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2/10)

Chapter 1 

오늘은 청소부 k의 기일이었다. 그가 죽은 지 꼬박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의 따뜻한 차가 생각나는 건 ‘도망자’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오늘은 또한 리가 도망친 지 보름이 되던 날이었다. 리는 이날 환상적이게 멋진 남자를 만났다. 정확히 끝내주게 완벽한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약기운이 있는데다, 카일에 대한 반항이었다. 

‘카일만이 날 만족시킬 수 있어.’

확신을 무력화시킨 그런 밤이었다. 성당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났다. 도로 위엔 온갖 난잡한 사내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색색깔의 트럭 안에서 조몰락거리고 있는 괴상한 모습들. 리는 하릴없이 자위나 해대는 과일장수의 차를 얻어 탔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위감이 되어준 건 아니었다. 리는 가진 돈이 많았으니까. 다만 쓸 줄 몰랐을 뿐. 그의 씀씀이는 카일만큼이나 헤펐다.

리는 방황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시내에서 멀지 않은 클럽으로 들어섰다. 보라색 간판이 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곳이었다. 게이 바일까. 레즈 바일까. 알게 뭐람. 리는 제 정신을 쏙 빼놓을 수 있는 음악과 조명이 간절했을 뿐이었다. 

리는 천진한 얼굴로 입구에서 음료를 받아먹었다. 그러나 아둔함의 죗값은 환영과 통각이었다. 받아 마신 그 위스키로 인해 클럽 안의 불빛과 사물들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화장실 팻말을 읽기까지 20분이 소요되었다. 팻말은 보라색에서 다시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구불구불한 바닥은 소름 끼칠 만큼 수평을 유지했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복숭아 장수의 체모가 떠오를 만큼.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 없었다. 리는 조소했다. 클럽에서 컵 위를 가려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은 제 부모를 원망했다.

아니면 도망친 저를 보름 동안이나 찾지 않은 카일을 원망해야 했다. 리는 두 눈에 힘겹게 힘을 주고 벽을 짚고 섰다. 흡사 해군 파티 같았다. 위아래로 흰 정장, 그리고 어깨에 빼곡하게 박혀있는 별들까지. 돛대가 새겨진 빳빳한 모자를 쓴 사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왜 민간인인 자신을 보고 갸우뚱거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해군 파티에 약쟁이라니. 그래서 제게 약을 먹였을까. 

도망꾼. 애인 없이 사랑의 도피를 한 패배자. 그 약의 초록 빛깔은 어느새 도마뱀이 되어 리를 공격해왔다. 성당 꼭대기에 악랄하게 올라오는 영리한 존재. 리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겨내었다. 작은 괴물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도록 도망쳤다.

수많은 돛대 중 유난히 빛이 나는 사내가 들어왔다. 말끔한 인상과 달리 불량기 가득한 눈빛. 그 속에 숨길 수 없는 교양. 점잔 떠는 얼굴에도 가릴 수 없는 색기. 꽤나 여럿 마음을 할퀴었을 것처럼 생긴 남자였다. 성숙함이 더해진 탓에 불량스럽게 보이지 않았을 뿐 남자의 기운은 무척이나 삐딱했다. 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남자는 카일과 닮아있었다. 카일이 이곳에 올 리가 없는데, 저를 찾으러 올 리가 없는데. 집시 자식이 제 발로 기어나갔다고 환호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진한 난교 파티를 벌일 수도.

새빨간 조명이 리의 눈을 강타했다. 홍등가처럼. 해군들은 하나둘씩 모자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유유히 모자를 쓰고 있는 한 사람. 민간인일까. 그는 무척이나 의심스럽게도 해군 모자만 쓴 채 검정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포르노처럼, 금방 제 발을 핥을 것처럼. 리는 그를 복종시키고 싶었다. 

남자는 금욕적인 눈빛으로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매끄러운 목선에 튀어나온 목젖. 그것이 무엇을 연상시켰다. 리는 제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창피하게 발기를 하진 않은 듯했다. 따가운 침을 삼켰다. 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화인 듯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외설적인 손동작이었다. 남자는 손으로 무슨 짓이든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는 잘게 몸을 떨었다.

‘아래로 와.’

남자의 수화는 중의적인 의미였다. 어떤 아래? 너의 아래, 아니면 샴페인이 터지고 있는 멍청이들의 파티에?! 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에게 걸어갔다. 공기 중엔 비릿한 정액 냄새와 술이 섞여있었다. 여러 곳에서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척질척 혀가 섞이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북하게 들려왔다.

“흐응.”

‘응’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남자를 보면서, 남자와 눈을 마주치면서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털었을 때 리는 서로가 얽히는 진한 숨결에 집중했다.

“하….”

리는 깊숙한 곳에서 흐느꼈다. 심장 속에 피어나는 한 떨기 꽃처럼. 남자의 숨결을 먹고 자라는 망상처럼.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카일에게 벗어난 후 처음으로. 심장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남자와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짙은 회색의 느긋한 시선처리. 카일이 아니면 누구일까.

“안녕.”

남자의 목소리는 얼굴만큼이나 색정적이었다. 매혹적인 숨소리와 코끝에 닿는 남자의 향수 냄새까지. 관능적이었다. 리는 까치발을 들고 남자의 눈동자를 핥았다. 눈꺼풀 위로 축축한 혀가 닿을 때까지.

“하. 이런 눈알로 누가 웃으래요?”

리는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였다. 미친 소리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게 본능에 충실해지는 빌어먹을 마약의 순기능이었으니까. 남자는 피식 웃었다. 작은 바람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단단히 리의 허리를 고정하고 옆구리 안쪽 살을 간지럽혔다. 

리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곤 남자에게 밀착시켰다.

“술 사줄래요? 싸구려를 얻어먹어서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남자는 ‘기꺼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영국 발음이었다. 스치는 단 한 사람. 리는 잽싸게 머리를 털어버렸다. 남자는 귓불부터 턱 선 아래까지 핥아내었다. 리의 꼿꼿했던 등이 곡선으로 꺾여 들어갔다.

“눈 핥은 벌이야.”

남자는 리의 콧대를 두어 번 두들겼다. 리는 해사하게 웃었다. 카일이 아니라면 전부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날. 이제 보니 세상에 남자는 많았다. 제 욕구를 채워줄, 판타지를 낱낱이 파헤쳐 줄 남자들 또한 무수했다. 이 남자도 오늘 하나의 도구가 되겠지. 리는 푸스스 웃었다. 어차피 카일의 말대로 누가 쑤셔줘도 자지러질 몸일 뿐일 테니.

“……”

남자가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곤 영롱하리만큼 붉은 잔을 내밀었다. 히비스커스. 우습게도 죽은 청소부 K가 타주던 차가 떠올랐다. 새빨간 색소가 소용돌이를 치며 가라앉았다. 시각을 자극했다.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 안에서 소름 끼치게 빨간 액체가 흩어졌다. 리는 남자의 입술을 물어뜯고 싶었다. 잔 속에 담긴 액체만큼이나 빨아 당기고 싶어졌다.

“이런 술 사주는 남자 조심하라고 했는데요?”

카일이 무릎에 앉혀두고 알려주었던 세상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이었다. 제 세상이 된 주제에 카일은 너무도 태평했다. 제 세상을 흔들어놓고, 전부를 가져가 놓고. 두려워할 것을 알려주다니. 카일은 두려움 그 자체였는데.

카일을 떠올리고 나니 남자의 얼굴이 흐릿했다. 남자가 준 술을 들이켜자 눈코입이 뭉그러졌다. 그럼에도 완벽한 비율에 절제된 불량스러움 속 색기가 흘러넘쳤다. 위험하다. 마치 카일처럼. 이제 확신할 수 없었다. 취기가 돌았다. 

