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카일은 더더욱 리를 본능적으로 만드는 존재였으므로. 평생토록. 출소한 후 리가 줄곧 기다렸던 사람은 카일이었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카일의 구역이 아닐까 기대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 번쯤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내 아들 건들지 마.”
카일의 목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이 내려앉았다. 커피 잔과 얽힌 손이 덜덜 떨려왔다. 카일이 방문한 이유는 역시 단 한 가지였다. 사랑이 아니라면 전부를 주는 남자였으니. 이번에도 예외일 리가 없었다.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무려 14년이었다. 카일에게 속아 인생을 허비한 시간이. 카일은 한결같이 못되었고 자신은 한결같이 어리숙했다.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 하는 거야? 웃기다.”
리의 목소리를 듣자 카일은 메슥거림이 느껴졌다. 리의 목소리가 심장이 저릿할 만큼 매혹적으로 느껴졌던 이유였다. 솜털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평생 리의 얇은 허리선을 보며 발정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리는 존재 자체만으로 거룩했다.
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을 것 같았다. 목소리도 얼굴도 전부 그대로였다. 장물아비의 곁에서 빼내오던 순간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거릴 뿐이었다.
다만 리의 몸은 닳고 닳아 보였다. 질서 없는 문신과 흉터 자국들이 카일의 조직원들보다 더 엉망이었다.
“웃길 것도 없지. 벌써 3년이나 흘렀으니까.”
카일의 말은 다분히 리를 상처 주기 위한 말이었다. 그리고 제 미련을 떨쳐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3년 만에 본 리를 다시 사랑할 것 같아서.
“오랜만이야…….”
리는 카일의 차가운 뺨에 손을 올렸다. 카일에게 몸을 기대 오기 시작했다. 카일은 리의 공간을 마련하는 듯 침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리는 카일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넣었다. 둘 사이에 익숙한 자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신체가 맞춰지고 있었다. 리는 카일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눈썹부터 눈동자, 목젖까지 리의 손가락이 내려왔다. 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카일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눈동자. 오랜만이었다.
“아델이 그러더군. 창녀보다 더 환각제 같은 자식이 나타났다고. 3년 동안 널 성당에 가둔 보람이 없어. 적어도 난 네가 성인(聖人)일 줄 알았는데.”
카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성당에서의 종소리처럼 리의 귀를 따갑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네 죄를 참회하길 바랐어.”
리는 카일과 몸을 겹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일이 아닌 의미 없는 사물에 시선을 두고 운을 떼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는데요?”
“넌 날 홀리고… 지배하고… 타락시켰지.”
“이제 파멸만 남은 건가요?”
카일은 괴담을 두려워하는 멍청한 남자처럼 굴고 있었다. 결국 사랑은 한다는 걸까. 제 마음도 어쩌지 못해 화살을 돌리는 걸까. 카일의 모호한 말에 리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카일이 처음 뱉는 진실일까. 아니면 제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한 도구일까.
“카일은 아직 죽지 않았잖아.”
카일의 날카로운 턱 선이 천천히 젖혀지기 시작했다. 어젯밤 바라본 아델과 닮은 얼굴. 커튼 사이로 바람이 들이쳤다. 그리고 세상을 젖게 만드는 빗소리가 흘러넘쳤다.
카일의 코트에서 빗물 냄새가 흥건했다. 핏물과 섞여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카일은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리는 귀를 막았다. 카일의 진심은 총알 같았다.
“죽을지도 몰라. 널 사랑해서.”
카일은 고해성사를 마친 후 미련 없이 일어섰다. 리는 두 귀를 막았던 손을 풀었다. 손 틈새로 카일의 고백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짧은 두 문장을 확신할 수 없었다. 카일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감히, 카일이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할 리 없었다. 비슷한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빗소리가 들린 데다, 귀를 막았으니 이건 제 착각이 기인한 환상일 것이다.
“아델에게서 떨어져. 겨우 사람 만들어 놨으니까. 개새끼 하나 못 죽여서 낑낑대는 애가 이젠 총이 없으면 잠도 못 자.”
카일은 제 말소리가 새어나가길 원치 않는다는 듯 창문을 세게 닫았다.
“난 내 아버지를 증오했어. 그런 주제에 결국 그렇게 되고 싶어 했지. 가장 두려웠던 사람이 롤모델이라니. 웃기지 않아? 아델도 날 그렇게 여길 거야. 죽이고 싶겠지. 도망치고 싶겠지. 나와 닮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리의 얼굴에 빗물이 튀겼다. 메마른 커튼이 젖어가고 카일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암흑 같은 오늘날 얼어버리기 좋은 표정이었다.
“아델은 달라. 당신이랑은 달라.”
리는 조소했다. 3년 만에 만나서 카일이 꺼낸 말은 야속하리만큼 잔인했다. 카일의 우려대로 아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카일은 일반인의 범주에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잔혹했고 아델은 순수했다. 약에 취해 자신을 범하였을 뿐 아델은 여전히 순진했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약쟁이가 되어버린 아델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델은 인생 자체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처럼 매일 밤 악몽에 뒤척거렸다. 미안하다, 무섭다를 반복하며 잠을 설쳤다. 카일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3년 전처럼 해맑은 미소를 잃어버렸지만 아델은 카일과 달랐다.
“웃기는 소리. 해저든은 전부 같아. 우리 부자는 너 때문에 망할 테지.”
카일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리는 방을 나서는 카일을 붙잡았다. 카일은 결코 붙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리에게 붙잡힐 만큼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으면서 리의 손길대로 눈을 돌렸다.
리는 마지막인 것처럼 카일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 살짝 꺼진 침대에 카일을 앉혀 두었다. 리는 슬픈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리의 뾰족한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걸렸다. 카일의 심장이 정신 사납게 두근거렸다. 과연 제가 아델을 걱정할 입장일까. 두려운 건 리일까, 제 마음일까.
리는 카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보았다. 카일은 순순히 리의 가슴팍에 안겨왔다. 리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리는 가는 손가락으로 카일의 머리를 헤집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일 때 어렴풋이 보였던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빨간 피가 카일의 머리카락에 번져가고 있었다.
“아파요?”
리는 카일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왼쪽 손을 뻗었다. 서랍장의 약을 찾으려는 듯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카일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리의 왼손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다치면 오래가니까 걱정돼.”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카일은 흐리게 두 눈을 떴다. 제 앞에 있는 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리를 잊은 그 시간에도 리를 잊지 못했었다. 그렇게 착각했을 뿐.
“이렇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
카일은 절규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리의 손목을 놓고 말았다. 얇은 손목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시계. 아델이 제 어미에게 받았던 유품을 걸고 있었다. 지하실에 가둬질 때까지 아델이 지니고 있던 시계. 아델은 목숨과도 같은 시계를 리에게 양도한 것이었다. 카일은 두려웠다. 아델을 볼 때마다 리를 사랑하는 자신의 최후가 그려져서 도망치고 싶었다. 겨우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울고 싶어졌다.
“사랑한다고 하지 마.”
카일은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려 했다. 일평생 사람을 죽인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리였다. 리가 제게 등을 돌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고 그 사랑이 끝났을 때 리의 차가운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다. 리는 카일을 향해 웃었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눈빛은 타오를 만큼 뜨거웠다.
“인정하기로 했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리는 푸념 섞인 진실을 털어놓았다. 리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카일을 사랑할 때도, 버림받아야 할 때도. 리는 언제나 ‘사랑’을 앓고 있었다. 카일은 알고 있었다. 리의 사랑 방식이 때때로 제 숨을 옭아매기도 숨을 불어넣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리의 사랑에 숨이 막혀왔다.
“당신 아들, 아델…. 오지 못하게 막을게.”
카일은 리의 손을 치웠다. 하염없이 툭 떨어지는 리의 손등이 애처로워 보였다. 리의 눈빛은 미아처럼 카일의 발걸음을 쫓았다.
“미안해…. 차라도 마시고 가. 사랑한다고 안 할게. 응?”
카일은 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 보라색 눈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쯤 되니 제 아들의 열렬한 사랑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지 못하는 아델의 장애에 연민이 들었다.
“그래.”
카일의 대답과 함께 리는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카일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소년 같은 남자였다. 카일은 리의 손목을 쥐었다. 천천히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리는 수줍은 듯 눈을 맞추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아델은 널 어미쯤으로 생각하나 보군.”
“뭐?”
리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까짓 카일의 스킨십에 노곤하게 몸이 녹았던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졌다. 카일은 리의 손목 위의 시계를 두들겼다. 어젯밤 아델이 남기고 간 시계였다. 리는 아차 싶어 등 뒤로 손을 숨겼다. 자신에게 준 것이 카일의 죽은 전처의 유품이라니.
카일은 필사적으로 아델이 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어미 대신, 아버지의 첫 사랑쯤으로 기억하길 원했다.
“스무 살의 패기일까? 모성애와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어버릴 줄 어떻게 알았겠어.”
카일은 리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거칠게 시계를 풀어내었다. 리가 제 아들에게 속박되어있는 듯한 느낌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아델과 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자체가 불결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과연 모성애일까요? 아델은 아마 날….”
리는 카일의 턱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각진 턱의 여린 살 부분이 간질거렸다. 카일의 목울대가 움직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짙은 회색빛 눈동자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사랑할걸요?”
카일은 리의 손등을 쳐냈다. 리의 흰 손등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것을 보니 손목이 부러진 것 같기도 했다. 카일은 그제서야 제가 리에게 당했음을 깨달았다. 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일을 농락한 사람치고 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잤어?”
카일은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오물 취급을 받은 리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제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걸까.
“어린 남자가 취향인가 봐. 아무래도.”
카일은 애매한 리의 표현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겨울에 열기가 오르는지 우악스럽게 베스트를 벗었다. 리는 바닥에서 일어나 카일의 셔츠 위를 애무하듯 쓸었다. 리는 손가락으로 카일의 가슴팍을 간지럽히며 히죽 웃었다. 그리곤 리는 갈증이 나는지 담배를 물기 시작했다. 흰 연기를 뿜어내며 카일의 단추를 천천히 벗겨내었다.
카일의 목뒤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한겨울에 찬바람을 쐬고 싶을 만큼 화끈거렸다. 커튼을 닫은 것이 과오로 느껴질 만큼 극도의 흥분을 하고 말았다. 리를 감지할 수 없었다. 예전의 소년 같던 리가 아니었다. 농염해지고 능숙해진 것은 육안으로도 확실한 상태였지만 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복수도 어리광도 아니었다.
“아델은 아파. 병신으로 산지 3년이 넘었지.”
“왜요?”
리는 불안한 듯 대답을 재촉했다.
“널 만나러 간 교도소에서 못 볼 꼴을 본 모양이야. 그날 이후로 눈을 잃었지. 눈이 달려있어도 구실을 못한다는 이야기야. 거울을 보고 제 얼굴조차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더군.”
카일은 거짓말을 태연자약하게 늘어놓았다. 지하실에 갇힌 후 발병된 아델의 증상을 리에게 뒤집어 씌웠다. 먼 훗날 아델이 행복해질 것을 기약하면서. 리는 절망했다.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라고 했던 것도 그 속에 아델의 건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런 아델이 안면인식 장애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 제 탓 같았다. 자신을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순수한 아델이 자신에게 미쳐 칼을 휘두른 것도 전부 제 탓이었다.