“난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남자는 손가락을 구부려 리의 볼을 꼬집었다. 하. 다정한 쓰레기. 이쪽도 카일과 다름없군. 리는 조소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리의 입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관상용 도구일까. 리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카일이 받아주지 않았던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음악소리에 묻힌 목소리가 부디 카일과 닮지 않기를 기도했다. 남자의 넓은 가슴팍 위로 손을 올려두었다. 남자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능숙하고 여유롭고 나른한 얼굴과 달리 촌스럽게 뛰고 있는 심장. 리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마음껏 어린 티를 내며 남자에게 안기고 싶었다. 무정한 엄마와 기억나지 않는 아빠. 그리고 매일 밤 저를 떠나가는 카일을 떠올리며 낯선 남자의 살결에라도 닿고 싶었다. 

“조금? 근데 조심하는 게 더 재밌으니까.”

리는 남자의 품에 쓰러졌다. 기억나는 건 남자가 묵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연신 남자에게 뽀뽀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쪽쪽 소리가 제 귓가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리는 침대에 누워 옷을 벗었다. 찬물을 들이켜고 나니 지끈거리던 두통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샤워를 마친 후 타월 한 장만을 걸치고 리에게 다가왔다. 리는 속이 울렁거린 탓에 머리를 흔들었다. 

‘카일. 카일?’

“카일?”

리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남자는 테이블에 곱게 놓은 넥타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리의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해진 시야. 불안함이 주는 안정감. 카일을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마지막 발악.

“자꾸 다른 남자 이름을 불러서 말이야.”

남자는 리의 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우리 섹스해요.”

리는 카일을 잊기 위해 발악했다. 카일을 사랑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네? 세이프 워드 없이 엉망으로 섹스하는 거예요.”

리는 허망하게 웃었다. 왜 카일이 자꾸 생각날까. 낯선 남자일 뿐인데. 얼굴도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였다. 이미 두 눈이 가려져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상처를 많이 받았나 보군.”

남자는 부드럽게 리를 끌어안았다. 리는 남자의 가슴팍에 입을 맞추며 두 팔을 벌렸다. 하룻밤 보고 말 사이. 이렇게라도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남자는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리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아무것도 따질 여력이 없었다. 리 또한 남자에게 매달려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넥타이로 눈이 가려진 탓에 남자의 코와 턱을 침 범벅으로 만들었지만 마침내 아랫입술에 닿았을 때 이가 닿을 만큼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해. 카일…….”

리는 눈물을 뚝뚝 흘려대었다. 남자의 넥타이가 흥건하게 젖을 만큼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무 사랑해…….”

리는 헐떡거렸다. 남자는 리를 품에 안고 침대에 부드럽게 누웠다. 리의 울음소리가 잦아졌다. 

* * *

익숙한 종소리, 벽난로 속 나무가 죽어가는 소리. 발자국 소리조차 낯선 곳. 제 감옥. 다시 성당이었다. 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익숙하게 손을 뻗었다. 주황빛의 은은한 스탠드를 켜고 ‘하룻밤 사고’를 정리해 보았다. 카일에게서 도망쳤고, 하지만 카일은 잡으러 오지 않았고 클럽에서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 낯선 남자는? 클럽은? 정신이 쏙 빠질 만큼 좋았던 섹스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왜 제가 성당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보름간의 기억이 허상인 건지, 조현병의 초기 증상인 건지. 리는 제게 닥친 현실이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이었다. 주황빛 전등이 소등되었다. 

“헤로인을 먹고도 내 이름을 부르다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카일의 목소리였다. 리는 눈을 비볐다. 카일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미칠 만큼 좋았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중하게 대해주었던 그 낯선 남자가. 카일이 아닌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운명처럼 제 마음을 빼앗은 그 남자가. 카일이었다.

리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카일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깨달았는데. 분명 기적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허무함에 실성한 것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그 해군 모자는 뭐야?”

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보름 만에 찾아와 약에 취한 자신을 조롱하는 걸로도 모자라 연기까지 한 카일. 이젠 더 이상 상처받을 구실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카일은 늘 신선하게 제 마음을 할퀴었다. 

“너한테 약 탄 새끼 머리 자르고 받은 대가지.”

카일은 느긋한 미소로 웃었다. 그 근사한 웃음에 리의 심장 한편이 욱신거렸다. 리는 카일에게 비적비적 걸어갔다.

“왜 보름 만에 날 찾았어?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 집 떠난 개새끼한테도 그렇게는 안 해!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리는 카일의 멱살을 쥐었다. 손목에는 그 어떤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리의 보라색 눈동자는 카일을 향한 분노와 애정이 섞여 혼탁해졌다. 

“가출은 즐거웠어?”

카일은 처절하게 쓰러지는 리를 가뿐히 무시했다.

“카일… 제발!”

접시 깨지는 소리 같았다. 리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는 카일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카일은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리에게 느긋한 웃음을 흘렸다. 

“아들을 찾았어.”

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 이제 날 버릴 건가요?”

리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아니, 네 발로 걸어 나가지 않는 이상 널 버릴 일은 없어. 안심해.”

그 말이 뭐라고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리의 심장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형편없는 외사랑의 연장선이었다. 

* * *

“난 너의 아버지고,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의 명령을 따르는 거야.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다른 얼간이들과는 대우가 다를 테니. 안심해.”

아델이 18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는 몹시 담백한 남자였다. 아델 또한 그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다. 비루한 슬럼가엔 경찰보단 마피아가 필요했다. 혁명가를 꿈꾸지 않았던 아델에게 ‘정의’는 걸리적거리는 감정일 뿐이었다. 그저 마을을 지켜주고 외부 마피아로부터 지켜주면 그만이었다. 마피아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마피아뿐이었다. 

아델이 태어났을 때부터 어미인 제니가 죽을 때까지 카일은 여전한 남자였다. 신뢰를 얻는 마피아, 고전으로 되돌릴 유일한 신. 카일에 대한 평가는 우아했고 고상했으며 그의 앞에서 흐르는 공기라도 붙잡으며 칭송하고 싶을 정도였다.  

경찰보단 B조직을, 정부보단 B조직을. 예술의 혼, 사교장의 꽃은 B조직만이 피울 수 있었다.

[배트맨보다 조커를 좋아합니다.]

아델과 카일의 첫 대화였다. 카일은 직감적으로 피가 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귀여운 아들. 세상의 모든 배트맨을 죽이는 것, 애초에 정의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카일의 삶이었고 아델에게도 나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귀엽네.]

카일의 말에 아델은 붉은 얼굴로 끄덕거렸다. 자신과 닮은 얼굴로 따분하게 표정을 짓는 모습마저도 소문 그대로였다.

카일은 올해 마흔이 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나이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감히 카일의 얼굴을 마주하며 근황을 묻는 것만큼이나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짙은 눈썹에 반항기 서린 눈동자. 얼핏 보면 초점이 불명확해 보이지만, 그 속에 가득한 맹수 같은 느낌은 그가 마피아임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회색의 눈동자. 조금은 섬뜩할 수도 있는 아주 정교하고 투명한 색이었다. 애연가답지 않게 총명한 눈동자였다. ‘웃음 선’. 누군가는 볼이 패인 카일을 보며 그렇게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깊게 웃을 때면 진한 눈빛은 조화로울 만큼 깊이감을 더해주었다. 높은 콧대와 어울리는 다부진 턱 선까지. 온몸에 피를 휘감으며 진한 비린내를 풍겨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델은 카일의 늦은 아들이었다. 십팔 년 만에 찾은 사생아. 아델은 그동안 자신을 아비 없이 태어난 달팽이쯤으로 치부했었다. ‘아버지’라는 것은 판타지 속에서나 나오는 기이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러나 카일의 회색 눈동자, 각진 턱 선 그리고 부드러운 흑발의 머리칼까지. 카일을 설명할 모든 단서는 아델에게 녹아있었다. 다만 카일의 미세한 주름과 살기 어린 눈동자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소년에겐 없었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아델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카일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였다. 비가 오는 날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시체를 처리하는 일. 그것은 19년 만에 찾은 가정사였다. 그리고 평생 맡아야 할 본분이었다. 