“질투에요, 아니면 과보호에요?”
리는 허무한 듯 카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끝에서 얇은 담배가 타고 있었다. 카일은 리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연기를 빨아들였다.
“아델을 잘 키워보고 싶어.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스파이의 역사에 창녀가 빠질 순 없잖아?”
카일은 리의 머리채를 부드럽게 휘어 감았다.
“난 네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럴 리가.”
“넌 우리 기업에 아는 것이 너무 많아. 그런 네가 아델에게 접근하는 거.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카일은 리의 서러운 눈빛에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카일은 이안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눈치챘었지만 이안은 생각보다 더 판을 크게 벌이고 있었다.
카일은 극악무도한 마피아였고 다른 조직과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카일의 눈에 띄다니. 리는 죽을 운명에 처한 이안이 안쓰러웠다. 카일의 방문에 두근거렸던 심장을 잠재우고 이성을 찾아야 할 때였다.
“그래. 앞으로 아델… 못 오게 만들게. 그런데 말이야, 난 어떻게 해야 못 오게 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어.”
리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델을 막는 것은 카일을 향한 제 사랑을 막는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불가능이었다.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손에 쥔 찻잔이 식어갔다. 연분홍색 차 위로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카일은 몸을 일으켰다. 리는 그 순간 카일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당신 이야기 좀 해봐.”
리는 두 번째로 카일을 잡았다. 이번에도 잡힐까. 리는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카일의 등을 바라보았다. 리는 간절한 듯 카일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짧게 손톱이 깎인 손끝 사이로 리의 차가운 살결이 맞닿았다.
“해봐요.”
손끝보다 간지러운 리의 목소리에 카일은 움찔거렸다. 리는 카일의 소매 깃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리와 비교될 수 없는 카일의 힘이 부드럽게 끌려왔다. 리와 연결된 끈이 있는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카일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커튼에 가려져 나뭇잎이 흔들거리는 것 외에 보이질 않았다. 이곳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리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달콤해서 질식할 것 같았다. 끊어내고 싶었다. 지긋지긋하게 설레는 숨결을. 리의 현악기 같은 목소리를.
“일기 쓰는 걸 좋아했다고 했잖아요. 근데 아버지가 검사해서 스페인어를 배웠다고. 그게 생각나요.”
카일은 예술과 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오래된 질병인 것처럼 앓아왔다. 피아노 앞에서 정신없이 연주에 몰두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유년기 땐 발레리나 인형 줄을 하루 종일 당긴 적도 있었다.
그는 아버지 몰래 전시회장 소화기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작품을 감상했다. 주머니에 총을 쥐고 화가의 자서전을 읽는가 하면 침대 속에서 홀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살아있는 짐승을 쏘아도 괜찮았던 소년이 베토벤의 머릿결을 걱정하며 울기도 했다.
전부 카일이 일곱 살 무렵 일어났던 일이었다. 카일은 아버지 몰래 고불고불한 음표와 노랫말을 적곤 했다. 제멋대로 악기를 창조하며 마구간 앞에서 새벽을 지새우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짝사랑, 노루의 눈동자, 새빨간 풍선, 멧돼지의 이빨 같은 소소한 것들을 기록하곤 했다. 한때는 활자 중독이라 여겼고 나이가 흐르고 나니 유서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카일이 스페인어를 배우게 된 것은 아버지에게 일기장을 들킨 날이었다. 처음 카일은 자욱한 지옥불을 보게 되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위로 치솟는 검은 연기. 그 속엔 유서와 노루와 멧돼지… 그리고 끝을 맺지 못한 음표들이 승천했다.
다신 아버지가 볼 수 없도록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피아인 제 아버지는 구역이 아닌 언어는 배척했으니 무엇을 거래할 것도 없는 나라가 안전하다는 것이 카일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낯선 언어로 써 내려가는 글씨들. 그것은 카일의 최후의 일탈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카일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왜 리가 이런 화두를 던지는지 파악해야 했지만 불가능했다. 리는 제게 무엇을 협상하지도 뺏으려 교활을 떨지도 않는 인물이었으니까. 그저 사랑하고 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30년도 더 된 이야기야.”
카일은 리의 이야기를 차단했다. 걱정도 추억 팔이도 감성을 자극하려는 것도 아니라면, 리의 속셈은 무엇인가.
“연극에서 손을 뗐다는 소문을 들었어.”
카일은 핏기 없는 얼굴로 리를 마주했다. 아델을 손에 넣고 포기했던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 감정을 풀어내는 일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뜯어내는 일이 고되게 느껴졌다. 감정노동이 힘겨워졌다. 리를 잃고 아델을 얻은 이후 생긴 취향의 단념이었다.
마음을 대변하는 모든 일이 달갑지 않았다. 제 일기장을 태워버린 아버지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정신을 놓은 날엔 새벽부터 아침까지 음악을 들었다. 방안이 찢어질 만큼 높은 음을 내지르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리 와일러. 리 와일러. 리 와일러. 리의 이름이 낡은 신문에 적혀져 있었다. 그날 이후로 모든 창작활동을 그만두었다. 제 발자취가 남는, 감상이 남는, 평가가 남는, 그리움이 남는 모든 일들을 그만두었다.
“이곳까지 소문이 났나 보군. 전과자인 너도 아는 걸 보니.”
카일은 변변치 않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커튼에 한번 시선을 내던졌다.
‘뛰어내리고 싶군.’
다시 수치심이 몰려왔다. 활자로 남기지 않아도 리의 얼굴에 기억되는 바보 같은 제 얼굴이. 사랑에 빠진 역겨운 소년 같은 얼굴이 기억될 것 같았다.
카일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차갑게 내뱉었다. 리는 카일에게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옷이 바람에 흔들려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 보였다.
“난 카일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해. 당신은 작곡할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이니까.”