[말썽쟁이들을 혼내주러 가는 거야.]

카일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난이도 A급의 명령이 아닌 아버지와의 따뜻한 주말 나들이쯤으로 포장하곤 했다. 

카일은 도시 B를 주름잡고 있는 사업가이자 예술가, 무역업자라 일컬어지는 지주였다. 다들 그렇게 말하곤 했다. 카일은 그 누구도 자신을 ‘마피아’라고 칭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치욕이었다. 

사교장, 파티장으로 둔갑한 거대한 마약 시장은 그 속에 정신을 잃고 빠질 만한 향락거리가 필요했다. 매년 수천 명의 노예가 재롱을 부리는 연극과, 서커스까지 전부. 아주 고전적인 눈요깃거리는 상류층의 입맛에 제격이었다. 

카일은 B조직의 우두머리였지만 그러한 부끄러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턱 선을 따라 진하게 파인 미소를 지으며 ‘예술일 뿐이야.’라고 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착취하는 일, 연좌제를 부여하는 일은 단지 예술일 뿐이었다. 예닐곱도 되지 않는 소녀와 소년을 잡아 연극에 올렸다. 최근 아시아 지역으로 서커스단을 유통하는 것도 두둑한 수익이었다. 카일은 예술을 사랑했고, 발정했다. 20년 동안 그의 취미는 꽤나 고상했다.

그런 카일과 어울리지 않게, 아델의 어머니는 해맑은 여자였다. 그래서 정신이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아델은 생각했다. 정신 나간 해맑음. 카일과 어울리지 않는 여자임은 확실해 보였다.  

아델의 어머니는 흰머리가 지긋한 여자였다. 그것은 약물 중독과 항암치료가 만들어낸 끔찍한 작품이었다. 절대 만나선 안 될 두 가지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델과 카일. 둘은 항암제와 마약 같았다. 카일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아델을 만나선 안 되었구나.]

카일은 그녀를 버렸다. 카일이 버린 여자의 수를 세는 건 심해에 가라앉은 시체를 세는 일보다 부질없었다. 카일은 무언가를 버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런 카일이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은 정정당당하게 재산을 몰수하기 위함이었다. 

[당신 아들. 아, 나의 아들이기도 하지. 꽤 쓸 만한 물건이라고 하던데.]

아델은 18년 만에 아버지와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카일은 아델의 어머니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팔에 울긋불긋한 링거를 매달고 끄덕거렸다. 링거는 그녀의 삶과는 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물건이었다. 슬럼가의 마담이 하얀 침대에 누워 고상한 카디건을 입고 링거를 맞는다는 것은 그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카일만이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노릇 좀 할까 하는데. 제니는 어떻게 생각해? 이미 죽을 목숨이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나?]

여자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창문 밖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창문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눈을 떠요. 당신의 앞에 환희가 비칠 겁니다.’

제니의 열여덟 첫 연극 속 대사였다. 카일은 검은색 기미가 가득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 * *

스무 살 때부터 소년들을 잡아 연극 연습을 시키고 무대에 올려온 남자, 카일. 팔려왔다는 괴담이 자자했지만 연습실로 가면 열정에 넘쳐 눈이 반짝거리는 아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뇌가 중요한 거야. 몸보단 정신이지. 이걸 먼저 지배하면 모든 것은 쉬워져. 아주 간단한 원리야.”

카일은 커다란 유리창 안에 다리가 찢어질 듯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소년을 향해 턱짓을 했다. 아델은 그의 냉정한 말투와 상반된 타오르는 눈빛에 한기가 들었다. 아델은 카일의 명령,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다소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델은 연습실 관리와 대본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이것은 마치 지루한 동아리 시간을 보내는 듯 평화로워서 절로 하품이 나오곤 했다. 

예술에 발정하는 남자라더니 소문처럼 카일은 한결같이 취해 있었다. 이른 아침에 방에서 흘러나오는 침식 -카일의 트랙 1번이었다- 을 커피가 식을 때까지 재생시켰다. 포마드의 스타일이 단정하다 못해 냉철해 보였다.

아델은 도무지 카일이 흐트러진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베스트부터 더블 단추로 이루어진 가장 불편한 슈트를 입고 장갑까지 착용했다. 검은색 가죽 장갑. 그가 다가올 때 피비린내에 섞인 진한 향수 냄새, 그리고 씁쓸한 약 냄새가 났다. 대부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한기였다. 그의 영혼이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아델은 카일이 시체처럼 느껴졌다. 

“리께서. 또 일을 치셨답니다.” 

아시아인, 유럽인으로 이루어진 카일의 비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불편한 자세로 서있던 아델은 신문에 얼굴을 고정하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식사에 초대한 카일의 의도와 직결된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그의 수행비서 한 명이 사라졌고 그 자리는 아델의 차지였다. 수행비서들은 의문 섞인 얼굴과 조금의 불쾌감, 카일의 아들이라는 선망이 섞인 역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께서.’ 

그것은 무언가 이상한 단어였다. 

‘리?’

아델은 성별조차 감이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께서’라는 경어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합치면 굉장히 어색한 낱말이었다. 

카일은 아시아인의 보고를 들으며 식은 커피잔을 입술에 대었다. 카일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무심히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내 아들이야.”

짧은 한 문장에 ‘동급’, ‘무조건 적인 충성’과 ‘복종’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비서들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B조직은 야쿠자, 사무라이 집단이 몸담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동양식 예절은 눈에 띄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게이샤는 별로라는 카일의 지루한 하품 이후로 일본인은 소멸되었다. 

아델은 코트를 쥐고 방을 나서는 카일에게 인사를 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델은 카일의 지시대로 아시아인을 따라 나섰다. 그의 이름은 ‘킴’이었다. 

“아시아인은 전부 킴입니까?” 

아델은 아시아인의 단조로운 이름에 의문이 들었다.

킴은 카일을 대할 때처럼 정중한 웃음을 지으며 ‘전부 그렇지는 않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킴은 손수 차 문까지 열어주었다. 

“중국인 아니고, 일본인 아니고, 북한인 아니고 한국인입니다.”

킴은 짹짹거리는 작은 새처럼 말했다. 아델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지시한 첫 번째 미션을 수행할 장소에 도착한 듯했다. 단아하고 단정한 성당 디자인과는 맞지 않은 광활하게 뻗어 있는 정원을 가진 곳이었다. 그곳의 성당 풍경은 미적 영역의 통일성을 해치는 그런 것이었다. 

꼭대기 층에 작은 인영이 스쳐갔다. 

검은색 머리에 하얀 얼굴. 킴이 문을 열 때까지 보이는 단서는 그것이 전부였다. 남잔지 여잔지 모르는 존재는 킴과 아델을 확인하곤 고개를 휙 돌렸다. 

“어딜 가는 겁니까?” 

“여긴 어딥니까.” 

차 안에서 물어왔던 질문에 킴은 어색한 미소를 걸고 웃기만 했다. 잔디밭에 차를 부드럽게 주차한 킴은 작은 목소리로 

“카일의 숨겨둔 애인. 뭐 그런 거예요. 이상하겠지만 적응될 거예요.” 

라고 말했다. 

“중년의 불장난 같은 거죠.”

킴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가볍게 긁었다.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인 듯했다. 아무래도 보스의 사생활을 떠벌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 천년의 로맨스를 설명하며 흥분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았다. 

“이제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릴게요. 일단 창문을 열어 주시고, 총이나 칼 같은 거 전부 치워주세요. 건방진 리가 언제 난리를 피울지 모르니까요. 어디서 그렇게 가지고 오는지 모르겠어요. 이곳을 나갈 수가 없는데 참 희한한 일이죠. 그래서 샤를이 잘린 겁니다. 물론 일자리가 아니라 목이요.” 

킴은 트렁크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꺼냈다. ‘흡.’ 그의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델은 한 손으로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킴은 작게 손뼉을 치며 아델을 따라갔다. 

“어딘지 알고 가요?”

“머리통이 보여서요.”

“아버지는 소아성애인가요?”

꼭대기 층에서 보았던 인영은 작은 아이, 혹은 마른 여자로 느껴졌다. 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이해하실 건가요?”

킴은 짓궂은 편이었다. 아델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킴을 바라보았다.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인가요? 그건 범죄 아닙니까?”

킴은 제 장난이 통하지 않았다는 듯 입술을 비쭉거렸다. 이내 킴은 아델을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소아성애자’보다 강력한 것을 담고 있었다. 아델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제 뺨에 느껴지는 작은 물방울도. 

아델은 습관적으로 손바닥 우산을 만들었지만 이곳은 B구역이었다. 비가 내릴 일은 없었다. 항구의 축축한 냄새가 불어왔지만, 어머니가 떠올랐지만, 아델은 침을 쓰게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버지의 애인’

킴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맴돌았다.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덮쳐오는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어느새 먹구름 낀 하늘이 축축해졌다. 안개에 뒤덮인 정원이 아득했다.  

* * *

“또! 또 카일이 안 왔어. 열흘이 지났는데도 날 보러 안 왔어!”

킴은 커다란 문을 열었다. 작은 인기척에 빼꼼. 보라색 눈동자가 킴을 쫓았고 이내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던지기 시작했다. 

아델이 벽난로에 몸을 데우기도 전에 남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정 머리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 아마 남자인 것 같았다. 그의 성별은 알았고, 이제 그의 슬픈 사연을 알 차례였다. 

남자는 킴의 어깨를 흔들며 애절하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카일이… 카일이…….”

그러다가 단호한 킴의 얼굴을 할퀼 듯이 내리쳤다. 분명 분노를 가득 실은 몸짓이었지만 피골이 상접한 남자의 몸집은 너무도 하찮게 느껴졌다. 아델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의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감상했다. 남자는 멀리서도 둥둥 떠다닐 만큼 창백한 낯빛이었다. 

뾰족하게 각이 져있는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체구였다. 킴의 얼굴이 돌아가게 내리치는 순간에도 손가락에 올라온 뼈가 선명해 소름이 끼쳤다. 아델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스무 살 초반. 그것도 아니면 아직 제 또래일 것 같았다. 그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아마 나이대가 조금은 있어 보였다. 그것은 중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어른’인 것에 대한 확신이었다. 

남자는 킴을 내리친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킴의 엉망인 얼굴만큼이나 남자의 얼굴도 할퀴어져 있었다. 

남자는 새끼 고양이처럼 팔꿈치를 오므리고 얼굴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킴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카일이 서커스를 감상하는 것처럼. 아델과 킴 앞에서 벌어지는 발칙한 고양이 쇼 같았다. 

‘스스로가 할퀴는 것인가.’

남자의 손등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킴이 그에게 상자를 내민 이후로 아델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약중독자’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킴은 얼굴을 매만지며 그에게 상자를 든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지친 기색으로 작은 상자를 파헤쳤다.

“나는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남자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동시에 남자의 목덜미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마 ‘카일’에게 받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듯 수줍게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상자 또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아델은 남자가 던져버린 상자를 주워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주었다. 

아델은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킴은 멀뚱히 서있는 아델에게 귓속말을 했다. 

“리 와일러.”

아델은 끄덕거렸다. 만약, 제 어미가 듣는다면 ‘싸구려 남창’이라고 할법한 이름이었다. 아델은 리의 이름을 소중히 발음해 보았다. 

“리….”

‘리….’

‘리….’

숨결이 가빠지고 있었다. 심장이 오르락내리락. 제 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왔다. 아델은 셔츠 위로 솟아오른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리는 마네킹처럼 묵묵히 서있는 아델을 바라보았다. 건조한 눈빛으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진득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리의 보라색 눈동자가 아델의 가슴팍에 닿았다. 아델은 화살에 찔린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마네킹 같던 아델의 동요에 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델의 귓바퀴에 리의 푸스스한 웃음이 닿았다. 그리고 방금 전 그처럼 아델의 창백한 목덜미가 데일 듯이 달아올랐다. 

아델은 홀린 것처럼 리를 바라보았다.

이 감정은 마치 체육관에서 선생 몰래 마약을 했을 때와 같은 짜릿함이었다. 관음 혹은 관음의 대상이 되는 것.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불안감과 전이되는 황홀함, 짜릿함이 섞여 마약보다 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리는 선생이었을까. 마약이었을까. 아델은 근육이 마비될 것처럼 떨고 있었다. 

리는 아델의 움직임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어떤 머저리가 들어온 걸까?’

리는 며칠 전 카일을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는 화풀이로 그의 부하에게 총을 쐈다. 

[사모님 이건 구멍을 막으면 나가지 못하는 총입니다.]

남자는 이죽거렸고, 리는 총이 아닌 화병을 남자의 머리에 내려쳤다.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리는 머리가 찢어진 남자의 손을 잡아채 제 중심에 올려 두었다. 물컹한 것이 잡히자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리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창부 취급하는 카일의 부하들이. 남성이었고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칭하는 ‘미세스’라는 호칭은 꽤나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다. 영혼을 갉아먹을 만큼 모욕적이었다. 

멍청한 부하들 중 킴의 차별성은 ‘눈치’였다. 킴은 조금의 예우를 갖춘다는 점에서 화병까지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리는 킴의 뒤에 멀찍이 서있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카일과 닮았네.’

회색 눈알에 넓은 어깨, 전등에 닿을 듯한 큰 키까지. 그를 찬찬히 훑어보자 카일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리는 소파에 누워 와인을 홀짝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잡은 탓에 와인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카일 젊을 때 같아.’ 

리는 목선을 타고 흐르는 와인을 닦아내었다. 흰 얼굴에 보랏빛 와인이 번져가고 있었다. 

아델은 리의 몸짓이 마치 부화하는 애벌레 같다고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 번데기를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리는 세포까지 나른해 보였다. 시체 같은 리가 멍하니 앉아있을 때면 죽은 것 같은 끔찍함이 들어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리는 천천히 슬리퍼를 벗어 두고 소파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카일이… 안 오니까…….” 

리는 킴에게 손짓을 했다.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리의 눈알은 보라색이었다. 아델은 세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리의 눈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슬럼가의 혼혈은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그러나 이런 색은 처음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저택에 리 홀로 빛이 났다. 아델은 그를 잡고 눈을 더욱 가까이 맞추고 싶었다. 리는 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장이라도 발톱을 세워 달려들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 미안…….” 

리가 예의를 차리고 말을 할 때면 훌쩍 연배가 높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냥 소년 같던 리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작은 방안을 채우는 얕은 숨소리는 파도 소리처럼 나긋나긋했다. 

아델은 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항구를 떠올렸다. 리의 목소리는 잔잔한 바닷소리 같았다.

“뒤에는 누구야?” 

리는 소파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보라색 고양이. 하얀 얼굴은 그루밍을 하고 있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아델은 완전히 그의 시야를 가렸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동자를 훔쳐보았다. 