카일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린아이에게 충고를 듣는 꼰대처럼 한껏 비아냥거렸다.
“불멸의 연인. 아버지는 제2의 베토벤이었어. 그가 죽고 나서. 아니 내가 그를 죽이고 나서 그의 유서에 적힌 여자들을 찾느라 세상이 떠들썩했지.”
카일은 식어버린 잔을 들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발견된 유서. 제 영혼이 하늘에 분실된 날. 아버지는 남몰래 편지를 써오고 있었다. 이름 모를 여인에게, 어쩌면 남자일지도 모르는 의문의 상대에게. 사랑이 아닌 치욕이었다. 적어도 카일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언젠가는… 내가 죽어도 편지가 발견되겠지. 무엇이 쓰여 있을까. 카일이 사랑하는 여인은 누구일까.”
“…….”
“난리가 날 거야. 이젠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졌어.”
카일은 잔을 내려놓고 리의 턱을 쥐었다. 미약하게 남아있던 열기가 리의 턱을 감싸 안았다. 힘을 주었다. 입술이 벌어지고 붉은 혀가 드러났다. 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통스러운 자극에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렸지만 미소만큼은 화사했다.
포슬거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경쾌하게 카일의 귓가에 떨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리가 미소를 지었다. 농염한 빛깔을 띠었다.
“사랑하는 리.”
하늘로 흩어졌던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리.’
‘사랑하는 리.’
쾌쾌한 냄새, 빨간 연기로 세상이 뒤덮였던 그 순간. 리의 목소리와 함께 연기는 걷어지고 낡은 종이 냄새가 흘러나왔다. 온전하게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아델. 이렇게 적혀 있었으면 좋겠어요.”
카일의 심장이 고요해지길 기다렸다. 리는 조용한 걸음으로 카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더 이상 리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의 영혼이 제게 합쳐진 것처럼. 설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리가 웃었다. 쓰리게 웃었다. 그리고 재가 되어 소각되었던 조각들이 비수가 되어 제 가슴을 찌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할 만큼 내가 편해졌나 보군.”
“농담이 아니니까요.”
리는 멀어지는 카일을 붙잡았다. 서로의 코끝이 스칠 만큼 아슬한 거리였다. 당장 리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영혼을 흡입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기억해야 했다. 반드시. 아버지가 태운 재가 되어버린 제 영혼을.
“유치했나요? 아 맞다. 이름이 적혀있으면 불멸의 연인 자격이 박탈이겠죠.”
스쳤던 콧날이 떨어졌다. 혀가 섞이기 전에 다행이었다. 리는 카일의 셔츠에 걸쳐진 담배를 매끄럽게 뽑아들었다. 길쭉한 리의 손 틈에 아름답게 감기는 사이즈였다.
“그래서 지금 행복해요?”
리의 연기가 피어났다. 영혼이 하늘로 먹힐 차례였다. 그래서였을까. 지독한 장마와 눈을 뜰 수 없는 어둠이 시작된 것은.
“육아에 여념 없지.”
카일은 리의 담배를 넘겨받았다. 차라리 찢길 영혼이라면 제가 받아들이는 편이 옳은 것 같았다. 더 이상 아이처럼 불타오르는 제 일기장을 보며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
리는 카일의 선을 긋는 대답에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리의 콧날이 다가왔다. 까치발을 한껏 들고 카일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작은 동물을 안는 것처럼 귀를 감싸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의 얇은 다리가 위태롭게 떨려왔다. 카일은 책상에 앉았다. 키 차이를 줄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겨우 버텨왔던 리의 다리가 풀렸고 카일에게 가볍게 쓰러졌다.
“나랑 잘래?”
“뭐?”
카일은 리를 바라보았다. 리는 장난기 없이 건조한 눈빛이었다. 다시 시작된, 둘 사이의 깊이를 알리는 무겁지 않은 말들이 떠올랐다.
“왜 고민해?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아델을 구실로 멋없는 거절을 해서일까. 리는 조금 심통이 난 것 같았다. 아니면 서러운 것일까. 한껏 제 마음을 꼬아서 표현하고 있었다. 늘 그의 어리광이 밉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카일은 먹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도록 리의 능숙하지 못한 유혹에 설렌 자신도 허탈했다.
“잔망이 늘었어. 교태도 연륜인가.”
리는 카일의 가슴팍을 짚고 일어섰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줘. 차가운 얼굴로 비웃어줘. 내가 흔들리지 않게.”
능숙한 유혹은 어느새 차가운 회답이 되어 돌아왔다. 단 한순간도 떠올려 본 적 없던 리의 단념.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보라색 눈동자는 매섭게 빛이 났다.
“옷 벗어, 리.”
강압적인 어조였다.
“뭐?”
카일은 농밀하게 웃었다. 낯선 그 눈빛에 두근거렸다. 카일을 그리워했던 3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곤 리를 번쩍 들어 낡은 침대에 눕혔다. 리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실감나지 않았다. 첫 경험 같았다. 적당히 불안하고 설레던 그날처럼. 카일이 달리 보였다. 낯설었다. 분명 하면 안 될 짓임을 알면서도 카일을 보내기 싫었다. 그와 섹스를 하게 된다면 눈물 젖은 얼굴로 매달릴 것이다. 지금처럼 표정관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카일을 놓치기 싫었다.
“벗겨줘?”
카일은 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역시 그를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강압적인 말과 달리 카일은 조심스럽게 옷을 벗겨주었다. 리는 벗기기 수월하도록 살짝 허리를 들었다. 카일은 리의 드로즈까지 전부 벗겨내었다. 카일의 손끝에서 리의 드로즈가 아슬하게 걸쳐졌다. 카일은 드로즈를 쥐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 마…!”