“이게 신기해?” 

리는 메이드에게 받은 새로운 유리잔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아델은 찰나의 새초롬한 리의 표정을 훔쳐보다 얼굴이 붉어졌다. 리는 보라색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다들 신기하다고 하더라. 카일도.”

그제서야 아델은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것은 미션이었다. 미션을 준 것은 아버지의 18년 만의 돌봄인 셈이었다. 그러나 아델은 본분을 망각하고 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남자를, 불장난의 연료를 탐닉하고 있었다. 

‘카일’ 

리의 입술로 카일을 발음할 때 아델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만약 리가 성까지 발음해 준다면. 아비와 같은 성을 발음해 준다면 환상적일 것 같았다. 

‘해저든’

아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차가운 제 손으로 볼을 감싸 화상을 입을 듯 뜨거워진 볼을 가려야 했다.

킴은 상자 속에 담긴 약들을 서랍장에 정리하기 분주했다. 

“삼십 분 후면 나갈 수 있어요. 그때까지만 참아요.”

킴은 아델에게 윙크를 했다. 주어진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왜, 아쉬울까. 아델은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더러워도 견뎌요.’라고 말하는 듯 킴의 얼굴은 단숨에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킴의 염려와 달리 아델은 리를 더 보고 싶었다. 

아델은 불안함이 들었다. 리의 눈동자를 감상할 시간이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회색기가 섞인 머리카락과 얇은 셔츠 사이로 비치는 문신들이 궁금했다. 아델은 호기심에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리를 쫓았다. 수줍은 소년처럼 볼을 매만지다가도 단숨에 욕정을 담은 광기가 나오곤 했다.

“넌 이름이 뭐야?” 

“아델입니다.” 

아델은 리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리는 인위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머리통이 흔들리며 맥을 못 추었다. 이렇게 머리를 떨굴 때면 몇 번을 중심을 잡지 못해 해롱거리는 것은 별다른 증상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마약 중독자. 

“아델.. 아델. 꼭 여자 이름 같잖아? 사모님 소리 듣는 나나, 너나. 우리는 불쌍해.” 

그대로 리는 소파 위로 쓰러졌다. 킴은 와인 잔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며 손짓을 했다. 

“이제 나가요.” 

킴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 * *

“무슨 일을 하는 남자입니까?” 

아델은 창문 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꺾인 나뭇가지, 고인 빗물들, 썩어버린 벤치. 무엇 하나 요기할 것조차 없음에도 킴을 마주 보는 일보단 괜찮았다. 킴을 멀리하고 싶던 건, 리를 등지고 웃던 모습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하는 일은 없을 걸요? 가끔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카일이랑 취미는 비슷하죠.”

“참, 이런 거 보면 취미가 중요해요. 그거 아니면 카일이 그 자식이랑 말이나 섞겠어요?” 

아델은 카일을 떠올렸다. 연극 구상과, 캐스팅 전부 비서들의 일이었고, 카일은 오로지 삽입곡과 대본에만 집중했다. 카일은 오로지 감정노동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리는, 감정을 죽이기 위해 마약을 하는 남자로 보였다. 

보랏빛의 리와 카일. 

아델은 둘 사이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사람. 사모님이라 칭하는 것을 무척 수치스러워하던 리. 그의 설움이 잊히질 않았다. 아델은 마지막 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아델이 다녀간 후 리는 정확히 6시간 후에 눈을 떴다. 

[약효가 반나절이에요. 비싼 거니까 아껴 쓰라고요.]

리는 귓가에 킴의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작은 새 같은 자식, 포크로 날개를 찢어 발라 먹고 싶었다. 

“지금 내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거야? 재밌네.”

리는 커터 칼로 소파 안쪽을 뜯었다. 그리곤 몇 개의 알약을 꺼내 입속에 넣었다. 킴이 통제할 수 있는 건 칼이 전부였다. 리의 광기와 도둑질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약효가 돌았다. 리는 휘청거리며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이내 불안한 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불안에 대한 생각들이 비로소 잠잠해질 때면 코끝이 매워왔다. 

결국 망상의 끝은 카일이었고 지저분하게 남는 잔상 또한 카일이었다. 달콤했다. 카일의 이름을 부르고 눈을 감는 일은. 

달콤한 것들의 끝은 결국 파멸이었다. 아름다움과 소멸을 뗄 수 없는 것처럼. 

리는 담요를 코끝까지 끌어당겼다. 몸을 가리는 일은 리의 오랜 트라우마였다. 언제는 약에 취해 눈을 떠보니 두 팔이 침대 헤드에 묶여 있었던 적도 있었다. 

[리허설이야, 아가야.]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리를 차례로 덮쳐왔다. 입을 막고 몸속을 헤집으며 치던 장난들이 온몸에 선명했다. 강간과 다름없는 리허설은 몸이 기억하는 흉터였다. 리는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어 스스로 역류하고 있는 정신병이었다. 리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카일이 보고 싶어.” 

리는 앓는 소리를 냈다. 담요를 젖히고 침대에 쓰러졌다. 아름다운 카일은 제 안에서 소멸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카일이 죽어버린다면. 죽은 카일을 그리워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고독을 씹는 리의 외사랑은 언제나 처참했다.

카일은 리를 열여덟에 데려왔다. 천막을 치고 장물아비를 하던 어미. 빛 한 점조차 보지 못하고 리는 이 세상에 버려졌다. 마치 볼일처럼, 며칠 묵은 집안일처럼 그렇게 리는 태어났다. 

헝겊을 싸매고 쥐꼬리를 물어뜯으며 컸던 리에게 카일은 세상에 빛이 아닐 수 없었다. 카일은 장물아비인 어미에게 시계를 넘겼다. 일 킬로도 되지 않아 보이는 것이 이렇게나 큰 가치가 있다니. 천막 뒤에 숨어 카일을 훔쳐보던 리는 그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시계를 향해 달려갔다. 방금까지 전등 아래 빛이 나고 있던 시계는 종적을 감추었고, 리는 두리번거리다 식탁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커다란 손으로 리를 끌어낸 가드는 그의 윗옷부터 양말까지 벗겨 시계를 찾았다. 리는 가드의 오른 손에 매달려 피투성이가 된 채 흔들거렸다.

마침내 리가 맥없이 고개를 떨궜을 때, 짤랑거리는 종 소리와 함께 카일이 등장했다. 담배냄새와 섞인 찬바람이 리의 뺨을 감싸 안았다. 리는 홀린 듯이 눈을 떴다. 싸구려 종, 매일 벌레가 갇히는 오물 덩어리는 한 순간에 구원의 소리가 되었다. 예수의 부름이었고 마리아의 노래였다. 리는 그날 기적을 보았다. 

[가짜를 도둑맞아도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카일은 가드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두 눈이 부어올라 앞을 볼 수 없던 리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향수 냄새와 피 냄새가 흥건한 검은색 코트.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종소리. 카일은 리에게 창조 그 자체였다. 

* * *

리는 카펫 위로 신발을 벗어던졌다. 침대 헤드로 기어가 서랍 안을 뒤졌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잡히는 총을 카일의 머리 위에 겨누었다. 카일의 젖은 머리에서 익숙한 샴푸 냄새가 흘렀다. 이 주 만이었다. 리는 그의 허리 위로 올라탔다.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일부러 서랍장을 소리 나게 마찰시켰다. 쾅. 고요한 성당 속으로 불성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리는 서랍장에 손을 넣고 내려치기 시작했다. 영양가 없던 손톱이 부러지고 손끝에 가시가 박혀오기 시작했다. 리는 카일과 함께했던 밤을 떠올렸다. 

리는 이 주 만에야 나타난 야속한 남자의 이마에 총을 다시 짓눌렀다. 소름 끼치는 선율을 들으며 그의 머리 위에 힘을 주었다. 

‘이것도 하나의 곡이 되기를. 만약, 카일을 죽일 수만 있다면….’

리는 카일과 함께했던 세월이 그려졌다. ‘노래는 추억을 파는 거지.’ 카일이 언젠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는 카일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카일을 떠올렸다. 

남색의 시트가 걷어졌다. 카일은 리의 앙상한 손목을 잡았다. 카일의 한 손에 들어오는 얇은 두 손이 가증스러웠다. 

‘우습군.’

카일은 리의 처량한 몸을 훑었다. 

“죽어버린 줄 알았어.” 

리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마에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에 카일은 같잖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리는 카일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피아였으니까. 죽어도, 죽지 않아도 이상할 리 없는 직업이었다. 

십년 전 카일은 리를 씻기고 입히고 온기를 나눴다. 그것이 카일의 일상이었다. 리는 카일에게서 매번 창백한 피 냄새를 맡았다. 

‘오늘 하루도 카일이 무사하게 해주세요.’ 

‘일 년만 카일이 무사하게 해주세요.’ 

그의 기도는 ‘카일이 죽게 해주세요.’로 바뀌었다. 

카일과 섹스를 할 때면 이름 없는 망자들과 몸을 섞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리는 카일을 걱정했다. 매일 뉴스를 찾아보고 흐린 눈으로 기사까지 정독해야 했다. ‘카일 해저든 사망.’ 단어를 찾아다녔다. 

하루가 저물어 가도록 카일의 이름을 사냥했다. 매일 밤 몸을 주고 떠나는 남자였다. 카일과 맞는 새벽은 종말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게 이거라고 생각해?]

새벽을 뒤척이던 리는 카일의 허리를 껴안았다. 깍지를 끼고 그의 허리를 둘러 얼굴을 파묻었다. 카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작 이분의 시간이었다. 리를 재촉하듯 자동차 불빛이 커튼에 번져갔다. 번쩍거리는 불빛은 둘 사이를 방해하는 조용한 장애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을 보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선량한 비서가 고생 좀 하겠지.]

카일은 재를 털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카일은 죽지 않았고 리에게 새로운 상처를 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도가 간절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유감이야. 리.”

“…….”

“아쉽게도. 쏠 거야, 리? 장소를 옮길까? 창문으로 떨어질게. 그때 쏴. 한때 동경했던 작품이 있어. 그 속의 환상을 실현해 보고 싶었는데. 전부 너에게 달렸으니까.”

카일이 즐겨보던 작품이었다. 열꽃. 그것은 카일이 함부로 붙인 이름이었다. 작품 속 남자는 자살이었고, 카일을 쏜다면 그것은 타살이었다. 이렇게 그의 심장을 날려버린다면.

“어떨 것 같은데?” 

리는 카일과 눈을 맞췄다. 카일의 턱 아래에 총구를 겨누고 달칵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총알은 겨우 세 개뿐이었다. 카일이 피해도 한 번 정도는 맞힐 확률이었다. 

“너는 변덕스러워. 장담하지 못하겠군.” 

카일은 두 손을 움직였다. 리는 더욱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쫓았고, 카일은 두 손을 머리맡에 두고 리의 행동을 감상했다. 

“예술작품 감상하듯 그런 표정은 삼가줘.”

리는 협박에 가까운 부탁을 뱉었지만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멀쩡히 살아 있었네? 이렇게 두 다리도 튼튼하고 말이야.” 

리는 분노가 들끓었다. 십 년째 이어온 그와의 밀회는 몸서리치게 외로웠다. 외로움은 어느새 스스로를 파괴할 만큼 자라버렸다. 암세포처럼. 제 몸을 들끓게 하는 카일에 대한 간절함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리는 카일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리쳤다. 원망 섞인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당신 이제 늙었어.” 

그렇게 말하던 리의 심술에도 불구하고 카일은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얼굴이었다. 

“수은이라도 먹는 거야?” 

리는 늙지 않는 카일이 수상했다. 저를 납치해온 그 순간부터 잠자리에서 조금 짓궂어졌을 뿐 매끄러운 얼굴은 늘 한결같았다.

“나한테 올 시간이 없었어? 그렇게 바빠? 사람 죽이는 남자가 할 일이 그렇게 많냐는 말이야.” 

리는 그의 멱살을 쥐었다. 총을 던져버리고 양쪽 뺨을 내려쳤다.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리의 손바닥에 카일은 가볍게 조소했다. 

“아니면 저곳은 어때.” 

죽고 싶은 사람처럼, 찰나가 마지막인 것처럼 카일은 경건하게 장소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내 카일은 벽난로에 턱짓을 했다.

“추위를 피해 도망친 고양이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 부하들한테 무슨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내가. 네 장단에 맞춰줄 것 같아?” 

리는 ‘비서’가 아닌 ‘부하’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교양과 예술에 젖어 있는 카일이 사무치도록 경멸하는 호칭이었다. 마피아를 마피아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 리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고, 카일은 평소와 달리 다정한 눈빛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날 사랑하잖아.” 

회색빛의 눈동자가 보랏빛에 스며들었다. 

“죽을 만큼 사랑하잖아.”

리는 카일의 목을 졸랐다. 아주 서서히 그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보랏빛에 갇히기를 바라면서.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하잖아.”

리는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죽을 만큼 사랑해. 죽을 때까지 사랑해. 네가 죽으면 따라 죽겠어. 카일이 비아냥거리던 연극 속 대사였지만. 적어도 리에게는 현실이었다. 

결국은 ‘사랑해’, ‘날 좀 봐줘’라고 들렸을 것이다. 리는 자신의 유치한 어리광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카일은 제 마음을 눈치 챘으면서 방치한 것이었다. 리는 수치심에 숨조차 쉬어지질 않았다. 

“널 쏘면 나한테 남는 게 뭐지?”

“음. 명예. 권력. 재력. 내가 떠나고 남긴 것들?” 

카일은 허리 위에 있는 리를 단숨에 뒤집었다.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재수 없어.” 

리는 그의 얼굴을 밀쳐내었다.

“여전히 넌 아름다워.” 

“장난치지 마.”

리는 씩씩거리며 서랍장을 닫았다. 굳게 닫히면 좋으련만 미련 가득하게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장난치지 마.”

카일은 리의 목소리를 따라 했다. 리의 목소리는 열일곱 때와 같은 변성기를 겪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얇고 가냘파서 곧 끊어질 것 같은 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따라한 카일은 이내 리의 숨소리처럼 숨을 내뱉었다. 

“장난치지 마.”

리는 카일의 귀를 깨물었다.

“입을 깨물어야지.”

카일의 능글맞은 장난에 리는 어느새 화가 스르륵 풀려버렸다. 비참했지만 달콤함이 우선이었다. 카일에게 모든 것을 걸었으니까. 오늘밤은 카일을 보낼 수 없었다.

리는 카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카일은 더 이상 짓궂은 장난을 하지 않았다. 카일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카일은 흥분하고 있었다. 리는 카일의 귓불을 살짝 머금었다. 둘 사이에 올 수 없는 평온함이 찾아왔다. 리는 귓속말을 멈추었고 카일은 리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속삭여줘. 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흘려줘.”

카일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다음날 카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눈을 떠야 했다. 요염한 인어공주에게 된통 당한 기분이었다. 귓불부터 뒷목까지 새빨개진 것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리의 음담패설은 그 어떤 하모니보다 출중했다. 리가 흘렸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역시나 맨 정신으로 느끼기엔 리는 위험했다. 외설적이었다. 