카일은 더욱더 깊이 느끼려는 듯 드로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혀로 살살 핥아내었다. 카일의 혓바닥에 흰 실감이 묻어나왔다. 어느덧 드로즈는 카일의 타액으로 흥건해졌다.
“부끄러워 제발 하지 마…!”
리는 카일의 손에 걸린 드로즈를 던져버렸다. 카일은 항복을 알리는 손을 흔들었다. 리는 쑥스러운 듯 카일의 넥타이를 풀어내었다. 그리곤 넥타이 속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혀로 살살 핥아내며 카일의 체향을 만끽했다. 카일과 같은 얼굴로. 카일은 리를 보며 웃었다. 쓴 향수 맛이 났다.
“아직도 이 향수 쓰네.”
리는 아련하게 웃었다. 카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셔츠를 벗어던지고 리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리는 카일의 복근에 성기를 마찰시켰다. 몇 번의 부딪힘 끝에 리의 성기가 발기했고 카일은 리의 성기를 잽싸게 쥐었다.
“읏…!”
리는 앓는 신음을 흘렸다. 아델이 망가뜨려 놓은 곳이 아직 성치 않았지만 카일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몸이 닿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리는 카일을 끌어안았다. 카일의 재킷이 바닥에 떨어졌다. 전라가 된 리는 카일의 복근에 제 몸을 붙였다.
“안아줘.”
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카일은 끄덕이며 리의 뺨에 볼을 부볐다. 리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살이 더 빠졌네.”
카일은 리의 허리선을 만지작거렸다.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리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아… 살 뺀 거야… 빼고 싶어서…….”
마음 고생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카일을 향한 복수심이 아니었다. 저를 보는 카일의 애틋한 눈빛에 가슴이 사무쳤기 때문이었다. 선한 거짓말이었다.
“당신이… 싫으면 옷 입고 할게….”
카일은 가죽뿐인 제 몸을 안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옷에 손을 대려는 찰나 카일이 리를 와락 안았다.
“리.”
카일은 부드럽게 리를 불렀다. 리는 이미 귓불이 달아오른 얼굴로 카일의 몸을 탐닉했다. 리는 사타구니를 벌리고 카일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앉았다.
카일은 리의 허벅지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미 카일의 앞섶은 부풀어 오른 지 오래였다. 엉덩이로 성기를 비비적거렸다. 바지 위로도 감춰지지 않는 카일의 뜨거운 그것이 느껴졌다. 곧장 폭발할 것 같았다. 리의 허리놀림에 카일이 움찔거렸다. 카일은 리의 성기를 세게 쥐었다.
“아...아파…”
리는 카일의 어깨에 포개지 듯 쓰러졌다. 카일은 리의 요도를 얕게 두들겼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리는 새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리의 귓바퀴가 홍조로 물들었고 카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카일의 손바닥에서 리의 성기가 점차 팽창되고 있었다.
“으읏… 카일… 놔줘…!”
사정감이 몰려오는데 카일은 요도를 틀어막고 웃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건지, 아니면 끝까지 희롱할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해.”
카일의 달큰한 고백과 함께 리는 파정했다. 카일은 리의 기둥을 천천히 놓았다. 흥건해진 요도 끝을 보며 전율했다. 카일의 셔츠는 이미 리가 뿌린 정액으로 엉망이 되었다. 리는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렸다. 사랑해라니. 그 말은 반칙이었다.
“속지 말아야지.”
카일은 땀에 붙은 리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턱 끝을 깨물며 연한 살의 맛을 느끼고 있었다.
“일어나.”
배 위에 뿌려진 액체를 닦아 내기 무섭게 카일이 다시 몸을 겹쳐왔다. 미끌거리는 정액 위로 카일의 탄탄한 복근이 겹쳐졌다.
“안에 싸줘… 응?”
질펀하고 끈끈한 촉감에 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싫어. 그럼 우리가 뭐라도 된 것 같잖아?”
카일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깊이 파고들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리는 카일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카일의 성기를 깊숙이 끌어 당겼다.
“안에 싸줘 제발. 카일의 것을 전부 갖고 싶어.”
리는 처연하게 울었다. 뾰족하게 꺾인 눈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카일은 싸늘하리만큼 차분한 얼굴로 리를 바라보았다.
“싸줘? 뱃속이 망가지도록 싸줘?
리는 끄덕거렸다. 카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리의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카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리의 다리를 벌렸다. 분홍빛으로 물든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리의 콧등을 세게 깨물었다. 카일의 축축한 입술이 콧등에 닿았다.
“부어올랐어. 그만둬도 돼. 아쉬운 건 너일 테니까.”
카일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쉬운 건 리일 테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녹진한 숨소리는 어느새 위협적인 맹수처럼 변해있었다.
아델의 성기가 들어갔던 부근에 생살이 쓸려 있었다. 접합부가 엉망으로 찢어진 듯했다. 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카일을 놓칠 순 없었다.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집착적인 사랑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전부 괜찮아.”
리는 카일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한 번 하면 안 끝낼 거야.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리는 카일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리의 상반신이 카일의 몸에 붙어졌다. 미끌거리는 카일의 복근 위로 제 성기를 비벼대고 있었다.
카일은 리의 턱을 물었다. 리의 입술이 벌어지고 농밀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카일은 그 틈을 타 혀를 넣었다. 리의 혀를 감싸 안고 혀 천장을 훑어내었다.
“흐읏….”
리는 애가 타는 듯 카일의 혀를 졸졸 따라갔다. 리의 눈이 감기는 찰나, 카일은 허리를 뭉근하게 움직였다. 리가 쾌감에 젖은 얼굴로 눈을 감자 카일은 리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고정시켰다.
카일의 거친 허리 짓이 계속되었다. 리의 목을 끌어안고 울대를 간지럽혔다. 리의 흐느끼는 소리가 사방에 흩어졌다
“읏……!”