‘얼굴을 볼 면목이 없군.’ 지난밤 리의 목소리에 발정을 표했던 것이 떠올랐다. 리를 볼 낯이 없었다. 

“내 목소리가 좋아?”

“……”

카일은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받아 들었다.

낭만은 단기적이었다. 주인공을 등진 초라한 조연처럼. 리를 발정하고 나면 마음이 허망해졌다. 카일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리는 풀이 죽은 얼굴로 침대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카일은 또다시 2주가 흐르도록 성당에 가지 않았다. 

* * *

아델은 여전히 카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신분에 들어왔을 땐 더욱 미지였다. 

한때 마피아는 총을 쏘고 마약에 취한 미친 종족들이라고 폄하됐었다. 그러나 카일은 달랐다. 그의 스케줄은 일정했으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오버되면 그대로 담배를 물고 신문을 열었다. 낮에는 악보를, 밤에는 대본을 썼다. 가끔씩은 뮤지컬도 즐겼다.

아델에겐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죽고 하나뿐인 혈육이었지만 그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다정한 말투와 상반되는 강압적인 명령들. 이곳에서의 특혜라 하면 조금은 수월한 일을 맡긴다는 것 외엔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아델은 다시 그 성당에 가고 싶었다. 그곳은 성당 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약식과 이미 사라진 터전일 뿐이지만 아델에겐 성지였고 천국이었다. 신성했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동이 느껴졌다. 신앙심.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선망이었다. 그리고 리에 대한 어긋난 욕망이었다. 

아델은 킴을 찾아갔다. 리를 보기 위해선 킴의 허락을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킴은 사악한 얼굴로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킴은 이곳에서 주로 캐스팅을 맡았다. 인종을 구별해 무대에 오를 소년들을 선별했다. 

[캐스팅 매니저라고 불러주세요.]

킴은 활짝 웃는 얼굴로 윤리적 잣대를 피했지만 그 또한 착취의 일종이었다. 

하루에 열 시간 내리 소년들은 발레와 무용을 배웠으며 발톱이 전부 빠진 상태로 뒤뚱뒤뚱 걸었다. ‘아름다워요. 우리는 만족해요.’ 마치 전족과 같은 두려움이었다. 이곳에서 ‘미’는 억압과 착취가 빚어낸 폭력의 결과물이었다.

킴은 소년의 다리를 꺾다 말고 아델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인지, 골똘히 아델을 바라보았다.

“성당을 가죠.”

아델은 흔한 인사도 없이 대뜸 성당을 입에 담았다. 킴은 알만하다는 듯 적당히 둘러대기 시작했다. 

“음. 아델 그곳에 가고 싶어요?” 

킴은 눈썹을 찡그렸다. 아델이 가진 동양인에 대한 편견답게 친절한 남자였다. 물론 아델의 신분에 따른 양면성이었지만. 킴은 미묘한 얼굴로 아델을 훑어보았다. 아델은 카일과 닮아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감탄할 만큼. 카일이 이곳의 오너가 될 무렵 흘렀던 남성의 냄새가 아델에게 흐르고 있었다. 

“리가 궁금해요?” 

아델은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킴은 카일도 그랬으니 아델 또한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어느 누구도 그 성당에 발을 붙이면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라푼젤이야.” 

뒷말은 그러했다. 10년을 갇혀 있는 리는 머리가 길지 않아 도망치지 못하는 비운의 공주라고 했다. 

카일만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전부인 리는 묘한 매력이 흘렀다. 리는 유일하게 카일이 죽이지 않는 남자였다. 

리는 스물여덟 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즉흥적이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변덕스러웠고 행동하는 본새가 거침없었다. 카일을 향해 총을 들이미는가 하면 그의 비서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래봤자 힘없이 악만 남은 그를 ‘사모님’으로 대우하는 것은 카일이 그를 봐주고 있다는 오랜 증거였다.  

그런 리의 오묘한 매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운 스물여덟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을 테니까. 때때로 나오는 차분함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물건을 던지고 깨부술 때가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얌전하고 상냥하기까지 했으니까. 술에 취하거나 약에 취하지 않으면 누구보다 예의 있는 사람이었다. 

리에게 홀린 남자들은 모두 카일의 손에 죽음을 당했지만 그 이유 또한 ‘리’라는 설명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리얼을 원해. 그러니 무대에 올리는 게 좋겠군. 마침 사형수 역할이 필요해서 말이야.]

카일은 킴을 향해 웃어 보였다. 1302번 3940번 사형수는 죽음에 처했다.

킴은 아델의 등을 어루만졌다. 이제 보니 어른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나, 이곳에서 일하기엔 때 묻지 않은 해맑음이 가끔은 독이 될 수도 있었다. 

“내일 갑시다. 기다리던 사모님을 만나러 가시죠.” 

킴은 아델의 등을 쓸어보았다. 위로인가. 아델은 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델은 가끔 킴의 말투가 지나치게 사회자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 말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닮은 아이군.’ 했던 카일의 말이 떠올라 참았다. 품위를 지키라는 카일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델은 애써 행복한 얼굴을 숨기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함부로 기뻐할 수 없었다. 카일의 말은 설치지 말고 궁금해하지 말고 품위를 지키라는 소리 없는 경고 같았다. 아델이 느끼기에 카일은 조용한 독사 같았다. 

그날 카일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델은 카일의 저택으로 들어왔고 환영인사 없이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고 있었다. 

리의 성은 꼭대기만큼이나 아찔해 보였지만 카일의 집은 간소했다. 물론 미국의 중심가에선 사치스러웠지만 리의 공간만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카일은 그날 새벽 다섯 시에 들어왔다. 타이와 셔츠를 세탁기에 넣고 굳건하게 서있었다. 

‘세제가 뭉치는 것을 보는 건가.’

아델은 와인 한 잔을 입속으로 넘겼다. 액체가 흐르는 작은 소리에도 카일은 예민하게 주머니 속 총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아델의 인기척임을 알고 실소했다. 

“아직까지 자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카일은 지친 듯 머리를 넘겼다. 아델은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반가웠다. 그 감정은 로봇의 부품이 빠졌을 때 느껴지는 환희 같은 것이었다. 카일이 로봇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했을 때와 같은 쾌감이었다. 

“습관이 된 일입니다.”

아델은 카일의 부하들처럼 깍듯한 표현을 사용했다. 아주 정중하고 단정한 끝맺음이었다. 카일은 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좋지 않은 습관이야. 앞으로 밤에 글을 쓰는 행동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카일은 아델의 어깨를 두들겼다. 카일과 눈높이가 맞는 남자는 아델이 오랜만이었다. 아델은 인상을 찌푸렸다. 리에게서 나던 짙은 풀냄새가 카일의 코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 독한 냄새였다. 질투를 해야 할까, 아버지의 사생활에 무례함을 떨어야 할까. 아델은 카일에게 갖는 감정을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저 내일 당장 리를 만나러 간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내일은 카일보다 더 먼저, 리의 눈을 보고 오겠노라고 아델은 다짐했다. 

* * *

솔방울을 몸에 박은 듯 씁쓰름한 냄새가 리에게 풍겨왔다. 식물 같은 남자. 펄럭거리는 남자. 비를 맞지 못해 시들어가는 남자. 리는 하필 사연 있는 향기까지 처량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리는 비적비적 아델에게 걸어왔다. 킴은 주차할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고 한참을 정원을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낮은 욕설을 내뱉던 킴은, 

“먼저 올라가세요. 리 개자식.” 

이라며 정원에 풀려있는 개들을 보며 침을 뱉었다.

리는 정원 한가득 꽃을 심어놓고 데려온 유기견을 풀어 놓았다. 마치 아름다운 지뢰처럼. 개들의 똥이 킴의 차에 튀었고 킴은 새빨개진 얼굴로 클랙슨을 울렸다. 