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위만 막으면 돼?”
리는 필사적으로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속 여린 살을 깨물었다.
“아래는 어떡할 거야?”
구멍 속에 한가득 채워지는 질척거리는 소리, 정액이 흘러넘치는 질펀한 소리. 살덩이가 마찰되는 음란한 소리.
카일의 성기가 제 구멍을 유린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살스러운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몰라… 하아… 으응…!”
카일은 리의 아랫배를 눌렀다. 카일의 성기로 예민한 내장들이 엉망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카일은 본격적으로 리의 위에 올라탔다. 그도 꽤나 흥분한 기색이었다. 피로감에 절여있던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먹잇감을 찾아 집중하는 야생동물 같았다. 카일의 회색 눈동자가 번쩍 빛이 났다.
육중한 몸으로 리를 결박하고 가녀린 목선을 빨아당겼다. 여전히 자국이 남아있는 그곳에 새로운 자국을 덧칠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리의 목덜미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의 아랫배에 성기를 겹치고 제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리는 날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카일의 성기와 맞닿은 제 성기에서 불이 날 듯 달아올랐다. 리는 카일의 귓가에 앓는 소리를 내며 발가락을 오므렸다.
“으.. 윽…!”
카일의 허리 짓이 점차 과격해졌다. 교차된 허벅지 근육이 잔뜩 성나 있었다.
카일은 보다 더 높게 하복부를 쳐올렸다. 리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침대가 흔들릴 만큼 격정적인 허리 짓이 이어졌다.
“하..으읏…………! 히익……!”
리는 괴성을 지르며 온몸을 벌벌 떨어대었다. 카일의 머리카락이 리의 쇄골을 간지럽혔다. 카일은 리의 쇄골 속으로 혀를 넣었다. 마침내 아래가 꽉 들어찼다. 카일은 심장까지 찌르려는 듯 더욱 거칠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천한 환락이 느껴졌다. 더 이상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정신을 놓고 싶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오로지 카일의 몸을 욕정 하는 본능을 제외하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
카일의 녹진한 신음이 흩어졌다.
카일은 흉흉하게 발기된 성기들을 맞잡아 빠르게 마찰시켰다. 리를 일으켜 성기가 달궈지도록 리의 것과 함께 쥐 흔들었다. 어느새 리의 끈끈한 정액이 터져 나왔고 카일은 리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젖꼭지 아래부터 배꼽까지 손으로 훑어내었다. 리의 젖꼭지가 바짝 섰다. 빠르게 움직이며 허리를 튕겨내기 시작했다.
카일은 리의 가슴팍을 빨아당겼다. 혀를 꼿꼿이 세워 바짝 선 유두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돌기를 긁어내며 잘근잘근 깨물었다. 카일의 높은 콧대가 리의 유두에 비벼졌다.
“흣…!”
리는 끊어질 듯한 신음을 흘려대며 카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랫배에는 젖어가는 정액과 카일의 눌린 성기. 카일이 빨아당긴 젖꼭지가 잔뜩 부어올랐다.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한기가 돌았다. 붉은 젖꼭지가 파르르 떨려왔다. 카일은 엄지와 검지로 튕겨내듯 유두를 괴롭혔다.
“하아… 읏…!”
카일은 유륜을 크게 핥아내었다.
리의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카일은 리의 겨드랑이를 핥아내었다. 비로소 카일과 섹스를 하는 실감이 났다.
“간지러워…!”
리는 수치에 물든 얼굴로 허리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극적인 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욕망에 전신이 경련하듯 떨려왔다.
“예뻐 죽겠어.”
리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안 예쁜 곳이 없어. 젠장.”
카일은 욕설과 함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카일은 리의 양손을 한손으로 결박하고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얕은 삽입질에 리는 끊어질 듯한 신음을 내질렀다. 젖꼭지가 가느다랗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카일은 가슴팍을 찢어낼 듯 살결을 물어뜯었다. 그는 이미 인간의 이성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읏…! 그니까… 흣…!”
언어랄 것도 없는 괴상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카일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려대었다. 인간이길 포기하고픈 쾌감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음란하고 잔혹한 충동에 빠져버렸다. 헤어 나오지 못하리라 장담했다. 리는 짐승처럼 카일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카일은 땀에 붙은 리의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리는 카일의 품에서 벗어나 무릎을 질질 끌고 침대 끝으로 기어갔다.
“좋아… 진짜… 너무 좋아서… 나…”
리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카일을 눕혔다. 그리곤 카일과 등지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이내 카일의 얼굴 위로 천천히 앉기 시작했다. 힐끔 뒤를 돌아보며 제 구멍과 카일의 입술이 닿았는지 확인했다. 카일은 리의 엉덩이를 갈랐다. 리는 침대 위에 손을 걸치고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진짜… 나 카일이…. 너무 좋아.”
카일은 리의 구멍 속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카일의 혀가 내벽을 찔러왔다. 리는 허리를 움직였다. 카일의 콧대가 골에 닿았을 때 위치를 맞춰 그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카일은 리의 내벽 속으로 혀를 넣었다. 좀 더 안쪽을 맛보고 싶은 듯 리의 둔부를 찢을 듯 갈랐다. 이제서야 정액이 흘러내리는 내부가 한 눈에 드러났다.
“하….”
리의 허리가 곡선으로 꺾였다. 카일의 허벅지를 짚은 손이 애처롭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허리에 힘을 주고 앉은 탓에 등골이 바짝 긴장되었다. 카일은 더욱 빠른 속도로 리의 구멍을 핥아내었다. 어느새 카일의 성기가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카일의 성기가 무섭도록 흔들리고 있었다. 카일은 리의 구멍을 코로 비비적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리의 허리가 앞으로 쏟아졌고 카일은 리의 둔부 위를 내려쳤다. 리는 마침내 카일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춥춥. 카일은 리가 젖혀진 틈을 타 그의 성기를 한가득 입에 물었다. 서로의 성기를 물어대는 소리가 야살스럽게 울려 퍼졌다. 리는 카일의 무릎을 간신히 짚고 허리를 돌렸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내려쳤다. 구멍 위를 핥아내며 입을 맞추었다. 리는 그대로 맥없이 쏟아졌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촉감에 허리를 사방으로 털어대었다.
리는 카일의 성기를 쥐고 귀두부터 머금었다. 감당하지 못할 사이즈에 입가가 찢어졌다. 리는 카일의 성기를 두 손으로 쥐고 입술로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볼이 옴씬 패였다. 리의 침과 찢어진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피로 카일의 귀두가 젖어갔다. 리는 두 손으로 기둥을 빠르게 돌리며 혀로 흡입했다. 카일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카일은 제 위에 있던 리를 눕히고 위로 올라섰다.
펑펑 소리가 나게 허리를 쳐내기 시작했다.
“으읏…! 좋아…! 나 카일 너무 좋아…!”
리는 카일의 등짝을 미친 듯이 긁어내었다. 성질이 고약한 고양이처럼 얇은 비명을 질러대며 카일을 탐욕했다. 카일은 버둥거리는 리의 한쪽 다리를 쥐어 어깨에 올려두었다. 리의 종아리 근육이 반짝 서 있었다.
카일은 리의 가슴을 쥐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카일의 허리 짓이 격해질수록 리는 카일의 얼굴을 끌어안고 날카로운 교성을 내질렀다. 카일은 리의 손을 쥐었다. 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깍지를 끼고 천천히 몸을 결박시켰다. 리는 카일의 팔뚝을 핥아내었다. 힘줄이 잔뜩 솟아오른 부분에 입을 맞추고 한가득 물어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에 푸른빛의 힘줄을 지닌 카일의 팔이 아름답다 느끼며, 리는 다시 카일의 아랫배에 제 성기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쌀 거 같아…!”
사정감도 소변도 아닌 것이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더 이상 나올 정액이 없는데 요도가 찢어질 만큼 극심한 고통이 들었다. 리는 카일을 밀쳐내었다. 왠지 침대에 실수할 것 같은 끔찍한 망상이 들었다.
“싸도 돼.”
카일은 리의 목에 손을 얹고 허리 짓을 시작했다. 카일의 단단한 복근이 흔들거렸고 리의 허벅지를 잡은 두 자국이 선연했다. 카일은 리의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려 제 복근에 맞닿도록 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삽입을 시작했다.
리는 헐떡거리며 혀를 깨물기도 하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아니, 흐읏..! 진짜 이상해 뱃속이 이상해!”
리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카일은 쉬이, 쉬이. 리를 달래며 성기를 밀어 넣었다.
혀로 배꼽을 쓸더니 가슴팍을 앙 물었다. 카일은 연신 리의 튀어나온 뱃가죽을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웠다. 한 꺼풀도 되지 않는 살을 뚫고 카일의 성기가 찢어 나올 것 같았다. 한계였다. 소변인지 아니면 정액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카일을 밀쳐내었다.
“아니야… 흐윽 그만 그만…!”
“한 번 시작하면 못 끝낸다고 했을 텐데?”
카일은 리의 요도를 부드럽게 쥐고 쓸어내기 시작했다. 카일은 집요하게 귀두를 자극시켰다.
“아…. 아앗……!”
그 순간이었다. 리의 요도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흩뿌려진 액체를 바라보았다. 시트를 흠뻑 적실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리는 얼굴을 가리고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리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려왔다. 리는 커다랗게 울어대며 카일의 어깨를 팡팡 내려치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시트를 바라보며 다시 눈물을 흘려대었다.
“내가… 흐윽… 그만 하자고… 했는데…”
리는 서럽게도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카일은 시트를 걷어내고 리의 성기를 와락 물었다. 리는 화들짝 놀라 카일을 밀쳐내었다.
“이건 무슨 맛일까 궁금해서.”
카일은 입맛을 다시며 기둥에 남은 액체를 핥아먹었다.
카일은 농염하게 웃었다. 리는 젖어버린 시트를 바라보며 카일을 밀쳐내었다. 더 이상 카일의 것을 받을 힘이 남아나질 않았다. 하반신이 분리될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느새 섹스는 몸을 찢을 듯이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접합부가 얼얼하다 못해 더 이상 감각이 없었다.
카일은 리의 고개를 꺾었다. 제 남근이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찢어진 여린 살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미 뱃속은 카일의 정액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리는 고개를 꺾고 카일의 성기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귀두부터 자비 없이 찔러 넣기 시작했다. 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수록 카일은 리의 얼굴을 고정시키고 바라보게 할 뿐이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이미 제 몸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접 보니까 더 흥분되지 않아?”
카일은 리의 성기를 쥐고 빠르게 쓸어내렸다. 더 이상 뿜어낼 게 없는 성기가 차츰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못해요…. 이제… 더 이상….”
리는 휘청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뜨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여긴 아닌 것 같은데? 봐봐.”
카일은 다시 고개를 꺾게 만들었다. 모순적이게도 리의 엉덩이가 습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카일의 것을 집어 삼키려는 듯 움찔거리며 허리를 털어내고 있었다. 리는 카일에게 길들여져 버린 음란한 제 몸이 당황스러웠다.