매혹적이게 아름다운 꽃들을 밟아가며 차를 대야 하는 것이 리가 설계한 오늘의 심술이었다. 소음 가득한 클랙슨 소리에도 리는 단정한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자주 보는 것 같아요.” 

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여전히 풀냄새가 가득했다. 카일에게 번진 냄새처럼. 그의 손에 박혀있는 가시들과 물집들, 어깨 위에 떨어진 작은 꽃잎들이 리의 취미를 추측케 했다. 

“꽃을 다듬었어요.”

리는 아델에게 비밀스러운 공간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계절에 따라 리의 냄새는 바뀌어갔다. 비닐하우스는 리의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물론 카일이 지어준 리의 놀이터였지만. 하루 종일 꽃을 돌보고 꺾어버리고 짓밟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비 냄새가 나네요.”

리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약기운이 가시고 냉정한 현실로 돌아올 차례였다. 리는 지친 기색으로 휘청거렸다. 

“앞으로는 제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아델은 제가 뱉어놓고도 낯선 문장에 식은땀이 흘렀다. 카일의 앞에선 누구보다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리의 앞에만 서면 제 나이에서 다섯 살이나 어려지는 것 같았다. 어색하다. 어색해. 아델은 머리를 흔들었다. 풀냄새에 현혹되는 자신을 다그쳐야 했다.

“그래요.” 

아델은 리의 곁을 맴돌았다. 입술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리는 차분하게 부산스러운 아델을 바라보았다. 어른의 인내심을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어제…”

아델은 리에게 다가섰다. 리의 흰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노을이… 핑크색… 노을이요…”

주먹을 쥔 손엔 땀이 흘러나왔다. 리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의 얼굴에 피가 몰려 새빨개졌다. 

“핑크색… 노을이 비가 내리니까… 아니, 비가 내리면서 핑크색…”

아델은 바보 같은 제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왜 리의 앞에만 서면 로봇처럼 삐걱거리는지. 스스로가 싫어졌다. 창피했다. 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다시 아델의 마음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응. 천천히 말해도 돼요.”

리의 미세한 끄덕거림에 아델의 세상이 흔들렸다. 리의 웃음은, 가녀린 목소리는. 노을 속에 갇힌 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청아하고 깨끗한 음색. 

“핑크색 노을이 졌는데 비가 내려서 예뻤다고요?”

리는 기특하다는 듯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해주고 싶었어요. 당신한테.”

리의 눈동자가 차츰 커져갔다. 아델은 떨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노을이 예쁘다고요. 지금.”

“함께 보고 싶다고.”

아델의 심장에도 진한 노을이 드리운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리는 싱겁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아델은 리의 포슬거리는 웃음소리에, 초승달처럼 꺾이는 예쁜 눈매에 매혹되었다. 겨우 리의 시선에도 심장이 시큰거렸다. 

“다음에는… 같이 노을을 봤으면 해요.”

리는 식은땀을 흘리는 소년을 흘깃 바라보았다. 적당히 끄덕거리곤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장갑과 얼굴에 붙은 흰 가루들, 리는 베이킹을 하던 참이었다. 그때 주차를 마친 킴이 꽃향기를 잔뜩 달고 리에게 걸어왔다. 그 순간 리는 킴의 어깨를 밀치며 멱살을 잡아 올렸다. 

“당신이 나를 속였더라고요. 카일이 출장 중이라면서요. 일본? 일본이라고 했나? 다시 게이샤에 관심이 생겨 친히 관광까지 할 계획이었다면서요?” 

리는 킴을 쏘아봤다. 그를 보는 눈빛에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아 절로 나른해졌다. 아델은 리의 신경의 범주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틀 전 카일의 행방을 묻는 리에게 킴은 되는대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리를 잠재우기 위한 거짓 보고였지만 카일과 하룻밤을 보낸 리를 기만한 행동은 분명했다. 일본에서 미국까지 20분 만에 도착하는 것은 100년이 흘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말이 전부 틀리지는 않았을걸요?” 

킴은 리의 송곳 같은 추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점점 일그러지는 리의 얼굴을 보며 아델은 심장이 이상해졌다. 킴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리를 이죽거리는 느낌이 선명해졌다. 마치 ‘카일을 기다리지 마. 멍청한 새끼야.’라고 비꼬는 듯 리를 굴욕 속으로 몰아넣었다. 

“전부 틀리지는 않았다고?” 

리는 커다란 장갑을 벗어던지고 세차게 킴의 뺨을 내려쳤다. 

“벌써 십 년이야. 내가 너 하나 못 죽일 것 같아?” 

아까의 이죽거리던 킴은 어느새 순한 킴이 되어 눈동자를 굴렸다. 킴의 멱살을 쥐던 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입술에선 선홍빛의 피가 흘러나왔고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분노에 차오르고 있었다. 멱살을 쥔 쪽은 리였지만 킴보다 배는 더 불안해 보였다. 

킴은 눈치를 살살 살피다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돌아섰다. 

“삼십 분 후에 아래에서 봐요.”

마치 끝말을 맺지 않아도 알 것처럼 킴은 등을 돌렸고 리는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내렸다. 아델이 처음 보는 리의 앙칼진 모습이었다. 

반죽을 하던 참이었는데 딱딱하게 굳어버린 밀가루에 리는 기운이 빠졌다.

“나 요리 잘하는데.” 

리는 멍하니 탁자에 기대어 힘없이 앞치마를 던졌다. 앞치마에 엉망으로 튀어있는 반죽들이 처량했다. 

“커피라도 드실래요? 너무 아기라서. 커피 마실 줄은 알아요?” 

아델은 리의 목소리가 아이를 달래주는 유모처럼 느껴졌다. 마치 엄마 같기도 했고 가끔씩은 어린아이를 대하는 선교사 같았다. 

‘아기’라는 표현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제 어미조차 쓰지 않는 지나치게 달콤한 애칭에 아델은 얼굴을 붉혔다. 리와 함께 있으면 카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가 되어갔다. 제 나이를 찾는다는 것은 리를 욕정 할 때만 가능했다. 

“아기는 아닙니다.” 

아델은 그에게 다가갔다. 훅 얼굴을 들이민 아델 덕분에 커피를 고민하던 리는 화들짝 놀랐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델은 소름 끼치게 카일을 닮은 얼굴이었다. 리는 자연스럽게 아델에게 입을 맞출 뻔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아기라고 하지 말라고 했으니. 리는 그의 단호한 말투에 웃음을 참아야 했다. 카일과 몸집이 비슷했지만 한마디 건넬 때마다 얼굴이 벌게졌다.

“아델.” 

아델은 리의 손에 들려 있는 잔을 넘겨받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다란 잔을 잡고 있는 리가 위태로워 보였다.

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 실언을 한 것 같았다. 맑은 얼굴이라 마냥 아이라고 생각했다. 카일의 부하들 중 이렇게까지 젊은 청년은 오랜만이었으니까. 아델을 보면서 카일을 떠올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여자 이름 같아.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아델은 커피를 내렸다.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리의 목소리에 덩달아 손이 떨렸다. 등지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관능적인 목소리였다. 어린 자신이 품을 마음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촉촉한 음색이었다.  

“누나가 죽고 그 이름을 사용할 뿐입니다.” 

리는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려고 말을 붙인 게 아닌데 아델의 담담함은 리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니까.” 

아주 오래전 일이니까. 리도 아델처럼 그렇게 말할 날을 기다렸다. 리는 자신의 입술 선을 슬쩍 아델처럼 따라해 보았다. 언젠가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카일은 오래전의 일이니까.’라고 말할 날을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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