카일은 녹진하게 머물러 있던 성기를 빼내었다. 울렁. 리는 다시 한 번 헛구역질을 했다. 카일의 성기가 빠져나가자 오히려 휑한 기분이 들었다. 리는 아쉬운 듯 울먹거리며 카일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짚었다. 천천히 카일의 성기를 집어 삼키며 귀두를 밀어 넣으려고 노력했다. 카일은 원망스럽게도 리의 수치스러운 일을 지켜볼 뿐이었다. 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꿈속에 있는 듯 현실감이 무뎌졌고 전등이 흔들거리며 눈이 부실 뿐이었다.
리는 허공에 흩어지도록 고백을 던졌다. 다시 카일의 허리가 움직였다. 그때였다. 리의 기억이 끊긴 것은.
카일은 기절한 리의 골반을 끌어왔다. 이미 이성이 정제된 본능만이 남겨졌다. 카일은 육욕에 찌든 얼굴로 리의 허리를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부어오른 접합부에선 가느다랗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기도 아닌 것이 카일은 무언가에 홀린 듯 텅빈 눈으로 삽입을 시작했다. 리의 신음이 멈춘 고요한 이명만이 들려오는 듯했다. 리는 쌔근쌔근 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에 맞춰 얕은 삽입을 하며 허리를 돌렸다.
“하아…”
카일은 뻐근해진 목을 풀었다. 그리곤 리의 다리를 찢을 듯이 벌렸다. 맹수처럼, 가여운 초식동물을 산채로 먹어치우는 것처럼. 카일은 다시 뜨거운 정액을 싸질렀다. 시트를 흠뻑 적실만한 양이었다. 카일은 아랑곳 않고 제 성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랑해.”
카일은 기절한 리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카일은 리의 입속에 물을 흘려보냈다. 리는 간신히 눈을 뜨고 카일의 품에 안겼다.
“갈 거야?”
리는 정사 후를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끈적이는 몸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리는 카일의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목에선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일은 격정적인 섹스에도 지친 기색 없이 멀끔하기만 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카일은 셔츠를 챙겨 입었다. 이미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리는 일어서려는 카일의 등을 껴안았다.
“같이 있어줘.”
리는 눈물을 뚝뚝 흘려대었다. 이미 마비된 하반신과 정액이 눌어붙은 몸, 땀으로 전신이 적셔졌지만 괜찮았다. 카일을 잡을 수만 있다면 수천 번도 감수할 수 있었다.
카일은 여전히 순진한 리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리는 연륜이 없었다. 리의 한껏 흔들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아서 참 다행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다시 리의 마음을 무참히 밟아 놓았다. 아주 나쁜 사람처럼. 리의 그림자마저 어둠 속에 가둬 놓을 만큼 나쁜 사람이었다.
“너도 흔들리지 마. 다정하게 굴어도 장단 맞추지 마.”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리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액으로 젖은 시트로 몸을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일은 어느새 시계까지 완벽히 착용한 이후였다. 마치 1분 후면 떠날 사람처럼.
“내가 당신 셔츠를 더럽혀놔서… 세탁해줄까요?”
리는 묽은 액체가 튄 카일의 셔츠를 가리켰다. 세탁해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카일이 머물렀으면 했다. 같잖은 구걸이었다.
카일은 묵묵히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받으며 책상에 기대어 있었다. 카일은 손목시계를 두들겼다. 곧 부하들이 올 시간이었다. 리는 시간이 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카일을 눈치채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카일이 걱정되었다. 손끝에 찔린 자국이 사무치도록 슬퍼져서 카일을 보낼 수 없었다.
리는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급히 제 서랍장을 뒤져 연고와 반창고를 챙겼다. 그리고 카일의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쥐여 주었다. 카일은 연고와 리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붉어지는 카일의 두 뺨. 카일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리는 갸우뚱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제 몸을 살피는 카일의 시선에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그 정도 시간은 있어. 할 거면 하던가.”
리는 활짝 웃었다. 카일은 문을 열고 대기하는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리는 카일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서로의 손은 처음보다 많이 험악해져 있었다. 리의 부드러운 손은 어느새 문신과 칼자국이 박혀 울퉁불퉁했다. 카일의 손보다 더. 카일은 리의 손끝을 느꼈다. 여전히 차갑고 뼈의 느낌이 소름 끼쳤다. 그럼에도 달아오른 두 뺨이 식을 줄을 몰랐다.
“요즘은… 이런 거 많이 생겼어요. 물 들어가도 괜찮으니까 떼지 말고…….”
카일은 귀찮다는 핑계로 밴드 따위는 하지 않았다. 총을 잡을 때 끈끈한 접착이 묻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리는 소곤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카일의 손에 말을 걸어왔다. 차가운 손이 뜨거워진 카일의 손등에 닿았다. 따끔거릴 만큼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리고 부하의 두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카일을 보내야 했다. 조금 더 보고 싶은데. 방문까지. 아니 가게 앞까지. 주차장까지.
리는 주자창까지 카일을 따라나섰다. 리는 살짝 떨어져 카일의 차를 바라보았다. 기다림과 또 기다림. 부하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3년의 세월만큼이나 그의 부하와 차는 달라져 있었다. 그 공백에 어떻게 참견할 수 있을까. 그리워할 수도 낯설어할 수도 없었다.
“잘 가.”
리는 손을 흔들었다. 이제 와서 미련이 남을 사이도 아니었다. 미련이 있겠지만 일평생 카일을 기다리겠지만 사랑을 구걸할 용기가 부족했다. 3년이 흘렀고 이젠 카일의 마음을 알았으니 제가 흔드는 것만큼 같잖은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신 못 보겠지만… 난 휴대폰도 없고 집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카일이 찾지 않을 거 알아. 그냥 아쉬워서.”
리는 쓰리게 웃었다. 카일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리가 붙여놓은 반창고를 거칠게 떼어냈다. 리는 바닥에 버려진 반창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차에 올라타는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지막이겠구나.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아델이 오지 못하게 말리는 것만이 제 숙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